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검은달
돌주먹이 처참하게 망가지기까지 걸린 시간은 단 5분이었다.
강풍은 5분 만에 돌주먹을 만신창이로 만들어놓았다.
이미 관중들은 투신을 연신 외치고 있었다.
끓어오르는 분위기… 확실히 강풍은 율의 주문대로 압도적인 힘의 차이를 보여주었다.
“투신이라… 회색늑대가 숨겨두었던 한 수가 있었군.”
검은달이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래봤자 이변은 이 경기 하나일 뿐이야. 당장 4 : 0 패배를 막기 위해서 투신이 나왔지만 결국 그뿐인 거야. 내가 경기를 마무리할게.”
아라는 크로우즈가 투신까지 끌어들인 건 대단하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봤자 패배를 한 경기만 미뤘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결국은 4 : 1 로 자신이 승부를 결정지을 생각이었다.
붉은 구미호 아라의 출전.
당연히 율 쪽에선 엘리스가 결투장에 올라갔다.
자신만만한 아라와 반면에 여전히 포커페이스를 유지하고 있는 엘리스.
아라는 경기를 빨리 끝내고 쉬러가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걸 알까?
돌주먹이 본 악마보다 더 악마 같은 존재가 엘리스란 걸… 차라리 돌주먹이 더 편히 쓰러진 것일지 모른다는 걸…….
그녀는 절대 그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 * *
“그, 그만…….”
아라는 공포에 잔뜩 질린 표정으로 간신히 쥐어짜듯 얘기했다.
하지만 엘리스의 주먹에 자비란 존재하지 않았다.
퍼퍼퍽!
아라의 복부를 파고드는 엘리스의 철권.
엘리스는 특별한 기술도 사용하지 않고 진짜 말 그대로 아라를 그냥 때려잡았다.
묵사발이란 표현이 딱 어울릴 정도로 아라는 박살이 났다.
차라리 강풍의 강력한 스킬에 연속해서 두들겨 맞고 빠르게 쓰러진 돌주먹이 너무 부럽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당연히 스킬을 사용하지 않은 주먹으로 때리는 것이니 아라는 곧장 쓰러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대신 온몸이 부서질 것 같은 통증을 느끼고 있었다.
시스템 상에서 통증의 80%를 차단한다고 해도 이렇게 누적된 통증은 상당한 고통을 줄 수 있었다.
아라는 항복이라도 하고 기권하고 싶었지만 길드 전쟁의 대표전에선 기권이란 게 존재하지 않았다.
무조건 생사결(生死結).
누구 한 명이 게임 아웃될 때까지 승부는 결정 나지 않았다.
덕분에 아라는 벌써 15분째 엘리스에게 맞고 있는 중이었다.
처음엔 자신이 가진 여러 능력을 사용하며 발악이라도 했지만 이젠 그 발악조차 하지 않았다.
그저 빨리 경기가 끝났으면 좋겠다는 생각만 할 뿐이었다.
휘익!
빠각!!
그런 아라의 소원을 들어주려고 한 것일까?
엘리스가 강력한 무릎치기로 아라의 머리를 쳐올린 후 결투가 시작되고 처음으로 공격 스킬을 사용했다.
44연환 섬전권(閃電拳).
퍼퍼퍼퍼퍼퍼퍼퍼퍼퍼퍽!
섬전처럼 빠른 주먹질이 총 44번 아라의 몸에 적중되며 아라는 그대로 허공에서 게임 아웃되어 바닥에 떨어졌다.
쿠쿵!
충격적인 패배.
그나마 투신의 승리는 어느 정도 모두가 이해하는 분위기였지만 엘리스의 승리는 그렇지 않았다.
PvP랭킹 14위의 붉은 구미호 아라를 가지고 노는 것처럼 농락했다.
이건 마치 격투기를 배운 어른이 이제 중학생이 된 꼬마를 상대로 격투기 경기를 펼친 느낌이었다.
아라의 충격적인 패배에 가장 분노한 건 검은달이었다.
아라는 그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여자 친구였다.
그런 여자 친구가 자신의 눈앞에서 처참히 농락당해 쓰러지자 검은달의 몸에선 후끈 열이 달아오르고 있었다.
스코어는 이제 3 : 2.
벼랑 끝까지 몰렸던 크로우즈가 아주 놀라운 두 번의 경기를 보여주며 3 : 2까지 따라왔다.
하지만 제일 중요한 마지막 경기엔 다크문의 끝판 왕 검은달이 출전했다.
검은달의 명성은 투신과 비슷했다. 아니, 어떤 면에선 투신을 능가했다.
그에 반면, 크로우즈의 출전자는 이름도 공개하지 않은 복면을 쓴 정체를 알 수 없는 유저였다.
몇몇 관중들은 설마 이번에도 뭔가 깜짝 유명인이 등장하는 게 아니냐며 기대했지만… 그 기대는 딱 몇 초 만에 무너졌다.
율이 들고 나온 무기.
그게 문제였다.
율은 ‘섀도우 윙-묵현’을 들고 나왔다.
딱 봐도 기타처럼 생긴 무기… 그 말은 곧 이번 출전자가 음유시인이란 뜻이었다.
갑작스러운 음유시인의 등장에 관중석이 크게 요동쳤다.
“뭐야? 결투를 포기했어?”
“크으~ 역시 준비한 수는 딱 전판에 다 끝났나보네.”
“아쉽네. 어쩌면 오늘 골든 라인에 이어 다크문도 무너지는 걸 구경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캬, 여기서 이기기만 하면 3 : 3 동률이 되면서 대장전을 이긴 크로우즈가 이길 수 있었던 거 아냐? 아깝다~ 아까워. 투신이 딱 지금 결투에 올라왔어야 했거늘.”
여러 사람들이 실망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결투를 치르는 두 사람은 관중들의 말 따위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꼬마야, 난 설마 네가 대장전에 올라올 줄은 몰랐다. 근데… 이거 어쩌지. 내가 지금 기분 상태로는 아무래도 좀 심하게 다룰 거 같은데. 견딜 수 있겠어?”
검은달은 엘리스가 아라를 처참하게 망가트린 것 때문이라도 도저히 적당히 결투를 이기는 걸로 끝내 수가 없었다.
“어이, 수다쟁이. 그만 떠들고 시작하는 게 어때?”
“끝까지 건방을 떠는구나!”
스르릉!
검은달이 등 뒤에 메고 있던 커다란 도를 꺼내들었다.
암흑마도(暗黑魔刀)라 불리는 이 도는 바로 조각 아이템이었다.
그것도 그냥 조각 아이템이 아닌 영혼의 조각 하나와 정복의 조각 하나가 합쳐져 진화된 조각 아이템이었다.
우우우우웅!
암흑마도가 뽑히자 섀도우 윙이 공명하기 시작했다. 마찬가지로 암흑마도 공명하고 있었다.
“응!?”
검은달은 이런 암흑마도의 반응에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런 거였어? 크크, 어쩐지 당당하게 대장 자리에 나온 이유가 있었군. 허~ 이거 기대는 하고 있었지만 진짜 이렇게 만날 줄은 몰랐네.”
검은달은 이러한 공명 현상이 정확히 뭘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 역시 이미 한 번의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왜 신나?”
율은 검은달이 조각 아이템을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해 그리 크게 놀라지 않았다.
왠지 로열패밀리의 마스터라면 조각 아이템 하나 정도는 가지고 있는 게 기본인 것처럼 느껴졌다.
“당연히 신나지. 흐흐, 그건 내가 접수해서 잘 써주마.”
“알았어. 접수해가 봐.”
조각 아이템 소유자끼리의 격돌.
이건 이제 단순히 길드와 길드의 전쟁이 문제가 아니었다. 누구든 쓰러지는 자는 너무나 소중한 걸 빼앗기게 되었다.
물론 검은달은 자신이 쓰러진다는 생각 따윈 아예 하지 않고 있었다.
상대는 음유시인으로 보이는 유저였다.
아무리 조각 아이템을 들고 있다고 해도 자신이 질 가능성 따윈 보이지 않았다.
음유시인으로 PvP를?
검은달은 지나가던 개가 웃을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럼 사양하지 않고 접수해가마!”
츠츠츠츳!
검은달의 대도에 강력한 포스가 응집되었다.
검은달이 무슨 클래스를 지니고 있는지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대략 광전사 계열과 유사한 스페셜 직업일 가능성이 높다는 의견이 많았다.
그 얘긴 곧 공격력이 굉장히 강력하고 대신 방어력은 조금 낮을 것이란 얘기였다.
율은 이번 결투에서 평소엔 잘 보여주지 않던 음유시인의 모습으로 검은달과 싸웠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었지만 별로 뭔가를 숨기기 위해 노력할 생각은 하지 않고 있었기에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검은달과 싸우는 것이었다.
파파팟!
검은달이 상당히 멀리서 대도를 휘둘렀음에도 포스 블레이드가 만들어낸 무형의 기운은 허공을 가르고 율을 향해 쏟아졌다.
콰과과광!
율이 옆으로 가볍게 몸을 돌리며 그 기운들을 피해냈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그 무형의 기운이 보이지 않을지 몰라도 율의 눈에는 보였다.
이게 바로 상상력과 호접몽의 위대함이었다.
율이 상상하는 모든 것을 형상화시켜 주는 힘.
이것이 있기에 율은 말도 안 되는 움직임을 보여줄 수 있었다.
목표물을 잃은 기운들은 바닥과 충돌하며 폭발했지만 이건 검은달이 율에게 건넨 인사일 뿐이었다.
검은달은 기운을 날림과 동시에 그 기운을 바로 뒤쫓아 율과의 거리를 좁혔다.
그리고 곧장 커다란 도의 면(面) 부분으로 율을 후려쳤다.
도면강타라 불리는 이 기술은 제대로 적중되면 최대 7초까지도 기절 상태에 빠질 수 있는 무시무시한 기술이었다.
하지만 율이 쉽게 이 공격을 맞아줄 리 없었다.
쩌저정!
암흑마도를 막아낸 섀도우 윙.
율은 ‘악기 막기’ 스킬을 이용해 도면강타 기술을 막아냈다.
데미지 자체는 그리 큰 기술이 아니었기 때문에 악기 막기로 스킬을 막은 율이 입은 피해는 거의 없었다.
검은달은 도면강타가 막히자 곧장 다시 몸을 빙글 돌리며 대도를 눕힌 상태로 회전시켰다.
도면강타에 이은 회전 베기 공격!
두 기술이 연계기 판정을 받는 기술들은 아니었지만 나름 검은달이 개발한 훌륭한 연속 기술이었다.
촤아아악!
한 방 맞으면 허리가 두 동강날 것 같은 강력한 회전 베기가 율을 휩쓸었다.
아니, 율이 서 있던 자리를 휩쓸었다.
율은 본능적으로 위험을 느끼며 어느새 ‘바람을 따라 걷기’ 스킬을 이용해 뒤로 빠져나왔다.
현재 율은 검은달에 비해 월등히 높은 이동속도를 지니고 있었다.
음유시인 자체의 이속 증가 효과에 섀도우 윙에 달려 있는 이속 증가 옵션, 거기에 바람을 따라 걷기 스킬은 율을 정말 날아다니게 해주었다.
위험지대에서 빠져나온 율은 곧장 노래를 불렀다.
그가 부르는 노래는 불타는 대지였다.
율은 일단 불타는 대지를 통해 검은달을 귀찮게 할 생각이었다.
화르르륵!
여기저기에서 피어오르는 불꽃.
하지만 검은달은 예상보다 더 침착하게 반응했다.
그는 자체적으로 모든 속성의 저항력을 올려주는 버프를 사용한 후 불길이 약한 불타는 대지는 그냥 무시한 채 뚫고 지나가는 방법을 사용했다.
그렇게 되고 나니 사실상 불타는 대지가 거의 효과가 없게 되었다.
율은 첫 번째 흔들기가 실패하자 곧장 빠르게 두 번째 흔들기를 시도했다.
이번엔 여러 가지 이속 저하 효과를 지닌 노래들을 다양하게 부르며 검은달의 움직임을 최대한 봉쇄하는 방향으로 전투를 이끌었다.
그와 함께 중간 중간 ‘불타는 대지-겁화’로 검은달의 생명력을 소모시켰다.
하지만 이번에도 역시 검은달은 매우 침착하게 반응했다.
그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몇 가지 탈출 기술을 이용해 이속 저하 효과를 제거하고 ‘불타는 대지-겁화’는 바로바로 그 범위에서 빠져나왔다.
그러면서 오히려 반격을 시작했다.
검은달은 율에게 붙는 게 생각보다 쉽지 않다는 걸 깨닫고, 아예 자신 역시 원거리 공격을 위주로 플레이하기 시작했다.
그의 원거리 공격은 생각보다 강력했다.
포스 블레이드를 허공에 휘둘러 만들어내는 진공참(眞空斬)이라든지, 대도로 땅을 찍어 충격파를 만들어내는 충격파 공격… 그중에서도 율을 가장 위협하는 공격은 그 커다란 대도를 던져서 공격하는 기술이었다.
그것을 비도술(飛刀術)이라고 할 수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반원을 그리며 무시무시한 기세로 전방을 휩쓰는 대도의 비행은 맞으면 무조건 위험할 것 같은 공격이었다.
결국 두 번째 흔들기도 실패로 끝났다.
율은 자신이 검은달의 실력을 너무 무시했다고 판단했다. 다시 검은달의 실력을 상향 조종한 율.
결투에서 상대방의 실력을 인정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요소였다.
마찬가지로 검은달도 율을 너무 깔봤다는 걸 깨달았다.
확실히 상대는 조각 아이템을 소유할 만큼의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거기까지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전력을 다하는 순간 율은 말 그대로 순식간에 삭제될 것이라 믿었다.
“좋아, 이 정도 놀아줬으면 되겠지?”
검은달은 대도를 다시 고쳐 잡았다.
“이제부턴 좀 어지러울 거다!”
츠츠츠츠츳!
갑자기 검은달의 몸 전체에서 강력한 포스 에너지가 증폭되었다.
검은달은 좀처럼 사용하지 않는 월식(月蝕)의 인(印)을 깨웠다.
검은달이 가지고 있는 클래스는 스페셜 클래스가 맞았다.
그리고 그 스페셜 클래스가 광전사 계열인 것도 맞았다.
하지만 보통의 광전사들과는 달랐다.
그는 평소엔 평범한 일식(日蝕)의 인(印)이란 것을 깨운 상태로 활동했다.
일식의 인이 깨어 있는 상태에선 광전사라고 말하기도 힘들 정도로 상당히 좋은 밸런싱을 지니고 있었다.
다른 광전사들처럼 방어력이 극단적으로 좋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공격력도 상당히 괜찮은 편이었다.
간단히 말해 일식의 인은 밸런싱이 맞춰진 파워 있는 전사 정도라고 보면 옳았다.
하지만 월식의 인이 깨어나면 상황은 완전히 바뀌었다.
월식의 인은 극단적인 힘을 검은달에게 선사했다.
일식의 인이 깨어 있을 때 사용할 수 있었던 모든 방어 계열 스킬은 전부 사라지고, 대신 그 자리에 강력한 공격 스킬들이 생성되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방어력도 일식의 인 때와 비교해 거의 20% 수준까지 떨어졌다.
대신 공격력이 두 배 가까이 증가하고 이동속도도 빨라졌다.
한마디로 공격에 모든 힘이 쏠려버린다는 뜻이었다.
쾅!
월식의 인이 개방되자 검은달은 곧장 율을 향해 달려 나갔다.
그리고 정말 엄청난 스피드로 대검을 가로로 내리찍었다.
휘잉!
이 모든 게 거의 3초 정도에 일어난 일이었다.
반응이 조금이라도 늦으면 이 대도에 큰 타격을 입을 수도 있는 상황!
하지만 율은 아슬아슬한 타이밍으로 이 대도를 간신히 피해낼 수 있었다.
콰과광!
갑작스러운 검은달의 변화에 율은 살짝 당황했다.
뭔가 변화가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있기는 했지만 이런 극단적인 변화가 있을 것이라고는 예상치 못한 율이었다.
검은달은 너무 황급히 공격을 피하느라고 살짝 율의 중심이 무너진 걸 놓치지 않았다.
곧바로 이어져 들어오는 검은달의 사선으로 올려 베기!
율은 이번 공격도 바닥을 구르며 간신히 피해냈다.
하지만 산 넘어 산이라고 검은달의 공격은 끝나지 않았다. 이번엔 올려 베기에 이은 3단 진공참이었다.
각각 머리와 허리, 그리고 다리를 노리고 들어오는 이 진공참은 도저히 피할 수가 없었다.
율은 어쩔 수 없이 최대한 몸을 숙이며 ‘악기 막기’로 다시 한 번 공격을 막아냈다.
쩌저정!
주르르륵!
악기 막기는 데미지를 완벽하게 전부 방어하는 기술이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당연히 율의 생명력이 어느 정도 깎여 나갈 수밖에 없었다.
“큭!”
율에게 더 좋지 않은 건 검은달의 공격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3단 진공참에 이은 대검 날리기!
이 공격을 피하기엔 너무 늦었고 그렇다고 재사용 대기 시간에 걸려버린 악기 막기를 다시 사용할 수 있지도 않았다.
율은 어쩔 수 없이 숨겨두었던 한 수를 사용했다.
아이템 스킬 블링크!
원래 이럴 때 사용하는 기술이 아닌 결정타를 먹일 때 사용해야 하는 기술이었는데 어쩔 수가 없었다.
검은달은 자신의 몰아치기를 너무 간단하게 빠져나간 율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블링크? 아이템 스킬인가?”
그는 율이 사용한 기술이 어떤 종류의 것이고, 어떤 식으로 발동된 건지 정확하게 예측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다시 사용하는 건 불가능하겠군.”
기분 나쁘게 웃는 검은달.
그는 마치 이제 승부는 끝났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모르는 게 하나 있었다.
바로 율 역시 아직 모든 걸 다 보여준 게 아니라는 점이었다.
‘이건 어지간하면 사용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율은 분위기를 전환하기 위해 아껴두었던 한 수를 꺼내들었다.
뮤직 박스(Music Box)-영웅들의 서사시(의적 로냘드)
파파팟!
뮤직 박스가 사용되며 순간적으로 영웅들의 서사시가 적용되었다.
물론 뮤직 박스로는 절대 영웅들의 서사시를 완벽하게 연주할 수 없었다. 즉, 영웅들의 영혼을 소환할 수 없다는 얘기였다.
하지만 대신 1회성으로 단 한 번 저장되어 있던 그 영웅이 사용하는 스킬을 사용할 수 있는 효과가 적용되었다.
이 효과는 10초간 유지되기 때문에 10초 이전에 스킬을 하나 빠르게 사용해야 했다.
즉, 지금과 같은 경우 의적 로냘드의 서사시가 적용되기 때문에 앞으로 10초간 의적 로냘드의 스킬 중 하나를 사용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로냘드의 비기 ‘바람의 가호’
바람의 가호는 순간적으로 10초간 이동속도를 100% 상승시키는 스킬이었다.
가뜩이나 빠른 율.
그의 이동속도가 100% 상승되자 그는 정말 엄청난 속도로 움직였다.
검은달이 월식의 인을 개방하며 얻은 빠른 움직임조차 율에게 비교하면 느려 보일 정도였다.
순식간에 검은달의 뒤를 잡은 율.
율은 곧장 또 하나의 뮤직 박스를 사용했다.
뮤직 박스(Music Box)-영웅들의 서사시(바바리안의 전설 타이온)
츠츠츳!
이번엔 타이온이었다.
뮤직 박스가 사용되자마자 곧장 율의 주먹에 포스가 응집되었다.
그리고 그 응집된 포스가 맺혀 있던 오른 주먹을 검은달의 옆구리에 꽂아 넣었다.
퍼퍽!
“컥!”
전광석화와도 같은 이동과 공격에 검은달은 순간적으로 한 방을 허용했다.
하지만 그는 그 와중에도 대도를 옆으로 휘두르며 반격을 가했다.
분명 그의 반격은 훌륭했다.
그러나 율은 이미 그의 반격을 예상하고 또 하나의 뮤직 박스를 사용한 후였다.
뮤직 박스(Music Box)-영웅들의 서사시(강철의 영웅 칼튼)
쩌저저정!
방패를 대신해 섀도우 윙(묵현)을 이용하여 칼튼의 포스 쉴드를 시전했지만 그럼에도 검은달의 반격은 완벽하게 막혔다.
대검을 방어해 낸 율은 곧장 들고 있던 섀도우 윙을 검은달의 뒤통수를 향해 휘둘렀다.
빠각!
정확하게 명중하는 악기 강타.
순간 검은달은 기절 상태에 빠졌다.
뮤직 박스(Music Box)-영웅들의 서사시(건 마스터 바우어.)
스스슷!
건 마스터 바우어의 서사시가 적용되는 그 순간, 섀도우 윙의 모습도 쌍권총 모습으로 변했다.
타타타타타탕!
검은달의 몸에 마구 꽂히는 염화탄들!
기절 상태였던 검은달은 고스란히 그 공격을 모두 몸으로 받을 수밖에 없었다.
퍼퍼퍼퍼퍼펑!
율과 검은달이 워낙 근거리에서 싸웠기 때문에 관객들은 율이 쌍권총을 사용해 검은달의 몸에 염화탄을 꽂아 넣은 걸 제대로 보지 못했다.
단지 검은달이 기절한 순간 율이 뭔가 스킬을 사용해 검은달의 목에 폭발을 만들어냈다는 것만 이해했을 뿐이다.
쿠쿠쿵!
폭발과 함께 날아간 검은달이 땅바닥에 처박혔다.
율은 어느새 쌍권총을 다시 묵현 형태로 바꾼 뒤 또 하나의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실전에서 이 노래를 사용하는 건 율도 처음이었다.
하지만 분명 이 노래라면 상황이 종료될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천지조화의 곡-지옥염화(地獄炎火)
화르르륵!
율을 중심으로 생겨난 거대한 화염의 벽!
그 벽은 노래와 함께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으으으.”
검은달은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일어났다.
하지만 그가 일어났을 땐 이미 그 화염의 벽이 그를 덮치고 있었다.
화륵!
검은달을 집어삼킨 화염의 벽.
순간적으로 화염의 벽 때문에 결투를 지켜보던 모든 사람들이 율과 검은달의 모습을 놓칠 수밖에 없었다.
“뭐, 뭐야? 어떻게 된 거야?”
“설마… 음유시인이 지금 그 학살자 검은달을 이긴 거야?”
“말도 안 돼.”
“저게 무슨 음유시인이야… 난 결단코 저런 음유시인은 본적이 없어.”
갑자기 소란스러워지는 관중석.
하지만 아직 전투가 완전히 끝났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관중들 중에서는 화염의 벽이 걷히면 다시 검은달의 반격이 시작될 것이라고 믿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모르고 있는 게 하나 있었다.
바로 화염의 벽 안에서 검은달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 지 그걸 모르고 있었다.
검은달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율을 바라보았다.
그의 몸을 꿰뚫고 지나간 두 자루의 대검과 대도.
연속 공격과 염화탄의 폭발, 그리고 화염의 벽까지 이어지는 율의 공격에 의해 큰 타격을 입은 검은달이었지만 아직 결투를 포기한 건 아니었다.
그는 이 화염의 벽을 재빨리 탈출해 다시 재정비하고 율을 한 번에 끝내 버릴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걸 단지 생각만 해야 했다.
그가 화염의 벽을 통과하자마자 곧장 양쪽 가슴을 꿰뚫은 대검과 대도가 있었다.
파멸의 빛.
율이 파멸왕의 이 비기로 마지막 결정타를 날렸다.
“이, 이게…….”
급속도로 0%를 향해 내려가는 생명력.
파팟!
율은 대검과 대도를 뽑았다.
율이 대검과 대도를 뽑는 그 순간 지옥염화가 만들어낸 화염의 벽도 사라졌다.
다시 나타난 검은달과 율.
바닥에 주저앉은 검은달과 조용히 그런 검은달을 내려다보고 있는 율의 모습에 관중들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누가 봐도 이건 검은달의 패배를 의미하는 장면이었다.
음유시인이… PvP의 최강자 중 한 명이었던 검은달을 꺾었다.
그것도 운이 아닌 실력으로!
“와아아아아아!”
“죽인다~!”
“대박이네!!”
“이게 말이 돼?”
“음유시인이 사실 사기 클래스였던 거야?”
미친 듯이 터져 나오는 함성.
율은 그 함성과 함께 들려오는 시스템 메시지를 들으며 조용히 결투장에서 내려갔다.
띠링, 숨겨져 있던 신의 파편 ‘영혼의 조각[암흑마도]’, ‘정복의 조각[달의 지팡이]’을 손에 넣었습니다. 이미 가지고 있던 혼돈의 조각[섀도우 윙]과 서로 공명하며 하나로 합쳐집니다. 혼돈의 조각의 3차 봉인이 풀립니다.
띠링, 두 개의 조각이 합쳐지며 혼돈의 열쇠[섀도우 (Shadow)]가 만들어졌습니다.
띠링, 특수 메인 퀘스트 ‘혼돈의 열쇠’가 갱신되어 ‘혼돈의 열쇠(2)가 되었습니다.
이로써 3번째 봉인마저 풀었다.
율은 특별히 조각을 빼앗을 마음이 없었건만 운명은 그로 하여금 조각을 모으게 만들었다.
물론 아직 대표전이 끝난 건 아니었다.
아직까지 스코어는 3 : 3으로, 이제 대표들이 나와 한 경기를 다 치러야 했다.
하지만 이미 분위기는 사실상 끝이 나 있었다.
크로우즈 측에 남은 세 사람 중 누가 나가더라도 현재 다크문에 남은 이들이 견뎌낼 수가 없었다.
결국 승리는 크로우즈의 것이 될 수밖에 없었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결과.
사람들은 이런 예상치 못한 결과에 열광할 수밖에 없었다.
그게 사람들의 심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