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화 〉걷는 사자 전쟁의 시작, 왕의 음모2
프레드릭왕은 궁내장관의 말을 들으면서 미리 건네받은 종이를 펼쳐보았다.
종이에 적힌 내용에 따르면 여태까지 낳은 자식들은 12남 8녀였고, 살아있는 자식들은 10남 8녀, 총 열여덞명이었다.
1. 왕세자 존 (적1남, 모친 캐서린) - 사망
2. 앤 (적1녀, 모친 캐서린)
3. 브랜든 (적2남, 모친 아말리아)
4. 콜먼 (적3남, 모친 아말리아)
5. 알렉시아(적2녀, 모친 아말리아)
6. 닐 (서1남) - 사망
7. 엘레나 (서1녀)
8. 윌리엄 (서2남)
9. 마가렛 (서2녀)
10.토마스 (서3남)
11.안젤리나(서3녀)
12.엘리노어(서4녀)
13.케네스 (서4남)
14.스콧 (서5남)
15.샤를 (서5녀, 모친 미셸)
16.블레어 (서6남)
17.테레사 (서6녀)
18.조지 (서7남)
19.로베르 (서8남)
20.로난 (서9남)
“이 중에서 한 녀석한테만 정을 붙여야해…… 적은 누구고 나를 보호할 수 있는 녀석은 또 누굴까……”
어느새 그 어미와 자식들의 소개가 끝나있었다.
“이어서 전하의 말씀이 있겠습니다.”
“수고했다, 궁내장관.”
“감사합니다 전하.”
프레드릭왕은 왕좌의 팔걸이를 손으로 만지작 거리며 자식들을 바라보았다.
“그대들을 오늘 이 자리에 초대한 이유가 궁금할 것이다. 서로 인사나 하라고 모이게 한게 아니야.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왕은 옆을 돌아보았다.
“그것을 가져오너라.”
“예.”
잠시 어디론가 사라졌던 궁내장관이 곧 양팔로 나무상자를 들고 나타났다. 그가 왕앞에 나무상자를 내려놓자 왕은 뚜껑을 열고 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이게 누군지 아느냐?”
홀안에 있던 사람들은 무심코 그것을 쳐다봤다가 이내 자기도 모르게 비명을 내지르며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도 그럴것이 왕이 들고 있는 것은 다름아닌 사람 머리였다.
“이 녀석은 서장자 닐이라고 하지. 너희 오빠일수도 있고 형일수도 있고 동생일수도 있다. 그런 이 녀석이 어쩌다 이렇게 비참한 꼴이 되었는지 아느냐? 그 이유인즉슨, 이 아버지를 해치려 들었기 때문이니라.”
프레드릭왕은 닐의 머리를 집어서 모두가 둘러앉은 기다란 탁자위로 던졌다.
“꺄악!”
닐의 머리가 탁자의 끝까지 데굴데굴 굴러가는 동안 여기저기서 재차 비명이 터져나왔다.
“너희가 알다시피 제 1왕위 계승자였던 존이 죽었느니라. 그리고 그로인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차기 왕위계승자 자리를 노리는 녀석들이 생겨났지. 나는 결코 이를 좌시할 수 없었다. 차기 왕위를 둘러싼 너희들의 파벌 싸움은 왕국에 혼란만 가져올테고, 자칫하면 왕국의 멸망을 야기시킬 수도 있는 일이니까. 따라서 차기 왕위계승자를 노린 권력암투가 더욱 심화될 기미가 보이기에 그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하기로 결정했다.”
프레드릭왕은 죽을때까지 왕좌를 지키고 싶은 본인의 욕심을 내색하지 않고, 그저 전처들과 첩, 자식들이 후계자 자리에 욕심을 부리는 바람에 현재 왕국이 소란스러워지고 있다고 몰아세웠다.
“하루빨리 왕위계승자를 정하는 것만이 왕국의 혼란을 수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고로 다음 왕위계승자를 지명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이 몸은 차기 왕위계승자가 될 기회를 여기 앉아있는, 내 핏줄을 물려받은 모든 자식들에게 공평하게 부여할 예정이다.”
“잠깐만요, 아버지!”
적장녀 앤 공주가 발끈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존이 죽었으니 다음 왕위계승자는 엄연히 저입니다! 일찍이 제 2 왕위계승자로 지목된 저라고요!”
“오늘 이 시간부로 네 왕위계승권 자격을 박탈하겠다. 다른 형제들과 마찬가지로 주어진 기회를 통해 왕위계승자가 되도록 하거라.”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갑자기 박탈하는게 어딨어요!”
프레드릭왕이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이 나라의 왕인 내게 대드는 것이냐?”
왕의 싸늘한 태도에 앤 공주는 즉시 입을 닫고 자리에 앉았다. 왕은 노쇠했지만 아직 위엄이 있고 힘이 있었다. 심기를 불편하게 하면 자식이라고 해도 가만두지 않았다. 계속 대들었다간 목이 잘린 닐의 꼴이 될지도 몰랐다.
“그럼 지금부터 왕위계승자가 될 수 있는 기회란 무엇인지 설명하겠다. 모두들 우리 레온 왕가의 가보 블랙드래곤의 심장에 관한 얘기를 들어봤을 것이다. 못들어봤으면 책을 찾아서 읽거나 주변인에게 물어보도록. 아무튼 100년 전, 우리 레온 왕국은 아케르니아 제국의 침입을 받아 블랙드래곤의 심장 반쪽을 약탈당했다. 제국과의 전쟁이 종전된 직후부터 지금까지 우리는 계속 블랙드래곤의 심장 반쪽을 반환해줄 것을 요구하고 있지만 그들은 귀를 꽉 막고 협상을 거부하며 무시하고 있지. 자, 모두들 잘 듣거라. 우리 레온 왕국을 통치하는 왕으로써 맹세하겠다.”
프레드릭왕은 목에 힘을 주며 이어말했다.
“아케르니아 제국으로 가서 그곳의 황제를 설득하고 약탈당한 블랙드래곤의 심장 반쪽을 돌려받도록 하거라. 차기 왕위계승자가 되기 위한 조건은 바로 이것이다. 훌륭한 협상을 통해 왕가의 가보를 되찾아오면 차기 왕위계승자로 인정해주겠다!”
아까 프레드릭왕에게 눈도장을 받으려 했던 엘레나가 조심스레 물었다.
“어, 어머니가 창녀 출신이라도 왕위계승자가 될 수 있는건가요?”
“물론이다! 모친이 천한 신분을 가졌더라도 블랙드래곤의 심장 반쪽을 되찾아 온다면 왕위계승자로 임명해주겠다!”
또 누군가 물었다.
“만약 아케르니아 제국으로 향하는 과정에서 먼저 도착하겠답시고 저희들끼리 싸움이 일어나면 어떻게 되는겁니까?”
“왕실은 너희들끼리 다툼이 일어난다해도 일절 간섭치 않겠다.”
“누군가 다치거나 죽는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해도요?”
“과정은 중요치 않다. 오로지 결과만이 중요하다. 그래서 나는 이 말을 하고 싶다.”
프레드릭왕은 양팔을 좌우로 크게 벌리며 힘차게 외쳤다.
“차기 왕위계승자가 되기 위한 너희들의 도전을 이 몸은 ‘제 2차 걷는 사자 전쟁’이라 명명하겠다!”
자리에서 가만히 지켜보던 미셸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프레드릭 당신…… 몇년 못본새에 완전히 미쳐버렸군. 걷는 사자 전쟁은 같은 핏줄을 타고난 오빠와 여동생이 서로를 죽이고 싶어 안달났던 끔찍한 전쟁이었다고… 그걸 또 반복할 생각이야?”
***
프레드릭왕의 제 2차 걷는 사자 전쟁 선언이후 홀안은 급속도로 냉각되었다. 오늘 다른 이야기가 나올줄 알고 내심 기대하며 참석했던 사람들은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듯이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홀안을 급히 빠져나갔다.
왕은 그들을 붙잡지 않았다. 사실상 제 2차 걷는 사자 전쟁이 이미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왕위계승자가 되기 위해 아케르니아 제국의 수도로 갈 생각이 있으면 서둘러 떠나야할 것이고, 왕이 의도한 태풍에 휘말리고 싶지 않으면 황급히 몸을 피해야 할 것이다.
“우리끼리 싸우게 할 생각이야. 난 아버지의 생각대로 움직이지 않을거야. 영지로 돌아가서 당장 군대를 일으키겠어. 뜻을 같이하는 형제들을 모아 빠른 시일 내에 왕도를 공격할거야.”
이름 모를 아들은 그런 말을 중얼거리며 홀을 떠나갔다. 스쳐지나가는 그를 샤를은 아무생각없이 바라보며 어머니 미셸의 손에 이끌려 밖으로 나가는 중이었다.
“어머니, 아버지 안만나고 떠날거예요?”
“인간 같지도 않은 인간이다. 네 아버지는 우리를 사지로 내몰았어.”
“무슨 말이에요?”
“너와 네 형제들을 죽일 생각으로 이 일을 벌인게 분명하단다. 걷는 사자 전쟁은 형제자매들간의 피를 흘리는 전쟁이었어. 그런데 2차 걷는 사자 전쟁이라니… 전하는 미쳤어.”
“왜 그런 짓을 해요?”
“모르지. 자식을 매정하게 버리는 인간의 속뜻을 누가 알겠니.”
“그럼 앞으로 어쩌시게요?”
“전하의 장난에 놀아날 생각은 없다. 우리는 걷는 사자 전쟁에 참가하지 않을거야. 하지만 참가하려는 멍청이들이 있을지 모르니 빨리 영지로 돌아가자구나. 애초에 여길 오는게 아니었는데, 지금 우린 굶주린 맹수들에게 둘러싸여있는 것과 다름없다.”
샤를은 미셸을 뒤따라가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홀안을 황급히 떠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몇몇은 홀안에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머릿속에 집어넣으려는듯이 예사롭지 않은 눈초리로 주의깊게 쳐다보고 있었다.
무엇보다 오늘 공개적으로 왕위계승자 자리를 박탈당한 앤 공주는 씩씩거리며 홀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다른 형제들 앞에서 망신을 주다니! 두고봐! 신전의 대주교님께 이 일을 말씀드려서 빼앗긴 권리를 되찾겠어!”
그러고 보면, 모친의 배경이 좋아 반듯한 가문에서 태어난 형제자매들은 걷는 사자 전쟁에 굳이 참가할 필요가 없으나 그와 달리 모친의 배경이 형편없어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형제자매들은 이번 걷는 사자 전쟁을 통해 신분 상승의 기회를 노려봄직했다.
주변에서 맹수 같은 눈빛을 빛내는 형제자매들 대부분이 옷차림이 초라했고 머리카락도 잘 다듬지 않아 조금 지저분했다.
‘저들은 참가할 생각인가…?’
샤를은 불쑥 두려운 기분이 들어 고개를 숙였다. 혹시나 모를 일에 대비해 형제자매들에게 자신의 얼굴을 알리기가 꺼림칙했다. 그녀는 계속 고개를 숙인 채 어머니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
***
“여기서 끝인가……? 다른 형제들하고 대화의 시간도 없이…… 이대로 끝? 다과 시간이라도 가질줄 알았는데……”
마가렛은 줄곧 눈치만 보다가 형제자매 대부분이 홀을 빠져나가기 시작하자 자신도 떠나야할 것 같아 조심스레 자리에서 일어났다. 프레드릭왕은 이미 자리를 비운지 오래였다. 오늘 이곳에 오기 직전까지 그녀는 처음 만나는 형제자매들과 차를 마시며 친해지는 상상을 해왔었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너무나 허무한 만남이었다. 사람들이 참 쌀쌀맞다. 그녀는 아쉬운 입맛을 다시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가 일어나서 출구쪽으로 몸을 돌리자 숙부인 클리프가 재빠르게 다가왔다.
“오 나의 귀여운 숙녀여. 돌아가시는 겁니까?”
“네, 숙부님.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그리고 도와주셔서 감사했어요.”
“감사는 됐습니다. 한 핏줄끼리 당연히 도와야죠. 그나저나 어디까지 가십니까? 마차로 태워다 드리겠습니다. 당신처럼 아름다운 숙녀를 혼자 보내기엔 행여나 나쁜 일을 당하지나 않을까 신사로서 심히 걱정되는군요.”
“아, 아니예요. 더 이상 폐를 끼칠 수 없어요.”
“부담갖지 말아요. 우린 한 핏줄이잖아요?”
클리프는 마가렛의 한쪽 어깨에 손을 올리며 윙크를 날렸다.
“혹시 일행이 있으십니까? 어머니가 같이 왔다든지?”
“일행은… 저 혼자예요.”
“맙소사. 여기까지 혼자서 온겁니까? 그 갸날픈 몸으로? 실례지만 사는 곳이 어디죠?”
“여기서 좀 떨어진 첼란 마을이요…”
“첼란? 첼란이라면 걸어서 가기 힘든곳 아닙니까. 세상에. 여기까지 정말 혼자서 온겁니까?”
“네… 뭐… 많은 사람들이 타는 이동 마차도 있고…”
마가렛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혼자서 왔다니 대단하군요!”
클리프는 부담스럽게 몸을 밀착하며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렇다면 더더욱 혼자 보내면 안되겠습니다. 홀몸으로는 위험해요.”
“어째서요?”
“다른 형제자매들에게 살해당할 위험이 있거든요.”
“네?”
마가렛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말씀을 이해 못하겠어요. 형제들이 왜 저를 살해해요?”
“제 말을 이해하려면 먼저 전하께서 말씀하신 걷는 사자 전쟁이란 단어의 속뜻을 해석할줄 알아야합니다.”
“무슨 뜻이 있는데요?”
클리프는 주변을 살핀뒤 다시 허리를 숙여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걷는 사자 전쟁이란 한 핏줄로 태어난 형제들간의 다툼을 의미하지요. 아까 전하께서 하신 말씀의 속뜻은 바로 이것입니다. ‘너희들끼리 싸워서 이긴 사람을 내 왕위계승자로 삼겠다.’”
“그, 그럴리가요!?”
“오 불쌍한 나의 조카여. 당신은 이미 격랑의 소용돌이 속에 빠져들고 말았습니다! 이 싸움에서 살아남으려면 당신 곁에 든든한 지원군이 있어야 합니다! 필수입니다!”
“머릿속이 어지러워요. 숙부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건지 모르겠어요. 너무 갑작스러워요.”
“걱정말아요, 그대. 이 클리프. 사랑스러운 조카를 힘껏 돕겠습니다. 나만 믿고 따라오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