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복수
9명이 된 섀도우 로드.
그들은 일단 러셀요새에서 그동안 하지 못했던 정비를 했다.
특히 비주류 파티원들 거의 대부분이 아이템을 강탈당했기 때문에 제대로 정비해야 했다.
율은 가지고 있던 골드를 그들에게 아낌없이 나누어주었다.
더불어 아직 팔지 않았던 쓸 만한 아이템들도 다 건네주었다.
비주류 파티는 아직 만 레벨이 되지 못한 상태였다.
그들은 거의 만 레벨 직전까지 갔다가 무한PK에 잘못 걸려 오히려 레벨이 떨어진 경우였다.
어둠의 숲이 만 레벨을 빨리 찍을 수 있는 사냥터라는 꾐에 넘어간 게 가장 큰 실수였다.
어쨌든 완벽하게 정비를 끝내자 그들은 다시 어둠의 숲을 향해 이동했다.
팔콘이 먼저 어둠의 숲에 가 있었기 때문에 혈마대의 움직임은 거의 실시간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졸지에 모든 먹잇감을 놓친 혈마대는 거의 패닉 상태에 빠졌지만 결코 어둠의 숲을 포기하지 않았다.
사실상 어둠의 숲만큼이나 작업하기가 좋은 곳도 드물었기 때문에 그들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어딜 가서 버려진 라이프 스톤을 구하겠는가?
그렇다고 그 비싼 라이프 스톤을 직접 구입할 수는 없었다.
비록 버려졌다고 해도 소유권 자체가 소멸된 건 아니었기에 마을을 차지할 수는 없었지만 이렇게라도 이용할 수 있다는 게 그들로서는 대단히 중요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그곳을 포기하지 않고 다시 유저들을 유인하기 시작했다.
율은 그 사실을 알고 새로운 계획 하나를 짰다.
이름 하여 ‘뱀의 머리를 자르는 작전’이었다.
“그러니까 풍이랑 엘리스는 어리바리한 평균레벨 150정도의 유저들인 것처럼 행동해서 놈들에게 고의로 낚여줘. 낚이는 타이밍은 내가 나중에 따로 얘기해줄게. 그리고 불 형 파티는 팔콘이 전해주는 정보를 바탕으로 놈들이 가장 취약한 곳을 계속 찔러줘요. 절대 정면 싸움은 하지 말고 무조건 좀 싸우다가 바로 외곽으로 빠져요. 형 파티는 놈들을 최대한 귀찮게 하면 되는 거예요. 그리고 싸울 때 꼭 복수하러 온 것처럼 최대한 요란스럽게 굴어요.”
율이 차근차근 작전을 설명했다.
“그렇게만 하면 되는 거냐?”
“네, 어쩌면 형들 역할이 제일 중요해요. 놈들을 최대한 귀찮게 해서 놈들의 본대를 끌어내면 성공한 거예요. 팔콘이 본대가 출발했다고 전해주면 절대 본대랑 싸우지 말고 본대하고 가장 멀리 있는 놈들을 공격해서 계속 본대를 끌고 다니세요.”
“알았다. 한번 잘해보마.”
“우리는 어떻게? 그냥 낚여만 주면 되는 거야?”
“일단 낚여주면 아마 놈들이 여명의 마을로 데리고 갈 거야. 그때가 타이밍이야. 오히려 니들이 역으로 놈들을 PK해 버려. 하지만 너희는 절대 복수가 컨셉이 아니야. 너희는 진짜 양아치가 되는 거야. 놈들을 잡는 PKK(Player Killer Killer)~ 양아치를 털어먹는 PKK. 그게 너희의 컨셉이야.”
“호오, 그러니까 한마디로 PK헌터가 되라는 거네?”
강풍이 재미있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너희들이 활약할수록 저쪽도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어. 그러니까 수고 좀 해줘.”
“오케이~ 접수했어.”
“형, 근데 저는 이번에도 정찰만 해요? 저 이래 뵈도 싸움 좀 하는데…….”
아쉬운 표정의 팔콘을 보며 율이 웃었다.
“하하, 알았다. 너는 정찰하다가 엘리스와 풍이를 도와줘라. 너도 한번 제대로 악당이 되어봐라.”
“오오, 그런 거 좋죠. 흐흐~ 다 죽었어.”
팔콘이 신나했다.
나이 차이는 율과 세 살밖에 나지 않지만 팔콘은 아직 어리다는 느낌이 강하게 묻어나왔다.
“자, 이번 작전의 하이라이트는 혈마대 대장으로 알려진 놈의 목을 따는 겁니다. 그리고 그건 제가 직접 하겠습니다.”
“오~ 메인은 길마님이셨던 거야?”
강풍이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웃으며 얘기했다.
“사실 뭐 너나 엘리스가 해도 상관은 없는데. 아무래도 내가 하는 게 좀 더 편안하게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율은 다양한 스킬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었기에 아무래도 작전을 수행하며 생기는 변수들을 엘리스와 강풍보다 더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었다.
그래서 직접 하기로 결정한 것이었다.
또 한 가지… 어쩌면 섀도우 로드의 공식적인 첫 복수라고 할 수 있었기에 복수의 핵심은 길드 마스터인 자신이 직접 해야 한다는 의무감도 없지 않아 있었다.
“헤헤, 농담한 거다. 누가 하든 놈의 목만 따면 되는 거지. 당연히 난 널 믿는다.”
강풍이 기분 좋게 웃으며 율의 어깨를 토닥였다.
“이게 제가 짠 계획의 전부입니다. 모두 맡으신 역할들만 잘해주신다면 복수는 의외로 쉽게 성공할 겁니다.”
PK길드 혈마대.
그들은 PK길드답게 그리 만만한 이들이 아니었다.
하지만 총 인원이 9명밖에 되지 않는 섀도우 로드는 그들을 겁내지 않았다.
“가자.”
자리에서 일어나는 9명의 그림자들.
그들의 얼굴엔 자신감이 가득 차 있었다.
* * *
“왜 자꾸 이런 일이 생기는 걸까?”
피묻은쌍칼이 인상을 잔뜩 구긴 채 서 있었다.
그런 그를 지켜보던 동생 피묻은쌍도끼는 자신의 형이 얼마나 지랄 맞은 성격인지 알고 있기에 그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래봤자 잔챙이들이잖아. 저번처럼 어이없는 술수에만 안 휘말리면 오히려 놈들을 잡아서 이득을 볼 수도 있을 거야. 혹시 알아~ 그놈들이 유니크 아이템이라도 떨어트려줄지…….”
“후우~ 진짜 그렇게라도 안 되면 큰일이다. 상납금을 내야 하는 날짜가 코앞인데 아직 절반 정도밖에 못 채웠어. 이러다가 내 피 같은 개인 골드를 쓰게 생겼다고.”
“그래도 까부는 모양새를 보니 어느 정도는 놀아본 놈들 같아. 분명 좋은 아이템을 선물해 줄 거야.”
피묻은쌍도끼는 정말 제대로 김칫국을 마시고 있었다.
“그나저나 신규 유저들은 잘 끌어들이고 있지?”
“열심히는 하고 있는데… 아무래도 소문이 많이 나서 그런지 일단 이쪽은 경계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어. 그래서 아예 이젠 여기가 어둠의 숲이 아니라 노을 숲이라고 속여서 데리고 오는 중이야.”
“잘했다. 어둠의 숲은 이미 너무 알려졌으니까 그렇게 해서라도 무조건 신규 유저들을 잔뜩 끌어들여야 한다.”
노을 숲은 어둠의 숲과 반대 방향에 존재하는 또 다른 숲이었다.
하지만 보통의 검마노 유저들은 정확하게 지형이나 길을 숙지하고 있지 않는 경우가 많았기에 어둠의 숲을 노을 숲이라고 말해도 속는 유저들이 꽤 많았다.
“근데 형, 우리한테서 탈출한 놈들 중에 몇 명이 계속 귀찮게 하는 건 해결됐어?”
“내가 지금 그것 때문에 골치가 아프다. 이것들이 자꾸 신경을 긁어서 아주 짜증이 나. 어떻게 아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혈마대원들 중에서도 가장 취약한 애들이 있는 곳만 골라서 찾아오는데 아주 죽겠다. 그렇다고 곧 작업해야 하는데 정예 대원들을 분산시켜 놓을 수도 없고…….”
“형, 그냥 한 번에 다 몰려가서 쓸어버리자. 계속 이렇게 귀찮게 굴면 나중에 본격적으로 작업 시작할 때 더 짜증날 수 있잖아. 아예 본대를 끌고 가서 한 번에 싹 밀어버리자.”
“으음… 지금 그렇지 않아도 그걸 생각하고 있었다. 이번에도 함정은 아니겠지?”
“에이~ 저번에 낚인 건 요상한 함정에 낚인 거고, 이번엔 분명 다른 목적을 가진 놈들이 와서 설치는 거잖아. 복수를 한다고 꼴값을 떠는 것 같던데 내가 아주 작살을 내놓을게.”
“그것도 나쁘지는 않지. 성질 같아선 내가 가고 싶은데 난 이제 시작할 작업을 위해서 이것저것 준비할 게 있으니 네가 본대를 이끌고 갔다 와라.”
원래 피묻은쌍칼은 안전제일주의자였기 때문에 의외로 변수가 있을 만한 전투에는 절대 참가하지 않았다.
특히 PK를 하고 얻는 대부분의 전리품을 그가 보관했기 때문에 혹시라도 눈먼 칼에 맞아 죽기라도 하면 큰일 날 수가 있었다.
그래서 자신은 늘 안전한 베이스캠프에 숨어 있었다.
정말 대단한 양아치 중에 양아치였다.
“반나절이면 될 거야. 아주 깨끗하게 해결하고 올게.”
피묻은쌍도끼는 자신 있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밖으로 나갔다.
그는 자신들을 귀찮게 하는 잔챙이들을 후딱 박살내 버리고 돌아오기 위해 쌍칼을 경호하는 인원들을 제외한 모든 혈마대의 대원들을 데리고 비주류 파티가 활동하고 있는 지역으로 출발했다.
아예 포위를 해서 섬멸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가 출발한 그 순간, 율의 계획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는 걸 그는 알 수 없었다.
이미 준비하고 있던 강풍과 엘리스는 스스로 미끼가 되어 낚시에 걸려주었고, 팔콘은 현재 상황을 자세하게 길드원들에게 중계하며 강풍과 엘리스의 뒤를 따랐다.
마지막으로 율은 혈마대의 베이스캠프로 침투할 모든 준비를 끝내고 정확한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비주류 파티가 본대를 이끌고 어둠의 숲 최북단 위로 올라간 그 순간, 엘리스와 강풍이 본래의 모습을 드러냈다.
PK유저들을 터는 PKK유저.
그들은 그 모습을 완벽하게 재현했다. 덕분에 가장 깜짝 놀란 건 피묻은쌍칼이었다.
본대가 빠진 지금 갑자기 자신들을 터는 PKK들이 나타났다는 소식에 그는 황급히 베이스캠프에 남아 있던 정예 대원들을 투입시켰다.
PK들에게 PKK들은 제일 짜증나는 존재였다.
일명 PK헌터라고도 불리는 그들.
그들은 PK들을 죽여 그들이 떨어트리는 양질의 아이템과 그들의 목에 걸려 있던 현상금을 가지고 갔다.
PK는 돈이 되었기에 당연히 PKK들의 수입은 무척 좋은 편이었다.
물론 PKK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었다. 어지간한 실력으로 PKK를 하겠다고 설치다간 오히려 PK들한테 털릴 수도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PK들은 제대로 된 PKK가 나타나면 잔뜩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피묻은쌍칼 역시 한순간에 자신들의 유인조를 박살낸 두 명의 PKK가 등장했다는 소식을 듣곤 일이 심각하다는 걸 단번에 깨달았다.
본대에게 연락해서 돌아오라고 해도 거의 30분은 걸릴 수 있었다.
그 시간이면 PKK들이 얼마나 많은 사냥을 할지 헤아리기도 힘들었다.
그리고 본대가 도착하면 유유히 사라질 게 뻔했다. 그렇게 놔둘 수는 없었다.
무슨 수를 쓰더라도 그들을 30분 동안 묶어 놓고 본대로 포위해 제거해야 했다.
피묻은쌍칼은 자신들을 건드린 PKK들에게 아주 큰 후회를 남겨주겠다고 다짐했다.
그랬기에 그는 단 두 명의 유저를 제외한 모든 정예 대원들을 PKK쪽으로 투입시켰다. 물론 이번에도 역시 자신은 가지 않았다.
늘 그렇듯 혹시 일이 꼬일 수도 있는 곳에는 절대 가지 않는 게 그의 생활 신조였다.
하지만 그가 정말 모르는 게 하나 있었다.
모든 일이 한꺼번에 연달아 터진 그때, 자신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 어둠의 그림자가 있다는 것을…….
율은 ‘도리안의 그림자’를 이용해 아주 손쉽게 피묻은쌍칼이 있는 베이스캠프 안으로 침투할 수 있었다.
이제 남은 건 두 명의 정예 혈마대원과 피묻은쌍칼뿐이었다.
정보에 의하면 피묻은쌍칼은 이름처럼 쌍칼을 쓰는 게 아니었다.
그의 무기는 활이었다. 활 중에서도 가장 위력이 강력한 것 중 하나인 헤비크로스보우 계열을 사용하는 유저였다. 전형적인 뒤치기 유저라는 뜻이었다.
오히려 조심해야 할 건 그를 지키는 정예 혈마대원 두 명이었다.
전사 계열로 보이는 두 명을 한 번에 쓰러트리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그 얘긴 두 명하고 싸우게 되면 뒤치기 전문 캐릭터였던 피묻은쌍칼이 호시탐탐 뒤를 노린다는 얘기였다.
이렇게 되면 문제가 생길 수도 있었다.
물론 그렇게 싸운다고 해서 꼭 자신이 질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왕 복수를 하는 거 완벽하게 굴욕을 맛보여주고 싶었고… 괜히 이상한 변수 같은 건 처음부터 안 만들고 싶었던 율로선 확실한 수를 사용하기로 했다.
‘불사인 소환’
율은 베이스캠프에서 좀 떨어진 나무 뒤에서 불사인을 소환했다. 그리곤 아주 작게 ‘진정한 영웅들의 서사시’를 불렀다.
소환한 영웅은 나르엘.
나르엘은 불사인의 몸에 잘 적응하고 있었고, 그가 워낙 시끄럽게 잘 까불었기 때문에 이번 역할에는 딱 좋았다.
“오오! 또 나…….”
“쉿!”
율은 나오자마자 시끄럽게 떠들려고 하는 나르엘의 입을 재빨리 손으로 막았다.
“떠드는 건 이따가 실컷 해도 좋으니까 지금은 조용히 좀 해봐.”
“흠흠, 알았다.”
나르엘은 고분고분하게 율의 말을 들었다.
처음에 율에게 미친 듯이 까불었던 그의 모습은 거의 찾아볼 수가 없었다. 아쉬운 건 나르엘이었으니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저기 멀리 천막들이 보이지? 저기 가면 중앙에 큰 천막을 지키는 놈들이 두 명 있을 거야. 어떻게 해도 좋으니까 걔들하고 한번 신나게 놀아봐. 최대한 시끄럽게… 놈들의 시선을 꽉 붙잡아놔.”
“오, 전부 내 맘대로 해도 되는 건가?”
“응, 마음대로 해. 죽여도 되니까 하고 싶은 건 다해.”
“크크, 이거 정말 마음에 드는 일이군. 어서 가자! 그렇지 않아도 이 몸을 얻고 마법을 제대로 사용해본 적이 없어서 답답했는데, 내가 오늘 화염마법의 최종 진화 형태를 보여주마.”
물론 나르엘의 마음처럼 진짜 화염마법의 최종 진화 형태가 여기서 재현되기는 힘들었다.
하지만 율은 이 정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했다.
어차피 나르엘의 용도는 시선을 끄는데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자신은 최후의 일격을 날리면 되었다.
“좋아, 바로 가자. 난 뒤로 돌아갈 테니 먼저 출발해라.”
“흐흐, 알았다.”
율은 나르엘을 먼저 보낸 후 곧장 다시 묵현을 연주하며 ‘영웅들의 서사시’를 불렀다.
이번에 소환한 영웅의 영혼은 당연히 가장 익숙한 파멸왕 슈나이더의 영혼이었다.
다른 영혼들로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지만 율은 이번만큼은 빙룡과 화룡을 사용하고 싶었다.
전 길드 마스터 가츠를 위한 현 길드 마스터 율의 선물 같은 것이었다.
“크하하하! 불꽃의 나르엘님 강림이시다!”
나르엘은 율이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화려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파이어 볼 두 발로 자신의 등장을 알린 나르엘.
그는 곧장 두 명의 혈마대원에게 가벼운 불길을 내뿜어주었다.
갑자기 등장한 나르엘을 보고 깜짝 놀란 그들은 곧장 무기를 꺼내들며 앞으로 뛰쳐나왔다.
그러자 소란을 들은 피묻은쌍칼도 자신의 무기를 챙겨 밖으로 나왔다.
“젠장… PKK놈들 여기까지 온 건가?”
당황한 표정이 역력한 피묻은쌍칼.
하지만 이제는 어디로 도망갈 수도 없는 상황이었기에 그는 드디어 싸우는 걸 선택했다.
“기껏해야 한 명일 뿐이다. 혈마대에서 가장 강한 세 명이 여기에 있을 것이라곤 생각하지도 못했겠지!”
그의 말처럼 이곳에 있는 셋은 혈마대에서 가장 강한 이들이었다.
피묻은쌍칼은 자신의 목숨을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혈마대에서도 가장 실력이 좋은 이들 둘을 뽑아 자신의 전속 경호 대원으로 임명했다.
그렇기에 설사 상대가 PKK라고 해도 자신이 있었다.
“넌 내가 죽여주마!”
손에 들고 있던 커다란 헤비크로스보우에 특수화살 통을 끼워 넣는 피묻은쌍칼.
그의 활 솜씨는 확실히 대단했기 때문에 이렇게 뒤에서 저격하면 당해내는 유저가 거의 없었다. 하지만 그건 저격을 했을 때의 얘기였다.
“누가 누굴 죽이는데?”
피묻은쌍칼의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
그는 갑작스럽게 자신의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오자 깜짝 놀라며 뒤로 몸을 돌렸다. 그리곤 조준이고 생각이고 모두 하지 않고 일단 활을 쐈다.
파파팟!
꽝꽝광!
허공을 가르며 뒤에 있던 큰 나무에 가서 박히는 화살 세 발.
특별히 큰돈을 주고 구입한 폭시(爆矢) 세 발이 연달아 터지면서 나무를 쓰러트렸지만 정작 목소리의 주인공은 보이지 않았다.
“어디에 쏘는 거야!”
스팟!
그 순간 피묻은쌍칼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 대검 두 자루.
율은 쌍칼이 등을 돌리는 순간 높게 뛰어올라 그의 시야에서 벗어났다.
까가가강!
피묻은쌍칼 역시 나름 이름 있는 PK유저답게 율의 기습 공격을 가까스로 헤비크로스보우를 머리 위로 들어 올리며 방어했다.
헤비크로스보우가 무슨 재질로 만들어졌는지 모르겠지만 상당히 고급 아이템 같아 보였다.
“크윽.”
방어는 했지만 워낙 창졸간에 막은 거라 데미지를 제대로 완화시키지 못했기에 피묻은쌍칼이 살짝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이 순간이 기회라면 기회였다.
이때 곧장 몰아친다면 피묻은쌍칼에게 큰 데미지를 입힐 수 있었다.
하지만 율은 알면서도 연속해서 몰아붙이지 않았다.
그 이유는 단 하나, 피묻은쌍칼에게 경고를 주기 위해서였다.
“혈마대의 대장 피묻은쌍칼인가?”
피묻은쌍칼은 상대가 바로 공격을 이어가지 않자 마음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입은 데미지를 회복했다.
“잘 알면서 겁도 없이 덤볐던 것이군.”
이것이야말로 진짜 허세였다.
난데없는 피묻은쌍칼의 허세에 율은 그저 웃음만 나왔다.
“후후, 정말 어이없는 놈이었군.”
“누가 어이없을지는 두고 보면 되는 거 아니겠어?”
피묻은쌍칼이 이렇게까지 허세를 부리는 이유는 방금 전 입은 데미지를 최대한 회복하고 다음 공격을 어떻게 할지 생각하기 위해서였다.
그에겐 지금 잠깐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 그건 두고 보는 걸로 치고… 일단 오늘 네가 여기서 죽어야 할 이유를 세 가지만 설명해주마.”
“허허, 네가 간이 부어도 제대로 부었구나.”
“첫째!”
율은 피묻은쌍칼이 무슨 말을 해도 신경 쓰지 않고 그를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내 친구와 동료를 상하게 했기 때문에.”
“무슨 개소리냐!”
“둘째! 내 친구와 동료의 것을 빼앗았기 때문에.”
“걱정 마라. 네놈 것도 빼앗아줄 테니.”
“셋째!”
율이 셋째를 외치는 순간, 어느 정도 몸이 회복된 피묻은쌍칼이 자신의 특기 기술 중 하나인 고속사격을 이용해 마치 서부시대에 총잡이들이 결투할 때 그랬던 것처럼 율을 향해 폭시 한 발을 빠르게 날렸다.
파팟!
피묻은쌍칼의 공격 타이밍은 정말 완벽해 보였다.
‘됐다!’
헤비크로스보우의 특징은 한 발만 제대로 맞춰도 거의 회복 불가능한 타격을 입힌다는 것이었다.
특히 그 비싸다는 폭시까지 사용했으니 데미지는 더 커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건 그의 망상일 뿐이었다.
파팟!
폭시가 율을 관통했다.
폭시라면 맞는 순간 터져야 하는데 그냥 관통한 게 너무 이상해보였다.
스스스~
이상할 수밖에 없었다. 폭시가 관통한 건 율이 남긴 잔상이었던 것.
아플란의 금반지에 내장되어 있는 블링크 스킬이 만들어낸 결과였다.
피묻은쌍칼의 고속사격보다 율의 블링크 스킬이 더 빨랐다.
애초에 그의 기습은 성공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냥 네놈의 그 야비한 얼굴이 싫기 때문에.”
등 뒤에서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순간 피묻은쌍칼은 일이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었다는 걸 느꼈다.
“이 세 가지 이유 때문에… 넌 죽는다!”
파아아앗!
‘죽는다’는 말과 함께 거대한 검은 날개 두 장이 피묻은쌍칼을 집어삼켰다.
혈마대 대장이자 온갖 악행을 일삼던 양아치 피묻은쌍칼은 이렇게 허무한 죽음을 맞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