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화 〉데보라와 마크, 방패막이3
“누나랑 같이 있고 싶은거야?”
“응… 누나 좋아.”
“정말? 어머, 예뻐라!”
데보라는 기뻐하며 버나드를 와락 껴안았다. 반면에 남자는 인상을 쓰며 소리쳤다.
“얀마! 헛소리하지말고 빨랑 떠나! 누가 자선단체인줄 아나!”
“오라버니.”
데보라는 결심을 굳힌듯 눈에 힘을주고 그녀의 오빠를 응시했다.
“불쌍한 아이예요. 우리가 두고 가면 굶어죽을지도 모른다고요.”
“쟤 데리고 다니다가 우리가 굶어죽게생겼다! 빨리 떨어지고 이리와서 짐수레나 밀어! 기사들 오기 전에 당장 떠나야 해!”
데보라는 싫은 표정으로 남자를 빤히 바라보다 갑자기 짐수레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러고는 짐칸에서 자신의 짐보따리를 집더니 오빠를 돌아봤다.
“전 이 아이와 남겠어요. 혼자가세요.”
“뭐, 뭐, 뭐? 너 그걸 말이라고 해?!”
남자는 한숨을 푹 내쉬더니 도저히 안되겠는지, 답답한 표정으로 버나드의 손목을 붙잡고 구석으로 끌고 갔다.
“넌마 그거 알아야 해.”
“뭐?”
버나드는 순진무구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러자 남자가 다시 한숨을 내쉬더니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쟤 미쳤어. 내 여동생이지만 미쳤다고. 한마디로 제정신이 아니란 소리야. 알겠어? 미친년이라서 어느 순간 널 잡아먹으려 들지도 모른다고.”
“안믿어.”
“진짜라니까? 쟤 사실 얼마전까지만 해도 니 또래만한 꼬마애를 알고 지냈었어. 이웃주민들이 친남동생으로 착각할 정도로 걔를 아주 잘 보살펴줬지. 길고양이를 돌보듯 말이야. 내 여동생이 좀 많이 착하긴 해. 특히 애들을 많이 좋아하지. 아무튼 걘 이웃에 살던 꼬마였어. 무지 가난한 집에 살았지. 그러다 병에 걸려버린거야. 불치병. 끙끙 앓다 석달전에 죽어버렸어.”
“그래서?”
“답답아. 그러니까 넌 걔 대타일뿐이라는거야. 너 애완동물 안키워봤어? 개 키우다 죽으면 어쩌고 싶어? 외롭고 허전한 빈 구석을 채워줄 수 있는 새로운 개를 사오지 않을까? 그거랑 똑같은거라고. 넌 그냥 새로 사온 개일뿐이라는거야. 여동생은 지금 예전에 보살펴주던 애가 생각나서 너한테 감정이입한거라고. 이해해? 넌 걍 대타야. 잠깐 지나가는. 나중에 쟤 감정이 괜찮아지면 비참하게 버려질거라구.”
남자는 말을 마친 후 잠시 버나드를 빤히 주시했다.
“…버려지는게 무섭지 않아?”
“……”
버나드는 짧은 순간 프레드릭왕이 떠올랐다. 그러나 이내 머릿속에서 지웠다. 그는 남자를 향해 해맑게 웃어보였다.
“버려져도 상관없어. 지금은 같이 있을 수 있잖아. 그거면 돼.”
“뭐 인마?”
버나드는 사실 남자와 데보라의 존재에 대해 예전부터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정확히는 세달 전이다.
하루에 왕을 만나고 싶다고 요청해오는 이들이 수십명이었다. 비밀리에 왕의 경호도 겸하는 밤의 늑대들은 왕에게 접견 신청을 하는 사람들의 신원을 일일이 파악하고 자격이 충분치 않은 사람을 가려내는 일도 했었다.
“무명 화가가 전하를 알현하고 싶다고 한 귀족을 통해 요청해왔다. 데보라 라일리, 마크 라일리. 이들에 대해서 신원조사해봐.”
버나드는 데보라와 마크의 신원조사를 레아에게 맡겼고, 그녀는 이틀후 버나드를 찾아왔다.
“마크 라일리. 32세. 주변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종종 어리숙한 모습이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다년간의 무명 화가 생활을 통해 쌓인 생활력과 성실함으로 그를 아는 사람들에게는 큰 신뢰를 받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전하와의 만남은 위쇼 남작에 의해 추진되었고, 마크 라일리는 이를 위해 본인의 전 재산을 위쇼 남작에게 건네준 모양입니다. 그런데 위쇼 남작은 더 큰 금액을 원했는지, 마크 라일리는 그에게 전 재산을 갖다 바치고도 모자라 모자란 금액을 위쇼 남작에게 빌렸다고 합니다.”
책상에 앉아 가만히 듣고 있던 버나드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어리석군. 위쇼 남작에게 당했네.”
“절박했나봅니다. 마크 라일리는 전하와 만나기만 하면 유명 화가가 될거라며 기대에 가득 차있었습니다.”
“내가 전하의 성격을 아는데, 마크 라일리는 결국 빚쟁이가 될거야. 위쇼란 작자는 원래 그런놈이거든. 무명 예술가들에게 전하를 소개시켜준다면서 접근해 자신에게 돈을 빌리게 한뒤 패가망신시키는게 취미지. 좌우지간 다음. 그의 여동생은?”
레아의 시선이 두 손에 들고 있는 종이로 향했다.
“데보라 라일리. 23세. 오빠인 마크 라일리와 달리 그녀는 똑똑하고 느긋한 성격을 가졌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변장을 통해 직접 만나보니, 게으른 것은 아니지만 말투나 행동을 보면 뭐랄까… 차분하고 여유로웠습니다. 얼굴에는 항상 미소를 띠고 있더군요. 그리고 남을 잘 보살피고 참견하는 버릇이 있어 사람들을 잘 도와준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특히 애들을 많이 좋아하는 것 같았습니다. 얼마전에 이웃주민의 아이가 죽자 매일 그 아이의 무덤에 가서 꽃을 놓고 오더군요.”
“정이 많은가 보군. 그외 다른건?”
“마크 라일리나 데보라 라일리나 둘 다 평범한 하류층이라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특별한 것은 없습니다.”
“알았다. 두 사람을 승인해. 전하와의 만남을 허락하겠다.”
“네, 말씀대로 전하겠습니다.”
며칠 후 마크는 여동생과 함께 그가 간절히 바라던 왕성을 방문했다.
때마침 버나드는 한가한 시간이기도 해서, 프레드릭왕과 만나고 있는 두 사람을 멀리서 조용히 지켜보았다.
한껏 화가다운 복장으로 멋을 내고온 마크는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왕좌에 앉은 왕을 그리는 중이었고, 데보라는 조수로서 그동안 마크가 그렸던 그림들을 주위에 하나씩 전시하고 있었다.
그렇게 왕이 알현실에 들어온지 5분도 안지났을때였다.
“하아암, 지루해.”
프레드릭왕은 갑자기 하품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별다른 말도 없이 그대로 떠나버렸다.
“저, 전하……?”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인지라 뒤에 남겨진 마크는 멍한 표정을 지으며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실감이 안나는 눈치였다.
데보라가 다가와서 안타까운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오라버니, 이번에도 아닌가봐요. 전하도 오라버니 그림을 싫어하나봐.”
“헐……”
이후 데보라에게 뒷목깃을 붙잡힌 채 마크는 넋이 나간 표정으로 질질 끌려나갔다.
두 사람에 대한 버나드의 기억은 거기서 끝이었다.
그리고 오늘, 그 두 사람과 다시 만났다.
“이봐 마크! 말 사논거 없어?”
뒤에서 짐수레를 밀고 있던 버나드가 소리치며 묻자 앞에서 전력을 다해 끌고 있던 마크가 헉헉대며 큰 목소리로 대답했다.
“가난한 예술가한테 말은 사치야! 불평하지말고 밀어 인마!”
멜라니아와 함께 짐칸에 타고 있던 데보라가 미소지었다.
“버나드, 누나가 이따 맛있는거 해줄게. 힘내?”
“데보라도 내려와서 같이 밀면 안될까?”
“어머, 연약한 누나한테 힘든 일을 시키려는거야? 슬퍼.”
버나드와 멜라니아는 결국 마크와 데보라의 일행이 되었다. 네 사람은 왕도를 빠져나가기 위해 남쪽 성문을 향해 계속해서 내달렸다. 버나드는 가끔씩 뒤를 돌아보며 저 멀리 우두커니 서있는 왕성을 바라보곤 했다.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빛나던 시기에 지냈던 왕성. 그것이 점점 멀어지는 것을 보며 버나드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
방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클리프는 와인 두 잔이 놓인 은색 쟁반을 한손으로 들고 점잖게 노크했다.
똑똑.
그러자 방안에서 하녀들에게 둘러싸여 머리 손질을 받고 있던 마가렛이 급하게 뒤를 돌아보았다.
“수, 숙부님!”
“하하, 가만히 앉아계십시오. 들어가겠습니다.”
“네, 드, 들어오세요.”
“내일 집에 간다고 말해줘서 고마워요.”
“아, 아니예요… 숙부님께 폐를 끼치는건 아닐지…”
“전혀, 전혀! 전~혀 폐가 아닙니다. 오늘 묵고 가라는건 나의 제안이었으니 즐거운 마음으로 하룻밤 묵다 가십시오.”
“가, 감사해요.”
“제 가슴 깊은곳에 자리잡은 신사의 양심이 사랑스러운 레이디를 보살펴주라 외치고 있었습니다. 불쌍하고 가련한 그대를 보니 뭐든 해주고 싶은 동정심이 마구마구 솟아나더군요.”
“아, 네……”
클리프는 안으로 들어와서 쟁반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 하녀들을 슬쩍 쳐다보았다.
그가 눈치를 주자 세 명의 하녀는 서둘러 빗질을 끝마치고 얼른 방을 빠져나갔다.
하녀들이 떠난뒤 클리프는 자연스럽게 방문을 걸어잠갔다. 그러고는 거울 앞에 앉아있는 마가렛에게 활짝 웃으며 다가갔다.
“오오, 아름다워요. 가꾸니 더욱 아름답습니다…!”
클리프가 양팔을 활짝 벌리며 그녀의 외모를 찬사하자 마가렛은 양볼을 붉게 물들이며 수줍어했다.
“쑤, 쑥스럽네요.”
“부끄러워하지마세요! 자신의 빛나는 외모를 세상에 자랑하십시오! 선물해준 드레스와 목걸이는 마음에 드십니까?”
“그럼요. 전부 예쁘고 좋은 것들이라 어찌 보답을 해드려야할지……”
“부담갖지 않아도 됩니다. 내가 당신에게 바라는 것은 단 하나뿐이거든요.”
“어, 어떤거요?”
마가렛이 조심스레 묻자 클리프는 방긋 웃으며 탁자로 걸어갔다.
그는 은색 쟁반에 놓여있던 와인 두 잔을 양손에 들어보였다.
“와인 한잔 마시면서 저와 대화를 나눠주면 됩니다. 그것뿐이에요.”
클리프는 밝게 이를 드러내고 웃으며 마가렛에게 윙크를 날렸다.
“아름다운 숙녀분과 함께 하는 이 순간이 제겐 무척 영광입니다. 자, 한잔 하시죠.”
“고맙습니다.”
“술은 잘 마시나요?”
“조, 조금요.”
“저를 위해 이 한잔만 비워주십시오. 부탁합니다.”
“네. 당연히 그래야할 것 같아요. 오늘 많은 신세를 졌는데 남기면 실례니까요.”
두 사람은 건배를 한뒤 술을 마셨다.
마가렛은 숙부에게 보여주려는듯 평소보다 과하게 한모금 이상을 쭉 들이켰고, 클리프는 그 모습을 보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는 매우 음흉했다.
“마가렛, 어머님은 집에 계십니까? 어머님과 둘이 사나요?”
“어머님은… 3년전에 돌아가셨어요. 왕궁에서 시녀 일을 하다 얻은 전신 화상 때문에 고생을 하시다 세상을 떠나셨죠…”
마가렛은 고개를 숙이며 슬픈 표정을 지었다.
“저런, 곁에서 돌보느라 고생이 많았겠습니다. 삶이 풍족하지 않았겠군요.”
“돈을 벌기 위해 마을의 과부들과 시체닦는 일을 했어요. 못배우고 무식한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단순 노동 밖에 없었거든요.”
“도와주는 이는 없었습니까?”
“시체닦는 일을 하다보니… 마을 사람들은 불길하다며 누구 하나 제게 말을 걸어오는 사람이 없었어요. 같이 일하는 과부들 말고는…”
마가렛이 화들짝 놀라며 눈을 크게떴다.
“호, 혹시 숙부님도 제가 더럽고 불길하다고 생각하면 바로 나갈게요! 저, 전 괜찮습니다! 익숙하니까요! 마음 편히 말씀해주세요!”
“오오, 진정하세요, 진정하세요. 저는 전혀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불길하다니요? 당신은 아름다운 꽃, 좋은 향기가 나는군요.”
클리프의 말에 마가렛은 금세 안심하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숙부님은 정말 좋으신분 같아요.”
“과찬이십니다. 마가렛. 당신이야말로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