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구출
율은 어둠의 숲 외곽에서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아무래도 외곽이라 적들이 있을 가능성은 별로 없었지만 그래도 분명 조심해야 하는 장소였다.
그나마 율이 현재 강림시킨 영혼 자체가 이런 은신 후 이동에 어느 정도 익숙한 영혼인지라 그렇게 어렵게 이동하고 있지는 않았다.
트랩 마스터 도도.
아주 먼 옛날, 함정 기술 하나로 모든 도적들을 비웃은 전문가가 있었다.
도적이었지만 반대로 도적들을 잡았던 안티 도적.
대륙에서 좀 잘나간다는 가문들은 모두 그를 고용했다.
심지어 여러 나라의 왕궁과 황궁에서도 그를 자주 불러들였다.
이유는 하나.
기가 막힌 함정 기술 때문이었다.
그가 설치한 함정은 같은 도적들도 두려워했다.
해체는 고사하고 함정을 발견하지도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함정에 관한 모든 것을 마스터한 도도.
그렇기에 그는 도적들에게 가장 두려운 상대였다. 그의 그러한 기술은 도적들에게만 적용되는 게 아니었다.
실제로 그는 한 전쟁에서 대규모 함정을 설치해 그의 함정이 전쟁에서도 통한다는 걸 입증했다.
비록 마흔 살이라는 많지 않은 나이에 당대 최고의 도적이자 살수(殺手)였던 미스트에게 암살당했지만, 그전까지 그가 남긴 업적은 가히 대단했다.
정말 웃긴 건 이 도도와 미스트가 전부 율이 소환할 수 있는 영웅의 영혼들이라는 것이었다.
둘 다 워낙 개성이 강한 영혼들이라 잘 소환하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둘 다 후세에 영웅으로 기억된 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도도의 영혼을 강림시켜 트랩 마스터의 기술을 얻은 율은 자신이 지정한 구역에다 조심스럽게 함정을 설치하고 있었다.
도도의 영혼을 아예 한 번도 써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
모든 영혼을 분석하고 연구하기 위해 꾸준히 노력했기 때문에 도도의 영혼도 어느 정도는 사용할 수 있었다.
물론 그래봤자 도도의 능력을 50%도 사용하지 못했지만 그 정도만으로도 충분했다.
어차피 이 함정은 일종의 시선 분산용이었다.
걸리면 좋은 거고, 걸리지 않아도 크게 아까울 건 없었다. 기껏해야 함정을 만들 때 사용한 재료비 정도만 날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대충 만들 생각은 없었다.
율은 정성을 들여 신중하게 함정을 만들었다.
비록 아직은 파이어 트랩, 쇼크 트랩, 파이크 트랩, 오일 트랩. 이렇게 네 가지 기본 트랩만 만드는 수준이었지만 그래도 도도의 트랩인지라 그 위력은 결코 무시할 수준이 아니었다.
유저가 설치한 함정의 유지시간은 최대가 48시간(게임시간)이었으니, 이걸 설치하고 최대한 빨리 작전을 진행시켜야 했다.
‘도도의 능력을 빌려도 30개 이상의 함정은 힘들구나.’
보통 함정을 설치하는 직업은 도적 계열로 구분되었다.
당연히 유저들 중에서도 함정 설치 스킬을 전문적으로 키운 이들도 있었다.
그들이 설치할 수 있는 최대 함정의 개수는 약 40개였다. 그것도 최상급 유저들을 기준으로 했을 때 얘기였다.
보통은 10개 정도의 함정밖에 설치하지 못했다.
그나마 도도의 힘을 빌렸기 때문에 30개까지 가능한 것이었다.
평소에 좀 더 도도의 영혼에 익숙해져 있었다면 더 다양한 종류의 함정을 더 많이 설치할 수 있었겠지만 지금으로써는 이게 한계였다.
한 구역 당 3개.
율은 최대한 효율이 좋도록 이 3개를 적절히 모아 설치해 놓았다.
‘주력 영혼이 아닌 영혼들도 꾸준히 수련한다고 했는데 아직도 많이 부족하네.’
노력은 꾸준히 했다. 단지 시간이 부족했을 뿐이다.
도도의 영혼은 율이 스스로 분류한 영혼의 활용 등급 중 가장 낮은 최하로 구분되었기에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활용하면 되었다.
율은 어둠의 숲 외곽을 빙 돌며 그렇게 함정을 전부 설치했다.
이제 남은 건 각자 임무를 맡고 떠났던 세 사람이 돌아오길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수고했다.”
율이 마지막으로 돌아온 강풍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아, 미안. 좀 늦었지. 생각보다 NPC용병들이 까다로워서 여기까지 데리고 오는데 좀 오래 걸렸다.”
“흐흐, 강풍 형이 NPC 고용을 처음 해보셨구나. 걔들 진짜 짜증나게 까다롭죠. 그래서 어지간하면 차라리 돈을 주고 유저들끼리 계약을 맺는 게 더 낫다는 얘기도 많아요.”
어둠의 숲을 전부 정찰하고 돌아온 팔콘은 성격상 한시라도 아는 척을 하지 않으면 입에 가시가 돋는 게 분명해 보였다.
“자, 다 왔으니까 이제 본격적으로 계획을 얘기해보자. 엘리스, 길이 몇 개나 됐어?”
“정확하게 이어진 건 4개, 그리고 산맥으로 난 샛길이 한 개, 나머지 2개의 길은 근처를 우회해서 지나가기만 한다.”
“오케이~ 생각보다는 길이 많네. 그럼 팔콘 넌 어땠어?”
“음, 일단 이놈들은 어둠의 숲 안쪽에만 거의 300명이 넘게 돌아다니는 것 같아요. 대부분 한 파티씩 뭉쳐서 다니는데 워낙 많이 돌아다녀서 사실상 이대로는 각개 격파가 불가능할 것 같아요. 그리고 여명의 마을도 살짝 들어가 봤는데 겨우 50여명 밖에 안 보이더라고요. 그나마 라이프 스톤 근처의 안전지대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어요.”
“길드인 것 같아?”
“음, 그건 확실히 모르겠어요. 단지 같은 문양이 새겨진 망토를 많이 입고 있는 걸로 봐서는 어떤 한 길드가 주축이 된 거 같아요. 정확히 어떤 길드인지는 모르겠고요.”
“그렇군.”
율이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한 번 지도를 살폈다.
“풍아, 소문은 확실히 냈지?”
“당연하지. 아주 확실하게 냈다. 무한PK를 토벌한다니까 사람들도 관심을 많이 갖더라.”
“좋아, 그럼 분명 놈들의 움직임이 있을 거야. 토벌대가 온다는데 가만히 있을 리가 없지. 용병들까지 고용해 대규모 부대가 이동하는 걸 확실히 보여줬으니 소문은 더 구체화됐을 것이고… 결국 놈들은 불안해서 어떻게라도 움직이겠지.”
율이 노린 게 이것이었다.
“그럼 우린 이제 뭘 해야 해?”
“우리? 우린 기다려야지. 팔콘, 네가 조금 더 수고해줘야겠다. 조금 있으면 분명 놈들이 움직일 테니 그들이 움직이는 걸 확실히 체크해서 나에게 알려줘.”
“네.”
“그리고 우리는 여기서 팔콘이 정보를 가져올 때까지 대기한다. 곧 아주 재미있는 일이 벌어질 거야.”
“흐~ 이거 오랜만에 몸 좀 제대로 풀겠네.”
강풍이 굳은 몸을 가볍게 풀며 웃었다.
그의 말대로 유저와의 싸움은 오랜만이었지만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그들이 누구인가!
그 유명한 혈천대전에서 1, 2, 3위를 차지한 이들 아닌가.
적어도 유저와의 싸움은 그들만큼 노련한 이들도 찾기 힘들었다.
* * *
“4조, 10조, 14조, 21조, 40조. 이렇게 5조가 외곽 순찰을 나가야겠다.”
“형, 굳이 그렇게 많이 동원할 필요가 있을까? 우리 정보망에 걸리지도 않은 토벌대라면 완전 허접할 텐데.”
두 남자의 대화.
무한PK의 중심이었던 혈마대(血魔隊) 길드의 길드 마스터 피묻은쌍칼과 그의 친한 동생 피묻은쌍도끼였다.
“도끼야, 세상을 그리 만만하게만 보면 안 된다. 검마노가 얼마나 무서운 곳인지 벌써 잊었냐? 내가 왜 이 개고생을 하면서까지 골드를 벌고 있는지 잊은 거야? 그 망할 골든라인에게 상납금을 바치기 위해서 이러고 있는 거잖아.”
“하지만 대신 그들은 우리를 보호해 주잖아요.”
“골드라인이? 착각하지 마라. 우리를 궁지에 몰아놓고 거액의 상납금을 바치면 살려줄 뿐만 아니라 보호까지 해주겠다고 얘기했던 게 우리를 배려해 준 거 같아? 이거야말로 완전 개소리지. 걔들은 우리를 그저 쥐어짜서 빨아먹으려고 하고 있을 뿐이야. 물론 보호도 해주겠지. 적어도 안정적으로 돈이 들어올 때까진 말이야. 하지만 결국 일이 생기면 가장 먼저 내쳐질 대상이 바로 우리들이다. 알겠냐?”
“그럼 차라리 아예 그냥 도망가는 게 낫지 않아요.”
“허, 골든라인이 어떤 놈들인지 잊었냐? 걔들은 로열패밀리다. 로열패밀리 중에서도 정보력이 뛰어나기로 소문난 놈들에게서 도망치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아냐? 그냥 깔끔하게 죽고 말지.”
“후우~ 너무 어렵네요.”
“아직 네가 어려서 그렇다. 조금만 더 크면 이 세상이 진짜 만만한 곳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될 거다.”
“그럼 일단 다섯 개조를 이끌고 정찰을 나가볼게요.”
“그래, 네 말대로 별건 아니겠지만 혹시 모르는 거니까 확실히 살펴보고 와라. 이상 징후가 발견되면 바로 보고하고.”
“네.”
피묻은쌍칼은 그렇게 이상한 소문에 대비해 후속 조치를 해놓았다.
그는 하루하루를 살얼음판 위를 걷듯 살아가야 하는 살인마 유저였다.
악행수치가 너무 높아 죽는 순간 가지고 있는 대부분의 아이템을 떨어뜨려야 하고, 레벨이나 스킬 숙련도도 남들과 완전 다른 수준으로 떨어졌다.
당연히 죽으면 안 되었다.
그래서 그는 늘 안전을 제일로 따졌다. 물론 한 번의 실수로 정말 더럽게 엮여버렸지만 지금에 와서는 그것도 그렇게 나쁜 건 아니었다.
비록 상납금이 너무 많아 부담되는 게 사실이었지만 아예 그 기회를 살려 세를 몇 배로 늘리고 작업 자체를 대규모로 진행시켜 버렸다.
예전이었다면 토벌대가 무서워서 하지 못했을 짓을 골든라인이라는 배경만 믿고 대책 없이 질러버렸다.
나중에 골든라인이 뭐라고 질책하면 그때 자중하면 되는 거였다.
“그나저나 저항이 뜸해지니까 수입도 덩달아 줄어서 큰일이네. 유인조 애들한테 레벨이 좀 낮아도 되니까 일단 무조건 많이 데려오라고 해야 하나?”
무슨 일이 있어도 일정 수준의 수입은 유지되어야 했다. 그래야 상납금도 내고 적당히 다른 유저들과 분배도 할 수 있었다.
“진짜 도끼 말대로 도망가서 한 일 년 정도만 어디 짱 박힐까? 대박만 하나 건진다면 진짜 고것만 믿고 그럴 수도 있을 텐데… 제대로 된 유니크 아이템 하나만 걸려라. 진짜 확 도망가 버릴 테니.”
쌍칼 입장에서도 골드라인의 압박은 너무 짜증났다.
자유롭게 PK를 하는 게 좋아 살인마까지 됐는데 이렇게 개 줄에 묶이듯 속박 당하자 견디기가 힘들었다.
“답답하구나.”
나름대로의 사정이 있는 쌍칼.
하지만 그의 사정 따위를 신경 써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양아치에 살인마였고 그 사실은 영원히 변하지 않았다.
* * *
[동북쪽으로 대략 다섯 파티가 움직입니다. 아무래도 정찰을 하는 거 같은데요?]
팔콘이 놈들의 움직임을 정확하게 파악한 후 파티 대화로 알려왔다.
[아마 곧 좀 더 부산하게 움직일 거다. 그때를 정확하게 알려줘라.]
외곽을 정찰한다면 분명 자신이 설치해놓은 함정들 중 하나는 지나칠 것이고, 그러면 어떤 식으로도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걸 보고하는 순간… 당연히 놈들의 본대는 움직일 것이라고 예상했다.
이런 율의 예상이 현재까지는 매우 정확하게 적중했다.
[바로 그때를 맞춰서 우리는 놈들의 반대방향으로 침투한다. 그리고 곧바로 마을에서 친구들을 구출해 탈출한다. 이게 이번 계획의 전부다. 이 계획의 생명은 스피드다. 아무래도 정면 싸움은 우리가 불리할 수밖에 없으니까 무조건 빠르게 치고 들어가 더 빠르게 빠져나와야 한다.]
[오우~ 스피드가 생명이네.]
[팔콘, 네 역할이 크다. 넌 전투에 합류하지 않아도 되니까 실시간으로 놈들의 움직임만 나에게 알려줘.]
[네엡!]
점점 결전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정면 대결은 피한다고 했지만 그렇다고 싸우지 않는 건 당연히 아니었다.
오히려 빠르게 길을 뚫어야 하기 때문에 더 치열하게 싸울 수밖에 없었다.
1순위가 갇혀 있는 친구와 동료들을 구출하는 것이고, 2순위가 PK유저들에게 복수하는 것이었다.
복수는 구출하고 난 후 천천히 해도 상관없었다.
[자, 힘내서 한 방에 끝내보자.]
율이 힘차게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전투의 시작, 그것을 알려줄 이는 팔콘이었다.
“마, 막아!”
퍼퍼퍽!
엘리스의 주먹과 발은 막으려 한다고 막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맞은 곳을 또 맞으면 아프다.
그런데 같은 곳을 일곱 번이나 맞으면 어떻게 될까? 그냥 쓰러진다가 정답이다.
엘리스의 칠성권을 버티거나 피할 만큼 실력 있는 유저는 여기에 없었다.
그녀는 파죽지세로 빠르게 길을 열었다.
그런 그녀의 뒤에는 투신창을 휘두르며 사방에서 달려드는 유저들을 깔끔하게 정리하는 남자가 서 있었다.
투신 강풍.
오랜만에 투신의 전투력이 마음껏 뿜어져 나오자 그의 근처는 완전히 초토화되었다.
엘리스와 강풍의 뒤를 따라 같이 달리는 율.
그는 이번에도 역시 보조 역할에 충실하며 혹시라도 엘리스와 강풍이 놓친 유저들이 있으면 각종 메즈로 묶어놓았다.
이 세 사람의 호흡은 더 이상 지적할 부분이 전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완벽했다.
율이 설치한 함정에 낚여서 외곽으로 혈마대의 본대가 이동한 순간, 율은 그들의 반대 방향으로 길들 뚫기 시작했다.
본대가 빠졌다고 PK유저들이 전부 사라진 건 아니었다. 혈마대 소속이 아닌 PK유저들이나, 혈마대 소속이지만 본대에 소속되지 않은 이들이 율 일행의 앞을 막아섰다.
하지만 그들은 너무나 약했다.
혈마대의 본대만 믿고 하이에나처럼 모여든 이들이라 심지어 만 레벨이 아닌 이들도 있을 정도였다.
덕분에 길 뚫기는 더욱 수월하게 진행되었다.
단 30분(게임시간) 만에 여명의 마을까지 한 번에 돌파했다.
그즈음 피묻은쌍칼 역시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았지만 이미 그는 반대쪽 외곽으로 빠져 있는 상태였다.
“불 형!”
율은 마을 안에서 초췌한 모습으로 쉬고 있던 다크불을 불렀다.
“허어… 율, 네가 여길 어떻게…….”
갑작스러운 율의 등장으로 깜짝 놀란 다크불.
놀란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와 같이 앉아서 쉬고 있던 비주류 파티는 물론이고 아직까지 여명의 마을에서 탈출하기를 포기하지 않은 다수의 유저들도 모두 깜짝 놀랐다.
“긴 얘기는 나중에 하고 일단 여기서 나가자.”
시간이 없었다.
여기서 괜히 뭉그적거리다간 혈마대 본대와 싸워야 하는 최악의 상황을 맞이할 수 있었다.
“그, 그래.”
다크불과 비주류 파티원들은 당황스러웠지만 일단 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율을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동시에 여명의 마을에 갇혀 있던 모든 유저들도 같이 달리기 시작했다.
포위망이 너무 단단해 탈출은 꿈에도 못 꿨던 그들이 너무나 쉽게 탈출하고 있었다.
물론 이 탈출을 위해 율이 나름대로 준비를 많이 한 건 사실이었지만 그래도 예상보다 더 수월하게 일이 진행된 감이 있었다.
율의 계획은 완벽하게 성공했다.
겨우 40분 만에 모든 상황이 종료되고, 여명의 마을에 갇혔던 모든 유저들은 어둠의 숲 밖으로 탈출할 수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을 구해준 율 일행에게 연신 고맙다는 말을 했다.
이미 무한PK를 당하며 지칠 때로 지친 그들이 지금 할 수 있는 건 고맙다는 말뿐이었다.
율은 계속 괜찮다고 말하며 그들을 안전한 지역까지 데려다 주었다.
그렇게 모든 유저들을 깔끔하게 보내준 후 드디어 율은 비주류 파티원들과 본격적인 해후를 할 수 있었다.
러셀요새의 한 객점에 자리를 잡은 그들은 서로의 어깨를 두드리며 인사했다.
“형, 고생 많았죠.”
“크으~ 네가 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어떻게 온 거야? 여기가 그리 만만한 곳은 아닌데…….”
“그러게. 난 율이 나타났을 때 ‘내가 드디어 헛것을 보는 구나’했다니까.”
다크불과 강한남자는 아직까지도 놀람이 다 안 풀린 표정으로 얘기했다.
그들은 특히 비주류 파티원들 중에서도 가장 처참한 몰골을 하고 있었다.
다크불이야 원래 갑옷을 거의 입지 않는다고 쳐도 강한남자는 트레이드마크인 두 개의 방패 중 한 개는 아예 없었고, 한 개마저 낡은 이상한 방패를 끼고 있었다.
그들은 탱커 역할을 하며 다른 이들보다 더 많이 죽었고 그 결과가 바로 이 모습이었다.
“근데 율님, 설마 만 레벨 찍었어요?”
비주류 파티에서 유일하게 율과 말을 트지 못한 이는 융단폭격이었다.
동갑이라 금방 친해질 것 같았지만 의외로 융단폭격이 말을 잘 못 트는 성격이었다.
“네, 찍었어요.”
“야~ 니들은 아직도 그러냐. 서로 편하게 좀 해라.”
서로 존댓말을 사용하는 율과 융단폭격을 보며 이반이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이반 형이 더 잘 알잖아요. 제가 얼마나 말을 잘 못 놓는지.”
“하긴, 네가 생긴 것과 달리 좀 그런 면이 있지. 그래도 한두 번 본 것도 아닌데 서로 편하게 지내려고 노력 좀 해봐. 근데 율이 너 만 레벨을 찍었다고? 이야~ 역시 대단하다. 우린 아직도 240대인데.”
이반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고개를 끄덕였다.
“크으, 우리도 이번 일만 아니었으면 벌써 만 레벨 찍었을 텐데… 어디서 이상한 놈한테 잘못 낚여서 이게 뭔 꼴이래.”
융단폭격은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이게 다 파티장이 못나서 그런 거니 날 욕해라.”
다크불은 심각하게 자신의 실수를 자책했다.
실제로 그들을 유인한 유저를 받은 건 다크불이었다.
“됐다. 지나간 얘기는 그만하고… 어쨌든 이렇게 탈출도 했으니 다시 심기일전해서 잘해보자.”
비주류 파티의 분위기 메이커 이반이 약간 의기소침해 있는 파티원들을 다독이며 분위기를 살렸다.
“그나저나 율아, 네 옆에 계신 분들은 친구 분들이야?”
“네, 이 멋진 음유시인 율의 친구, 더 멋진 강풍이라고 합니다. 하하하.”
“전~ 율 형님의 영원한 동생 팔콘이라고 합니다.”
“엘리스입니다.”
율이 뭐라고 소개하기 전에 강풍이 선수를 쳤다. 그리고 강풍에 이어 팔콘과 엘리스도 간단하게 인사했다.
“오~ 친구 분들이었네. 반갑습니다. 이반이라고 합니다.”
“다크불입니다.”
“강한남자에요.”
“로이드라고 불러주세요.”
“융단폭격입니다.”
서로가 간단하게 인사한 후 모두 객점 자리에 앉았다.
시원한 음료와 술을 같이 마시며 이런저런 얘기를 시작한 그들은 오랜만에 여유로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특히 무려 넉 달 동안 죽을 고생을 한 비주류 파티에겐 이 시간이 너무 꿀맛 같았다.
“길드?”
“네, 전에 편지로 살짝 얘기했었죠. 전 형들을 꼭 제 길드에 초대하고 싶었어요.”
분위기가 어느 정도 무르익자 율은 전부터 생각하고 있던 길드 가입 얘기를 자연스럽게 꺼냈다.
“하지만…….”
다크불이 살짝 망설이는 표정을 지었다.
“왜요?”
“우리가 도움이 될지 모르겠다. 우린 완벽한 비주류잖아.”
다크불의 목소리엔 자신감이 없었다.
율이 그런 다크불을 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형, 왜 이렇게 약해지셨어요. 예전의 그 당당함은 어디로 갔어요? 기억 안 나요? 우리가 얼마나 강했는지… 비주류가 어디 있어요. 우리가 즐기면 그게 바로 주류가 되는 거예요.”
“으음.”
“율 말이 맞다. 이번 일 때문에 불, 네가 너무 약해진 거 같아. 우리가 어때서? 우리만큼 개성 있는 놈들이 어디 있냐~ 크크, 난 길드 가입 찬성이다.”
이반이 가장 연장자답게 다크불을 추스르며 분위기를 바꿔놓았다.
“이반 형님 말이 맞아. 불아~ 힘내라! 네 그 황소 근성은 어디로 간 거니? 흐흐.”
강한남자도 지원 사격을 해주었다.
“다른 사람들은 어때? 다 찬성하는 거야?”
“저도 찬성이요.”
“나도 당연히 찬성.”
모두가 찬성했다.
“좋아, 그럼 바로 가입하도록 하자. 길드 이름은 섀도우 로드라고 합니다. 일단 멤버는 여기 있는 엘리스와 강풍이 전부입니다.”
“잠깐만요! 형, 저는요? 저도 가입시켜 주세요.”
팔콘이 갑자기 나섰다.
“네가 길드에 가입하겠다고? 넌 어차피 길드에 관심 없잖아?”
율은 팔콘이 이렇게 얘기할 줄을 몰랐기에 크게 당황했다.
“관심이 없었는데 이제 생겼어요. 꼭 가입하고 싶어요. 그런데 섀도우 로드… 설마 제가 알고 있는 그 섀도우 로드는 아니죠?”
“아마 맞을 거다.”
율 대신 강풍이 대답해 주었다.
“헐… 대박이네요. 그 전설의 섀도우 로드를 어떻게 형이 다시 이끌고 있어요?”
“음, 설마 그 섀도우 로드가 이 섀도우 로드야?”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이반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네, 맞을 겁니다.”
이번에도 역시 강풍이 대답했다.
“헉!”
“허헛!!”
“이잉?”
모두가 놀랐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미 섀도우 로드는 검마노의 유명한 전설 중 하나였다.
“자세한 건 나중에 차차 설명해드릴게요. 어쩌다보니 제가 그 섀도우 로드의 2대를 맞게 되었습니다. 후우~ 왜 이렇게 꼬였는지 모르겠는데. 좋아, 팔콘. 진짜 너 섀도우 로드에 가입할 준비가 되어 있는 거야?”
“네, 전 진심입니다.”
실제로 팔콘은 단순히 분위기에 휩쓸려 가입을 희망하는 게 아니었다.
그는 이미 어느 순간부터 이들과 계속 함께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 결과가 이렇게 나타나게 된 것이다.
“좋아, 그럼 팔콘 너까지 정확 6명 모두 길드에 가입하는 걸로 하자.”
“이야~ 드디어 우리도 길드가 생기는 거야?”
이반이 어린애처럼 신나하며 좋아했다.
율은 일일이 모두와 악수를 하며 가입시켜 주었다.
이로써 섀도우 로드의 총 인원은 9명이 되었다.
“길드 마스터로서 부족한 게 많아 부끄럽지만 최대한 우리가 짊어진 이 붉은 십자가에 누가 되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율이 간단하게 인사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잔을 높게 들었다.
“우리 건배나 할까요?”
“오~ 좋지.”
“자자, 모두 잔 들어요!”
율의 건배 제안에 8명의 길드원들이 모두 잔을 높게 들었다.
“섀도우 로드를 위하여!”
“섀도우 로드를 위하여!!”
“섀도우 로드를 위하여!!!”
강하게 세 번을 외치는 그들.
그들은 이렇게 완전한 섀도우 로드의 일원이 되었다.
그들 모두는 건배한 잔에 들어 있던 술과 음료를 단번에 마셨다.
“캬아~ 술 맛 좋다~!”
“아주 시원~ 하네.”
모두가 즐거워하는 그때, 율은 다시 조금 심각한 얘기를 꺼내들었다.
“이제 이렇게 모두가 같은 길드원이 되었으니… 할 일은 해야겠죠.”
“할 일?”
“할 일이 뭔데?”
갑작스러운 율의 말에 모두가 궁금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은혜는 10배로, 원한은 1,000배로. 이게 섀도우 로드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이제부터는 복수를 해야죠.”
사악하게 웃는 율.
그는 단순히 구출만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복수, 그걸 하지 않는다면 마치 화장실을 갔다가 밑을 닦지 않고 나오는 기분일 수밖에 없었다.
혈마대.
섀도우 로드의 첫 복수 대상은 바로 그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