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화 〉걷는 사자 전쟁의 시작, 왕의 음모1
고개를 바짝 쳐든 버나드는 점점 가까워져 가는 가마솥을 바라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미친 마녀야! 내게 죽음을 선택할 권리를 줘! 내 명예를 더럽히지 말란 말이다! 네년을 죽일거야! 네년을 진작에 죽였어야 했어!”
“낄낄낄! 지금 그 얼굴이 보고 싶었다! 두려움에 떠는 얼굴을 말이다! 너무 행복해!”
멜라니아는 기쁜 얼굴로 계속 핸들을 돌렸고, 이윽고 버나드는 비명을 지르며 가마솥 안으로 풍덩 빠져버렸다.
실내를 가득 메웠던 버나드의 비명이 단숨에 사라지고 마녀의 웃음 소리만이 울려퍼졌다.
버나드를 집어삼킨 가마솥의 끓는 물은 거품을 만들며 보글보글 피어올랐다.
“레아에게 고마워해라 늑대 녀석…… ”
멜라니아는 핸들에서 손을 떼고 지팡이에 몸을 기댄채 펄펄 끊는 가마솥을 지그시 쳐다보았다.
가마솥안에 담긴 정체 모를 액체가 빠른속도로 줄어드는 중이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가마솥안의 액체가 보글보글 끓어오르며 용솟음 치더니 돌연 사람이 튀어나왔다.
“으아아아!”
그가 비명을 지르며 밖으로 빠져나오려 발버둥치자 그에 못이긴 가마솥이 바닥으로 엎어졌다.
와장창!
운좋게 살아난 버나드는 단숨에 멜라니아에게 달려가 그녀의 목을 졸랐다.
“죽어어어어!”
“커억, 컥!”
그러나 치미는 분노에 휩싸여 무지막지한 살기를 내뿜는 것도 잠시, 버나드는 문득 위화감을 느꼈다.
마녀의 목을 조르고 있는 것은 분명 자신의 손일텐데 어른의 손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작고, 부드럽고, 깨끗한 피부를 갖고 있었다.
마치 처음보는 손 같았다.
아니, 그 전에……
자신에겐 손이 없을텐데?
“어떻게 된거야……?”
그는 멍하니 멜라니아의 목에서 손을 떼며 자신의 두 손을 물끄러미 살펴보았다.
“왜……? 왜 손이 있지……? 그, 그러고 보니 다리도……?”
“켁, 켁! 빌어먹을 놈, 죽는줄 알았잖아!”
멜라니아는 지팡이로 버나드의 등을 후려쳤다. 하지만 버나드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넋나간 얼굴로 벽에 걸려있는 전신거울 앞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잠시 후 전신거울에 비친 그의 모습은… 팔다리가 온전한 소년이었다.
“이, 이게 나라고……?”
***
버나드를 처리하기 위해 버나드의 자택에 미리와서 대기하고 있던 블라쉬와 그의 부하들은 뒤늦게 소식을 접했다.
“방금 버나드를 운반하던 병사가 와서 보고하길 마녀 멜라니아가 데려갔다고 합니다.”
“그 마귀할멈이? 뭐하려고?”
“모르겠습니다. 다짜고짜 화를 내기에 왕실 마녀이기도 하고 어쩔 수 없이 넘겨줬다고 합니다.”
“이 멍청한 새끼들!”
블라쉬는 주먹으로 탁자를 내려쳤다.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바지를 추스리며 문쪽으로 향했다.
“멜라니아에게 간다. 체더, 와빈, 서둘러.”
“옛.”
“마녀가 그를 데려간 이유가 뭘까요?”
“내가 알아? 무슨 꿍꿍이가 있나보지.”
“방해하면 어쩌실겁니까?”
“그년도 죽여야지.”
“마녀를 죽이는건 좀 재수없지 않습니까? 저주라도 받으면…”
“뭔 상관이야. 그래봤자 늙은 할망구일뿐이야.”
가볍게 대꾸하는 블라쉬의 입가에 사악한 미소가 그려졌다.
얼마뒤 마녀 멜라니아의 방앞에 도착한 블라쉬는 문을 쾅쾅 두드렸다.
“여보시오! 여보시오! 멜라니아님 용무가 있어 찾아왔습니다! 문 좀 열어보시오! 전하께서 급히 보내서 왔습니다!”
기다려도 안에서 반응이 없자 블라쉬는 부하들을 돌아본뒤 뒤로 한 발자국 물러섰다.
그리고 강하게 발로 차서 문을 부숴버렸다.
쾅!
안으로 들어가자 텅빈 방안에 조금전까지 사람이 있었음을 증명하듯 여기저기 흔적이 남아있었다. 엎어진 거대한 가마솥 그리고 옷장을 뒤적거린 흔적, 또 무언가를 다급하게 챙긴듯한 열린 서랍장들.
한때 밤의 늑대들 소속이었던 블라쉬는 여러 임무를 수행하면서 이와 같은 광경들을 자주 봐왔었다. 도주하는 자들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둘이 파티라도 한거야? 한바탕 크게 싸질러놨구만. 그 마녀… 역시 버나드와 한패인가 보군. 썩을년.”
그는 방안 구석구석을 칼집으로 두들겨가며 유심히 흝어보더니 이내 비밀통로의 입구로 보이는 것을 찾아냈다.
바닥의 나무 판자를 열자 어딘가로 이어진 비밀통로가 드러났다.
블라쉬는 체더와 와빈을 돌아보며 낄낄 웃어보였다.
“뼈만 남아 쭈글쭈글한 늙은이다. 버나드가 평소보단 가볍겠지만, 큭큭 짊어지고 가기조차 버거울거야. 허리나 부러지지 않으면 다행이지.”
체더와 와빈이 미소지었다.
“걸어서 가도 금방 따라잡을걸요.”
“저 밑 어딘가에서 이미 버나드한테 깔려서 바둥바둥대고 있는거 아닙니까?”
“그럴지도 모르지.”
세 사람은 여유만만하게 농담을 주고 받았다.
그러다 잠시 후 블라쉬의 입가에 웃음이 사그라들며 그가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추격해.”
***
“오, 아름다운 숙녀분이여, 길을 잃으셨나요?”
뒤에서 불쑥 검붉은 벨벳 튜닉을 입은 중년 귀족이 말을 걸어왔다.
그때까지 많은 형제들이 앉아있는 널따란 홀 입구에서 머뭇거리던 마가렛은 흠칫 놀라며 그를 돌아봤다.
“네? 네……”
그녀가 수줍은듯 고개를 숙이며 대답하자 중년 귀족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보였다.
“낯설어서 그러시는지요?”
“조, 조금……”
“안심하십시오. 저기 앉아 계신 분들도 마찬가지일겁니다. 다들 한 핏줄이지만 처음 만났을테지요. 그래서 낯설지만 한편으로는 무척 반가울겁니다. 이들이 나와 피를 나눈 형제들이구나 하면서 가슴 한켠이 뭉클할겁니다. 저 또한 제 조카중에 이렇게나 아름다운 숙녀분이 계실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감미로운 향기가 나는 조카를 만나게 되어 어찌나 기쁜지, 가슴이 마구 뜁니다.”
“네, 네? 조카요?”
놀란 그녀가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치자 중년 귀족이 방긋 웃어보였다.
“프레드릭 전하의 동생 클리프입니다. 아름다운 당신에게는 숙부가 되겠군요.”
“수, 숙부님……!”
“진정하세요. 자주 놀라고 그러면 건강에 좋지 않답니다.”
클리프는 자연스럽게 손을 뻗으며 마가렛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자, 가실까요? 제가 직접 자리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저, 저기……”
“형제들을 두려워하지 마세요. 모두 당신의 아군입니다. 정 힘들면 제가 곁에서 지켜드리지요.”
“괘, 괜찮습…”
“쉿. 부담 갖지 말고 이리로.”
클리프가 앞장서서 걷자 마가렛은 잠시 망설이다 얌전히 그의 뒤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미셸이 한심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옆에 앉아있는 자신의 딸 샤를에게 속삭였다.
“방금 안에 들어온 저 녀석과는 절대 가까이 하지 말거라. 다정한척 말을 걸어오면 그냥 무시해.”
“누군데요?”
“전하의 남동생 클리프란다. 세상 사람들은 그를 향해 겁쟁이 클리프(Cliff of Coward)라고 부르지.”
“수치스러운 별명이군요.”
“걷는 사자 전쟁 당시 누나였던 이블린과 맏형인 프레드릭 전하가 싸울때 그는 양쪽 눈치를 보며 자신의 영지에만 숨어있었지. 그리고 프레드릭 전하가 전쟁에서 이기자 그제서야 나타나 간이며 쓸개며 다 내줄듯이 아첨하면서 목숨을 건진거야.”
“어머니가 저를 낳기전 궁에서 지낼때 자주 만났겠네요.”
“정말 짜증났었지. 말투가 느끼해서 그가 말을 걸어올때마다 몸에 두드러기가 나는 것 같았어.”
“어떤 말투인데요?”
“들으면 귀가 썩을거야.”
“하하하.”
어머니 미셸의 말에 샤를이 저도 모르게 그만 웃음을 터뜨렸다.
그때까지 서로를 낯설어하며 긴장한 표정으로 앉아있던 주변 사람들이 모두 샤를을 쳐다보자 그녀는 얼른 웃음을 지우고 딴청을 피웠다.
때마침 궁내장관이 홀안으로 들어와 크게 외쳤다.
“전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모두 바르게 앉아주십시오!”
순식간에 조용해지며 긴장감이 감돌았다.
오랜만에 전남편 혹은 전애인을 만나게 되는 여인들의 복잡한 감정과 난생처음 아버지를 만나게 된 자식들의 흥분과 기대감이 어우러진 적막감이 실내를 지배했다.
이윽고 고위 대신들과 함께 모습을 드러낸 프레드릭왕은 실내를 둘러보며 자조섞인 웃음을 먼저 터뜨렸다.
“이렇게나 많았던가.”
프레드릭왕은 곧장 상석으로 걸어가서 앉았다. 그가 머리에 쓰고 있는 왕관이 황금색으로 눈부시게 반짝거렸다.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두 와줘서 고맙다.”
왕은 말을 마친 후 기다란 탁자에 둘러앉은 여인들을 번갈아가며 유심히 쳐다보았다.
왕은 한때 품었던 여자들의 얼굴이 잘 기억나지 않았다. 아니 확실히 기억나는 여자가 있었고, 어렴풋이 기억나는 여자도 있었고, 아예 기억에서 잊혀진 여자도 있었다. 자식들의 얼굴은 두 말 할 것도 없이 처음보는 얼굴들 뿐이었다. 꼬마도 있었고 소년, 소녀, 성인이 된 사내 녀석도 있었고, 숙녀도 있었다.
“한명 한명이 다 반가운 얼굴들일세. 잘들 지내셨소?”
마음에도 없는 왕의 물음에 모든 사람들이 한 목소리로 공손히 대답헀다.
“예, 전하.”
“여보게 궁내장관. 여기 앉아있는 부인들과 그 아이들의 이름을 하나씩 호명해보게.”
“예, 시작하겠습니다 전하.”
궁내장관은 명단이 적힌 종이를 한 손에 들고 직접 어머니와 자식을 가리키며 그들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이쪽은 돌아가신 아말리아 왕비님과의 사이에 낳은 적2남 브랜든, 적3남 콜먼, 적2녀 알렉시아 입니다. 잘 아실테니까 자세한 설명은 건너뛰겠습니다.”
죽은 왕세자 존은 아말리아 왕비의 자식이 아닌 먼저 죽은 첫째 왕비 캐서린의 자식이었다. 아말리아 왕비는 캐서린이 죽은 이후 프레드릭왕이 두 번째로 맞이한 왕비였다.
“에… 그리고 이쪽은 돌아가신 캐서린 왕비님의 적1녀 앤 공주님. 이상, 여기까지가 우리 궁에서 지내는 전하의 자식들이었습니다. 이제부터 만나는 자식들은 처음보는 얼굴들일겁니다.”
궁내장관은 서둘러 옆으로 이동했다.
“여기 앉아있는 아가씨는 창녀 카렌의 서1녀 엘레나 입니다. 어머니 카렌은 5년전에 성병으로 사망했다고 합니다.”
“안, 안녕하세요 아버님!”
엘레나 라고 불린 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프레드릭왕을 향해 친근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러나 왕은 무미건조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 앉으라고 손짓했다. 엘레나는 뻘쭘한 미소를 지으며 도로 자리에 앉았다.
“에… 다음으로 여기 앉아있는 부인은 전하의 사촌 여동생 엠마입니다. 그리고 그 옆에 앉은 청년은 그녀의 아들이자 전하의 서2남 윌리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