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6화 〉충성의 대가, 몰락6 (6/200)



〈 6화 〉충성의 대가, 몰락6

“전하?”
“아니 죽이지마. 아냐 죽여. 아닐세 죽이지마! 젠장!  형제를 그냥 살려보내게!”
“버나드의 충견이 왕비님과 왕세자를 시해한걸 잊으셨습니까? 게다가 버나드는 왕족을 전문적으로 살해하던 녀석입니다. 전하께서 그렇게 키우셨지요. 녀석은 사자를 사냥하기 위해 키워진 늑대였습니다.  늑대가 미쳐버리면 주인을 물지 않으리란 보장이 어디있겠습니까?”

프레드릭왕은 굳은 표정으로 안소니의 눈을 뚫어지라 바라봤다. 그 눈빛속에 고민의 흔적이 보였지만 언뜻 두려운 기색도 엿보였다.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알아서 하게.”

그 한마디를 남기고 왕은 뒤돌아서 자리를 떠났다.
안소니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뒤따라온 블라쉬에게 지시했다.

“우두머리 사자의 명령이 떨어졌다. 버나드를 죽여라.”
“오늘 저녁엔 성대한 파티를 열어야겠습니다. 깔끔하게 처리하고 오지요.”

블라쉬는 미소 띤 얼굴로 가볍게 묵례를 했다.

***

버나드는 마침내 감옥에서 해방됐지만 형언할 수 없는 깊은 슬픔에 빠져있었다.
사지가 잘린 것은 둘째치고 충성을 다 바쳤던 프레드릭왕의 배신이 그를 무척이나 슬프게 만들었다.
그는 이제 죽을날만 기다리는 고기덩어리나 다름없었다.
 이상 살고자 하는 의지가 사라져 무기력했고, 사지가 없어 움직이는 것도 불가능했다.

“이 등신 좀 봐. 손발이 없으니까 무슨 인간 구더기 같네. 큭큭.”
“근데 뭐하던 놈이야? 버나드란 이름은 처음 들어보는데.”
“나도 몰라. 하지만 왕이 찾아오는걸 보니 높은 귀족이긴 한가봐.”
“아, 그건가 보네. 정치범.”
“워메, 왕한테 대들다 팔다리 다 짤렸는갑네.”

어두운 감옥 통로에서 수레를 끄는  명의 병사가 자기들끼리 소곤거리고 있었다.
버나드는 수레에 실려 이동중이었다.
연신 자신에 관한 대화를 나누는 병사들의 목소리는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버나드는 멍하니, 캄캄한 감옥 천장을 바라보며 넋이 나가있었다.
잠시 후 밖으로 나오자 쏟아지는 햇살에 그만 눈이 부셨다.
얼마만에 보는 태양이던가.
또 얼마만에 보는 낮이던가.
버나드가 눈을 꽉 감은 채 인상을 찡그리고 있으니 병사 하나가 물어온다.

“천으로 얼굴 좀 가려드릴깝쇼?”
“아니.”
“괜찮겄습니까?”
“이대로가 좋다. 이대로가……”
“햇살 오랜만에 보지요? 사면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

버나드는 천천히 눈을 뜨며 강렬하게 쏟아지는 햇살과 마주보려 노력했다.
그러나 쉽지않다.
이윽고 안간힘을 써서 태양을 마주했을때, 그는 희미하게 웃었다.

“평범한 삶… 레아, 결국 네 말대로 됐구나……”

그때  노파가 수레 앞을 막아섰다.

“이놈들, 멈추어라.”

병사들은 수레를 멈추고 귀찮은 표정을 지었다. 수레를 막아선 이는 다름아닌 왕실마녀 멜라니아였기 때문이다. 세상엔 마녀는 불길하다는 인식이 팽배했고 재수없는 일에 휘말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병사들은 속으로 혀를 찼다. 더욱이 멜라니아의 외모가 불안감을 한층 더 가중시켰다. 허리가 구부정한 노파에 얼굴에는 주름살이 가득했고 머리색은 백발이었으며 광대뼈가 툭 튀어나와있었다. 언뜻 보면 못된 마귀할멈 같기도 했다.

“저희한테 볼일이라도 있으십니까?”
“너희한테 없고, 고놈한테 있다.”

멜라니아는 지팡이로 수레에 누워있는 버나드를 가리켰다.

“내가 데려가야겠다.”
“예? 저흰 높으신 분들의 명령을 받고 이분을 댁으로 모셔다 드리는 중입니다. 멜라니아님 얘기는 듣지 못했습니다.”
“떽! 내놓으라면 내놓을 것이지  잔말이 많아!”

마녀가 갑자기 언성을 높이자 병사들이 뒷걸음질치며 당황한 표정을 짓는다.

“이, 이분을 데려가서 어쩌시려고요?”
“빨리 꺼지지 않고  자꾸 캐물어! 네놈들 한꺼번에 저주에 걸리고 싶은것이야!?”

멜라니아가 지팡이를 들어올리자 놀란 병사들이 재빨리 수레에서 떨어졌다.

“나, 나중에 무슨 일이 생기면 멜라니아님이 데려갔다고 할겁니다!”
“우, 우린 아무 책임 없어요!”
“알았으니까 어서 꺼지라고 이놈들아!”

마녀가 고함을 지르며 지팡이를 바닥에 찍자  소리에 기겁한 병사들이 사색이 되어 달아나버렸다.

“낄낄, 모자란 것들.”

멜라니아는 천천히 지팡이를 짚으며 수레에 다가가 버나드를 내려다보았다.
전신을 쭉 훑어보더니 이내 고소하다는 듯이 낄낄 비웃어댔다.

“이야 참으로 못생긴 늑대로구나. 처량하기 그지없군.”
“매일같이 저주하더니 드디어 바라던대로 됐네. 날 어쩔 생각이지?”

모든 것을 포기한 버나드는 차분했다.

“아들의 복수를 위해 죽일건가?”
“겁이 나느냐? 낄낄.”
“음, 사실은 그래. 하지만 벌벌 떨 정도로 두렵지는 않아. 내 삶이 여기까지라면 받아들일 수 밖에.”
“역겨운 녀석!”

멜라니아가 발끈해 소리쳤다.

“내 방으로 가서 네놈을 흠씬 두들겨 패줄테다!  아들을 죽여놓고 뭐가 그리 잘났어!”
“난 당신의 아들을 죽이지 않았어. 구해달라는 부탁들 들어주지 않았을 뿐이지.”
“시끄러워! 네놈은 벌을 받아야 해!”

마녀는 절뚝거리며 수레의 뒷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허리 굽은 몸으로 힘겹게 수레를 밀며 자신의 방이 있는 건물로 향했다.
그 무렵 황금사슴 기사단이 머무는 숙소는 분주했다. 안소니에게 명령을 받은 블라쉬는 부하들을 소집했다.

“마스터울프를 죽이러간다. 체더, 와빈 따라와.”
“예, 그러지요.”
“좋은 구경하게 생겼군.”

곧바로 떠날 채비를 하는 세 사람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줄리안이 끼어들었다.

“어이, 신임 단장님. 나도 데려가주면 한턱 쏘겠습니다.”

무장을 챙기던 블라쉬가 동작을 멈추며 뒤를 돌아보았다.

“네가? 너도 죽이러 간다고?”
“예, 그 말입니다.”
“사지가 날아간 옛주인을  끌어안고 꽁무니 빠지게 달아날 모양인가 보군.”

블라쉬의 말에 주변에서 구경하고 있던 체더와 와빈이 웃음을 터뜨렸다.

“버나드의 오른팔이었던  녀석을 데려갈만큼 날 바보로 아는거냐?”

블라쉬는 얼굴을 바짝 들이대며 줄리안을 뚫어지게 노려보았다.

“그 창녀집에 안소니님이 자주 갔단 기록만 없었어도 넌 이미 끝난 목숨이었어.”
“누가 알았겠어.”

줄리안은 능청스럽게 양팔을 들어보였다.

“마스터울프랑 구멍동서일줄. 내가 창녀의 장부를 빨리 처리하란 조언을 안했다면 분명 안소니님도 버나드와 같이 체포됐을거야. 버나드의 정부였던 창녀와 잠자리를 같이할 정도면 안소니님 또한 전하의 의심을 사기에 충분하니까. 따지고 보면 안소니님 휘하에 있는 너도 내 덕분에 산거나 마찬가지지.”
“니놈이 상황을 조작한건 아니고?”
“그럴리가.”
“죽은 창녀가 실은 버나드의 정부가 아니었다든지?”
“설마, 내가 본게 있는데.”
“조작이 네놈의 특기잖아.”
“몰랐네 나한테 그런 능력이 있는줄.”

줄리안이 싱긋 웃어보이자 블라쉬가 그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무슨 생각으로 황금사슴 기사단에 넣어달라고 한건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이곳 단장으로 있는한 네놈이 쓰일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딴 직업을 알아보는게 좋을거야.”

블라쉬는 가슴을 밀치듯 멱살을 풀면서 그 자리에서 투구를 쓰고 부하들과 함께 떠났다.
뒤에 남겨진 줄리안은 옷매무새를 단정히 고쳤다.

“일 시킬게 없다니 좋아죽겠군. 놀아도 봉급은 나올  아닌가.”

그는 설렁설렁 건물 밖으로 나갔다. 햇살이 눈부시게 내려쬐고 있었다. 하늘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아… 날씨 한번 더럽게 좋네요 단장님. 감방에만 처박혀 있기엔 슬플 정도로 좋은 날씨입니다. 산책이나 하러가야겠군.”


***

마녀의 방에 도착하자 펄펄 끓는 커다란 가마솥이 눈에 띄었다.
솥뚜껑 옆으로 줄기차게 새어나오는 김으로 인해 방안의 공기는 뜨거웠고, 솥안의 내용물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맛은 없을  같은 약재 냄새로 가득했다.

“아구, 힘들어라…”

멜라니아는 수레를 방안에 밀어넣은뒤 방문을 잠그고 의자에 털썩 앉아버렸다.

“니놈 때문에 이게  고생이란 말이냐?”

마녀는 손에 쥔 지팡이로 수레 안에 누워있는 버나드의 가슴을 툭툭 때렸다.

“망할 늑대놈. 아들을 뺏어가더니 그 어미까지 생고생을 시키고 있어. 너처럼 못된 놈은 세상에 없을게야. 쯔쯔.”
“누가 데려오라고 했나. 그냥 병사들한테 맡겼으면 됐잖아.”
“시끄러워 이놈아! 어디서 말대꾸야! 팔다리도 없는 등신이.”
“날 실험 재료로  생각인가?”
“그것도 좋지.”

마녀가 말라비틀어진 허벅지를 주먹으로 툭툭 마사지하며 낄낄 웃음을 터뜨렸다.

“인체 실험을 하기에 딱 좋은 육체를 갖고 있지 않은가. 왼팔에는 닭다리를 붙여주고 오른팔에는 개구리의 뒷다리를 붙여주는거야. 그리고 오른쪽 다리에는  뭐를 붙여줄까. 아! 뱀의 꼬리를 붙여주는게 좋겠군! 흐물흐물 땅바닥을 기어다니게 말이야. 꺄하하하!”

버나드는 그녀의 말을 듣고 심기가 불편해졌다. 농담으로 취급하기에는 다름 아닌 불길한 마녀 멜라니아가 한 말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라면 실제로 행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성질 고약한 노인네야. 헛소리 내뱉지 말고 날 빨리 칼로 찔러줘.”
“버르장머리 없는 늑대야, 네놈 때문에 내 머리가 아프다.”

그녀가 갑자기 투덜댔다.

“레아에게 고마워하거라.”
“레아? 아,  신세 망친 여자. 큭큭. 고마워서 죽겠군.”
“암 고맙고 말고.”

멜라니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수레를 밀어서 벽에 붙였다. 그리고 밧줄을 묶어 버나드의 목에 걸고 살짝 조였다.

“목을 졸라 죽이게?”
“멋진 방법이야.”

마녀가 낄낄 웃었다. 그녀는 손에 쥔 밧줄을 쥐고 한쪽 발을 절면서 수레에서 멀리 떨어졌다.
펄펄 끓는 가마솥으로 가더니 뚜껑을 열고 국물의 맛을 보았다.

“흐음, 이 정도면 적당하군. 때가 됐다.”

사방이 막힌 수레에 누워있는 버나드는 보이는 것이라고는 천장뿐이었고 마녀의 음성만이 들려올뿐이다.

“무엇을 하려는거지…?”
“늑대를 삶아먹으려는게지.”

방안의 분위기로 무슨 말인지 대충 직감한 버나드가 발끈했다.

“날 모욕하지마라. 난 우리 왕국을 위해 헌신한 귀족이란 말이다! 죽는 방법만이라도 선택하게 해줘!”

버나드가 화를 내는 이유는 사람이 화형이나 마녀의 실험을 통해 죽음을 당하면 지옥에 가거나 영혼의 소멸, 최악의 경우에는 악령으로 부활해 마녀의 종이 된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귀족의 경우에는 반역자를 제외하고는 참수형을 당하는게 대부분이었고 그것이 명예로운 죽음이라 여겼다. 그렇다 보니 현 상황은 무척이나 화나고 억울할만했다.

“이 사실을 알면 전하께서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레아의 말이 맞았어. 사지를 잘리고도 여전히 전하를 찾는구만. 꽉 막힌 멍청이 같으니.”

마녀는 낄낄거리며 다른 곳으로 걸어갔다. 방 한편에는 통나무로 만들어진 운반 레일이 있었다. 그 끝은 가마솥과 맞닿아 있었고, 마녀는 손에 쥐고 있던 밧줄을 두 손으로 힘껏 잡아당겼다.

“크윽!”

밧줄이 덜컥 목을 조이자 버나드는 소리를 지를 수가 없었다. 핏발이  정도로 숨이 막혀왔지만 그는 차라리 다행이라 여겼다.

‘마녀가 생각을 달리먹었는가? 그래, 죽어서 악마가 되는 것보다 교수형을 당하는게 낫다!’

하지만 숨통을 조이던 밧줄은 그의 바람과 달리 금세 느슨해졌다.

“컥! 컥! 하아! 하아…! 도대체 무슨 생각이냐……!”

버나드는 숨을 몰아쉬며 급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마녀는 밧줄을 이용해 버나드를 수레에서 꺼낸뒤 그대로 통나무 레일 위에 올려놓은 것 뿐이었다. 그녀는 이어 근처로 다가와서는 목재 핸들을 붙잡고  손으로 돌리며 통나무 레일을 가동시켰다.
덜컹하는 소리와 함께 버나드의 몸이 움직이며 펄펄 끓는 가마솥을 향해 운반되기 시작했다.

“뭐, 뭐야……!? 뭐하는거냐고 이 미친 할망구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