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화 〉장거리 이동수단, 플랫폼3
플랫폼의 역할은 단순하다.
대귀족이 먼거리를 이동을 하게 되면 그를 호위하기 위해 보통 수십에서 수백명의 무장 기사와 종자들이 따라붙게 되는데, 이처럼 대귀족은 긴 여정길에 혹시나 마주칠지도 모를 괴물이나 도적들로부터 신변을 지킬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는 반면에 여행자나 상인들은 자신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이 썩 마땅하지 않다. 그래서 사람들이 고안해낸 것이 대귀족이 이동할때 호위 비용을 내고 같이 이동하는 것이었다. 그게 바로 플랫폼이다.
대귀족이 목적지까지 가는 동안 플랫폼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중간에 하차도 하고 새롭게 합류하는 사람도 있는 등 플랫폼은 마치 이동하는 마을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왜 마을이냐면 플랫폼 안에서 경제활동이 매우 활발하게 이뤄지기 때문이다. 웬만한 도시의 시장보다 더 활기를 띄는 바람에 플랫폼만 따라다니는 상인과 음유시인, 창녀들도 많았다.
“들어가자. 흑, 피 같은 내 돈…”
마크의 말에 버나드는 다시 짐수레 뒤쪽으로 가서 밀 준비를했다.
“넌마, 나중에 일해서 너랑 니 할머니꺼까지 다 갚아. 장부에 전부 기록해놓을거야. 나 뒤끝 있다.”
버나드는 아무 생각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잠시뒤 마크가 이끄는대로 굵은 나무를 깎아 만든 커다란 울타리 안으로 들어가자 드넓은 플랫폼의 전경이 한눈에 펼쳐졌다.
마치 사람들이 북적이는 시장터 같았다. 물건을 사고팔고 가격을 흥정하고, 도박을 하고, 술을 마시고, 춤을 추고, 싸우고, 신기한 짐승들을 구경하고, 별의 별 사람들이 몰려와 있었다.
버나드는 조용히 짐수레를 밀면서 주변을 꼼꼼이 둘러보았다. 문득 칼을 파는 상인이 보였다. 칼의 품질은 그다지 좋아 보이지는 않았지만 돈이 없는 그에게는 딱 적당한 무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당장 호신용 무기가 하나 필요했기에 마침 잘됐다는 생각에 얼른 데보라의 팔을 흔들었다.
“데보라, 나 저거 사줘.”
“어떤거?”
무심코 고개를 돌린 데보라는 가판대에 진열된 칼들을 보더니 깜짝 놀랐다.
그녀가 서늘한 느낌이 있는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저런건 위험한 물건이란다?”
“필요한 물건이야.”
“저놈봐라. 만난지 만하루도 안지난 생판 남들한테 물건 사달라고 조르는 저 철면피 좀 봐. 얀마! 너 방금 나한테 빚지고 정신 못차렸어?!”
대화를 엿들었는지 마크가 짐수레를 끌면서 난리법석을 떤다.
“돈 없어! 그냥 가!”
“마크, 그럼 가지고 다니는 칼 있어?”
“그런게 있을리가 있냐? 난 평화로운 감성을 지닌 화가라고! 싸움을 싫어해!”
“그럼 우린 우리 몸을 어떻게 보호해?”
“여기 기사님들한테 지켜달라고 돈 드렸잖냐!”
“어떻게 믿고?”
“믿어야지 안믿으면 어쩌게?”
“내가 알기로는 플랫폼에 소매치기라든지 밤에 몰래 텐트에 들어와서 소지품을 훔쳐가는 도둑들도 많아. 그런 사람들까지 잡아내지는 못할거야. 플랫폼의 기사들은 게으르거든.”
“그분들이 게으른지 니가 어떻게 알어!”
“그냥 알아.”
“버나드가 누나 지켜줄거야?”
데보라가 웃으며 묻는다. 버나드는 조금도 고민하지 않고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응, 지켜줄게.”
담담하게 대답하며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했다.
‘칼 쓰는 법을 잊은 이상, 다시 감각을 되찾기 위해서라도 매일 피나는 연습을 해야해. 훈련을 하다보면 다시 기억날지도 몰라.’
데보라가 풍만한 가슴속에 숨겨뒀던 지갑을 꺼내들며 말했다.
“대답이 예뻐서 누나가 사줄게. 누나를 얼마나 잘 지켜줄지 앞으로 기대할게?”
“미쳤어!?”
마크가 펄쩍 날뛰며 난리법석을 떨었다. 버나드와 데보라는 그의 잔소리를 한 귀로 흘려버렸다. 그리고 칼을 파는 노점으로 가서 물건을 둘러보았다. 버나드는 진열된 칼들을 가까이서 보자마자 웃음부터 흘러나왔다. 칼들은 대부분 보통 이하의 것들이었다. 무엇보다 칼날. 저것들을 날이라고 하는 것도 우스웠다. 무뎌진건 기본이고 심지어 조금씩 휘기까지 했다. 검 끝조차 뾰족하지 않고 뭉툭했다.
“어떤걸 사고 싶어?”
데보라의 물음에 버나드는 대답없이 지그시 가판대를 주시하기만했다. 어느것을 봐도 이거다 싶은게 없었다. 늘 좋은 칼을 가지고 다니던 버나드의 눈에는 새것처럼 보이기는 하나 죄다 쓰레기 뿐이었다. 강철이 아닌 싸구려 금속을 가져다 만든 가짜 칼들 뿐이었다.
‘아쉬운대로 제일 싼걸 고를까… 어차피 데보라도 돈이 별로 없을테고…’
한참을 구경만 하고 있으니 이웃 노점상이랑 도박만 하고 있던 노점 주인이 말을 걸어왔다.
“누가 쓸 칼이요? 거기 예쁜 아가씨? 아니면 이 꼬마애?”
“이 아이요.”
데보라가 손으로 버나드를 가리켰다. 머리가 지저분하고 털이 수북히 자란 노점 주인은 버나드를 보더니 ‘그럼 이거지’ 하면서 한쪽에 쌓인 잡동사니들을 뒤적거리더니 단검을 내밀었다.
“이건 어떠냐? 네 또래 애들이 잘 사간단다.”
노점 주인이 내민 칼을 보자마자 버나드는 자신도 모르게 코웃음이 흘러나왔다.
장난감 같은 무기다. 쳐다볼 가치도 없다는 듯 한번 보고는 더 이상 시선을 주지 않았다.
그뒤로 가판대를 쭉 둘러보다가 버나드는 눈치껏 데보라의 주머니 사정에 맞는 칼을 골랐다. 가격이 싸고 품질도 별로지만 그래도 그중에 그나마 나은 칼을 집어들었다.
허공에 휘둘러봤다.
금속이 원래 무겁지만 쓰레기 칼임에도 묵직한 맛이 느껴졌다. 소년의 근력으로 장시간 사용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더 가벼운 칼을 찾고 싶지만 여긴 이런 것 밖에 없다. 가격을 물어보니 역시나 싸다. 데보라의 미소 띤 얼굴이 한층 더 화사해졌다.
“이걸로 할래?”
“응.”
칼을 구매 후 마크가 있는 곳으로 걸어가면서 손가락으로 검신을 튕겨봤더니 내구성이 형편없어서 금방 부러져버릴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뭐, 그렇게 심해보이는건 아니고 짐승 네, 다섯 마리 정도는 잡을 수 있을듯한 나약한 내구성이다.
하지만 쓰레기 칼이라도 있어서 마음이 편안해졌다. 꼴에 무인이랍시고 버나드는 손에 칼을 쥐고 있으니 기분이 좋았다. 나를 조금이라도 지킬 수 있다는 생각에 무척 안심이 되었다.
버나드는 데보라와 함께 사람이 북적이는 노점 사이를 걸었다.
“버나드가 이제부터 누나의 호위 무사가 되어주는거야?”
“어? 응.”
버나드는 진심이 없는 어조로 대충 대답헀다. 그 느낌을 아는지 데보라는 그를 보며 어딘가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 친구처럼 편하게 대하던 고위 기사며 대뜸 칼을 사는 것까지, 행동 하나하나가 너무 특별나서 평범한 소년으로 보기에는 괴리감이 있었다.
“아까 그 고위 기사님은 누구니? 네 아랫사람인줄 알았단다? 혹시 너도 귀족이야?”
갑작스러운 질문에 버나드는 당황하지 않았다. 그의 이전 직업 특성상 누군가를 속이기 위해 거짓말을 입에 달고 살아야할때도 있었기에 그의 반응은 매우 담담했다.
“어렸을때 알고 지내던 옆집 형이었는데 우연히 출세해서 기사가 된거야. 나보다 훨씬 잘난 배경을 갖게 되었지만 어렵게 대하지 말고 전처럼 편하게 지내자고 하더라고.”
“아하, 그래? 그랬구나… 음……”
궁금증을 잔뜩 품은 데보라는 계속 물었다.
“근데 칼은 갑자기 왜 산거야? 칼 쓰는 법을 배운적 있니?”
그녀와 나란히 걸어가던 버나드는 턱을 긁으며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없어. 그냥 샀어. 써 보고 싶어서. ‘남자는 칼이지’란 말도 있잖아.”
“남자는 돈이지.”
“하하, 그럴 수도 있겠네.”
자신의 말에 웃음을 터뜨린 버나드가 귀여운지 데보라는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빨리 가서 텐트치고 밥 먹자.”
“응.”
그때 어떤 기사가 목청 높여 소리쳤다.
“미셸 영주님께서 돌아오셨다! 길을 비켜라!”
동시에 한쪽만 닫혀있던 플랫폼의 출입문이 양쪽으로 열리기 시작했다.
“어서 길을 열어라! 말과 마차에 깔려죽어도 책임 안져! 빨리 비켜!”
북적이던 군중들이 양옆으로 갈라지며 길을 만들어냈고, 버나드와 데보라도 얼른 길옆으로 비켜섰다.
잠시 후 활짝 열린 출입문 너머로 화려한 마차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때, 군중들 속에서 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남자가 버나드의 시선에 잡혔다. 사람들은 하나 같이 아름답고 고귀한 영주 아킨테의 미셸이 돌아왔다라며 굉장히 들뜬 분위기로 마차를 응시하고 있었으나 남자만은 달랐다. 그의 시선은 출입문과 가까운 곳에 세워진 망루 위를 향하고 있었다.
버나드는 남자의 시선을 따라 망루 꼭대기를 쳐다보는 순간 눈이 크게 떠졌다. 꽤나 익숙한 인물이 망루 위에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이름이 레파스였던가. 녀석은 암살을 전문으로 하는 라인 형제중 장남이었다.
일찍이 밤의 늑대들은 전국 각지에 있는 범죄 조직 및 무력단체, 무리를 짓지 않고 개별적으로 움직이는 암살자들의 활동 또한 꿰고 있었다. 그리고 왕을 위해 임무를 수행하면서 그들과 마주치는 일도 잦았다. 라인 형제들도 그중의 하나다. 그들은 주로 귀족들을 암살하는 일을 청부 받아왔다. 예전에 버나드는 프레드릭왕을 적대시하는 귀족을 죽이기 위해 라인 형제를 이용한 적도 있었다. 그때 레파스를 만나 직접 거래를 제안했기에 레파스의 얼굴만 알고 있었으나 아마도 방금 전 남자는 차남 릭이라 예상되었다. 라인 형제는 장남 레파스와 차남 릭 단 둘로 구성된 암살집단이다.
‘미셸이 목적인가? 아니면 그 딸 샤를?’
버나드는 불쑥 얼마전 기억이 떠올랐다.
‘제 2차 걷는 사자 전쟁을 벌일 계획이네. 물론 난 뒤로 빠져 있을 거야. 뒤로 빠져서는 자식들간의 싸움을 부추길 생각이지. 서로 왕좌를 차지하기 위해 싸우다 보면 하나씩 하나씩 죽어나가겠지? 지들끼리 싸우느라 바빠서 내게 암살자를 보내거나 왕도를 공격하려는 생각따윈 꿈도 못꾸겠지. 어떤가, 내 생각이. 멋지지 않나? 으흐흐흐…’
이랬던 프레드릭왕의 말.
‘설마… 전하의 뜻대로 제 2차 걷는 사자 전쟁이 시작되었단 말인가?’
버나드가 생각에 잠겨있는 동안 망루 위에 있던 레파스는 어느새 화살을 시위에 메기고 쏠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목표를 일격에 죽여야하는 암살자가 가진 화살인만큼 보통 화살이 아니었다. 버나드의 짐작대로라면 저것은 광범위한 공격성을 자랑하는 산성화살이다. 미셸과 그녀의 딸 샤를을 마차채로 녹여서 죽일 생각인 것이다.
‘아킨테의 미셸이 죽는다면 우리 왕국의 손해는!? 이득은!?’
버나드는 다급해졌다.
“그게 문제냐! 그녀가 죽는다면 내가 왕도를 벗어나지 못하잖아!”
그는 다짜고짜 소리를 지르며 앞으로 튀어나갔다.
“버나드!”
곁에 있던 데보라가 깜짝 놀라며 급하게 말리려해봤지만 이미 늦었다.
마차를 위해 열어둔 길로 홀로 튀어나온 버나드는 크게 외치며 망루 위를 가리켰다.
“암살자다! 저기 있는 남자가 미셸님을 노리고 있다!”
“그게 뭔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여?”
“어떤 미친놈들이 미셸님을 살해할 생각을 해?”
군중들은 난데없는 소리에 놀라면서 일제히 망루 꼭대기를 쳐다봤다. 버나드의 말대로 한 사내가 활을 든 채 멀리있는 마차를 조준하고 있자 너나할 것없이 ‘저놈 잡아라!’ 하며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비명을 지르는 여자도 있었다.
“저놈 누구야? 저놈 아는 사람있어?”
“우리 소속은 아니야! 처음보는 얼굴이다!”
“그럼 잡아!”
기사 몇 명이 재빨리 망루를 향해 뛰어갔고, 당황한 레파스는 이제 막 출입문을 통과한 마차를 향해 화살을 날렸지만 집중을 못 해서인지 크게 빗나가버렸다.
그러는 사이 버나드는 라인 형제의 차남인 릭을 뒤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