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화 〉왕을 향한 분노, 더욱 짙어지고2
그 말에 버나드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으며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전하가 날 죽이란 명령을 내렸다고? 그럴리가!’
지난날 형제 같았던 둘 사이가 아무리 멀어졌어도, 그동안의 정이 있어 프레드릭왕이 직접 암살을 지시하리란 생각은, 버나드의 머릿속에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충격이었다.
블라쉬의 입을 통해 절망스러운 말을 듣고 나니, 감옥에 갇혀 있던 지난날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모든 신하들이 자네를 죽이라고 아우성치더군. 그런 상황에 난 자네와의 옛정을 생각해 목숨을 부지시켜주는 것만이 최선이었네.’
‘자네에게 영지를 선물해주기로 했어. 남은 여생 그곳에 가서 하녀들의 시중을 받아가며 편히 살도록 하게. 아내가 될 여자도 내 명문가의 여식으로 직접 구해줄테니까 걱정 말게. 자네를 빼닮은 유능한 아들을 낳아줄거야.’
‘곧 우리 왕국에 피바람이 불거야. 여기에 있어봤자 자네만 위험해. 잠시 중앙에서 멀리 떨어져 있게.’
감옥에서 프레드릭왕이 했던 말이 모든게 거짓이었단 생각이 들자 버나드는 그에게 큰 실망을 금치 못했다.
‘나를 챙겨주는척 위로했던 말이 전부 다 거짓이었단 말인가……? 최종 목적은 나를 죽이는 것이었어……?’
사지가 잘려나가는 고통속에서도 끝까지 왕을 믿고, 왕을 용서 했었다.
그리고 걸레짝처럼 쫓겨나며 먼 곳에서 남은 여생을 보내라는 말도 순순히 받아들였다.
하지만 자신을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다는 것 만큼은 절대 용서할 수가 없었다.
그간 수없이 많은 일들을 겪어오며 왕의 뒤치다꺼리를 했는데, 전부 빼앗아 가놓고 남은 여생 제 명대로 살아갈 수 있는 작은 보상 마저 줄 수 없단 말인가?
이대로 은퇴를 하고 가정을 꾸리며 조용한 삶에 만족하고 싶었는데, 그것마저 프레드릭은 허용치 않겠단 말인가?
누가 프레드릭을 왕으로 만들어줬는데!
누가 왕의 강대한 적이었던 여동생 이블린을 죽여줬는데!
버나드는 파도처럼 밀려드는 배신감에 치를 떨며 난생처음으로 프레드릭왕을 경멸하고 증오하는 감정이 고개를 처들었다.
“난 절망속에서도 끝까지 당신 말을 고분고분 들어가며 죽을때까지 조용한 삶을 살아가려고 했는데…! 프레드릭! 내 모든 것을 앗아가놓고도 당신의 머릿속에는 그저 날 죽일 생각밖에 없었단 말인가……!”
세차게 내리는 폭우속에서 들려오는 블라쉬의 외침은 점점 솟구치는 버나드의 증오심에 더욱 불을 지폈다.
“설령 내가 계집을 끼고 놀며 농땡이를 피워도, 널 죽이라는 전하의 명을 받은 안소니 후작은 계속해서 네게 암살자들을 보낼거야! 마스터울프! 살려고 발버둥 치지마라! 헛수고일 뿐이야! 한때 당신은 우리 왕국에서 가장 유능하고 쓸모있는 존재였지만, 지금의 당신은 우리 왕국에서 가장 필요없는 골칫덩어리 같은 존재가 되었다! 왕국은 당신을 버렸다!”
쿵!
왕국이 널 버렸다는 블라쉬의 외침이 버나드의 가슴에 유난히도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들었던 그 어떤 말보다도 가장 충격적이고 뼈저리게 가슴 아팠다.
‘나는 대체 뭘 위해 살아왔던가!’
분해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프레드릭왕을 따라다니며 지난 17년간 이뤄왔던 일들이 모두 허사였다. 돌아온건 왕국을 위해 열심히 일한 업적이 아니라 도망자 신세, 그리고 좌절과 배신감 뿐이었다.
“생사고락을 함께하며 영원을 다짐했던 맹세가 이렇게나 쉽게 무너질지 몰랐다. 나는 대체 누굴 위해 살아왔을까. 레아, 네가 옳았어……”
마지막까지 남아있었던 프레드릭왕을 향한 충성심이 점차 희미해져 가고 있었다. 반면에 여태껏 가슴에 품고 있던 레아에 대한 원망과 증오심은 눈녹듯 녹아내리고 그녀를 향한 그리움과 안타까움이 그 빈공간에 차곡차곡 쌓이기 시작했다.
“날 진심으로 걱정해주던 사람은 레아뿐이었어. 왜 이제서야 알았을까……!”
이미 떠나버린 인연을 잡지못한 아쉬움과 뒤늦은 후회가 폭풍처럼 거세게 몰아치며 버나드는 자신을 원망하고 자책했다.
“여기 있었구나?”
머리위에서 불쑥 블라쉬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도망갈 의지조차 상실해버린 버나드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숨어있던 자리에 멍하니 앉아만 있었다.
블라쉬는 곧장 앞으로 다가와서 버나드의 멱살을 붙잡고 한손으로 번쩍 들어올렸다.
“감옥에서 봤던 표정이네? 세상 사는걸 포기한 표정. 절친하게 지내던 왕의 명령으로 왔다니까 충격이 컸나보지?”
“……”
생기를 잃은 눈빛으로 자신을 마주보는 버나드를 보며 블라쉬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처음에는 예전 보스이기도 했고, 예의상 단숨에 목을 칠 생각이었어. 하지만 지금은 마음이 바꼈지. 아까 날 놀린 대가다. 느긋하게 실컷 팬 다음 저 세상으로 보내줄게.”
“이봐, 블라쉬……”
“응?”
“그 전에 하나 묻고 싶은게 있다…”
“시간 끄는 거야? 뭐 아무튼 좋아. 시간은 많으니까. 비가 그치기 전까진 우리가 여기 있는지 아무도 모를거야. 저기 보이는 언덕에 있는 미셸년은 정부랑 떡이나 치고 있겠지. 해봐.”
버나드는 중얼거리듯 힘없이 말했다.
“‘당신을 잃고 싶지 않습니다’의 의미가 뭐지……?”
엉뚱한 소리에 블라쉬가 고개를 갸웃했다.
“몰라서 묻는 거야? 말그대로 잃고 싶지 않은가 보지.”
“말의 속뜻을 묻는거다…”
“뭔 소리야?”
“사랑한다는걸까? 아니면 상관을 동경하고 존경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온 말일까?”
“하하, 갑자기 뭔 사랑 타령이슈? 안되겠네. 머리가 이상해진 것 같으니 정신 차리게끔 뚜드려 패줘야겠어. 닭살 돋아서 들어주기가 힘들어.”
블라쉬가 실실거리며 주먹을 들어올리는 찰나였다.
그가 방심한 사이 뒤에서 귀신처럼 나타난 데보라가 두 손으로 들고 있던 돌로 블라쉬의 뒤통수를 퍽! 찍어버렸다.
“아악!”
“버나드를 내버려둬!”
큰 충격을 받아 고개를 숙인 블라쉬의 어깨너머로 데보라의 얼굴이 눈에 들어오자 버나드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까 날아가서 부딪힌게 원인인지 이마가 찢어진 데보라의 얼굴에서 붉은 피가 빗물과 섞여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게다가 얼굴에 피를 뒤집어 쓰고 있음에도 데보라는 아무렇지도 않은듯 버나드를 향해 환하게 웃어보였다.
“걱정하지마, 누나가 지켜줄게!”
“데보라……!”
“이 썅년이!”
블라쉬는 돌에 머리를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쓰러지지 않았다. 우선 버나드를 주먹으로 쳐서 날린 다음에 뒤로 돌아서 데보라의 따귀를 후려치고 그녀가 비틀거리다 넘어지자 발로 사정없이 짓밟았다.
“이 벌레 같은 년이 감히 나를 때려? 버르장머리를 고쳐주마 쌍년!”
“꺄악! 꺅!”
쓰러진 데보라가 폭행을 당하는 동안 주먹을 맞고 날아간 버나드는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다 멈췄다.
“안돼, 데보라……!”
눈앞의 적. 처참하게 맞고 있는 데보라.
버나드는 안간힘을 다해 일어서려고 했다.
하지만 갑자기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오며 현실과 지난날의 기억이 뒤섞이는 착란 증세가 일어났다.
폭우가 쏟아지고 데보라가 블라쉬한테 발길질을 당하는 상황이 아닌, 어느 순간 맑은 하늘 아래 땅바닥에 쓰러진 자신이 있었다.
어째서인지 체력이 다해 심하게 지쳐있었다.
반듯이 누워 가쁜 숨을 고르고 있는데 누군가 불쑥 얼굴을 내밀었다.
“이로써 열번째 쓰러졌다. 어서 일어나라.”
무뚝뚝하지만 부드러운 음성이었다.
하늘에 떠있는 찬란한 태양의 역광에 가려 얼굴은 잘 보이지 않는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실루엣만 보일뿐.
“이제 거의 다 왔다. 조금만 힘을 내면 우올려베기를 터득할듯 싶구나.”
프레드릭인가?
아니, 아니야.
수차례 고민 끝에 버나드는 한 인물을 떠올렸다.
아아, 이는 분명 그 사람이다.
함께 프레드릭왕을 모시며 같은 길을 걷다가 어느덧 잊혀진 사람……
“이스베르그의 레퍼드? 만인에게‘훌륭한 용병왕’이라고 불리던 그 레퍼드……?”
그가 피식 웃었다.
“처음 만난 사람 대하듯이 새삼스럽게 무슨 말이냐. 왜 갑자기 내 칭호를 말하는거야.”
그 순간 밝게 빛나던 태양빛이 옅어지면서 웃는 얼굴의 레퍼드가 또렷이 보였다. 17년전 그 당시 레퍼드는 30대 젊은 용병이었다. 지금 그의 나이는 아마도 50……? 50세의 중년이 되었을까? 레퍼드는 어찌 지내고 있을까?
“자, 일어나라 버나드. 네 검술 선생으로서 오늘은 반드시 우올려베기를 터득시켜주마. 잘 따라오도록 해.”
“레퍼드……”
버나드는 멍하니 누워있다 그가 내민 손을 맞잡았다. 그리고 힘차게 말했다.
“빨리 알려줘! 지금 그 기술이 꼭 필요해!”
우연히, 잊고 있던 기억이 또 하나 돌아왔다.
머릿속의 기억이었기에 기술의 습득 속도는 매우 빨랐다. 기억은 레퍼드가 며칠에 걸쳐 알려주는 우올려베기 기술을 단 몇초만에 보여주었고, 버나드가 그것을 다시 터득하는 속도는 빛처럼 빨랐다.
그리고……
“반반해서 봐줬더니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기어올라? 버나드를 죽인 다음에 오늘 똑똑히 알려주지! 네년을 잡아다 노예로 삼아야겠다!”
“꺄악! 크윽! 윽!”
데보라가 맞으면서 시간을 벌어주고 있는 사이 현실로 되돌아온 버나드는 급히 칼부터 찾았다.
지끈거리던 두통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였다. 그의 머릿속은 아주 맑고 쾌청했다. 방금 배운 기술을 빨리 써먹고 싶은 기분뿐이었다.
‘저깄다!’
천으로 덮인 노점 가판대 밑으로 아무렇게나 쌓여있는 잡칼이 보였다.
지금 이 순간 칼의 질 따위야 아무래도 좋다. 그저 베고 찌를 수만 있다면야.
버나드는 얼른 달려가서 칼을 집어들었다. 그리고 블라쉬를 향해 전력질주했다.
“블라쉬이이이!”
“음?”
밑을 쳐다보고 있던 블라쉬가 무심코 뒤를 돌아보는 찰나, 버나드는 곧바로 기술을 시전했다.
상대의 정면을 향해 뛰어들다 잠시 좌측으로 빠졌고, 무릎을 구부렸다가 세차게 튕기면서 우측으로 스쳐지나가듯 블라쉬의 가슴을 잽싸게 베어버렸다.
그리고 가슴베기에 이어 본능적으로 다른 기술을 연계했다. 방금 배운 우올려베기다. 블라쉬의 가슴을 가로로 벤 버나드는 즉각 칼의 방향을 바꿔 위로 힘껏 들어올렸다.
“이야아압!”
촤악!
칼날이 번뜩이며 위로 솟구치는 순간 버나드는 승리를 예감할 수 있었다. 칼을 머리 위로 들어올린 채 잠깐 정적이 흘렀다.
“허억, 허억!”
“큭……!”
파바바밧!
뒤늦게 검기가 담긴 노란 섬광이 블라쉬의 가슴과 왼쪽 어깨를 번개처럼 훑고 지나갔다. 그 직후, 블라쉬가 입고 있던 갑옷이 와그작 금이 가며 산산이 조각났다. 이내 팍 소리와 함께 폭발하듯 깨져버린 갑옷 조각들이 바닥에 흩뿌려졌다.
그러나 흉갑이 완전히 박살났지만 블라쉬는 쓰러지지 않았다. 놀랍게도 그는 멀쩡했다.
“죽는줄 알고 식겁했다고?”
안도의 미소를 짓는 블라쉬를 응시하며 버나드는 절망 어린 신음을 내질렀다.
“이, 이럴 수가!”
손맛이 좋았고 완벽했는데 어째서 상처 하나 입히지 못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소름이 끼쳤다.
“폼은 예전 그대로 멋졌지만 덩치가 작아져서 그런지 위력이 없구만 그래.”
블라쉬가 허리에 차고 있던 칼을 뽑아들었다.
“작아졌다고 무시했더니 그게 화를 불러올뻔했어. 암 그렇고 말고. 꼬리가 잘려도 늑대는 늑대지. 내가 방심했네. 밑에 쓰러진 계집 말고 당신부터 빨리 죽였어야했는데.”
블라쉬가 두 손으로 칼을 쥐고 공격 자세를 취했다. 그의 얼굴에 웃음기가 싹 사라져 있었다. 눈빛부터가 조금 전과 많이 달라졌다. 지금까지 장난이었다면 이제부터는 진지하게 상대해주겠다는 본심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었다.
“제길……”
버나드는 긴장한 표정으로 침을 꿀꺽 삼켰다. 늦어도 5초다. 자신이 죽기까지 남은 시간 5초. 블라쉬가 진심을 보인 이상 살아남을 방도가 없었다. 자신을 지그시 노려보는 그의 몸이 움직이는 순간 한칼에 죽을 것이다.
그렇게 궁지에 몰린 쥐처럼 무력하게 목을 내놓고 있을때였다.
갑자기 어디선가 여성의 위엄있는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던져라!”
“예!”
비가 많이 쏟아지는 가운데 난데없이 사방에서 올가미가 날아들었다.
수많은 올가미가 블라쉬의 몸통을 노렸다. 즉각 눈치를 챈 블라쉬는 날렵하게 움직이며 몇 개의 올가미를 피해냈지만, 계속해서 날아드는 올가미가 하나둘씩 그의 몸에 휘감기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블라쉬는 순식간에 결박됐고, 몸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게되자 그는 사나운 맹수처럼 격렬하게 몸부림치며 소리를 질렀다.
“이게 뭐하는 짓이야! 나는 전하의 명령을 받고 이곳에 온 마스터다! 날 방해하는 놈들은 모두 반역자로 체포할테야! 당장 풀어! 풀라고!”
잠시 후, 블라쉬와 버나드를 둥글게 에워싼 수십명의 기사들과 미셸이 모습을 드러냈다.
“무사해서 다행이구나 버나드.”
미셸은 마치 넌 내게 빚을 졌다는 식으로 뽐내는 미소를 지으며 버나드를 바라보더니, 이내 블라쉬에게는 싸늘한 시선을 보냈다.
“저 놈을 감옥에 가두거라. 내일 날이 풀리는대로 우리 야영지에 허락도 없이 침입한 죗값을 묻겠다.”
그러나 버나드가 그것을 허용치 않았다.
미셸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그가 민첩하게 움직이며, 땅에 떨어진 블라쉬의 칼을 냅다 주워들더니 두 손으로 힘껏 블라쉬의 심장을 찔렀다.
푹!
“커억!”
그의 갑작스러운 행동을 보고 미셸이 혀를 차며 미간을 찡그렸다.
“저 아이 설마 자신의 비밀을 감추려고, 일부러?”
미셸은 사실 블라쉬에게서 버나드의 정체에 대해 자세히 캐묻고 싶은 생각이었으나 버나드의 재빠른 대처로 그 기대가 날아가 버렸다.
그런 가운데, 버나드는 점점 숨이 멎어가는 블라쉬를 노려보며 말했다.
“왕국이 날 버렸다고? 그렇다면 왕국 자체를 바꿔버리겠다.”
입술 밖으로 피를 울컥 토하며 블라쉬가 히죽 웃는다.
“크큭, 어떻게 하시게? 전하한테 복수라도 하시게?”
“오늘부로 프레드릭은 더 이상 나의 왕이 아니다.”
버나드는 말을 마치고 심장에 꽂은 칼을 시계방향으로 비틀었다.
“끄아아아아아……!”
블라쉬는 끔찍한 고통에 괴로워하다가 마지막으로 대량의 피를 울컥 쏟아내고는 그대로 숨이 멎었다.
“후……”
그의 죽음을 확인한 버나드는 칼에서 손을 떼고 뒤로 물러나며 바닥에 쓰러져있는 데보라에게 시선을 옮겼다. 온몸에 멍이 들고 피를 흘린 그녀는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
버나드는 가까이 다가가 허리를 굽히고 데보라가 제대로 숨을 쉬는지 가슴에 귀를 대고 확인했다.
풍만한 젖가슴이 큼지막하게 들썩이는 것이, 다행히도 숨은 잘 쉬고 있었다.
버나드는 잠든 것처럼 보이는 데보라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지켜줘서 고마워 데보라. 이 은혜…… 잊지 않을게.”
나지막이 속삭이며 그녀의 피멍이 든 손등에 살짝 입을 맞췄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저 멀리 높은 곳에 서있는 미셸을 당당히 응시했다.
“만백성이 찬양하며 떠받드는 현명하고 지혜로우신 군주이신 아킨테의 미셸님께 간곡한 청이 있습니다!”
“호오?”
버나드가 처음으로 자신에게 말을 걸자 미셸은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말해보거라.”
버나드는 그녀를 향해 한쪽 무릎을 꿇고 공손히 머리를 조아렸다.
“이 버나드! 당신을 섬기고 싶습니다!”
프레드릭을 향한 복수심. 그 시작은 아킨테의 미셸부터였다. 그녀의 비호 아래 왕실의 추격자들로부터 몸을 지키고, 그녀가 가진 강대한 힘을 이용해 프레드릭을 친다. 이것이 버나드의 머릿속에 담긴 최초 구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