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33화 〉떠오르지 않아, 검술2 (33/200)



〈 33화 〉떠오르지 않아, 검술2

클레어가 가볍게 묵례했다.

“다녀오겠습니다.”
“잠깐만 기다려, 나도 갈거야.”

샤를이 서둘러 잠옷을 벗어던지며 그녀의 속옷 입은 몸매가 드러났다.

“그 못난 녀석이 얼마나 잘하는지 지켜보겠어.”
“그럼 문앞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

걸어서 금세 도착한 곳은 널따란 공터가 있는 훈련장이었다.
그곳에는 이미 연락을 받은 니콜라스가 홀로 나와서 대기하고 있었다. 그의 양손에는  자루의 목검이 쥐어져 있었다.
그가 버나드와 나란히 걷고 있던 미셸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오셨습니까.”
“오래 기다렸나?”
“저도 방금 왔습니다.”

니콜라스가 미소를 짓고 버나드를 돌아봤다.

“미셸님께 얘기들었다. 네 덕분에 배신자를 처단할 수가 있었어. 고맙다.”

버나드는 대답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말수가 적은 아이인가 보군요.”

니콜라스가 목검 하나를 내밀었다.

“클레어가 올때까지 먼저 연습하고 있거라.”
“……”

목검을 받아들고 잠시 살펴보던 버나드는 곧바로 넓은 공간으로 이동해서 휙휙 휘둘러 보았다.
니콜라스가 그 모습을 지켜보며 미셸에게 말했다.

“자세는 나쁘지 않아보이는군요.”
“그런가요?”

미셸이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저 아이가 말하길, 자기는 칼 쓰는 법을 전혀 모른다고 하더군요. 근데 내가 볼땐 거짓말 같은 느낌이 들더라는거죠. 저 아이의 말이 사실인지 진위여부를 가리기 위해 경을 부른것이니, 클레어와 대련하는 모습을 꼼꼼히 관찰해주세요.”
“맡겨주십시오. 산전수전 다 겪으며 평생을 칼밥으로 먹고산 제 눈은 못속일겁니다.”

니콜라스가 여유있게 웃으며 팔짱을 꼈다. 그러면서 버나드의 행동을 더욱 눈여겨 보기 시작했다.
곧이어 밝은 드레스 차림의 샤를과 대련복을 엄격히 차려 입은 클레어가 도착했다.

“어머니!”
“여긴 왠일이냐? 아침부터 바쁜 것 같더니.”
“이곳에 버릇장머리 없는 녀석이 있다길래 구경왔어요.”

샤를은 공터 중앙에서 목검을 휘두르고 있는 버나드를 보더니 즉시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흥! 그냥 마음에 안들어.”
“클레어, 얘기는 들었겠지?”

미셸의 물음에 클레어가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네, 저 소년과 대련을 하라는 이야기를 전해들었습니다.”
“그래, 바로 할 수 있지? 몸 푸는 시간이 필요할까?”
“바로 시작하고 싶습니다.”
“어머니, 클레어를 뭘로 보는거예요? 저런 풋내기를 상대로 몸을 풀다니 지나가는 개가 웃을 거예요.”

미셸이 샤를을 돌아봤다.

“말을 가려서 하렴. 버나드가 들으면 네게 실망할거야.”
“버나드, 버나드. 대체  녀석이 뭐가 좋은 거예요? 실망하든 말든 저는 신경안써요. 지가 나랑 무슨 관계라고.”

그때 버나드는 샤를의 목소리가 들리자 목검을 휘두르는 것을 멈추고 그녀를 쳐다봤다.

“샤를……”

옛시절이 떠오르며 자기도 모르게 흐뭇한 미소가 흘러나왔다.

“많이 컸구나. 이젠 숙녀가  됐어……”

우연히 샤를과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버나드의 웃는 표정을 발견하고는 소스라치게 놀라더니 곧장 손가락질을 하며 소리쳤다.

“어머니! 저 녀석 보세요!  표정을 보시라고요! 날 보며 음흉하게 쳐웃고 있어요! 클레어! 당장 달려가서 저 변태 호색한을 두들겨 패주렴!”
“……!”

버나드는 흠칫하며 곧바로 정색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점잖게 헛기침을 하고 난뒤, 다시 목검을 휘두르며 칼에 대한 기억을 되살리려 최대한 애를 썼다.

‘잘  수 있을까? 지금으로선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아… 가슴베기와 우올려베기 같은 경우는 갑옷을 착용하지 않은 저 클레어란 소녀에게 치명상을 입힐지도 모르고…’

현재 버나드가 익힌 가슴베기와 우올려베기의 경우에는 중간이 없었다. 무조건 검기가 실려 나가는 상태였고, 버나드는 위력을 약하게 조절할만한 능력이 없었다. 대련중에 검기를 발산하면 당연히 상대는 치명상을 입게 될테고 위험했다.
하지만 가슴베기와 우올려베기를 안쓰자니 버나드가 쓸 수 있는 기술이 하나도 없었다. 그는 지금 검술의 기본기조차 모르는 상태였다.  승부, 보나마나  것이 뻔했다.

“자, 클레어. 시작하자꾸나. 중앙으로 가서 버나드와 마주보고 서거라.”
“네.”

클레어는 니콜라스에게 목검을 받아들고 중앙으로 가서 섰다. 그러는 동안 샤를은 계속 미셸에게 방금전 일을 떠들어댔고, 미셸은 딸이 시끄럽게 굴자 약간 짜증이 났는지 미간을 찡그렸다.

“숙소로 돌아가거라.”
“어머니! 저 녀석이 변태 같은 눈빛으로  전신을 훑었다고요! 어머니는 괜찮은 거예요? 전 수치심을 느꼈어요!”
“너보다 어린 아이가 뭘 알고 그랬겠느냐. 네가 생각하는게 아닐테니 조용히 하렴. 다들 너 때문에 아무것도 못하고 있잖니.”

니콜라스가 껄껄 웃으며 끼어들었다.

“걱정마십시오 아가씨. 클레어가 대신 때려주겠답니다. 함 지켜보시지요.”
“좋아요! 클레어한테 부탁해야겠어요! 클레어! 네 앞에 있는 그 녀석이 날 음흉한 눈길로 쳐다봤어! 내가 큰 수치심을 느꼈으니 그 녀석의  다리를 부러뜨려 버려! 날 이상하게 쳐다보면 두   배로 당한다는 것을 똑똑히 알려주도록 해!”

옆에서 듣고 있던 미셸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흔들었다.

“멜라니아, 당신 말이 맞아요. 내가 딸을 너무 오냐오냐 키웠나봐요.”

잠시 후, 니콜라스가 대련을 시작하라고 외치자 버나드와 클레어는 목검을 쥐고 서로 대치했다.
양쪽 다 조금전과는 사뭇 다른 기류가 흐르기 시작했다. 버나드와 클레어는 서로 다른 이유로 진지했다. 우선 버나드는 어차피 질게 뻔하니 자신이 얼마나 못하는지 기량을 가늠해보는 기회로 삼았고, 클레어는 며칠전 버나드가 훈련용 허수아비를 두동강 냈던 기억을 떠올리며 보통 상대가 아님을 깨닫고, 자신의 모든 힘을 동원해 최선을 다해 상대해주기로 마음 먹고 있었다.
여기에 더해서 클레어의 투지를 더욱 불타오르게 만들었던 것은 엊그제 미셸의 말이었다.

‘보나마나 클레어보다 월등할게다. 평범하게 자란 아이가 아니거든.’

자신의 실력을 무시하는 미셸의 말이 계속 머릿속에 맴돌았기 때문에 클레어는 이 기회에 확실히 보여자주고 다짐했다.

‘지지 않아… 버나드… 꼭 이긴다…’

속으로 각오를 피력하자마자 클레어가 쏜살같이 달려들었다. 그녀가 순식간에 코앞에 나타나서 목검을 휘두르자 버나드는 크게 당황하면서도 얼결에 겨우 막아냈다.
탁!

‘빠르다!’

버나드는 속으로 혀를 찼다.

‘샤를의 호위기사라더니 역시 잘하네. 이 아이, 남자보다 날렵하고 가벼운 여자의 신체 특징을 잘 이용하고 있어. 몸이 번개처럼 재빨라.’

멀리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니콜라스가 매와 같은 눈빛을 하고 턱을 어루만졌다.

“흠, 초반부터 제법 세게 나가는군요. 상대를 파악할 필요조차 없다 이건가.”
“그래요?”

미셸이 환하게 웃었다.

“그럼 그렇지. 제까짓게 실력을 숨겨봤자 금방 들통난다고.”

그러는 순간에도 버나드와 클레어는 계속 쉴새없이 목검을 주고 받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니콜라스가 갑자기 감탄한 표정을 지었다.

“호오, 멋지군! 저 기술을 저렇게 쓸줄이야.”
“잘하나보죠?”
“예, 보통 실력이 아니군요. 우아하게 춤을 추는것 같습니다. 오옷! 방금 보셨습니까?”
“뭔데요?   했나요?”
“방금 그건 정말 기막힌 기술이었습니다. 앗! 저것 보십시오! 연타 날리는 것을 보세요!”
“그렇게 잘해요?”
“완전 재주꾼입니다, 재주꾼. 오오! 저런 기술까지 갖고 있었다니! 말그대로 인재로다 인재!”

미셸은 아주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밤의 늑대들 출신이 어디가겠어. 비범한건 못속여.’

그녀가 니콜라스를 돌아보았다.

“내가 예상한대로 버나드가 잘하죠? 실력을 숨긴게 맞죠?”
“예?”

니콜라스가 뭔소리냐는듯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녀를 마주봤다.

“버, 버나드요?”
“버나드가 이기고 있는것 아니에요? 우아하게 춤추고 잘한다면서요.”
“네? 소신은 지금까지 클레어 경을 말한 것입니다만……”
“예에!? 그게 무슨 소리예요? 저 아이는 밤의 늑…… 어?”

미셸은 급하게 훈련장 안을 쳐다봤다가 그곳에서 벌어진 기막힌 광경을 보고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마, 맙소사! 저럴리가!”

클레어한테 된통 당한 버나드가…… 바닥에 널브러져서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그의 목검은  멀리 날아가서 부러져 있었다.

“으으, 허리야……”

버나드가 아픔을 호소하며 일어서질 못하자 곧바로 니콜라스가 양팔을 좌우로 펼치며 크게 외쳤다.

“두 사람 대련 끝! 거기까지!”

그 직후 샤를이 팔짱을   거만한 자세로 소리 내어 크게 웃었다.

“저  좀 봐! 아, 속이 다 후련하네! 10년 묵은 체증이 싹 내려가는 기분이야! 하하하! 클레어 잘했어! 방으로 돌아가거든 내가 큰 상을 내려줄게!”

미셸은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는 눈초리였다. 니콜라스를 붙잡고 끈질기게 캐물었다.

“움직임에 거짓이 없었나요?”
“없었습니다. 제가 보장합니다.”
“정말 제대로 본거예요?”
“대충 봐도 딱 알겠더군요.”
“그럴리가 없는데……”
“더 시험해 볼 것도 없습니다.”

니콜라스는 대책이 안선다는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 소년은 태어나서 단 한번도 칼을 쥐어본 적이 없는게 확실합니다. 안타깝지만 정말 형편없는 칼솜씨였습니다.”

한편, 목검을 아래로 향한 채 우두커니 서 있던 클레어는 바닥에 쓰러져있는 버나드를 내려다보며 불쾌한 감정을 숨길 수가 없었다.

‘이 아이… 본실력을 발휘하지 않았어…’

허수아비 훈련장에서  실력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아무나 평범한 목검에 검기를 싣지 못한다. 그러나 눈앞에 누워있는 이 소년은 가볍게 해냈다.
클레어는 분한듯 입술을 깨물었다.

‘날 속이려는 거야…? 나 따위는 같잖아서…?’

좌우지간 버나드의 칼솜씨를 재차 확인하고 싶었으나 미셸도 바빴다. 그녀는 오늘중으로 기필코 왕도를 떠나기 위해 가신들과 상의를 해야만했다. 따라서 쓰러진 버나드를 일으켜 그와 몇마디 대화를 나누고 부상 정도를 확인한 후 별탈이 없자 곧바로 돌아섰다. 버나드도 데보라의 소식을 전하기 위해 마크가 있는 텐트에 들렸다 온다며 발길을 돌렸다.

클레어 또한 앞장 서는 샤를을 뒤따라 걸음을 옮겼다. 그녀는 묵묵히 걸어가면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기대와 달리 맥빠진 싸움이었다. 그리고 뭔가를 배우거나 의미 있는 경험을 하지 못하고 버나드에게 놀아난 것 같아 기분이 나빴다.

그리하여 고민을 거듭한 결과, 그녀는 샤를에게 잠시 볼일을 보러 시장에 다녀온다는 말을 남긴 후 곧장 버나드의 뒤를 밟았다. 그 행동은 분명 클레어 답지 않은 것이었지만, 버나드 때문에 자존심이 살짝 상한 것도 있고 그의 본실력을 꼭 보고 싶었다.

어느덧 버나드가 홀로 시장골목에 진입하자, 클레어는 천막 지붕 위에서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다가 살며시 칼을 빼들었다. 이번엔 목검이 아닌 날이 시퍼렇게 살아있는 진짜 칼이었다. 진심을 담아 버나드를 습격할 작정이었다.

‘피하거나 막지 못하면… 진짜로 죽어…’

그녀는 버나드가 절실히 느끼도록 일부러 강한 살기를 풍겼다. 그리고 힘껏 지붕을 박차며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머리 위로 칼을 움켜쥔 채 버나드를 일도양단할 생각으로 그의 뒤통수를 향해 세차게 칼을 내려치려는 순간, 갑자기 어떤 여자가 커다란 젖가슴을 출렁거리면서 뛰어오는 광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버나드! 혼자만 가고 미워!”
“어? 데보라, 누워있지 않고 여긴 왜 왔어?”
“미셸님이 네가 떠났다길래 바로 일어나서 쫓아왔어!”
“마크한테 데보라가  있다고 알려주려고 그랬지. 다시 돌아갈 생각이었어.”
“그래도 누나를 보고 갔어야지! 일로와! 숨 못쉬게 괴롭혀 줄테야!”
“헙!”

데보라가 다짜고짜 버나드를 와락 껴안는 찰나, 빠른 속도로 하강하고 있던 클레어는 급 당황하여 재빨리 몸을 틀었다.

“칫!”

그대로 지상으로 추락하며 전날 비가 와서 고여있던 진흙탕에 풍덩 빠져버렸다.
찰싹!
말의 배설물까지 섞인 똥물이 주변에 튀겼다. 버나드와 데보라는 잽싸게 그것을 피하며 깜짝 놀란 얼굴로 웅덩이를 쳐다봤다.

“뭐, 뭐지?”
“뭔가 떨어진 것 같은데.”

물결이 출렁거리는 흙탕물을 유심히 들여다보는 와중에 불현듯 클레어가 관에서 일어난 송장 마냥 흙탕물 속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머 깜짝이야!”

데보라가 반사적으로 뒷걸음질 쳤다가 버나드를 껴안고 있던 팔을 풀고서 조심스레 클레어에게 다가갔다.

“괜찮으세요…?”
“괜찮. 그럼, 이만.”

온몸에 흙탕물을 뒤집어 쓴 클레어는 쥐고 있던 칼을 얌전히 칼집에 꽂아 넣고 도망치듯 자리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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