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떠나기 전……
단 며칠… 누군가에겐 그저 아무 의미도 없었을지 모르는 이 며칠이 또 다른 누군가에겐 엄청난 큰 의미를 지닌 날이 될 수도 있었다.
율이 그랬다.
단 며칠뿐이었지만 율은 그동안 많은 것을 깨닫고 배웠다.
율은 그 깨달음을 다시 잊지 않기 위해 머릿속에 새기고 또 새겼다.
어느 정도 만족할 만큼 검마노에 대한 공부를 마친 율은 다시 검마노에 접속했다.
본의 아니게 며칠 정도 쥬신대의 수업을 빠졌지만 큰 문제가 될 건 없었다.
율은 그동안 등한시했던 학업도 빠르게 끝마칠 생각이었다.
한때는 부모님이 자신에게 무관심하다고 생각했고, 그 결과 어리광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투정들을 너무 많이 부렸었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달라졌다.
부모님이 자신을 쥬신대에 보낸 것만으로도 그분들이 자신을 꾸준히 생각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아직은… 완벽하게 자신을 둘러싼 모든 사람들에 대한 생각을 정리한 게 아니었지만 가츠의 말대로 하나씩 천천히 바꾸며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승급 시험을 보겠다고요?”
쥬신대 학부지원과 소속 교수였던 에를렌이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네.”
“그것도 그냥 승급 시험도 아닌… 3학년 전문 과정 승급 시험을요?”
“네.”
율이 차분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런데… 3학년 전문 과정 승급 시험의 조건은 알고 계시나요? 최소 레벨 170이상에 적어도 3가지 이상의 스킬들을 마스터 등급까지 올려놓아야 시험을 볼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집니다. 물론 이건 그저 최소 자격이고… 보통 합격하는 이들은 레벨이 200에 가깝고, 스킬들은 5가지 이상 마스터에 올려놓은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런데 지금 학생은…….”
에를렌은 지금 자신에게 승급 시험을 보겠다고 말하는 유저가 누구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도대체 이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네, 다 알고 있습니다. 물론 저도 당장 시험을 보겠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제가 알기론… 승급 시험을 보기 위한 특별 휴학제도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최대 3년(게임시간)까지 휴학을 인정해주고, 그 뒤에 승급 시험에 합격하면 곧바로 승급을 시켜준다고 들었는데요. 맞나요?”
“…그건 맞습니다. 하지만…….”
에를렌은 뒷말을 더 하려다 멈추었다.
사실상 아무도 승급 시험을 위한 휴학을 3년까지 쓰지 않았다.
그럴 바에야 그냥 수업을 들으며 차근차근 올라가는 게 훨씬 더 편했다.
물론 3학년 전문과정과 율의 현재 과정과의 차이는 대략 4년(게임시간) 가까이 났기 때문에… 율이 시험에만 합격할 수 있다면 1년(게임시간)이라는 시간을 단축시킬 수 있는 것이었지만 그 누구도 이러한 모험을 하지 않았다.
“저는 그걸 신청하러 온 것입니다.”
“…….”
원칙상 율의 요청은 아무 이상이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에를렌은 과연 이것을 받아줘야 할지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신청을 받아들이자니 왠지 한 학생의 철없는 도전을 부추기는 것 같아 꺼림칙했고, 안 받아들이자니 명분이 없었다.
“자신 있으신가요? 승급 휴학을 사용하시고 승급하지 못하면 자칫 큰 불이익을 받으실 수도 있습니다.”
“괜찮습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그것은 제가 감당해야 할 저의 책임이겠죠.”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율.
그는 이미 마음의 준비를 모두 끝낸 상태였다.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그 신청을 접수해드리겠습니다. 아마 정확한 휴학 일정은 일주일(게임시간) 내로 개별 통보될 겁니다. 학생의… 건투를 빌어드리죠.”
고개를 끄덕이며 율의 신청을 받아준 에를렌.
찜찜한 기분이 들었지만 당사자가 이렇게까지 적극적으로 나오는데 더 이상 어쩔 수가 없었다.
* * *
일단 계획대로 승급 휴학 신청을 끝낸 율은 곧장 빛의 망치의 장인들을 만나러 갔다.
휴학 일정이 나오면 바로 쥬신 시를 떠날 것이었기 때문에 미리 인사를 해두려는 것이었다.
처음엔 그저 그들에게 배우는 여러 가지 기술들이 재미있었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 한곳에는 언제라도 기술 배우기를 그만두고 떠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젠 그들에게 배우는 기술보다 그들이 소중했다는 걸 깨달았다.
자신의 마음이었지만 자신이 잘 몰랐던 부분들.
율은 그런 부분들을 하나씩 알아가는 중이었다.
“어디로 가려고?”
전주비빔밥이 아쉬운 표정으로 율을 바라보았다.
처음 만났을 때는 그저 광고용으로나 이용하자고 생각했었던 율이었지만, 어느새 율은 그의 소중한 수제자가 되어 있었다.
“그냥 여기저기요. 특별히 정하지는 않았어요. 그동안 잘 몰랐는데 세상이 참 넓더라고요.”
이 세상도, 저 세상도… 모두 넓다는 걸 깨달았기에 더욱 떠나고 싶은 율이었다.
“그래, 다양한 경험이야말로 진정한 자신의 자아를 발견하는데 큰 도움이 되는 법이지. 하지만 조심해라. 검마노의 세상은 생각보다 더 위험한 곳이다. 그리고 잊지 마라. 넌 이 위대한 요리 마스터 전주비빔밥님의 유일한 제자라는 것을… 어딜 가든 절대 대충 허기나 때울 수 있는 삼류 음식은 멀리 해라. 어지간하면 네가 직접 요리해서 무조건 최고의 음식을 먹어라.”
참으로 전주비빔밥다운 충고였지만 율은 진심이 느껴져서 무척 좋았다.
“네, 꼭 명심할게요.”
“좋아~ 그 마음가짐을 계속 기억하도록. 그리고 이건… 아마 네가 여행하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거다.”
전주비빔밥이 고개를 끄덕이며 선반 위에서 커다란 상자하나를 꺼내 율에게 건넸다.
“이게……?”
검은색 나무 상자는 한눈에 봐도 예사 물건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내가 소싯적에 여행을 하며 유용하게 쓴 것이다. 이래봬도 무려 레어 아이템이다. 아마 너에게 꼭 필요한 물건이 될 거야.”
전주비빔밥이 확신에 찬 표정으로 얘기했다.
율은 도대체 이것이 무엇이기에 그가 이렇게까지 확신에 차 자신에게 필요한 물건이라고 하는지 궁금했다.
‘도대체 뭐기에?’
율은 궁금한 표정을 지으며 조심스럽게 검은 상자의 아이템 정보를 확인해 보았다.
이동용 만능요리도구 상자[레어(Rare)]<특수장비류>
: 전설의 그랜드마스터 요리사로 유명했던 자이먼이 직접 디자인한 최고의 만능요리도구함. 대략 10,000여 개가 한정 생산되었지만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르며 이젠 거의 온전히 남아 있는 게 몇 개 없는 희귀한 물건이다. 어떤 전설에 의거하면 자이먼은 이 요리도구에 자신의 모든 요리 비법이 숨겨져 있는 곳을 표시해놨다고 한다. 물론 그건 그저 전설일 뿐이다.
능력 : 요리 성공률+5%, 완성된 요리의 유통기간(+2일)
특이사항 : 특수한 마도시대의 공간 확장 마법이 걸려 있어 수많은 각종 요리 도구들이 들어 있지만 무게는 거의 나가지 않는다. 단, 이 상자에는 지정된 요리도구만 집어넣을 수 있다.
레벨제한 : 없음
스킬제한 : 요리스킬숙련도(패시브) 익스퍼트(숙련자) 이상
아이템을 확인한 순간 율은 그저 웃을 수밖에 없었다.
전주비빔밥은 그의 소중한 추억이 담겨 있을 것이라 예상되는 물건을 율에게 넘겨주었다.
요리사라면 누구라도 자신의 요리 도구를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법.
그런 의미에서 율은 전주비빔밥의 마음을 진하게 느낄 수 있었다.
“형… 아니 싸부!”
율은 처음으로 전주비빔밥에게 사부라는 호칭을 사용했다.
“사부는 무슨… 됐다. 그냥 계속 형이라 불러라.”
쑥스러운 듯 얼굴을 붉히는 전주비빔밥.
참으로 이상하게 첫 만남을 가졌던 그 두 사람이 이젠 서로를 보며 기분 좋게 웃을 수 있는 사이가 되었다.
이것이 바로 사람 사는 세상이었고… 율이 앞으로 좀 더 알아가야 할 세상이기도 했다.
율은 전주비빔밥을 시작으로 열혈망치와 나머지 마스터들도 모두 만났다.
심지어 자신이 배우기를 거부했던 4명의 마스터들에게도 찾아가 예전의 철없던 자신의 행동을 사과했다.
율은 어쩌면 자신이 조금만 더 일찍 지금의 깨달음을 얻었다면 자신은 섀도우 로드가 아닌 빛의 망치에 소속되어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일까?
그는 마치 빛의 망치가 제2의 길드라도 되는 것처럼 소중하게 느끼고 있었다.
그런 마음을 가지게 된 이유에는 길드원도 아닌데 그를 반갑고 소중하게 대해주는 마스터들의 태도도 큰 영향을 미쳤다.
이미 율을 공동 전인으로 인정하고 모든 마스터들이 그를 제자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율을 특별하게 대접해주었다.
전주비빔밥이 그랬듯이 나머지 11명의 마스터들도 각자 자신이 갖고 있던 물건을 하나씩 내놓았다.
그것들이 대단한 아이템이거나 엄청난 값어치를 지니고 있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율은 그 물건들을 통해 그들의 진심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고, 그걸로 큰 행복을 느낄 수 있었다.
율은 진심으로 열두 명의 마스터를 모두 자신의 스승으로 여기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그들이 원하는 ‘위대한 장인’에도 기필코 도전해보겠다고 다짐했다.
* * *
낡은 대장장이 망치[노말(Normal)]<대장기술 장비류>
: 낡았지만 장인의 손때가 느껴지는 망치. 묘한 현기마저 느껴진다.
능력 : 모든 종류의 대장기술에 사용된다.
특이사항 : 스승의 채취가 남아 제자에게 가르침을 전해준다.
특수능력 : 아주 드문 확률로 특수한 대장기술을 사용할 수 있게 해준다.
레벨제한 : 없음
스킬제한 : 대장기술스킬숙련도(패시브) 익스퍼트(숙련자) 이상
기계공학 도구 세트[매직(Magic)]<특수 장비류>
: 기계공학 마스터인 TNT가 직접 제자인 율을 위해 만든 기계공학 도구 세트. 현존하는 모든 기계공학 도구를 아주 간편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하나의 원통형 통에 모두 넣었다.
능력 : 기계공학숙련도+2%
특이사항 : 약간 무리해서 설계한 물건이라 자칫 엉뚱한 도구가 튀어나와 위험할 수도 있다.
레벨제한 : 없음
스킬제한 : 기계공학스킬숙련도(패시브) 익스퍼트(숙련자) 이상
간단한 보석세공도구 뭉치[노말(Normal)]<세공 장비류>
: 매우 간단한 보석세공도구 뭉치였지만 아주 오랜 기간 누군가 사용한 흔적이 남아 있다. 그리고 그 흔적에는 고스란히 장인의 손길이 남아 있다.
능력 : 모든 종류의 보석세공에 사용 가능
특이사항 : 도구에 한 글자의 글귀가 적혀 있음[보석세공은 도구로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하는 것이다.].
레벨제한 : 없음
스킬제한 : 보석세공스킬숙련도(패시브) 익스퍼트(숙련자) 이상
대나무 낚싯대[레어(Rare)]<특수 장비류>
: 정말 보잘것없어 보이는 낚싯대이지만 이것으로 세상에 낚지 못할 존재는 없다. 전설의 낚시꾼 강태공이 남긴 그 낚싯대와 비슷하게 생긴 것도 특징이라면 특징이다.
능력 : 미끼를 끼우지 않아도 낚시를 할 수 있음.
특이사항 : 마음으로 낚시를 하는 이들만 사용할 수 있는 특이한 낚싯대.
레벨제한 : 없음
스킬제한 : 낚시스킬숙련도(패시브) 익스퍼트(숙련자) 이상
재봉 도구 세트[매직(Magic)]<특수 장비류>
: 재봉에 필요한 모든 도구가 들어 있는 작은 상자. 겉에는 ‘더 넓은 세상을 보고 더 멋진 남자가 되어 돌아와라.’라고 적혀 있다.
능력 : 재봉스킬숙련도 +2%
특이사항 : 약간 무리해서 설계한 물건이라 자칫 엉뚱한 도구가 튀어나와 위험할 수도 있다.
레벨제한 : 없음
스킬제한: 재봉스킬숙련도(패시브) 익스퍼트(숙련자)이상
세상의 모든 식물[노말(Normal)]<도서류>
: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종류의 식물에 대해 기록된 도서. 두께가 상당해 다 읽으려면 꽤 오랜 시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
능력 : 완독 시 (모든 식물에 관련된 학문지식) +10
특이사항 : 완독 시 원하는 내용을 생각하는 것만으로 언제라도 펼쳐볼 수 있다.
레벨제한 : 없음
스킬제한 : 채집스킬숙련도(패시브) 익스퍼트(숙련자) 이상
무한의 붕대[레어(Rare)]<특수 장비류>
: 무한정 사용할 수 있는 붕대. 이 붕대의 가치를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치료에 사용되는 붕대라면 무한하게 사용할 수 있다.
능력 : 치료용 붕대 생성(무한)
특이사항 : 치료용으로 사용하지 않을 경우 그 즉시 사라짐.
레벨제한 : 없음
스킬제한 : 응급치료스킬숙련도(패시브) 익스퍼트(숙련자) 이상
율을 가르친 마스터들은 각각 준비했던 물건을 율에게 전해주었다.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비록 율에게 가르침을 전하지는 못했지만 다른 마스터들처럼 율을 공동 전인으로 여기고 있던 나머지 4명의 마스터들도 타투 입문서부터 건축설계기초 스킬 북, 초보자용 채광용 곡괭이, 대륙 지도 세트까지 각각의 선물을 율에게 주며 꼭 자신들의 생산 기술도 익혀줄 것을 당부했다.
물론 율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꼭 열심히 익혀보겠다고 대답했다.
빛의 망치 장인들에게 너무나 많은 것을 받은 율.
단순히 아이템들만 받았다면 모를까… 거기에 그들의 마음까지 듬뿍 얹어서 받았기에 율의 어깨는 더욱 무거워졌다.
하지만 무거워진 어깨보다 따뜻해진 마음이 더 기분 좋았던 율.
그는 이렇게 대충 떠날 준비를 끝내가고 있었다.
전주비빔밥에게 얘기했듯이 어디로, 어떻게 떠날지는 결정하지 않았다.
게임시간으로 3년.
현실시간으로 1년.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었다.
율은 이 시간을 그동안 자신이 잃어버리고 살았던 것들을 하나씩 되찾아볼 생각이었다.
아직은 부족한 게 더 많은 그였지만… 여행을 끝낸 후의 그는 어떤 이가 될지 아무도 몰랐다.
그저 지금과는 많이 다른 이가 될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예상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