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인연(因緣)인가? 악연(惡緣)인가?
화르륵!
율의 양손에서 불꽃이 솟아올랐다.
현재 그에게 힘을 전해주는 영혼은 불꽃의 나르엘이었다. 원소마법사로서 특히 화염계열 마법의 대가였던 나르엘은 오천 년 전 있었던 제1회 마법대전(魔法大戰)에서 우승한 대단한 마법사였다.
물론 당시는 마나의 힘보단 포스의 힘이 더 강세를 떨치던 시대이긴 했지만, 마법대전은 모든 마법사들이 옛 영광을 되찾고자 만들었던 일종의 대표 선발전이었다.
모든 마법사들 중 최고가 된다는 건 보통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했다.
나르엘과 같은 경우는 선천적으로 불에 대한 친화력을 타고나 화염마법을 누구보다 더 완벽하고 자연스럽게 사용할 수 있었고, 이 능력을 이용해 최고의 마법사가 되었다.
율에겐 이러한 나르엘의 친화력마저 전해졌다.
그래서일까?
율의 화염마법은 낮은 랭크(1랭크)임에도 불구하고 그 존재감이 보통이 아니었다.
퍼퍼펑! 꽈광!
간단한 2클래스의 파이어 볼이었지만 두 발이 동시에 목표에 작렬하며 ‘썩은 나무 정령’을 불태워버렸다.
쿠르륵!
힘없이 쓰러지는 썩은 나무 정령.
레벨이 40이 넘는 몬스터였지만 거의 상극이라 할 수 있는 화염마법에 율이 나르엘에게 이어받은 불 속성 친화력이 위력을 더하며 깔끔하게 해치울 수 있었다.
띠링, 화염마법 숙련도(패시브)가 0.231올랐습니다.
띠링, 화염마법 숙련도(패시브)가 숙련도 100을 채우며 랭크 2로 상승되었습니다.
띠링, 파이어볼(2서클)의 스킬 숙련도가 0.012올랐습니다.
……
……
‘점점 더 좋아지는군.’
율은 고개를 끄덕이며 푸른 숲을 사냥터로 결정하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이곳은 특히 화염마법의 대가인 나르엘의 영혼에 완전히 특화된 사냥터였다.
거의 대부분의 몬스터들이 화염마법과 극성인 나무[木] 속성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나르엘의 마법은 이곳에서 강력한 위력을 발휘했다.
다른 저레벨 유저들에겐 최고의 짜증 유발 스킬인 썩은 나무 정령의 썩은 나무뿌리 묶기(4초간 이동을 제한하고 강력한 독(毒) 피해를 입힘)도 율은 불꽃회오리(광역 화염 공격, 독을 태워버리는 효과도 지니고 있음)로 가볍게 막을 수 있었고, 푸른 숲 전체에 퍼져 있는 검은 독벌의 독침 공격은 율의 몸에 걸려 있는 화염보호막(일정량의 데미지를 흡수, 일정 확률로 공격자에게 화염 데미지를 입힘)을 뚫지 못했다.
이래저래 율에겐 정말 좋은 사냥터가 되어버린 푸른 숲.
물론… 딱 여기까지는 좋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결코 좋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 점점 강해지고 있었다.
“왼쪽인가?!”
“아니야! 정면이야!”
여기저기서 갑자기 들려오는 외침들.
율은 갑자기 들려온 외침에 놀라며 잠시 사냥을 멈추고 뒤로 물러났다.
평화롭기만 하던 푸른 숲에 일어난 변화.
물론 본래 이런 모습이 푸른 숲에 잘 어울리는 모습이었지만 정작 율은 그걸 모르고 있었다.
‘뭐지?’
“막아!”
“으아악!”
“커어억!”
갑자기 들려오는 비명소리.
검마노는 통각 설정을 최대 10%에서 최대 20%까지 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통각 설정을 20%한다고 해서 얻는 큰 이득은 없었다. 하지만 통각 설정이 너무 낮을 경우 전투에서 아주 미묘한 차이를 느낄 수 있기 때문에 대부분의 유저는 20%의 통각으로 게임을 즐겼다.
20%라는 수치는 결코 높지 않은 수치였지만 그렇다고 무시할 수 있는 수치도 아니었다.
물론 유저가 쇼크를 받을 정도의 충격은 시스템 차원에서 미리 차단하지만, 유저가 견딜 수 있을 만한 충격은 그대로 적용시켜 그것의 20%를 직접 느낄 수 있게 했다.
예를 들어, 검에 찔려 치명적인 일격을 당하면 적어도 송곳에 가볍게 찔린 정도의 아픔은 느낄 수 있었다.
특히, 직접적으로 피가 튄다거나 몸이 절단되는 경우는 없었지만 최소한의 효과로 무척이나 리얼하게 표현하는 검마노의 리얼리티 그래픽 효과 때문에 아픔과는 별도로 절로 비명소리가 나오는 건 당연했다.
생각해봐라.
자신의 어깨를 관통한 검.
팔을 태워버린 화염.
다리뼈를 부러트린 충격.
비록 아픔이 적다고 해도 이 모든 과정이 확실하게 느껴지기 때문에 비명소리는 저절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들려온 이 비명소리는 누군가 큰 충격을 받았다는 뜻이 될 수 있었다.
‘PK?’
푸른 숲 자체는 자유 PK지역이 아니었다.
푸른 숲에서 수정 동굴 안쪽과 그 입구 근처만 자유 PK지역이었다.
하지만 자유 PK지역에서 전투를 벌일 경우, 그 지역을 벗어나더라도 전투를 풀고 ‘수호주문서’를 다시 사용하지 않는다면 여전히 자유 PK지역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파파팟!
율이 PK를 생각한 그 순간 그의 앞으로 갑자기 세 명의 유저가 뛰쳐나왔다.
얼굴 표정만 보아도 얼마나 다급한지 알 수 있을 것 같은 세 명의 유저.
그들은 대충 겉모습만 봐도 한계 레벨인 250을 찍은 만 레벨 유저들이 확실해 보였다.
“비켜!”
율을 발견한 그들이 율을 밀치며 앞으로 뛰쳐나가려 했지만 그런 그들의 의도는 성공하지 못했다.
일단 율은 나르엘의 독문 비기(秘技)였던 플레임플래시(일종의 블링크 계열 마법. 랭크가 높아질수록 이동할 수 있는 거리도 길어진다)를 이용해 도저히 20레벨 대의 저레벨 유저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움직임을 보여주며 매끄럽게 그들을 피해 뒤로 물러났고, 그와 동시에 그들과 율의 앞쪽에 또 다른 한 명의 유저가 길을 막으며 나타났기 때문이다.
쿠쿵!
“버서커!”
“크윽!”
“가츠!”
두 자루의 거대한 도와 검을 양어깨에 각각 하나씩 짊어진 한 남자.
덩치는 그다지 크지 않았지만 가죽 방어구조차 제대로 입지 않아 그대로 노출되어 보이는 그의 맨몸은 인체라는 재료로 만들 수 있는 최고의 조각품 같아 보였다.
검마노에선 실제로 유저의 능력치에 따라 몸의 모습이 변해가는 특징이 있었다.
초기 설정을 어떻게 하든지 자신이 가는 길에 따라 분위기와 겉모습이 변한다는 뜻이었다.
기본적인 그 사람의 모습은 그대로 유지되었지만 그 상태에서 조금씩, 하지만 확실하게 변했다.
그래서 검마노를 오래 플레이한 유저들 같은 경우 실제 모습 그대로 게임을 시작했음에도 나중엔 꽤 다르게 변한 경우도 많았다.
그런 걸 감안해 보면 방금 전에 나타난 근육질 몸매를 지닌 유저는 매우 뚜렷한 한 가지 길을 걸어왔을 것으로 예상되었다.
“어딜 가? 먼저 시작을 했으면… 끝은 보고 가야지.”
천천히 미소 짓는 남자.
그는 어깨에 짊어지고 있던 두 자루의 도와 검을 땅바닥에 꽂았다.
퍼퍽!
“자, 늘 그렇듯 선택해야지. 뜨겁게 죽을래… 아니면 차갑게 죽을래? 선택은 자유야.”
붉은색을 띠고 있는 커다란 양손대도와 푸른색을 띠고 있는 커다란 양손대검.
그가 그 두 가지 무기를 가리키며 눈앞의 유저들을 향해 물었다.
앞에서 세 명의 유저가 말했던 그의 별명과 이름.
버서커 가츠.
검마노를 즐긴다고 자부하는 그 많은 유저 중 그를 모르는 이는 거의 없었다.
주로 버서커 또는 광전사라 불리며 검마노 최고의 강자 중 한 명으로 뽑히는 남자.
그는 검마십강이라 불리는 검마노 최고의 유저 열 명 중 한 명이자 검마노에서 가장 신비스럽고 독특한 길드로 여겨지는 ‘섀도우 로드’의 공식 길드마스터였다.
전체 인원이 몇 명인지, 정확하게 어떤 이들이 소속되어 있는지, 또 어디에 메인 아지트가 있는지 아무도 몰랐다.
그 무엇도 제대로 알려진 게 없는 섀도우 로드.
가장 정확하게 알려진 건 길드의 마스터인 가츠와 부마스터인 카인, 그리고 몇 명의 유저들뿐이었다.
알려진 것만 봐서는 조금 특별한 유저들이 모여 만든 소수정예의 소형 길드 같아 보였다.
하지만 섀도우 로드는 결코 작은 길드가 아니었다.
지금까지 딱 세 번, 섀도우 로드가 진짜 모습을 보여준 횟수였다.
5년(게임시간) 전에 있었던 초대형 길드 동방천하(東方天下)와의 전면전, 3년(게임시간) 전에 있었던 검마십강 중 하나인 적풍무적이 이끄는 적풍대와의 충돌, 그리고 가장 최근인 반 년(게임시간) 전에 있었던 신흥 PK길드로 뜨고 있던 블러드고스트와의 심각한 갈등.
결론부터 얘기하면 동방천하는 공식적으로는 휴전을 선포했지만 사실상 섀도우 로드에게 밀려 굴욕적인 후퇴를 하게 되었고(이 일을 계기로 동방천하의 기세가 꺾여 이제는 덩치만 큰 이류 길드가 됨), 적풍대는 비록 전력을 다했던 것이 아니라고 해도 단 한 번의 전투로 섀도우 로드에게 완벽하게 패배하며 선봉이 꺾여 결국 적풍무적이 직접 나서서 사과하는 것으로 더 이상 전투가 커지는 걸 막았다.
그리고 마지막에 있었던 블러드고스트와의 심각한 갈등은 결국 블러드고스트의 완벽한 몰락으로 끝이 났다.
단 하루 만에 이루어진 섀도우 로드의 블러드고스트 섬멸 작전은 지금도 여러 유저들에게 회자되는, 굉장히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이 세 번의 전투 때마다 등장하는 섀도우 로드 특유의 붉은 십자가를 새긴 낡은 회색 망토를 찬 다수의 비밀스러운 유저들.
어느 정도의 숫자가, 어떤 이들이 참여했는지 아무도 모른다. 그저 붉은 십자가가 새겨진 회색 망토가 생각보다 많았다는 소문만 돌 뿐이었다.
물론 검마노의 전체 대륙, 아니 섀도우 로드가 활약하는 동방 대륙만 해도 그들과 비교될 S급 길드들은 적지 않게 있었다.
하지만 섀도우 로드는 그런 길드들과 비슷하면서 또 달랐다.
섀도우 로드는 철저하게 자신의 기준으로 정의를 결정했고 타협도, 회유도, 후퇴도 하지 않았다.
때론 지나칠 정도로 이기적이기도 했고, 어떨 땐 그 어떤 PK들보다 더 잔혹했다.
하지만 그들은 선을 넘지 않았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자신들이 스스로 세운 기준을 철저히 지켰다고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수많은 유저들은 그들을 검마노 최고의 괴짜들로 인정했다.
‘특별하지 않다면 섀도우 로드에 들어올 자격이 없다.’
실제로 섀도우 로드의 마스터인 가츠가 늘 하는 말이었다.
그러한 가츠가 지금 이 자리에 있었다.
가츠와 섀도우 로드는 율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
물론 다른 이들처럼 자세하게 알지는 못하고 단지 가츠가 유명한 네임드 유저이고, 섀도우 로드 역시 유명한 S급 길드라는 사실 정도뿐이었지만 어쨌든 알고 있는 것만은 확실했다.
‘저 사람이… 그 가츠인가?’
율은 두 자루의 커다란 검과 도를 땅바닥에 꽂은 채 여유롭게 웃고 있는 가츠를 바라보았다.
터무니없어 보일 정도로 넘쳐흐르는 자신감.
그리고 알게 모르게 주변을 압도하는 묵직한 기세.
과연 네임드 유저다운 모습이었다.
그에 반해 그를 상대해야 하는 세 유저들의 표정은 꽤 좋지 않았다.
애써 숨기려고 하고 있지만 이미 그들의 눈빛은 겁을 잔뜩 집어삼킨 상태였다.
‘싸우기 전에 이미 승패가 결정 났네.’
억지로 참아도 소용없었다. 그들은 이미 이길 마음 자체가 없었다.
“이 자식!”
“우리를 우습게보지 마라!”
“으아아!”
세 유저는 발악이라도 하듯 가츠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가츠는 마치 예상이라도 했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빠르게 자신이 꽂아 놓은 두 자루의 검과 도를 뽑아들었다.
“선택하지 않았으니… 결과는 알아서 감당하길.”
파파파팟!
붉은색 도에서 뜨거운 화기(火氣)가 솟구침과 동시에 푸른색 검에선 차가운 한기(寒氣)가 분산되었다.
그렇게 가츠의 주력 기술 중 하나인 폭염빙하(暴炎氷河)가 이곳에 모습을 드러냈다.
하늘을 뒤덮는 강력한 화염폭풍.
동시에 땅을 얼려버리는 강력한 얼음안개.
두 가지 기운이 동시에 주변을 휘몰아쳤다.
“커어억!”
“크윽!”
이미 가츠에게 쫓기며 상당한 데미지를 입고 있었던 세 명의 유저에겐 이 폭염빙하를 막을 힘이 없었다.
애초에 그들이 수정 동굴에서 어설프게 독점 사냥을 하려 했던 것부터 잘못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결정적인 실수는 잠시 수정 동굴에 찾아왔던 가츠를 실수로 먼저 공격한 것이었다.
그들 길드는 대략 100여 명의 유저들이 활발하게 활동하는 작지 않은 길드였지만, 그래봤자 섀도우 로드에겐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특히 건드리면 무조건 터진다는, 걸어 다니는 핵폭탄 가츠를 건드렸으니 그 뒷얘기는 더 할 필요도 없었다.
소문대로 가츠는 곧바로 폭발했고, 그는 늘 그렇듯 자신의 기준대로 곧장 전력으로 길드원들을 공격했다.
수정 동굴에 와 있던 길드원은 총 15명.
그 중 7명은 가츠라는 이름을 듣자마자 도망가 버렸고, 5명은 순식간에 가츠에게 게임아웃 당했다.
그리고 남은 세 명.
그 세 명이 바로 이들이었다.
그들은 동료들 5명이 게임아웃 당할 때 간신히 몸을 피해 도주를 선택했다.
하지만 도주는 겨우 몇 초 만에 끝나고 말았다.
한번 물면 절대 놓지 않는다는 가츠가 그들을 순순히 도주하게 놔줄 리 없었다.
치잉!
사방에 몰아치는 냉기와 화염.
그 두 가지 기운을 관통하는 하나의 강력한 기운.
가츠는 어느새 방금 전 들고 있던 두 개의 검과 도보다 훨씬 큰, 자신의 덩치만한 거대한 검은색 검을 들고 세 유저들 사이를 스치듯 지나갔다.
일기일합(一氣一合).
단 한 번의 기운으로 세 명을 동시에 베어버린 기가 막힌 검술.
그것도 보통 검이 아닌 보통 사람은 들기도 힘들 것 같은 거대한 크기의 검을 들고 보여준, 신기에 가까운 검술이었다.
“크으으으.”
쿠쿵!
털썩!
쿵!
세 명의 유저가 모두 쓰러졌다.
이미 폭염빙하로 생명력이 거의 바닥까지 떨어진 그들은 이 가츠의 일기일합을 당해낼 수 없었다. 그런데 쓰러진 건 그 유저들뿐만이 아니었다.
“뭐 이런…….”
남아 있던 마나를 쥐어짜 화염보호막과 플레임플래시를 사용했지만 가츠가 뿜어낸 범위 공격을 막거나 피할 수 없었던 율.
거기에 간당간당하게 버티고 있던 생명력을 한 방에 날려버린 일기일합.
율은 뜻하지 않게 가츠와 한 길드와의 전투에 휘말려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음?”
분명 정당방위로 전투를 치른 것이라 악행수치가 올라갈 일이 없는데, 갑자기 악행수치가 올라가자 그때서야 율이 자신을 공격한 길드와 한패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가츠.
하지만 깨달음이 너무 늦었다.
쿵!
쓰러진 율.
레벨이 20대였던 율이 버티기에는 너무나 강력한 공격들이었다.
아무리 그가 영웅의 영혼을 강림해 놓은 상태였다고 해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이런!”
순간 자신의 큰 실수를 깨달은 가츠.
하지만 이미 율은 죽어버렸다.
원한은 절대 잊지 않고 무슨 일이 있어도 몇 배로 갚고, 은혜 역시 절대 잊지 말고 갚아야 한다는 신념을 지니고 살아가던 가츠.
이번 같은 경우는 은혜도 원한도 아니었지만, 이대로 잊을 수는 없었다.
명백한 자신의 실수였다.
가츠는 잠깐 동안 반투명해지며 사라지는 율의 시체를 바라보며 생각을 정리했다.
“…수호주문서를 사용하지 않은 것으로 봐서는 분명 레벨이 높지 않다. 그렇다는 얘기는…….”
가츠는 고개를 돌려 쥬신 시 쪽을 바라보았다.
이것은 분명 자신의 빚이었다.
욕은 얼마든지 먹고도 살 수 있는 가츠였지만 빚을 지고 살 수는 없었다.
그게 그의 스타일이었고, 그의 인생관이었다.
* * *
화악!
빛기둥과 함께 율은 자신이 지정한 라이프 스톤 앞에서 다시 일어났다.
“…뭐 이런 경우가 다 있지?”
그저 황당함에 웃음밖에 나오지 않는 상황이었다.
“푸른 숲… 그곳이 자유 PK지역이었나?”
분명 가츠와 그가 쓰러트린 유저들은 수호주문서를 사용하지 않고 있었다.
가츠야 원래 수호주문서를 사용하지 않는 걸로 유명한 유저였다지만, 가츠의 상대였던 유저들도 수호주문서를 사용하지 않은 것으로 봐서는 분명 자유 PK지역과 관련이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사람들이 찾지를 않았군.”
율은 그때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어떻게 보면 정말 재수 없는 상황이었다. 경험하고 싶지 않던 죽음을 또 경험했기 때문에 율의 표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가츠를 찾아 복수를 한다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가츠가 고의로 그랬다고는 생각되지 않았지만, 조금 괘씸한 건 어쩔 수 없었다.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율은 굳이 마음속에 뭔가를 담아 놓는 성격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쉽게 잊는 성격도 아니었다.
어쨌든 지금은 다시 다른 사냥터를 알아봐야 했다.
푸른 숲이 위험하다는 걸 몸으로 깨달았으니, 그곳을 제외한 다른 쓸 만한 사냥터를 찾을 필요가 있었다.
“검은 안개 계곡으로 가야 하나?”
아무래도 그곳이 가장 적당할 것 같았다.
율은 혹시 모르니 다시 한 번 지도를 꺼내 꼼꼼히 점검해 보았다.
자신이 모르는 위험이 있는 곳인지 확실하게 체크했다.
괜히 또 이번처럼 어이없게 죽는 건 사양하고 싶은 율이었다.
죽음을 경험했지만 율이 딱히 엄청 손해를 본 건 없었다.
오히려 괜찮은 버프도 하나 걸렸다. 이제 사냥터만 바꾸면 아무 문제가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문제(?)는 다른 곳에서 생겼다.
“찾았다!”
상당히 귀에 익은, 방금 전까지 들었던 것 같은… 그런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가 등장했다.
“다행히 늦지 않았군.”
크게 웃으며 율에게 다가오는 근육질의 남자.
‘가… 츠!?’
율은 갑작스러운 가츠의 재등장에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왜?
도대체 왜 여기에 다시 나타난 것일까?
그리고 그 의문은 가츠의 다음 말에 의해 말끔히 해소되었다.
“너에게 진 빚… 그 빚을 갚아야겠다.”
아무렇지도 않게 빚을 갚겠다고 말하며 율 옆에 선 가츠.
이미 주변의 다른 유저들은 갑자기 나타난 가츠를 알아보고 수군거리며 율과 가츠를 바라보았다.
“방금 전 일 때문이라면 크게 상관 없…….”
율은 괜히 가츠와 같은 유명인과 얽히는 게 싫었다.
그나마 검마노를 플레이하며 여러 사람(그래봤자 빛의 망치의 마스터들이 대부분이었지만)들을 만나 전과는 많이 달라졌다지만 아직까지도 혼자인 게 더 익숙했다.
그런 그였기에 가츠처럼 굉장한 유명인과 함께 서 있는 것만으로도 현기증이 날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그의 생각 같은 건 가츠에게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했다.
“아니, 나는 상관있어. 그러니 꼭 갚아야 해.”
가츠가 누구인가?
강력한 네임드 몬스터를 혼자 잡고 있을 때 유명 랭커들이 파티를 맺고 그의 뒤를 쳐서 죽이자, 무려 넉 달(게임시간) 동안 그 랭커들 모두를 쫓아다니며 기회가 날 때마다 죽이고 또 죽인 지독한 독종이 아닌가.
그런 가츠를 괜찮다는 말 한마디로 떨쳐버리는 건 무리였다.
‘크으…….’
율은 골치가 아파왔다.
가츠가 도대체 어떻게 빚을 갚겠다는 건지 모르겠지만, 마음 같아서는 한시라도 빨리 대충 빚을 갚고 떠나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악연이군.’
율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가츠와 원치 않는 악연을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건 오로지 율의 생각일 뿐이었다.
이것이 진짜 악연인지, 아니면 인연인지… 정확한 건 아직 알 수 없었다.
모든 것은 결국 운명.
율이 검마노와 만났던 것이 운명이었던 것처럼 가츠와 만난 것도 운명일 수 있었다.
어쨌든 그렇게 그들은 기묘한 관계로 얽혀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