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화 〉어렴풋한 칼의 기억, 가슴베기2
그렇게 두 사람은 영주의 막사를 빠져나와 그대로 마크와 멜라니아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러다 길을 걷는 도중 버나드가 갑자기 머리의 통증을 호소하며 바닥에 털썩 주저앉자 데보라가 화들짝 놀랐다.
“버나드! 괜찮니!?”
“머, 머리가……!”
“자객이 때린 곳이 아픈거야? 알았어! 누나가 미셸님을 데려올게! 미셸님이 도와주실거야!”
“기, 기다려!”
머리를 감싸고 바닥에 엎드린 버나드는 간신히 손을 뻗어 그녀를 만류했다.
“가, 가지마. 금방 괜찮아질거야.”
“머리에 이상이라도 생기면 어떡하니? 후유증이 남으면 어떡해? 미셸님이 데리고 있는 사제분들한테 진찰을 받아보는게 좋아!”
“시, 싫어! 난 괜찮아! 가지마!”
“아니야, 가야겠어.”
단단히 결심한듯 데보라가 뒤로 돌아서자 버나드가 인상을 쓰며 크게 소리쳤다.
“가지마, 제발! 너한테 화낼거야! 야! 가지말라고!”
“누, 누나한테 윽박지르다니…!”
버나드가 화를 낸 것에 데보라는 큰 충격을 받았는지 금세 울먹거렸다.
“버나드…! 누나가 미운거니……?”
그녀가 제자리에 털썩 주저 앉고 엉엉거리며 뭐라고 하든 말든 버나드는 지금 미칠 지경이었다. 그 어떤 말도 귀에 들려오지 않았다. 몇 시간전 라인형제의 차남인 릭에게 세게 얻어맞아서 뇌가 손상된 것일까? 철퇴로 머리를 한방 얻어맞은것처럼 머리가 지끈거리며 속이 심하게 울렁거렸다.
“아악! 끄으으윽!”
하지만 버나드는 이것이 아파서 그런것이 아니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어째서인지 괴롭지만 싫지만은 않은 느낌이다. 그도 그럴것이 지금 눈앞에… 잊혀졌던 기억들이 세차게 물결치며 자신의 머릿속을 마구 들쑤시고 있었다.
그것은 검에 대한 기억.
처음 검을 잡았을때.
검을 배울때.
그리고 검을 마스터했을때.
또 누군가에게 검을 가르칠때.
자신이 지금까지 겪어왔던 수천개의 기억들이 한꺼번에 몰려들어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하지만 기억들은 쉽사리 다가오지 않았다. 마치 자신을 놀리는듯한 기분이다. 이거 줄까, 저거 줄까. 뇌라는 녀석이 기억을 볼모로 버나드를 놀리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머리의 통증이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지며 버나드는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아울러 지금 이 순간, 칼에 대한 무언가가 언뜻 기억날 것만 같았다.
“뭐, 뭔가가 아른거려…!”
눈을 크게 뜬 채 멍하니 엎드려 있던 버나드는, 어쩌면 이것이 기회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벌떡 일어섰다. 그러고는 갑자기 어디론가를 향해 헐레벌떡 뛰어가기 시작했다.
“데보라! 먼저 가있어!”
“어디 가는거니! 버나드! 버나드!”
데보라는 거짓으로 찔끔 흘렸던 눈물을 치마로 대충 닦고서는 제자리에서 빠르게 일어났다.
“다가와서 미안하다고 해줄줄 알았는데 버나드는 정말 냉정하네. 호호.”
그녀는 웃는 얼굴로 치마에 묻은 흙먼지를 탁탁 털고는 서둘러 버나드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혼자서 다니면 위험해! 기다리렴!”
플랫폼 안에는 영주의 기사와 종자들이 머무는 만큼, 그들의 수련을 위해 다양한 훈련장이 곳곳에 설치되어 있다. 버나드는 그중 한 곳인 훈련용 허수아비가 설치되어 있는 장소로 향했다.
얼마 뒤 숨을 헐떡거리며 훈련장에 도착하자, 훈련을 막 마치고 나온 기사 한 명이 천으로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며 피식 웃어보였다.
“넌 누구냐? 여긴 왜 왔어? 사람 찾으러 심부름 온거야?”
“나도 훈련을 하고 싶어. 외부인도 할 수 있지?”
“네가 훈련을 하겠다고? 하하. 외부인은 규정상 출입이 안되지만 너 같은 꼬마가 하겠다면 굳이 말릴 사람은 없을거야. 제 몸보다 큰 목검을 들고 어버버하는 꼴이 우스울테니 말이야. 잠깐의 여흥거리는 되겠지. 들어가봐.”
“고마워!”
버나드는 단숨에 수십개의 훈련용 허수아비가 세워진 울타리 안으로 들어갔으나 아쉽게도 빈 자리가 없었다. 한둥안 울타리 입구에서 멀뚱히 지켜봐야만했다. 동시에 속이 타들어갔다.
‘어렴풋이 떠오른 기억이 사라지기 전에 한번 휘둘러봤으면 좋겠는데.’
플랫폼 안은 시장터처럼 건물과 사람이 바글바글 거리고 비좁았기에 마음 놓고 칼을 휘두를 만한 장소가 없었다. 따라서 이 훈련장만이 유일한 장소이건만, 눈앞에 있는 사람들의 훈련이 길어질수록 초조함만 더해갔다.
“쓸래?”
입구에서 한참을 우두커니 서 있는데 갑자기 어떤 여기사가 다가와 반가운 말을 건넸다.
“난 끝났어. 쓸래?”
방금 전 자신이 이용하던 훈련용 허수아비를 가리키는 그녀. 허리까지 닿는 긴 금발 머리에 상당한 미인이다. 나이는 10대 후반? 아니면 정확히 20세? 젋고 아름다운 얼굴이지만 무표정을 짓고 있으니 얼음처럼 차가운 인상이었다. 심지어 눈매 마저 고양이처럼 날카롭게 생겼다.
“응, 고마워!”
버나드는 후다닥 뛰어가서 훈련용 허수아비 앞에 섰다. 그런데 막상 서고보니 목검을 안들고 왔다. 다시 목검이 진열된 곳으로 뛰어가려는 찰나, 뒤에서 묵묵히 지켜보던 여기사가 자신이 쓰던 목검을 그에게 던져주었다.
“써.”
버나드는 목검을 허공에서 낚아 챈뒤 그녀를 향해 엄지 손가락을 들어보였다. 그리고 뒤로 돌아 야심차게 훈련용 허수아비를 쳐다봤다.
“자, 해보자. 해보는거야, 버나드.”
그런 그를 여기사는 뒤에서 조용히 지켜보았다.
별다른 생각이 있는게 아니라, 여태껏 훈련장을 찾아온 사람 중에 버나드 정도의 나이대를 가진 소년을 처음 보기도 하고, 그저 십대 중반즈음으로 보이는 소년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단순 호기심 때문이었다. 보나마나 기초 수준에 썩 대단하지 않을 것이란 예상은 이미 머릿속에 있었다. 그냥 가벼운 호기심이었다.
훈련용 허수아비와 마주서자 버나드는 어렴풋이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제 1차 걷는 사자 전쟁이 한창이던 17년전, 옹이투성이의 오래된 참나무 아래서 프레드릭왕에게 검술을 배우던 시절이었다. 맞아, 그날이 처음으로 프레드릭왕을 때린 날이었다.
그날을 떠올린 버나드는 손에 쥔 목검을 머리 위로 들어올렸다.
툭.
툭.
처음엔 가볍게 치다가 점점 위력이 세졌다.
탁!
탁!
훈련용 허수아비를 때리는 속도가 빨라질수록 기억도 점점 진해져갔다.
“버나드. 룰은 어제와 같다. 오늘도 내 머리 위에 사과를 올려놓고 상대해줄테니 사과가 떨어지면 네 승리다.”
“날 무시하는 거야? 그딴거 필요없다고.”
프레드릭왕은 머리 위에 사과를 올려놓으며 웃어보였다.
“네 임시 스승으로써, 시합의 룰은 내가 결정한다. 콧물 찔찔이 꼬마 검사야.”
“뭐? 콧물 찔찔이? 프레드릭 두고봐! 반드시 사과를 떨어뜨려줄테니까! 내가 이기면 프레드릭이야말로 콧물 찔찔이 검사야!”
“알았어. 기세 좋다. 자, 그 기세로 덤벼!”
“이야야아아압!”
버나드가 빠르게 달려들며 곧 두 사람의 목검이 맞부딪혔다.
탁!
탁!
탁! 탁! 탁!
타닥!
탁!
“방금건 자세가 좋지 않아, 칼을 더 높이 올렸어야지.”
프레드릭은 제자리에서 큰 흔들림없이 버나드의 공격을 전부 손쉽게 받아냈고, 버나드는 잔뜩 화가났다.
“거만 떨지 말라고!”
외침과 동시에 목검이 다시 허공을 갈랐지만 프레드릭은 가볍게 쳐냈다.
탁!
“겨우 이런 실력으로 부모님의 원수를 갚으려 했던거냐? 지나가던 개가 웃겠다.”
“빌어먹을!”
타닥!
“세상의 모든 계집들을 품고 싶지 않냐? 그럼 유능한 검사가 되라. 유명해지면 여자들이 알아서 달라붙는다.”
“닥쳐!”
탁!
탁, 탁!
“저 뒤를 봐. 네 어리버리함에 부모님을 죽인 원수가 비웃고 있어. 지금의 넌 독기말곤 볼 것 없는 허당이야.”
“시끄럽다고!”
프레드릭왕의 독설이 늘어갈수록 그에 비례해서 버나드는 투지를 불살랐지만 그와 함께 눈물도 쉼없이 흘러나왔다. 분하고 원통했다. 한대만이라도 제발 한대만이라도 프레드릭왕을 치고 싶은데 그는 능수능란하게 공격을 피하거나 막았고, 버나드는 자꾸 뜻대로 되지 않자 집중력이 흐트러지고 울화만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결국 특별한 전략없이 어거지를 쓰듯 공격하기만 하니 어느새 자세는 무너지고 훈련이 훈련이 아닌게 되었다.
“하압!”
탁!
“하이야압!”
타닥!
“이야악!”
타다다!
“합! 아! 이야아아! 프레드리이이익!”
타닥!
“검과 네 몸이 분리됐다. 흥분을 가라앉히고 정신 집중해 코찔찔이 꼬맹아. 검과 하나가 되란 말이다.”
“듣기 싫다고오오! 이얍! 하야! 이야! 이얍! 이얍! 이야아아압!”
뒤에서 묵묵히 버나드를 지켜보고 있던 여기사는 그에게 실망한 눈길을 보냈다.
“투박하고 엉성해.”
더는 볼 것 없었다.
옛기억에 잠긴 버나드는 아무런 말도 없어, 아무런 표정 없이 담담하게, 훈련용 허수아비를 향해 쉼없이 공격을 퍼붓고 있었지만, 동네 부랑배가 길거리에 떨어진 막대기를 들고 아무렇게나 휘두르는 것과 다름 없는 수준이었다. 그의 몸짓에는 정확성이 없고 규칙도 없었다. 막무가내 그 자체였다. 검술을 배워본적도 없어보이는 하수 중의 하수로 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당연한걸까.”
소년이 어리다보니 당연하다.
뻔한 결과가 나왔다며 여기사는 미련없이 등을 돌렸다. 그리고 울타리 밖으로 나가려는 순간, 어떤 젊은 여자가 잽싸게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여기사는 자기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추며 시선이 무심코 그녀를 쫓았다.
“버나드!”
데보라는 훈련용 허수아비를 무작정 패고 있는 버나드를 목격하자마자 곧바로 위화감을 느꼈다. 그녀와 알고 있던 버나드와 너무나 다른, 지금 그의 눈은 너무나 날카롭고 무서웠다. 싸늘한 표정으로 무언가에 홀린듯 훈련용 허수아비를 때리는 일에 빠진 그가 마치 딴사람 같았다.
“쟤 버나든가……? 비슷하게 생긴 사람?”
데보라는 잠시 망설이다 밝은 목소리로 소리쳤다.
“거기서 뭐하니~! 저녁시간 다 됐는데 텐트에 가서 밥 안먹을거야?”
하지만 버나드에게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는 지금 17년전 프레드릭왕과 싸우는 일에 한창이었다.
“그 작은 몸뚱이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구나. 네 체격은 공격 받는 면적이 작아서 유리하다는걸 명심해. 장점을 활용하란 말이다. 잠깐. 빈틈이 보이잖아. 옆으로 좀 더 비스듬하게 서라.”
“니 말 듣기 싫어!”
탁!
타닥!
“내 즐거움은 분해 죽는 네녀석의 일그러진 낯짝을 보는 거다. 근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머리 위에 놓인 사과 하나 떨어뜨리지 못하다니 네놈의 근성 따윈 겨우 이 정도였군. 정말 씁쓸하다. 너무 씁쓸해서 네가 참 한심하게 보인다. 차라리 다른 녀석을 가르칠걸 그랬어. 시간 낭비였군. 널 그냥 버려야겠다.”
“웃기지마아아아아!”
그때였다. 수백차례 막무가내 공격만 던지던 버나드의 자세가 갑자기 바로 잡히더니, 프레드릭왕이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매우 깔끔하고 빠르게 공격이 들어갔다.
“어?”
다리를 향하던 공격이 갑자기 유연하게 방향이 바뀌며 가슴으로 목검이 날아들었다. 예기치 않았던 방향에서 날아온 공격이라 프레드릭왕은 순간 당황했다.
“어쭈?”
타악!
묵직한 타격음이 허공에 메아리쳤다.
목검이 그동안 난공불락의 요새였던 프레드릭왕의 가슴을 정확히 때리며 그의 중심이 흔들렀다.
곧바로 머리 위에서 사과가 굴러 떨어지며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하하……”
애당초 훈련을 시작하기 전, 오늘도 버나드가 자신의 머리 위에 있는 사과를 떨어뜨리지 못할 것이라 짐작했던 프레드릭왕이었다.
그런데 예상은 멋지게 빗나가고 말았다.
이렇게나 배움이 빠를줄이야.
프레드릭왕은 허탈한 웃음을 짓다가 이내 밝게 웃어보였다.
“드디어 성공했구나 버나드. 축하한다.”
“고마워, 프레드릭.”
버나드는 고개를 들어 프레드릭왕을 향해 해맑게 웃었다. 그의 얼굴은 흙과 눈물로 범벅이 되어있었다.
훈련을 할땐 프레드릭왕한테 화나고 짜증났지만, 성취하고 나니까 이보다 기쁜 것도 없다.
버나드는 기쁜 눈물을 흘리며 프레드릭왕에게 뛰어가 그의 품에 안겼다.
기억은 거기서 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