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5화 〉충성의 대가, 몰락5 (5/200)



〈 5화 〉충성의 대가, 몰락5

버나드의 입가에 웃음이 사그라들었다.

“제 1 왕위계승자였던 존님이 죽은게 원인이군요.”
“왕비인 아말리아와 존의 군대가 내게 원한을 품은 전처들과 첩들, 그리고 그 자식들로부터 나를 지켜주고 있었네. 근데 자네의 부하였던  망할 계집 때문에 모든게 틀어지고 만거야. 날 지켜주던 보호막이 사라졌단 말일세. 아말리아의 친족들은 그녀의 죽음을 내 탓으로 몰며 병사들을 이끌고 고향으로 돌아가버렸어. 이는  각지에 흩어져있는 전처 및 첩 사생아들의 군대로부터 왕실을 지킬 수 있는 병력이 부족하단 말일세. 이놈이고 저놈이고 불시에 처들어와서 본인이 왕이 되겠다고 떠들어댈테지.”

걷는 사자 전쟁 당시 프레드릭왕은 군자금을 얻고 세력을 강화하기 위해 다수의 지방 영주들의 여식과 정략결혼을 하며, 그때그때 정세에 따라 이혼과 파혼, 결혼을 수없이 반복했다.
 과정에서 여러 첩을 두기도 했고, 전쟁때만 해도 첩들은 그에게  힘이 되어주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찾아오자 지방 영지를 다스리는 첩들이 가진 군사력은 되레 왕권을 위협하는 새로운 세력으로 자라나 버렸다.

“왕국에 법이 있는 한 함부로 칼을 들이댈  없을 것입니다. 왕세자가 죽었으니 그 다음 왕위계승자는  공주님일 것입니다.”
“법? 크큭. 법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우리가 언제 법을 지켰다고? 나부터 안지키는데. 들어보게.”

프레드릭왕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가 말을 이었다.

“2주전 내 침소에 자객이 침입했었네. 근데 잡고보니 그게 누군지 아는가? 놀라지 말게. 30년전 시녀와의 사이에 낳은 닐이란 녀석이었어. 난 처음에 그놈이 누군지도 몰랐어. 말해줘서 알았지. 아무튼 그놈이 하는 소리가 글쎄, 왕의 핏줄을 이어받았으니 자기가 왕이 되겠다고 고래고래 소리치더군. 더는 듣기 싫어 그 자리에서 죽여버렸네. 병사들을 시키지 않고 내가 직접 죽였지. 머리의 뚜껑이 열렸었거든.”

프레드릭왕은 자리에서 일어나 뒷짐을 지고 허름한 벽을 바라봤다.

“왕비와 왕세자가 사라지자 이혼한 전처들과 첩들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게야. 그년들이  아파 낳은 자식들과 편먹고 날 몰아내려고 작정을 한게지. 사자가 나이들어 발톱이 빠진줄 아나보지? 흥, 웃기지 말라고 해. 발톱이 없으면 발가락에 송곳을 박으면 돼.  지독하고 날카로운 송곳을 말일세. 난 아직 왕좌에서 물러날 생각이 없네. 물러나는 순간 내 운명이 어떻게 될지 누구보다 잘 알거든. 지금보다 더욱 심한 퇴물 취급을 받게 될게야. 어쩌면 독방에 갇혀 평생 빵만 먹고 살다 뒈질지도 모르지. 절대 그럴 수 없어. 난 죽을 때 죽더라도 꼭 왕좌에서 죽을것이네. 눈을 감는 순간까지 왕관을 벗지 않을거야.”

버나드는 얘기 도중 끓어오른 프레드릭왕의 흥분이 가라앉을때까지 잠시 기다렸다. 그리고 말했다.

“저를 빨리 복직시켜주십시오. 제가 지켜드리겠습니다.”
“이젠 그 몸으로는 어려울거야, 버나드.”
“저희 밤의 늑대들엔 저보다 훨씬 유능하고 훌륭한 부하들이 있습니다. 그들을 지휘하면 됩니다.”
“안타깝네만, 밤의 늑대들은 이미 해체됐네. 밤의 늑대들을 대신하여 안소니 밑으로 새로운 기사단이 생겼지. 황금사슴 기사단이라고 블라쉬 경이 초대 단장이 되었네. 자네의 부하였던 줄리안을 비롯하여 밤의 늑대들 일부도 거기에 들어갔을게야.”

버나드는 충격을 금치 못했다.
밤의 늑대들은 버나드가 청춘을 바쳐 일군 결실이었다. 하루아침에 사라졌단 소리에 그는 일순 격앙됐다.

“왜 그러셨습니까!”
“나도 어쩔 수 없었네!”
“그동안 당신만을 바라보고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우정이 영원히 변치 않으리라 생각했습니다! 이제 보니 제가 어리석은 기대를 품고 있었던것 같군요!”
“그럼  계집 관리를 잘했어야지! 모든게 다 그 레아라는 계집 때문이 아닌가!”
“레아가 왕비와 왕세자를 살해했다고 해서 저를 못 믿으시는 겁니까!”
“자네가 무척이나 아끼던 부하였어!”
“그게 뭐요! 그래서 저를 못 믿으시냐고요! 설마 왕비와 왕세자를 시해한게  지시에 의해 실행되었다는겁니까? 눈을 똑바로 보고 말씀해보십시오! 국왕전하!”

버나드의 의연한 외침에도 프레드릭왕은 계속 벽만 응시하며 차마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오랜 침묵의 시간이 지난 후 버나드는 결국 크게 낙담을 하고 말았다.

“저를 못 믿으시는군요. 그래서  감옥에 가두고…”

프레드릭왕이 급하게 말을 잘랐다.

“늙으면 겁이 많고 의심만 는다네! 자네도 나중에 나이 들어봐! 난 절대 악감정을 갖고 자네를 사지로 내몬게 아닐세! 내가 어떻게 할  있는 감정이 아니야! 자제가 안될 정도로 두려움이 샘솟았던 것 뿐이지!”
“절 늘 형제라고 하셨었죠. 저 역시 프레드릭님을 형이라 생각하고  아버지처럼 여겼습니다.”
“나는 지금도 자네를 형제라고 여기고 있네. 버나드. 자네가 없었다면 난 결코 걷는 사자 전쟁에서 여동생 이블린을 이길 수 없었을거야.”
“당신을 위해 이블린을 죽였습니다.”
“알아. 나도 고마워하고 있어.”
“당신을 지키기 위해 밤의 늑대들을 만들었습니다.”
“이블린처럼 나와 피를 나눴지만  적대시하는 왕족들을 살해하는 멋진 비밀조직이었지. 덕분에 자네는 왕족 살해자라는 영광스러운 호칭도 얻고 말이야. 아마 자네처럼 수많은 왕족을 살해한 자는 역사에 단언코 없을걸세. 나의 삼촌, 고모, 외할아버지 등 사돈에 팔촌까지 내가 지시만 하면 닥치는대로 마구 죽였지. 심지어 3살이었던 이블린의 아들까지도 말이야.”
“그런식으로 만인에게 심한 짓을 해가며 오로지 당신만을 위해 살았던 자를 오늘날 당신의 손으로 망가뜨린겁니다……”

버나드는 지난날을 떠올리며 눈물을 흘렸다.

“왜 모르겠는가.”

왕의 목소리는 침울했다.

“모든 신하들이 자네를 죽이라고 아우성치더군. 그런 가운데 난 자네와의 옛정을 생각해 목숨을 부지시켜주는 것만이 최선이었네.”
“세븐 로얄을 지워버리고 팔다리를  잘라놨으니 목숨이 붙어있어봤자 병신처럼 낑낑대며 살아가는게 전부일테죠.”
“화내지 말게. 자네에게 영지를 선물해주기로 했어. 남은 여생 그곳에 가서 하녀들의 시중을 받아가며 편히 살도록 하게. 아내가 될 여자도 내 명문가의 여식으로 직접 구해줄테니까 걱정 말게. 자네를 빼닮은 유능한 아들을 낳아줄거야.”
“쓸모없으니 구석에 가서 처박혀 있으란 얘기입니까?”

왕에게 실망한 버나드는 삐뚤어져 있었다.
왕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을 돌렸다.

“곧 우리 왕국에 피바람이 불거야. 여기에 있어봤자 자네만 위험해. 잠시 중앙에서 멀리 떨어져 있게.”

버나드는 누운 채로 감옥  가운데에  있는 프레드릭왕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떤 일을 계획하고 계신거군요.”
“자네의 그 망할년때문에 왕비와 왕세자가 죽고 난 혼자가 됐어. 곁에 아무도 없지. 난 살아야하네 버나드. 내 생이 다 할때까지 왕좌에 앉아있겠다고 했지?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오늘 전국방방곡곡에 흩어져 있던 자식들을 전부 불러 모았네. 합쳐서 열여덟명이나 되더군. 처음들어보는 이름도 많았어.”
“설마 자식들을 전부 죽이시려는 겁니까?”
“그랬다가는 영주인  어미들이 당장 군사를 들고 일어날게야. 그들이 한데뭉쳐 연합군이라도 만들었다간 화를  키우는 격이지. 자식 중에 누가 왕좌를 노리고 있는지, 누가  진심으로 좋아하는지 알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나?”

프레드릭왕이 갑자기 음흉하게 웃어보였다.

“제 2차 걷는 사자 전쟁을 벌일 계획이네. 물론  뒤로 빠져 있을 거야. 뒤로 빠져서는 자식들간의 싸움을 부추길 생각이지. 서로 왕좌를 차지하기 위해 싸우다 보면 하나씩 하나씩 죽어나가겠지? 지들끼리 싸우느라 바빠서 내게 암살자를 보내거나 왕도를 공격하려는 생각따윈 꿈도 못꾸겠지.”

대화 내내 눈길을 피하던 왕이 처음으로 눈을 마주치며 물었다.

“어떤가, 내 생각이. 멋지지 않나? 으흐흐흐…”

버나드는 왕의 생각을 말리고 싶었다. 그러나 그 말이 입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는 놀랐다. 지금 이 순간 음흉하고 비열한 웃음을 짓는 왕은 자신이 알던 그 왕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프레드릭왕은 항상 당당하고 멋진 사내였다. 하지만 지금 눈 앞에 있는건… 영락없는 여우 같은 늙은이었다.

‘언제부터 변한걸까……’

수십년간 내 집 드나들듯이 드나들었던 왕궁이 처음으로 낯설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제야 돌아갈 곳이 없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다.

***

잠시 자리를 비켜주었던 안소니 후작이 감옥 안으로 들어왔다.

“이만 돌아가시죠. 전하의 피를 물려받은 사생아들 및 왕자와 공주님들이 모두 모였다고 합니다.”
“다들 제때 와주었군.”

프레드릭왕은 안타깝고 슬픈 얼굴로 버나드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까 말한 대로 잠시 멀리 떠나 있어주게. 이곳 상황이 정리되면 잊지 않고 부를테니.”

버나드는 갈라진 목소리로 힘없이 대답했다.

“예, 그러지요. 그러겠습니다… 프레드릭님께서 바라신다면…”
“고맙네.”

프레드릭왕은 허리를 굽혀 누워있는 버나드의 머리를 쓰다듬은뒤 다시 일어섰다.

“여보게, 안소니. 사람을 시켜 버나드를 밖으로 내보내도록 하고 짐싸는걸 도와주라 이르게.”
“예,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전하.”
“그리고 재정관에게 돈을 내달라 하여 하인과 노예를 부족하지 않게 사서 여행길에 딸려 보내도록 해. 호위병은 내 근위대쪽 사람을 쓰도록 하고.”
“예, 알겠습니다.”

뒤늦게 안으로 들어온 블라쉬가 코를 막은 채 말을 꺼냈다.

“그런데 전하. 아까부터 이상한 냄새가 나지 않습니까?”
“냄새? 무슨 냄새 말이냐.”

블라쉬는 주위를 둘러보더니 버나드의 하나남은 오른쪽 다리를 가리켰다.

“저 발바닥 좀 보십시오. 지옥의 악마가 보낸 벌레들에게 감염됐는지 징그럽게 썩어들어가고 있습니다. 저대로 놔두다간 온몸에 퍼져나가겠는데요? 신전 사제들의 치료는 통하지 않을 것 같고 미리 자르는게 좋겠습니다.”
“안소니 자네의 생각은 어떤가.”
“저도 동의합니다.”
“버나드, 자네는? 악마가 자네의 다리를 파먹고 있네. 감염된 다리를 그냥 놔두면 여행길에 위험할걸세. 괜찮겠나?”
“마음대로 하십시오. 다리가 있든 없든 달라질게 있겠습니까……”

왕과 대화를 나눈 직후부터 버나드는 완전히 자포자기 상태였다. 그의 눈빛에는 생기가 없었다.

“그럼 즉시 자르도록 하겠습니다.”

블라쉬가 히죽 웃으며 버나드를 질질 끌어다 오른쪽 다리만 단상 위에 올렸다.
그러고 나서 남몰래 귓가에 속삭였다.

“다리 하나  받아가마. 평생 병신처럼 살으라구, 마스터울프.”

블라쉬는 허리에 차고 있던 칼을 뽑아들었고 잠시 후 감옥에선 찢어질듯한 버나드의 비명이 메아리쳤다.

***

프레드릭왕은 안소니와 함께 감옥 건물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곧장 자식들이 모인 장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뒤에서 따라오던 안소니가 급히 옆으로 붙었다.

“진정 저대로 보낼 작정이십니까?”
“또 할게 있나?”
“버나드입니다. 마스터울프이자 왕족살해자, 그 버나드 말입니다. 사지가 없다고 방심해선 안됩니다. 숨통을 끊어놓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후환이 두렵지 않으십니까?”

프레드릭왕의 걸음이 멈췄다.
그는 턱을 어루만지며 고심을 거듭했다.

“음…”

그러다 말했다.

“죽이게.”
“탁월한 결정이십니다, 전하.”

안소니가 미소를 지어보인 순간 프레드릭왕이 재빨리 손을 저었다.

“아, 아니야 죽이지마.”
“예?”
“아니다 죽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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