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화 〉장거리 이동수단, 플랫폼2
“마녀의 짓이지.”
“저 할망구가요?”
“싸가지 없는 놈! 마녀님으로 부르겠다며!”
멜라니아가 욕설을 뱉으며 투덜거렸고, 버나드가 웃으며 대답했다.
“말하자면 길어. 나중에 설명할게.”
줄곧 옆에 서있던 데보라는 깜짝 놀란 얼굴로 버나드를 신기하게 바라보는중이었다. 그러다 갑자기 버나드의 옆구리를 콕콕 찔렀다. 버나드가 그녀를 돌아보자 팔짱을 끼고 웃는 얼굴로 왠지 무서운 분위기를 풍겼다.
“버나드? 어째서 고위 기사님이 네게 무릎을 꿇고 예를 갖추는지 이 누나한테도 설명해주면 참 좋겠구나. 말 안해주면 밥을 안주는 수가 있단다?”
웃으면서 협박 아닌 협박을 하는 그때였다. 기사들한테 계속 처맞고 있던 마크가 허겁지겁 달려와서 줄리안의 다리를 필사적으로 붙잡고 매달렸다.
“아구, 기, 기사님! 버나드랑 아는 사이신 것 같은데 저 좀 살려주십시오! 부, 부탁합니다! 제발 저 좀 구해주십시오! 아흑흑!”
줄리안은 묵묵히 고개를 돌려 버나드를 바라봤다.
버나드가 고개를 끄덕이자 줄리안이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며 세 명의 기사들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넌 뭐야?”
“왕궁 소속이냐?”
“뭘 폼 잡고 걸어오고 있어?”
“너희 셋, 잘 들어. 나 치안대에서 나왔어. 니들이 길거리에서 폭행을 일삼는 바람에 시민들이 무섭다고 신고해서 패는거야.”
줄리안은 허리에 차고 있던 칼을 노련하게 칼집채로 빼들었다.
그리고……
줄리안이 세 기사를 걸레짝으로 만드는데 걸린 시간은 채 2분도 되지 않았다.
***
줄리안 덕분에 남쪽 성문을 통과하기는 쉬웠다. 그에게는 별다른 검문없이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는 특별 통행증이 있었다. 비밀 임무를 수행하는 요원이기에 늘 소지하고 다녔다.
“전하께서 직접 하사한 통행증이군요. 이 길은 복잡하니 일행분들과 같이 이쪽으로 오십시오. 바로 나가실 수 있습니다.”
경비병의 안내를 받아 고위 귀족들이 오가는 별도의 문으로 왕도를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
“와우! 성밖이다! 드디어 탈출했다!”
“오라버니, 아무리 신이나도 그렇지 큰 소리로 떠들다간 붙잡혀간다고요?”
다른 일행들이 앞서 나가는 동안 버나드는 그 뒤에서 줄리안과 함께 나란히 걸었다. 그러면서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을 모두 이야기했다.
이윽고 이야기가 끝나자 줄리안은 먼 곳을 한번 바라보더니 말했다.
“마녀가 좋은일 했네요.”
“소감은 그것뿐인가?”
“그것뿐이죠. 아, 그렇지. 이제야 전하가 미운가요?”
그 질문에 버나드는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그는 시선을 내리며 망설였다.
줄리안은 그를 빤히 바라보다가 다시 정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래도 한단계 진보했네요. 전에는 전하를 믿는다고 바로 대답이 나오더니 지금은 망설이시네. 당신이란 사람 참… 충성심이 대단해… 존경스러워.”
버나드는 화제를 돌렸다.
“같이 떠나자고 하면 당연히 거부하겠지?”
“당연하죠. 안정된 삶을 살고 있는데 괜히 나가서 고생하고 싶지 않네요. 말씀드렸잖아요. 전 당신을 배신했다고.”
“나스키라 아타체도 이젠 소용없는 말인가?”
“그런셈이죠. 전 비겁한 배신자니까요. 그리고 무엇보다, 그냥 지금은 저 하고 싶은대로 살고 싶네요. 그동안 절 가혹하게 다루던 직장 상사한테서 마침내 해방된 느낌이거든요. 당분간 자유를 만끽하고 싶어요.”
줄리안의 말에 버나드가 큭큭 웃었다.
“날 잡아가면 블라쉬가 아주 좋아할텐데 왜 내버려두는 거지?”
“뭐하러 그런 일을 해요, 피곤하게. 단장님을 잡아가봐야 블라쉬의 공으로 돌려지겠죠. 제가 미쳤다고 블라쉬 좋은 일을 하겠습니까? 그럴바엔 블라쉬를 골탕먹이는게 천배 낫지. 그나저나 레아는 어떻게 생각해요? 그녀를 원망하십니까?”
“레아… 솔직히 원망해. 하지만 그녀에 대해 아무말도 하고 싶지않아. 떠올리기도 싫어.”
“저 같으면 쌍욕을 했을겁니다.”
줄리안은 진지했던 표정을 풀면서 머리를 긁적였다.
“근데 기분이 정말 이상하군요. 나보다 키 작은 어린애가 나한테 내려다보듯이 말하는게 적응이 안돼요. 목소리도 애 목소리고. 예전 모습의 단장님이라 생각하며 겨우겨우 대화를 하긴 하는데 굉장히 우스운 꼴이군요.”
“기필코 방법을 찾아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갈거야.”
“저 할망구가 해준댑니까? 방법을 안대요?”
“대화할 시간이 없어서 아직 안물어봤어. 여유가 생기면 물어봐야지.”
“저 양반 꽤 고약하던데 순순히 말해줄려나 모르겠네.”
줄리안은 발걸음을 멈추고 하품을 하며 기지개를 쭉 켰다. 그리고 버나드의 한쪽 어깨를 툭툭 토닥였다.
“뭐, 모쪼록 잘 풀리시길 바랍니다.”
“돌아갈거야?”
“예, 이제 가봐야죠. 여기 더 있어서 뭐해요. 왕비님과 왕세자를 시해한 범죄자랑 같이 있는거 걸렸다간 큰일나게.”
버나드가 황당한 웃음을 터뜨렸다.
“넌 진짜 개같은 놈이야.”
“어라? 저한테 함부로 그런 말을 했다간 다쳐요. 꿀밤을 쥐어박을 수 있을 만큼 작아지셨다는걸 아셔야죠. 어른 앞에서 말조심합시다.”
“내가 누구를 더 원망해야 하는지 모르겠군. 왕인지 너인지. 지금 이 순간엔 네가 무척 얄밉다.”
“부디 제게 원한을 품지 마시길. 원한은, 왕에게로. 다시 한번 강조해서 말씀드리지만 아이다썬의 프레드릭 레온에게로. 그럼 잘가십시오.”
줄리안은 장난꾸러기 마냥 손을 가슴에 대고 깍듯이 허리를 굽히며 작별인사를 건넸다.
“너도 잘 가라.”
“언젠가 다시 만날겁니다.”
“그럴 날이 빨리 오기를.”
“지금 그 말이 저를 더욱 슬프게 만드네요.”
“응?”
“아니예요, 아무것도. 혼잣말 좀 해봤습니다.”
“혼잣말 하는 것도 병이야. 좋은 여자를 만나고 싶다면 빨리 고치는게 좋아.”
버나드는 미소를 띤 채 줄리안의 가슴을 툭치며 발길을 돌렸다. 기약 없는 이별이건만, 서로 알고 지낸 시간에 비해 이별은 허무할 정도로 가벼웠다. 버나드가 일행들쪽으로 걸어가자 등뒤에서 줄리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크게 외쳤다.
“예쁘장한 꼬마가 된 김에 귀부인들 보지 빨아주는 일이나 해보시죠! 요즘 왕도건 지방이건 귀부인들 사이에서 미소년을 정부로 삼는게 유행이라더군요! 돈 많이 벌겁니다! 어쩌면 모 귀부인의 부드럽고 빵빵한 젖탱이를 쪽쪽 빠는 맛에 증오 따위 생각 안날지도 모르죠!”
버나드는 피식 웃으며 뒤를 향해 손가락 욕을 날렸다.
“알려줘서 고맙다! 참고하지!”
“별말씀을요!”
줄리안은 떠나는 버나드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미소를 짓고 돌아섰다. 성문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면서, 그동안 버나드와 함께했던 시간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지나갔다. 또한 그 좋았던 날들이 다시는 오지 않을 것이란 생각에 입안에 씁쓸함이 감돌았다.
그는 바닥에 자란 잡초를 뜯어 입에 물면서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열심히 왕국을 지킨 영웅이 비참한 길을 걷네~♪ 나는 열심히 지키지 말아야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성문쪽을 쳐다보는 순간, 화려한 마차가 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이쪽으로 오는 것이 보였다.
줄리안은 선두의 기수가 들고 있는 깃발의 문장을 보고 마차에 탄 사람이 누구인지 곧바로 알 수 있었다.
‘아킨테의 미셸인가. 왕의 전처였던……’
죽시 발걸음을 멈추고 입에 물었던 잎사귀를 뱉어냈다. 그리고 예를 갖춘 자세로 머리를 숙였다. 왕가 소속이라고 자랑하듯이 왕가 문양이 박힌 갑옷을 입고 있었기에 저들도 본인을 알아볼 것이고, 그렇기에 왕의 전처를 향해 어느 정도 공경심을 표해야했다.
줄리안은 고개를 숙인 상태로 마차가 지나가기만을 조용히 기다렸다.
그의 짐작대로 점점 다가오는 마차안에선 미셸과 그녀의 딸 샤를이 일찌감치 그에게 시선을 던지고 있던 중이었다.
“어머니, 저기 서 있는 사람 왕실근위대 소속 기사인가보네요. 저런 화려한 갑옷은 근위대 기사들만 입지 않던가요?”
“아니. 아니야.”
“제 말이 틀렸어요?”
미셸은 옛기억을 더듬듯이 약간 미간을 찡그린채 창밖에 우두커니 서있는 줄리안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 순간 마차는 순식간에 그를 지나쳤다. 미셸은 시선을 거두며 딸을 돌아봤다.
“방금 그 사람을 안다. 얼굴이 기억나는구나.”
“궁에 있을때 알고 지냈어요?”
“말을 나눠본적은 없어. 하지만 그를 잘 알지.”
“어떻게요?”
“어느날 전하가 술에 잔뜩 취해 호기로 기사 몇명을 침실로 불렀었지. 처음 본 것은 그때였어. 전하는 저 사람을 비롯해 다른 사람들을 가리키며 자신을 호위하는 비밀조직 기사들이라고 하면서 침을 튀기면서 자랑했었지. ‘미셸! 이들의 정체를 아는 사람은 우리 왕국에서 극소수에 불과하지! 오늘 본걸 영광으로 알아!’ 라면서.”
“아… 비밀 기사 조직도 있었구나. 신기하다. 소설속에서만 봤었는데 현실에도 있을줄이야…”
“현재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여있어도 전하가 건재한건 저들 때문이야. 이름이 아마… 나이트 울프라고 했던가? 하여튼 간에 밤의 늑대들이라고 들은것 같구나.”
미셸은 다시금 기억을 되짚어 보았다.
“그때 저 남자는 둘째치고 그의 단장이라는 자가 꽤나 듬직해보였는데…… 잠깐 봤을뿐인데도 인상이 강하게 남았었지. 나도 저런 가신을 두고 싶을 정도로. 망나니 같은 프레드릭 전하가 부러웠던건 그때가 처음이었어.”
“그 단장이라는 사람 얼굴 기억해요?”
“기억하는게 이상하지 않겠니? 잊어버렸어. 벌써 10년이나 지난 일이다.”
“방금 그 사람은 기억했잖아요?”
“그 사람은 내 호위도 몇차례 했었어. 하지만 그 단장이란 사람은 전하가 무척 취해서 나한테 자랑하고 싶어 부른날 말고는 궁에서 몇년을 지내도 마주치지 못했지. 이럴 정도면 벌써 죽은게 아닐까?”
“왜 죽어요?”
“사고사라든지, 자객의 칼에 맞았다든지, 원인은 많지.”
미셸이 웃어보였다.
문득 마부석과 연결된 작은 창문이 열리며 집사의 음성이 들렀다.
“미셸님, 우리 야영지에 다왔습니다.”
“빨리 왔군요. 알겠습니다, 내릴 준비를 하지요.”
“네, 끝까지 안전하게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작은 창문이 도로 닫히고 미셸은 창밖을 바라봤다. 저 멀리 자신의 기사들이 머무는 야영지가 보였다. 야영지에는 가문의 기사들 말고도 상인들과 여행자들 그 밖의 여러 사람들이 몰려들어 북적였으며, 통나무를 깎아만든 울타리 안에 수백개의 천막이 촘촘하게 세워져 있어 얼핏보면 작은 요새처럼 보이기도 했다.
***
“플랫폼 입구에서 돈을 걷을거야. 버나드 너 돈 있어?”
코에 반창고를 붙인 마크의 질문에 버나드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러자 마크가 혀를 찬다.
“빈대처럼 붙어 먹기만 할 셈이냐?”
“어린애잖아요. 돈이 어딨겠어요. 우리가 내줘요.”
“넌 내 여동생인데 왜 피도 안섞인 놈만 편드냐? 쳇.”
버나드를 두둔하는 데보라의 말에 마크는 투덜거리며 입구에서 돈을 걷는 사내에게로 향했다.
“헤헤, 수고들하십니다. 호위비는 얼마죠?”
“몇 사람이오?”
“하나, 둘, 셋…… 넷. 아, 네 사람입니다.”
“어디까지 가는데?”
“아킨테요.”
“그럼 우리랑 끝까지 가는거네.”
“헤헤, 그렇습니다. 잘 부탁드려요.”
“별일 없으면 대략 50일즈음 걸릴테니 72크랑만 내시오.”
“허걱, 그렇게나 많이……! 알, 알겠습니다. 흐윽, 피 같은 내 돈……!”
버나드는 손을 벌벌 떨며 돈을 건네는 마크를 보며 피식 웃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곳은 드넓은 초원의 한가운데 세워진 아킨테 영주 미셸의 플랫폼.
영주와 그 기사들은 단순히 야영지라고 부르지만, 이곳을 이용하는 여행자나 상인, 플랫폼을 따라다니며 호객행위를 하는 창녀들, 개인용무로 먼 곳을 이동해야 하는 평범한 귀족 등 여러 사람들은 이곳을 플랫폼(platform)이라고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