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화 〉어렴풋한 칼의 기억, 가슴베기3
그리고…
대각선으로 잘린 훈련용 허수아비의 상체가 스르르 미끄러지다 바닥으로 툭 하고 떨어졌다.
“헉, 헉! 해, 해냈다…!”
버나드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환희에 가득차 있었다.
“일전에 전하가 가르쳐준 가슴베기…! 되찾았어!”
주먹을 불끈 쥐는 그를 뒤에서 지켜보던 여기사는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믿을 수가 없어…”
기이한 광경이었다.
방금 전 버나드가 선보인 기술은 소년이 발휘한 재주라고 하기에는 놀랍도록 깔끔했고 무섭도록 파괴력이 있었다. 심지어 목검에 검기가 스며들다니? 목검으로 훈련용 허수아비를 이등분하다니 성인조차 하기 힘든 일을 소년이 어떻게 해냈단 말인가. 어릴적부터 검술에 재능있는 천재가 아니고서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그 천재를 여기사는 여태 살아오면서 단 한번도 본적이 없다. 아니, 지금에서야 보고만 것일까. 그래서 더욱 신기하고 놀라웠다.
‘저 소년의 정체는 뭘까?’
정말 검술에 재능이 있는 천재일까? 아니면 수백년 먹은 드워프? 혹은 그외 이종족?
차라리 수백살 먹은 이종족이었으면 좋겠다. 여기사는 자기도 모르게 질투심이 솟구쳤다. 솔직히 자신은 훈련용 허수아비를 목검으로 자를만한 능력이 없다. 그런데 그것을 자신보다 어린 소년이 해내다니 부럽고 샘이났다.
“저기……”
여기사가 버나드를 향해 한발짝 내딛는 순간, 누군가 그녀를 재빠르게 지나치며 바람을 일으켰다. 여기사의 귓가에 흘러내린 금발 머리카락이 사부작 휘날렸다.
“버나드!”
데보라는 한달음에 달려가서 버나드를 와락 끌어안고 감탄한 표정을 지었다.
“너무 멋있었어! 칼 쓰는건 언제 배운거야? 어떻게 배웠어? 응? 정말 대단해!”
“컥, 컥! 데, 데보라! 수, 숨 막히니까 세게 껴안지마! 어푸!”
평소에 사교성이 없던 여기사는 다가갈 생각을 순순히 포기하며 지그시 지켜보기만 했다. 처음에 버나드에게 말을 걸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소년이었기에 그나마 편했다. 하지만 어른이 그 곁에 있으면 사정이 다르다. 다가가 말을 걸기가 쉽지 않다.
얼마 지나지 않아 훈련장을 나선 데보라와 그녀의 품에 안겨 거의 끌려가다시피 떠나는 버나드를 뒤에서 조용히 바라보며 그녀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친누나 일까…? 이름이… 버나드? 버나…드?”
***
고풍스러운 드레스를 입은 미셸의 아름다운 가슴 위에서 아킨테의 주인임을 상징하는 붉은 목걸이가 연신 흔들거렸다.
그녀가 회의 막사 안으로 들어서자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던 가신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묵례를 건넸다.
“그 소년은 잘 만나고 오셨는지요?”
영주의 비서 및 주치의 역할까지 맡은 ‘영지 총장’사만다가 웃으며 물었다. 영주가 여성이었기에, 신체구조가 다른 남자들은 신경써줄 수 없는 섬세한 부분이 있어 영주를 바로 곁에서 보좌하는 총장직을 미셸의 친우인 그녀가 갖게 되었다.
“응, 착하더구나.”
“특별한건 없었나요?”
“아무것도. 아이가 무척 내성적이었어. 대화를 나누기가 조금 힘들었지. 얘기를 들어보니 평범한 삶을 살아왔던 것 같아. 자, 모두 제자리에 앉으세요.”
미셸이 앉으며 손짓하자 가신들이 모두 제자리에 앉았다.
연륜있는 노기사이자 기사단장 니콜라스가 엉덩이가 닿기 무섭게 입을 열었다.
“그 아이는 아직 여기에 있습니까?”
“돌려보냈습니다. 바라는게 있냐고 물어보니 아무것도 없다더군요. 아, 칼을 하나 달랬군. 칼 하고 돈을 조금 줘서 보냈습니다.”
“좀 더 데리고 있으시지 그랬습니까. 물어볼 것도 많은데 ”
“이런저런 대화를 나눠보니 평범한 남매 같았습니다. 다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미셸님께서 그러시다면 맞는 것이겠지요.”
“좌우지간 니콜라스 경은 알아낸게 있습니까?”
라인 형제들을 신문해서 얻은게 있냐는 질문이었다.
노기사 니콜라스는 면목없다며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녀석들은 잡히기 전에 이상한 약을 복용한 것 같았습니다. 신문 내내 마약에 중독된 것처럼 정신을 못차리더군요. 횡설수설 하기만 해서 아무것도 얻어낼 수 없었습니다…”
총장 사만다가 덧붙였다.
“채찍으로 때려도 아프다고 비명을 지르기는 커녕 좋아 죽겠다며 더 때려달라고 했다더군요. 붙잡힐때 통증이 쾌락으로 변하는 약을 복용했나 봅니다. 그리고 약의 효력이 다 하자 즉사를 했다네요.”
“의뢰인을 지키고자 자신들의 목숨을 바쳤단건가. 암살자라지만 명예는 아나보군.”
“그간 쌓아온 명성을 더럽히고 싶지 않았나보죠.”
“그럴테지. 하지만 날 죽이려 한 이상 곱게 저승으로 보내줄 수는 없지. 시체의 항문에 치욕스럽게 작대기를 꽂아준건 매우 잘한 일이야.”
“제 생각이었습니다.”
작게 손을 들어보이는 니콜라스를 향해 미셸은 피식 웃었다.
그러고 나서 모두를 둘러봤다.
“보시다시피 걷는 사자 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나와 샤를은 전하의 계획에 동참할 뜻이 전혀 없습니다. 내일 즉시 고향으로 귀환할 것이며, 돌아가는 동안 언제, 어디서, 누가, 또 우리를 위협할지 모릅니다. 그 방법은 이번처럼 암살자를 보낼 수도, 음식물이나 식수에 독극물을 탈 수도, 대형사고를 일으킬 수도, 야영지 안에 괴물을 푸는 식으로 우리를 공격할지도 모릅니다. 항상 긴장하고 각자 맡은 곳에서 최선을 다해 애써주십시오. 그리고 니콜라스 경은 오늘부터 야영지 안에 드나드는 외부인들의 신원을 철저히 파악하고 출입 보안을 강화해주길 바랍니다.”
“절대 실수 없게 하겠나이다. 맡겨주시지요.”
“하나 더. 현재 야영지에 머무는 모든 외부인의 신원을 더욱 자세히 파악해서 명단을 세밀하게 만드세요. 이름, 직업, 고향, 목적, 가족관계 등등. 수상한 자를 찾는데 도움이 될겁니다.”
“속히 이행하도록 하겠습니다.”
미셸은 이어 마구간을 책임지는 마관장을 돌아보았다.
“벤, 조금전 말했듯이 내일 점심 이후에 떠날 수 있게 마차와 말들을 준비해주세요. 아시겠죠?”
“네, 영주님.”
이후에도 회의는 다른 왕족들의 공격을 대비하는 논의로 해가 질때까지 계속 되었다.
회의가 끝나자 기사단장 니콜라스는 외부인들에게 내일 일정을 알려주기 위해 서둘러 나갔고, 미셸은 자신의 숙소로 향했다.
어느덧 밤하늘에 보름달이 떠 지상을 은은하게 비추고 있었다.
미셸은 보름달을 향해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숙소로 들어갔다.
널따란 막사 안에 가장 깊은 곳에 배치된 침실에 들어가자, 알몸에 화려한 가운만 달랑 차려입은 어떤 청년이 술과 안주를 준비해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응. 너도 하루종일 기다리느라 지루했겠구나. 옷 벗는 것 좀 도와다오.”
“알겠습니다.”
얼굴이 몹시 앳되어 보이는 청년은 미셸보다 훨씬 키가 작지만 아름답게 생긴 조각 미남이었다. 하지만 곱상하게 생긴 외모와 달리 하는 일은 좀 서툴렀다. 미셸의 옷을 벗기는데 애를 먹자 그녀가 돌아본다.
“피에르, 아직도 헤매는구나.”
“죄, 죄송합니다… 적응할때도 됐는데…”
“내가 하마.”
미셸이 몇 번 손을 움직이자 입고 있던 드레스가 훌러덩 밑으로 떨어지며 그녀의 나신이 드러났다. 십대 후반의 딸을 가진 30대 여성이라고 하기에는 처녀보다 매끈한 몸매를 갖고 있었다. 그녀는 탐스러운 엉덩이를 씰룩이며 술과 안주가 있는 탁자로 가서 의자에 앉았다.
술잔을 들어 한모금 마신 다음, 미소 띤 얼굴로 미남 청년 피에르를 그윽하게 쳐다봤다.
“뻘쭘하게 서있지 말고 와서 핥으렴.”
“예, 예. 부, 분부에 따르겠습니다……”
미셸은 잔뜩 긴장한 그를 보며 웃었다.
“너의 그 순수함이 매력있어. 사내들은 보통 거칠기만 하지 낭만이란게 없거든. 프레드릭도 그랬어. 뭐가 그리 급한지 대충 벗기고 후다닥 박는게 전부였지. 너처럼 달콤한 맛이 없었달까.”
“가, 감사합니다.”
“어서 가까이 오렴.”
“네…”
앉아있던 미셸이 한쪽 다리를 의자에 올리며 다리를 벌리자, 두툼하게 갈라진 그녀의 은밀한 부위가 빼꼼히 고개를 내밀었다.
피에르는 쑥스러운 나머지 시선둘 곳을 몰라하며 주위를 보는척했다. 그러나 그는 곧 가운을 벗고 엎드려 기어가서 주인의 은밀한 부위에 입술을 파묻었다.
무릎 꿇고 앉은 그가 혀를 움직이기 시작하자 미셸의 입술에서 낮은 신음성이 터져나왔다.
“하아… 그래, 거기야. 이제야 능숙해졌구나. 네 덕분에 하루의 피로가 쫙 풀리는 기분이야. 팔딱거리는 활어처럼 더, 더 세게 해다오. 아아…”
애무를 음미하듯 두 눈을 지그시 감은 미셸은 황홀한 쾌락을 만끽하며 술잔을 입가에 가져갔다. 그리고 목마른 육식동물처럼 잔에 든 내용물을 맹렬히 들이마셨다.
꿀꺽, 꿀꺽, 꿀꺽!
***
흔들리며 타고 있는 횃불들이 밤길을 밝게 비추고 있었다.
버나드는 데보라와 함께 텐트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마크와 멜라니아가 기다리고 있는 텐트는 제일 구석진 곳에 있었고, 예정대로라면 버나드가 마크와 함께 텐트를 칠 계획이었다. 버나드와 데보라가 도착하자 야영지의 전경을 스케치하고 있던 마크가 그들을 보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짐작대로 그는 단단히 화가 나있었다.
“야! 니들 어디갔다왔어! 나혼자 텐트치고 물건 정리하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줄 알아? 칼 사러 간다더니 대체 몇 시간을 농땡이 피우다 온거냐고!”
데보라가 나서서 미소 띤 얼굴로 대답했다.
“오라버니, 얘기 못 들었어요?”
“핑계댈 생각하지마!”
“핑계가 아니예요. 낮에 미셸님을 구한 소년이야기 몰라요? 플랫폼 안에 널리 퍼졌을텐데.”
“그게 뭐? 그게 너희랑 무슨 상관… 허걱! 설마 그게 버나드 이야기였어?”
“그러니까 늦었죠. 호호.”
“세상에!”
마크는 버나드에게 한달음에 달려가서 그의 양어깨를 붙잡고 흔들었다.
“그, 그 유명한 미셸님을 니, 니가 구해드렸다고?”
“어.”
“지, 진짜?”
“진짜야.”
버나드는 미소를 지으며 손에 쥐고 있던 돈주머니를 찰랑찰랑 흔들어보였다.
“사례금도 받았어.”
“오오! 얼마나? 얼마나주든?! 미셸님이니까 통 크게 주셨을거야!”
“몰라, 절반은 마크가 가져.”
“뭐?”
마크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나, 날 준다고?”
“빚진거 갚는거야. 왕도에서부터 여기까지 오는데 돌봐준 빚.”
“이렇게나 많이?”
마크는 냅다 돈주머니를 받아들고 안에 든 금액을 확인했다.
“헐! 대충봐도 절반이면 100크랑이 넘네! 이 정도면 말 한마리는 거뜬하게 살 수 있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