〈 35화 〉되찾는 노력, 수련2
클레어가 처음 시범을 보였을때, 버나드는 그녀의 동작을 애를 써서 따라하면서 문득 어떤 가능성을 발견했다.
왕실 마법사들이 기억을 봉인 했지만 몸이 알고 있어서 일까, 나무막대기를 휘두르며 몸을 움직이자 머릿속에서 오래전 기억이 슬그머니 피어올랐다.
버나드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어느 한때의 옛 기억을 떠올리면 우올려베기를 습득할때처럼 무언가 얻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으로 클레어의 동작을 그대로 흉내내면서 기억날듯 말듯한 감각의 꼬리를 겨우 붙잡고 있었고, 이윽고 몸을 휘감는 그 아련한 감각을 안간 힘을 다해 끝까지 붙잡고 있자, 마침내 그의 노력이 무의식을 떠돌던 어떤 조각난 기억을 불러왔다.
레아는 사실 인간이 아니었다. 귀가 뾰족한 엘프족이었다.
산속 동굴에서 혼자 살고 있던 그녀를 처음 발견했을때, 그녀는 엘프어조차 서툴렀으며 인간어는 아예 몰랐다. 그러다 보니 엘프 집단에서 사회생활을 경험하며 자란게 아니라 마치 야생에서 짐승들이 키운 아기 같았다.
그렇게 순진무구하고 짐승의 새끼 같은 레아를 알게된지 얼마되지 않을때였다.
많은 고민 끝에 레아를 전사로 키우기로 한 버나드는 본격적으로 그녀에게 칼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자, 날 따라해봐라. 아주 간단한 동작부터 시작하겠다.”
“동자부더 시자하게따.”
“내 말을 따라할 필요는 없다.”
“냬 먈을 다라할 삘요능 없따.”
레아의 지능이 모자랐던 것도 아니고 신체 역시 성인 여성이었으나 발음이 서툴러 좀 모자라게 보였을뿐이다. 게다가 인간의 언어를 열심히 공부하겠답시고 버나드가 하는 말을 하지말래도 그대로 따라하는 버릇이 있었다.
“이렇게 움직여봐.”
“이려케 움지겨바.”
레아는 버나드가 보여준 동작을 그대로 따라하면서 말도 따라했다.
“그 다음 이렇게.”
“그 댜움 이려케.”
“세 동작을 이어서 한번에 보여주겠다. 잘 봐. 하나, 둘, 셋. 쉽지?”
“셰 둉쟉을 리어서 한변에 보여주게따. 쟐 바. 하냐, 듈, 솃. 씹찌?”
그때 레아를 가르치며 선보였던 동작들이 현재 버나드의 머릿속에 빠른 속도로 스며들고 있었다. 기억속의 본인이 가르치고 현재의 본인이 배운다. 버나드는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아가며 클레어의 동작들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동작의 의미를 순식간에 이해하며 완벽하게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고리타분한 설명따위 필요없었다. 이미 아니까. 한 동작을 습득하면 그에 관한 이론도 동시에 되찾았다.
“이야, 대단한데…”
갑자기 버나드와 클레어 주위로 기사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두 사람이 나란히 합을 맞춰 검술 훈련을 하자 그 모습이 신기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버나드의 기본기가 무척 뛰어나게 보여서 종일 행군으로 지쳐있던 사람들의 시선을 저절로 잡아끌었다. 검을 알고 검으로 먹고 사는 사람이라면 지금 버나드의 동작을 보고 가볍게 지나칠 일이 아니었다. 비록 기본기에 지나지 않았지만, 물흐르듯 유유히 흐르는 그의 동작에 분명 배울 점이 있었다.
“오호, 저게 저렇게도 할 수 있는거구나.”
실력은 좋지만 기본기가 탄탄하지 못한 기사들이 수두룩 하다. 오래 칼을 쓰다보면 자신만의 비법이 몸에 익어 정석으로 배운 기본기를 잊게되는 것이다. 화려한 기술 및 빠른 속도. 자신의 검술에 새로운 기술을 추가할 생각에 앞서 두 가지를 추구하다보면 어느새 기본기는 사라지고 새로운 형태의 움직임이 만들어진다. 그렇기에 오래 검을 써온 웬만한 기사들은 기본 자세가 자신의 입맛대로 변해버려 정석을 잊고 살아간다.
그런 그들에게 버나드의 동작은 아주 교훈적이고 유용한 구경꺼리였다.
“저놈 봐라. 천재검사 소리 듣는 클레어보다 잘하는데?”
“저 정도면 선생해도 되겠어.”
샤를의 막사 주변에 모인 기사들은 감탄의 눈빛을 발하며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했다.
“밖에 무슨 일이지?”
막사 밖이 소란스럽자 샤를은 식사를 하다말고 밖으로 나와서 주변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몰려든 사람들과 버나드와 클레어의 모습을 보고는 바로 인상을 찡그렸다.
“클레어는 왜 저 녀석과 있는거야?”
당장 이쪽으로 오라며 소리를 지르려다 근처에 미셸이 있는 것을 보고 꾹 참았다. 분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두 사람의 모습을 어머니가 관심을 갖고 지켜보는 중이었으니까.
그도 그럴것이 미셸은 만면에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놀라움, 기쁨, 만족감이 서려있었다.
“왕도에 온게 헛수고는 아니었던 모양이군요.”
“뛰어난 인재를 발견해서 기분 좋으시겠습니다. 버나드가 재능이 있단걸 어찌 아셨습니까?”
니콜라스의 물음에 미셸이 자랑스럽게 대답했다.
“우리와 출신 성분이 다르거든요.”
“어디 출신인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비밀이에요. 버나드와 나만 알고 있어야하는 비밀.”
“그러십니까.”
니콜라스가 껄껄 웃었다.
“아무튼 버나드에게 스승이 필요한가 보군요. 어떤 연유인지는 몰라도 칼을 못쓴다는건 사실인듯 하고, 가르침을 주어 그의 능력을 꽃 피워줄 수 있는 스승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미셸이 동의한다는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현 시점에서는 클레어로 충분해 보이네요. 클레어에게 앞으로 버나드를 가르치라고 해야겠어요.”
“그럼 클레어 경에게 제가 따로 말해두겠습니다.”
“네, 그렇게 해주세요.”
하지만 두 사람의 생각은 곧이어 발생한 클레어의 돌발 행동으로 인해 틀어져 버렸다.
남들이 볼땐 야밤에 수련을 하는 버나드와 클레어의 모습이 멋지고 훌륭해 보였겠지만, 정작 시범을 보이던 클레어는 속이 타들어갔다.
자신의 동작을 능수능란하게 따라하는 아니, 훨씬 더 뛰어나게 구사하는 버나드를 보며 그녀는 분노와 함께 질투심이 솟구쳐 올랐다.
언제는 검술의 기본기조차 모른다고 하더니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꼬마야 잘한다!”
“클레어보다 더 잘하네!”
주위에 몰려든 사람들은 저마다 한결같이 버나드에게만 박수를 보냈고 그를 가르치고 있는 자신은 찬밥신세였다.
클레어는 후회했다. 지금 여기 왜 있는건지 모르겠다. 버나드가 따라하는 모습을 보면 영락없이 고수인데, 뭘 가르쳐달라는건지?
그가 자신을 골탕먹이기 위해 일부러 접근한게 확실하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하긴 검기를 다룰줄 아는 그가 기본기를 모른다는게 말이 되나? 참 성격 못된 인간이다. 남이 민망해하는 상황을 즐기는 악취미가 있는게 아닐까.
‘날 속였어…’
불편하고 불쾌한 기분을 감당하지 못한 클레어는 결국 가르치는 것을 중단하고 말없이 자리를 이탈했다. 그녀가 아무 말도 없이 다른곳으로 휙 가버리자 버나드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급히 뒤따라갔다.
그러자 클레어가 뒤돌아서며 더 이상 따라오지 말라며 차갑게 쏘아붙였고, 당황한 버나드는 아무 것도 못하고 떠나는 그녀를 그저 멍하니 바라봐야만했다.
“쯔쯔, 아쉽구만.”
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니콜라스는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어린 나이의 클레어 경이 감당하기에는 벅찼던가 봅니다.”
“벅차다니요? 방금전까지 잘했잖아요?”
미셸이 고개를 갸웃하자 니콜라스가 흐뭇하게 웃었다.
“클레어 경은 뛰어난 검사지만, 아직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고 있는 파릇파릇한 청년입니다. 나이가 나이인지라 바다처럼 넓은 너그러운 마음씨 보다는 싸워서 이기고 쟁취하는 승부욕이 앞서겠죠. 자신보다 뛰어난 버나드를 보며 당혹스럽고 초조함이 앞섰을지도 모릅니다. 추월당했다고 생각하니 분한거죠.”
“아하.”
미셸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웃으며 말했다.
“그런거라면 잘됐네요. 아이들은 싸우면서 정든다잖아요? 곧 해결되겠죠.”
밤이 깊어지자 미셸은 숙소로 돌아와 여행으로 인해 땀나고 풀 냄새가 배긴 옷을 벗고 미지근한 물이 담긴 목욕통에 몸을 담갔다. 그녀의 시중을 들던 피에르가 포도주와 가벼운 안주를 가져다 주었다. 뒤이어 피에르는 곧 있을 그녀와의 잠자리를 준비했지만, 오늘밤 미셸은 그를 원치 않았다. 버나드를 보며 밤의 늑대들의 매력에 푹 빠진 그녀의 머릿속엔 그들의 우두머리였던 사내를 그리워 하고 있었다.
어느덧 목욕을 끝마친 그녀가 피에르에게 말했다.
“오늘은 나가 있거라. 혼자 자겠다.”
“예, 대영주님.”
피에르는 고개를 숙인뒤 밖으로 나가면서 희미하게 웃었다.
‘오늘은 노래를 부를 수 있겠어.’
그가 떠나고 난뒤 미셸은 한손에 술잔을 들고 침대에 걸터앉으며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버나드가 그 정도 실력이면 마스터울프는 당연히 엄청난 실력을 갖고 있었겠지."
버나드를 손에 넣은 것처럼 밤의 늑대들이 해체된 이상 그를 설득해 손에 넣을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이미 죽어버렸다.
“살아있었다면 좋았을텐데.”
그녀는 10년전 왕의 침실에서 프레드릭이 만취했을때를 떠올렸다. 프레드릭왕은 갑자기 재미난 것을 보여주겠다며 난생 처음 듣는 밤의 늑대들이란 자들을 방으로 불렀다.
잠시 후 건장한 체격을 가진 세 명의 사내가 왕의 침실을 찾았다. 세 사람 모두 잘 생기고 멋진 젊은이들이었다. 그때가 밤의 늑대들과 만난 첫 만남이자 마지막 만남이었다.
“자, 이 친구들을 소개시켜주지! 여기는 늑대 1호! 이쪽은 늑대 2호! 마지막으로 늑대 3호!”
프레드릭왕은 잔뜩 취해서 제정신이 아니었다. 혼자 신이나서 입에 담기도 부끄러운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떠들어댔다.
“내 자네들을 위해 왕비를 속옷만 입혀놨다네! 실컷 눈요기 하고들 가라고! 하하하!”
당시 갓 왕비가된 미셸은 취침전 왕의 술시중을 드느라 붉은 망사 슬립 아래 속옷만 입고 있었다. 사실 조금전 방에 사람들이 온다길래 미셸은 급히 드레스를 입으려고 했으나 프레드릭왕이 못하게 막았다.
프레드릭왕은 취하지만 않으면 더할 나위 없이 위엄있고 멋진 왕이었다. 그러나 술만 취하면 딴사람이 된듯 폭력적이고 문란하며 경박한 끼가 발동했다.
“평소에 만나기 힘든 사람들끼리 모였으니 서로 영광인줄 알아! 이 녀석들은 왕국을 위해 비밀리에 움직이는 최고의 전사 밤의 늑대들! 그리고 여기 계신 창녀 같은 아가씨는 우리 왕국의 왕비다! 서로 인사들 해!”
왕에게 불려온 밤의 늑대들 세 사람은 각각 버나드, 줄리안, 그리고 로토 라는 자였다.
“모두 반갑습니다…”
세 사람에 대한 미셸의 첫인상은, 버나드는 듬직하고 믿음직스러운 지휘관 답다랄까. 비범한 분위기를 풍기며 지금의 왕보다 오히려 왕 다운, 그녀로 하여금 우러러 보게 만드는 아우라가 있었다.
더불어 부드러운 눈매가 한가득 자애로움을 품고 있다. 인간적이고 따뜻한 사람이 아닐까 하며 왠지 모르게 친근감이 들었다.
버나드는 왕의 침실에 와서 단 한번도 미셸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그래서 미셸은 그가 고마웠다. 복장이 천박한 왕비의 체면을 지켜주기 위해 시선을 딴곳에 두려 애 쓰는 것이라며 그를 보며 참 예의바르고 정직한 사람이란 느낌을 받았다.
반면에 줄리안이라는 자는 프레드릭왕과 술잔을 나누는 와중에도 자신을 흘깃흘깃 쳐다보고 있었다. 그것은 로토라는 자도 마찬가지였다. 그 때문인지 두 사람에 대한 인상은 버나드에 비해 약했다. 처음봤을때보다 점수가 깎였달까. 그렇잖아도 이 자리에 있고 싶지 않은 미셸의 마음을 더욱 슬프게 만들었다.
좌우지간 세 사람이 나타나면서 술자리는 전보다 흥겨워졌고, 시간이 흐를수록 미셸도 긴장이 풀리며 내심 즐거워졌다. 줄리안이라는 자는 재치있고 입담꾼이었다. 모두를 배꼽 잡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그리고 로토는 상의를 벗고 자신의 근육을 과시하며, 남자 스트리퍼 같은 기상천외한 저질춤을 춰댔다. 그가 춤을 추는 내내 미셸은 눈살을 찌푸렸지만 귀부인들이 환호성을 지를만한 춤인 것만은 분명했다.
세 사람 중 유일하게 버나드만 과묵하게 있으면서 별로 말은 안했지만 미셸은 그가 가만히 있어도 마냥 좋았다. 그냥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남자였다. 그리고 분위기가 무르익자 갑자기 위기가 닥쳐왔다.
술을 너무 많이 마셨는지 갑자기 소변이 마려웠다.
이미 방안에 요강이 마련되어 있었고, 아까부터 남자들은 거침없이 바지를 끌어내리고 거기에 오줌을 싸대고 있었으나 미셸은 홀로 여자인 까닭에 차마 그러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프레드릭왕에게 귀띔으로 화장실이 있는 탑에 다녀온다고 속삭였더니 그가 돌연 미친 소리를 해댔다.
“여보게 버! 아니지, 아니지, 크흠! 여보게 마스터울프! 우리 왕비님께서 지금 급하게 소피가 마려우시다니 자네가 같이 갔다와!”
“네? 무슨 소리예요!? 호위기사인 사만다를 부르면 돼요!”
얼굴이 시뻘건 프레드릭왕이 손을 휘휘 저었다.
“부끄러워 마시오! 이참에 우리 왕국 최고의 영웅인 마스터울프의 호위를 받아가면서 오줌을 싸보는 영광을 누리는거요! 절호의 기회라고! 으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