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3화 〉아킨테의 미셸, 눈치채다3 (23/200)



〈 23화 〉아킨테의 미셸, 눈치채다3

“……”
“나의 것이 되어준다면 네 배경에 대한 비밀은 철저히 보장해주겠다. 오로지 나만 알도록 하지.”

미셸은 잠시 말을 멈추고 버나드의 눈동자를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자신의 말에 동요하고 있는지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버나드의 눈빛은 눈곱만치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바위 같았다.
그녀가 허탈한 한숨을 내쉬며 책상 위에 놓여있는 과일 바구니로 시선을 돌렸다.

“훈련을 잘 받았나보구나.”

라고 하면서 과일바구니에 놓인 포도 한알을 따서 입속에 쏙 집어넣고 잘근잘근 씹었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꿀꺽 하고 침 넘어가는 소리가 천둥소리 마냥 들렸다.

“음?”

무심코 시선을 돌려 버나드를 쳐다봤더니 뜻밖에도 신선한 과일이 가득 담겨있는 과일바구니를 쳐다보는 그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자신이 말을 걸때는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이 단단한 바위같더니만 먹을 것을 보고는  사람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달라져있었다.
과일바구니를 쳐다보는 그의 눈빛이 반짝반짝 빛이났다. 먹고 싶어 미치겠다는듯이. 그는 재차 꼴깍 침을 넘겼다.

“호오…”

미셸은 슬그머니 입꼬리를 말아올리며 다시금 과일바구니로 손을 뻗었다.

“흐음, 이번엔 뭘 먹을까. 사과? 배? 복숭아?  포도? 아니야 이거나 먹을까.”

그녀는 서랍을 열더니 자주 즐겨먹는 과자인 프레첼을 꺼냈다. 종이봉투를 찢어 책상위에 활짝 벌려놓고는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내며 아주 맛있게 과자를 먹는 시늉을 했다.

“아아, 달아라…!”

미셸이 프레첼을 하나씩 입안에 던져넣을수록 버나드의 입과 배에서 난리가 나고 있었다.

꼴깍…!
꼬르륵…!

마치 귀를 쫑긋 세운 개 마냥 눈을 동그랗게 뜬 버나드는 그렇게 한참 동안 미셸의 먹는 모습을 눈을 빛내며 지켜보고 있었다. 혹시 과일이나 과자를 주지 않을까 기대가 담긴 모습이었다. 그의 모습은 물론 배고파서 그러는 것도 있지만 감옥에 갇히기 전까지 풍족한 생활을 누렸기 때문에 귀족들이 먹는 음식에 대한 그리움도 컸다. 맛없는 수프 말고 진짜 음식 같은 음식을 오랜만에 먹어보고픈 욕심이 있었다.

특히 다양하고 신선한 과일은 평민들이 구경하기가 힘들었으며 오로지 귀족들만 자주 맛볼 수 있는 나름 귀하디 귀한 음식이었다.
하지만 미셸은 그를 골리듯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오히려 협상을 했다.

“오랜 도피생활로 많이 굶주렸을테지. 먹고 싶어? 만약 먹고 싶으면 먹고 싶다고 얘기해. 그럼 주마.”
“……”
“간단해. ‘먹고 싶습니다’ 한마디면 되는거야. 네 목소리가 듣고 싶구나.”

미셸은 과자를 하나 손에 들고 보란듯이 흔들어보였다.
그러자 버나드는 한순간 흥미를 잃은듯 정색했다. 무표정으로 미셸을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그의 눈동자는 한때 몰아치던 굶주림을 잊고 아무 생각이 없어보였다. 그 모습을 보고 미셸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너도  고집이 세구나.”

이후 미셸 혼자만 계속 말하며 한시간 정도 흘렀을까, 문득 밖에서 집사 니슨의 목소리가 들렸다.

“미셸님, 샤를리나님이 찾아왔습니다.”
“들어오라고 하게.”
“네, 그리하겠습니다.”

잠시 후 장막이 걷히며 미셸의 딸인 샤를이 안으로 들어왔다. 눈부시게 빛나는 금발 머리카락을 군데군데 땋아 청순해 보이는 그녀는 가슴에 쌍두 독수리가 수놓인 보라색 튜닉에 엉덩이가 쫙 달라붙는 검은색 바지차림이었다.
그리고 그녀를 뒤따라 같은 머리색을 가진  생머리 금발 여기사도 안으로 들어왔다. 여기사는 은색 갑옷차림이었다.

“새로운 노리개인가요? 피에르는 질리셨나 보죠?”

샤를은 싸늘한 눈길로 버나드를 바라보며 그를 지나쳤다. 이어 그녀를 뒤따라온 여기사는 버나드를 보더니 자기도 모르게  앞에서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너… 훈련장…”

여기사는 버나드의 얼굴을 알아보고 아는척을 하려했으나, 버나드는 그녀를 한번 쳐다보고는 곧바로 시선을 돌려버렸다.

“저 아이는 노리개가 아니란다. 앞으로 널 지켜주는 호위 무사가 될거야.”
“네?”

샤를은 인상을 찡그리며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랴는듯이 대꾸했다.

“저한테는 이미 클레어가 있어요.”

뒤따라 들어온 금발 여기사의 이름은 클레어였다.

“클레어가 있는데 뭐하러  사람을 둬요? 게다가 남자잖아요.”
“제 2차 걷는 사자 전쟁이 시작되었다. 왕의 피를 물려받은  해코지할 생각에 다른 왕족들이 암살자를 보낼지 몰라. 지금부터는 클레어의 도움만으로는 힘들게다.”

미셸은 버나드를 돌아보며 미소지었다.

“저 아이는 잘 훈련된 늑대란다. 엄청난 실력을 갖고 있는 아이지.”
“클레어보다도요?”
“보나마나 클레어보다 월등할게다. 평범하게 자란 아이가 아니거든.”

그 말은 순간 뒤에서 묵묵히 서있던 클레어의 가슴을 파고들며 무사로서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미셸과 샤를이 계속해서 대화를 나누는 동안 클레어는 조용히 버나드를 주시했다.

“목검… 두동강… 잊지않아… 겨뤄보고… 싶어.”


***

마크와 함께 짐수레를 지키고 있던 데보라는 근심이 한가득이었다.
대영주에게 잡혀간 버나드의 신변이 걱정되어 그녀는 한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지를 못했다.
안절부절못하며 짐수레 주변을 왔다갔다 거리길 반복 하는 여동생을 보며 마크가 끝내 혀를 찼다.

“잡아다 구워먹는다고 한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난리야? 좀 가만히 있어. 에휴 심란해 죽겠네.”
“오라버니는 걱정이 안돼요?”
“아까  봤어? 강제로 잡아가긴 했지만 험하게 다루진 않았잖아. 미셸님 눈치보니까 버나드를 마음에 들어하는 것 같더라. 대귀족한테 눈도장 찍히고 그놈 완전 대박났어. 우리보다 풍족하게 잘 살거라고.”
“버나드는 싫어했어요. 내가 분명히 봤어요. 버나드는 미셸님한테 가길 완강히 거부했다고요!”

데보라는 불안한 얼굴로 눈동자를 좌우로 굴리며  달전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데보라… 나 죽는 거야…? 이제 데보라랑 만날  없는거야…?’

데보라가 친동생처럼 아끼며 잘 보살펴 주었던 옆집 아이.
 아이가 지병으로 숨을 거둘때 곁에 있던 데보라는 아무것도 해줄 수 없었다.
그나마 해준 것이라고는 무력한 자신을 원망하며 목이 아프도록 울던게 전부였다.

“다시 반복할 수 없어……!”

데보라는 돌연 주먹을 움켜쥐며 이를 악물고 다짐했다.

“반드시 구해낼거야!”
“야! 너랑 걔 만난지 겨우 하루됐어. 그 사이 나몰래 무슨 끈끈한 우정이라도 생겼냐? 응? 어떻게 해야 그런 기분을 느껴? 알려줘라 좀. 정말 바보 같다니까. 애들 좋아하는 것도 정도껏해야지.”
“버나드는 애가 아니예요!”
“걔가 애지. 애가 아니면 뭐냐?”

데보라는 큰 목소리로 반박했다.

“버나드는 이미 의젓한 어른이라고요! 아침에 계곡에서 봤는데 페니스의 굵기부터 남달랐어요! 제가 보장해요!”
“헐……”

너무도 황당한 나머지, 마크는 넋이 나간 얼굴로 여동생을 멍하니 바라보며 그녀를 또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는 사이 데보라는 겉옷을 잽싸게 걸쳐입더니 어디론가 뛰어가기 시작했다.
마크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야! 어디가!”
“버나드를 데려올거예요!”
“말이 되는 소리를 해! 너 혼자 가서 뭘 어쩌겠다고!”

말하는 사이 데보라는 이미 멀리 사라진 뒤였다.
마크는 한숨을 내쉬며 꿍얼거렸다.

“제까짓게 가봤자 뭘하겠어. 경비병들한테 쫓겨나기만 할테지. 쳇.”


***

“유명한 가문 출신인가요?”
“이 아이에 대해 아직 모르는게 많아. 어쩌면 부모를 알기도 전에 버려진 고아일 수도 있어.”
“뭐예요. 그럼 형편 없는 배경을 가졌단 소리잖아요?”

샤를은 버나드를 돌아보며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어머니, 우린 왕국에서 제일로 알아주는 아킨테 가문이라고요. 저렇게 근본 없는 사람을 제 호위기사로 쓸 수 없어요. 다른 영애들에게 보여주기도 창피하단 말이에요. 영애들은 저마다 잘 생기고 체격도 건장한 젊은 기사들을 호위기사로 두는데,  20살도 안되어보이는 소년은 대체 뭐예요? 그럼 하다못해 클레어 정도는 되야죠. 클레어는 집안이 평범하지만 천재 검사 소리를 듣고 있어 남들에게 자랑하기도 좋단 말이에요.”
“그거 아니? 최근 신전에서 발행한 책에 겸손이란 단어가 무려 90번이나 나온단다. ‘신은 겸손한 자를 구원하신다.’, ‘신은 고통을 주시어 겸손하게 만드신다.’, ‘신은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신다.’등등. 샤를, 네가 그 책을 필독하길 바란다.”
“전 따분한 책은 읽고 싶지 않아요.”

샤를이 갑자기 버나드를 향해 손가락질을 하며 소리쳤다.

“이 몸이랑 나이가 비슷해보이는 당신! 잘하는게 뭐죠? 정말 칼을 잘 다루나요? 그렇게까지 내 호위가 하고 싶어요?”
“……”

샤를은 대답을 기다렸으나 허사였다. 버나드는 입을 닫은 채 지그시 쳐다보기만할뿐 그녀와 대화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당신 벙어리인가요? 왜 말을 안하죠?”
“……”

침묵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샤를의 표정도 점점 굳어갔다.
분한듯 그녀의 손가락이 덜덜 떨렸다.

“지, 지금 날… 무시하나요? 감히 평민따위가?”
“……”
“하, 기가 막혀.”

그녀는 어이없다는듯 미셸을 바라봤다.

“어머니, 아주 버르장머리 없는 사내를 데려왔군요. 눈앞에서 소리쳐도  말에 꿈쩍도 안하는 사람인데 진정 이딴 사람한테 하나뿐인 딸의 호위를 맡기실건가요?”

미셸이 싱긋 웃으며 고백했다.

“내 말도 안듣는 중이란다.”

그 말에 샤를은 버나드를 더욱 못마땅하게 쳐다봤다.

“어머니까지 무시하다니 참으로 건방진 인간이군요. 이런 인간을 뭐하러 데려왔어요? 제 호위말고 축사 청소를 시켜요.”
“인내해야한다. 이 소년을 길들일 시간이 필요해. 값진 보석은 누구나 쉽게 손에 넣을 수 없기에 값진것이니까.”
“말을 안듣는 노예는 채찍으로 때리면 말을  듣는다는 소리가 있더군요.”

미셸은 웃으며 딸의 조언을 농담으로 받았다.

“참고 하도록 하마. 좌우간 무슨 일로 날 찾아왔니? 다들 떠날 채비를 하느라 바쁠텐데.”

버나드를 노려보던 샤를은 시선을 돌려 미셸을 마주보았다.

“아, 오늘 일정을 여쭤보려고 왔어요. 혹시 변경된게 있나해서요.”
“오늘 일정? 점심 먹고 떠나기로 했잖으냐.”
“갑자기 바람이 거세게 불고 날씨가 좋지 않아요. 서쪽에서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어요. 비가 곧 쏟아질 것 같은데 예정대로 출발하실건가요? 다들 이동을 꺼려하는 분위기예요.”
“비가 올 것 같다고? 아까까지만 해도 분명 날씨가 좋았는데 어떻게 된거지?”

미셸은 서둘러 밖에 나가보려는듯이 책상에서 일어나 외투를 걸치고 급히 피에르를 찾았다.

“피에르 거기 있느냐! 피에르!”
“예, 예! 여기 있습니다 대영주님!”

밖에서 대기중이던 피에르가 후다닥 안으로 뛰어들어왔다.

“잠시 나갔다 올테니 여기 묶여있는 소년을 잘 지켜보고 있거라. 금방 올거야.”
“예, 분부에 따르겠습니다.”

피에르는 공손히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였다.  앞으로 미셸이 지나쳤고 곧이어 샤를과 클레어가 뒤따랐다. 샤를은 피에르를 지나치며 그를 벌레보듯이 쳐다봤고, 클레어는 구석에 앉아있는 버나드를 돌아보며 흥미 어린 눈길을 보냈다.
그런식으로 세 사람이 막사를 떠나자 적막해진 가운데, 피에르가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그가 버나드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물었다.

“너, 넌 누구야…? 여긴 왜 온거지?”

그의 눈빛은 버나드를 무척 경계하고 있었다.

“내 일자리 뺏으러 온거지? 정말 그런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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