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화 〉왕을 향한 분노, 더욱 짙어지고1
좀 더 관심을 갖고 지켜보던 와중에 여자는 예상외로 수상한 행동을 보이고 있었다. 어떤 소년의 손을 붙잡고 숨어다니면서 병사들의 시야를 요리조리 피해다니는게 눈에 띄었다.
“저년이 사람을 죽였나 왜 저럴까. 후후. 평범한 계집은 아니었던 모양이군.”
블라쉬는 더욱 유심히 데보라를 지켜보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왠지 알 수 없는 묘한 느낌이 들었다.
“저년 수상해… 어제 버나드가 도망친 장소에 있었던 것도 그렇고… 오늘은 또 이상한짓 하는걸 보니… 버나드와 관련된 뭔가가 있을 것 같아.”
눈을 가늘게 뜬 채 조용히 턱을 어루만지던 그는 고민 끝에 데보라의 뒤를 밟아보기로 결심했다.
“버나드와 관련 없어도 좋아. 저년의 구린걸 캐내서 그걸 빌미로 꼬셔 보기라도 해야지. 그냥 놔주기엔 아까운 여자니까 큭큭.”
이윽고 버나드와 데보라는 언덕에 세워진 아킨테군의 진지를 무사히 빠져나왔다.
노점이 즐비한 시장구역으로 진입하자 두 사람은 숨을 돌릴겸 눈에 띄지 않는 골목 구석으로 가서 비를 피했다.
인적이 없는 좁은길, 차양막 아래에 나란히 쪼그리고 앉아 두 사람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이곳까지 오는데 체력을 많이 소모했다. 게다가 바람이 불고 비까지 오니 평소보다 숨이 더욱 빨리 찼다.
서로 말없이 잠깐 호흡을 가다듬은 뒤에야 입을 열 수 있었다.
“이제 어쩔거야 버나드?”
데보라가 비에 젖은 머리카락을 손으로 쥐어짜며 물었다.
그녀의 물음에 버나드는 빗물이 튀기는 바닥을 쳐다보며 짧게 고민하더니 가볍게 대답했다.
“떠나야지.”
“혼자?”
“응.”
“할머니는? 할머니도 구해야 하잖아.”
버나드가 고개를 저었다.
“그 마녀는 이런 날씨에 나랑 같이 가고 싶지 않을거야. 왜 나타났냐고 날뛰며 화를 낼걸. 마녀를 데려가는건 다음을 기약할 수 밖에.”
“하긴 바람도 세고 비가 많이와서 할머니는 밖에 나오는걸 싫어하시겠다. 근데 버나드? 할머니를 왜 마녀라고 하는거야? 할머니가 들으면 화를 내실거란다?”
버나드가 피식 웃었다.
“데보라. 데보라도 이제 알잖아. 내가 말 안해도 속으로는 어느 정도 감잡고 있었잖아. 멜라니아와 나는 가족이 아니야. 그 여자는 마녀고, 나는 보다시피 왕실의 기사들에게 쫓기는 신세야.”
“언제부터 쫓긴거야?”
“어제부터. …갑작스러웠지.”
데보라가 안타까운 눈길로 그를 쳐다봤다.
“누나가 곁에서 도와줄게. 떠나지마.”
“불가능해. 데보라는 힘이 없어. 나랑 같이 있다간 죽을지도 몰라.”
“누나가 힘이 없다니 무슨 말이야? 아까 커다란 짱돌로 병사들 기절시킨거 못봤니?”
“그건 뭐… 조금 놀랍기는 해도.”
버나드는 실제로 데보라에게 감탄했다. 그녀의 팔힘이 세다는건 알고 있었지만 훈련을 받은 병사까지 쓰러뜨릴줄이야. 하지만…
“왕실의 기사들은 일반 병사 따위가 아니야. 그들은 심지어 초인적인 힘을 가진 자들도 있어.”
“걱정하지마. 누나도 초인이 되면 된단다?”
“농담 아니야.”
“어머, 누나를 못 믿겠다 이거야?”
데보라는 힘을 과시하려는듯 득의양양하게 소매를 걷어부치며 두 팔을 위로 쭉 뻗었다.
“잘 보렴. 누나가 이래봬도 팔에 근육이 장난 아니야.”
그 순간 머리 위로 쭉 뻗은 데보라의 양손바닥에, 위에서 내려쳐진 무언가가 타이밍 좋게 잡혔다.
척!
“응? 이건 뭘까나……?”
손가락으로 잠시 그것을 더듬었다.
“사람의 손 같기도 하고… 그리고 이건 칼자루… 인가?”
“칼자루?”
버나드가 흠칫하며 재빨리 고개를 들었다. 누구의 것인지 눈앞에 시퍼런 칼날이 번뜩이고 있었다. 그리고 데보라의 머리 위를 쳐다보자 언제 다가온 것인지 우람한 덩치의 근육질 사내가 보였고, 데보라가 만세하듯 쭉 뻗은 팔에 칼을 쥔 오른손을 붙잡힌 채 서 있었다.
그가 버나드를 향해 씨익 웃어보였다.
“한참 찾아다녔잖아, 마스터울프. 쥐도새도 모르게 단칼에 죽여버릴려고 했는데 이 계집이 그걸 우연히 막았네. 운 좋았수. 크큭.”
버나드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등골이 서늘해졌다.
“피해! 데보라아아아!”
버나드는 재빨리 빗속으로 몸을 날리며 블라쉬에게서 멀리 떨어졌지만, 데보라는 마냥 좋은듯 계속 블라쉬의 팔을 붙잡은 채 좋아라 하고 있었다.
그녀가 기뻐하며 소리쳤다.
“버나드 이거봐! 누나가 암살자를 붙잡았어! 빨리 와서 공격해!”
이 순간만큼은 데보라가 참 눈치없어 보였다.
“이것봐! 나 약하지 않아! 대단하지?”
“어, 잘했다. 몸매 좋은 계집아.”
블라쉬는 붙잡힌 오른팔을 위로 쭉 들어올렸다. 그러자 그의 팔을 힘껏 붙잡고 있던 데보라가 그대로 위로 딸려왔다.
“어? 신기하다. 이 사람 힘이 무척 세…”
데보라의 몸이 공중에 뜬 채로 점점 위로 올라가더니 곧 블라쉬와 마주했다.
블라쉬는 천진한 표정을 짓는 데보라의 얼굴을 핥듯이 자신의 입술에 침을 발랐다.
“너하고도 따로 할 얘기가 있으니 어디가지 말고 얌전히 있으라구.”
그는 말을 마치자마자 데보라를 뿌리치듯 팔을 세차게 휘둘렀다. 그러자 그 힘을 못당한 데보라의 몸이 허공으로 휙 날아가더니 비 때문에 천을 덮어놓은 노점 가판대에 머리를 탁 부딪히며 짧은 비명과 함께 밑으로 떨어졌다.
이어 그녀는 강한 충격을 받고 기절했는지 엎어져 쓰러진 채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데보라!”
버나드가 급히 달려가려 했으나 블라쉬가 앞길을 막아섰다.
“자, 다음은 너라고 마스터울프.”
그가 사악하게 웃었다.
“쫓아다니느라 엄청 피곤했어. 빨리 끝내고 가야지.”
그가 느긋하게 칼을 쥔 손목을 돌리며 조금씩 다가오자 버나드는 뒷걸음질 치며 급하게 소리쳤다.
“내가 버나드인지 어떻게 확신하지? 가짜일 수도 있잖아!”
“염려마. 본인 확실하니까. 아까 얘기 엿들었어. 사지가 잘려나간 인간이 꼬마가 됐다는걸 깨닫고 웃겨 뒤지는줄 알았지.”
“성인이 작아진다는게 가능해?”
“당신 곁에 마녀 멜라니아가 있으면 그럴 가능성이 높겠다 싶었어. 그 할멈이 괜히 마녀겠어? 그리고 우리가 괜히 밤의 늑대들이었겠어? 또 당신이 뭔데 마스터울프였겠어? 남들이 하기 어려운 불가능한 임무도 막힘없이 척척 수행해내고, 불가사의한 일까지 해내던걸 늘 곁에서 지켜봤다고. 크라챠 임무때 기억 안나? 그때 당신은 어떤 마법사의 도움을 받아 잠깐 80살 노인이 되었었지. 그랬던 사람이 꼬마가 됐다고 해봐야 그리 놀랍지도 않아. 그리고 당신.”
마지막으로 의미심장한 말을 건넸다.
“아무리 어려졌다지만 앳되기만 할뿐 어떻게 봐도 마스터울프의 얼굴이잖아? 차라리 아들이라고 하지 그랬어. 그랬다면 믿었을지 또 알아? 크큭.”
버나드는 속으로 혀를 차며 입술을 깨물었다. 현재 모든 힘을 잃은 자신의 실력으로는 절대 블라쉬를 이길 수 없다. 계란으로 바위치는 격이다. 어떻게 해야 될까, 어떻게 하면…!
“몸이 작아지면서 세븐로얄을 되찾았지!”
절박함에 머리를 굴리던 버나드가 갑자기 그렇게 외치자 다가오던 블라쉬가 우뚝 멈춰섰다.
“세븐로얄을 가졌다고?”
“그렇다! 네 녀석이 계속 그딴식으로 나온다면 나도 사용할 수 밖에 없어. 이곳에 있는 사람들에게 큰 피해가 가겠지만!”
버나드가 당당하게 한 손을 앞으로 뻗자 블라쉬가 콧방귀를 꼈다.
“거짓말 하지마. 왕실 마법사들에게 꽁꽁 봉인된게 쉽게 풀렸단게 말이 돼?”
순간 버나드의 귀가 솔깃했다.
‘세븐로얄이 사라진게 아니라 봉인됐다고? 그렇다면 아직 내 안에 존재하는건가……?’
속으로 생각하는 사이 블라쉬는 다시 발걸음을 옮기며 거리를 좁혀왔다.
“에고 거짓말이나 하고.”
블라쉬는 실망했다는 표정으로 일부러 한숨을 내쉬었다.
“명색이 왕의 턱밑까지 올라갔던 양반인데 좀 더 살아보겠다고 거짓말을 하는건 좀 꼴이 사납군. 그 품격 있고 위엄있던 양반은 대체 어디로 사라진건지.”
“못 믿겠으면 보거라!”
버나드는 앞으로 뻗은 손바닥을 쫙 피고 서서히 오므리기 시작했다.
“내가 힘을 되찾은 이상 네 녀석쯤이야 한입거리도 안되지!”
진지한 표정으로 당당히 외치면서 손을 오므리는 그의 모습을 바라보던 블라쉬는 다시금 발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기분탓인지는 모르겠지만 바람이 전보다 더욱 매섭게 몰아치는 느낌이었다. 왠지 불길하다.
‘진짠가?’
진실인지 아닌지 분간을 하기 어려울 정도로 버나드의 기세는 대단했다. 정말로 그의 손에서 레온 왕가의 비술인 권능의 힘이 뿜어져 나올듯한 모습이다.
“잘가라 블라쉬! 오늘밤 지옥의 악마가 네 영혼과 한잔하고 싶다는구나! 안부 전해주렴!”
“설마……?”
긴가민가하며 블라쉬의 얼굴에 일순 두려움이 퍼져나갔다. 그리고 그때였다. 버나드가 ‘끝이다!’ 하고 크게 외치며 주먹을 꽉 움켜쥐는 순간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천둥번개 소리가 대지를 뒤흔들며 블라쉬의 고막을 강타했다.
우르르콰쾅쾅!
“크앗!”
블라쉬는 귀청을 찢는 천둥번개 소리에 지레 겁을 먹고 황급히 몸을 날렸다. 그렇게 주변 사물에 몸을 숨긴 직후, 그는 안전하다며 가슴을 쓸어내렸으나 곧 버나드에게 속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제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둘러보니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버나드만 홀연히 사라져 있었다.
“씨발!”
그냥 운좋게 번개친거였다.
블라쉬는 창피함을 못이겨 얼굴이 급속도로 붉어졌다. 분통이 터져 사방에 대고 소리를 꽥꽥 질러댔다.
“이 쥐새끼 같은 자식아! 세븐로얄 따위 못 쓸줄 알았어! 감히 누굴 속여! 당장 찾아내서 죽여버릴테다!”
버나드는 멀리 도망가지 못하고 근처에 숨어있었다. 입안이 바짝 마르는 가운데 그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블라쉬의 손아귀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둘 중 하나는 반드시 죽어야 끝이난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은 가슴베기뿐… 검기 없이 저놈을 쓰러뜨릴 수 있을까…?”
검기 쓰는 법을 까먹어서 도통 모르겠다.
과연 이길 수 있을지… 그저 암울했다.
“이봐, 쥐새끼! 나한테서 도망칠 수 있을 것 같아?”
쏟아지는 빗속 어디선가 블라쉬가 소리치며 비웃었다. 그는 여기저기 두리번 거리며 숨어있는 버나드를 찾아다니는중이었다.
“굳이 내가 아니더라도 당신을 죽이고 싶어하는 놈들이 줄을 섰지! 당신이 죽을때까지 왕실에서는 계속 추적자들을 보낼거야!”
버나드는 기척을 지우고 슬금슬금 블라쉬를 피해다니며 받아쳤다.
“네녀석이 나한테 개인적인 원한을 품어서 쫓아온게 아니고?”
“원한? 그래, 당신한테 아주 큰 원한을 품었지!”
블라쉬는 한순간 감정이 북받친듯 허공을 향해 윽박지르듯이 소리쳤다.
“당신만 아니었어도 난 떼돈을 벌며 잘 살았을거야!”
“그건 불법이었어 블라쉬! 난 정당한 절차를 밟아 널 퇴출시켰을뿐이다! 넌 해선 안될 범죄를 저질렀어!”
“하하하! 범죄자란 소리는 이제 과거일뿐이야! 지금은 네놈이 왕국의 적이지! 그것도 악랄한 범죄를 저지른 대역죄인!”
블라쉬는 득의양양하게 말을 이었다.
“착각하지마 마스터울프! 난 결코 사적인 감정따위로 이곳에 온게 아니야! 내가 이 자리에 있는 이유는 바로 왕이 보내서 왔지! 당신이 그렇게나 열렬한 충성을 바쳤던 프레드릭 전하께서 직접 네놈을 죽이라고 명령을 내리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