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 그림자 전설 (94/95)

14 그림자 전설

1년(현실시간) 전 검마노에 골든 패치라 불리는 패치가 있은 후 검마노의 세상은 거의 모든 게 바뀌었다.

유저들은 이때부터를 검마노의 황금시대라고 불렀다.

현실시간으로 1년, 그리고 게임시간으로 3년이 지난 지금 여전히 황금시대는 계속되고 있었다.

황금시대 이전 암흑시대라 불렸던 때에 검마노를 사실상 지배했던 로열패밀리들은 대부분 무너졌다.

물론 획기적으로 길드를 개혁해 살아남은 길드들도 있었다.

그렇게 살아남은 몇몇 로열패밀리와 새롭게 신흥 세력으로 부상한 길드 연합들을 합쳐서 사람들은 검마노 100대 길드라는 목록을 만들었다.

말 그대로 춘추전국시대와 같은 세력 구도가 만들어진 것이다.

물론 다 하나의 예외는 존재했다.

모든 유저가 입을 모아 얘기하는 검마노의 정점.

스페셜 원이라 불리는 그들.

바로 그림자들, 섀도우 로드였다.

그들이야말로 검마노의 황금시대를 대표하는 최고 길드였다.

그들이 최고라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는 유저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들은 그 사건 후에도 다른 남은 다섯 로열패밀리들 중 둘과 다시 충돌했었다.

결과는 현재의 상황이 말해주고 있었다.

섀도우 로드와 충돌했던 그 두 길드는 다크문과 골든 라인 그랬듯이 처참하게 무너졌다.

섀도우 로드의 그림자들은 너무나 강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 그림자들이 도대체 누구인지 아무도 몰랐다.

어떤 이들은 그림자들이 최소 몇 만은 된다고 했고, 또 어떤 이들은 오천도 되지 않는다고 했다.

누구의 말이 맞는 건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그저 자신들이 편할 대로 생각하는 게 제일 좋았다.

당금에 이르러서 저레벨 유저들에게 가장 들어가고 싶은 길드가 어디냐고 묻는다면, 100이면 100 모두 섀도우 로드라고 얘기했다.

섀도우 로드의 결속력은 이미 오래전부터 알려진 사실이었다.

그들은 길드원들을 서로 가족이라고 생각하며 챙긴다고 알려졌다.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더 대단하고 더 강한지도 몰랐다.

어쨌든 많은 사람들이 그토록 동경하는 섀도우 로드지만 정작 가입은 쉽지 않았다.

철저히 추천에 의해 실력이 확인된 소수의 인원만 길드원으로 받았기 때문에 누가, 언제, 어떻게 길드에 가입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심지어 길드 내부의 정보를 밝힐 경우 캐릭터가 초기화될 수 있다는 살벌한 비밀 엄수 선언을 하고 길드에 가입하기 때문에 친한 친구나 가족에게도 자신이 섀도우 로드라는 걸 밝히지 않는다고 전해졌다.

알면 알수록 더 신비로운 섀도우 로드.

덕분에 사람들은 섀도우 로드를 더욱 동경하며 꼭 그림자의 일원이 되고 싶어 하는 건지 몰랐다.

* * *

“RS연합?”

가볍게 연주하며 엘리스와 같이 노래를 부르던 율은 자신을 찾아온 팔콘의 얘기를 듣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네, 레볼루션 썬이라고 예전에 로열패밀리 중에 썬(Sun) 길드 기억나세요?”

“알지. 우리랑 한번 붙었었잖아. 걔들이 다시 길드를 만든 거야?”

“아, 그건 아니에요. 그 썬 길드는 우리한테 개박살이 나고 완전히 무너져서 사라졌어요.”

“그럼 뭐야? 레볼루션 썬? 진화한 썬 길드라는 뜻 아냐?”

“그 뜻은 맞는데… 자세히 알아보니까 그 길드가 부활한 건 아니고, 그 길드의 추종자들이 새로 만든 길드더라고요. 이미 예전 썬 길드의 핵심멤버들은 캐릭터를 새로 키우거나 다른 길드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니까 간단히 말하자면… 짝퉁, 가짜죠.”

“그래? 근데 걔들이 왜?”

“좀 당황스럽긴 한데… 걔들이 우리한테 선전포고를 했어요.”

“으음?”

“저도 처음엔 종종 있었던 일들이라 그냥 평소처럼 장난으로 치부하고 끝내려 했는데… 얘들이 무려 우리 길드의 그림자 명단을 빼내려고 별 수작을 다 부리고 있네요. 지금도 정보 길드 세 곳에서 그 얘기를 접수받고 오는 길이에요.”

검마노의 유저들이 잘 모르는 것 중 하나가 현재 검마노에서 활동하는 4대 정보 길드 중, 세 군데가 모두 섀도우 로드가 운영하는 곳이란 사실이었다.

율은 섀도우 로드가 로열패밀리를 무너트리고 새로운 시대를 열었던 그 순간부터 이미 검마노의 정보 시장을 장악하기 위해 여러 가지 노력을 했었다.

그 결과, 현재 섀도우 로드는 4대 정보 길드 중 세 군데를 사실상 통제하고 있었다.

세 군데 중, 두 군데는 섀도우 로드가 직접 만든 곳이었고 나머지 한 군데는 슬쩍 힘으로 제압한 곳이었다.

그나마 섀도우 로드의 영향을 받지 않는 정보 길드가 ‘천이통’이라는 길드였는데, 사실 이 길드가 4대 정보 길드 중 규모가 제일 작았다.

어쨌든 그렇게 일찌감치 검마노의 정보망을 모두 장악하고 있었기에 율은 앉은 자리에서 검마노의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낱낱이 알고 있었다.

“…그냥 놔두기엔 선을 넘었군.”

“네, 저도 선을 넘은 것 같아 형한테 말씀드리려고 올라온 거예요.”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네 생각은 어때?”

“가볍게 9기 그림자들 좀 보낼까요?”

“9기로 가능해? 9기라면 이제 갓 그림자 육성 프로젝트를 끝낸 길드원들이잖아.”

“충분해요. 형, 우리 실력 잘 아시잖아요.”

“하긴… 그런 놈들은 9기가 아니라 현재 수련 중인 10, 11기를 보내도 충분하긴 하겠다.”

섀도우 로드는 완전하게 자리를 잡은 후 그 뒤로 새로운 길드원을 받을 때 꼭 3~5개월(게임시간)에 한 번씩 기수를 나누어 한꺼번에 받았다.

당연히 최초 섀도우 로드를 그 자리에 올려놓은 이들은 1기가 되었고, 그 뒤로 2기, 3기… 이렇게 쭉 추가되었다.

그리고 새롭게 가입을 한 길드원들은 꼭 그림자 양성 프로젝트라는 걸 경험해야 했다.

이것은 일종의 수련이었다.

이걸 개발한 건 의외로 강풍이었다.

강풍은 다년간의 전투 경험을 바탕으로 신규 길드원들의 능력을 단시간에 단련시킬 여러 방법을 개발했고, 그걸 하나로 묶어 만든 게 그림자 양성 프로젝트였다.

신규 길드원들은 그 누구도 예외 없이 대략 6개월(게임시간) 정도가 걸리는 그림자 양성 프로젝트를 통과해야 진짜 그림자가 될 자격을 얻었다.

“그럼, 9기 그림자들로 해결하는 걸로 할게요.”

“응, 그렇게 해. 아, 참!”

“네?”

“그때 말했던 건 어떻게 됐어? 찾았어?”

“아~ 맞다. 그렇지 않아도 형한테 그 얘기도 하려고 했는데 깜빡했네요. 정확한 위치는 아직 알아내지 못했어요. 대신 놈들이 끌어들인 다른 랭커들 명단은 확보할 수 있었어요.”

“다른 랭커? 놈들 말고 또 있어?”

“네, 형이 워낙~ 인기남인지라 그놈들이 하고 다니는 얘기에 관심을 가질 만한 랭커들은 좀 있죠. 일단 이번에 추가된 놈들은 일단 예전 우리가 무너트렸던 로열패밀리 ‘명(明)’의 길드 마스터였던 주원장과 부길드 마스터였던 관우가 있고요.”

“또 로열패밀리야? 걔들은 지겹지도 않은가…….”

“지겹기보단 답답하겠죠. 어쨌든 예전 로열 유저 출신 랭커가 대충 세 명… TOP유저 출신 랭커가 한 명… 놈들까지 합치면 대략 서른 명 정도 되겠네요.”

“그게 끝이야?”

“현재까지는 이게 끝인 것 같아요.”

“그래서 도대체 모여서 뭘 한다는 거야?”

“정확한 건 알 수 없지만 아마도 그들의 목표는 한 가지겠죠.”

“나?”

“네, 형을 쓰러트리는 게 현재 검마노의 정점을 쓰러트리는 거잖아요. 검은달과 황금공자가 지금까지 미련을 못 버리고 저렇게 구차하게 랭커들을 모으는 이유가 뭐겠어요. 무조건 형이죠.”

“정말 세상 재미없게 사는 놈들이네. 그렇게 경고했건만… 내가 너무 물렁했나?”

“으음… 물렁하시지는 않았는데요.”

순간 팔콘은 식은땀을 흘렸다.

율이 다크문과 골든 라인을 얼마나 집요하고 사악하게 짓밟았는지, 그리고 아예 재기할 생각조차 하지 못하게 철저히 뿌리까지 전부 뽑아서 제거해 버리는 그의 모습을 직접 옆에서 지켜본 팔콘으로선 절대 율이 물렁했다는 것에 동의할 수 없었다.

“근데 왜 이렇게 경고를 무시하지. 안 되겠어. 놈들에게 진짜 절망이 뭔지 다시 한 번 보여줘야겠어.”

“직접 나서시게요?”

“걔들 상대하는데 굳이 그림자들까지 동원할 필요가 뭐 있겠어. 그렇지 않아도 나도 요즘 좀 근질근질했어.”

“그럼, 제가 놈들의 위치가 파악되는 대로 바로 알려드릴게요.”

“응, 부탁한다.”

“네, 형 쉬세요. 누나도 쉬어요.”

팔콘은 율과 엘리스에게 인사하고 자리를 떠났다.

“…너 또 혼자 가려고 생각하고 있지?”

팔콘이 떠나자 가만히 듣고만 있던 엘리스가 슬쩍 율을 바라보며 얘기했다.

“응? 아, 아니… 아무래도 내가 해결해야 할 문제니까… 그래서…….”

“나도 같이 간다.”

“아, 아니 그래도 내가 혼…….”

“같이 간다.”

또박또박 다시 한 번 말하는 엘리스.

그녀의 목소리에서 위험을 느낀 율은 곧장 입장을 바꾸었다.

“당연히 같이 가야지. 그럼! 당연한 거야.”

본격적으로 연애를 시작한 지 거의 1년(현실시간)이 다 되어가지만 여전히 율은 엘리스에게 꽉 잡혀 있었다.

며칠 후 팔콘은 어이없는 RS연합의 응징을 위해 9기 그림자들을 보냈다.

9기 그림자들의 대표인 로안은 대략 160여 명의 9기 그림자들을 곧장 RS연합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RS연합은 하이퍼넷에 당장이라도 섀도우 로드를 쓰러트릴 것처럼 큰소리를 뻥뻥 쳐놓았지만 사실은 전부 노이즈 마케팅이었다.

그들은 절대 섀도우 로드를 쓰러트릴 생각이 없었다. 아니, 쓰러트릴 수가 없었다.

현존 최강의 길드를 쓰러트릴 만큼의 전력은 당연히 없었다. 그들은 단지 자신의 길드를 이슈화시켜 조금이라도 많은 신규 길드원을 받으려고 이런 어이없는 일을 꾸몄던 것이다.

물론 뭔가 진짜 섀도우 로드를 상대하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 섀도우 로드의 그림자들 명단을 찾는다거나 괜히 섀도우 로드의 본거지라는 소울 시티 주변을 어슬렁거린다거나 하며 계속해서 주기적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유도했다.

그리고 RS연합은 진짜 그런 노이즈 마케팅의 효과를 곧장 볼 수 있었다.

섀도우 로드란 이름이 워낙 대단해서 그런지 진짜로 신규 길드 가입자 수가 평소보다 두 배로 늘었다.

그들 입장에선 정말 대성공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몰랐다.

그저 장난처럼 건드려봤던 섀도우 로드.

그들은 그 그림자들이 진짜 움직였을 것이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RS연합의 총 길드원 숫자는 대략 1만 명 정도였다.

하지만 그건 그저 총 길드원 숫자였고, 대충 하루 동시 접속자 숫자는 2~3천 명 정도였다.

이 정도라면 규모가 작은 길드는 아니었다.

아무래도 연합 형태의 길드이다 보니 머릿수는 어느 정도 확보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 2~3천 가량의 길드원들 중 반수에 가까운 천여 명이 게임 아웃을 당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대략 몇 시간 만에 천여 명의 RS연합 길드원들을 제거한 이들은 바로 9기 그림자들이었다.

로안이 이끄는 그들은 능숙한 솜씨로 RS연합의 손발을 잘랐다.

이렇게 먼저 손발을 자르면 머리가 움직이게 되어 있었다.

그리고 당연히 그 머리 역시 손발과 마찬가지의 결과를 얻을 수밖에 없었다.

로안과 9기 그림자들은 RS연합을 쓸어버렸다.

머릿수가 적은 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림자들은 벌써 3년(게임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적은 숫자로 훨씬 더 많은 숫자의 유저들을 쓰러트려왔기 때문에 그들의 행보엔 거침이 없었다.

추풍낙엽.

가을바람에 떨어지는 나뭇잎들처럼 RS연합은 제대로 손도 써보지 못하고 그림자들에게 응징을 당했다

오랜만에 그림자들이 등장해 가볍게 일을 벌려놓자 하이퍼넷도 소란스러워졌다.

명불허전이란 말부터 최강의 그림자들답단 말까지 모두가 그림자들의 실력에 혀를 내둘렀다.

특히 꼴값을 떨면서 섀도우 로드와 싸우겠다고 설레발쳤던 RS연합이 완전히 박살나자 아주 속 시원하다는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여전히 일반 유저들은 섀도우 로드에 대한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섀도우 로드는 지금까지 소수를 대표하며 그 소수의 위력을 제대로 보여주었다.

인간은 늘 기적을 꿈꾼다.

그렇기 때문에 일반 유저들에겐 소수가 다수를 이기는 기적을 보여준 섀도우 로드야말로 그들이 가장 원했던 이상향에 가까운 길드였다.

* * *

[모든 시스템이 정상 작동 중입니다.]

유토피아는 늘 그렇듯 성진에게 매 시간마다 시스템 작동 정보를 얘기해 주었다.

1년(현실시간) 전까지만 해도 유토피아는 바쁘게 이런저런 변동 사항을 얘기하고 있었지만, 이제는 거의 매일매일 똑같은 말만 반복했다.

검마노의 시스템 자체가 거의 완벽하게 안정화를 찾았기 때문에 최근엔 아주 작은 변화도 거의 없을 정도였다.

“…앞으론 매 시간마다 보고하지 말고 하루에 한번만 보고해라.”

성진 역시 그걸 잘 알기 때문에 결국 이제는 보고 주기마저 바꿔버렸다.

[알겠습니다.]

“참, 그리고 그 녀석은 잘 있냐?”

[현재 편안하게 세상을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허허, 세상을 돌아다녀? 그 녀석이 드디어… 여유를 찾고 그 세상에 적응을 했구나…….]

[유저들 사이에 섞여서 모험도 즐기고 심지어 레벨까지 올리고 있습니다.]

“…드디어… 내가 원했던 그 순간이 왔군.”

성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매우 밝게 웃었다.

이것이야말로 궁극적으로 그가 원했던 것이다. 현실에서 제대로 생(生)을 다 끝내지 못하고 떠난 그녀였다.

하나밖에 없던 자신의 딸 박솔.

그녀만 생각하면 성진은 가슴이 찢어졌다. 연구에 미쳐 그녀를 거의 방치하다시피 놔두었던 성진.

과거의 성진은 가족보단 연구가 먼저였다.

그녀의 어머니이자 자신의 아내가 죽을 때도 연구 때문에 병원조차 제대로 가보지 못했던 나쁜 아버지… 그게 바로 성진이었다.

그 성진을 너무나 미워했던 솔은 결국 20세의 나이에 자살을 시도했다. 비록 자살은 미수로 끝났지만 결국 그녀는 그 일로 인해 식물인간이 되었다.

그때 성진이 받았던 충격은 엄청났다.

가족을 사랑하지 않았던 게 아니었다. 단지 가족을 위해 더 열심히 일한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그런데 이런 결과가 나와 버렸다.

성진은 그 뒤로 두문불출하며 뭔가를 만들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검과 마법의 노래’였다.

우연히 딸의 방에서 발견한 수많은 판타지 소설들을 보고 그녀가 현실보다 이 판타지 속의 세상을 좋아했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그는 그녀에게 이 세상을 보여주기로 마음먹었다.

그가 검마노를 만든 이유는 돈을 벌기 위해서도, 자신의 실력을 자랑하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단지 딸에게… 새로운 세상을 보여주고 싶어서였다.

아버지의 마음으로 만든 게임.

그가 만든 그 검마노의 중심엔 솔이 있었다. 식물인간이 되어 누워 있던 솔.

그녀의 몸은 죽었지만 뇌는 살아 있었기에 성진은 그 뇌를 슈퍼컴퓨터와 연결해 하나의 거대한 세상을 다시 창조했다.

인간의 뇌는 감히 최신형 슈퍼컴퓨터조차 범접하기 힘든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 결과 검마노는 성진이 생각했던 것 이상의… 아니, 이상이란 말도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정말 생각지도 못한 엄청난 세상이 탄생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그 세상은 불안정했다.

특히 성진의 딸인 솔이 이 세상에 대해 굉장히 부정적이었다.

그래서 여기저기에서 문제가 생겼다.

성진은 자신의 힘으로 그 문제를 해결하고 솔이 영원히 그 세상에서 만족하며 살도록 만들어 주려고 했다.

하지만 그게 잘되지 않았다.

사실 마신 뮤온이 등장하고 어둠의 군단이 지오 대륙으로 쳐들어오는 이 내용 모두가 게임 속에 살아 있던 솔이 만들어낸 일들이었다.

솔은 마치 자신을 통해 만들어진 이 세상을 다시 자신의 손으로 망가트리려고 하는 것처럼 행동했다.

결국 성진은 어쩔 수 없이 최후의 결단을 내렸다.

현실보다 백만 배 정도로 빨리 진행되고 있던 검마노 세상의 시간 흐름을 오히려 현실보다 훨씬 느리게 진행되도록 조종하고, 거기에 이번 문제를 해결할 외부 개입 요소를 추가시켰다.

그 외부 개입 요소가 바로 유저들이었다.

유저들을 통해 새로운 변화를 만들어내길 원했던 성진.

사실상 조각 아이템이나 여러 퀘스트들까지 모두 성진이 만들어냈던 것이다.

그가 원했던 건 하나였다.

이 세상의 안정화.

그 안정화된 세상에서 딸이 그렇게 원했던 판타지 세상을 살아가는 것… 성진은 오로지 그것만을 원했다.

그리고 드디어 그런 순간이 왔다.

솔은 이제 완벽하게 검마노의 세상을 이해하고 또 만족하고 있었다.

그렇게 그녀는 그 세상에서 제2의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이걸로 만족이었다.

이제 성진은 계속 이러한 세상을 평생토록 유지하는 것에만 신경 쓰면 되는 것이다.

“…솔아… 마음에 드느냐?”

대답도 하지 못할 딸을 향해 조용히 묻는 성진.

그는 미친 과학자이기 전에 한 아이의 아버지였기에 이런 엄청난 세상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이 아비가 너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라곤 이런 것밖에 없구나… 미안하다… 미안하다…….”

성진은 솔을 향해 연신 사과를 했다.

일이 이 지경이 되기 전에 잘했어야 했다.

그랬다면 솔은 남들처럼 원래 인생에서 행복하게 살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고, 결국 솔은 원래 인생을 제대로 살아보지도 못했다.

그래서 성진은 그녀에게 두 번째 삶을 만들어주었다.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성진이 딸에게 바치는 처음이자 마지막 선물. 그게 바로 ‘검과 마법의 노래’였다.

* * *

“여어~”

율이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가며 손을 흔들었다.

마치 반가운 친구라도 만난 것 같은 행동이었다. 하지만 율이 지금 만난 이들은 결코 그의 친구들이 아니었다.

갑자기 율이 나타나자 급당황하는 그들.

그들은 바로 검은달과 황금공자가 열심히 끌어 모은 안티 섀도우 로드 모임이었다.

“어, 어떻게…….”

검은달은 율과 엘리스가 갑자기 자신들이 있는 곳에 나타나자 크게 당황하며 말까지 더듬었다.

“뭘 그리 놀라. 처음 만나는 사람처럼… 다들 한 번씩은 날 만나봤었잖아?”

율이 여유 있게 웃으며 얘기했다.

“으음… 어떻게 이곳에 온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겨우 둘이서 이곳에 온 것이라면 분명 후회하게 될 것이다.”

검은달과 황금공자가 모은 안티 섀도우 로드들은 생각보다 더 많았다.

팔콘은 대략 30명 정도라고 얘기했었는데, 와서 보니 거의 100명 정도는 되는 것 같았다.

그래서일까?

처음엔 당황했던 그들도 율이 진짜 단둘이만 이곳에 왔다는 걸 깨닫자 점차 자신감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건방진 놈. 난 네놈의 그 오만함이 언젠가 너에게 큰 독이 될 거라고 믿고 있었다.”

머릿수의 압도적인 우위를 깨달은 황금공자가 코웃음을 치며 얘기했다.

“호오~ 다들 옛날 기억 같은 건 다 머릿속에서 지워 버렸나봐?”

철저하게 박살났던 기억들.

이곳에 모인 대부분의 사람들은 율에게 아주 심하게 당했던 기억들이 있었다.

“그때와 지금은 다르다. 넌 정말 큰 실수를 한 거야.”

검은달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실수? 내가?”

“그렇다. 넌 너무 네 실력을 믿고 오늘 치명적인 실수를 한 것이다.”

“그러니까 정리를 하자면… 너희들이 우리를 이길 수 있다는… 뭐, 그런 얘기인 거지?”

“흐흐흐, 당연하지. 네가 아무리 그림자의 왕이자 검마노의 최강자라고 해도 이 정도의 숫자 차이는 절대 극복하지 못한다. 여기엔 로열 유저만 해도 41명이 넘게 모였다. 그뿐인 줄 아나? 나머지 62명 정도도 전부 TOP유저들이다. 거기에 리미트 유저도 넷이나 있다. 어때? 좀 긴장이 되나?”

“…정확히 백 명하고 거기에 일곱 명 추가인가?”

율은 조용히 검은달 패거리의 숫자를 세어보았다.

“그래, 좀 많이 모이긴 했구나.”

“이제 슬슬 걱정이라도 되는 거냐?”

“근데…….”

율이 천천히 눈앞에 있는 이들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이렇게 모였다고 나를 이길 수 있을 것 같아?”

“너의 그 사기적인 능력은 누구보다 내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난 그걸 충분히 고려해서 이번 멤버들을 모았다. 아니, 어쩌면 충분을 넘어 훨씬 더 강하다고 가정하며 모았다고 말하는 게 맞겠군.”

“아~ 그렇군. 그럼 이게 바로 너의 최선이겠군?”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했다. 최선이냐고 묻는다면… 그렇다!”

자신 있게 대답하는 검은달.

율은 그런 검은달을 보며 특유의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후후, 진짜야? 이게 진짜 최선이야? 그렇다면…….”

그의 말과 함께 주변 공기가 아주 미약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너희 오늘 여기서 전부 죽는다.”

츠츠츠츳!

율의 몸에서 피어오르는 막대한 투기(鬪氣).

“너희가 원하는 만큼, 너희가 꿈꿨던 만큼… 딱 그만큼 절망과 지옥을 경험하게 해주마.”

파아앗!

율의 손가락에 끼어져 있던 엡솔루트 링이 묵현으로 변화했다.

동시에 율은 그것을 튕겼다.

디링!

전투의 시작.

훗날 그림자 왕의 절대무력을 명백히 증명한 전투로 널리 알려진 ‘로열의 몰락’ 전투가 시작되었다.

절망과 지옥.

율과 엘리스는 진짜로 그들에게 그것을 경험시켜 주었다.

그들에게 자신이 넘을 수 없는 벽이 아니라 아예 막혀 있는 벽이라는 사실을 알려준 율.

100 VS 2라는 수적 차이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 그저 학살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율도 율이지만 엘리스마저도 너무 강했다.

특히 그 둘의 호흡은 마치 한 사람이 두 개의 캐릭터를 조종하는 것처럼 완벽했다.

모든 면에서 완벽하게 졌다.

과거에 졌을 때보다 더 처참하게 무너졌다.

간신히 그 절망감이라는 나락에서 기어 올라왔던 그들은 이번엔 더 깊은 절망감의 나락으로 다시 추락했다.

이건 도저히 다시 올라올 수 없는 나락이었다.

한때 검마노를 지배했던 로열의 주인들.

하지만 그 로열의 시대는 이제 끝났다. 이로써 완벽하게 몰락했다.

대신 그림자의 시대가 왔다.

그림자의 전설.

그것은 앞으로 검마노에 영원히 기억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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