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34화 〉되찾는 노력, 수련1 (34/200)



〈 34화 〉되찾는 노력, 수련1

잽싸게 떠나는 클레어의 뒷모습을 보며 데보라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저 사람은 대체 뭐였던걸까?”
“글쎄, 술이라도 한잔 했나보지.”

버나드는 점점 멀어져가는 클레어를 향해 중얼거리면서 뒷머리를 어루만졌다.

“분명히 살기였어……”

두 사람은 금세 잊고 마크가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야! 왔구나! 왔어!”

마크는 플랫폼이 이동할 것을 대비해 미리 짐을  싸놓고 홀로 짐수레를 지키고 있었다.
버나드와 데보라를 보더니 반가워하면서 뛰어왔다.

“왜 이렇게 오래 걸렸냐? 밤에 나혼자 짐 지키느라 죽는줄 알았다. 미셸님이 뭐래? 아무말씀 없으셨어?”

마크는 간밤에 벌어졌던 블라쉬에 관한 일을 몰랐다. 그래서 버나드가 대충 필요한 것만 사실대로 이야기했고, 그러자 마크는 깜짝 놀라며 여동생을 걱정스러운 눈길로 쳐다봤다.

“맞은 곳은 괜찮은거야?”
“미셸님의 사제분들께서 공짜로 치료해주셨어요.”
“다 나았어?”
“네, 지금은 기운이 넘쳐나요. 끄덕없어요.”

데보라가 소매를 걷어부치더니 건재함을 과시하듯 알통을 자랑했다. 그 모습에 마크는 안심하며 버나드를 돌아보았다.

“너네 할머니는 어디갔어?”
“미셸님이 돌봐주실 모양인가봐. 아직 거기에 있어.”
“그래? 그러면 잘됐네. 그건 그렇고 너 이리 와봐. 일로, 일로.”

마크가 갑자기 버나드를 구석으로 데려갔다.
그는 바지 뒷주머니를 얼른 뒤지더니 세 장의 접혀진 종이를 꺼냈다.

“내가  위해서 야심차게 준비한게 있어. 기대해라 인마.”
“뭔데?”

마크는 뒤에 멀뚱히  있는 데보라의 눈치를 한번 살피고는 서둘러 종이를 펼쳐보였다.

“짜잔.”
“……!”

아무 생각없이 손바닥만한 종이를 들여다본 버나드의 눈이 이내 커졌다. 마크가 준비한 것은 다름아닌 남녀가 성교하는 모습이 담긴 춘화도였다. 총  장이었는데 각 장마다 장소와 인물들이 제각기 달랐다. 들판, 집안, 바닷가 그리고 가슴 큰 여자, 작은 여자, 엉덩이에 살집이 두툼해서 무척 커보이는 여자까지 다채로웠다. 다만,  장에 전부 출연하는 남자 주인공은 체구가 작은 것이 어째 버나드 자신을 닮은 것 같았다.

“어때 꼴리지? 좋아?”

버나드는 물끄러미 그림을 감상해보았다. 단단한 성기를 펠라치오 해주는 여자, 정상위를 즐기는 남녀, 커다란 엉덩이를 흔들며 남자를 유혹하는 여자, 마크는 춘화도를 자주 그려봤었는지 여체를 아름답게 잘 표현했다.

“이걸 왜 그렸어?”

뭐…… 춘화도란건 일반인들이 손에 넣기 어려운 그림이기도 하고 우연히 선물로 받은김에 소장하고 싶은 욕구가 있었지만, 갑작스러워서 궁금했다.

“왜 그렸냐니 인마. 너 악마한테 강간 당하지 말라고 선물해주는거야. 이거 보고 미리미리 딸쳐서 빼라는 뜻이지. 근데 니가 뭘 좋아할지 몰라서 이것저것 준비해봤어. 좋아하는 취향 있으면 언제든지 와서 말하라구. 성행위 자세, 가슴 크기, 엉덩이 크기 같은 것들 말이야. 노란 머리, 빨간 머리, 검은 머리 등등. 전부 니 취향대로 그려줄게.  예전에 유곽에 자주 출장나가고 그랬었거든, 그때 본게 많아.”

버나드는 다시금 그림을 바라보다 시선을 들어 마크를 쳐다봤다.

“원하는게 뭐야?”
“하하하  녀석 봐라. 원하는 거냐니! 하하하!”

껄껄 웃던 마크가 갑자기 급 정색하며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저, 저기 있잖아! 미셸님이 널 좋아하잖냐?”
“좋아하진 않지.”
“아냐, 아냐. 내가 보기엔 미셸님께서 관심이 아주 많은 것 같았어. 그, 그러니까  말은……!”

마크는 초조한 사람처럼 침을 꿀꺽 삼키고 말을 이었다.

“나 미셸님 한번만 만나게 해주라.”
“왜?”
“왜라니? 내가 유명해져야 너도 공짜로 밥을 얻어 먹을 수 있을  아니냐? 미셸님한테 그림 실력을 인정받으면 또 알아? 전속 화가가 될지? 그럼 그때부터 우린 떼부자가 되는 거야!”

마크가 하늘을 쳐다보며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돈 걱정 없이 살  있다고!”

그때 슬그머니 데보라가 나타나더니 버나드의 손에 들린 세 장의 춘화도를 보고는 인상을 찡그렸다.
 즉시 버나드의 손에서 그림을 빼앗아 들고는 마크의 뒤로 가서 여우 같이 상냥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서 버나드한테 야한 그림을 그려준 거예요?”
“물론이지! 버나드는 외설적인 그림으로 성욕을 채우고, 나는 미셸님을 만나 지갑을 채우기 위해서!”
“아하~ 자신의  벌이를 위해서 아이한테  좋은걸 가르쳐주시네요, 오라버니.”
“내가  많이 벌면 서로 좋은게 좋은거 아니냐! 원하는게 있음 말…… 뭐, 뭐? 오, 오라버니?”

마크가 흠칫하며 뒤를 돌아보자 웃고 있는 데보라와 눈이 마주쳤다.

“세상 사람들이 알면 오라버니를 정말 쓰레기 같은 인간이라고 칭찬할거예요. 그렇죠?”

그녀는 싱긋 웃어준뒤 곧바로 주먹을 날렸다.
퍽!

“커억……!”

***


다음날 새벽녘, 아킨테군은 왕도를 떠났다.
선두에서 걸어가는 기사의 머리 위로 아킨테 가문의 깃발이 펄럭였고, 미셸과 샤를은 양편에서 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말을 타고 앞으로 나아갔다. 아킨테군의 보호를 받는 플랫폼 이용객들은 그들의 뒤를  열로 오와 열을 맞춰 따라 갔다. 아킨테군이 대략 300명, 상인, 여행객 등 플랫폼 이용객들은 거의 400명에 달했다. 버나드 일행도 그속에 껴있었다.

“흑, 콧등이  주저앉았어……”

며칠전에 빚을 받으러온 기사들한테 얻어맞은 코뼈가 또 부러졌다며 마크가 투덜거렸다. 그런 그가 앞에서 짐수레를 끌고 버나드가 뒤에서 밀었다. 데보라와 멜라니아는 짐칸에 앉아서 주변 풍경을 구경했다. 일찍이 미셸은 직접 멜라니아를 보살피려고 했으나 멜라니아가 한사코 거절하며 버나드와 함께 가겠다고 고집을 피웠다. 그 결과 짐수레에 멜리니아가 타며 다시 일행에 합류하게 되었다.

왕도 주변이라 그런지 썬로드(Sun Road)라 불리는 대로는 평평하게 잘 닦여 있었다. 짐칸에 웅크리고 앉아있는 멜라니아가 투덜대지 않고 꾸벅꾸벅 졸고 있으니 말다했다. 그런 가운데 버나드는  멀리 멀어져가는 아이다썬(왕도)을 말없이 돌아보면서 만감이 교차했다. 그러다 결국 하나의 감정만이 얼굴에 떠올랐는데, 그것은 이제  지펴지기 시작한 타오르는 분노였다.

‘프레드릭. 내가 다시 왕도로 돌아오는 날이 당신이 왕좌에서 물러나는 날이 될거야.’

해가질 무렵 어느 산기슭에 다다랐을때, 기사단장 니콜라스의 명령을 전파받은 기사들이 일제히 소리쳤다.

“오늘밤은 여기서 야영한다! 모두 행군을 멈춰라!”

하룻밤만 길에서 노숙하고 갈 예정이라서 모두 가벼운 짐만 풀었다. 잠자리도 막사나 텐트가 아닌 모포만 덮고 자는 야외 취침이었다. 아킨테군의 막사도 단 세 개 밖에 세워지지 않았다. 하나는 미셸의 막사, 다른 하나는 샤를, 그리고 통제를 위한 지휘 막사 뿐이었다.

“버나드와 못다한 이야기를 해야겠어요. 버나드가 있는 곳을 아십니까?”

미셸은 대충 짐을 풀고 나서 버나드부터 찾았다. 내일 일정을 상의하기 위해 그녀의 막사에 와있던 니콜라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하를 보내 데려오겠습니다.”
“아뇨, 그쪽에 노파가 있어서 내가 가는게 나을거예요. 멜라니아와도 할 이야기가 있거든요.”
“그럼  따라오시죠. 안내해드리겠습니다.”

미셸은 곧장 막사를 나섰다.
같은 시각, 버나드는 짐수레가 있는 곳을 떠나 샤를의 막사 주변을 기웃거리는 중이었다. 그의 손에는 길고 얇은 두 개의 나무막대기가 쥐어져 있었다. 누군가를 찾고 있었지만 보이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샤를의 막사에 들어가보고 싶었으나 그녀가 비명을 지를까봐 내키지 않았다.

“흐음… 그냥 갈까.”

곧 데보라가 저녁을 먹으라고 할테고 일행들을 기다리게 하면 안되겠다는 생각에 그만 마음을 접고 떠나려할때였다.
양손에 쟁반을 든  샤를의 식사를 가져오던 클레어와 딱 마주쳤다.

“버나드…?”
“아, 날 기억하는구나.”

버나드가 환하게 웃어보였다.

“널 찾아왔어. 이름이 클레어지?”
“어… 그런데?”

클레어는 말끝마다 좀 여운이 남는 말투를 사용했다. 말끝을 힘없이 흐렸다. 아픈 사람처럼 조용하고 나긋나긋한 느낌이랄까.

“내게 칼 쓰는 기본기를 알려줬으면 해.”

버나드가 대뜸 그런 말을 하자 클레어는 살짝 미간을 좁히며 고개를 갸웃했다.

“왜 내게…”
“어제 보니까 실력이 대단하더라. 너한테 배워보고 싶은 기분이 들었어.”

클레어의 칼솜씨는 정말로 깔끔하고 훌륭했다. 버나드의 생각은 이랬다. 훌륭한 솜씨를 가진 그녀에게 기본기를 배우면 뭔가 떠오르는게 있지 않을까 하고. 과거의 기억이 되돌아오지 않을까하는 기대가 있었다.
칼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이  버나드가 독학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검술 교본을 소지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그와 더불어 주변에 칼을 잘 쓰는 사람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 우연히 클레어를 알게 되고 그녀에게 한가닥 희망을 걸고 찾아온 것이다.
만약 거절한다면 순순히 돌아갈  밖에.
하지만 그녀에게 승낙을 얻기 위한 비장의 무기를 가져왔다.

“돈을 받길 원하면 수업료로 아주 좋은걸 갖고 왔지. 이거 구하기 힘든거야.”

그는 자신있게 말하며 즉시 종이 세 장을 내밀었다.

“시중에 내다 팔면 비싸. 특별한 취향을 가진 귀족들만 즐기는 문화라 희귀한거거든. 이걸로 수업료를 대신 해줘.”
“음… 어… 음…”

클레어는 버나드의 손에 쥐어진 종이를 뚫어지라 쳐다보며 연신 눈을 깜빡거렸다. 당황스럽게도 그것은 춘화도였다.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버나드가 건넨 것을 받았다.
버나드가 기뻐했다.

“승낙한거야?”
“네가 검기를 발산하는 모습을 봤어.”
“언제?”
“저번에 허수아비 훈련장에서. 궁금해. 왜 내게 배우려는지…”

버나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때만 잠깐 그랬을 뿐이야. 검기를 자유자재로 다루지는 못해. 실력은 어제 너도 봤다시피 완전 초보자 수준이고.”
“이해가 어려워…”

검기를 쓰는데 검을 못쓴다니 클레어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안갔다.

“일단… 샤를님께 식사를 전해드리고 올게… 기다려…”

클레어가 버나드의 요청을 받아준 이유는 별것 없었다. 그의 본실력을 알고 싶어서였다. 호기심의 상대가 제 발로 찾아와주니 잘됐다는 생각밖에 안들었다.
그녀는 샤를의 막사에 들어갔다가 5분쯤 지나 밖으로 나왔다.

“가자…”

때가 때고 장소가 장소니만큼 두 사람은 샤를의 막사 근처에 자리를 잡고, 훈련복 없이 현재 입고 있는 복장으로 각자 나무막대기를 들었다.
버나드와 마주 보고 선 클레어는 멍하니 고민을 하는가 싶더니 고개를 들었다.

“어떻게 가르쳐야 해…? 가르쳐 본 적이 없어…”
“음, 그럼. 네가 기초적인 동작을 먼저 시범보여봐. 내가 따라하는식으로 할게.”
“설명 없이…?”
“응, 설명 안해도 돼. 난 동작만 외우면 돼.”
“알았어.”

클레어가 바로 나무막대기를 쥐고 자세를 잡았다.
때마침 그곳을 지나고 있던 미셸과 니콜라스가 두 사람을 발견하고 발걸음을 멈췄다.

“클레어 경과 버나드라는 소년이군요. 어울리지 않는 조합인데 어째서 같이 붙어 있을까요?”
“둘이 뭔가 하려나 보군요. 잠깐 지켜봅시다.”

미셸은  발치에 있는 두 사람을 유심히 바라봤다.

“가장 기본적인 동작이야.”

클레어는 말없이 몸을 움직이며 기초적인 검술을 몇 가지 선보였다. 버나드의 말대로 만약 그가 검술에 문외한이라면 방금 선보인 동작을 몸에 익히는대만 적어도 일주일은 걸릴터였다. 하지만 버나드가 금세 동작을 능숙하게 따라하며 그녀를 약간 당황케했다. 버나드는 처음에 서툴더니  번 세 번 연달아 반복한뒤에는 그녀가 알려준 동작들을 순식간에 외워버렸다.

“어떻게…?”
“나도 잘 모르겠어. 그냥 몸이 움직여. 몸이 기억하나봐.”
“무슨 소리야…”

클레어는 아까부터 계속 버나드가 하는 말을 이해할  없었다.
이어 그녀는 기초지만 좀 난이도가 높은 동작을 몇 개  선보였다. 그러자 버나드는 몇 번 연습해보더니 마치 클레어의 복사판인 것 마냥 그녀의 동작을 하나도 틀리지 않고 그대로 따라했다.

“호오…”

멀리서 지켜보고 있던 니콜라스가 턱을 어루만지며 탄성을 자아냈다.

“저 친구, 이제보니 초짜가 아니었군요. 아무리 기초적인 동작이라지만 고수도 저렇게 깔끔한 자세가 나오기는 쉽지 않을텐데.”
“그래요?”

미셸의 귀가 솔깃했다. 동시에 그녀의 가슴속에서 버나드를 향한  기대감이 피어올랐다. 그리고 그녀의 가슴을 한층 더 두근거리게 만든 것은 그 다음 이어진 니콜라스의 말이었다.

“버나드가 클레어 경의 동작을 따라하는 것 같지만, 놀랍게도 그의 동작이 그녀보다 매우 훌륭합니다. 오히려 먼저 시범을 보이는 클레어 경이 제자고, 후에 따라하는 버나드가 스승 같군요. 어찌 이런 일이. 열심히 가르쳐 주는 클레어 경이 딱해 보일 정도로 민망한 상황이군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