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화 〉충성의 대가, 몰락1
***
“사람은 늘 지나가버린 인연을 그리워한다. 그리고 죽음과 가까워질수록 그 그리운 시절로 되돌아가고 싶은 미련은 더더욱 커져만 간다.
지나가버린 인연을 잡지못한 아쉬움과 후회는 뒤늦게 그리워하며 기억하는 자를 향한 저주인가 아니면 인생 한때의 찬란한 추억인가. 이제와 그 인연을 대신할 것은 없는 것일까 그때를 완전히 잊을 수는 없는 것일까.”
***
아침에 눈을 뜨자 흐릿한 시야속에 창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바닥에 널브러진 옷을 주워입고 있는 창녀.
침대에 누워있는 버나드를 돌아보며 그녀가 웃는다.
“일어났어요?”
버나드는 손을 뻗어 그의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어제 내게 술을 먹였나?”
“좋아했잖아요.”
“난 취하는걸 싫어해.”
“하지만 취하면 좋아하잖아요. 즐겁게 잘하던데요?”
버나드는 미간을 찡그리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술은 괴물이다. 다음에 또 물 대신 술을 주는 일이 발생하면 가만두지 않겠다.”
“어젯밤 우울한 얼굴로 자기가 마셨으면서. 어쨌든 난 술을 좋아해요. 그리고 술에 취한 채 즐기는 섹스를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죠. 당신에게 그 기쁨을 알려주고 싶었어요.”
“난 즐길 생각에 섹스를 하는 것이 아니다. 술과 섹스 모두 싫어해.”
버나드는 이불을 젖히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버나드.”
창녀가 옷을 주워입다 말고 그에게 다가와 젖가슴을 비볐다.
“그러면서 왜 늘 저를 찾는거죠? 한달에 한번씩 주기적으로. 혹시 제가 마음에 들어서?”
버나드는 빤히 그녀를 내려다보다 입을 열었다.
“정액이 일에 방해가 돼서.”
“음? 아, 몽정 때문인가요?”
“미인계에 당하지 않기 위해서다. 의지와 상관없이 차오르는 욕정을 주기적으로 해소하는 것일뿐.”
“하하하.”
그녀가 깔깔 거리며 크게 웃음을 터뜨린다.
“당신 직업이 뭐길래 미인계를 걱정하죠? 정적을 걱정할만한 유명한 귀족은 아닌듯 싶은데.”
“알 것 없어.”
“그럼 저를 찾는 이유는요? 저도 미인계를 쓰고 있는지도 모르는데? 이건 대답해주실 수 있죠?”
“포주 없이, 동료 없이, 혼자서 일을 한다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그만큼 보는 눈이 적고 소문이 날 우려가 없으니까? 당신은 무슨 일을 하죠?”
버나드는 대답없이 고풍스러운 가구들로 채워진 방안을 지그시 둘러보았다.
이곳은 창녀의 저택이자 그녀의 가게다.
혼자서 성매매를 하는 그녀는 귀족을 상대하는 고급 매춘부였다.
전부터 이 저택에는 왕도에서 내로라 하는 인물들이 자주 드나들었다.
하지만 그들의 명단은 여태껏 바깥세상에 알려진 적이 없다.
보안이 철저하다는 증거다.
일찍이 버나드가 받은 보고서에 의하면, 창녀는 대부호의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사생아라는 이유만으로 유기되고 방기됐다. 그녀는 예술에 소질을 보이며 지성과 미모를 겸비하였지만, 성인이 되어 집에서 쫓겨나고 생계를 이어나갈 수 없을 정도로 큰 어려움에 처하자 결국 귀족들을 집으로 불러들여 접대하는 고급 창녀가 되었다.
세상에 알려진 그녀의 삶은 예술을 사랑하고 즐기며 가난한 예술가들에게 후원을 아끼지 않는 아름답고 젊은 귀부인이다.
그러나 그녀의 혼인은 거짓이었다. 따라서 남편 또한 가짜. 실제로 그녀는 누구와도 혼인하지 않았다.
귀부인이란 신분은 여러모로 유리했다.
누군가와 혼인했다는 사실은 세간에 그녀를 더욱 품위있고 고상한 존재로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그녀를 즐겨찾는, 그녀의 본모습을 아는 이들에게 안심과 안정감을 가져다 주기도 했다.
위장 결혼은 만일의 사태를 대비한 안전장치였다.
행여나 그녀가 매춘부란것과, 그녀를 거쳐갔던 수많은 귀족의 명단이 세상에 폭로된다면, 그때 가짜 남편이 나서서 “내 아내와 그 분들과는 결코 불미스러운 일이 없었소이다!” 하고 증언해주면 누구도 반박할 수 없게 되니까.
아내의 불륜에 가장 치를 떨어야할 남편이 아니라고 주장하는데 누가 손가락질을 하랴.
버나드는 바지주머니를 뒤져 금화 하나를 탁자에 내려놓았다.
“한달후에 시간 비워둬.”
“기꺼이. 그런데 알려줄 생각은 없는건가요?”
버나드는 옷걸이에 걸린 옷을 챙겨입으며 그녀를 응시했다.
“이렇게 귀찮은 여자였나?”
“다른 사람들에겐 귀찮지 않은 여자죠. 그런데 당신은 귀찮게 하고 싶네요.”
“어째서?”
“…….”
창녀는 살며시 미소만 지을뿐이었다.
버나드는 무감정한 눈빛으로 두어번 눈을 깜빡이더니 말했다.
“한달뒤의 약속은 없었던걸로.”
“왜요? 제가 쓸데없는 질문을 하는 바람에 걸리적거리기 시작했나요?”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며 조용히 옷을 챙겨입은 버나드는 칼을 허리춤에 두르고 그대로 문쪽으로 향했다.
뚜벅뚜벅.
그가 걸어가며 담담히 입을 열었다.
“누군가 물어온건가? 내 정체에 대해서?”
“어제 아침 안소니님이 다녀갔어요.”
“후작이? 그도 너를 찾나?”
“네, 종종. 그가 갑자기 어떤 남성의 생김새를 설명하며 물어보더군요. 그런 남자가 이곳에 오지 않냐 하면서. 얘기를 들어보니 당신과 외모가 아주 흡사했어요. 하지만 난 모른다고 했죠.”
“옳은 판단이었다.”
“굳이 당신을 감싸주려했던건 아니었어요. 그저 안소니님이 먼저 저와의 약속을 어겼기 때문이죠. 이곳에는 오직 향락만이 존재하니까요. 바깥세상 일을 알려하지 말고 물어서도 안돼요. 특히나 이곳을 찾아주시는 손님에 대한 질문은 절대 사절이에요. 저한테 큰 실례를 범한거죠.”
창녀는 미소를 지은채 잠시 버나드를 바라보다 다시금 입을 열었다.
“그런데 저도 규칙을 어기고 말았어요.”
“무슨 규칙?”
“안소니님과 있었던 일을 당신에게 밀고하고 있는 중이죠. 손님과 주고 받은 대화를 절대 그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말자 라고 저 자신과 맹세한 것을 현재 어기고 있는 중이에요.”
“그래서?”
“솔직히 저도 알고 싶어요.”
창녀는 가슴에 손을 모은 채 천천히 탁자로 걸어갔다. 그리고 문앞에 서있는 버나드를 돌아보며 눈을 마주쳤다.
“당신은 누구죠? 조금의 힌트라도 줘봐요.”
“날 알려하지…”
“잠깐만요. 난 우리집의 규칙을 깨면서까지 당신에게 아주 작은 정보를 줬어요. 그러니 당신도 아주 작은 정보라도 내놔봐요. 이른바 등가교환이죠. 또 알아요? 앞으로 우리가 서로 협력하는 사이가 될 수 있을지.”
그녀가 웃으며 윙크를 보낸다.
“서로를 위해.”
창녀의 제안은 뜻밖이었다.
버나드는 강제로 침묵을 가지며 고민할 수 밖에 없었다.
왕국의 주요 인사들과 자주 잠자리를 같이 하는 그녀가 자원해서 첩보원이 되어준다니 이처럼 달콤한 제안이 없었던 것이다.
“목적이 뭐지? 왜 날 도와주려는거냐. 혹시 너야말로 안소니 후작의 첩자가 아닌가?”
“의심이 많은 사람이군요. 당신의 잠자리 매너에 반했다고만 해두죠.”
“낯간지럽군.”
“더욱 닭살돋게 해주죠. 민망한 나머지 당신의 뺨이 붉어지는 모습을 보고 싶어요. 당신은 다른 손님들과 달리 잠자리에서 아주 신사적이고 상냥했어요. 주인을 닮아선지 그 하반신에 달린 물건도 매우 따뜻…”
“닥쳐.”
버나드는 점잖게 헛기침을 했다.
그의 귀가 금세 보일듯말듯 붉게 달아올랐다.
“이 이상 불필요한 말은 삼가라. 네가 원하는 정보를 주겠다.”
“마침내 동지가 되기로 결심한건가요?”
창녀가 환하게 웃는다.
“어서 말해봐요. 내게 당신의 어떤 정보를 줄거죠? 다른 사람 얘기는 필요없어요. 오직 당신에 대해서만 알려주면 돼요. 이름, 나이, 사는 곳, 고향, 직업 등등.”
“지금까지 너와 잠자리를 한 인물 중에 가장 신분이 높은 자의 직위가 뭐였지?”
“그야 당연히 어제 방문해주셨던 안소니님이죠. 우리 왕국의 실세중의 실세. 설마 그 분의 정적이라며 으리으리하게 포장하고 싶은신가요? 안됐지만 전 이미 그 분의 정적들을 다 꿰고 있죠. 심지어 그들의 페니스에 자리잡은 점 위치까지 알 정도예요. 안소니님과 그 정적들은 밖에서는 으르렁대며 싸우지만 이 집에서는 한 여자를 공유하고 있죠. 웃기죠? 아무튼 그 안에 당신처럼 생긴 사람은 없었어요.”
버나드는 작게 고개를 저었다.
“너의 짐작은 틀렸다. 난 그 후작과 정적들을 넘어서는 인간이다.”
“예……?”
“그들의 머리 위에 군림하는 인간이지.”
창녀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한다.
“그럼 왕세자…?”
“왕세자 위, 왕의 바로 아래. 오늘 대답은 여기까지다. 다른걸 듣고 싶으면 다음에 새로운 정보를 가져오도록.”
버나드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곧바로 문 닫히는 소리가 들려오며 방안에 홀로 남겨진 창녀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왕세자 위, 왕의 바로 아래? 그 둘 사이에 낄만한게 있던가……?”
한동안 고민에 잠겨있던 그녀는 번개를 맞은 사람처럼 돌연 눈을 번쩍떴다.
“설마 밤의 늑대들?”
***
저택을 빠져나오자 정문 앞에 마차 한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 옆에 마치 일반인인냥 평상복을 갖춰입은 부하 줄리안의 얼굴이 보인다.
그가 심술궂게 웃고 있다.
“간밤에 즐거우셨습니까? 저 집 주인이 저보다 더 상냥하게 잘해주던가요?”
“장난하지마.”
“왜 그래요. 정겨운 아침 인사인데.”
“여긴 어떻게 알고 왔지?”
“단장님께서 갑자기 말도없이 사라지시면 뻔하죠. 늘 한달에 한번씩 주기적으로 사라지니까, 따져보니 오늘이 바로 그날이더군요. 생리하는 날.”
“너한테 알아봐달라고 부탁하는게 아니었는데, 실수였다.”
“좋은 여자 소개시켜줬죠? 그녀의 출신배경부터 세세한 것 하나까지 신중히 검토한뒤 단장님께 추천한 겁니다. 욕 먹지 않으려고 애 많이 먹었다고요. 하여간 저 여자. 오늘밤엔 요드발 백작과 자는 것 같던데. 허이구야. 매일 불타오르네.”
“듣고 싶지 않다. 가자.”
“예예, 어련하시겠습니까. 저 같아도 내 여자 뺏기는 기분이 들겠네요. 오늘밤 딴 놈이 따먹는다고 생각하면 으이구.”
“좆같은 놈.”
버나드의 왼팔격인 줄리안은 이런 남자다.
자신의 상관 앞에서도 제멋대로에 건방지고 조롱하는 말장난을 서슴치 않는다.
그러나 겉보기에는 버나드를 존중하지 않는 것처럼 보여도, 본인을 버나드의 분신이라 칭할정도로 상관에 대한 존경과 애정을 가끔씩 표현하고는 한다.
단지 줄리안의 성격이 조금 삐뚤어졌을 뿐이다.
마치 뭐든지 반대로 하고 싶은 청개구리처럼.
“레아가 안보입니다.”
마차에 타자마자 마주보고 앉은 줄리안이 그런 말을 했다.
“아침에 출근하지 않았더군요. 혹시 들은게 있으십니까?”
“글쎄.”
줄리안은 창밖을 응시하는 버나드의 눈빛을 보고 대충 무언가를 눈치챘다.
“흐음, 뭔가 짐작가는게 있으신가보군요?”
동시에 마차가 덜컹 거리며 출발했다.
“며칠째 불안해보이더군요. 조만간 사고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오늘 쉬라고 하신겁니까?”
“아무말도 안했어.”
“멋대로 결근을 한겁니까?”
버나드는 무언가를 생각하는듯 조용히 눈만 깜빡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여유만만하신거 아닙니까? 그 녀석이 사고라도 쳤다간 우린 큰일난다고요?”
“…….”
줄리안은 대답없는 버나드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다시 입을 열었다.
“레아때문에 혼란스러우신거군요. 아, 그런거였군. 레아가 단장님의 아이를 임신한겁니까?”
난데없는 말에 깜짝 놀란 버나드가 그를 돌아봤다.
“말도 안되는 소리하지마. 난 결코 그녀와 잠자리를 같이한적이 없어.”
“압니다. 너무 말을 아끼시길래 살짝 놀래켜드렸습니다. 하하, 진정하세요.”
줄리안이 빙긋 웃는다.
“하지만 레아가 갑자기 전에 안하던 행동을 하면 단원들 모두 단장님과의 관계부터 의심할겁니다. 평소 단장님을 바라보던 레아의 눈빛이 과하게 반짝였기 때문이죠. 푹 빠져서는…, 그렇게 말 잘 듣는 개도 없을겁니다. 단장님이 죽으라고 명령하면 그 자리에서 바로 죽을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