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화 〉신선한 물고기, 데보라3
버나드는 재차 당차게 그녀를 졸랐지만, 데보라는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면서도 계속 뜸을 들였다.
“욕망의 악마한테 지배당한 상태에서 누나가 눈치도 없이 알몸으로 있는 바람에 많이 힘들었겠구나. 나 때문에 그렇게 발기하다니… 면목이 없네… 미안해요, 누나가 눈치를 못채서…”
그녀가 자꾸 위로의 말로 시간을 끄는 것 같아 버나드는 답답하고 초조했다. 언제나 여유로운 태도를 가진 데보라는 평소에 말하는게 좀 느린편이지만 지금은 더 느린 것처럼 보여 환장할 것 같았다.
따라서 가장 확실하고 간단한 방법을 쓰기로 했다. 세상 누구나 좋아하는 것을 주면 된다. 버나드는 머릿속에 든 생각을 여과없이 그대로 뱉어냈다.
“그럼 데보라랑 하려면 얼마면 돼? 돈 줄게.”
“남자는 흥분한걸 진정시키려면 사정해야 하는거지? 알았어. 누나가 일단은 손으로… 뭐?”
서로 동시에 말을 뱉어냈고, 데보라는 버나드의 말을 듣자마자 귀를 의심했다.
“방금 뭐라고 했니?”
정색하며 묻는 그녀의 질문에 버나드는 당당하게 대답했다.
“전에 종종 찾던 창녀는 한차례 행위에 금화 1냥씩을 받았어. 데보라는 얼마를 원해? 만약 어제 미셸님에게 받은걸 전부 원한다면 다 주도록 하지.”
그가 말을 마치자 갑자기 데보라의 주위에 음산한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하하하……!”
데보라는 실성한듯이 웃으면서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더니, 버나드를 내려다보며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버나드? 잘 들으렴. 누나는 말이지? 돈을 받고 몸을 파는 창녀가 아니란다?”
말을 마침과 동시에 그녀는 팔꿈치로 버나드의 얼굴을 강하게 후려쳤다.
퍼억!
“컥!”
기습적으로 턱을 얻어맞은 버나드는 그대로 뒤로 나자빠지면서 정신을 잃었고 그의 몸은 물속으로 천천히 가라앉았다.
“꼬르륵……!”
보글보글보글.
***
“벌써 지친거냐? 일어나라.”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렀다.
“아직 끝나지 않았어. 어서 일어나.”
익숙한 음성이다.
“오늘 내로 우올려베기를 끝내기로 했잖냐. 빨리 일어나라.”
아아, 이 목소리는 그 사람인가.
검술을 배우던 시기인가 보다.
“나의 주특기인 우올려베기는 배우기 매우 까다롭다. 네 체격으로는 힘들지도 모르지. 하지만 네가 원했으니 가르쳐주마. 자, 시간이 없다. 어서 일어나.”
목소리의 주인이 손을 내밀었다. 버나드는 흐릿한 시야속에서 그의 손을 맞잡았다.
그 순간 현실로 돌아왔다.
눈을 뜨니 데보라가 걱정스러운 안색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데, 데보라…?”
“많이 아팠어? 미안해. 힘을 조금 뺀다는게 너무 세게 쳤나봐.”
“여긴 어디야? 아… 데보라한테 맞았었지…”
“기절시킬 정도로 때릴 생각은 없었어. 누나도 깜짝 놀랐단다.”
데보라는 버나드의 얼굴을 끌어안고 연신 미안하다는 말을 전했고, 버나드는 괜찮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이 덜깨 멍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니 아직 계곡이었으며 데보라가 옷을 입혀준건지 아까 빨래했던 옷을 입은 채였다.
옷이 마르지 않아 자갈밭 위에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그럼에도 갈아입을 옷이 없는 걸 어쩌랴. 정신을 차린 버나드는 곧바로 데보라와 함께 계곡을 떠났다.
“악마가 지배하던 성욕은 사라진거야?”
“음, 그런것 같아. 지금은 괜찮아졌어. 평온해.”
버나드는 나란히 길을 걸어가면서 아픈 턱을 어루만졌다. 한대 얻어 맞고 나니 한때 불타올랐던 욕정이 단숨에 사그라들었는지 다시 솟구칠 낌새조차 안보였다.
‘아까의 욕정은 역시 악마 때문이었나보군. 이제 악마가 떨어져 나간 것 같으니 됐어.’
그렇게 생각하며 그는 안심했다.
하지만 데보라는 계속 근심어린 표정으로 버나드를 바라봤다.
“나중에 또 악마가 찾아오면 누나한테 말해줘. 어떻게든 구해줄테니까.”
“고마워. 그때도 잘 부탁해.”
“버나드를 위해서라면 누나 뭐든지 할테니까.”
“응.”
데보라는 짐짓 서글픈 표정을 지었다.
“버나드 그거아니? 우리가 만난 악마는 정말 나쁜 악마였단다. 누나를 글쎄 창녀 취급을 하지 뭐니.”
“그, 그래?”
버나드는 살짝 당황했다. 그런 취급을 한건 자신의 진심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악마가 아니라 자신의 의지로 내뱉은 말 같은데… 고개를 갸웃하던 그는 금세 생각을 지워버렸다. 뭐 이미 다 끝난 일이니까.
어쨌든 간에,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며 길을 걷던 두 사람이 플랫폼에 거의 다다랐을 무렵이었다.
“멈춰.”
버나드가 급하게 발걸음을 멈추더니 돌연 데보라의 손을 붙잡고 주변 사물 뒤로 재빨리 몸을 숨겼다.
무심코 이끌려온 데보라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그를 바라봤다.
“왜 그래?”
“블라쉬야.”
“블라쉬? 흐음, 어디선가 들어본 이름인데…”
“어제 데보라의 엉덩이를 만진 놈.”
“아!”
데보라는 손뼉을 마주치더니 즉시 고개만 내밀어 플랫폼의 입구쪽을 슬며시 쳐다보았다.
문밖에서 대기 중인 세 명의 기사가 보였다.
말을 탄 세 사람은 전부 중무장에 화려한 갑옷을 입고 있었다.
“아킨테의 영주! 미셸님께서 나오십니다!”
경비병이 외치는 소리와 함께 플랫폼의 문이 활짝 열리며 그 안에서 아킨테의 미셸이 가신들을 대동하고 걸어나왔다.
그 광경을 보고 버나드는 혀를 찼다.
“아무래도 블라쉬 녀석이 냄새를 맡은 모양이야. 야단났군.”
***
“날 찾아온게 당신입니까?”
“신의 축복을 받은 광활한 땅의 주인, 아킨테의 미셸님을 만나뵙게 되어 실로 가문의 영광입니다. 그런데 전하께서 보낸 신하를 문밖에 세워두는 경우는 처음보았습니다.”
“시기가 시기라서 말이지요.”
블라쉬와 마주보고 선 미셸이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그녀는 오늘 블라쉬란 사내와 처음 만났고, 그에 대해 아무런 정보가 없었다. 아는 것이라고는 오직 그의 가슴에 새겨진 왕가의 문장뿐이었다.
그리고 왕가의 문장인 걷는 사자 옆에 나란히 다른 문장 하나가 더 새겨져 있었는데 뿔 달린 사슴 모양이었다.
‘왕가 사람인건 틀림없어. 하지만 저 문장은 처음보는 것인데… 테두리 모양을 보면 가문의 것은 아니고 기사단인가?’
그녀가 수년전 궁을 나온 이후에 새로 창립된 기사단이라면 잘 모를만도 했다.
“그래서 무슨 용무로 찾아온 겁니까?”
“도망친 쥐 새끼 한마리와 늙은 마녀를 찾고 있습니다. 혹시 멜라니아라는 마녀를 아십니까? 예전에 궁에서 지내셨으니 아마 아시겠지요.”
“당신의 말대로 오래전 만나본 적은 있으나 얼굴이 기억나리라곤 기대하지 마세요. 10년이 넘은 일이니.”
미셸은 무뚝뚝하게 말하고 나서 재차 차갑게 말을 이었다.
“그런데 당신, 왕가의 사람이라 하나 본인이 누군지조차 소개를 안하는 경우는 나야말로 처음보았습니다.”
“여기 나오시기 전에 왕가의 중신이라고 병사를 통해 미리 전달해드리지 않았습니까?”
“그게 다 인가요?”
블라쉬는 미소를 지은 채 뒤에 있는 부하들, 체더와 와빈을 한번씩 돌아보며 피식 웃더니 말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소개가 늦어서 죄송합니다. 저는 용병 카반트의 아들 블라쉬. 왕실에서의 위치는 해군의 제독, 육군의 야전사령관, 이들을 능가하는 그 이상의 지위를 가지고 있는 대신입니다.”
“어떤 일을 주로 하지요?”
“규정상 밝힐 수 없습니다. 간단히 전하께서 보냈다 생각하시면 됩니다. 제가 하는 일은 전하가 하셔야 하는 일을 대신하는 것이거든요.”
“밤의 늑대들인가?”
미셸의 입에서 불쑥 불쾌한 단어가 튀어나오자 블라쉬가 심드렁한 표정으로 빤히 그녀를 쳐다보더니 입을 열었다.
“밤의 늑대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사라지고 당신들이 들어왔나보군요.”
미셸이 손으로 블라쉬의 가슴에 새겨진 황금사슴 문양을 가리켰다.
블라쉬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감이 대단하십니다.”
“그렇게 보이더군요.”
미셸은 비꼬는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육해군의 마스터들을 능가하는 지위를 가진 블라쉬 경이 나를 찾아온 이유는 내 야영지 안에 도망친 쥐 새끼 한마리와 마녀 멜라니아가 숨어있다고 추정되서 입니까?”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아킨테의 미셸님을 오늘 처음 뵀는데 이해가 상당히 빠르고 영리하신 분이군요. 존경스럽습니다.”
“그래서 나의 야영지를 수색하고 싶다?”
블라쉬는 한손을 가슴에 대고 깍듯이 허리를 굽히며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정중히 부탁드립니다.”
미셸이 코웃음쳤다.
“그건 불가능합니다.”
그녀의 말에 블라쉬의 미소가 즉시 사라졌다.
“어째서죠?”
“내가 바로 아킨테의 미셸이니까요. 누구도 내 야영지를 함부로 들쑤실 수 없습니다.”
“전 전하의 명령을 받고온 대리인입니다.”
“대리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전하의 노여움을 사고 싶으신 겁니까? 도망친 쥐새끼는 왕실에 큰 해를 끼친 중대한 범죄자입니다.”
미셸은 말을 돌렸다.
“그 쥐새끼 라는 사람의 정체가 뭐죠? 그것부터 알고 싶군요.”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귀족인가요?”
“실례지만, 그것도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 대외비거든요. 후후.”
왕족살해자란 호칭을 가진 버나드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지는 순간, 왕에게 적대적 행보를 보이는 왕족을 살해하기 위해 왕실이 따로 비밀조직을 두고 있었다는게 발각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프레드릭왕만 곤란한 입장에 처하게 된다.
미셸은 언성을 높였다.
“귀족인지조차 알려줄 수 없다고요? 그럼 더더욱 내 야영지에 들어올 수 없습니다. 오히려 당신들이 수상하군요. 제 2차 걷는 사자 전쟁이 시작된건 아시겠죠? 우린 지금 심란합니다. 그런 와중에 당신들 때문에 더욱 혼란해질 수는 없어요. 이만 돌아가주길 바랍니다.”
블라쉬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조금전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왕의 대리인, 그 말은 즉 상대가 대영주라 해도 내가 원하는걸 강제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안타깝지만 왕의 효력은 우리 아킨테에서는 통하지 않습니다.”
“현재 당신과 당신 기사들이 밟고 있는 땅은 전하의 땅입니다. 여긴 아킨테가 아니니 말씀을 조심하시는게 좋으실 겁니다. 자칫 고향땅을 영영 못 밟을지도 모르니까요.”
“협박하는 겁니까? 좋습니다. 그럼 어디 한번 해보시죠.”
미셸이 체포할테면 체포해보라는듯이 당당하게 앞으로 나섰다.
“같이 궁으로 가서 전하를 만납시다. 전하 앞에서 함께 따지자고요. 난 전하께 이리 말씀드리겠습니다. ‘당신의 부하가 옛 연인에게 협박을 서슴지 않으며 버릇없이 굴었다고요.’블라쉬 경? 내 발언에 대해 당신도 동의하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