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화 〉신선한 물고기, 데보라1
그는 다시 버나드를 쳐다봤다.
“진짜 나 반 주게?”
“버나드! 오라버니 주지 말고 니가 다 갖고 있으렴.”
“야! 넌 조용히 해!”
“오라버니는 분명 딴곳에 쓸게 뻔하단다?”
“난 그래도 계집질이랑 도박은 안해. 유명해지고 싶어서 홍보하는데 돈 쓰다 빚질뿐이지.”
“마크가 알아서 하겠지.”
버나드는 돈 주머니에 손을 넣어서 마크에게 절반을 나눠준다음 데보라에게도 일정 금액을 선물했다.
“이건 아까 칼 사준거에 대한 보답.”
“어머, 나도 주는 거야? 고마워라.”
“이제보니 복덩이를 데리고 있었네! 으히히히!”
마크는 돈을 받더니 좋아죽겠단다. 처음 만났을때부터 버나드에게 계속 잔소리를 늘어놓던 그가 돈을 받고나서는 갑자기 사람이 친절해졌다.
“버나드! 하루 종일 돌아다니느라 피곤했을텐데 얼른 텐트에 들어가서 푹 셔라!”
“마크는 뭐하게?”
“난 야영지 그림 멋지게 그려서 아킨테 기사들이나 미셸님에게 팔아볼 생각이야. 또 아냐? 고가에 사줄지. 아무튼 그림 그리는 일에 집중할테니까 너도 편히 너 할거해. 데보라는 빨리 밥 좀 지어주고.”
데보라는 텐트 앞에 놓인 짐들을 이리저리 훑어보더니 아쉬워했다.
“버나드한테 돈 받을줄 알았으면 여기올때 뭐 좀 사올걸 그랬네. 우리 먹을 거라고는 지금 콩하고 양파 밖에 없는데.”
“됐어, 됐어. 저녁이니까 대충 먹어. 내일 점심때나 거하게 먹으면 되지.”
“오라버니, 그럴거면 아싸리 간단하게 흑빵이나 먹을까요?”
“마음대로해.”
마크와 데보라가 저녁 메뉴를 상의하는 동안 버나드는 텐트 입구를 가린 천을 열어젖혔다. 허리를 숙이고 들어가야 하는 높이에 바닥 면적은 세사람이 나란히 누우면 불편한 크기였다. 불빛 하나 없이 깜깜한 그 안에서 멜라니아가 다리를 쭉 뻗고 끙끙거리는 신음을 내며 자고 있었다.
마크가 가까이 다가와서 속삭였다.
“야, 너네 할머니 왜케 몸에서 냄새가 나냐?”
“냄새?”
“막 동물 썩은내하고 이상한 잡내 같은게 섞여서 나는데 아주 미치겄더라. 하루종일 같이 있는데 환장하는줄 알았다니깐? 니가 손자니까 말 좀 잘해서 근처 계곡에 가서 씻겨드려봐. 여기서 조금 걸어가면 계곡물있다더라.”
“알았어.”
버나드가 가볍게 대답하고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마크가 다시 불러세웠다.
“자, 잠깐만. 혹시 너희 할머니… 하, 나참… 야야, 이런 말하기는 좀 그렇지만. 음… 그러니까 기분 나쁠 수도 있겠지만 그냥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거야. 그냥, 진짜 그냥. 아까 짐 정리하다가 할머니 짐에서 우연히 본게 있는데, 그러니까 서운해 하지마라? 즉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마녀 아니냐고?
“허걱!”
“마녀 맞아.”
버나드가 웃으며 확인시켜주자 마크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문이 막혀버렸다.
“……!”
“걱정마. 마크랑 데보라에게 해를 끼치진 않을테니까. 만약에 해를 끼치면 내가 대신 때려줄게.”
버나드는 그런 말을 남겨놓고 깜깜한 텐트 안으로 들어갔다.
텐트는 높이가 낮기 때문에 허리를 숙이고 들어가서 자리에 앉았다. 그러고는 끄응 거리는 신음을 내며 자고 있는 멜라니아의 다리를 발로 툭툭 찼다.
“일어나.”
툭, 툭.
“일어나라고 멜라니아.”
“으음… 누구냐…?”
“나다 버나드.”
“건드리지 마라, 이 몸은 지금 피곤하다. 으음냐…”
버나드는 그녀의 종아리를 걷어차다시피 약간 세게 찼다.
“아얏! 다리 아프다 이놈아!”
“네 짐을 전부 불태워버리는 수가 있어.”
“못된 놈의 늑대 새끼.”
멜라니아는 누운 채로 버나드를 돌아봤다.
“기껏 살려줬더니 은혜도 모르는 늑대구나.”
“그걸 묻고 싶었어. 왜 날 도와준거냐? 증오했으면서.”
“내가 순순히 알려줄 것 같으냐?”
마녀가 낮게 낄낄거리며 버나드를 약올렸다.
“알고 싶으면 대가가 필요하니라.”
버나드는 마녀의 태도에 화가 나지 않았다. 그저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그녀가 이렇게 나올줄 진작에 알고 있었으니까. 그의 목소리는 침착했다.
“짐작가는건 있어. 레아가 부탁한 것이냐?”
“호오, 제법이구나. 영리해, 영리해.”
“그녀가 또 무슨 말을 했지?”
“넌 레아를 죽였어.”
마녀는 엉뚱한 소리를 뱉었다.
“니가 레아를 죽인거야.”
그 말에 버나드는 다소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녀가 날 죽였어. 레아가 날 망가뜨렸다고.”
“그 반대다. 네놈이 처신을 똑바로 했다면 레아가 처형당할 일도 없었을게다. 너도 예상하고 있었지 않느냐. 레아가 그 잡년 왕비와 개새끼인 왕세자를 죽이리란 것을.”
“시끄러워.”
버나드는 더 이상 말을 이어가기가 싫어졌다.
“잠이나 쳐자라.”
“낄낄, 등신 같은 놈. 지가 불리하니까 잠이나 쳐자래. 낄낄… 으음, 음냐…”
멜라니아는 누운 채로 등을 돌리며 금세 곯아 떨어졌다.
버나드는 한동안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레아 때문에 죽고, 레아 덕분에 살고, 먼저 세상을 떠난 그녀는 악마인가 천사인가…’
문득 무언가 떠오른 버나드는 다시금 멜라니아의 종아리를 살짝 걷어찼다.
탁!
다리에 뼈밖에 없어 막대기를 차는 기분이었다.
“일어나봐.”
멜라니아가 움찔하면서 깨어나더니 짜증을 냈다.
“망할 늑대놈이 병신이었을때 흠씬 두들겨 팼어야 하는데 저 못된 놈 같으니라고 에구 쯔쯔…!”
“이것만 말해라. 원래의 내 몸으로 돌아가려면 어떡해야하지? 넌 방법을 알고 있겠지?”
“누구 좋으라고 알려줘? 공짜로 알 생각은 하들 말아라. 정 알고 싶으면 내가 원하는걸 들어주거라. 네놈이 내 소원을 들어줄때마다 하나씩 알려주마.”
“난 거래를 제안하는게 아니야. 순순히 대답하지 않으면 이 자리에서 널 죽일 수도 있어. 소년이 됐다고 우습게 보지마. 노망난 할멈 하나쯤은 거뜬하니까.”
“낄낄, 누가 무서워할줄 알고? 레아에 대한 이야기와 몸이 원래대로 돌아가는 방법에 대해 듣고 싶지 않은가 보지? 내가 너보다 나이를 먹어도 수십살은 더 처먹었다 이 멍청한 늑대야. 감히 누굴 협박하는 것이냐.”
버나드는 발끈하며 마녀를 밤새도록 괴롭히고 싶었으나 체력적으로 그럴 여력이 없었다. 갑자기 큰 피로감이 덮친 것이다. 그 때문에 더는 목소리를 내기가 힘들었다. 지난 한달 내내 감옥에만 갇혀있다가 오늘 겨우 나왔다. 겨우 나온 상태에서 또 하루 종일 돌아다녔으니 겹겹이 쌓인 그 피로감이란 이루말할 수 없었다.
어느 순간 병든 닭처럼 졸고 있을때, 입구의 천이 열리며 데보라가 얼굴을 내밀었다.
“버나드~ 밥 먹으렴. 어? 자고 있었어? 자려면 밥 먹고 자~ 얼른 할머니 깨워. 할머니 식사하세요~”
졸린 기분으로 간신히 저녁식사를 마치고, 버나드는 텐트 밖에서 모포를 덮고 눕자마자 그대로 의식을 잃었다. 잔인한 운명을 원망하거나 근심할 새도 없이 죽은 듯이 잠들었다. 그와 멀리 떨어진 곳에선 어떤 음유시인이 감미로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날밤 버나드는 꿈을 꾸었다. 레아가 아닌 데보라가 꿈에 나왔다. 안지 하루도 안지난 데보라라니… 그건 좋은 꿈이 아니었다. 아니, 좋았지만 의아하고 당황스러운 꿈이었다. 꿈에 나온 데보라는 아낌없이 모두 주었다. 그녀의 입술, 그녀의 젖가슴, 그녀의 은밀한 곳. 버나드는 숨을 헐떡이며 데보라를 착실히 정복해 나아갔다. 그리고 마침내 절정의 순간에 치달았을때, 버나드는 꿈에서 깨어났다.
“이, 이럴수가! 어, 어째서!?”
다음날 아침. 버나드는 자신의 손에 묻은 우윳빛깔 끈적끈적한 액체를 보고 기겁하며 상체를 벌떡 일으켜 세웠다. 조금전, 잠결에 무심코 바지속에 손을 넣어 가랑이 사이를 북북 긁다가, 속옷안이 축축하길래 정신이 퍼득 들어 확인해보니 그것은 바로 정액이었다.
“모, 몽정!? 서, 설마 몸이 작아진 것이 원인인가……? 십대 소년이라는 성욕이 강한 시기라서……?”
“으음. 버나드 일어났어?”
데보라가 졸린 눈을 비비며 텐트 밖으로 나오자 버나드는 크게 당황하며 정액이 묻은 손을 급히 뒤로 숨겼다.
“어, 어! 일어났어!”
“왜 그렇게 놀래? 무슨 일 있는거야? 하아암.”
“아, 아무것도!”
평소 같으면 어떠한 상황이라도 버나드는 침착했겠지만 몽정의 경우에는 달랐다. 왕국 내 대부분의 신전에서 알리길, 남성의 몽정은 신에 대한 믿음이 부족한 사람에게만 오는 것이며 그런 사람들이 잠들었을때 여악마가 유혹해서 남긴 아주 불결한 결과물이라고 정의하였다.
그래서 대부분의 백성들은 자신의 아버지 혹은 남편이나 연인, 오빠, 남동생 등등, 남성이 만약 몽정을 했다면 신에 대한 믿음이 부족한 탓에 간밤에 여악마가 다녀간 것이라며 불결하게 취급했다. 심지어는 몽정을 한뒤 며칠내에 악마가 와서 영혼을 빼앗아갈 것이라는 속설도 돌았다.
따라서 버나드는 몽정을 한게 당황스럽고 창피했던게 아니라, 자신의 믿음이 약해 간밤에 여악마가 다녀갔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꿈속에 데보라가 등장해 그녀와 정사를 한 것도 그렇고, 분명 간밤에 짓꿎은 여악마가 나타나 자신을 더럽힌 것이 틀림없다고 여겼다.
‘조만간 아무 신전이든 방문해서 신께 기도를 올려야겠어! 제기랄!’
텐트 밖에서 같이 잤던 마크는 벌써 일어나 있었다. 나무통에 담긴 물로 세수를 하고 온 그가 흰천으로 얼굴을 닦으며 가까이 다가왔다.
“어제 기사단장 니콜라스 님이 말한거 들었지? 오늘 점심먹고 떠날거래. 다들 아침 먹으면 짐쌀 준비해라.”
“오라버니, 버나드가 이상해요.”
“왜?”
“아침부터 목소리가 너무 큰게 수상하달까요?”
“그게 뭐가 이상해? 클수도 있는거지.”
“마, 맞아! 클수도 있지 뭘 그래! 하하, 하하하…”
버나드의 얼굴이 급 빨개진 가운데, 새벽부터 깨어나 주변 노점들을 기웃거리던 멜라니아가 근처로 다가오더니 코를 킁킁 거렸다.
“어디선가 수컷의 정액 냄새가 나는구나. 마녀의 코는 못속이지. 낄낄. 진하디 진한 향을 보니 미약을 만드는 재료에 넣으면 그만이겠어. 아들을 낳게 해주는 수컷의 기운이 아주 강력해.”
멜라니아는 유심히 주변을 둘러보더니 돌연 버나드를 지팡이로 가리켰다.
“너구나! 늑대!”
“아, 아니다! 헛소리 하지마 이 할망구야!”
“뭐가 아니야. 날 속일 순 없다, 낄낄.”
“닥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