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 새로운 시작 (25/95)

11. 새로운 시작

그림자의 전설과 섀도우 로드의 전쟁은 섀도우 로드의 승리로 끝났다.

루딘은 목이 잘리며 처참하게 죽었고, 그 뒤를 그가 이끌고 온 정예 유저 3천 명이 차근차근 무너져 내렸다.

이 과정은 대부분 공개되었고, 많은 유저들이 섀도우 로드의 강함에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뒤에 몇몇 사람들에 의해 그 전쟁이 3천 대 3백의 싸움이었고, 후속부대로 천 명이 넘는 사람이 더 증원되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그림자의 전설은 이미지에 엄청난 타격을 입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림자의 전설에 대해서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왜냐하면 더 큰 사건이 있었기 때문이다.

섀도우 로드의 해체.

물론 가츠가 정식으로 섀도우 로드의 해체를 선언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과 함께했던 섀도우 로드의 1대 유저들의 은퇴를 선언하고, 섀도우 로드의 길드 스톤을 길드 요새에서 뽑아냈다.

길드 스톤을 뽑았다는 것은 그 길드 요새에 대한 모든 권리를 포기하고 길드 요새를 없애겠다는 뜻이었다.

길드는 유지될 수 있겠지만 사실상 길드 하우스를 지니지 않은 길드는 정식 길드로 인정받지 못했다.

그리고 1대 유저들이 은퇴한다는 건 사실상 폐쇄적인 길드 정책을 유지하던 섀도우 로드로서는 소속된 거의 모든 유저가 은퇴한다는 뜻과 같았다.

이것은 말만 1대의 은퇴였지 모든 사람들은 섀도우 로드가 공식적으로 해체했다고 받아들였다.

갑작스러운 섀도우 로드의 이런 발표에 정말 많은 사람들이 크게 놀랐다.

특히, 얼마 전 섀도우 로드의 길드마스터인 가츠가 유명 격투가 강철민이란 사실이 알려진 후의 일이었기 때문에 대부분 신변이 노출된 강철민이 결국 게임을 접게 되었다고 이해했다.

어쨌든 이렇게 되자 정작 그림자의 전설의 굴욕적인 패배보다 섀도우 로드의 해체가 더 큰 이슈가 되고 말았다.

검마노에서 한 시대를 풍미했던 가츠와 카인, 그리고 그들의 동료들… 어떤 이들은 검마노의 전설 중 하나가 사라졌다고 안타까워했고, 또 어떤 이들은 검마노에서 가장 신비로우면서 멋진 길드가 사라졌다고 안타까워했다.

물론 몇몇 사람들은 건방진 놈들이 사라졌다고 말하기도 했지만 그건 정말 극소수의 말일 뿐이었다.

섀도우 로드의 1대 유저들이 은퇴하기까지는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그걸 알 리 없는 사람들은 그저 그들의 은퇴만 놓고 얘기할 뿐이었다.

이런 게 세상이었다.

과정보단 결과… 결국 모든 건 결과로만 얘기가 가능했다.

“정말 이젠 아예 안 들어오시는 거예요?”

율은 자신 앞에 서 있던 가츠에게 다시 한 번 물었다.

“아마도… 뭐… 가끔 생각나면 잠깐잠깐 들어올 수도 있겠지만 예전처럼 게임을 즐길 수는 없을 것 같다.”

“…….”

“아쉽냐?”

“네…….”

율은 솔직하게 얘기했다.

아쉬웠다.

뭔가 더 친해지고 싶었는데… 이렇게 헤어지는 게 아쉬웠다.

이제야 동료가 뭔지, 친구가 뭔지 알게 된 율이었기에 이번 일은 그저 안타까울 뿐이었다.

“아쉬워할 것 없다. 예전엔 나도 너랑 비슷했다. 친구도, 동료도 아무도 없는 외톨이. 오로지 나만 아는 극단적인 개인주의자… 이게 바로 내 옛날 모습이었다.”

가츠가 슬쩍 웃으며 천천히 말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링 위에선 혼자 싸우는 것이기 때문에 그 누구의 도움도 필요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지. 실제로 난 실력도 있었기 때문에 누구보다 쉽게 정상을 향해 달려갈 수 있었다.”

오래전 가츠는 장래가 매우 촉망한 격투 유망주였다.

그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유명해졌다.

그게 오히려 독이었을까?

그는 유명해지는 속도만큼이나 빠르게 점점 더 거만하고 독선적으로 변해갔었다.

“그땐 세상에서 내가 가장 잘난 줄 알았었지. 그 누구도 나를 이길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었어. 그런데… 그건 정말 내 오만이었지.”

충격적인 패배.

그것도 그냥 패배가 아닌 치명적인 부상까지 입으며 완벽하게 패배했다.

“물론 사람들은 내가 입은 치명적인 부상을 걱정했지만, 정작 난 그 부상보다 내가 그렇게 완벽하게 졌다는 것에 더 충격을 받았지.”

육체적 부상보단 정신적 부상이 더 컸던 그때.

그는 그 충격으로 상당히 오랫동안 세상을 멀리하고 사람들과의 만남을 극도로 꺼렸다.

가뜩이나 개인적이었던 성격은 아예 극단적인 개인주의로 변했고, 그 누구도 가까이 오는 걸 반기지 않았다.

“철저히 혼자가 되고 싶었어.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혼자가 되고 싶었던 게 아니라 누군가에게 구원을 받기 위해 더 그렇게 혼자가 되고 싶었던 척한 것 같기도 해.”

가츠가 율을 처음 만났을 때 가장 놀랐던 건 마치 자신의 예전 모습을 보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가츠와 율이 이렇게까지 큰 인연으로 맺어지게 된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자신과 같은 실수를 하지 않게 해주고 싶었기 때문에… 자신이 카인을 만나 참된 인생에 대해 눈을 떴던 것처럼 율도 자신을 만나 깨달음을 얻었으면 하는 마음에 율에게 길드 가입을 제안했던 것이다.

“카인은 의사였어. 원래는 내 몸에 난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만났었지만… 나중엔 몸의 상처보단 정신의 상처를 더욱 신경 써서 치료해준 훌륭한 의사였지. 후후… 물론 난 늘 돌팔이라고 놀리고 있지만 녀석의 실력은 정말 최고였어. 그 녀석을 만난 건 나에게 있어 인생의 최고 행운이었고, 그 녀석으로 인해 참된 인생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지.”

가츠가 간직하고 있던 그의 비밀.

그것은 벌써 10년도 훨씬 넘은 오래된 이야기였다.

그런 오래된 얘기를 율에게 해주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어쨌든 이제 세월은 많이 지났고 언제까지 우리들이 이 자리를 지키고 있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조금 이를지 몰라도 언젠간 이렇게 하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우리 1대의 시대는 이걸로 끝이다. 이제부턴 너의 시대다. 비록 피치 못할 사정 때문에 제대로 2대를 꾸려주지 못했지만… 너라면 충분히 1대보다 더 멋진 2대를 만들 것이라 생각한다. 섀도우 로드라는 이 이름… 이제부턴 너에게 맡긴다.”

스윽.

가츠가 손에 들고 있던 길드 스톤을 율에게 넘겨주었다.

“제가 맡으라고요?”

“응, 이미 모든 사람들하고 상의를 끝냈다. 우리는 여기서 끝이지만 너는 아니잖아. 이제부터 섀도우 로드의 길드마스터는 너다. 네가 섀도우 로드를 어떤 식으로 키우더라도 우리들은 늘 뒤에서 널 응원할 거야.”

“하, 하지만…….”

“하지만은 무슨~ 영 마음이 내키지 않으면 그냥 버려도 돼. 말했잖아. 어떤 식으로 키우더라도 응원하겠다고… 설사 네가 섀도우 로드의 계승을 포기하더라도 우린 널 원망하지 않을 거야. 만약 그렇다면 섀도우 로드의 운명이 딱 거기까지일 뿐이니까. 이건 너에게 길드를 맡으라고 강요하거나 떠맡기는 게 아니야. 단지… 너에게 이어줄 뿐이야.”

“…….”

“율아, 아직도 넌 네가 스스로 만들어 놓았던 그 커다란 벽을 완벽하게 무너트린 게 아니야. 나 역시… 그 벽을 전부 무너트리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어. 사실 이 게임에서 섀도우 로드라는 길드를 만들고 수많은 동료들이 생기면서 완벽하게 무너졌다고 말하는 게 맞을 거야. 너도 그랬으면 좋겠어. 그게 솔직한 내 마음이야.”

가츠가 율의 어깨를 살짝 두드리며 기분 좋게 웃었다.

“자~ 어깨를 펴고! 당당하게! 섀도우 로드의 2대 길드마스터로서 검마노에 새로운 전설을 만들어봐! 그리고 이건 보너스로 주는 선물이야.”

가츠는 길드 스톤과 함께 자신의 트레이드마크라고 할 수 있는 붉은색 양손 대도와 푸른색 양손 대검을 율에게 주었다.

“비록 네가 사용할 수 없을지 몰라도… 꼭 2대에게 물려주고 싶은 물건이었어. 팔아서 골드로 만들어도 상관없고 그냥 기념품으로 가지고 있어도 상관없으니까 받아둬. 그거 유니크 세트 아이템이라 값어치는 상당히 높을 거야.”

자신이 가지고 있던 가장 소중한 것을 율에게 건네는 가츠.

“형…….”

율이 아쉬운 표정으로 그 물건들을 받았다.

“이제 진짜 끝이네. 흐~ 정말 아쉬울 거야.”

가츠의 웃음 속에는 진한 아쉬움이 숨겨져 있었다.

하지만 그는 박수칠 때 떠나는 게 가장 좋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다소 이른 시간에 은퇴를 선언했던 것이다.

광전사 가츠.

그는 이렇게 검마노에 몇 가지 전설만 남긴 채 조용히 떠나갔다.

* * *

섀도우 로드의 1대 유저들은 정말 검마노를 동시에 떠났다.

그들은 구차하게 은퇴를 번복하지도 않았다.

깔끔한 퇴장.

사람들은 그런 그들을 보며 정말 전설이 될 만한 이들이라고 칭송했다.

하지만 그래봤자 대부분의 사람들은 금세 그 사실을 잊어버리는 게 현실이었다.

결국 전설이라는 건 가물가물한 옛 추억일 뿐이었다.

현실을 살아가는 이들에겐 현재… 지금 이 순간이 중요했고, 그 다음으로 앞으로의 미래가 중요했다.

뒤를 돌아보고 사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렇기 때문에 검마노의 세상에서는 정말 빠르게 섀도우 로드에 관한 것들이 잊히고 있었다.

물론 잊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섀도우 로드의 2대 길드마스터가 된 율이었다.

그는 섀도우 로드의 길드 스톤을 가지고 다시 목운해로 돌아왔다.

가츠에게 모든 걸 이어받은 그는 곰곰이 자신이 이어받은 이 섀도우 로드를 어떻게 할 것인지 생각해보았다.

가츠는 그에게 1대보다 더 멋진 2대를 만들어보라고 했지만 아직까지 율은 자신이 있지 않았다.

물론 그렇다고 포기할 생각도 아니었다. 어떤 2대가 될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한번 도전해 볼 생각이었다.

어쨌든 목운해로 돌아온 율은 다시 예전처럼 사냥을 하고 레벨을 올리며 해결하지 못했던 퀘스트를 차근차근 해결하기 시작했다.

목운해에서 좋은 인연으로 맺어졌던 비주류 파티는 현재 그들이 율을 만나기 전에 받았던 파티 퀘스트 때문에 목운해를 떠나 다른 대륙으로 넘어가 있었다.

그들과는 장거리 편지로 계속 대화하고 있었기 때문에 서로 조만간 퀘스트가 정리되고 다시 만나기로 한 상태였다.

일단 율은 그 비주류 파티를 자신이 만드는 2대 섀도우 로드의 중심에 둘 생각이었다.

율의 생각을 보아하니 1대가 그랬듯이, 2대 역시 독특한 유저들이 모여들 게 될 것만 같았다.

어쩌면 이게 섀도우 로드의 가장 대표적인 특징일지도 몰랐다.

그 특징은 1대에서 2대로 넘어와도 바뀔 것 같지 않았다.

물론 율은 비주류 파티의 동료들에게는 아직 정식으로 얘기하지 않은 상태였다.

혹시라도 그들이 거절할 수도 있었지만 그건 걱정하지 않았다.

율은 진심으로 그들을 대했고, 그들 역시 진심으로 율을 동료로 받아주었기 때문에 설사 사정이 있어 길드에 가입하지 못한다고 해도 그들은 영원히 율의 동료였다.

율도 이것을 알고 있었기에 일처리를 급하게 하지 않는 것이었다.

어쨌든 생각을 대충 정리한 율은 목운해에서의 작은 퀘스트들을 모두 완료한 후 곧장 목운해를 넘어 동방 대륙의 끝자락에 있다는 땅 끝 마을로 걸음을 옮겼다.

[이름] : 선율 아폴론 [소속] : 자유시민(쥬신)

[종족] : 인간 [성향] : 모범적인(854)

[호칭] : 위대한 음악가 [명성] : 4400

[직업] : 영혼의 음유시인

[레벨] : 210[1.12%]

[기본능력치] : <힘 : 28> <민첩 : 30> <지능 : 20> <지혜 : 19> <매력 : 21> <이능 : +1405> <체력 : 210>

[특수능력치] : <예술 : +276> <인내 : +118> <집중 : +146>

[방어도] 2968

[생명력] : 5600/5600 마력[500/500]

[소울에너지(SE)] : 2944

[직업스킬]+

[생산스킬]+

[속성친화력]+

……

……

율의 레벨은 현재 210이었다.

목운해를 혼자 통과하기엔 살짝 모자란 감이 있는 레벨이었지만 율은 자신의 능력을 믿었다.

특히, 그림자의 전설과 전쟁을 치르며 필이 꽂혀 불렀던 노래들 중 무려 두 가지가 명곡 판정을 받으며 새로운 노래 스킬로 등록되었는데, 그 두 가지 노래가 상당히 쓸 만했다.

[그림자를 밟으며][002.011]

: 그림자를 밟아 상대방을 잡는 놀이를 하는 듯한 흥겨운 노래. 동요는 아니었지만 마치 동요처럼 해맑은 멜로디를 지니고 있는 노래였다. 매우 짧은 노래였지만 여러 번 반복할수록 그 효과가 제대로 발휘되었다.

소모에너지 : 소울에너지 2(한번 중첩될 때마다 두 배로 늘어남. 최대 4번까지 중첩됨)

능력 : 1중첩-자신을 중심으로 반경(50m) 안에 있는 적들의 이동속도를 20초 동안 10% 낮춤. 2중첩-자신을 중심으로 반경(50m) 안에 있는 적들의 이동속도를 30초 동안 20% 낮춤. 3중첩-자신을 중심으로 반경(50m) 안에 있는 적들의 이동속도를 40초 동안 30% 낮춤. 4중첩-자신을 중심으로 반경(50m) 안에 있는 적들의 이동속도를 50초 동안 40% 낮추고 동시에 10초간 그림자를 완전히 묶어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하게 함.

특이사항 : 연주시간[10초]. 동시에 최대 14명까지만 이 효과가 적용됨.

[악마의 유혹][001.210]

: 노래가 울려 퍼지고 그 노래에 한번 귀를 기울이기 시작하면… 아무 일도 할 수 없게 된다. 이것은 악마의 속삭임이자 유혹. 이 유혹에 빠져들면 치명적인 상태에 빠질 수 있었다.

소모에너지 : 소울에너지 35

능력 : 저항을 완전히 하지 못했을 경우-[15초간 현혹 상태로 아무 행동도 하지 못하고 제자리에 서 있게 된다. 현혹 상태에선 모든 데미지가 2배로 들어온다.]

부분 저항을 했을 경우-[7초간 현혹의 영향으로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휘청거린다. 단, 현혹 상태 판정을 받지는 않는다.]

저항을 했을 경우-[1초 정도 잠깐 어지럼을 느끼지만 거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특이사항 : 연주시간[20초]. 동시에 최대 21명까지만 이 효과가 적용됨.

이속저하와 발 묶기 효과를 동시에 낼 수 있는 ‘그림자를 밟으며’와 훌륭한 광역 현혹 기술인 ‘악마의 유혹’.

이 두 기술은 율을 훌륭한 메져로 만들어주었다.

물론 다른 메져들처럼 즉시 시전 메즈 기술이 없는 건 좀 아쉬웠지만, 어쨌든 이 두 노래가 있는 이상 혼자서 목운해를 관통하는 것도 그리 크게 어려워 보이지는 않았다.

자신의 능력을 믿는 율은 준비를 끝내고 바로 목운해 너머에 있는 땅 끝 마을을 향해 이동했다.

목운해 깊숙한 곳에 나오는 다양한 고레벨 몬스터들은 율에게 그저 사냥감일 뿐이었다.

사냥과 이동.

율은 그것을 계속 반복했다.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지도를 살피며 정확한 방향으로 나아간 지 보름이 지났을 때, 율은 드디어 목운해를 벗어날 수 있었다.

* * *

땅 끝 마을은 목운해를 벗어나 조금만 더 이동하니 나타났다.

확실히 인적이 많지 않은 마을답게 유저들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이곳에 올 만큼 능력이 되는 높은 레벨의 유저는 올 이유가 없어서 오지 않았고, 나머지 레벨이 낮은 유저들은 올 능력이 없어서 오지 못했다.

어떻게 보면 약간 버림받은 것 같은 마을.

율 역시 퀘스트가 아니었다면 이곳을 찾아오지 않았을 게 분명했다.

어쨌든 율은 이곳에서 현자 아플란의 시종이었던 촌장을 찾아야 했다.

율은 처음 마을에 도착했을 땐 금방 촌장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큰 오산이었다.

워낙 오지의 마을이어서 그런 것일까?

마을 NPC들은 이방인에게 경계심을 꽤 드러냈다. 심지어 대화도 제대로 해주지 않을 정도였다.

촌장님이 어디 계시냐고 물으면 그건 왜 물어보는 거냐고 되묻는 마을 NPC들.

율은 촌장이 누군지 찾는 것부터 헤매기 시작했다.

“후우~ 결국 NPC들과 좀 친해져야 해결되는 문제인 건가?”

30분가량 마을 이곳저곳을 다녀보고 내린 결론이 이것이었다.

다행스럽게도 마을 주점에서 간단한 퀘스트 몇 개를 주는 NPC들이 있었기에 그 퀘스트들을 해결하며 친밀도를 올리면 어느 정도 대화가 가능해질 것 같았다.

퀘스트는 어렵지 않았다.

주변의 몬스터를 잡아주거나 간단한 재료들을 수집해주는 걸로 몇 개의 퀘스트들을 완료할 수 있었다.

그렇게 대략 한두 시간 정도 그들이 원하는 퀘스트들을 해결해주자 드디어 마을 NPC들이 율에게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조금씩 율에게 하는 말이 늘어나더니 결국 어느 정도 친근하게 대화할 수 있는 수준까지 되었다.

그 수준까지 가자 드디어 촌장이 누군지 알 수 있게 되었다.

촌장은 의외로 가까운 곳에 있었다.

퀘스트를 하며 몇 번 봤던 마을 근처 바닷가에서 낚시를 하고 있던 늙은 어부가 이 마을 촌장이었다.

율은 촌장이 누군지 확인한 순간 바로 그에게 달려갔다.

마을 사람들과 어느 정도 친밀도를 올렸기 때문에 당연히 촌장하고도 대화가 가능할 것이라 생각했던 율.

하지만 그건 그의 착각이었다.

촌장은 마을 사람들과는 또 다른 인물인 것 같았다.

말을 걸어도 요지부동인 채 그저 조용히 낚시만 할 뿐이었다.

처음엔 마을 사람들과의 친밀도가 아직 부족해서 그런 줄 알고 다시 주점으로 돌아가 자잘한 퀘스트들을 조금 더 했다.

몇 시간 정도 열심히 퀘스트들을 해결하자 마을 사람들은 상당한 친밀감을 보여줄 정도로 친해졌다.

이젠 됐겠지 하는 마음으로 다시 촌장을 찾은 율.

하지만 촌장은 변함없이 율을 무시했다.

이쯤 되자 율도 오기가 생겼다.

율은 촌장과의 친밀도가 마을 사람들과는 다르다는 걸 깨닫고는 곧장 촌장과 친밀도를 올릴 방법을 찾았다.

일단 퀘스트 같은 건 없었다.

대화 자체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율은 촌장 뒤에 앉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무엇이 촌장을 움직일 수 있을까?

그렇게 십여 분을 생각한 끝에 한 가지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낚시… 저 촌장은 오로지 낚시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으니 그 부분을 공략해야 한다.’

결론을 내린 율은 곧장 가방에서 대나무 낚싯대를 꺼내들었다.

그리곤 촌장 옆에 자리를 잡고 낚싯대를 바다에 기울였다.

흠칫.

촌장이 율의 대나무 낚싯대를 보곤 상당히 놀란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물론 말을 걸진 않았지만 촌장의 눈빛만 봐도 이미 그가 자신에게 관심을 가졌다는 걸 눈치 챌 수 있었다.

하지만 율은 촌장이 관심을 가지든 말든 신경 쓰지 않는 모습으로 자신만의 낚시를 했다.

어차피 한 번에 친밀도를 올릴 수 있으리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이 기회에 그동안 조금 등한시했던 낚시 기술도 올리고 음식재료도 좀 구해놓을 생각이었다.

율과 촌장은 나란히 앉아서 4시간 동안 아무 대화 없이 서로 낚시에만 집중했다.

한동안 손에서 놓고 있던 낚싯대였지만 막상 다시 잡으니 예전의 실력이 금방 나타났다.

바닷가에서 잡히는 고급 어종들이 줄줄이 낚여 올라오는 상황이었다.

한 시간에 한 마리도 제대로 낚지 못하던 촌장과는 매우 비교되는 모습이었다.

율이 그렇게 상당한 낚시 실력을 보여주자 촌장은 시간이 지날수록 율 쪽을 쳐다보는 시간이 많아졌다.

반면, 율은 촌장 쪽을 단 한 번도 쳐다보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낚시에만 집중했다.

먼저 말을 거는 쪽이 대화의 주도권을 빼앗긴다는 걸 알고 있던 율이었기에 조급하게 마음먹지 않고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것이었다.

그러자 그 기다림은 결국 4시간 만에 결실을 맺었다.

“…자네 낚시 실력이 정말 대단하군.”

슬쩍 말을 거는 촌장.

‘걸렸다.’

율은 낚싯대를 바다에 던져놓고 물고기를 낚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 진짜 낚고 싶었던 건 촌장이었다.

그리고 오랜 기다림 끝에 그 촌장이 드디어 미끼를 물었다.

“아… 별것 아닙니다. 그저 스승님한테 배운 대로 할 뿐이죠.”

일단은 겸손.

실제로 거짓말도 아니었기에 말 속에서 진실함이 느껴졌다.

“아니야, 정말 재능이 있는 것 같네.”

“과찬이십니다.”

또 한 번 겸손.

이런 상황에서는 겸손만큼 점수를 많이 딸 수 있는 행동이 없었다.

“우리 마을 사람 같지는 않은데… 어디서 온 건가?”

“목운해 너머에 있는 자유도시 쥬신에서 왔습니다.”

“호오~ 쥬신. 내가 젊었을 때 잠깐 머물었던 곳이지. 그땐 아직 도시라고 말하긴 좀 작은 규모였는데… 그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나 보군.”

NPC와의 친밀도는 수치로 표시되는 게 아니었다.

그래서 이 친밀도 시스템이야말로 유저들이 가장 짜증내는 것 중 하나였다.

자칫 친밀도가 낮은 상태에서 NPC에게 실수할 경우 영원히 해당 NPC와 대화를 하지 못하는 경우가 생길 수도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율도 최대한 조심스럽게 촌장과의 친밀도를 차근차근 올리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가요? 옛날 쥬신이 어떤 곳이었는지 잘 몰라서요. 영감님은 여행을 많이 다니셨나 봐요?”

“나? 허허, 믿을지 모르지만 왕년엔 나도 좀 잘 나갔었지.”

기분 좋게 웃으며 말하는 촌장.

그는 마치 과거의 자신을 회상이라도 하는 표정이었다.

어쨌든 그렇게 율과 촌장의 대화는 계속되었고, 촌장과의 친밀도는 대화가 계속될수록 조금씩 올라가고 있었다.

현자 아플란을 찾기 위해서는 촌장의 도움이 전적으로 필요했기에 율은 시간을 아낌없이 투자할 생각이었다.

낚시를 하고… 대화를 하고…….

그렇게 율이 촌장을 만난 지 4일(게임시간)이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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