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3화 〉충성의 대가, 몰락3 (3/200)



〈 3화 〉충성의 대가, 몰락3

***

며칠  레아와 나누었던 대화가 꿈속에 나왔다.

“이 일을 그만두고 어디 먼 곳으로 가서 가정을 꾸리고 싶지 않나요?”

레아는 예고도 없이 집무실로 찾아와서는 그런 말을 건넸다.
버나드는 상상조차 못해본 말이라 그저 웃음만 흘러나왔다.

“내게 가정은 필요없다. 평생 전하 곁에 머물며 그 분을 지켜드리는 것만이 마스터 울프의 사명이다. 가정을 꾸리는건 이 일과 맞지 않아. 적들의 인질이나 도구가 될 수도 있으니까.”
“그러시군요……”

레아는 말끝을 흐리며 잠시 침묵을 가졌다.

“…오래됐죠? 두 분의 인연.”
“오래됐지. 보자. 지금이 265년이니까 한 20년 됐으려나? 걷는 사자 전쟁이 244년에 발발했고 나와 전하가 만난게 그로부터 4년뒤인 248년이었으니 벌써 17년이나 흘렀군.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다  수 있겠다.”
“17년 전이면 버나드님이 15세때네요.”
“철없던 시절이었지. 첫만남때 전하께 큰 무례를 범했어. 전하의 자비가 없었더라면 난 아마 이 세상에 없었을거다. 그날 이후로 전하께 늘 감사드리고 있지.”
“애초에  분이 서로 만나지 않았는게 버나드님의 인생을 위해 더욱 좋았을지도 모르죠……”
“레아…?”
“죄송해요. 실언을 했습니다.”
“전하가 계셨기에 나는  나은 삶을 살았고, 강대한 힘도 얻을 수 있었다.”

레아는 오히려 그것이 슬픈듯 중얼거렸다.

“강대한 힘… 레온 왕가에 전해져 내려오던 비술, ‘세븐 로얄’을 모두 익힌 버나드님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우리 왕국 제일의 검……”

오늘따라 레아는 이상했다.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버나드는 그녀의 얼굴을 또렷이 마주하고 싶었지만 어째서인지 시야가 점점 흐릿해져만 갔다.
짧은 꿈이었다.

철푸덕!

“언제까지 처잘꼬야?”

기형적인 외모를 가진 곱추 간수 휘틀이  양동이를 벽으로 집어던졌다.
난데없이 물세례를 맞은 버나드는 정신이 번쩍들었다.
잠에서 깨자마자 현실로 돌아왔고, 다시 비참하고 잔인한 현실에 충실해야 하는 순간이었다.
독방의 냄새나는 짚더미 위에 누워 있던 그는  번인가 몸을 일으켜 세워보려 노력했지만 상체를 일으킬 수가 없었다. 며칠 전 양팔이 잘린 그는 둥근 바퀴처럼 바닥을 뒹구는게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오늘도 너 때릴고야. 준비된고지?”

손에 쥔 채찍을 팽팽히 잡아당기며 히히덕 거리는 휘틀이 바로 양팔을 자른 장본인이다. 그저 팔 달린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게 이유였다. 휘틀은 우둔하고 자신의 추한 외모를 비관하는 사내여서 정상인을 무척이나 싫어했다. 타인의 외모를 자신과 마찬가지로 망가뜨리는 것을 좋아했다.

“어제 잘때 고민해봤는데 오늘은 네 성기를 떼어내기로 했오. 어차피 달려 있어봐야 앞으로 쓸데도 없잖엉. 잘라서 내가 기르는 메기한테 줄꼬양.”
“큭큭, 크크큭……!”

버나드는 실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양팔이 없는 것은 둘째치고 하루도 쉬지 않고 받은 고문으로 온몸의 뼈마디가 쑤셔서 저항하는 것조차 버거웠다.
차라리 지금 당장 죽는게 낫겠다 싶을 정도로 그는 한없이 절망스럽고 고통스러웠다.

언젠가 블라쉬에게 체포되고 나서 왕과의 독대를 거부 당했다.
그 직후 감옥에 투옥된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른다. 이제는 날짜 감각도 무뎌졌다.
숱한 고문으로 이성을 갖고 정상적인 사고를 하기조차 버거웠으며 그 쉬운 덧셈조차 못할 정도로 머리가 망가지기 직전이라는 말이 정확할 것이다.

“하하하, 하하……”
“음? 왜 웃는고지? 성기를 자른다니까 좋은고햐?”
“잘 들어봐. 휘틀.”
“응.”
“세상에 남자가 너랑 나  둘 뿐이야. 나는 이렇게 양팔이 잘린 채고 심지어 고추까지 없어. 그에 반해 너는 지금 모습 그대로지. 자, 이런 가운데 세상에서 가장 아리따운 미인이 우리 눈앞에 있어.”

휘틀의 눈이 동그랗게 떠지며 그가 헤벌쭉거린다.

“헉, 미인? 오호홍! 수줍어랑!”
“첫 눈에 반할 정도로 정말 아름다운 미인이야. 그 여자보고 우리  중에 마음에 드는 남자를 하나 선택해보라고 하는거야. 그 여자는 과연 누굴 고를까?”
“그야 나지. 팔도 없고 좆도 없는 너 같은 병신을 누가 고르겠옹. 오호홍.”
“틀렸다. 그녀는 네게 그럴거야. ‘너처럼 사람 새끼도 아닌 괴물하고는 말도 섞기 싫으니 저리 꺼져’ 라고.”

버나드는 휘틀을 향해 히죽 웃어보였다.

“그녀는 날 고를게 뻔하다, 이 괴물새끼야.”
“이, 이 자식이…!”

휘틀의 얼굴이 험상궂게 일그러졌다.
뿌드득!
이를 가는 그를 보며 버나드는 더욱더 화를 돋우었다.

“세상 그 어떤 여자도  좋아하지 않아. 넌 흉측하고 못생겼으니까. 여자들이 다 도망칠걸?”
“으아아아! 아니야아! 너 이 자식 가만두지 않겠엉!”

마침내 휘틀이 폭발하며 버나드의 왼쪽 다리를 거칠게 붙잡고 끌어당겼다. 버나드는 질질 끌려갔고, 휘틀은 돌로 만들어진 단상에 버나드의 왼쪽 다리를 올려놓고 허리에 차고있던 직사각형 모양의 넓적하고 네모난 칼을 빼들었다.
바닥에 깔린 짚과 같이 끌려온 버나드는 정신 나간 사람처럼 고래고래 소리질렀다.

“바로 그거야! 날 죽여 어서 죽이라고! 다리말고 내 심장을 찔러라! 제발 부탁이다!  망할 새끼야! 거기 말고 여기! 여기! 여기가 심장이란 말이다!”
“너, 너! 두고봐아! 다시는 개기지 못하게 해주겠엉!”

휘익!
휘틀은 칼을 높이 쳐들자마자 주저없이 내려쳤다.
탁!

“으아아아악!”

사방에 피가 흩뿌려지며 허벅지 바로 밑까지 왼쪽 다리가 잘려나갔다.
휘틀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계속 씩씩거리며 이번에는 버나드의 오른쪽 다리를 집어들었다.

“당장 나가소 계집을 데려올거야. 아무 계집이나 데려와소, 사지가 없는 네놈과 나 중에 누가 더 좋은지 물어볼꼬야! 만약 네놈이 더 좋다고하면 그 자리에서 계집을 죽이겠엉! 하지만 날 좋아한다고 하면 네놈 앞에서 보란듯이 떡칠거야! 두고봐아!”

버나드에게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고통에 울부짖으며 빨리 죽여달라고만 외칠뿐이었다.

“네가 원하는대로 안해줄고양. 조금씩 조금씩 괴롭히면서 죽일고니까. 고러는게 더 재밌옹.”

휘틀은 씩 웃고는 버나드의 오른쪽 다리를 단상 위에 올려놓고 칼을 들어올렸다.
그때 외부인의 방문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려왔다.
땡땡.
땡땡.

“칫, 짜증나게 누구양.”

휘틀은 허리춤에 달린 칼집에 서둘러 칼을 꽂으며 문을 쾅 닫고 나갔다. 곧 덜거덕거리며 문에 자물쇠를 채우는 소리가 들렀다.

“가지 말고 죽이라고… 날 어서 죽여달란 말이야 개놈아…”

왼쪽 다리의 출혈이 심했던 버나드는 고통으로 목이 메면서 점점 의식을 잃어가고 있었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때, 그는 자신의 왼쪽 다리에 약을 발라주고 있는 줄리안을 발견했다.

“정신이 드나요? 정말 놀라워요. 단장님을 완전히 부숴놨군요. 아주 철저하게. 왕은 뭐가 두려웠던건지.”

줄리안은 말끔한 제복차림이었다. 그는 죄를 면했단 말인가. 어떻게? 그런 의문이 머릿속에 차오르는 사이 줄리안이 먼저 말을 건네왔다.

“이럴까 싶어 응급약을 들고오길 잘했군요. 신성한 기운이 담긴 약을 발라 왼쪽 다리의 상처를 봉합했습니다. 원기가 회복되도록 알약도 먹였고요.”
“그냥 죽게 놔두지 그랬나…”
“슬픈 소리 하지 마세요. 우리 왕국 최고의 영웅이 죽으면 모두가 낙담할겁니다. 뭐, 단장님이 영웅이라는 걸 아는 백성은 아주 극소수겠지만요.”
“난 사지가 없는 얼간이일뿐이야.”
“그러게 제가 뭐랬습니까. 전하를 믿지 말라고 했죠? 이 지경까지 왔는데 아직도 전하를 믿으십니까?”

줄리안은 버나드의 눈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기가막히게도, 버나드는 시선을 내리며 말을 돌릴뿐이었다.

“내가 감옥에 갇힌지 얼마나 지났지…?”
“한달 조금 넘었습니다.”

줄리안이 피식 웃었다.

“어리석은 사람. 그래서 당신과 끝까지  수 없었던 겁니다.”
“무슨… 소리야…?”

줄리안은 손을 털며 자리에서 일어나 어깨를 으쓱거렸다.

“전 당신을 배신했습니다.”

아주 당당하게 선언하듯이 말을 뱉어냈다.
버나드는 누운 채로 그를 올려다보며 눈만 깜빡이다가 갑자기 실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너라면 그럴만해. 그리 놀랄 일도 아니지.”
“흠, 뭐랄까. 기대와 달리 실망스러운 반응이군요. 평소에 제가 그렇게 못미더웠던겁니까? 흐음. 단장님의 애장품을 부순다든지 더 심한 짓을 할걸 그랬나보군요. 아무튼 원망하지 않으십니까?”
“그럴 수 밖에 없었던 것이겠지.”
“뭐죠 그 해탈한듯한 재미없는 표정은? 사람은 궁지에 몰렸을때 본성이 나온다던데 단장님의 태도가 너무 감동스러워서 이거 완전 눈물 나겠는데요? 뺨이나 안맞으면 다행이라 생각하며 마음 단단히 먹고 왔건만. 아, 맞다. 따귀 때릴 팔도 없지.”
“잔인한 농담이다. 하긴 너라면 할만하지. 큭… 저들이 의심은 안하던가? 순순히 받아주든?”
“의심을 안할리가요. 그래서 우리 밤의 늑대들이 그동안 수집했던 고급 정보들을  풀면서 저들에게 신뢰를 쌓았죠.”
“어떤…?”
“예를 들면 단장님이 한달에 한번씩 찾아가던 창녀의 집이라든가?”
“제기랄…”

버나드는 탄식을 내뱉었다.

“개 같은 놈. 그 여자는 우리와 아무 상관없어.”
“제가 봐도 전 개 같은 놈인 것 같아요. 근데 살려면 별수 있나요? 아무거나 막 갖다 붙여야지. 단장님께 정보를 제공해주던 첩자이자 간간이 살도 맞대는 정부라고 했어요.”
“넌 정말 개놈이야, 줄리안.”
“전에 말씀하셨던 좆 같은 놈보단 낫네요. 적어도 개는 멀쩡하게 생겼으니까요.”
“집어치워. 그녀는 어찌 됐나…?”
“뭐 어찌 되겠어요. 뻔하죠. 성기에 돼지좆이 박힌 채 처형 당했습니다. 한개가 아니었죠. 병사들은 자궁이 터지도록 쑤셔넣었어요. 피부 가죽이 벗겨진건 덤이고요.”
“후…”

버나드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죽음을 안타까워할뿐 제게 화를 내지 않으시는군요.”
“화를 내서 뭐하는가. 그동안 밤의 늑대들을 이끌면서 너희에게 가르친게 그것인데.”
“걷는 사자 전쟁의 영웅인 단장님께 많은걸 배웠죠. 첩보활동부터 감시, 귀족 사찰, 첩자색출, 암살, 요인 호위 등 활동에 필요한 생존기술까지. 위험한 상황에 처하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살아남아라 라는 말이 특히 기억에 남는군요.”
“…그랬었지.”
“전 당부하신대로 했을뿐이고요.”
“뭐라 대꾸할 말이 없군. 교과서적으로 잘했다고 밖에. 축하한다 줄리안. 저들에게 신뢰를 주기 위한 네 공작은 성공했다.”
“감사합니다.”

줄리안은 빙긋 웃고는 화제를 돌렸다.

“세븐 로얄을 쓰지 않고 뭐하시는 겁니까? 그 기술들을 쓰면 그런  상태로도 감옥을 빠져나가는 것즈음이야 식은 죽 먹기일텐데.”
“권능은 이제 없다.”
“네? 없다니요?”
“이곳에 오자마자 제일 먼저 당한 일이 궁정 마법사들에게 둘러싸여 일곱개의 권능을 제거당하는 일이었지.”
“하하… 제거할 수도 있는 것이었습니까? 오래전부터 레온 왕가에 전해져 내려오던 비술을 프레드릭왕의 협조로 스스로 터득한 거잖아요?”
“정확히는 모르겠어. 제거 당한 것인지 아니면 봉인 당한것인지… 확실한 것은 권능의 힘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리고 쓰는 방법이 떠오르지 않아. 어떻게 쓰는지조차 모르겠다. 심지어 내가 익힌 무예조차 떠오르지 않아. 칼을 쥐는 법조차 모르겠어. 머리가… 바보가 된것 같아…”
“이거야 완전 꼬리 잘린 늑대나 마찬가지군요. 마스터 울프가 어쩌다 이런 지경에 이르렀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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