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2화 〉아킨테의 미셸, 눈치채다2 (22/200)



〈 22화 〉아킨테의 미셸, 눈치채다2

“허걱! 미, 미셸님! 이 누추한 곳에 어인일이신지요!”

마크는 허둥대며 바닥에 넙죽 엎드렸다. 그러나 미셸은 그에게 눈길 하나 주지않고 텐트 안에 앉아서 파이프 담배를 태우고 있는 멜라니아와 대화를 이어나갔다.

“조금전 멜라니아님을 쫓아 이곳까지온 추격자들과 만났습니다. 일단 그들을 돌려보내기는 했는데 어떤 연유로 왕궁을 떠나셨는지 궁금하군요. 여긴 느긋하게 이야기하기에는 장소가 협소하고 보는 눈이 많으니 실례가 안된다면 저와 같이 가시지 않겠습니까?”
“안간다고 뻐기면 어차피 밑에놈들을 시켜서라도 데려갈 생각 아니더냐? 낄낄.”
“그럴리가요. 16년전 왕궁에서 지낼때, 만약 멜라니아님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저는 아마 제 딸 샤를과 만나지 못했을 겁니다. 그 은혜를 어찌 잊겠습니까.”

미셸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16년전 출산하던때를 떠올렸다.
 당시 멜라니아가 약을 주지 않았더라면, 미셸과 샤를, 산모와 아기중 둘 중 한 명은 목숨을 잃어야했다.

“우리 모녀를 구해준 고마우신 분께 제가 설마 무례를 범할리가요.”
“그 어미 고생시킨 못난 딸년은  크고?”
“덕분에 무럭무럭 자라서 의젓한 숙녀가 되었답니다.”
“귀하게만 자라서 버릇 없는건 아닐까몰라. 쯔쯔.”
“어디 가서 모가 나지 않도록 예의범절도 착실히 잘 가르치고 있지요.”
“성질이야 제 어미 반만이라도 닮으면 다행이겠지.”

멜라니아는 고개를 끄덕끄덕 하더니 다시금 입을 열었다.

“난 어디 못가. 싸가지 없는 늑대가 오기전까지 아무데도 안갈거야. 그런줄 알거라.”
“싸가지 없는 늑대요? 아, 일행이 한명 있다고 들었는데 혹시 그 분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예, 예! 맞습니다 맞아요!”

내내 머리를 조아리고 있던 마크는 이때다 싶어 끼어들었다.

“저 할머니가 기다리는 아이는 바로 버나드라는 손주 녀석입지요!”

멜라니아가 발끈했다.

“손주 아냐! 구역질 나는 소리를 씨부리고 있어!”
“아유, 할머니 알았어요 알았어. 우리 서로 친한데 오늘따라 왜 이리 화를 내실까. 미셸님 보고 계신데… 하하… 참! 미셸님! 근데 제가 그림을 좀 잘 그립니다! 하하하! 귀족분들 초상화를 여러번 그려봤습죠! 미, 미셸님도 괜찮으시다면 제가 그, 그려드릴 수 있는……”

니콜라스가 다가와서 마크에게 다그치듯 말했다.

“대영주님께서 말씀중이시니 조용하게. 자네에게 용무가 있으면 말을 거실 것이야.”
“아, 아고! 죄, 죄송합니다! 제가 귀족분들만 보면 긴장을 해서 그만 실수를 했네요! 아하하하…”

미셸은 묵묵히 마크를 내려다보다가 다시 멜라니아에게 시선을 돌렸다.

“버나드와 아는 사이셨군요. 어제 저도 버나드와 만나봤습니다. 그 아이가 멜라니아님과 연이 있을줄은 미처 몰랐네요.”
“만나봤어? 낄낄. 그런데도 네 목이 온전히 붙어있구만. 붙어있어.”
“예?”
“지금까지 궁밖에서 그 녀석과 마주친 왕족들은 살아남지 못했거든. 여긴 궁밖인데 넌 살아있네.”

멜라니아는 파이프 담배를 입에 물고 뻐끔거리며 연기를 뱉어냈다.
미셸은 지그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 버나드라는 소년. 뭔가 있나보군요?”

다시 현재.
미셸은 적대적인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버나드를 담담히 응시했다.

“버나드. 너의 거짓말엔 더 이상 속지 않는단다. 물어볼 것이 많으니 얌전히 나를 따라오렴.”

버나드는 그녀의 말에 순순히 따를 생각이 없었다. 현재 그는 사냥꾼들에게 둘러싸인 굶주린 늑대같은 기분이었다. 주위를 경계하면서 데보라에게 속삭였다.

“나한테서 멀리 떨어져.”
“어쩔 생각이야?”
“나랑 같이 있으면 위험해. 데보라는 마크에게 가.”
“너는?”
“난 신경쓰지마. 어차피 우린 남남이잖아. 이후부턴 날 잊어.”
“버나드! 아까처럼 또 냉정한 소리를 하는거야?”
“난 지금까지 데보라와 마크를 방패막이로 이용했을뿐이야. 사실은 왕국의 기사들에게 쫓기는 인간이지. 데보라와 마크에게 특별한 감정따위 일절 갖고 있지 않아. 그럼 잘가.”
“꺄악! 버나드!”

버나드는 말을 마치자마자 그 즉시 데보라를 힘껏 밀쳐내고 가장 허술해 보이는 곳을 향해서 서둘러 뛰어가기 시작했다. 궁지에 몰린 이상 멜라니아고 뭐고 자신부터 살기로 결정했다. 멜라니아를 되찾는 일은 우선 이 위기를 돌파하고  후에 해도 늦지 않다. 그런 생각으로 무작정 기사들의 포위망을 뚫고 나가려 할때였다.
미셸이 단호히 외쳤다.

“던지세요!”

그녀의 명령이 떨어지자, 기사들은 신속히 올가미를 꺼내들었다. 그리고 여러명이 동시에 버나드를 향해 올가미를 던졌다. 동서남북 사방에서 날아온 밧줄이 도망치던 버나드의 목을 단숨에 휘감았다.

“커억!”

기사들은 밧줄을 팽팽히 잡아당겨 버나드를 움직이지 못하게 막았다. 목이 졸린 버나드의 숨이 서서히 멎어가고, 얼굴은 새파랗게 질려갔다. 그럼에도 버나드는 저항하려 안간힘을 쓰다가 결국 무릎을 끓고 주저앉고 말았다.

“그만! 줄을 느슨하게 풀어라!”

여럿이  사람인것 마냥 아킨테의 기사들의 동작은 매우 정갈하고 훌륭했다.
기사단장 니콜라스의 신속한 명령으로 버나드는 간신히 숨을 쉴 수 있었다.

“컥! 컥! 하악! 하악!”

미셸이 엎드린 채로 거친 숨을 몰아쉬는 그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난 네게 해를 끼칠 생각이 없단다. 말만 잘하면 널 도와줄 수도 있어.”

하지만 버나드의 반응은 여전히 사나웠다. 그는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 늑대처럼 살기 어린 눈빛을 빛내며, 미셸이 가까이 다가오기를 기다리다가 지근거리에 이르자 돌연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버나드가 미셸의 목을 움켜쥐려는 듯이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을때 기사들이 잽싸게 올가미를 끌어당겼다.

“다시 당겨!”
“워! 워!”
“멈추지 말고 계속 조여!”
“크윽!”

버나드는 재차 숨이 막혀오며 목을 죄는 밧줄을 붙잡고 발버둥쳤다. 손톱으로 올가미를 쥐어뜯었지만 기사들이 단단히 붙잡고 있는 올가미 아래로 손가락 하나 넣을  없었다. 마녀 멜라니아는 그 광경을 보며 낄낄 웃음을 터뜨렸고, 마크는 보통 심각한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침을 꼴깍 삼킨   자리에서 꼼짝없이 얼어버렸으며, 데보라는 니콜라스의 가슴을 세차게 때리며 버나드를 풀어달라고 역정을 내며 항의했다.

“자, 그만!”

기사들은 마침내 버나드의 눈깔이 뒤집히고 기절 직전까지 갔을 때 비로소 올가미를 느슨하게 풀어주었다.
버나드는 바닥에 털썩 쓰러지더니 드러누운 채로 힘없이 바둥거렸다. 의식이 또렷하지 못하고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미셸이 그의 머리맡에서 발걸음을 멈추며 무심한 표정으로 내려다보았다.

“더 이상의 저항은 무의미하니 항복하거라, 밤의 늑대여. 앞서 멜라니아님에게 듣기로 너희 집단의 정확한 명칭은 ‘왕을 위해 미친 사자를 사냥하는 늑대들(Wolves hunting crazy lions for king)’이라지? 나도 오늘부터 늑대 한마리를 길러봐야겠다. 요즘처럼 흉흉한 시기에 매우 쓸만할 것 같아.”


***

반나절간 밖에 나가있던 미셸이 막사로 돌아온 소리가 들렀다.
 지키는 개처럼 침실에만 처박혀있던 피에르는 발걸음 소리를 듣고 얼른 밖으로 뛰어나갔다.
막사의 외실로 나가자 미셸을 비롯해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총장, 집사, 기사단장, 기사들. 그리고 그 사람들속에 처음 보는 소년이 섞여있었다.

‘어?’

기사들에게 끌려온 소년의 첫인상은 특이했다.
모든 것을 내려놓은 듯 자포자기한 표정은 둘째치고 목이 개목걸이로 결박된 채 굵은 사슬로된 개줄이 채워져 있었다.

피에르는 의아했다.
복장으로 보아 노예 같은데 미셸님은 어째서 노예를 감옥이 아닌 이곳에 데려왔을까? 본인의 침실이 있는 곳인데. 짧게 고민하던 그는 이내 눈이 커졌다.

‘성노예로 삼으려고?’

그때 미셸이 말을 걸었다.

“피에르,  잠시 밖에 나가 있거라.”
“예? 알, 알겠습니다.”

피에르는 가볍게 묵례를 한뒤 곧장 막사를 빠져나갔다. 갑자기 찬밥 신세가 된 그는 홀로 막사 주변을 맴돌면서 깊은 고민에 빠졌다.

‘설마 미셸님… 날 버리고  자식을 몸종으로 쓰실 계획인가…?’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안, 안돼…! 어떻게 해서 얻는 기회인데! 미셸님께 버려지면 난 뭘하고 살아야 하지? 안돼!’

잠깐 봤을뿐이지만 인상적이었던 소년의 외모를 상기했다.

‘녀석은 남성미 넘치고 남자답게 생기긴 했지만, 나처럼 아름답게 생기지 못했어. 미셸님의 취향에 어울리지 않아. 미셸님은 여자처럼 생긴 외모의 남자를 좋아하지. 그러니 절대 그놈은 아닐거야. 절대!’

피에르가 밖에서 새로운 얼굴의 등장으로 쫓겨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며 온갖 망상에 시달리는 동안, 막사안에서는 기사들이 바닥에 말뚝을 박고 그곳에 버나드의 목과 연결된 쇠줄을 고정시켰다.
기사 한명이 바닥에 고정된 말뚝을 힘껏 흔들어보더니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 정도면 오우거가 와도 못 뽑을겁니다.”

미셸이 팔짱을 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잘했어요. 다들 나가보세요. 사만다랑 니콜라스 경도 나갔다가 부르면 오세요.”

총장 사만다와 기사단장 니콜라스가 그녀에게 다가갔다.

“둘만 있으면 위험하지 않을까요?”
“저만이라도 여기 남게 해주십시오. 만약을 대비해 제가 지켜보는 것이 좋을  같습니다.”
“내가 소년 하나 못당할까봐서요? 두 사람  나를 너무 연약한 여자 취급하는군요. 괜찮습니다. 조용한 분위기속에서 대화해야 저 아이도 마음을 열기 쉬울겁니다.”

미셸이 자신있게 말하자 사만다는 바닥에 웅크리고 앉아있는 버나드를 한번 돌아본 후에 다시 미셸과 시선을 마주치며 묵례를 한뒤 밖으로 나갔다. 니콜라스 또한 버나드를 쳐다보며 ‘얌전히 있어야한다’ 라고 주의를 준뒤 그녀의 뒤를 따라나갔다.
이어서 집사 니슨과 기사들까지 모두 밖으로 나가자 미셸은 조용히 자신의 책상으로 가서 앉았다. 그녀는 손에 쥐고 있던 개목걸이의 열쇠를 앉으면서 책상 위에 던져놓았다. 버나드는 담담한 시선으로  모습을 지켜보았다.

“밤의 늑대들이 해체 되었다고 들었단다. 그 이유를 멜라니아에게 물었더니 그녀는 웃기만 하며 알려주지 않더구나.”

미셸은 책상에서,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있는 버나드를 내려다보며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을 걸어왔다.

“넌 당연히 이유를 알겠지? 밤의 늑대들 소속이니까 말이야.”
“……”

미셸은 말을 마친 후 잠시 버나드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러나 버나드는 태연한 눈빛으로 그녀를 빤히 바라보기만 할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침묵의 시간이 길어지자 미셸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나와 말하기 싫으니?”
“……”
“아니면 왕을 제외한 다른 왕족들과는 말하지 말라고 전하가 가르친거니?”
“……”
“때묻지 않은 순진한 표정으로  해맑게 쳐다봐도 소용없어. 연기하는거지? 귀엽게 보이면 측은한 감정이 들까봐? 그러면서 속으로는 많이 무섭고 혼란스러울 것이란걸 잘 안다.”
“……”

미셸의 추측은 어느 정도 맞았다. 버나드는 담담하게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으나 속으로는 걱정하며 멜라니아를 떠올리고 있었다. 멜라니아가 미셸에게 얼마나 얘기해줬을까? 자신이 밤의 늑대들의 수장이었던 것을 털어놨을까? 그리고 몸이 작아진 이야기도 했을까? 또 레아에 대한 얘기도 했으려나?

“난 네편이란다. 네가 내게 충성을 맹세한다면 지금 당장 목걸이를 풀어줄 수 있어. ‘당신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습니다’ 이 한마디면 족해. 싫으냐?”
“……”

그녀가 검지 손가락을 흔들어보였다.

“그러고보니 널 소유하려는 이유에 대한 설명을 안했군. 별 것 없다. 멜라니아가 말해주길 밤의 늑대들은 불미스러운 일로 강제 해체를 당했고, 그 단원이었던 자들은 전국 각지에 뿔뿔이 흩어져 황금사슴 기사단 소속인 자들에게 쫓기고 있는 중이라고 하더구나. 따라서 넌 지금 돌아갈 곳이 없는 셈이잖느냐. 그렇지?”
“……”
“버려진 늑대 한마리 주워다  보살펴줄 수 있어. 너만 동의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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