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5화 〉어렴풋한 칼의 기억, 가슴베기1 (15/200)



〈 15화 〉어렴풋한 칼의 기억, 가슴베기1

시끌벅적한 사람들 속으로 숨어들어간 그를 금세 찾아낸 버나드는 재빨리 손에 쥐고 있던 칼로 그의 등을 후려쳤다.
그런데 이게 왠걸?
예상대로라면 칼에 베여서 쓰러져야 하건만 버나드가 쥐고 있던 칼은 상대의 등에 부딪히자마자 칼손잡이 위의 칼날과 연결된 부분이 맥없이 부러지며 바닥에 떨어져버렸다.

“버, 벌써 고장나면 어떡해……?”

버나드가 날이 떨어져나간 칼손잡이를 보며 황당해하는 사이 그를 알아본 릭이 단숨에 다가왔다.
그러고는 힘껏 주먹을 날렸다.
퍽!

“컥!”

얼굴을 내주다시피 제대로 맞았기에 상당한 충격이 전해졌다. 버나드의 몸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홀라당 뒤로 넘어갔다.

“너 뭐하는 새끼야.”

분노한 릭의 욕설이 귓가에 들려옴과 동시에 버나드는 뒤로 나자빠지며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

한달전.
눈앞에 서 있는 레아가 진정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무척 흥분한 상태로 목소리를 울먹였다.

“그들이 단장님을 노리고 있어요!”
“안다.”
“알면서 왜 그러세요? 우리가 먼저 강력한 대응을 해야해요! 이대로 가만히 있다간 당하고 말거예요!”
“그것도 알아.”
“그런데도 왜 가만히 있냐고요!”

그녀가 꾸짖듯이 소리쳤다.

“그들에겐 힘이 되어줄 귀족들이 많이 있지만, 왕국에서 숨겨진 존재인 단장님은 전하 말고는 도와줄 귀족이 아무도 없다고요! 귀족들은 아무도 당신을 몰라요! 그들의 일방적인 주장에 귀를 기울이고 당신을 왕국의 적으로만 생각할거예요!”
“진정해 레아.”
“난 진정할 수 없어요. 난 내 삶을 지킬거예요.”
“네 삶은 뭔데?”

레아는 뜸을 들이다 대답했다.

“……단장님 밑에서 일하는 삶이요. 평생 그것만으로도 족해요. 그런데 그들이 모든걸 망치려 하고 있죠.”

수줍게 고백하는 그녀의 양볼이 붉게 물들었다.
그녀는 시선을 내린 채 가볍게 묵례를 한뒤 다시금 입을 열었다.

“단장님 앞에서 울고 화를 내서 죄송합니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레아는 그대로 뒤돌아서며 눈가에 맺힌 눈물을 훔쳤다. 그리고 성큼성큼 문쪽으로 걸어갔다.
버나드는 그녀를 붙잡을 생각에 다급히 그녀의 이름을 외쳤으나 그녀에게 닿지 못했다. 어째서인지 목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번을 불러봐도 레아는 듣지 못했다. 이윽고 레아는 문을 닫고 떠나버렸다.
가슴 아픈 기억이었다.

꿈에서 깨며 의식이 드는 순간 누군가가 자신의 손을 부드럽게 어루만져주고 있었다.
조물딱, 조물딱, 꼼지락, 꼼지락. 마치 마사지를 해주듯…

‘누구지? 누가  손을…’

버나드는 눈을 뜨고 일어나려 했지만 가위 눌린 것처럼 말이 안나오고 몸을 움직이기가 힘들었다. 자신이 계속 뒤척이자 손을 어루만져주던 상대도 낌새를 알아챘는지 만지던 손을 얌전히 침대 위에 내려놓고 잠시 아무것도 안하는듯 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잠시  상대는 버나드의 입술을 손으로 벌리고 입안에 물을 흘려넣었다.

미지근하고 맛 좋은 물이 입안으로 흘러들어오자 버나드는 긴장했던 근육들이 풀어지고 머리가 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스르르 눈이 떠졌다.
숨결이 닿는 거리에서 자신을 걱정스러운 안색으로 내려다보고 있는 데보라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가 조심조심 물을 먹여주고 있던 것이었다. 서로 눈이 마주치자 그녀의 얼굴에 화색이 돌며 기쁜 목소리로 외쳤다.

“버나드!”

버나드가 잠긴 목소리로 천천히 물었다.

“나… 어떻게 된거야…?”
“길바닥에서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던걸 미셸님의 기사들이 막사로 옮겨왔단다.”
“미, 미셸……?”
“누군지 알지? 아킨테의 미셸님. 여긴 그분이 머무는 막사안이야. 플랫폼 안의 모든 사람들이 너를 칭찬하고 있어. 네 덕분에 암살자를 잡았다면서. 그리고 미셸님이 다치지 않아 목적지까지 늦지않게 갈 수 있게 되었다고 다들 기뻐하는 중이야.”

데보라는 손뼉을 마주치며 좋아했지만 버나드는 이곳이 미셸의 막사라는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와, 왕족과 만나면 안돼…!”
“어째서?”
“이럴때가 아니야. 빨리 나가자!”
“버, 버나드?”

억지로 몸을 일으켜 세우며 얼른 빠져나가려는 찰나, 회색천으로 칸막이가 처진 다른 공간에서 불쑥 여성의 목소리가 들렀다.

“일어났느냐?”

 목소리의 주인이 입구를 가린 천을 젖히고 안으로 들어와 모습을 드러냈다.

“오, 깨어났군. 무사해서 다행이구나.”

흐뭇한 미소를 짓는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버나드는 그 자리에서 몸이 굳어버렸다.
자신을 바라보는 이는 다름 아닌 그 유명한 아킨테의 미셸.

애당초 버나드는 왕 말고는 다른 왕족과 만나는 일을 본능적으로 피하고 살았던 사람이다. 그에게 붙여진 왕족살해자라는 호칭에 걸맞게, 어차피 왕을 제외한 다른 왕족들은 언젠가 자신의 손으로 죽일지도 몰랐다. 그러니 서로 알고 지낼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 시절의 습성이 남아있던 버나드는, 지금 미셸에게 자신의 정체가 노출된 것에 극도로 불쾌하고 꺼림칙했다.

얼른 데보라의 등뒤로 가서 숨었다.
그랬더니 데보라와 미셸이 동시에 웃음을 터뜨리며 버나드를 향해 수줍음이 많은 소년이라고 자기들끼리 제멋대로 대화를 주고 받았다.

“저 아이의 이름은 뭐지?”

데보라가 대신 대답했다.

“버나드입니다.”
“좋은 이름이구나. 그래, 버나드. 머리는 괜찮으냐?”

미셸은 위엄있으면서도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버나드는 그녀와 직접적으로 대화를 나누는 것이 거북했다. 그래서 데보라의 등뒤에 숨은 채 미셸이 아닌 데보라에게 대답했다.

“괜찮다고 전해줘.”

그러면서 데보라의 옷깃을 잡아당기자, 그의 영문 모를 행동에 데보라가 약간 당황하면서도 미셸을 돌아보고 미소지었다.

“괜찮다네요.”
“다른 사람에게 전하지 말고 나와서 얘기하면 안될까?”
“높으신 분을 만나 부끄럽다고 전해줘.”

데보라가 고개를 갸웃하며 뒤를 쳐다봤다. 마치 그럴 성격은 아닌데  그러냐는듯한 눈치다. 버나드는 상관하지 말라는듯 그녀의 등허리를 손으로 슬쩍 밀었다. 그러자 데보라는 다시 고개를 돌려 앞에 앉아있는 미셸을 미소 띤 얼굴로 마주봤다.

“부끄럽다네요.”
“흐음, 세상엔 별별 성격을 가진 사람이 다 있지. 하지만 사내 아이가 돼서 수줍음을 타는 것은 요즘 시대에 어울리지 않단다. 다들 계집애라고 놀릴거야. 십대중반즈음으로 보이는데 그 정도 나이면   성인이나 마찬가지다. 또래 여자애를 한번즈음 품에 안아봤을 나이기도 하지. 차차 고쳐나갔으면 좋겠구나.”

남에게 대신 대답케하는 버나드의 행동이 무례할 수도 있는 일인데 미셸은 너그러이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버나드가 어린 소년이다 보니 귀여워서 넘어가주는듯 했다.
그녀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버나드, 라인 형제들이  죽이려 하는 것을 어떻게 알았느냐?”
“우연히 발견했을뿐입니다 라고 전해줘.”
“우연히 봤다고 전해달라네요.”
“음, 우연히라…”

미셸은 데보라를 쳐다보았다.

“데보라, 너와 버나드의 관계는 어떻게 되지? 친남동생인가?”
“음… 예, 뭐, 친동생 비슷합니다. 매우 가까이 지내고 있는 사이죠. 피는 섞이지 않았지만요.”

데보라가 싱긋 웃어보였다.

“그렇군. 두 사람은 이곳에 왜 온거지?”
“제게 오라버니가 한분 계시는데 직업이 화가입니다. 오라버니도 이곳에 머물고 있고, 우린 아킨테로 가서 새로 시작하기 위해 미셸님의 신세를 지게 되었답니다.”
“평범한 삶을 살고 있구나.”

미셸은 가볍게 미소지으면서 버나드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버나드. 오늘 네가 없었으면 난 무사하지 못했을 것이다. 네게 상을 내려주고 싶은데, 혹시 바라는 것이 있느냐?”

버나드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말했다.

“칼을 원한다고 전해줘. 암살자들과 싸우다 칼이 부서졌어.”
“칼이 필요하다네요. 암살자들과…”
“그만. 나도 같이 듣고 있으니 일일이 전해주지 않아도 된다. 아무튼 칼이 필요하다라, 수줍음 많은 행동과 달리 칼을 원하다니 특이하구나.”

데보라가 두 손을 앞으로 모으며 기쁜듯이 자랑했다.

“저를 지켜주고 싶대요.”
“너를?”
“네. 저를 무척 좋아하거든요. 얼마나 좋아하는지 시도때도 없이 졸졸 따라다녀요. 그래서 많이 귀찮답니다. 호호. 손이 참 많이 가는 애예요.”

순간 버나드는 귀를 의심했다. 데보라가 들떠서 제멋대로 하는 말에 잔뜩 태클을 걸고 싶었으나 꾹 참았다.

“널 미래의 신부로 점찍었나보지.”

황당한 미셸의 말에 데보라가 펄쩍 뛰며 두 손을 자신의 뺨에 갖다대며 좋아라했다.

“어머나, 버나드! 정말 그런거니? 누나를 네 신부로 정한거야?”
“영주님 앞이야. 진정해, 데보라.”

버나드는 동료들에게 늘 하던 버릇대로 딴소리 하지 말고 일이나 잘하라며 아무 생각없이 그녀의 엉덩이를 툭 쳤다. 그러자 데보라는 깜짝 놀라더니 두 손바닥으로 양볼을 비비며 짐짓 수줍은척 배시시 웃었다.

“어, 어머. 미셸님이 보는데서 누나의 엉덩이를 만지다니, 너무 과감한거 아니니? 누나 당황스럽단다?”
“그만하라고.”

버나드가 다그치듯 등허리를 꼬집었지만 데보라는 들은 척도 안하고 오히려 버나드를 가슴에  끌어안고 더욱 민망한짓을 연출했다.

“이런 깍쟁이 같으니. 누나가 좋으면 좋다고 솔직히 말하렴? 어린 녀석이 나쁜남자처럼 시크해서 마음에 든다니까. 호호호.”
“어푸, 어푸! 머, 멈춰! 허헉!”

그녀의 풍만한 가슴속에 파묻혀 버나드가 허덕이는 동안 미셸은 조용히 집사를 불러 버나드가 원하던 칼을 가져오게했다.
이윽고 집사가 칼을 가져왔을때 버나드는 그제야 데보라에게서 풀려날 수 있었다.

“버나드! 칼이야!”
“헉, 헉…”

버나드는 숨을 몰아쉬며 데보라보다 못한 힘을 가진 자신을 원망했다. 데보라는 예상외로  나이대 여성들보다 더 강한 힘을 가진 여자인 것 같았다. 남들은 꾸미고 다닐 시간에 매일 오빠만 따라다니면서 각종 잡일과 주방일을 도맡아 해서 그런가? 힘이 여간 센게 아니다. 그녀한테 한번 붙잡히면 빠져나오기가 힘들었다. 그녀의 몸에 근육도 없는  같은데 말이다.

좌우지간 버나드는 데보라에 대한 생각을 그만두고 시선을 들어 눈앞에 보이는 빛나는 칼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미셸이 밝게 웃었다.

“우리 아킨테산 강철로 만든 칼이란다. 네가 칼을 볼줄 아는지 모르겠지만 아킨테산 강철은 우리 왕국을 넘어 이웃나라에까지 잘 알려져있지.”
“들은적이 있습니다 라고 전해줘.”
“들…”

데보라가 버나드의 말을 그대로 옮기려고 하자 미셸이 됐다는 듯이 손을 들어 막았다.

“그럼 좋은칼이란 것을 잘 알겠구나.”

아킨테산 강철이 유명해진 것은 검의 강도 보다는 마법이 잘 스며들었기에 널리 이용되어왔다. 칼에 마법을 부여하면 다른 강철들은 저항하며 본래의 힘에 미치지 못하는 성능을 보여줬지만, 아킨테산 강철은 달랐다. 칼에 부여한 마법을 제대로 흡수해 100% 성능을 그대로 발휘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 까닭에 마법을 쓸줄 아는 마녀들이 단검으로 애용하는 일도 잦았다.

이러한 사실을 매우 잘 알고 있는 버나드였기에, 그는 아무 불만없이 칼을 원했다. 마법을 부여할 기회가 있을진 모르겠으나 어쨌든 좋은 칼임은 분명하니까. 받아서 나쁠게 없다.

“가져가거라. 오늘부로 너의 칼이니라.”

칼을 받고 나서 미셸에게 소정의 사례금도 받았다. 그녀는 아랫사람에게 베풀줄 아는 영주였다. 마땅한 직업이 없으면 아킨테에 도착하는 동안 소일거리라도 소개시켜주겠다고 했으나 버나드는 그녀와의 대화에서 적극적이지 않았다. 도망치듯 빨리 영주의 막사를 떠나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안녕히 계십시오라고 전해줘.”

그리하여 미셸에게 작별을 고하고 겨우 영주의 막사에서 빠져나왔을때,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각각 작살에 꽂혀 있는 라인 형제, 즉 레파스와 릭의 시체였다. 그들은 잡히고 나서 몇시간 동안 심한 고문을 당했는지 몸에 성한 곳이 없었으며  다 항문에는 그들을 능욕하듯 기다란 막대기가 꽂혀 있었다.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보란듯이 걸려있는 두 사람의 시체를 보고 데보라는 즉시 버나드의 눈을 가렸다.

“보면 안돼. 밤에 생각나서 오줌 쌀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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