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 청백산에서 만난 인연 (27/95)

13. 청백산에서 만난 인연

준비를 끝낸 율은 곧장 청백산으로 향했다.

청백산을 가기 위해선 일단 푸른 산맥을 넘어야 했다.

청백산은 상당히 난이도가 높은 사냥터였지만 푸른 산맥 전역이 다 비슷비슷한 건 사실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250레벨의 한계 레벨이건만, 모두 7명씩 풀파티를 만들어 공략하는 지역이었다.

하지만 율은 당당하게 혼자 공략했다.

그는 스스로의 능력을 믿었다.

가츠가 섀도우 로드를 그에게 맡겼을 때부터 스스로 홀로 서는 연습을 계속해왔던 율.

왜 가츠가 자신을 섀도우 로드의 2대 길드마스터로 지명했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일단 스스로 맡기로 결정한 순간부터 그 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율이었다.

물론 스스로 부족하다고 느끼는 부분이 많았지만 적어도 먼저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기에 그는 절대 이런 곳에서 약한 모습을 보여줄 생각이 없었다.

……

……

강철의 검을 들고 앞으로! 앞으로!

내 앞을 가로막는 모든 존재에게 파멸의 힘을 보여주리라!

츠리릿!

한 곡의 서사시가 끝나며 율의 몸에 굉장히 난폭한 한 영혼이 스며들었다.

아직 율은 영웅들의 서사시 숙련도가 그리 높지 못해 30명 정도의 영웅만 소환할 수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상급에 속하는 영웅인 파멸왕 슈나이더의 영혼이 율의 노래와 함께 소환되었다.

그는 아주 오래전 대륙에서 가장 포악하면서 가장 강력했던 왕이었다.

왕이면서 언제나 선봉에 서서 군을 이끌었던 그의 무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특히, 양손검 두 자루를 양손에 들고 펼치는 그의 파멸쌍대검술은 막을 수 있는 이가 없을 정도라고 정평이 났었다.

전설에 따르면 최상급 소드 마스터로서 거의 그랜드 마스터의 무력에 근접한 최고의 검사였다고 한다.

율은 요즘 종종 이 슈나이더의 영혼을 자신의 몸에 강림시켰다.

아직은 그 영혼의 파괴적인 힘이 익숙지 않았지만 그는 꾸준히 연습했다.

그가 슈나이더의 영혼을 선택한 이유는 단 하나였다.

가츠가 남긴 두 개의 검과 도.

이 양손검과 양손도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였다.

물론 영웅들의 서사시는 그냥 무작정 영혼을 강림시킨다고 끝나는 기술이 아니었다.

가끔… 아주 가끔… 가츠처럼 상식을 무시하고 처음부터 완벽하게 영혼의 힘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괴물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영혼의 힘의 30% 정도만 발휘했다.

그나마 율은 감각이 좋은 편이라 처음부터 상당히 적응이 빨랐지만, 가츠의 그 괴물 같은 적응력은 따라가지 못했다.

어쨌든 율은 이렇게 계속 슈나이더의 영혼을 몸에 받아들여 좀 더 확실하게 적응시킨 후 이 영혼을 자신의 주력 영혼으로 사용할 계획이었다.

진정한 영웅들의 서사시가 생겨나며 주로 다른 이들에게 힘을 나누어 주는 쪽으로 플레이했던 율이었지만 무조건 다른 이들에게 의존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물론 자신의 힘을 보여주는 방법이 영웅들의 서사시밖에 없는 건 아니었지만, 일단 솔로 플레이를 할 때는 확실히 영웅들의 서사시가 효율이 가장 좋았다.

스릉. 챙!

슈나이더의 영혼을 받아들인 율은 곧장 화룡과 빙룡을 뽑아들었다.

둘이 합쳐 빙화쌍룡이라 불리는 유니크 세트 아이템.

말이 유니크이지 옵션만 보면 거의 엘리트급으로 취급해도 될 정도로 굉장히 좋은 놈들이었다.

슈나이더의 파멸쌍대검술의 기본은 공격, 그리고 또 공격.

수비적인 기술은 단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같이 죽자’라는 마인드로 펼쳐야 하는 기술이 있을 뿐이었다.

크엉!

때마침 달려드는 키메라 한 마리.

율이 몸을 회전시키며 두 도와 검을 수평으로 휘둘렀다.

파파팟!

슈나이더 회전 회오리 베기.

물론 원래대로라면 오러가 강력한 와기(渦氣)를 만들어 내며, 심할 경우 오러의 회오리까지 만들어져야 했지만 율은 아직 화후가 부족해 그저 두 줄의 상처를 만드는 게 전부였다.

‘그리고 차지!’

대신 율은 연속 콤보로 키메라를 제압할 생각이었다.

회전 베기에 이어 곧장 대도와 대검을 서로 교차해 들고 곧장 키메라에게 달려들며 강력한 몸통박치기를 시전했다.

우웅! 콰득!

콰과광!

간단한 콤보 공격이었지만 키메라에겐 아주 훌륭하게 들어갔다.

그렇게 가까이에 있던 한 마리의 키메라를 해치운 율은 곧장 뒤로 점프했다.

뒤에서 율을 노리던 또 한 마리의 키메라.

율은 우아하게(?) 뒤로 몸을 한 바퀴 돌리며 그 키메라의 어깨에 대도와 대검을 꽂았다.

퍼퍽! 푸욱!

크어어어엉!

이건 뭐 특별한 스킬이 아니었다. 그저 율의 센스 좋은 동작일 뿐이었다.

요즘 들어 율은 자신이 의외로 싸움에 재능이 있다는 걸 깨달아가고 있었다.

특히, 의외로 대도와 대검이 자신의 손에 잘 맞는다는 게 신기했다.

노래 말고도 자신이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면서 또 한편으론 즐거운 율.

그렇기에 그는 이 살벌한 상황에서도 기분 좋게 웃을 수 있었다.

꽝!

율이 양어깨에 대도와 대검을 꽂았던 키메라의 등을 오른발로 강하게 차며 자연스럽게 뒤로 물러났다.

콰광! 주르륵!

덕분에 양어깨에 큰 상처를 입은 키메라가 앞으로 쓰러져 나뒹굴었지만 아직 죽지는 않은 것 같았다.

‘4마리?’

무려 240~250레벨대의 키메라 4마리가 아직 율 주변에 남아 있었다.

그나마 6마리였는데 두 마리는 이미 율이 해치운 상태였다.

‘다른 놈들이 몰리기 전에 빨리 끝장을 보자!’

이곳은 청백산.

그 중에서도 키메라가 가장 많이 몰리기로 소문난 정상 부근이었다.

율은 청백산 공략을 하며 미로와 같은 동굴을 통한 공략은 포기했다.

어차피 자신은 전문 탐험가나 모험가가 아니었기 때문에 절대 그 동굴에서 길을 못 찾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어쨌든 그렇게 해서 선택된 일반적인 길을 이용한 정상 접근은 시간이 지나고 정상에 가까워질수록 힘겨워졌다.

남들은 단 한 마리를 상대하는 것도 힘들어하는 키메라를 최소 3마리 이상씩 상대하며 뚫고 올라가길 일주일.

율은 점점 더 많아지는 키메라들을 보며 진짜 정상이 얼마 안 남았다는 걸 본능적으로 느꼈다.

하지만 아무리 율이 막강한 힘을 지니고 있다고 해도 미친 듯이 늘어나는 키메라를 상대하는 건 매우 지치는 일이었다.

지금만 해도 그토록 조심한다고 했는데, 결국 6마리의 키메라와 동시에 마주치고 말았다.

이쯤 되자 진짜 팀을 짜지 않고 온 게 후회될 정도였다.

그러나 그렇다고 여기서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일단 할 수 있을 만큼의 노력은 다해보고… 그래도 안 되면 그건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합!”

가볍게 숨을 들이마신 율은 곧장 4마리의 키메라를 향해 돌진했다.

그와 함께 오른손에 들고 있던 푸른색 대검 빙룡을 좌측에 서 있던 키메라를 행해 강하게 던졌다.

휘리릭! 퍼퍽!

크아앙!

키메라는 갑자기 날아온 빙룡을 막지 못해 복부에 그대로 꽂히고 말았다.

물론 이 정도의 공격에 죽을 키메라가 아니었다.

키메라의 생명력은 상당히 끈질겨 쉽게 죽일 수 없었다.

율 역시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자신이 던진 빙룡을 따라 전속력으로 그 키메라의 눈앞까지 달려 나간 후였다.

휘익!

오른발을 들어 박혀 있던 빙룡의 손잡이를 강하게 밀어 차는 율.

퍼퍼퍼퍽!

빙룡은 더욱 깊숙이 박혔고, 키메라는 고통에 몸부림치며 소리쳤다.

크어어엉!

고통 때문일까 순간 키메라가 취하고 있던 방어 자세가 무너졌고, 율은 그때를 놓치지 않고 왼손에 들고 있던 화룡을 이용해 키메라의 머리를 날려버렸다.

쾅!

털썩.

겨우 10초도 안 되는 시간에 또 한 마리의 키메라가 죽었다.

이번에도 역시 율은 스킬이 아닌 자신의 움직임과 센스로 키메라를 상대했다.

율처럼 이러한 전투를 즐기는 이들을 리얼 유저라고 불렀다.

그리고 자신이 가진 스킬을 의존해 싸우는 이들을 스킬 유저라고 불렀다.

물론 리얼 유저가 무조건 스킬 유저보다 강한 것은 아니었다.

단지 리얼 유저는 스킬 유저보다 희귀했고, 진짜 실력 있는 리얼 유저들은 종종 자신이 가진 능력의 한계를 뛰어넘었다.

사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율은 자신이 스킬 유저라고 생각했었다.

스킬을 얻고 그 스킬을 통해 전투를 치르고… 정말 전형적인 스킬 유저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러했던 율이 바뀐 건 가츠에게 섀도우 로드를 이어받으면서부터였다.

그는 그 당시 스스로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해보았다.

그리고 자신이 무엇을 잘할 수 있는지도 생각해보았다.

그 과정에서 그는 자신이 애초부터 스킬 유저가 아니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최초 스킬 따위에 의존하지 않고 자신만의 노래를 불렀을 때… 그때 이미 그는 스킬 유저보단 리얼 유저에 가까운 이로 결정되어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그는 그걸 잊고 보통의 평범한 유저들처럼 스킬 유저가 되어 갔었지만 여전히 본질은 바뀌지 않았다.

물론 율은 스스로 리얼 유저와 스킬 유저의 구분을 지을 생각이 없었다.

리얼이면 어떻고 스킬이면 어떤가?

결국 자신의 마음이 가는 대로… 그 상황에 가장 맞는 대로… 그렇게 알맞게 살아가면 그만이었다.

대도로 키메라의 머리를 날려버린 율은 곧장 다시 한 번 몸을 회전시키며 대도를 크게 휘둘렀다.

위이이잉!

그러자 대도가 지나간 궤적에서 반달 모양의 도기가 앞으로 쏟아져 나왔다.

파멸대쌍검술의 기술 중 하나인 파멸의 파도.

물론 이번에도 역시 화후 부족으로 파멸의 파도라고 부르긴 좀 많이 부족한 도기가 뿜어져 나왔지만, 썩어도 준치라는 말처럼 쉽게 무시할 수 있는 기운이 아니었다.

리얼로 싸우다가 갑자기 또 스킬을 이용해 싸우길 주저하지 않는 율.

이게 율의 장점이었다.

보통 유저들은 리얼이면 리얼, 스킬이면 스킬.

이렇게 한쪽으로 굳어진 전투를 펼치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렇게 되면 분명 한계가 존재할 수밖에 없었다.

진짜로 강해지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어떠한 틀에 묶어둬서는 안 되는 법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율은 다양한 경험을 하며 운 좋게 틀이란 것에서 쉽게 벗어날 수 있었다.

이것 역시 가츠가 미리 내다본 것일지 모르지만… 어쨌든 율은 가츠가 그랬듯이 리얼과 스킬의 구분을 뛰어넘는 유저가 되었다.

‘간다!’

파멸의 파도를 날리고 바로 쓰러져 있던 키메라에게서 빙룡까지 뽑아든 후 자세를 잡는 율.

남은 키메라는 3마리.

그 중 한 마리는 거의 빈사 상태였으니 실제로 남은 건 두 마리였다.

두 마리라면 정말 별것 아니었다.

후딱 해치우고 이곳을 빠르게 벗어나는 게 목적이었던 율은 다시 두 마리의 키메라를 향해 몸을 던졌다.

선율 아폴론.

섀도우 로드의 2대 마스터이자 그 누구도 가지지 못한 숨겨진 직업, 영혼의 음유시인을 소유한 자.

그의 발걸음엔 거침이 없었다.

그리고 자신감이 넘쳤다.

무엇이 그를 이토록 변하게 한 것일까?

등 뒤의 망토에 희미하게 새겨져 있는 붉은 십자가?

가슴속에 품고 있는 작은 길드 스톤?

손에 들고 있는 두 자루의 검과 도?

가방에 들어 있는 묵현?

모두 아니었다.

진정 그를 변하게 한 건 그 자신이었다.

스스로 껍질을 벗고 창공을 향해 날갯짓을 시작하는 율. 그는 그렇게 시나브로 진정한 남자가 되어 갔다.

* * *

청백산은 과연 대단히 높았다.

사실 끊임없이 등장하는 몬스터들만큼이나 율을 괴롭히는 건 청백산의 엄청난 높이와 그 험준한 지형이었다.

얼마 전 율은 정상에 가까워졌을 것이라 생각하고 꿋꿋이 올라갔지만, 그 뒤로 3일이 지난 아직도 정상에 도착하지 못했다.

무려 열흘 동안 청백산을 올랐지만 아직도 정상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율은 이제야 왜 청백산을 공략한 모험가가 별로 없는지 알 수 있었다.

일단 청백산은 지겨웠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키메라들의 공격과 험준한 지형은 사람을 지치게 했다.

특히, 정상에 대단한 보상이 진짜 있다는 확신도 없는 상황에서 신빙성 없는 소문만 믿고 그 지겹고 위험한 여정을 헤치고 정상에 오르기엔 무리가 있었다.

한마디로 노력에 비해 보상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뜻이었다.

만약 진짜 무슨 숨겨진 던전이 있다고 확인이라도 됐으면 모를까… 겨우 수상한 NPC를 하나 봤다는 소문 때문에 그 고생을 할 유저들은 없었다.

결국 그렇게 청백산은 버림받은 사냥터가 되었다.

혹시라도 조금 쉬운 루트가 발견되거나 전체적인 유저들의 수준이 올라가 좀 더 쉽게 오를 수 있게 된다면 모를까… 현재로써는 사람들이 별로 관심을 갖지 않을 곳이 될 수밖에 없는 청백산이었다.

‘결국 어떻게 했어도 혼자 왔을 것이라는 뜻이지.’

이런 곳에 같이 올 동료를 모은다?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이들을 불러 모은다면 모를까… 그저 공략을 위한 파티를 구성하는 건 무리가 있어 보였다.

누가 위험하고 귀찮기만 한 이 사냥터에 오려 하겠는가?

율이 거짓말이라도 한다면 가능성이 있겠지만 당연히 그럴 율이 아니었다.

“쳇… 방법이 없군.”

율은 결국 도움이나 파티 따위는 모두 포기했다.

그는 혼자 힘만으로 끝까지 해쳐나갈 생각이었다.

어차피 벌써 열흘간 그렇게 해왔으니 앞으로도 크게 문제될 건 없었다.

“세상에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는 거잖아.”

어차피 홀로 태어나 홀로 가는 세상.

그깟 동료가 없다고 포기할 율이 아니었다.

또 4일이 흘렀다.

총 14일(게임시간).

생각보다 너무나 길어지는 여정에 율은 살짝 지쳐 있었지만 그래도 끝까지 긴장의 끈을 유지했다.

당연한 것이지만 키메라는 전보다 훨씬 많이 튀어나왔다.

그냥 마치 쏟아 붓는 느낌이 강했다.

어쩌면 키메라 때문에 더 시간이 지체된 것일지도 몰랐다. 하루에 1km를 전진하는 것도 힘겨울 정도로 키메라가 너무 많이 몰려나왔다.

하지만 율은 계속 버티며 조금씩이라도 앞으로 나아갔다.

힘은 들었지만 적어도 아예 소득이 없는 건 아니었다.

빠른 레벨 업.

율을 벌써 230대 레벨에 들어섰다.

물론 레벨을 빨리 올린다고 당장 좋을 건 하나도 없었지만 일단 낮은 것보단 당연히 높은 게 좋았다.

율은 힘겨운 와중에 레벨이라도 빨리 오른다는 점을 위안으로 삼고 계속 버텨냈다.

그렇게 14일이 흐르고 거기서 또 4일이 지나 청백산에 오른 지 18일(게임시간)이 되었을 때… 드디어 율은 청백산의 정상을 눈으로 직접 볼 수 있게 되었다.

갑자기 완만해지는 경사와 함께 모습을 드러낸 분지 모양의 정상.

정상에 도달한 건 정말 기쁜 일이었다.

하지만 율은 기쁨을 느낄 틈 같은 것도 없었다.

왜냐하면 율을 향해 20마리는 족히 되어 보이는 키메라들이 떼를 이루어 덤벼들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분명 위기였다.

20마리가 동시에 덤볐을 땐 율은 자칫 기껏 여기까지 올라와서 허무하게 끝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런 위기의 순간에 기적이 일어났다.

20마리의 키메라가 너무나 위협적이라 아주 잠깐 놓친 하나의 그림자.

놀랍게도… 20마리의 키메라 앞에는 한 사람이 서 있었다.

딱 봐도 ‘나 유저요’라고 써 붙인 것 같은 사람.

방어력이 최강이라는 풀 플레이트 메일로 전신을 두르고 맨손으로 20마리의 키메라와 맞서고 있던 그를 보는 순간, 하늘이 자신을 돕고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 유저가 누구건 율은 일단 그를 돕기로 마음먹었다.

어차피 그나 율이나 20마리의 키메라를 홀로 상대할 수는 없을 게 분명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 순간 울려 퍼지는 한 줄기 노래 소리.

율은 일단 가벼운 노래로 그에게 버프를 안겨주며 자신이 적이 아니라는 걸 알렸다.

그와 동시에 시작된 전투.

그는 놀랍게도 아무런 무기도 들지 않고 오로지 박투만으로 키메라를 상대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노래를 불러 버프를 준 율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두터운 플레이트 헬멧을 쓰고 있었기에 그의 눈빛조차 볼 수 없었던 율은 일단 그를 최대한 돕기로 마음먹었다.

율의 손이 움직일 때마다 키메라들의 행동은 제한되었고, 동시에 플레이트를 입은 유저의 움직임은 빨라졌다.

우득! 콰득!

꺾고… 날리고…….

그의 박투 기술은 상당했다.

키메라들은 꼼짝도 못하고 그에게 하나씩 쓰러져갔고, 도저히 처리하지 못할 것만 같던 20마리의 키메라도 빠르게 줄어만 갔다.

‘좋은데?’

상황이 그렇게 흘러가자 율은 더욱 신나게 노래를 불렀다.

말을 하지 않아도 율은 알아서 척척 플레이트를 입은 유저와 완벽한 호흡을 맞췄다.

척하면 척.

율은 이미 누군가를 지원하는 것에 대해서는 거의 전문가 수준의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이제 남은 키메라는 단 다섯 마리.

율은 1분 안에 전투가 끝날 것이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바로 그때 갑자기 플레이트를 입고 있던 유저가 공격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응!?’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깜짝 놀란 율.

그런데 더욱 놀라운 건 그 다음이었다.

“물러나!”

두꺼운 플레이트 헬멧을 통과해 밖으로 새어나온 목소리는 괴이했다.

아무래도 방어력을 극대화시키기 위해 숨구멍을 최소한으로 만들어놨기 때문에 목소리가 변형되어 들리는 것 같았다.

어쨌든 그건 그거고… 율은 지금까지 잘 싸우던 유저가 갑자기 물러나라고 외치는 게 너무 당황스러웠다.

“네?”

당황스러움에 다시 한 번 되묻는 율.

하지만 그는 다시 대답하는 게 아니라 율의 질문을 무시한 채 갑자기 뒤로 달리기 시작했다.

율은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놀라 자신을 지나쳐 달려가려던 그의 팔을 붙잡았다.

“잠깐만요!”

도대체 왜 마무리만 하면 되는 키메라들을 놔두고 도망친단 말인가?

주변에 다른 키메라가 나타난 것도 아니었다. 특별한 이상 징후 따위는…….

우르릉!

있었다!

“헉!”

“큭, 젠장! 뛰어!”

또 한 번 흘러나온 괴이한 목소리.

하지만 그의 외침은 이미 늦은 후였다.

와르르르.

무너졌다.

율과 그가 밟고 서 있던 땅이 무너지며 그와 율은 아래로 떨어지고 말았다.

그가 뒤로 뛰라고 했을 때 달렸다면 아슬아슬하게 피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율은 오히려 그걸 피하려던 그를 붙잡아 이 난리에 둘 모두 휘말리게 만들었다.

‘크!’

순간 자신이 큰 실수를 했다는 걸 깨달은 율.

하지만 이미 되돌리긴 늦었고, 그와 율은 한꺼번에 굉장한 자유낙하를 경험하며 지하로 떨어져 내렸다.

‘죽는 건가?’

이 정도의 낙하 시간이라면 자칫 낙하데미지로 죽을 수도 있었다.

그렇다고 뭔가 조치를 취하긴 이미 늦은 상황.

율은 그저 자신이 끌어들인 유저에게 마음속으로 사죄하며 담담하게 마지막을 대비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끝은 아니었다.

퍼펑! 풍덩!

흙더미와 함께 거대한 지하 호수로 떨어진 그와 율.

호수가 낙하데미지의 대부분을 흡수하며 그와 율은 죽지 않고 살아날 수 있었다.

그렇다고 위기가 끝난 건 아니었다.

“크억!”

갑자기 빠른 속도로 가라앉기 시작하는 플레이트를 입은 유저.

풀 플레이트의 엄청난 무게는 그를 호수 밑바닥으로 미친 듯이 끌어당겼다.

‘헛! 안 돼!’

율은 순간 그를 다시 한 번 붙잡았다.

가뜩이나 함정에 휘말리게 했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익사 당하게 놔둘 수는 없었다.

젖 먹던 힘을 다해 그를 잡은 율.

하지만 율의 힘으로 그를 끌어당기기엔 역부족이었다.

그와 함께 호수 밑으로 가라앉는 율.

지금이라도 그의 손을 놓는다면 자신은 살 수 있겠지만 율은 절대 그렇게 할 생각이 없었다.

‘두 번의 실수는 없다!’

율은 절대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위급한 상황에 율의 머릿속으로 가장 먼저 떠오른 건 노래였다.

물속에서 노래를 부른다?

한 번도 해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이대로 포기하는 것보단 일단 해보는 게 나을 것 같았다.

힘차게 영웅들의 서사시를 부르기 시작하는 율.

처음엔 당연히 물속이라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하지만… 아주 약간의 시간이 흐르자 점점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율은 물속에서 또렷한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어두운 물속에서 울려 퍼지는 아름다운 한줄기 목소리.

이것은 바로 율의 목소리였다.

띠링, 숨겨진 음유시인의 비기(秘技) 심음(心音)을 터득했습니다.

띠링, 마음으로 부르는 노래를 환상이 아닌 현실로 바꿀 수 있는 능력을 터득했습니다.

띠링, 꽁꽁 숨겨져 있던 음유시인의 비기를 찾으며 3차 전직 조건의 첫 번째 조건을 만족시켰습니다.

띠링, 음유시인의 숨겨진 비기를 찾아 명성이 크게 올랐습니다.

……

……

시스템 메시지가 울려 퍼졌지만 율은 노래에 집중하느라고 그것에 신경 쓸 틈이 없었다.

영웅의 영혼을 부르는 율의 간절한 목소리.

결국 율은 자신의 바람대로 영웅을 불러냈고, 곧장 그 영웅의 힘을 빌려 그를 잡고 호수 밖으로 벗어날 수 있었다.

쾅!

호수에서 나오자마자 쓰러지는 두 사람.

거의 익사 직전에 빠져나온지라 두 사람은 굉장히 지쳐 있었다.

“헉… 헉… 괜찮으세요?”

율은 일단 찔리는 게 있어서 먼저 안부를 물었다.

그러자 풀 플레이트를 입고 있던 유저가 힘겹게 자신의 헬멧을 벗어 바닥으로 집어던졌다.

찰랑~

헬멧이 벗겨지며 드러나는 긴 머리카락.

백발?

아니었다. 그것은 휘황찬란하게 빛나는 은색빛깔의 머리카락이었다.

물에 젖었지만 그 고유의 빛깔은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생머리의 긴 머리카락.

그 머리카락과 함께 율의 눈에 들어온 풀 플레이트를 입고 있던 유저의 얼굴은… 엄청났다.

눈부시다?

아름답다?

이런 표현으로도 부족해 보이는 굉장한 미모의 얼굴.

율은 마치 TV나 영화에서만 보던 절세미인을 직접 본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그녀가 헬멧을 벗은 아주 짧은 찰나의 순간에만 느껴진 감정들이었다.

그녀가 헬멧을 집어던지고 율을 바라보며 입을 여는 순간, 그 모든 것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야~ 이 미친놈아! 거기서 날 왜 잡아! 아~ 돌겠네.”

그녀의 입에서 쏟아진 거친 말은 그녀의 외모와는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았고, 또한 그녀의 화난 표정은 율에게 미녀가 마녀가 되는데 필요한 시간은 단 1초면 되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거친 숨소리를 내쉬며 율에게 화를 내는 그녀.

그렇게 율은 훗날 은발의 야누스라 불리게 될 엘리스와 처음으로 만났다.

<2권 끝, 3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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