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 섀도우 로드 집결 (92/95)

12 섀도우 로드 집결

유저들은 이번 패치를 ‘골든(Golden)’ 패치라 부르기 시작했다.

황금의 시대.

마신 뮤온으로 시작되었던 어둠의 시대가 종료하고 드디어 다시 지오 대륙에 새로운 황금시대가 시작되었다.

아주 먼 옛날 번창했던 고대 문명을 일순간에 퇴보시켰던 어둠의 군단들도 마군왕 움브라와 함께 모두 사라졌다.

물론 그래도 여전히 어둠에 물들어 변형된 몬스터들은 그대로 남아 있었지만 이제 그들은 대륙의 일부분이라 할 수 있었다.

세계수가 살아나며 대륙 전체의 지형마저 변화했다.

너무 한꺼번에 많은 게 바뀌었다.

덕분에 유저들은 매우 당황스러워했지만 대부분의 유저들이 이번 업데이트를 아주 반갑게 받아들였다.

특히 새로운 종족 부분은 거의 열풍(熱風)을 넘어 광풍(狂風)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반응이 좋았다.

다만 몇몇 유저들… 정확히 말해서는 조각 아이템과 관련이 있던 유저들은 아주 강력하게 반발했다.

어떻게 보면 레전드급 이상의 위력을 지녔다고 할 수 있는 조각 아이템을 너무나 갑자기 빼앗겨버렸으니 그런 반응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보상으로 똑같은 종류의 엘리트 아이템을 줬다지만 오히려 그게 더 그들을 화나게 한 것 같았다.

마치 마시고 있던 고급 브랜드 커피를 빼앗은 후 100원짜리 자판기 커피라도 내어준 것과 마찬가지로 자신들을 완전히 무시했다며 흥분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흥분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었다.

그들은 빼앗긴 조각 아이템을 돌려달라고 다방면으로 의사를 표현했지만, 늘 그렇듯 검마노 측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압도적인 기술력이 바탕이 되다 보니 불만을 모르쇠로 일관해도 답답한 건 게임을 즐기는 유저가 될 수밖에 없었다.

마음에 안 들면 게임을 안 하면 그만인데… 현재 검마노를 대신할 다른 게임은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어차피 이번 경우는 불만 자체가 최상위권 유저들 몇몇에만 집중된 것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많은 수의 다른 일반 유저들은 아주 좋은 패치였다고 입을 모아 얘기했다.

조각 아이템이란 것 자체가 너무 많은 불평등을 야기했다는 그들의 주장도 일리가 있었다.

물론 그들은 그 불평등을 야기했던 조각 아이템이 하나로 뭉쳐서 진짜 너무나 심각한 불평등을 만들 수 있는 아이템이 되었다는 건 전혀 모르고 있었다.

아마 영원히 모를 것이다.

어쨌든 세상은 변하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많이.

지금 이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면 영원히 뒤쳐질 수 있다는 걸 많은 유저들이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그들은 열심히 변화를 쫓아가기 위해 노력하기 시작했다.

* * *

총 집결령.

율은 섀도우 로드의 마스터로서 3,216명의 모든 길드원들에게 총 집결령을 내렸다.

그 장소는 놀랍게도 이번에 새로 공개된 소울 시티였다.

벌써 반 년(게임시간) 넘게 인적이 드문 곳에서 폐관 수련을 계속해오던 섀도우 로드의 길드원들은 드디어 꽁꽁 막혀있던 섀도우 로드의 활동 금지 규칙이 사라지자 물 만난 물고기처럼 무척 즐거워했다.

그들은 곧장 소울 시티를 향해 달려갔다.

아직은 다크문과 골든 라인이 그들을 찾고 있었지만 그래도 최초에 열성적으로 찾을 때와 비교하면 거의 찾지 않는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변해 있었다.

특히 최근 발표된 새로운 업데이트 때문에 그들 나름대로 더 정신이 없을 수밖에 없었다.

그사이 섀도우 로드의 전 길드원 모두 은밀하게 소울 시티로 이동할 수 있었다.

소울 시티가 등장한 지 대략 보름(게임시간)밖에 지나지 않았건만, 이미 소울 시티는 엄청 복잡해져 있었다.

특히 새로 선택이 가능해진 종족들의 시작 지점이 모두 이 소울 시티로 고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여기저기 수많은 저렙들이 파티를 구하거나 물건을 사기 위해 돌아다녔다.

“휴~ 진짜 복잡하네.”

강풍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중얼거렸다.

“벌써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을 거라곤 생각하지도 못했네요. 우리도 이 도시가 생기고 나자마자 곧장 연락을 받고 달려온 건데…….”

팔콘 역시 대단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얘기했다.

“근데 왜 여기서 모이는 거야?”

당연히 다시 모일 때는 천공 도시에서 모일 것이라고 생각했던 엘리스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글쎄… 뭐, 이유가 있겠지. 설마 율이 아무 이유 없이 이곳으로 오라고 했겠어.”

“하긴.”

강풍의 말에 엘리스도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했다.

율이 아무 이유 없이 그냥 이곳에 모이라고 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그는 성격상 즉흥적인 행동보다는 계산적인 행동을 더 많이 하는 인물이었다.

바로 그때 소울 시티로 들어선 그들을 향해 한 남자가 다가왔다.

딱 봐도 인간이 아닌 남자.

그는 놀랍게도 엘프였다.

그것도 유저가 아닌 NPC 엘프였다.

“엘리스님과 강풍님, 그리고 팔콘님 맞으십니까?”

“음? 누구시죠.”

강풍은 한눈에 상대가 NPC란 걸 알아봤지만 그렇다고 그걸 굳이 티낼 필요까지는 없었다.

“율님의 명을 받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네!?”

NPC 엘프 남자의 말에 셋 모두 동시에 놀라며 똑같이 답했다.

“놀라지 않으셔도 됩니다. 지금까지 오신 섀도우 로드의 모든 길드원들이 저희들의 안내를 받아 율님이 계신 곳으로 가셨습니다.”

“…….”

“이게 어떻게 된 거냐…….”

“저희들이라면 누굴 얘기하는 거죠?”

말 없는 엘리스.

그저 황당하다는 표정만 짓고 있는 강풍.

그나마 팔콘이 가장 먼저 놀란 걸 진정시키고 엘프에게 물었다.

“저희들은 소울 시티를 지키는 자치단입니다.”

“소울 시티의 자치단이 왜 율 형의 명령을 듣는 거예요?”

“그거야 당연히… 율님이 이 소울 시티의 주인이시기 때문이죠.”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얘기하는 NPC 엘프.

하지만 그 말 덕분에 세 사람은 다시 한 번 더 큰 충격을 받은 표정을 지으며 또 동시에 같은 말을 토해냈다.

“네!?”

“하하, 여러분들도 역시 똑같은 반응을 보이시는군요. 일단 따라와 보십시오. 율님께서는 등 뒤에 짊어진 붉은 십자가를 믿는다면 따라와도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

붉은 십자가 얘기까지 하는 걸로 봐서는 확실히 율이 보낸 NPC였다.

셋은 어쩔 수 없이 그 NPC 엘프의 안내를 받으며 소울 시티 안쪽으로 이동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궁금한 게 많았지만 그런 궁금증은 율을 직접 만나 해결할 수밖에 없었다.

세 사람은 엘프 NPC를 따라 소울 시티의 가장 깊숙한 곳까지 들어갔다.

중간, 중간 도시 경비병으로 보이는 NPC들이 몇 번이고 가로막았지만 전부 엘프 NPC의 간단한 얘기와 함께 무사통과되었다.

도시 경비병마저 무섭게 생긴 이종족이 대부분이었다. 특이하게 가장 많은 경비병들이 오크 경비병들이었다.

오크 특유의 건장한 몸은 그저 서 있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위압감을 발휘했다.

뭐가 됐건 일단 중요한 건 이런 삼엄한 경계를 계속 지나 안쪽으로, 더 안쪽으로 들어간다는 것이었다.

소울 시티는 아직까진 밝혀진 것보다 밝혀지지 않은 게 더 많은 곳이었다.

당연히 지금 세 사람이 지나가고 있는 그 길은 아무나 들어올 수 없는 길이었다.

세 사람은 똑같이 의아함을 느꼈지만 일단은 가만히 있었다. 어차피 모든 의문은 율을 만나야 해결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10분을 넘게 걸어가자 드디어 마지막으로 보이는 커다란 문이 등장했다.

지금까지 세 사람을 안내했던 엘프 NPC는 문 앞에서 멈춰선 후 세 사람에게 안으로 들어갈 것을 권했다.

“제 임무는 여기까지입니다. 들어가시면 율님이 기다리고 계실 겁니다.”

그의 말과 함께 그 커다란 문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드드드드드.

문이 열리자 그 안에는 세 사람이 보고 싶어 했던 그 사람이 서 있었다.

선율 아폴론.

그가 바로 이곳에 있었다.

“어서와.”

반갑게 웃으며 세 사람을 맞이하는 율.

그런 율을 보며 세 사람 역시 기분 좋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아우~ 뭐, 이리 얼굴 보기가 힘들어?”

“형, 어떻게 된 거예요? 쟤들은 다 뭐고… 여긴 또 어디…….”

“천천히, 천천히 얘기하자. 오랜만에 만나서 겨우 그런 얘기부터 하긴 좀 그렇잖아.”

율은 궁금해서 죽겠다는 팔콘을 달래며 그의 어깨를 살짝 두들겼다.

바로 그때, 율의 복부에 아주 강력한 라이트 훅이 꽂혔다.

퍼억!

“커헉!”

엘리스였다.

“…내가 바쁘더라도 오프라인으로 전화는 하라고 했지.”

율의 귓가에 조용히 속삭이는 엘리스.

그런 엘리스를 보며 율은 식은땀을 흘렸다.

“했잖아…….”

“삼 일 전에? 하루에 한 번씩은 해야지.”

“크윽… 미안해. 진짜 이 안에서 너무 바빴어.”

“뭐야~ 만나자마자 사랑싸움이야?”

율과 엘리스가 작게 속삭이자 강풍은 괜히 심술을 냈다.

강풍의 심술에 엘리스는 조용히 고개를 돌려 강풍을 바라보았다.

“응? 아냐, 아냐. 괜찮아. 마음껏 얘기해.”

바로 꼬리를 내리는 강풍.

그 역시 엘리스는 두려워했다.

“자자, 일단 앉아서 얘기하자. 다들 잘 지냈지?”

“저희야 뭐 똑같았죠. 다크문하고 골든 라인 애들이 어찌나 열심히 우리를 찾아다니던지… 그걸 피하기 위해 계속 인원 이동을 시키느냐고 바빴어요.”

“아, 네가 고생 많았다. 요즘 좀 괜찮아졌지?”

“네, 걔들도 인간인 이상 이 정도해서 못 찾았으면 슬슬 지칠 때도 됐죠. 그리고 결정적으로 요즘 검마노가 너무 많이 바뀌고 있잖아요. 그것 땜에 걔들도 정신없는 것 같아요.”

“다른 길드원들한테 대충 듣긴 했다.”

“근데 진짜 형, 어떻게 된 거예요? 여긴 또 어디고요?”

“아, 여긴 소울 시티의 가장 중심이 되는 곳이야. 소울 시티가 고대 마도 공학으로 지어진 첨단 도시거든. 소문을 들었다면 알겠지만 여긴 밤이 없어. 소울 에너지로 연결된 조명시설이 밤을 낮으로 만들어주지. 그뿐만 아니라 각 지역마다 이동용 마법 포탈이 존재해서 이동하는 것도 매우 간편해. 그밖에 여러 시설이 있는데… 뭐, 그건 차차 지내면서 알아가도 괜찮을 거야.”

“소울 시티의 중심이요? 근데 여기에 왜 형이 있는 거예요?”

“당연히… 내가 소울 시티의 주인이니까.”

율은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하지만 그 대답에 세 사람 모두 아까 엘프 NPC를 만났을 때 지었던 표정을 지으며 그때와 같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

“네!?”

“응!?”

“음!?”

“뭘 그렇게 다들 놀라? 간단해. 내가 그동안 계속 연락도 못하고 바쁘게 지냈던 건 이 도시와 관련된 연계 퀘스트에 집중해서야. 결국 난 그 연계 퀘스트를 클리어했고… 그 결과 이렇게 소울 시티를 다시 부활시켰지.”

“…허, 그럼 형이 ‘골든 패치’를 일으킨 장본인이었어요?”

“응.”

“아~ 진짜 대박이다. 천지개벽 패치도 사실상 형이 주도해서 일으킨 것이고… 이번엔 골든 패치까지… 진짜 할 말이 없네요.”

“그냥 운이 좋았을 뿐이다. 그리고 천지개벽은 내가 주도 한 게 아니라 우리가 주도한 거지.”

“어쨌든 대박인 건 확실해요.”

“원래 쟤가 좀 대박 스타일이야. 뭘 해도 평범하지가 않아.”

강풍은 별일 아니라는 표정으로 얘기하고 있었지만 이번엔 그 역시 어느 정도 놀랄 만한 일이었다.

“됐어. 진짜 운이 좋았던 거니까. 그 얘긴 그만하고. 일단 팔콘아.”

“네?”

“내가 이번에 아예 우리 길드 거점 도시를 이곳으로 옮길 생각인데 가능하겠지?”

“아, 네. 뭐 어렵지 않아요. 근데… 기존 도시에 투자한 게 좀 아깝네요.”

“그건 생각해봤는데… 크로우즈를 위해 양도하는 건 어때?”

“크로우즈요? 음 이번에 아예 합병하는 거 아니었어요?”

“합병도 좋지만 생각해보니 크로우즈도 크로우즈만의 역사가 있는 건데, 무작정 섀도우 로드로 합치는 건 아닌 것 같더라. 그러니까 예전과 마찬가지로 연합 형태로 가자.”

“흐음, 큰 문제가 될 건 없으니까 편하실 대로 해요.”

“응, 그 문제는 네가 좀 알아서 해결해줘.”

“네.”

“참, 그림자 상단은 어떻게 됐어? 아예 회생 불가능이야?”

“애매한데요. 일단 아예 회생이 불가능한 건 아닌데… 아직 다크문과 골든 라인의 감시가 완전히 사라진 게 아니라서 대놓고 활동 자체는 하기가 힘들 것 같아요.”

“아우~ 질긴 놈들이야. 이 정도 했으면 포기할 때도 됐는데 좀 느슨해지긴 해도 포기는 안 하더라.”

강풍이 질렸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럼 걔들이 없으면 살릴 수 있다는 거지?”

“당연히 살리죠. 제가 그림자 상단이 치명적인 타격을 입기 전에 전부 일단 자유 영업으로 돌려놨기 때문에 지금도 여전히 상단은 돌아가고 있어요. 다만 수입이 제로(0)라서 그렇지.”

“오케이~ 좋아. 그럼 그 문젠 또 나중에 얘기하자.”

율은 그 뒤로도 세 사람과 이런저런 얘기를 계속 나누었다.

엘리스와는 오프라인에서 종종 연락했었지만 강풍과 팔콘은 거의 연락을 하지 못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나눌 얘기가 아주 많았다.

* * *

섀도우 로드의 소울 시티 집결은 아주 순조롭게 끝났다.

개인적인 일이 있는 49명을 제외한 3,167명 모두가 소울 시티에 도착한 후 율의 안내를 받은 그들은 전부 소울 시티에 있는 라이프 스톤에 영혼을 등록시켰다.

그리고 그와 함께 각자 소울 시티 정착에 필요한 일들을 처리했다.

길드 하우스는 소울 시티 중앙에 위치한 거대한 성으로 결정되었다.

소울 시티 자체가 율의 것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그 거대한 성 역시 율의 것이었다.

성안은 또 하나의 도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다양한 것들이 존재했기 때문에 졸지에 섀도우 로드 길드원들은 엄청난 호사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이로써 소울 시티는 섀도우 로드가 완전히 장악했다.

애초에 율이 존재하는 이상, 그 어떤 다른 길드도 소울 시티를 장악할 순 없었다.

섀도우 로드의 길드원들을 모두 불러들여 소울 시티를 장악한 율은 이제 진짜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동안 미뤄두었던 여러 가지 개인적인 일을 해결하느라고 본의 아니게 섀도우 로드의 성향과 맞지 않게 행동했었지만, 이제는 정말 달라질 예정이었다.

율은 그림자의 주인들이 얼마나 무서운지 세상에 확실히 보여줄 생각이었다.

당연한 것이지만 그 첫 번째 타깃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다크문과 골드 라인.

그들이야말로 섀도우 로드의 화려한 복귀를 더욱 돋보이게 만들어줄 아주 훌륭한 제물이었다.

물론 당장 성급하게 제물을 잡아먹을 생각은 없었다. 모든 건 순리대로…….

율은 차근차근 섀도우 로드의 복귀를 준비했다.

“연락 왔어?”

엘리스가 율을 쳐다보며 물었다.

밤하늘의 별이 너무나 아름다운 장소.

이곳은 소울 시티에서 가장 높은 곳이었다.

바로 중앙성에 있는 첨탑들 중 가장 높은 첨탑의 꼭대기였다.

율은 이곳에서 엘리스와 단둘이 도저히 가상현실이라곤 믿겨지지 않는 밤하늘을 감상하고 있었다.

“응, 왔어.”

“어떻게 찾은 거래?”

“모르겠어. 정확히는 얘기하지 않았는데… 아마도 내가 다크문, 골든 라인 애들하고 싸울 때 살짝 노출됐었나봐.”

“그렇구나. 근데 별로 좋지 않은 얘기라도 들었어? 표정이 안 좋네?”

“아니, 그쪽 얘긴 상당히 좋았어. 여러 가지 조건들도 참 좋았고… 아무리 봐도 도저히 생짜 신인과 계약하는 태도가 아닌 것 같았어.”

“그래? 근데 왜 별로 반갑지 않은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어?”

“당연하지. 반갑지 않으니까.”

“TOP이라면 요즘 노래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장 가고 싶은 연애 기획사잖아.”

“그래? 난 잘 몰라. 애초에 관심이 별로 없어서…….”

“거기 괜찮아. 싸구려 음악을 만드는 곳도 아니고… 거기 오너 마인드도 상당히 괜찮다고 하더라.”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

“아니, 뭐… 하이퍼넷에 찾아보면 다 나오잖아.”

“오~ 날 위해 검색도 해준 거야?”

“그, 그냥 궁금해서 찾아본 거야.”

엘리스는 갑자기 말까지 더듬으며 당황했다.

“아씨, 자꾸 말 돌릴래?”

엘리스는 골이 난 표정으로 율을 째려보았다.

“미안, 미안. 알았어. 대답해 줄게.”

율은 그런 엘리스의 모습을 보며 무척 즐거운 표정을 지었다.

“…그냥 가고 싶지가 않았어. 거기엔 모든 게 다 준비되어 있었지만 나에게 가장 중요한 한 가지가 빠져 있더라고.”

“응? 가장 중요한 게 뭔데? 준비해 달라고 하면 되잖아.”

“그게… 그쪽에선 준비해줄 수 없는 거야.”

“그런 게 어디 있어. TOP 정도면 어지간한 건 전부 다 준비해줄 수 있어. 일단 말이라도 해봐.”

“말할 필요도 없어. 진짜 그쪽에선 준비하지 못하는 거야.”

“도대체 그 중요한 게 뭔데?”

“알고 싶어?”

“응.”

“…난 어릴 땐 혼자 노래를 했어. 아무도 그 노래를 들어주지 않았지.”

대답은 하지 않고 갑자기 옛날 얘기부터 하는 율.

일단 엘리스는 그런 율의 얘기를 조용히 경청했다.

“그러다가 이 게임을 하게 되고… 이 안에서 내 노래를 누군가 들어준다는 게 얼마나 행복한 건지 알게 되었어.”

율은 예전 쥬신 시의 길거리에서 노래를 부르던 자신을 떠올리며 계속 얘기를 이어갔다.

“근데 언제부터인가 꼭 내 노래를 들어줬으면 하는 사람이 생겼어. 그뿐만 아니라… 나아가 난 꼭 그 사람의 노래를 부르고 싶어졌어.”

“…….”

율은 따뜻하고 행복한 눈빛으로 엘리스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엘리스, 아니… Nothing이라고 얘기해야 하나? 어쨌든 난 네가 좋아. 네 노래가 좋아. TOP에 없다는 그 중요한 건 바로 너야.”

“…언제부터… 알았던 거야?”

“꽤 됐어. 하지만 네가 원하지 않는 것 같아서 모른 척했지.”

“그랬구나…….”

“네가 무슨 사연을 가지고 있는 건지 알 수는 없지만 난 이제 네가 원하지 않는 노래를 부르고 싶지는 않아.”

“…나도 늘 너의 노래를 듣고 싶어.”

“그럼 됐잖아. 난 지금도 충분히 행복해. 너도 있고… 친구들도 있고… 소중한 동료들도 있고. 난 이걸로 만족해.”

“하지만…….”

“엘리스, 진짜 괜찮아. 노래를 잘 부른다고 꼭 가수가 되는 건 아니잖아? 특히 요즘 같은 시대엔…….”

“네 노랜 특별해.”

“어이쿠~ 감사합니다.”

“아니, 농담이 아니라 진짜 특별해. 어쩌면 요즘 같은 시대이기 때문에 더욱 네 노래가 특별한 것일지 모르겠어. 어쨌든 그런 특별한 노래를 다른 사람도 들을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어.”

“…그럼 네가 그렇게 해줘.”

“응?”

“네가 해달라고. 예전 그 하이퍼넷의 전설과 같은 가수 Nothing이라면 충분히 내 노래를 다른 사람들에게 들려줄 방법을 알고 있지 않겠어?”

“진심이야?”

“응, TOP에는 네가 없지만 여기엔 네가 있잖아. 그래서 난 여기가 좋아.”

엘리스를 향해 너무나 밝게 웃으며 대답하는 율.

엘리스는 그런 율을 보며 그저 같이 웃어줄 수밖에 없었다.

알면 알수록 더 좋아지는 율.

엘리스의 마음은 이미 율로 가득 차 있었다.

“나중에 후회하면 가만히 안 둔다.”

“예~ 예~ 그런 걱정은 붙들어 매세요.”

“그리고 다른 애들한텐 절대 내가 Nothing이란 거 얘기하지 마. 알았지?”

“당연하지. 내가 그걸 왜 얘기하겠어? 나만의 보물로 고이고이 간직중인데.”

율의 노골적인 표현에 엘리스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아~ 진짜 달빛 좋다!”

갑자기 기분이 급 좋아진 율이 큰소리로 외치며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한밤중 높은 첨탑 위에서 이루어진 두 남녀의 대화.

그 대화의 끝은 늘 그렇듯… 달빛에 생긴 두 개의 그림자가 하나로 합쳐지는 걸로 끝났다.

너무나 달콤하고, 짜릿한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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