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섀도우 로드 vs 크로우즈
갑자기 성사된 섀도우 로드와 크로우즈의 대결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율은 이미 회색늑대에게 말을 꺼낼 때부터 그들과 대결할 멤버들 중 셋을 결정해 놓았다.
강풍과 엘리스, 팔콘.
자신까지 합쳐서 넷.
남은 한 명은 길드 사정을 가장 잘 아는 팔콘에게 추천하게 했다.
팔콘은 신중한 고민 끝에 돌격전차라 불리는 고뿔을 추천했다.
성격이 워낙 불같은 걸 빼면 PvP 유저들 사이에서도 상당한 실력자로 불리는 그였기 때문에 대표가 되기엔 전혀 문제가 없었다.
율, 강풍, 엘리스, 팔콘. 그리고 마지막으로 고뿔.
이렇게 다섯 명이 이번 대결의 대표로 선발되었다.
크로우즈의 대표가 누구인지는 몰라도 율은 이길 자신이 있었다.
자신이 꿈꾸는 건 결국 크로우즈의 회색늑대가 꿈꾸는 것의 연장선이라 할 수 있었다.
회색늑대가 소수를 단단하게 결집시켜 강한 힘을 원하는 것처럼, 율 역시 자신이 모은 이들을 하나로 결집시켜 최대한의 힘을 끌어내려는 중이었다.
물론 아직은 미약한 게 더 많았지만 결국 율은 모두를 하나로 묶을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그만한 준비도, 능력도 모두 되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대표가 모두 결정되자 대결 날짜와 장소는 금방 나올 수밖에 없었다.
검은 대륙의 한적한 곳을 대결 장소로 결정하고, 이틀(게임시간) 후 정오에 만나기로 한 두 길드.
드디어 같은 꿈을 꾸는 서로 다른 두 길드의 대결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 * *
“이렇게 조용한 장소가 여기에 있을 줄은 몰랐네요.”
회색늑대가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몬스터도 거의 없는 곳이고 퀘스트 동선에도 속하지 않으며, 또한 채취할 자원도 없는 곳이라 아마 지나가는 유저도 없을 겁니다.”
“휴우~ 생각보다 섀도우 로드의 정보력은 정말 대단한 것 같군요.”
“어찌 대단한 게 정보력뿐이겠습니까.”
율이 계속 웃으며 대답을 받아주었다.
“하하, 진짜 율님은 못 말리겠군요. 뭐, 길게 얘기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바로 시작하죠.”
“그럴까요?”
서로 웃으며 얘기하지만 실상은 길드의 존폐를 결정지을 매우 중요한 일전이었다.
모든 걸 따져볼 때 율은 원래 이 대결을 성사시키면 안 되는 입장이었다.
회색늑대보다 잃을 게 더 많은 율이었기에 당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율은 오히려 자신이 이 대결을 제안했다.
그가 그렇게 하지 말아야 할 짓까지 하며 대결을 성사시킨 이유는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에 대한 믿음.
그리고 동료에 대한 믿음.
율은 절대 패배를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 여기서 패배할 것이라면 애초에 일찌감치 모든 걸 포기하는 게 옳다고 생각했다.
“저희 쪽 첫 번째 출전자는… 바로… 접니다.”
“……!”
“……!!”
회색늑대가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적어도 네 번째 이후에나 나올 것이라 예상했던 회색늑대다.
그런데 그는 놀랍게도 선봉에 나서며 기선을 제압했다.
그만큼 자신이 있어서인지는 몰라도 어쨌든 모든 사람의 예상을 빗겨간 멋진 출전이었다.
하지만 모두가 당황해도 율은 당황하지 않았다.
“그렇군요. 그런데 이거 참 재미있군요. 저희 쪽 첫 번째 출전자 역시 바로 접니다.”
웃으며 대답하는 율.
율은 첫 경기부터 기세로 밀릴 생각이 전혀 없었다.
원래 첫 경기 출전자로 예상되었던 이는 고뿔이었다.
고뿔을 출전시켜 상대방의 전력을 어느 정도 예측해보자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상대방이 이렇게 세게 나온 상태에서 원래의 계획대로 고뿔을 출전시킬 수는 없었다.
상대방이 강하게 나오면 자신 역시 강하게 나간다.
이게 율의 선택이었다.
“하하하, 재미있군요. 그럼 어디… 2대 섀도우 로드의 마스터인 율님의 실력을 보도록 할까요?”
회색늑대가 품안에서 단검 두 자루를 꺼내며 웃었다.
회색늑대는 소문대로 PvP에 아주 강력한 직업군 중 하나인 어쌔신 계열의 직업을 가지고 있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어쌔신 계열 직업 중에서도 상당히 전문적인 직업이라고 했다.
물론 스페셜 클래스 같은 직업은 아니었지만 사람들이 잘 하지 않는 그런 직업이라는 소문이었다.
“예의 같은 건 차리지 않겠습니다.”
회색늑대가 검을 바짝 들고 천천히 몸을 은신시켰다.
‘정보에 따르면 은신 특화 어쎄신인 고스트일 가능성이 크다고 했었지?’
율은 빠르게 몸을 숨기는 회색늑대를 바라보며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고스트라면 언제, 어디서 기습이 들어올지 모르기 때문에 최대한 주의해야 했다.
일단 율은 계속해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고스트에게 기습을 당하지 않는 가장 좋은 방법은 끊임없이 움직이는 것이었다.
움직임과 동시에 각종 버프를 자신에게 거는 율.
율은 자신이 음유시인이란 걸 숨기지 않고 보여주었다.
어차피 한식구가 될 이들한테 굳이 비밀을 남겨둘 생각이 없었다.
율이 노래를 부르며 움직이는 모습을 본 크로우즈 측은 무척이나 놀란 표정이었다.
설마 섀도우 로드의 마스터가 음유시인 계열의 직업을 지녔을 것이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분위기였다.
율은 모든 버프를 다 걸지 않았다.
그는 최대한 빠르게 적용시킬 수 있는 몇몇 버프만 걸고 곧장 회색늑대의 공격에 대비했다.
제일 먼저 그는 불타는 대지를 짧게 나누어 부르며 사방에 불을 질렀다.
아무리 회색늑대가 은신의 달인이라고 해도 불이 몸에 옮겨 붙으면 은신은 자동적으로 풀릴 수밖에 없다.
이것은 공격인 동시에 방어이기도 했다.
상당히 넓은 지역에 불타는 대지를 활성화시켰지만 회색늑대는 걸리지 않았다.
확실히 쉬운 상대는 아니란 뜻이었다.
‘분명 근처에 있다.’
율은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어쌔신 계열 직업을 가진 유저에게 잘못 당하면 정말 손가락 하나 꼼짝 못하고 끝이 날 수도 있었다.
특히 상대가 PvP의 전설과도 같은 유저인 회색늑대였기 때문에 더욱 조심해야 했다.
바로 그때 아주 묘한 감각이 율의 몸을 스치고 지나갔다.
‘온다!’
이것은 말로 설명하기 힘든 감각이었다.
게임 속에 어떤 식으로 구연이 된 것인지는 몰라도… 확실히 특별한 재능을 지닌 몇몇 이들은 이러한 묘한 감각을 지니고 있었다.
“우어어!”
율은 묘한 감각이 느껴지자마자 곧장 ‘괴성 지르기’를 사용했다.
10m 반경 내의 모든 적을 최대 5초간 멍하게 만드는 괴성 지르기.
회색늑대 정도의 유저라면 겨우 2초 정도만 멍하게 되겠지만 적어도 은신은 풀리게 되어 있었다.
“큭!”
율의 감각은 정확했다.
율의 등 뒤에서 갑자기 나타난 회색늑대.
그가 뻗은 칼날은 율의 등 뒤에서 멈춰 있었다.
아슬아슬한 방어 성공.
하지만 이걸로 완전히 공격을 저지했다고 할 수는 없었다. 2초라는 시간은 정말 짧은 시간이었기에 율은 망설임 없이 다음 행동을 연결시켰다.
휘이잉!
괴성을 지르며 곧장 들고 있던 섀도우 문을 휘둘렀다.
꽝!
이번 공격은 악기 강타였다.
이 공격 역시 최대 5초간 기절을 시키는 공격이었지만 마찬가지로 회색늑대에겐 약 2초 정도밖에 기절시키지 못했다.
하지만 이어진 콤보 공격에 회색늑대는 정말 꼼짝도 못하고 그 자리에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악기 강타를 꽂아 넣은 율이 곧장 뒤로 몸을 날리며 저장된 7개의 노래 중 하나를 사용했다.
그가 사용한 노래는 ‘도리안의 그림자’였다.
원래는 30초 동안 연주해야 효과가 발동되지만 기억된 노래였기 때문에 그 즉시 효과가 발동되었다.
사실 율은 영웅들의 서사시를 통해 더 쉽게 승부를 결정지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율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이번 대결에서 영웅들의 서사시를 사용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오로지 음유시인의 능력만 사용하기로 결정한 율.
영웅들의 서사시가 없다고 율이 약한 건 절대 아니었다.
율은 그걸 명확하게 확인하기 위해 스스로 자기 자신을 시험하고 있었다.
스르륵!
회색늑대는 오히려 자신의 눈앞에서 율이 사라지자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상대는 음유시인이었다.
PvP 유저들 사이에서 필드를 돌아다니는 허수아비라고 불리는 그 음유시인.
그런 음유시인이 자신의 공격을 막고 유유히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러니 회색늑대 입장에선 어처구니가 없을 수밖에 없었다.
악기 강타의 기절 시간이 끝나자 회색늑대 역시 빠르게 은신을 다시 시도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회색늑대는 재 은신을 할 수가 없었다.
곧장 이어진 율의 기습.
‘도리안의 습격’ 스킬을 사용해 생각지도 못한 타이밍에 율이 먼저 공격을 성공시켰다.
“크악!”
율이 은신하는 걸 보고 뭐가 됐건 일단 숨는 것이라 생각 했던 회색늑대는 정말 생각지도 못한 일격을 당했다.
하지만 더 괴로운 건 이게 끝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스슥!
율은 특별한 스킬을 사용한 것도 아니었는데 너무나도 완벽하게 회색늑대의 오른쪽으로 이동했다.
이게 바로 율이 지니고 있는 특수타이틀 호접몽과 특수능력 상상력의 위력이었다.
율은 이미 회색늑대가 기습을 당했을 때의 모든 경우의 수를 머릿속에 그리고, 그걸 호접몽을 통해 눈앞에 구현시켜 놓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제일 완벽한 하나의 선을 찾아 그 선을 따라 이동할 수 있었다.
이동과 함께 이어진 건 당연히 공격이었다.
휘잉!
꽈광!
다시 한 번 회색늑대의 뒤통수를 가격하는 악기 강타.
악기 강타가 단순히 기절만 시키는 공격이라고 생각하면 큰 착각이었다.
악기 강타는 분명 데미지를 동반한 공격 기술이었다.
아주 강력한 공격은 아니었지만 분명 어느 정도의 데미지를 주는 공격인 건 틀림없었다.
다시 한 번 아주 짧게 기절 상태에 빠진 회색늑대.
그나마 점감 효과가 적용되어 2초가 아닌 약 1초 정도의 기절이었지만 어쨌든 기절은 기절이었다.
율은 악기 강타에 이어 곧장 다시 몸을 돌리며 오른쪽 팔꿈치를 회색늑대의 허리 뒤에 찔러 넣었다.
아주 높은 자유도가 보장된 검마노에선 굳이 스킬을 사용하지 않아도 적을 공격할 수 있었다.
심지어 바닥에서 돌을 들어 상대에게 던져도 공격이 될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율의 이 간단해 보이는 팔꿈치 공격은 당연히 회색늑대에게 타격을 입혔다.
“커억!”
기절 상태에서, 그것도 정확하게 급소에 꽂힌 탓에 당연히 치명타 판정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음유시인이잖아?’
회색늑대가 의문 섞인 눈빛으로 율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율에게 자비란 없었다.
율은 곧장 오른쪽 다리로 회색늑대의 두 다리를 걷어 올리며 오른팔로 회색늑대의 목을 휘감았다.
이건 엘리스에게 배운 일종의 근접 유술(柔術)이었다.
우득!
허리가 꺾이며 뒤로 360도 돌아가는 회색늑대.
어어 하는 사이에 회색늑대는 속수무책으로 연속 공격을 허용하고 있었다.
꽈과광!
볼썽사납게 바닥에 처박힌 회색늑대는 멍한 정신에도 본능적으로 옆으로 구르며 자신의 비기 중 하나인 전투은신을 사용했다.
보통의 경우, 전투 중이라면 은신이 되지 않았지만 고스트의 전용스킬인 전투은신(1분 쿨)이라면 곧장 은신이 가능했다.
몇 번의 연속 공격으로 벌써 생명력의 30%가 날아가 버린 회색늑대.
고스트 직업 특성상 생명력이 그리 높지 않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피해였다.
상대가 음유시인인 것을 보고 살짝 방심했던 대가치고는 너무나 컸다.
율은 회색늑대가 전투은신을 사용하자 그의 직업이 고스트란 걸 확실할 수 있었다.
율은 고스트의 직업이 갖는 특징과 기술 패턴들을 잘 알고 있었다.
율이 레벨을 올리고 스킬을 수련하는 것만큼이나 가장 많이 신경 썼던 것 중 하나가 바로 다른 직업들에 대해 자세히 아는 것이었다.
이건 가츠가 술자리에서 율에게 말해준 강해지는 비결 중 하나였다.
적을 알고 나를 알아야 승리할 수 있다는 가츠의 말에 따라 검마노에 존재하는 수많은 직업들을 분석하고 연구했던 율.
확실히 그가 강해진 건 다 이유가 있었다.
‘전투은신 후 은신치료겠지?’
고스트는 미약하게나마 자기 스스로를 치료할 수 있는 스킬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고스트를 1 : 1 대결에서 잡기란 쉽지가 않았다.
‘하지만 은신치료를 위해선 안전한 장소가 필요하겠지? 내가 그 장소를 없애주마!’
은신치료는 고도의 정신 집중이 필요한 스킬이었기 때문에 한자리에서 가만히 있어야 했다.
율은 그러한 스킬 특징을 잘 알기에 곧장 불타는 대지를 사방에 난사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소울 에너지는 넘치도록 많은 율이었다.
이렇게 불타는 대지를 난사한다고 해서 그의 소울 에너지 관리에 타격이 있을 리는 없었다.
화르르륵!
사방이 불타올랐다.
덕분에 회색늑대는 율의 예상대로 은신치료를 하지 못했다.
아니, 시도를 했다가 불길이 번지는 걸 보고 곧장 취소했다.
은신치료는 쿨이 2분에 생명력의 20%를 회복시키는 기술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한번 취소된 이상 다시 회복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은신치료가 불가능하다면 아마도 다시 한 번 기습을 노리겠지… 처음에 당한 것도 있고 하니 안전하게 그림자조종하기로 공격하겠군.’
율은 회색늑대의 다음 패를 예상해보았다.
그림자조종하기.
멀리서 적의 그림자를 조종해 공격하는 고스트의 비기 중 하나.
공격과 동시에 은신은 풀렸지만 그림자를 이용해 하는 공격이라 상대방이 방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율의 예상은 정확하게 적중했다.
자신의 회복이 막히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림자조종하기를 통해 공격을 시도한 회색늑대.
그는 율의 등 뒤로 멀찍이 떨어진 지점에서 나타나 곧장 율의 그림자를 조종했다.
하지만 율은 이 공격의 맹점 역시 파악하고 있었다.
율은 망설임 없이 자신의 발밑에 불타는 대지를 시전했다.
화르륵!
타오르는 불길.
하지만 검마노 시스템의 특성상 특수공격이 아닌 이상 자신이 만들어낸 공격 기술에 자신이 피해를 입는 경우는 없었다.
오로지 공격을 받는 건 율을 공격한 그림자뿐이었다.
물론 그림자는 타깃팅이 되지 않는 존재였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당황해서 당연히 그림자가 공격이 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게 되었다.
이게 바로 사람들이 놓치는 부분이었다.
그림자는 공격이 가능하다.
물론 타깃팅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범위형 공격으로 공격이 가능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건, 그림자는 타격을 입으면 곧장 조종이 취소되고 그 타격의 50%를 고스란히 자신을 조종한 이에게 전해준다.
“크윽!”
회색늑대는 손바닥이 화끈해지는 걸 느끼며 재빨리 그림자의 조종을 취소했다.
그나마 최대한 빨리 취소해, 강제 소환 취소로 인한 타격은 입지 않았지만 어쨌든 공격은 실패했다.
간단하게 회색늑대의 공격을 저지시킨 율은 음유시인이 가진 고유 스킬 중 하나인 ‘바람을 따라 걷기’를 이용해 빠르게 회색늑대 앞까지 다가왔다.
순간 회색늑대는 자신이 너무 성급한 공격했다는 걸 깨달았다.
사실 그림자조종하기가 이렇게 쉽게 무산될 것이라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드러난 실수일 수도 있었다.
원래 고스트의 특성상 전투은신이 사용 불가능할 때는 은신을 계속 유지하는 게 옳았다.
하지만 회색늑대는 그림자조종하기가 성공할 것이라 생각하고, 대략 10초 정도 남았던 전투은신 재사용 대기시간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었다.
그게 큰 판단 착오였다.
5초.
전투은신을 사용하려면 5초가 더 필요했다.
하지만 율은 회색늑대에게 그 5초를 허락하지 않았다.
율은 다시 한 번 기억된 노래를 사용했다.
이번에 사용한 노래는 ‘악마의 유혹’이었다.
악마의 유혹이 울려 퍼지며 순간 회색늑대는 움직임을 멈췄다.
악마의 유혹은 기억된 노래로 저장될 경우, 모든 효과가 50% 감소하는 특징을 지녔다.
그렇지만 50% 감소한다고 해도 완벽하게 걸리면 10초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회색늑대는 전혀 저항하지 못했다.
그나마 유저 저항 효과 때문에 그는 7초간 현혹 판정을 받았다.
하지만 율에겐 그 정도의 시간이면 충분했다.
회색늑대의 움직임을 묶은 율은 곧장 불타는 대지를 연주했다.
이번 연주는 지금까지 했던 연주와는 달랐다.
지금까지는 단순히 은신을 찾아내기 위해 간결하게 연주를 끊어 불렀다면, 이번엔 제대로 된 겁화를 만드는 연주였다.
‘불타는 대지-겁화’
이것은 율이 가진 가장 강력한 대인 공격 스킬이었다.
화르르륵!
일순간에 회색늑대의 발밑에서 거대한 불길이 치솟았다.
“크아아악!”
불길이 치솟으며 데미지를 입은 회색늑대는 당연히 현혹 효과가 풀렸다.
하지만 그 대가는 아주 큰 타격이었다.
그래도 회색늑대는 확실히 평범한 유저가 아니었다.
그 상황에서도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했다.
스스슷!
회색늑대의 몸으로 모여드는 어둠.
그는 고스트가 가진 비기 중의 비기인 ‘어둠의 망토’를 사용했다.
비록 재사용 대기시간이 한 시간이었지만 순간적으로 어둠을 이용해 자신을 감싸 성(聖) 속성을 제외한 모든 종류의 공격을 2초 동안 완벽하게 차단하는 기술이었다.
어둠의 망토를 이용해 간신히 불길에서 빠져나온 회색늑대는 곧장 전투은신을 사용해 다시 은신을 했다.
율은 재 은신을 막기 위해 겁화를 사용했지만 겁화가 만들어내는 지속적인 불태우기 효과는 어둠의 망토로 인해 완전히 사라졌다.
하지만 율은 다시 은신을 허용했다고 실망하지 않았다.
어차피 어둠의 망토가 있는 이상 한번쯤은 이렇게 빠져나갈 수 있는 회색늑대였다.
‘그렇다면 다음은 다시 1분을 더 쓰고 공격을 시작하려나?’
전투은신의 재사용 대기시간은 고스트들이 철저히 지키는 원칙 중 하나였다.
하지만 여기서 율 역시 실수를 했다.
회색늑대는 율의 이러한 안일한 생각을 읽고 이번엔 아예 전투은신을 포기한 채 곧바로 기습을 감행했다.
이번 공격은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율의 뛰어난 감도 이번 공격을 잡아내지는 못했다.
감이란 것도 결국 예상을 기반으로 깔고 있을 때 더 정확해지는 법이었다.
퍼퍽!
율의 등 뒤를 파고드는 회색늑대의 날카로운 단도 두 자루.
순간 율은 이번 공격을 막거나 피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실수를 했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피해는 어쩔 수가 없었다.
하지만 피해를 최소화해야 했다.
특히 고스트의 연속 공격은 화려하면서 또 치명적이었기 때문에 그대로 고스란히 다 맞아 줄 수는 없었다.
율은 곧장 부츠에 담겨 있는 마법을 사용했다.
‘세계수의 보호’
10초간 모든 공격에 대한 회피 확률이 50% 증가하고, 모든 데미지를 30% 감소시켜 주는 아주 훌륭한 아이템 스킬.
세계수의 보호가 발동되자 회색늑대는 온전히 자신의 공격이 다 꽂히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이대로 모든 콤보를 쏟아내면 오히려 자신의 스프릿 에너지를 낭비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스프릿 에너지를 낭비했다간 자칫 다시 스프릿 에너지를 모으다가 치명적인 피해를 입을 수도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늘 스프릿 에너지를 신경 써서 관리해 줘야 했다.
회색늑대는 일단 콤보 공격을 멈추고 들고 있던 검의 손잡이로 율의 뒤통수를 강하게 후려쳤다.
일명 ‘뒤통수치기’라 불리는 고스트가 가진 기절 기술 중 하나였다.
뒤통수치기에 당한 율은 5초간 기절 상태가 되었다.
그에 회색늑대는 그 5초를 이용해 멀리 물러나며 전투를 해제시켰다.
5초가 거의 끝나갈 무렵 전투가 해제되자 회색늑대는 망설이지 않고 다시 은신해 버렸다.
이게 바로 고스트의 전형적인 전투 스타일이었다.
절대 무리를 하지 않는… 하지만 상대방을 무척 괴롭게 만드는…….
율은 기절 상태에서 깨어났지만 이미 생명력의 20% 이상이 훌쩍 줄어들어 있었다.
잠깐의 공격치고는 정말 무서운 위력이었다.
‘휴우~ 역시 방심은 금물이야.’
율은 다시 정신을 똑바로 차렸다.
한 번의 방심으로 치른 대가가 큰 만큼, 앞으론 절대 방심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바로 그때 회색늑대가 또 공격을 감행했다.
역으로 생각해 멋지게 공격을 성공시켰던 회색 늑대.
그는 이번 역시 역에서 또 한 번 역으로 찔러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