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붉은 십자가의 무게
열혈망치에게 부탁했던 물건들은 대부분 처리되었다.
끝까지 영혼을 부르는 장갑(레어)은 팔리지 않았지만 다른 아이템들은 모두 팔려나가 대략 6천 골드의 돈을 마련할 수 있었다.
워낙 싸게 팔았기 때문에 물건을 파는 건 금방이었다.
율은 그 6천 골드를 들고 자신에게 진짜 필요한 아이템들을 구입했다.
비록 레벨이 낮아 착용할 수 있는 아이템이 많지는 않지만 그래도 적당한 것들을 찾아 몇 개 구입했다.
사실 정작 율이 가장 많은 골드를 쓴 것은 가방이었다.
가상 가방 또는 마법 가방이라 불리는 검마노의 가방은 설정상 단 2개의 슬롯에 등록시킬 수 있었는데, 기본적으로 가방들은 무게를 낮춰주는 비율을 기준으로 그 등급이 나뉘었다.
가장 최하급들은 보통 1/2의 수준으로 무게를 낮춰 주었다.
100Kg의 무게를 넣는다면 50Kg이 되는 방식이었다.
또한 가방에 들어가는 최대 무게도 정해져 있었다.
보통의 평범한 가방들은 최대 무게가(낮춰지기 전 무게) 500Kg을 넘지 못했고, 조금 좋은 가방들이 1~2천 Kg, 그리고 진짜 특별한 가방들이 3~4천Kg의 한계 무게를 지니고 있었다.
최상급 가방들 중에는 1/10, 1/20 정도의 비율로 무게를 낮춰주는 가방들도 있었고, 흔히 레어나 유니크급이라 불리는 특수한 가방들은 1/1,000까지도 무게를 낮춰주었다.
그리고 한 유저가 들 수 있는 가방의 한계 무게는 그 유저의 체력 능력치와 힘 능력치에 의해 좌우되었다.
물론 상인이나 기타 가방이 많이 필요한 유저들에겐 직업 패시브 스킬로 가방의 한계 무게가 늘어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검마노에서는 워낙 이것저것 필요한 것도 많고. 가지고 다녀야 할 것도 많아 유저들은 자신의 장비만큼이나 가방에도 각별히 신경 쓰는 게 보통이었다.
특히, 율처럼 장기간의 여행을 목표로 한 유저라면, 마을을 찾는 게 쉽지 않은 검마노의 특성 때문에라도 큰 가방들을 준비해 든든하게 그 가방들을 채워 놓을 필요가 있었다.
1/2가방(100골드) 한 개, 그리고 1/5가방(2,900골드) 한 개.
율이 거금 3천 골드를 써서 장만한 가방 2개였다.
현재 율의 체력은 56, 힘은 7이었다.
체력은 1당 2Kg의 무게를 들 수 있고, 힘은 1당 4Kg의 무게를 들 수 있기 때문에 현재 율이 들 수 있는 무게는 대략 140Kg.
장비를 거의 착용하고 있지 않았던 율이기에 140Kg에서 장비로 인해 빠지는 무게는 별로 없을 것 같았다.
그 말은 율이 가방 두 개만 잘 이용하면 상당한 양의 물건을 담을 수 있다는 얘기였다.
율은 그 두 개의 가방에 남은 3천 골드를 모두 써서 구입한 각종 소모성 아이템들과 재료 아이템들을 가득 채워 놨다.
그렇게 모든 준비가 끝난 걸 확인한 순간 율은 미련 없이 쥬신 시를 벗어났다.
일단 그가 향하는 방향은 남쪽이었다.
동방 대륙의 남쪽은 지금 이 순간에도 활발하게 개척이 진행되고 있는 지역이었다.
그 말은 곧… 결코 안정되지 않은 위험한 지역이라는 뜻이었다.
이제 갓 초보레벨인 50을 벗어난 율에게는 다소 무리가 될 수도 있는 곳이었지만 율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중요한 건 자신의 마음이었다.
정처 없이 세상을 떠도는 이들이 바로 음유시인이었고, 율은 진짜 음유시인의 삶을 되짚어볼 생각이었다.
그렇기에 쥬신 시를 떠나는 그의 발걸음은 매우 가벼울 것 같았다.
3일 전 휴학 일정이 통보되었고, 곧바로 다음날부터 적용되었다.
율은 이제 3년(게임시간)간 자신만의 시간을 얻었다. 원래대로였다면 율은 벌써 떠났어야 했다.
하지만 율은 아직도 쥬신 시에 남아 있었다.
이유는 단 하나.
3일 전 휴학 일정이 통보될 때 율에게 날아온 편지 한 통 때문이었다.
‘삼일 후 그곳으로 찾아가겠습니다. 카인.’
붉은 십자가가 새겨진 편지지에 적힌 간단한 메시지.
섀도우 로드의 부마스터로 알려진 카인의 편지였다.
버서커 가츠와는 또 다르게 유명한 카인.
철혈의 카인 또는 냉혈의 카인이라고 불리는 남자.
가츠가 섀도우 로드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존재라면, 카인은 섀도우 로드의 실질적인 책임자였다.
실제로 마스터의 업무를 모두 책임지고 있는 카인.
가츠는 절대 자신의 업무 따위를 돌볼 위인이 아니었기에 결국 모든 건 카인의 손에서 처리되고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카인이 없었다면 지금의 섀도우 로드도 없었을 것이라고 얘기했다.
그리고 사실상 섀도우 로드를 쓰러트리려면 가츠가 아닌 카인을 제거해야 한다고도 말했다.
실제로 몇몇 세력이 섀도우 로드의 카인을 제압해 섀도우 로드를 무너트리려고 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카인은 그리 만만한 이가 아니었다.
지금까지 그 누구도 카인을 제거하지 못했다. 오히려 카인에게 역으로 당했다는 소문만 무성했다.
가츠에 대한 소문은 일일이 세기도 힘들 정도로 많이 퍼져 있었지만 카인에 대한 소문은 거의 찾기 힘들 정도로 없었다.
혹자는 카인의 무력은 거의 가츠의 수준이라고 했고, 또 다른 이는 카인의 무력은 극히 평범할 것이라고도 얘기했다.
그 누구도 제대로 확인하지 못한 카인의 무력.
하지만 모든 이가 인정하는 부분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카인의 신출귀몰한 전략이었다.
지금의 섀도우 로드가 최강의 비밀 길드로 인정받기까지 가장 많은 역할을 한 이가 바로 카인이었다.
그는 특별히 대단한 전력을 사용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적재적소에 정확한 상황판단을 앞세워 최선의 선택을 했고, 그 결과는 섀도우 로드의 승리로 이어졌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누군가에게 패배를 당한 적이 없는 길드.
물론 그만큼 제대로 싸운 적이 드물기도 했지만… 분명 섀도우 로드는 현재까지 무적의 길드로 알려져 있었다.
카인은 그런 존재였다.
가츠 만큼이나 유명하지만 실제로는 잘 알려지지 않은 사람.
그런 그가 자신을 만나러 오겠다는 메시지를 남겼으니, 율도 무시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반갑습니다.”
그는 정말 느닷없이, 은밀하게 나타났다.
율이 그를 기다리던 곳은 쥬신 시 외곽에 있는 조용한 골목길이었다.
율은 그저 그가 온다는 얘기만 했지, 어디에서 만나자는 얘기를 하지 않아 고생 좀 해보라는 심정으로 인적이 드문 골목길에 앉아 가볍게 악기를 만지며 앉아 있었다.
그런데 그런 율의 옆으로 너무나 갑자기 나타난 카인.
그는 골목길에 드리워진 그림자 속에서 천천히 걸어 나와 율에게로 다가왔다.
너무 갑작스러운 등장이라 율은 그저 놀란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섀도우 길드의 부마스터인 카인이라고 합니다.”
물론 율은 그가 카인이라는 것쯤은 이미 등장했을 때부터 알았다.
하지만 그는 깍듯이 예의를 차리며 율에게 고개를 숙였다.
“아, 예… 선율이라고 합니다.”
율도 엉겁결에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네, 율님… 제가 검은 대륙에 볼일이 좀 있어서 찾아뵙는 게 좀 늦었네요. 휴우~ 일단 길게 얘기하지는 않겠습니다. 어차피 율님도 저희 길드가 어떤 곳인지는 대충 아실 테니… 간단하게 얘기하죠.”
율은 소문으로만 듣던 그 카인을 만나보니, 왜 그의 이름 앞에 철혈이니 냉혈이니 하는 말이 붙는지 알 것 같았다.
단지 몇 마디 했을 뿐인데… 이미 그의 몸에선 한기(寒氣)가 흘러나오는 느낌이었다.
물론 그것은 그저 느낌일 뿐이었다.
하지만 율은 단지 느낌만으로도 실제 감각을 자극할 수 있다는 걸 처음으로 알았다.
‘…차갑다.’
카인이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공기가 차가워지는 것 같았다.
과연 냉혈, 철혈의 카인다운 존재감이었다.
“네, 얘기하세요.”
일단 첫인상은 굉장히 강렬했지만 율은 굳이 내색하지 않고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츠를 만났을 때 굉장한 열기를 경험했다면, 카인을 만나고 있는 지금은 엄청난 한기를 경험하고 있었다.
율은 검마노의 진짜 알짜배기 유저들은 보통 사람들이 아니라는 걸 새삼 다시 깨닫는 중이었다.
“얼마나… 얼마나 줬습니까?”
갑작스러운 카인의 물음에 순간 율은 그 질문을 제대로 파악할 수가 없었다.
“네?”
“아, 괜찮습니다. 선율님이 처음도 아니고… 지금까지 많은 분들이 똑같은 경험을 했습니다. 그리고 저도 그리 꽉 막힌 사람이 아닌지라 그분들에게 모두 적절한 보상을 해드리고 서로 오해가 없도록 일을 해결해왔습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마시고, 그 뇌도 근육으로 된 놈에게 얼마를…….”
카인은 걱정하지 말라는 어투로 고개를 끄덕이며 부드럽게 말했다.
하지만 율은 아직도 그의 말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건지 이해가 안 되네요. 얼마를 줬다니요? 지금 혹시… 가츠 형에게 돈을 줬냐고 물으시는 건가요?”
얼굴을 찡그리며 카인에게 묻는 율.
카인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기분이 살짝 나빠진 그였다.
“…네, 맞습니다. 그 근육질 원숭… 가츠… 형? 지금 혹시 가츠 형이라고 하셨나요?”
“네.”
“흠흠… 진짜 가츠 형이라고 하신 거 맞죠?”
“네, 맞습니다.”
“허어… 그럼 설마 그 무식한 근육 괴물에게 돈을 주지 않은 겁니까?”
“뇌도 근육으로 된 놈, 근육질 원숭이, 무식한 근육 괴물이 가츠 형을 지칭하는 것이라면… 맞습니다. 전 가츠 형에게 돈을 준 적이 없습니다.”
율이 고개를 끄덕이며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율은 카인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는 잘 모르지만 다짜고짜 이러는 건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의 표정은 굳어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정작 그 말을 들은 카인은 이상한 반응을 보였다.
지금까지 그다지 표정변화가 없었던 그였건만, 율이 돈을 주지 않았다고 말하자 그가 기묘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이럴 수가… 그 변태 근육맨이 돈을 받지 않고 길드에 신입 멤버를 받다니…….”
마스터의 신분으로 남의 길드 전쟁에 용병으로 고용돼서 싸우기 113회… 괜히 엉뚱한 시비에 휘말려 머더러(살인자)되기 96회… 새로운 조합 스킬을 만들겠다고 길드 창고에 보관된 온갖 종류의 스킬 북을 가지고 나른 게 53회… 고대의 전설로만 내려오던 아이템들을 찾겠다고 애꿎은 정보길드만 작살낸 게 17회… 그냥 대충 얘기한 게 이 정도였다.
가츠가 친 사고는 이것보다 몇 배는 많았다.
특히, 가츠가 가장 많이 친 사고가… 바로 섀도우 로드에 가입시켜 주겠다고 접근해 골드를 받아 챙긴 일이었다.
무려 198회.
금액은 1만 골드부터 100골드까지 다양했다.
한 길드의, 그것도 보통 길드가 아닌 섀도우 로드의 길드 마스터로서 그 신분을 이용해 가입 사기를 친다는 건 보통 유저들은 전혀 예상도 하지 못하는 일이었다.
덕분에 가츠는 198회를 시도해 197회를 성공하는 놀라운(?) 사기 성공률을 보여주었다.
물론 가츠가 그렇게 사기를 치면 그걸 무마시키는 건 늘 카인이었다.
이제는 너무나 익숙해 별로 귀찮지도 않을 정도로 변해버린 가츠의 사기행각 수습하기.
카인은 이번에도 역시 늘 하던 대로 수습을 하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가츠가 섀도우 로드에 가입시킨 유저는 단 10명.
그 중 한 명이 카인이었고, 카인과 비슷한 시기에 가입한 4명은 모두 섀도우 로드의 창립 멤버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오래전에 가입한 이들이었다.
그리고 나머지 5명은 가츠가 직접 인정한 검마노의 능력자들이었다.
그 다섯 명 중 가장 최근에 가입한 유저가 무려 3년(게임시간) 전이었다.
즉, 최근 3년 간 가츠가 직접 영입한 유저는 단 한 명도 없었다는 얘기였다.
물론 197명의 유저가 가츠에게 소량(?)의 돈을 주고 섀도우 로드에 가입했지만… 그들은 모두 다시 길드에서 조용히 나갔다.
카인의 수습.
카인은 회유와 협박을 모두 동원해 최대한 조용하게 가츠의 사기 행각을 무마시켰다.
그런데 무려 3년 만에 가츠가 돈을 받지 않고 가입시킨 진짜 길드 멤버가 나타났다.
돈을 받고 가입했다면… 절대 ‘가츠 형’이란 말은 사용하지 않을 것이다.
가츠는 자신이 인정하지 않는 이가 아니라면 절대 형이란 말을 사용하게 허락지 않았다.
누군가 자신이 허락하지도 않았는데 자신을 형이라 부른다면 그 자리에서 그 사람을 날려버릴 위인이 바로 가츠였다.
‘남자는 동생을 쉽게 만들지 않는다. 하지만 한번 동생으로 삼았다면 그 동생을 위해 형으로서 할 수 있는 모든 의무를 다한다.’
이게 가츠의 지론이었다.
이건 동생뿐만 아니라 친구나 형에게도 적용되는 말이었다.
동생, 친구, 형… 가츠는 쉽게 친분을 허락하지 않는 대신 자신의 마음을 한번 열면 그때부턴 진심을 다해 그 사람을 대하는 이였다.
그렇기 때문에 가츠는 쉽게 동생이나 친구를 만들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율은 가츠에게 형이란 호칭을 사용했다.
이는 곧… 가츠가 율을 진짜 동생으로 인정했다는 뜻이었다.
“문제가 있는 건가요? 그렇다면… 섀도우 로드를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율은 미련 같은 걸 둘 생각이 없었다.
가츠와의 인연이 좀 아쉬웠지만, 자신이 섀도우 로드를 나온다고 해서 가츠와의 인연이 끝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저 길드라는 형식적인 곳에서만 벗어나는 것뿐이었다.
실제로 율은 ‘빛의 망치’ 길드에 가입하지 않았지만 그 길드의 마스터들과는 매우 잘 지내고 있었기 때문에 가츠와도 그렇게 지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 아닙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아무래도 제가 실수를 한 것 같습니다.”
카인은 자신의 실수를 깨닫는 즉시 허리를 깊숙이 숙이며 율에게 사과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다시 한 번 더 깊숙이 고개를 숙이며 사과하는 카인.
방금 전까지의 모습과는 매우 달라보였다.
카인이 그렇게까지 나오자 율도 더 이상 뭐라 할 수가 없었다.
카인은 그렇게 몇 번이고 사과한 후 곧장 길드 메뉴를 열고 길드 등급의 세부 설정을 살폈다.
카인은 사실 얼마 전 신입 길드원이 들어왔다는 메시지를 보고 곧바로 율의 레벨을 확인하는 순간, 가츠가 또 사기를 쳤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아예 길드 등급의 세부 설정 따위는 살펴보지도 않았다.
그런데 율의 말을 듣는 순간, 자신이 큰 실수를 했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곧장 길드 등급의 세부 설정을 확인하는 순간, 그 실수가 진짜로 확실한 실수라는 걸 알았다.
세부 설정(등급) : 선율(레벨 : 56)-길드 등급[Shadow]
‘아!’
길드 등급이 섀도우라면 이미 진짜 섀도우 로드의 일원이라는 뜻이었다.
만약 가츠가 사기를 친 것이었다면 길드 등급은 [없음]으로 나와야 맞았다.
카인은 자신이 너무 큰 실수를 했다는 걸 확실하게 확인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정말 큰 실수를 했군요.”
또다시 고개를 깊숙이 숙이며 사과하는 카인.
그는 철혈이나 냉혈이란 말이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과하게 사과를 했다.
“아닙니다. 무슨 일인지 몰라도… 저는 괜찮습니다.”
그 냉혈의 카인이 그렇게까지 나오자 율은 민망한 표정을 지으며 손사래를 쳤다.
“이건 명백한 제 실수입니다. 당연히 율님은 기분이 나쁘셨을 수밖에 없습니다. 휴우~ 사실 제가 요즘 그 근육질 원… 아니, 가츠 녀석을 잡으러 다니는 중이라… 신경이 날카로워졌네요. 일단 어떻게 하다 보니 조금 꼬인 것 같지만 정말 진심으로 선율님을 환영합니다. 정식으로 다시 소개하죠. 저는 선율님과 같이 붉은 십자가를 등에 짊어 메고 앞으로 나아가는 한 명의 그림자… 카인이라고 합니다. 부길마라는 건 그냥… 제가 하는 일 때문에 그렇게 불리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크게 본다면 저나 선율님이나 다 똑같은 그림자일 뿐이죠.”
슬쩍 웃으며 다시 손을 내미는 카인.
율은 지금까지 카인에게서 받았던 차가움이 한순간에 사라지는 걸 느꼈다.
변해버린 카인.
그는 율을 자신의 동료로 인정하는 그 순간, 지금까지와는 많이 다른 분위기를 풍기며 율에게 손을 내밀었다.
“네… 반갑습니다.”
“실로 오랜만에 새로운 동료를 맞이하는 것이라… 저도 참 기분이 좋네요.”
율은 카인에게서 차가움 대신 반가움을 느낄 수 있었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방금 전까지는 이방인이라는 느낌이 강했다면 이제는 가족이라는 느낌이 강했다.
“솔직히 좀 얼떨떨합니다. 제가 섀도우 로드에 가입할 자격이 되는 것 같지도 않고…….”
율은 카인에게 솔직한 지금의 생각을 말했다.
자신의 레벨은 겨우 56… 괴물들이 즐비하다는 섀도우 로드와는 전혀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아니요. 그런 생각은 안 하셔도 됩니다. 일단 저희와 같이 붉은 십자가를 등에 짊어지게 된 이상… 선율님은 섀도우 로드의 당당한 그림자가 된 것입니다. 자격? 그런 건 없습니다. 섀도우 로드는 섀도우 로드일 뿐… 굳이 우리는 스스로에게 자격 따위를 매기지 않습니다.”
고개를 가로저으며 얘기하는 카인.
그의 표정은 단호했다.
“자, 받으세요. 이것이 바로 선율님이 짊어져야 할 붉은 십자가입니다.”
카인은 품안에서 낡은 회색 망토 하나를 건네주었다.
붉은 십자가가 새겨진 회색망토[노말(Normal)]<길드휘장>
: 깊은 사연이 느껴지는 낡은 회색망토. 이것에 새겨진 붉은 십자가에선 묘한 힘이 느껴진다. 이것은 매우 특별한 이들에게만 허락된 일종의 증표이다.
능력 : 길드휘장(망토 아이템에 융합해 사용할 수 있습니다.)
특이사항 : 붉은 십자가를 숨기거나 나타나게 할 수 있습니다.
“이건…….”
“마지막으로 선택하실 수 있습니다. 이 붉은 십자가를 짊어질 자신이 있으신가요? 앞으로 선율님에게 주어질 책임과 의무가 결코 만만치 않을 것입니다. 그것을 감당할 자신이 있으시다면… 이것을 받으시면 됩니다. 만약 감당할 자신이 없다면 지금 포기하세요. 일단 이것을 받은 뒤에는 거부할 기회 따윈 없을 겁니다.”
“…….”
율은 조용히 카인이 내민 회색망토를 바라보았다.
지금까지의 율의 인생은 회피의 연속이었다.
피하고… 또 피하고… 그렇게 세상의 모든 것을 피해 여기까지 왔다.
하지만 이제 율은 더 이상 피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선택했다.
‘…이젠 피하지 않는다.’
파앗!
“받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회색망토에 손을 뻗는 율.
카인은 그런 율을 보며 밝게 미소 지었다.
띠링, 비공개 길드 ‘섀도우 로드’의 진정한 길드원이 되었습니다.
띠링, 길드 등급이 [Shadow]에서 [Red Shadow]로 자동 변경됩니다.
띠링, 비공개 길드의 규칙에 따라 강제 길드 탈퇴시 큰 불이익을 당할 수 있습니다.
“선율님, 진짜 섀도우 로드의 일원이 되신 걸 축하드립니다. 앞으로 선율님은 섀도우 로드의 일원이라는 걸 공개하시고 다니셔도 되고… 공개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모든 건 선율님의 자유입니다. 단! 섀도우 로드의 길마 가츠의 긴급명령이 떨어지면 그땐 무조건 그 명령에 따르셔야 합니다. 그게 섀도우 로드의 유일한 규칙입니다. 그리고… 기회가 되신다면 얼음 대륙에 있는 비밀 아지트를 한번 방문해 주세요. 그밖에 다른 세세한 것들은 언제라도 저한테 문의하시면 제가 답변해 드릴 겁니다. 뭐, 길드의 대화 채널은 활성화하셔봤자 얘기하는 이들도 없을 테니… 저에게 직접 편지를 보내주세요.”
카인은 간단한 섀도우 로드의 규칙을 설명해 주었다.
특이한 것은 비공개 길드였던 섀도우 로드가 별다른 규칙이 존재하지 않는 자유로운 길드라는 점이었다.
보통의 비공개 길드들은 수많은 규칙을 세워놓고 그 규칙을 엄격하게 적용했다.
하지만 섀도우 로드는 오로지… 길드마스터인 가츠의 긴급명령만 따르면 된다는 규칙이 있을 뿐이었다.
거기에 원한다면 길드 가입을 숨겨도 된다니, 과연 섀도우 로드가 왜 사람들의 눈에 잘 띄지 않는지 이해되었다.
“자~ 이제 진짜 끝입니다. 긴급 연락은 꼭 저에게 먼저 하세요. 절대… 무조건… 그 근육… 가츠 놈에게 하면 안 됩니다. 후우~ 차차 알게 되겠지만 어지간해서는 가츠를 따라다니지 않는 게 좋습니다. 진짜… 제대로 꼬이고 꼬인 검마노 생활을 하고 싶다면 적극 추천하는 방법이기도 하죠.”
카인은 고개를 흔들며 마지막 당부를 했다.
“그리고 혹시라도 가츠를 보면 저한테 당장 연락해 주세요. 벌써 6개월(게임시간)째 놈을 못 잡고 있습니다. 이대로라면… 또 무슨 대형 사고가 터질지 몰라요. 꼭 잡아서 얼음 대륙으로 다시 데리고 가야 합니다.”
당부에 또 당부를 하는 카인.
그런 카인을 보며 율은 그저 웃을 수밖에 없었다.
‘가츠 형… 진짜 평범하지 않아.’
애초에 가츠가 평범하다는 생각을 한 적은 단 1초도 없었지만 카인의 말을 들어보니 더욱더 평범하지 않다는 생각이 드는 율이었다.
“그럼, 다음에 또 뵙도록 하죠.”
다시 고개를 숙이며 작별 인사를 하는 카인.
진짜 가츠와는 완전히 상반된 스타일의 카인이었다.
“네, 그럼 다음에…….”
율도 그런 카인에게 작별 인사를 하며 황급히 고개를 숙였지만 이미 카인은 그림자 속으로 사라진 후였다.
“…빠르네.”
율은 카인이 사라진 곳을 바라보며 슬며시 웃었다.
“전혀 다르면서도… 한편으로는 비슷한 건가?”
가츠와 카인.
그 둘은 진짜 상반된 스타일을 지녔지만 그럼에도 왠지 서로 비슷한 점이 느껴졌다.
아주 오래전… 검마노가 서비스되고 얼마 되지 않아 만들어졌다는 섀도우 로드.
섀도우 로드의 중심에 존재하는 가츠와 카인은 그때부터 친구였다고 전해졌다.
어쩌면… 그들이 그렇게 친구가 되고 힘을 합쳐 섀도우 로드를 만든 건, 서로 완전히 다르면서도 한편으론 비슷한 점이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나저나… 진짜 붉은 십자가를 짊어지게 됐네?”
율이 손에 들고 있는 회색망토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가츠에게 이끌려 섀도우 로드에 가입했을 때만 해도… 그저 유령 길드원이나 될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냥 가츠와 인연을 맺은 것으로 끝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가츠는 자신을 진짜 섀도우 로드의 일원으로 받아들인 것이었다.
“…어쩌면 이 모든 것이 운명 아닐까?”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운명이라는 걸 절대 믿지 않았던 율이지만… 그의 생각이 바뀌고 있었다.
“이게 진짜 운명이라면…….”
율이 회색망토를 천천히 펼치며 위로 들어올렸다.
“나에게 다가온 인연들이라면…….”
펄럭!
회색망토를 등 뒤로 둘러매는 율.
“피하지 않는다. 도망가지 않는다.”
율은 웃었다.
그 어느 때보다 크게 웃었다.
“이제부터 나는… 앞으로 나아간다!”
율의 다짐.
바로 여기부터였다.
모든 것은… 여기부터 시작될 것이다.
봄도 여름도… 그렇다고 가을도 겨울도 아닌 13월의 전설은 이렇게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1권 끝, 2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