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화 〉모든 것의 시초, 그날3
그런식으로 프레드릭왕은 양쪽을 대충 타일러서 돌려보냈다.
하지만 단단히 화가난 버나드가 다시 돌아와서 왕과 독대하며 그에게 허물없이 따졌다.
“제 말대로 존의 침실을 철저히 수색하고 왕비의 몸에 남은 체액을 검사했으면 명백히 밝혀졌을 일입니다! 어째서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래! 자네 말대로 했으면 누구 말이 맞고 누가 거짓말을 하는지 명확히 밝혀졌겠지! 그런데 그 뒤는? 그 뒤는 어쩔텐가!”
“……!”
버나드는 그 말의 의미를 잘 알기에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다.
왕도 흥분을 가라앉힌뒤 다시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내 자식들이 적자, 서자할 것 없이 왕좌를 차지하고 싶어 안달이네. 왕비와 존만이 나를 지켜주고 있어.”
한때 강력했던 왕의 힘이 버나드가 이끄는 밤의 늑대들이 있음에도 어쩌다 이리 쇠약해졌을까.
“여동생 이블린과 싸우면서 그 많던 또래 영주들은 죽거나, 죽임을 당했고, 지금 우리 왕국의 절반 이상이 젊은 영주들 뿐이네. 젊은 것들은 꼰대 노인과 어울리려 하지 않아. 젊은 것들은 패기있는 젊은왕을 선호하지. 내 적자, 서자놈들 말일세. 그 불효자 놈년들에게만 진심으로 충성을 맹세하고 있어.”
의자에 앉아있던 왕이 허탈하게 웃으며 탄식을 내뱉었다. 인망과 신망, 인복은 군주가 스스로 노력하는 것과 더불어 천운을 타고 나야지 버나드도 어찌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일례로 최근 프레드릭왕이 사치와 낭비를 일삼으며 국고를 탕진하고 있었는데, 버나드가 자제하고 검소하게 살아야한다며 수십번 충언을 올려도 절대로 듣지 않았다.
“지금 내 상황이 어떤줄 아는가? 이 왕궁이 왕비의 집이지 내 집 같지가 않아. 왕비의 집에 얹혀 살면서 그녀가 바람을 피우는걸 목격해도 찍 소리 하나 못내고 모른척 해야될 판국이지. 쫓겨날까봐.”
모든 것이 프레드릭왕 스스로 자초한 것이었다. 그는 전란의 시대에는 뛰어난 지도자이나 평화속에서는 그저 술과 여자만 찾는 뚱뚱보 왕에 불과했다. 실제로 최근에는 왕실에 불만을 품은 백성들에게 ‘뚱뚱보 늙은왕 프레드릭’으로 불리기까지했다.
버나드는 처음과 달리 한풀 꺾인 모습으로 돌아섰다.
“전하의 뜻이 그러하시다면 알겠습니다. 저는 더 이상 왕비와 존의 일에 관여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전하. 우리가 처음 만났던 시절 무엇이든 두려워하지 않고 과감히 결정하고 뛰어들던 그 시절의 전하가 그립습니다. 저는 아직 전하가 그때의 기백을 지금도 갖고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나이 따윈 아무 상관없습니다.”
그는 뼈있는 한마디를 던지고 자리를 떠났다.
프레드릭왕은 굳은 표정으로 닫힌 문을 바라보다가, 머리를 저으면서 씁쓸한 한숨을 내쉬었다.
“언제적 일이야……”
이어 안소니 후작을 불렀다.
프레드릭왕은 좀전에 버나드가 불리해지자 그를 지켜주었지만 사실은 가슴 한구석에서 의심이 싹트고 있었다. 그는 왕비와 존의 근친상간보다 버나드가 왕비에게 손을 댔다는게 더 충격적이었다. 왕비와 아들은 처죽이고 새로 맞이한뒤 새로 낳으면 끝이지만, 평생을 같이 했던 충신은 어디가서 덥썩 구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런 소중한 존재가 함부로 자신의 여자를 건드렸다는게 믿기지 않았다.
즉 프레드릭왕에게 있어 왕비는 정략결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그냥 물건이었다. 그에게는 세상 모든 여자가 물건이었다. 비상한 재주와 강한 무력을 가진 가신 버나드에 비해 가치가 크게 낮았다.
그런데 그와는 달리 가신이 자신의 물건에 손대는 것만큼은 절대 용납되지 않았다. 군주를 우습게 본다는 것과 다름없으니까.
“버나드가 정말로 왕비의 침실에 들어갔나?”
“예,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제 눈으로 분명히 보았습니다.”
“자네 말고 다른 사람은?”
“시녀들도 있습니다.”
“음……”
프레드릭왕은 그 말을 듣더니 얼굴이 어두워졌다.
안소니 후작이 음흉하게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전하, 신의 노파심일지도 모르겠사오나 버나드 경을 이대로 놔두다간 장차 큰 일이 발생할 것입니다. 그는 세븐로얄을 가진 자신의 힘을 믿고 점점 더 방만하고 오만해질게 뻔합니다. 오늘은 비록 미수에 그쳤지만 다음엔 왕비님께서 어떤 봉변을 당하실지 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 만약 그가 궁안에서 폭주한다면 그를 막을 수 있는 자가 우리 왕궁에 있을까요? 신은 무척 두렵습니다.”
덧붙였다.
“옛부터 말 잘 듣는 개도 종종 때려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매일 칭찬만하면 주인을 만만하게 보고 풀어지기 쉬우니 가끔씩은 바짝 조여주면서 주인에게 경외심을 갖게 해야한다는 뜻이죠.”
프레드릭왕의 낯빛에 불안감이 얼핏 서렸다. 힘없이 중얼거렸다.
“나는 늙었고, 혈기왕성한 젊은 늑대를 통제할 힘이 이제 남아있지 않아.”
“짐승들은 약한 개체를 잡아먹기 마련입니다. 거기에 인간들이 생각하는 정 따위는 없습니다. 순전히 약육강식의 세계만 있죠. 백성들 사이에서도 노인들이 자신이 기르는 개에게 물려 숨지는 사고가 빈번하게 일어나지 않습니까? 개가 은혜를 알면 그러지 못하겠죠. 인간들과 어울리며 사는 개가 그 지경인데 하물며 개보다 지독한 성깔을 가진 늑대는 어떻겠습니까?”
“뭔,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지껄이는군……”
프레드릭왕은 후작의 발언을 가당치도 않다며 한 귀로 흘렸지만, 한동안 혼자서 심각하게 고민해보니 어찌보면 맞는 말도 같았다. 이윽고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만일을 대비해 밤의 늑대들 말고 다른 비밀 조직을 하나 더 만들어야겠어. 그 팀은 자네가 맡아주게. 밤의 늑대들이 제대로 통제가 안된다 싶을때 그들을 사냥하는 처단 부대야.”
안소니 후작이 흐뭇하게 웃었다.
“현명한 판단이십니다.”
좌우지간, 일이 그럭저럭 마무리 되는가 싶었으나 왕비 아말리아와 버나드 사이에 원한이 생긴 것만은 확실했다.
그날 이후 버나드는 왕에게 통보한대로 왕비와 존의 일에 간섭하지 않으려 했으나 날이 갈수록 왕비 아말리아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다. 그녀는 도와줄 사람들을 모으고 버나드를 제거할 궁리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계획은 점점 짙어져, 결국 왕비를 비밀리에 경호하던 레아가 알게 되었다.
그녀가 갑자기 찾아와 펄쩍 뛰었다.
“왕비와 왕세자가 단장님을 노리고 있어요! 두 사람의 저택에 매일 수상한 사람들이 드나들어요! 두 사람을 지지하는 귀족들은 물론 암살자들까지 있었다고요!”
“아니까 진정해.”
“언제부터 아신거예요? 아니, 그 두 사람이 왜 그러는거예요?”
레아는 초조하게 대답을 기다렸지만 버나드는 차가웠다.
“내가 알아서 해결할테니 넌 빠져 있어.”
“단장님!”
“명령이다.”
레아를 다그치며 돌려보낸 후 버나드는 혼자 생각에 잠겼다.
왕비가 자신을 공격하려한다는 것을 진작에 파악하고 있었다. 안타깝지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현 사태를 왕에게 보고하면 지난날의 감정을 갖고 왕비를 모함하는게 아니냐며 왕에게 핀잔을 들을테고, 무엇보다 최근 기묘한 기류가 흐르는 프레드릭왕의 태도가 마음에 걸렸다. 어째서인지 자신을 대하는 눈빛이 예전과 많이 달라져 있었다. 기분탓인지는 몰라도 싸늘했다.
이런 상황에 눈에 띄는 행동을 하면 더욱 눈밖에 날 것이라는 것을 버나드는 직감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냥 조용히. 왕비가 자신에게 시비를 걸어오기를 기다렸다. 최적의 반격 타이밍은 우선 공격을 받고 나서였다. 왕비와 존이 그동안 모략을 짠답시고 남긴 증거물들이 주변에 차고 넘치게 쌓였을테니까. 자신을 공격한 것을 빌미로 삼아 그것들을 털기 시작하면 된다.
하지만 버나드의 계산착오였다.
왕비와 자신의 싸움을 어디 알리기도 부끄러운 치졸한 싸움으로 치부하며, 부하들에게 알리지 않고 모든 짐을 혼자 떠안으려한게 잘못이었다.
“이 일을 그만두고 어디 먼 곳으로 가서 가정을 꾸리고 싶지 않나요?”
레아는 예고도 없이 집무실로 찾아와서는 그런 말을 건넸다.
버나드는 상상조차 못해본 말이라 그저 웃음만 흘러나왔다.
“내게 가정은 필요없다. 평생 전하 곁에 머물며 그 분을 지켜드리는 것만이 마스터 울프의 사명이다. 가정을 꾸리는건 이 일과 맞지 않아. 적들의 인질이나 도구가 될 수도 있으니까.”
“그러시군요……”
레아는 말끝을 흐리며 잠시 침묵을 가졌다. 그러다 갑자기 잘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전 당신을 잃고 싶지 않습니다.”
그 말을 버나드가 귀신같이 알아들었다.
“나도 널 잃고 싶지 않아. 그러니 왕비에 대한 조사를 멈춰라. 독단으로 진행중이란걸 알고 있어. 규율위반이다.”
레아가 웃는다.
“단장님은 아까운 동료를 잃고 싶지 않은것 뿐이시죠?”
“그래. 또 뭐가 있어야 돼?”
“아뇨. 그거면 됐어요. 단장님처럼 바보 같고 무뚝뚝한 사람한테 잃고 싶지 않다는 말을 들은 것만으로도 큰 영광인걸요. 그거면 충분해요. 나머진 저 혼자 생각하죠 뭐.”
“나머지?”
“몰라도 돼요. 단장님이 혼자만 일하듯이 저도 혼자만 알고 있을래요.”
레아는 싱긋 웃더니 밝게 손을 흔들었다.
“가보겠습니다. 내일 봬요.”
“응, 그래. 수고 많았다.”
“보고 싶을거예요.”
“응?”
“이건 못들었나보죠?”
“뭐라고 했는데?”
“집에 가시면 푹 쉬시라고요.”
“그런가? 너도 푹 셔라.”
“네, 그럼 안녕히……”
그것이 그녀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레아는 그날 저녁, 왕비 아말리아와 존의 침실에 침입해 둘을 참수한 것도 모자라 존의 아들인 세손까지 죽여버렸다.
버나드가 알고 있는 그녀에 대한 기억은 거기까지였다.
***
눈이 번쩍 떠졌다.
“안돼, 레아!”
버나드가 소리치며 잠에서 깨어났다. 얼굴이 식은땀으로 젖어있었다.
“꿈이었나……?”
금세 정신을 되찾고 주위를 둘러보니 점심시간대에 평화롭고 한적하기 그지없다. 데보라가 누워있는 방안이다.
“왜 옛날 일이 꿈에 나오는지……”
어제 블라쉬에게 폭행을 당해 정신을 잃은 데보라를 지켜보다 언제 잠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악몽을 꾼 것처럼 기분이 별로였다.
버나드는 나른하게 목을 긁으며 기지개를 쭉 켰다.
“레아는 하늘에서 뭐하고 지내려나. 하아암.”
“으음……”
“어?”
움직일줄 모르던 데보라가 작은 신음을 내며 마침내 깨어났다.
“버나드……?”
“일어났어? 다행이다.”
버나드가 환하게 웃었다.
“으윽, 머리 아파.”
“가만히 누워있어. 물 갖다 줄까?”
“응, 조금만.”
“기다려.”
버나드가 후다닥 물을 갖다줬다. 데보라는 가볍게 입술만 적시고 주위를 둘러보더니 이내 버나드를 쳐다봤다.
“여기 미셸님 막사 아니야…?”
“맞아. 미셸님이 편의를 봐주셨어. 사제를 불러다 치료도 해주시고.”
“정말?”
데보라는 팔을 들어가며 몸 구석구석을 살펴보았다. 블라쉬에게 폭행당한 멍자국들이 깔끔하게 사라져있었다.
“어머, 신성 치료를 받아서 그런가 전보다 피부가 좋아진 것 같아! 우유처럼 새하얘!”
“잘됐네.”
버나드가 피식 웃었다.
자기 몸을 둘러보던 데보라가 갑자기 상체를 일으키며 이불을 젖혔다.
“여기 있을때가 아니지. 빨리 나가자.”
“왜?”
“이곳에 있는거 버나드가 싫어하잖아. 미안해. 누나 때문에 억지로 와서.”
“아니야 이제 신경 안써도 돼. 계속 누워있어.”
그 말에 데보라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눈을 껌뻑거렸다.
“어째서?”
그때 옆공간에서 발자국 소리가 났다.
뚜벅뚜벅.
누군가 걸어온다.
곧 미셸이 팔짱을 낀 채 미소를 짓고 나타났다.
“버나드는 어제부로 내 가신이 되었거든.”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데보라가 깜짝 놀라더니 이내 슬픈 표정으로 버나드를 쳐다봤다.
“누나 때문에 팔려갔구나! 사제 치료비가 비싸서!”
그녀는 짐짓 울상을 지으며 버나드의 목을 두 팔로 와락 껴안았다.
그 즉시 풍만한 가슴이 버나드의 얼굴을 짓눌렀다.
“헙!”
“다 나 때문이야! 얼마니! 사제 치료비가 얼마야! 누나가 빚내서라도 갚아줄게!”
“그, 그런거 아니야 데보라. 내가 선택한거야.”
버나드가 그녀를 달래며 등을 토닥였다.
그런데 세게 껴안고 있는데도 이전과 달리 버나드가 가만히있자 데보라는 오히려 그 점을 이상하게 여겼다.
바로 포옹을 풀더니 버나드를 빤히 바라봤다.
“버나드?”
“응?”
“괜찮은…… 거야?”
“뭐가?”
“내가 껴안는거 숨 막힌다며 싫어했잖아.”
그러자 버나드가 밝게 웃는다.
“숨 막히는게 이젠 좋아.”
“정말? 누나 가슴이 좋아진거야?”
“데보라란 사람을 좋아하게 된거야."
“가슴이 아니라 내가?”
“응.”
“그렇게 말해주니까 너무 감동적이고 기뻐. 갑자기 왜 그래?”
데보라가 기뻐하며 묻는 말에 버나드는 쑥스러운 나머지 시선을 돌려 창밖의 밝은 햇살을 쳐다보며 대답했다.
“블라쉬와 싸울때 날 지켜주려 애쓰는 것을 보고 나야말로 감동 받았어. 모든 것을 다 잃은 내게, 데보라는 유일한 아군이니까 포근해.”
버나드의 새로운 삶, 그리고 새로운 동료들.
줄곧 왕을 위해 희생만 하던 그의 인생은 지금에야 비로소 레아로 인해 제대로된 길로 돌아온 것이 아닐까.
레아의 선물이다.
두 사람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미셸이 말했다.
"자, 버나드. 데보라도 깨어났으니 이제 우리 둘의 얘기를 본격적으로 진행하자꾸나. 난 네 군주고 넌 내 가신이니 우리 일 얘기 좀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