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화 〉충성의 대가, 몰락4
줄리안은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며 탄식을 토해냈다.
그러고는 우두커니 서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잠시 말이 없던 그가 나지막이 물었다.
“세븐 로얄을 빼앗긴 것도 모자라 다리 하나만 남긴 채 사지가 잘리고…, 또 칼을 쥐는 법조차 기억나지 않고…, 그 상태로도 왕을 신뢰하는걸 보면 정말 궁금해서 묻는 겁니다. 예전에 혹시 왕한테 후장이라도 따였습니까?”
“큭큭, 줄리안. 이 상황에 농담은 그만둬.”
“단장님이 너무 바보 같아서 그럽니다. 속된 말로 우직한 멍청이 같다고요. 요즘 세상에 죽을때까지 충성을 맹세하는 신하가 어딨습니까? 아니. 다른 한편으로는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당신은 진짜 신의가 뭔지 아는 사람입니다. 저 같은 인간이 감히 범접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빛이 납니다. 그래서일까. 그래서 당신을 더더욱 우러러 보게 되고 현재 이 상황이 한없이 안타깝기 그지 없습니다. 이 빌어먹을 운명. 그 빌어먹을 성격. 당신이 내 부하였다면 때려서라도 정신차리게 했을텐데.”
“나와 전하의 인연은 쉽게 끊어질 줄이 아니야…”
“이래도요? 이 말을 듣고서도 왕에 대한 충심이 변하지 않으리라고 맹세합니까?”
줄리안은 전에 없이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버나드를 내려다 봤다.
“레아가 처형당했습니다.”
***
한창때의 프레드릭왕(아이다썬의 프레드릭 레온, Frederick Leon of Idahsun)은 훤칠하게 키가 크고 날렵한 몸매에 냉철한 눈빛을 지닌 그야말로 한마리 사자 같았다. 포효하는 사자 모양의 금빛 투구를 쓰고 말 위에 앉아있으면 그 모습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위압감을 풍기며 멀리서 보고 있는 적들이 숨을 못쉴 정도였다.
이렇게나 대단한 프레드릭왕이 어느날 어린 버나드의 눈앞에 나타났다.
당시의 버나드는 병사들의 약탈로 인해 가족을 모두 잃고 그의 눈빛은 살기가 등등했었다.
버나드에게 군대란 증오스러운 존재였고, 그는 그 지휘자인 프레드릭왕을 향해 죽일 작정으로 달려들었다.
그러나 프레드릭왕은 큰 바위처럼 강하고 단단했다. 기습 공격을 했을지라도 풋내기인 버나드의 수준으로는 어림 없었다.
후에 이 소식을 접한 신하들은 기겁하며 노했으나 왕은 자애로웠다.
“몇살이냐?”
“열다섯살이다. 어리다고 무시하지마!”
“무시하지 않아. 네 용기가 가상하여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눈빛이 어쩌다 그 모양이 되었느냐? 어린 나이에 벌써 살기가 넘쳐나는구나.”
“너희가 엄마 아빠를 죽였어!”
“우리가? 우리는 이 지역에 오늘 처음왔는데? 아마도 다른 영주의 군대인가 보군.”
젊은왕은 흐뭇한 눈길로 늑대새끼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널 가지려면 얼마면 되느냐? 아니지. 일국의 왕을 죽이려한 것을 보니 미래에 대한 계획따윈 없었을터. 돈은 필요없겠구나. 네 부모의 원수를 갚아주면 되는 것이냐? 그리하면 네게 미래가 생기는 것이냐?”
“보, 복수를 해주겠다고?”
“그래, 복수다. 기쁘냐? 네 속이 풀릴때까지 네 부모를 살해한 영주와 그 군대를 박살내주마.”
“날 도와줄거야? 지, 진짜지……!?”
뜻하지 않은 말을 듣고 울먹이던 버나드는 이내 크게 울음을 터뜨렸다.
“해줘. 놈들을 죽여줘!”
“알았다.”
프레드릭왕은 고개를 끄덕이며 곧바로 군대를 소집했고, 마을을 약탈한 영주의 군사를 추격해 그가 버나드에게 약속했던대로 그들을 완전히 박살내버렸다. 마지막엔 버나드로 하여금 원수였던 영주의 심장을 직접 찌를 수 있는 기회까지 줬다.
그로부터 7년이 지난 후, 걷는 사자 전쟁 기간 내내 줄곧 프레드릭왕을 따라다니며 대성한 버나드는 은혜를 갚기 시작했다.
어느날 버나드가 왕의 매제인 필립(웨이벌리의 필립 라셀, Phillippe Raschel of Waverley)의 목을 가져왔을때, 프레드릭왕이 멋진 금발을 휘날리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자랑스럽구나, 버나드.”
그리고 며칠 후 왕의 여동생인 이블린(웨이벌리의 이블린, Evelyn Leon of Waverley)의 목을 가져왔을땐, 프레드릭왕은 마침내 버나드를 가족으로 맞이했다.
“버나드, 그대는 나의 영원한 형제다.”
버나드는 무척 기뻤다.
프레드릭왕이 부모의 원수를 갚아준 날부터 이 사람을 위해 죽겠다고 맹세한 그는 남은 생이 창창한 나이에도 불구하고 여생을 국왕의 안위만을 걱정하며 살겠다고 재차 다짐했다.
하지만 지금.
그 결심이 점점 흔들리고 있었다.
버나드는 눈물을 흘렸다. 프레드릭왕을 꼭 만나고 싶었다. 하지만 왕은 한달이 넘도록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자신의 존재가 이처럼 쉽게 버려질만한 존재였던가. 정말 무가치했던가? 수없이 자문해도 돌아오는 대답은 하나다. 지금 이 비참한 현실이 말해주고 있었다. 그런데 그것이 왕의 대답이라는게 믿겨지지 않았다. 결코 믿고 싶지 않았다.
“뭔가 이유가 있으신거야… 날 찾아올 수 없는 이유가… 협박을 당한다든지…”
줄리안이 다녀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휘틀이 돌아왔다.
혼자가 아니었다. 간수들에게 식사를 배달하기 위해 감옥 주변을 배회하던 중년 하녀를 납치해와 자신과 버나드 중에 누가 더 좋냐는 유치한 질문을 던졌다.
하녀는 덜덜떨며 손에 칼을 쥔 휘틀을 손가락으로 가리켰고, 휘틀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그 자리에서 갑자기 예정에 없던 말을 꺼냈다.
“저 사지가 없는 병신의 성기를 핥아랑. 그럼 풀어줄겡.”
하녀는 그냥 풀어달라며 울먹이며 애원했으나 휘틀은 겁박지르며 그녀에게 강요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하녀가 버나드의 성기를 손에 쥐고 입에 넣으려 하자 갑자기 휘틀이 소리질렀다.
“너! 거짓말 했엉! 내가 더 좋다며! 어떻게 싫어하는 놈의 꼬추를 입에 물려고 하는 거징? 그놈이 징그럽게 생겼다며! 싫다며! 혐오스럽다명! 이 거짓말쟁이 계집아앙!”
“허, 허! 사, 살려주세요! 잘못했습니다!”
“난 거짓말쟁이가 제일 싫엉! 너 뒈졌엉!”
이후 하녀는 휘틀에게 멱살을 붙잡힌 채 어디론가 끌려갔다.
그녀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버나드는 알 수 없었다.
애당초 버나드는 하녀가 다녀갔는지도 몰랐다. 그는 한달여간 심한 고문을 당하는 것과 동시에 제대로 먹지를 못해 심신이 지쳐 현실인지 꿈인지 분간이 안가는 비몽사몽한 상태에 빠지는 일이 잦았다.
하녀가 왔을때 그는 옛날 일을 떠올리며 멍하니 회상에만 잠겨 있었다. 마치 식물인간처럼.
하지만 개는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는 순간조차 반가운 주인의 발자국 소리에 그만 꼬리를 흔들어 댄다.
그때까지 혼이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있던 버나드는 몸을 떨며 정신을 차렸다.
누군가의 발자국 소리를 들었다.
너무도 귀에 익은 발자국 소리.
발자국의 주인은 팔자걸음에 뒷꿈치를 미세하게 끄는 습관이 있다. 그리고 다리가 불편해 왼쪽 걸음의 속도가 약간 늦다. 그것은 발자국 소리의 주인을 오랫동안 지켜봐온 버나드만이 알 수 있었다.
“전하……!”
왕은 동행자가 있었다.
문너머에서 다른이의 목소리가 들렀다.
“간수가 어디갔지?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전하. 휘틀! 휘틀!”
그때 갑자기 먼 곳에서 우당탕거리며 헐레벌떡 뛰어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오, 오셨습니까! 에헤헤! 죄, 죄송합니당!”
“옷차림이 그게 뭔가! 왜 바지를 벗고 있어! 전하 앞이다! 옷차림을 단정히 해라!”
“어엇! 시, 실례했습니당!”
“어서 문을 따게!”
“예, 옛!”
곧 쇠사슬이 덜거덕 거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동시에 눈부신 불빛이 감옥 안으로 스며들었다.
한달이 넘도록 캄캄한 지하감옥에 갇혀 있던 버나드는 횃불의 불빛을 손으로 가리며 힘겹게 문쪽을 응시했다.
“보, 보고 싶었습니다 전하…!”
“버나드!”
자신을 방문한 이는 짐작했던대로 프레드릭왕이었다.
그는 버나드의 비참한 모습을 발견하고는 한달음에 달려와 버나드를 와락 껴안았다.
“오오, 나의 형제여!”
“죽기전에 만나뵐 수 있어 다행입니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단 말인가! 팔과 다리는 어디갔어? 누가 나의 형제를 이런 꼴로 만들었단 말인가!”
남일 대하듯 하는 왕을 향해 버나드가 힘겹게 미소지었다.
“누구긴요. 당신이잖습니까…”
“뭣이!?”
미처 예상치 못한 대답이었는지 왕의 눈동자가 좌우로 크게 흔들리며 당황한 표정이 역력했다.
그는 돌연 뒤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저놈이야! 저놈이 내 형제를 이렇게 만들어놨어!”
그러자 휘틀이 크게 당황하며 뒷걸음질을 쳤다.
“마, 마음대로 해도 좋다공 했는데!”
프레드릭왕은 불같이 노한 표정을 지으며 명령했다.
“여봐라! 당장 저 녀석의 목을 베거라!”
“예, 전하.”
대답한 이는 안소니 후작이었다.
감옥 안에는 프레드릭왕 말고도 안소니 후작을 비롯해 버나드를 직접 체포한 장본인인 블라쉬도 와있었다.
안소니 후작이 즉시 블라쉬에게 눈짓을 보내자 블라쉬는 재빠르게 칼을 뽑아들며 그 자리에서 휘틀의 심장을 찌르고 목을 쳐냈다.
“커억……!”
휘틀의 몸이 뒤로 넘어가며 털썩 쓰러졌다. 잘린 목은 눈을 부릅뜬 채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다 구석에서 멈췄다.
“치워라.”
“옛.”
블라쉬가 지시를 내리자 동행한 병사들이 서둘러 휘틀의 두 다리를 붙잡고 감옥 밖으로 질질 끌고 나갔다. 한 병사는 휘틀의 머리를 칼에 꽂고 그대로 들고 나갔다.
“저런 괘씸한놈 같으니. 감히 내 형제를 불구로 만들다니……!”
“전하… 그간 별고 없으셨습니까…?”
“버나드. 내가 전하라 부르지 말라고 몇번이나 말했나. 우린 격식따위 필요없는 사이잖나. 난 자네를 친동생처럼 아끼고 있어. 그런데… 이런! 미안함세. 난 자네에게 큰 아픔을 주고 말았네. 돌이킬 수 없는 큰 아픔을 말일세! 사라진 두 팔! 사라진 한쪽 다리! 아아, 앞으로 어떻게 살란 말인가! 난 자네에게 큰 죄를 짓고 말았어!”
“프레드릭님……”
“오늘 자네를 꺼내주러 왔으니 안심하게. 내 자네를 데리고 나가려고 온게야!”
“자,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응? 왜? 할 말이 있나? 할 말이 있으면 어서 말해보게. 자네의 말이라면 얼마든지 들어주지. 내 형제고, 내 친구니까!”
버나드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모두 내보내주십시오. 프레드릭님과 단 둘이 얘기하고 싶습니다.”
“그래, 알겠네.”
프레드릭왕이 뒤를 돌아보았다.
“모두 나가 있도록 하라.”
“예, 전하.”
안소니 후작은 버나드를 한번 바라보고는 뒤로 돌아 밖으로 나갔다.
블라쉬 또한 버나드를 쳐다보며 소리없이 히죽 웃고는 병사들과 함께 나갔다.
프레드릭왕과 둘만 남게 되자 버나드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안소니는 멀리해야할 자라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어찌 전하 곁에 있는지요. 그는 탐욕스럽고 교활한 자입니다.”
프레드릭왕이 얼굴을 찡그렸다.
“이 와중에도 날 걱정해주는 건가. 자네 몸부터 챙겨야할때네. 여기서 얼른 나가는게 먼저야.”
“피하지말고 대답해주십시오. 왜 안소니를 가까이 두신겁니까?”
버나드는 추궁하듯이 캐물었다. 왕에게 거침없이 싫은 말을 할 수 있는 신하는 오로지 버나드뿐이었다. 수십년간 생사고락을 함께한 버나드만이 가능했다.
프레드릭왕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게 다 그 망할년 때문이네.”
“누구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누구긴 누군가. 자네가 애지중지 키운 그 계집년 때문이라고.”
“레아… 말입니까?”
“그 계집이 왕비와 왕세자인 존을 살해하지만 않았어도 자네가 나락으로 떨어지고 내가 안소니를 곁에 둘일은 결코 없었을거라고!”
잠깐 발끈했던 프레드릭왕이 이내 목소리를 진정시키며 말을 이었다.
“난 지금 자식들한테 목숨을 위협받고 있네. 젊은 시절 이 여자 저 여자 가리지 않고 치마를 들추고 다닌 것에 대한 대가를 치르기 일보직전인 상황이지.”
버나드가 큭큭 힘없이 웃었다.
“그러게 조금만 건드리라고 부탁드렸잖습니까.”
“혈기왕성한 나를 누가 막을 수 있었겠나. 그 시절 내 건강한 좆은 기운센 연어처럼 팔딱거려서 나조차도 막을 수 없었어. 하녀건, 창녀건, 부하의 영애건, 사촌이건, 적장의 마누라건 가리지 않고 쉼없이 쑤셔대길 원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