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모여드는 괴짜들
“아! 이게 진짜… 저희와 같이 검마노를 즐기는 유저들의 전투가 맞나요?”
경악스러운 표정으로 소리치는 강민.
그가 마지막에 본 모습은 지금까지 그가 해설해 왔던 수많은 경기들 중에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대단한 장면이었다.
두 사람이 격돌한 후 엄청난 폭발이 일어났고, 그 순간 강풍이 도저히 막을 수 없을 것 같은 카운터 공격을 날렸다.
그런데 율이 그걸 피했다.
어떻게 설명이 불가능한 방법으로… 그리고 이번엔 역으로 율이 카운터 공격을 날렸다.
완벽하게 교차되어 들어간 카운터 공격.
아무리 투신 강풍이라고 해도 이건 절대 못 막을 것 같아 보였다.
하지만 그 순간 또 한 번의 반전이 일어났다.
강풍을 관통하는 율의 공격.
원래대로라면 이 공격 한 번으로 강풍이 쓰러져야 정상이었다.
그러나 강풍은 쓰러지지 않았다.
율의 공격이 그를 꿰뚫는 그 순간, 그의 몸이 마치 그림자처럼 흐려지며 율의 모든 공격을 통과시켰다.
율의 공격이 통과된 후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강풍은 반대로 율의 등에 자신의 창을 찔러 넣었다.
강풍의 승.
이 놀라운 반격과 반격, 그리고 또 반격으로 결국 강풍이 승리했다.
경기 시간으로 따지면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긴장감은 정말 최고였다.
1 : 0
4강전 두 번째 시합, 첫 번째 경기는 그렇게 강풍의 승리로 끝이 났다.
짧고 굵은 인상을 남기고 끝난 첫 번째 경기.
이 경기를 보고 있던 사람들은 두 번째 경기를 기다리며 기대에 가득 찬 표정을 짓고 있었다.
모두가 기다리는 두 번째 경기.
하지만… 아쉽게도 두 번째 경기는 열리지 않았다.
“너무 깔끔하게 포기하는 거 아냐?”
대기실로 찾아온 엘리스가 아쉬운 표정으로 율에게 물었다.
“아니, 딱 좋아. 더 이상 하다가는… 내가 욕심을 낼 거 같아. 파멸왕 슈나이더의 힘이 아닌 선율 아폴론의 힘으로 상대하고 싶은 욕심… 그래서 포기했어. 이미 이번 경기 한번으로 영혼의 힘도 다 차버렸고 더 이상 고생할 필요가 없잖아.”
놀랍게도 단 한 경기… 그것도 별로 길지 않았던 이 한 경기로 25%의 영혼의 힘이 전부 꽉 차버렸다.
100%를 채운 영혼의 힘.
영혼의 힘을 채우자 퀘스트는 자동으로 완료된 후 업데이트되었고, 영혼의 나침반도 제대로 작동하기 시작했다.
“표정은 그게 아닌데?”
엘리스가 정곡을 찌르며 다시 물었다.
“크으… 티나?”
“응, 조금.”
확실히 율 입장에서도 아쉬운 건 있었다.
진짜 제대로 강풍과 싸워보고 싶은 율이었다.
하지만 파멸왕의 힘이 아닌 다른 힘을 사용했을 경우 너무 과도한 관심을 받을 수도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쏟아지는 관심들도 부담스러워 죽을 것 같던 율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휴~ 몰라. 이미 기권 신청이 다 받아들여진 마당에 미련 따위는 버리는 게 더 좋겠지.”
고개를 흔들며 모든 걸 털어버리는 율.
“어쨌든 이제 투기장은 여기서 끝내야겠네. 아! 엘리스, 넌 결승에서 꼭 이겨라. 너라면… 충분히 가능해!”
“나도 기권할까?”
엘리스는 진심으로 율에게 물었다.
“아니, 싸워야지. 투신 강풍… 분명 싸워볼 만한 상대더라.”
그녀에게 기대를 거는 율.
자신은 포기했지만 엘리스는 그렇지 않았으면 하는 게 그의 마음이었다.
“그래? 알았어.”
너무 간단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는 엘리스.
이로써 그녀는 전력을 다해 결승전에 임하기로 마음먹을 수 있었다.
결승전은 앞으로 9일(게임시간) 후 열리기로 되어 있었다.
율은 그때까지 엘리스와 실전 대련을 해주며 자신이 느낀 강풍에 대한 것들을 전부 얘기해줄 생각이었다.
* * *
“몇 개월이나 여기 있었던 거지?”
성문을 나서던 엘리스가 문득 고개를 갸웃거리며 율에게 물었다.
“음, 한 6개월(게임시간) 정도? 그러고 보니 생각보다 오래 있었네.”
혈천 투기장에서의 6개월은 두 사람에게 많은 것을 안겨주었다.
일단 율과 엘리스는 검마노를 즐기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되고 싶어 하는 네임드 유저가 되었다.
흔히 네임드 유저란 불특정 다수의 검마노 유저 또는 팬들이 이름만 듣고도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야 진짜 인정을 받았는데… 그런 면에서 율과 엘리스는 이번에 확실히 자신들의 이름을 여러 사람에게 각인시켰다.
그리고 상당한 액수의 골드도 얻었다.
투기장 리그에서의 연승.
그리고 혈천대전에서의 선전.
이 두 가지 사실은 그들에게 자연스럽게 많은 양의 골드를 벌 수 있게 해주었다.
충분히 많은 것을 얻은 두 사람.
그들은 미련 없이 혈천 투기장을 떠나기로 결정하고 길을 나섰다.
다른 이들이었다면 좀 더 투기장에 남아 계속 이름을 떨치며 골드를 벌려고 했겠지만, 그들은 전혀 그럴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어디로 갈 건데?”
“일단은… 얼음 대륙. 그곳에 소울시티를 찾을 수 있는 단서가 있을 거 같아.”
엘리스의 물음에 율이 대답했다.
고개를 끄덕이는 엘리스.
당연히 엘리스는 율과 함께 얼음 대륙으로 가려는 중이었다.
율 역시도 엘리스가 함께 가는 것에 대해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제는 둘이 함께하는 모습이 따로 하는 모습보다 더 익숙해졌다.
“가자.”
준비는 대충 끝냈다.
투기장에는 알리지 않았다. 괜히 알렸다간 여기저기에서 자신들을 찾아올 수도 있었기 때문에 조용히 떠나는 쪽을 선택했다.
늦은 밤.
그들은 인적이 가장 드문 성문을 지나 조용히 북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하지만 그들은 오래가지 못하고 자리에서 멈춰서야 했다.
그들을 멈추게 한 원인… 그것은 바로 그들 앞에 나타난 한 남자 때문이었다.
“역시~ 제 예상이 딱 맞았군요!”
어둠을 뚫고 나타난 붉은색 머리카락을 지닌 남자.
바로 투신 강풍이었다.
“이렇게 떠나는 건 반칙이죠.”
강풍이 고개를 흔들며 얘기했다.
“후우~ 끈질기네.”
엘리스도 고개를 흔들며 중얼거렸다.
“흐음, 도대체 왜 그러는 거죠? 우승은 당신이 했잖아요.”
율은 귀찮다는 듯이 얘기했다.
그렇다.
이번 혈천대전의 우승은 강풍이 차지했다.
세트 스코어 5 : 4.
아슬아슬한 차이로 우승한 강풍.
하지만 그는 우승을 한 후에도 자꾸 율과 엘리스에게 개인적은 대련을 신청했다.
그것도 그냥 대련이 아닌 필드에서 서로 모든 걸 걸고 하는 실전 대련.
말이 대련이지 그냥 PvP를 하자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우승은 제가 했지만, 이런 찜찜한 기분은 처음입니다. 제가 잘못 본 게 아니라면… 두 분은 분명 전력을 다하지 않았습니다. 제 입장에서 이건 정말 굴욕이라고요!”
강풍이 발악하듯 외쳤다.
확실히 그는 율과 엘리스가 뭔가를 숨기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율과 엘리스 입장에선 그렇다고 이제 와서 모든 비밀을 얘기하고 강풍과 싸우는 것도 우스웠다.
“휴~ 몰라요. 저희는 그런 실전 대련은 할 생각이 없습니다.”
율은 손을 내저으며 강풍을 무시하고 계속 앞으로 걸어 나갔다.
“비겁하게 이런 법이 어디 있습니까!”
억울한 표정으로 소리치는 강풍.
율이 그런 강풍을 슬쩍 돌아보곤 인심 쓰듯 한마디 해주었다.
“그렇게 억울하면 계속 따라다녀 봐요. 혹시 나중에 시간나면 대련해 줄지도 모르죠.”
이건 그저 놀리는 말이었다.
어차피 강풍은 혈천 투기장을 떠나지 않을 게 분명했기 때문에 그동안 귀찮게 한 게 생각나 놀리듯 말한 것이었다.
“…….”
조용히 떠나는 율과 엘리스의 등을 바라보던 강풍.
그로서는 너무 아쉬웠다.
정말 처음 만난 호적수들이었는데… 그것도 한 명이 아니라 무려 두 명이었는데, 이렇게 쉽게 떠나게 놔두는 건 절대 용납할 수가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억지로 그들을 이곳에 잡아둘 수는 없었다.
치열한 투쟁이야말로 삶의 원동력이었던 강풍이다.
더 이상 혈천 투기장은 그에게 치열한 투쟁을 경험하게 해주지 못했다.
그래서일까? 그는 결국 결정을 내렸다.
광견이 여기서 포기한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한번 물었으니… 끝까지 놓지 말아야 했다.
“…떠나는 걸 못 막는다면… 따라가면 된다!”
혈천 투기장과의 작별.
오랜 시간 혈천 투기장에서 투쟁을 즐겼지만 이젠 다른 세상으로 떠날 때도 된 것 같았다.
“같이 가요! 따라오라고 했으니까… 같이 가도 되는 거죠!”
강풍이 큰소리로 외쳤다.
순간 율의 표정이 굳어졌다.
설마 진짜 따라올 줄은 몰랐다.
투기장의 지존이 투기장을 차버리고 자신들을 따라오다니… 이건 정말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었다.
빠르게 율과 엘리스 옆에 따라붙는 강풍.
그가 기분 좋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나이는 22세, 이름은 강풍. 잘 부탁합니다.”
“…….”
“…….”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강풍을 바라보는 율과 엘리스.
확실히 강풍의 합류는 충격적이었다.
* * *
둘에서 셋이 된 파티.
율은 자신이 직접 한 말도 있으니 어쩔 수 없이 강풍을 일행으로 받아주었다.
어차피 시간이 좀 지나도 대련을 하기 힘들다는 걸 알게 되면 떠날 것이라 생각했기에 별로 크게 신경 쓰지는 않았다.
그렇게 율과 엘리스, 그리고 강풍은 얼음 대륙을 향해 이동했다.
한창 유저들이 영역을 넓히고 있는 얼음 대륙은 동대륙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율 일행은 얼음 대륙으로의 길을 서두르지 않았다.
빨리 가려고 했다면 조금 큰 마을마다 존재하는 이동 포탈을 이용하거나, 요즘 한창 빠른 이동 수단으로 이름을 높이고 있는 개인 운송 서비스를 이용했겠지만 그들은 급할 게 없었다.
어차피 게임을 즐기는 입장이었던 그들은 천천히 여행을 하며 얼음 대륙을 향해 이동했다.
그렇게 한 달(게임시간)을 이동한 끝에 그들은 드디어 얼음 대륙에 발을 디뎠다.
율의 예상과 달리 강풍은 여전히 율과 함께했다.
재미있는 건 강풍이 더 이상 대련의 ‘대’자도 꺼내지 않는 다는 사실이었다.
이미 동갑인 걸 확인하고 말까지 놓은 세 사람은 상당히 친해져 있었다.
강풍은 사실 검마노의 모든 재미가 투기장에만 있다고 믿었던 이였기에 게임을 시작하고부터 지금까지 모든 삶을 투기장에 올인(All In)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투기장 밖에서 느끼는 재미들을 잘 모르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한 달 동안 여행을 하며 투기장 밖의 세상에도 상당히 많은 재미가 존재한다는 걸 알게 되자, 이 여행 자체를 즐기기 시작했다.
특히 친구, 동료라는 걸 가져본 적이 없었던 강풍에게 율과 엘리스는 낯설지만 아주 기분 좋은 존재들이었다.
늘 최고의 자리에서 남들과 경쟁만 했던 그에게 동료라는 건 새로운 활력제가 되었다.
예전에 율이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껍질을 깨고 나왔을 때 느꼈던 기분을 강풍도 느끼고 있었다.
어쨌든 그렇게 얼음 대륙에 도착한 그들은 일단 얼음 대륙에서 가장 큰 도시로 이름난 코륨으로 향했다.
중간중간 보급을 했다지만 그래도 중요한 소모성 아이템들을 많이 사용한 상태였기에 코륨에 들려 제대로 보급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최종 목적지는 얼음 대륙에서도 아직 개발되지 않은 오지들 중에서 가장 극악의 오지로 손꼽히는 곳이었기에 미리 준비를 철저히 할 필요가 있었다.
“코륨도 많이 발전했네.”
섀도우 로드의 마지막 결전 때문에 얼음 대륙을 찾았을 때 잠깐 들렀던 적이 있던 율은 전보다 훨씬 복잡하고 커진 코륨을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둘 다 여긴 처음이지?”
율이 엘리스와 강풍을 향해 물었다.
끄덕끄덕.
동시에 고개를 끄덕이는 두 사람.
그들은 검마노를 시작하고 동대륙을 벗어난 적이 없는 이들이었다.
사실 율도 아직 검은 대륙이나 붉은 대륙은 가본 적이 없었지만 그래도 엘리스와 강풍보다는 견문이 넓은 편이었다.
물론 그래봤자 유저들의 평균보다 떨어지는 견문이었지만 이 셋 중에는 최고라는 게 중요했다.
“일단 경매장부터 가서 아이템들도 처분하고 장비도 새로 구해보자.”
경매장의 위치는 율이 알고 있었다.
그는 엘리스와 강풍을 데리고 코륨의 메인 경매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성문에서 약 10분 거리에 있던 경매장에는 많은 유저들이 북적거렸다.
검마노의 경매장은 전 대륙이 통합되어 운영되었다.
대신 거리가 먼 곳에서 올린 아이템을 살 때는 거리에 비래해 약간의 물류비를 추가로 내게 되어 있었다.
수수료도 10%였으니 결코 경매장이 싼 물건을 파는 장소는 아니었다.
진짜 물건을 싸게 사려면 마을 곳곳에 열려 있는 개인 상점을 이용해야 했다.
간단한 좌판부터 커다란 종합상점까지 개인이 열 수 있는 개인 상점은 여러 종류가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대부분의 유저들은 경매장을 이용했다.
일단 경매장은 어지간하면 원하는 물건이 전부 있었고, 잘만 찾으면 개인 상점에서 구입하는 것만큼이나 싼 물건들을 구입할 수 있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시간이 날 때마다 경매장을 찾아와 물건들을 검색해 보곤 했다.
딱~!
손가락을 튕기며 경매장 메뉴를 활성화시킨 율도 일단 기본적인 검색 옵션을 설정하고 자신이 원하는 물건을 찾기 시작했다.
그동안 만 레벨인 250렙을 찍고 제대로 아이템을 구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았던 율이었기 때문에 율의 아이템은 대부분이 매직이나 레어 등급이었다.
이번 기회에 율은 투기장에서 번 돈과 그동안 모았던 돈들을 합쳐서 아이템을 제대로 세팅해 볼 생각이었다.
“일단 방어구는 세트 아이템 위주로 살펴보고… 장신구는 범용성이 좋은 걸 구해봐야겠네.”
마음 같아서는 여러 종류의 모든 아이템을 맞추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그나마 이미 투기장에서 활동하기 위에 파멸왕 슈나이더의 영혼을 강림시켰을 때 입을 레어 등급의 경갑옷을 맞춰놨다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이번에는 평상시에 입을 가죽갑옷 종류의 방어구와 마법사 계열의 영혼을 강림시켰을 때 입을 만한 천 계열 방어구를 맞춰볼 생각이었다.
물론 두 가지를 맞춰야 했기 때문에 최고급 아이템들을 구입하는 건 불가능했다.
최고급 아이템들은 그 하나하나 가격이 어마어마했기 때문에 율은 대략 중상에서 상급 정도의 아이템들을 구해볼 생각이었다.
엘리스와 강풍 역시 율 옆에서 쓸 만한 물건이 있는지 살펴보는 중이었다.
그들은 율과 다르게 한 종류의 아이템들만 찾으면 되었기에 좀 더 쉽고 빠르게 고를 수 있었다.
50분이 넘게 경매장 메뉴와 씨름을 한 율은 결국 레어 세트 아이템인 푸른 숲의 가죽갑옷 세트와 마법사들의 국민 교복이라고도 불리는 매직 세트 아이템인 마나로브 세트를 구입했다.
그리고 오로지 이능 능력치만 올려주는 옵션만 붙어서 더욱 마음에 든 혼의 목걸이(레어)와 모든 속성의 저항력을 올려주는 자수정 반지를 구입했다.
또 경매장에서 파는 몇 가지 특수한 소모성 아이템들도 골고루 넉넉하게 구입했다.
이미 가방은 1/10의 최고급 가방 한 개와 1/5의 고급 가방두 개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상당량의 아이템을 넣어도 큰 부담이 없었다.
현자의 허리띠로 인해 가방 슬롯이 하나 늘어난 건 이럴 때 정말 큰 도움이 되었다.
대충 원하는 아이템들을 구입한 율은 마지막으로 온몸을 가릴 수 있는 치장용 후드망토를 하나 구입했다.
검은색 후드망토는 특별한 옵션이 있는 것이 아니었지만 먼지바람을 막아주거나 약간의 보온 효과를 지닌 물건이었다.
율이 이걸 구입한 이유는 자꾸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보고 아는 척을 했기 때문이다.
그나마 엘리스는 현자의 로브로 완벽하게 모습을 감췄고, 강풍은 오래전부터 사용해 오던 붉은색 후드망토로 자신을 가리고 다녔기 때문에 꼭 율만 사람들에게 노출되었다.
사실 율은 진즉에 이 후드망토를 사고 싶었지만 의외로 후드망토가 희귀한 아이템인지라(재봉술 장인 중에서도 레서피를 배운 몇몇 사람만 제작할 수 있음) 간신히 코륨에서 하나를 구할 수 있었다.
가격도 상당히 비쌌다.
결국 율은 이 검은색 후드망토까지 구입하며 가지고 있던 골드를 거의 다 써버렸다.
남은 골드는 약 4천 골드.
원래 4만 골드 정도 가지고 있던 걸 생각하면 정말 대단한 과소비였다.
이 4천 골드도 각종 소모성 아이템을 전부 구입하고 나면 사라질 것이었기 때문에 결국 율은 이제 거지가 된 거나 다름없었다.
그래도 율은 별로 아까워하지 않았다.
돈을 쓸 땐 과감히 쓸 줄 알아야 한다는 생각을 지닌 율이었기에 망설임 없이 골드를 전부 써버렸다.
푸른 숲의 가죽갑옷 세트 같은 경우는 이능 능력치와 민첩 능력치, 그리고 체력까지 딱 좋은 옵션만 골고루 붙어 있는 아이템이어서 음유시인이 아닌 도적 계열, 헌터 계열 등등 많은 유저들이 눈에 불을 켜고 모으는 세트 아이템이라 골드 출혈이 더 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율은 아이템을 장만했다는 것에 의의를 두기로 했다.
율은 새로 산 아이템을 전부 착용하고 기존의 아이템들은 모두 경매장에 올려놓았다.
큰돈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물약 값이라도 나올 수 있었기 때문에 파는 게 좋았다.
어쨌든 이렇게 준비를 끝낸 율은 이미 20분 전에 모든 업무를 끝내고 나무 그늘에서 쉬고 있던 엘리스와 강풍에게 다가갔다.
“자, 다음은 잡화점으로 가자.”
필요한 것들을 맞췄으니 이제 남은 건 잡화점에서 구할 수 있는 각종 소모성 아이템들뿐이었다.
대략 몇 시간 동안 여러 잡화점과 개인 상점들을 돌아다닌 것으로 최종 준비를 모두 끝낸 그들은 근처 주점에 들러 가볍게 맥주 한잔을 했다.
가상현실에서 먹는 맥주는 오히려 현실에서 먹는 맥주보다 맛이 좋기로 소문이 났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즐겨 찾는 먹을거리였다.
“근데 진짜 어디로 가는 거야?”
강풍이 시원한 맥주를 한 번에 들이켠 후 율에게 물었다.
“알면 가기 싫을지도 모르는데.”
율은 괜히 웃으면서 강풍을 슬쩍 떠봤다.
“이거 왜 이래~ 내가 아직도 떠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거야? 말했잖아. 너랑 엘리스랑 다니는 게 투기장에서 노는 것보다 훨씬 재미있다고! 절대 안 떠날 테니까 말해봐.”
강풍은 미리 시켜놓은 또 한 잔의 맥주에 손을 뻗으며 가슴을 탕탕 쳤다.
“흐음, 뭐… 이제 출발해야 하니까 말해줄게. 아마 들어봤을 거야. 거인의 흉터라고…….”
“아~ 거인의 흉… 풉! 거인의 흉터!”
강풍은 입에 넣었던 맥주를 뱉어낼 정도로 깜짝 놀랐다.
그 와중에도 엘리스는 죽어라 맥주만 계속 마시고 있었다. 셋 중에 가장 검마노의 기본 지식이 딸리는 그녀인지라 거인의 흉터가 어떤 곳인지도 당연히 몰랐던 것이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엘리스는 그곳이 어디든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사실 원래대로라면 강풍처럼 놀라는 게 맞았다.
거인의 흉터.
그곳은 얼음 대륙에서도 최북단에 위치한 거대한 협곡이었다.
아주 먼 옛날, 거인들의 싸움으로 갈라져 버린 땅이라는 전설이 있었는데… 어쨌든 그곳은 대단히 위험한 지역이었다.
그냥 위험한 게 아니라 대단히!
일단 개척 자체가 안 된 곳이라 마을 같은 건 당연히 없었다.
근처에도 없었다.
개척 시도가 몇 번 있긴 했지만 개척대가 모두 포기했다. 이유는 너무나 추운 날씨와 그곳에 등장하는 강력한 몬스터들 때문이었다.
몬스터들이야 어떻게 힘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쳐도 날씨는 도저히 견디기가 힘들었다.
그냥 며칠 모험을 하는 것이라면 참고 견디겠지만, 개척 마을을 만들고 거기서 생활하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었다.
특히 개척 마을의 필수 조건인 NPC의 이주가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에(NPC들은 너무 척박한 환경으론 이주를 거부한다.) 결국 사람들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으로 거인의 협곡 깊숙한 곳에는 아이스 웜(Ice Warm)이라는 강력한 보스 몬스터가 살고 있었다.
이놈은 가끔 협곡 입구까지도 나오곤 했는데 재수가 없어 놈과 만나기라도 한다면 그냥 죽었다고 생각하는 게 좋을 정도였다.
“거기 엄청 빡세다던데.”
“괜찮아. 그래서 준비를 철저히 했잖아.”
율은 미리 엘리스와 강풍에게 방한복에 간이 난로까지 준비하라고 말해 놨었다.
“…이거 가지고 될까?”
“안 되면 되게 해야지.”
걱정하는 강풍과 괜찮다는 율. 그리고 아무 생각이 없는 엘리스.
이 대책 없는 세 사람은 내일 바로 거인의 흉터를 향해 떠나기로 결정했다.
본격적인 모험의 시작.
율은 스스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는 이미 훌륭한 동료 둘을 얻은 상태였다.
과거 가츠가 떠나며 그에게 남겼던 말.
‘네가 만드는 너만의 섀도우 로드를 세상에 보여줘라!’
율은 조금씩 그 말에 근접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