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화 〉데보라와 마크, 방패막이1
클리프는 대뜸 마가렛의 손을 잡고 걷기 시작했다. 얼떨결에 딸려간 그녀가 놀라며 소리쳤다.
“자, 잠깐만요! 어디로 가시는거예요?”
“쉿. 다른 형제자매가 우리의 계획을 엿들을지도 모릅니다. 목소리를 낮춰주세요.”
그는 다시 느끼한 시선으로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당신과 내가 힘을 합치는 겁니다. 우리 둘이 힘을 합쳐서 이 걷는 사자 전쟁에서 승리를 하는거예요. 아시겠습니까? 지금부터 그대를 전심전력으로 보호해드리겠습니다. 나의 사랑스러운 조카여.”
“지,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데…”
“말했죠? 혼자 돌아갔다간 살해당할지도 몰라요. 우선 우리집으로 갑시다. 당신에게 예쁜옷과 화려한 장신구들을 선물해주겠어요. 그리고 집까지 안전하게 모셔다드리지요.”
클리프는 말을 마치며 또다시 윙크를 날렸다.
“하, 하지만…”
마가렛은 이 상황을 완벽히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어쨌든 자신이 현재 위험에 처했다는 것을 대충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자신을 곱지 않은 눈길로 쳐다보는 형제자매들이 보였다. 어째서 저런 눈길로 자신을 쳐다보는 것일까?
그녀는 제자리에서 한동안 깊은 고민을 하다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숙부님…”
***
버나드는 캄캄한 지하 바닥에 귀를 대고 엎드렸다.
그러자 저 멀리서 들려오는 미세한 떨림…… 발자국 소리다. 더불어 말소리도 언뜻 들려왔다.
“이쪽웅얼웅얼…… 따라가면 금방 웅얼웅얼…”
추격자가 자신들을 뒤쫓고 있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 거리가 있다. 버나드는 쥐고 있던 마녀의 짐을 내려놓고 뒤에서 느릿느릿 지팡이를 짚고 따라오던 멜라니아에게 다가갔다.
“등에 업혀.”
“뭬야? 나보고 네놈 등에 업히라고?”
“시간이 없다. 이렇게 가다간 따라잡힐거야.”
“내 아들을 죽인 네놈 등에 업히는것만큼 구역질 나는 것도 없다. 여기 칼도 있으니 놈들을 작살내면 되잖느냐. 네놈이면 가능하잖아. 왕국 제일의 마스터울프였잖느냐.”
버나드는 머리를 긁적이며 고개를 저었다.
“다 잊어버렸어. 칼 쓰는 법을 몰라.”
“뭐라고?”
마녀는 황당하다는 듯이 낄낄 웃어댔다.
“늑대 머리가 돌대가리가 되었구만.”
“멋대로 생각해.”
버나드는 다짜고짜 멜라니아를 들쳐업었다. 마녀랑 한가하게 입씨름을 할 겨를이 없었다. 그러나 마녀는 등을 때리며 저항했다.
“에고고, 이놈아 내려놔! 난 죽어도 싫어! 네놈이랑 붙어있으니까 피부에서 닭살이 돋는다!”
“여기서 죽고 싶은거야?”
버나드의 체격이 비록 전보다 작아졌지만 노쇠한 마녀는 소녀처럼 키가 작고 뼈만 앙상하게 남아있었기에 그리 무겁지도 않았다. 시간이 길어지면 체력적으로 힘들겠지만 어쨌든 지금은 괜찮았다. 짧은 거리 정도는 어깨에 들쳐매고 갈수 있을 것 같았다.
버나드는 바닥에 내려놓았던 짐을 한손으로 움켜쥐고 빠르게 출구를 향해 걸었다. 가는 동안 마녀가 계속 바둥거리며 시끄럽게 굴었으나 그는 아예 무시해버렸다.
잠시 후 몸에서 땀이 비오듯 쏟아지며 힘든 나머지 바둥거리는 마녀를 냅다 던져버리고 싶었으나 이를 악물며 간신히 꾹 참았다.
“이봐, 멜라니아. 당신을 데리고 가는 이유는 하나야. 날 원래대로 돌려놔. 소년이 아닌 성인의 몸으로 돌아가게 해달란 말이다.”
“낄낄, 네놈이 원래대로 돌아갈 방법은 없어. 고소하다 고소해.”
“거짓말하지마. 네가 이렇게 만들어놓고 방법이 없다고? 안믿어. 일단 안전한 곳으로 가서 느긋하게 얘기해보자고.”
다행히도 얼마 지나지 않아 지상으로 향하는 출구가 보였다. 출구는 오래전에 말라버린 우물터였다. 우물 밖으로 연결된 사다리를 밟고 올라가는 동안 멜라니아는 떨어지기 싫은지 내내 떠들어대던 입을 꾹 닫고 두 팔로 버나드의 목을 끌어안고 등에 매달려 있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지상으로 탈출했다.
밝은 빛이 내려쬐는 밖으로 나오자마자 어떤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왕도의 귀족들은 예술을 몰라!”
빠직!
무언가를 부수는 소리도 났다.
멜라니아를 바닥에 내려놓고 한숨돌리며 고개를 돌려보니, 우물 주변에 어느 화가의 남루한 가게가 자리잡고 있었는데 오늘 이사를 가는지 텅텅 빈 가게 앞에 세워진 짐수레에 온갖 그림 도구들이 잔뜩 실려있었다.
그런 가운데 어떤 남자가 액자에 담긴 그림을 쓰레기터 앞에서 부수고 있었고,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젊은 여성이 그 모습을 미소 띤 얼굴로 태평하게 지켜보는 중이었다.
“오라버니, 그만 부수고 얼른 가요. 이러다 빚쟁이들이 쫓아오겠어요.”
“내 그림을 알아봐주는 귀족만 있었어도 우린 갑부가 되었을거야! 예술의 가치를 몰라보는 바보 같은 귀족들! 귀족들은 그렇다 치고 왕까지 예술을 몰라볼줄이야 실망했어!”
빠직!
남자가 재차 분노를 표출하며 액자에 담긴 그림을 발로 부수는 순간이었다. 그는 멀지 않은 거리에서 지켜보고 있던 버나드와 시선이 마주쳤다.
남자가 화들짝 놀랐다.
“허걱! 어, 언제부터 있었니? 혹시 방금 내 말 들었어?”
버나드는 ‘쟤 왜 저렇게 놀래?’라는 표정으로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였다. 우물 밑에서 추격자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쪽이다! 저쪽에 출구가 있어! 모두 이리와!”
“예!”
동시에 남자가 당황한 표정으로 헐레벌떡 뛰어오더니 버나드 앞에서 난리법석을 떨었다.
“꼬, 꼬마야. 저, 전하와 귀족분들을 욕했다고 어디가서 이르면 안된다? 아, 아니. 난 전하를 욕한게 아니야. 내 친구들중에 와아앙이라는 녀석과 귀이이좆이라는 이름을 가진 놈들이 있어. 지, 진짜야! 그 놈들을 욕한거란다. 아하하하……”
초조해진 버나드가 심각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말 안할테니까 우리를 숨겨줘.”
“어? 숨겨달라고? 왜…? 너도 참 어른을 당황시키는 재주가 있구나.”
남자가 버나드와 돌 위에 앉아서 쉬고 있는 멜라니아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설마 숨바꼭질을 하자고?”
자신이 소년이라 그런가보다라며 버나드가 답답한 탄식을 내뱉는 와중에 남자의 여동생으로 보이는 여자가 끼어들었다.
“그게 아니잖아요, 오라버니. 상황을 보니까 누군가한테 쫓기고 있나본데요?”
오호, 이 여자는 제법 영리하군. 버나드가 그런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이 누나 말이 맞아. 급해, 빨리.”
“숨겨달라구? 숨겨주면 어디가서 안이를거지?”
그때 우물 밑에서 블라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버나드! 그 위에 있는 것 다 안다! 사람 구실도 못하는 그 병신 같은 몸으로 도망쳐봤자 소용없어! 빨리 포기하는게 좋을걸! 하하하!”
버나드가 눈을 크게 뜨며 남자를 향해 다그쳤다.
“빨리!”
“아, 알았어!”
“이리오렴!”
여자가 먼저 재빠르게 움직이며 버나드의 손을 잡고 짐수레쪽으로 달려갔다.
“여기 올라가서 숨어있으렴. 천으로 덮어줄게.”
남자도 서둘러 멜라니아에게 뛰어가 그녀를 번쩍 들어올렸다.
“하, 할머니. 숨겨줄테니까 손자 입단속 잘 시켜!”
“저 늑대새끼가 손자라니, 지랄하고 자빠졌네! 구역질 나는 소리하고 있어!”
발끈한 멜라니아가 손에 쥔 지팡이로 남자의 머리를 마구 때렸다.
“아유, 왜 이러는거야! 그만때려요 그만!”
버나드가 짐수레에 올라타자마자 남자도 신속히 달려와서 멜라니아를 짐칸에 내려놓았다. 이어 여자가 커다란 검은천을 가져와서 짐칸을 덮었다.
그때였다. 우물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버나드!”
갑옷을 착용한 남자들이 우물에서 올라오고 있었다. 체더, 와빈에 이어서 마지막으로 블라쉬가 올라왔다. 남자와 여자는 왕가의 걷는 사자 문장이 찍힌 갑옷을 보고 순간 두려움이 솟구쳤지만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척 짐수레 앞에서 딴청을 부렸다.
“어디갔지? 방금 목소리가 들렸던것 같았는데.”
블라쉬는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남자와 여자를 번갈아 쳐다봤다.
“거기 너희들, 이 우물에서 사지 잘린 병신이랑 할망구 올라오지 않았어?”
“예, 예? 모, 모르겠는데요!”
남자는 얼굴이 빨개져서는 바짝 긴장한 표정이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었다. 자신이 숨겼다고 대놓고 말하는 것 같았다. 들킬것을 우려한 여자가 재빨리 나서서 미소를 지으며 끼어들었다.
“제가 봤어요. 저쪽 골목길로 급하게 도망쳤어요.”
“그래? 할망구가 팔다리 없는 병신을 업고가든?”
“네? 팔다리?”
여자는 순간 자신이 본 사람들과 인상착의가 달라서 속으로 갸웃했지만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예, 할머니가 병신을 업고 가더군요.”
“거짓말이었다간 책임져야할거다.”
“전 범죄자가 싫어요. 언제나 정의로운 기사님들 편이죠. 낮이나 밤이나.”
여자가 엉덩이를 흔들며 미소를 지어보이자 블라쉬가 피식거렸다. 동시에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남자는 사내를 유혹하는 여동생의 기막힌 모습을 보며 남몰래 뒷목을 붙잡았다.
블라쉬는 두 부하를 쳐다봤다.
“체더, 와빈. 저쪽으로 가봐.”
“그러죠.”
“난 다른 길로 가겠다.”
“예.”
체더와 와빈이 골목길로 사라지고 나서 블라쉬는 여자를 돌아보며 음흉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러고는 발걸음을 옮기던 찰나였다. 그는 갑자기 여자의 뒤에 있는 짐수레에 관심을 보였다.
“저 안에 뭐가 실려있지?”
남자가 짐수레를 가리듯 나서며 서둘러 대답했다.
“제, 제 겁니다. 그림을 그리는데 필요한 도구들이죠. 지, 직업이 화가거든요.”
“화가라고?”
“저, 전에 왕궁에도 들어간적이 있습니다. 두, 두 달전인가? 아무튼 그때 전하와 영광스러운 만남을 가졌었죠. 헤헤…”
블라쉬는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는지 주위를 유심히 둘러보기 시작했다.
“가게가 텅비었군?”
“보시다시피 망했습니다.”
여자가 끼어들며 방긋 웃어보였다.
“오라버니 그림을 사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거든요.”
“그림 좀 볼 수 있을까? 저 수레에 실려있나? 하나 가져와봐.”
“저, 저, 저, 저쪽을 보십시오!”
남자가 황급히 쓰레기터를 가리켰다.
“다, 다 부쉈습니다. 저, 전, 제 그림 실력을 비관하고 있어요! 내가 그림을 너무 못그리나 싶어 절망하며 다 부숴버렸습니다! 앞으로 뭘해먹고 살아야하는지! 아이구 이 멍청이 같은놈!”
남자는 과장된 몸짓으로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었다.
“재능이 없으면 망해야지 별 수 있나.”
블라쉬는 그렇게 대꾸하며 짐수레쪽으로 다가갔다.
그가 조금씩 짐수레에 가까워질수록 숨 막히는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던 남자의 눈동자가 점점 커졌다. 남자는 급하게 위기를 모면할 수 있는 화젯거리를 찾아봤으나 지금 이 순간 그의 머리로는 역부족이었다.
“아~ 요즘 아랫도리가 너무 허전하네. 굵고 따뜻한 것 좀 삼켜봤으면…”
불쑥 그런 소리가 들렀다.
남자와 블라쉬의 시선이 동시에 여자에게로 향했다.
여자는 손으로 부채질을 하며 딴청을 부리더니, 이내 블라쉬를 향해 능청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싱글거렸다.
“기왕이면 체력 좋은 기사님이 좋은데. 오늘 데려가실 분이 없으려나…?”
남자는 여동생의 저질스러운 말을 듣고 놀라 자빠질뻔했지만, 블라쉬는 그녀에게 흥미가 생긴듯 발걸음을 멈추고 히죽 웃었다.
“재밌는 계집이군.”
“더 재밌게 해드릴까요?”
여자는 계속 자신을 봐달라는듯이 과감한 행동을 서슴지 않았다.
그녀는 바닥까지 닿는 기다란 치마를 두 손으로 우아하게 천천히 들어올렸다. 블라쉬의 탐욕스러운 시선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조금씩 올라가는 치마를 보며 그 밑으로 드러나는 맨살에 정신을 빼앗겼다. 치마는 서서히 올라갔고, 그녀의 얇은 발목에서부터 매끈한 종아리, 무릎을 지나 이윽고 치마 밑으로 드러난 여자의 허벅지살을 본 블라쉬가 휘파람을 불렀다.
“으흐흐, 좋은 눈요깃거리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