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명훈, 천적만나다
구석에 숨어서 명훈이 맞아 죽기만을 기다리고 지켜보던
뼈다귀와 호구, 아니, 명호와 승운은 호흡이 멎는 느낌을
받았다.
설마 이 학교 짱까지 이길거라곤 상상도 못했던 탓이다.
이미 조폭과 연관이 있다는 충열이었기에 그 놀람은 더
욱컸다.
어떻게 쓰러지는지 보지 못했지만, 왠지 하복부의 어떤
부위가 아려오는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정말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여하튼 잠시나마 명훈의 뒤통수 칠 생각을 했던 명호와
승운.
이번 일을 계기로 배신이라는 단어를 머릿속에서 영구히
지워버렸다.
아마 다시는 떠올리지 않으리라.
다짐까지 하는 둘이었다.
왕따 명훈은 운이 아니라 정말 괴물이 되어 나타난 것임
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여하튼 명훈이가 쓰러진 충열이와 뭔가 정답게 이야기
나누는 모습을 주시했다.
그런데 명훈이가 친구 어쩌구 하는 것이 아닌가?
잘못 들었나 싶어 귀를 기울여 보니 갑자기 타격음이 들
려왔다.
황급히 시선을 돌려 명훈을 바라보니 갑자기 발길질을
시작으로 전신 구타를 시작한 것이 아닌가.
그러나 주먹과 발로 부족한지 옆에 굴러다니던 목각을
들더니 다구발을 새우기 시작한 것이다.
하긴 어제 자신들이 맞을 때를 떠올려 보았다.
의자와 마대자루가 날아다니던 치열한 격투!
…라기 보단 일방적인 구타였지만…….
여하튼 다급히 잡념을 머릿속에서 지우고 구타장면을 주
시했다.
그리고 많은 것을 생각 할 수 있었다.
‘인간이 인간을 저렇게 팰 수도 있는거구나….’
‘어떻게 저렇게 팰 수 있지? 저 새끼는 인간이 아닐꺼
다.’
멀리서 보이는 명훈은 들고 있던 목각으로 열심히 팼다.
결국 목각이 부러지자 부러진 것을 왼손으로 마저 들고
두들겼다.
일명 북어패기라는 명칭으로 불리는 공격법이었다.
경쾌하다 못해 흥이 날 정도로 울려퍼지는 타악기의 소
음이 공포로 다가오는 둘이었다.
퍽! 퍼, 퍼벅! 퍽퍽! 퍼버버버벅!
“윽! 어윽! 윽윽윽! 어어어억!”
난타음과 함께 어우러지는 충열의 비명소리.
결국 두 눈을 감았지만, 자신이 맞는 듯한 묘한 감정에
휩싸인 명호와 승운은 결국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저 새끼 뭘 처먹어서 저렇게 변했다냐?”
“씨발 내가 알게 뭐야!”
승운의 짜증 섞인 말투에 명호도 짜증이 났다.
“너 지금 나랑 맞짱 뜨자는거냐?”
명호의 화난 목소리에 승운이 한수 접어줬다.
명호자식이 자신보다 싸움을 잘하기 때문이었다.
“미쳤냐. 그렇지 않아도 정신없는데, 정신 나간 소리 좀
그만해. 새꺄 내가 너랑 왜 싸워 임마.”
“쯥….”
“여하튼, 내가 왜 과거에 저 새끼를 왜 건드려서 이렇게
됐냐.”
“내가 알게 뭐야. 저 자식이 저렇게 또라이가 되서 나타
날 줄 누가 알았겠냐?”
명호의 말에 승운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아, 정말 엿 같다. 계속 학교에 다녀야 하는건가?”
그 말에 승운이 화들짝 놀랐다.
“새까 그럼 너 집 앞에서 맞을래?”
“……”
“그래도 꼬봉이라도 됐으니 다행이지, 그렇지 않아다면
저렇게 맞을 뻔 했잖냐. 다행이라고 생각하자…. 으휴….”
“에휴….”
명호와 승운은 아직도 이어지는 난타소리를 피하고 싶은
지 조용히 귀를 막았다.
벌써 엉거주춤 일어난 녀석들이 있었지만, 악귀처럼 미
친 듯이 충열을 두드리는 명훈은 보며 누구도 선뜻 다가지
못했다.
그들의 시선이 자신들과 명훈 사이에 자빠진 노란머리
녀석과, 그 노란머리 녀석의 머리에 명중한 반이 쪼개진
목각 조가리에 솔려 있었다.
충열이가 열나게 맞는 것을 보고 아픔을 무릅쓰고 먼저
일어난 친구 녀석이 슬금슬금 다가가다 명훈이가 던진 저
쪼개진 목각 조가리에 머리를 정확하게 맞고 기절한 것이
다.
보지도 않고 뒤로 던진 것 같은데, 그렇게 나자빠지자
모두들 어안이 벙벙했다.
그냥 우연이라 생각하고 다시 한 놈이 다가갔지만, 바로
그때 들린 차가운 명훈의 목소리.
“이놈 다 맞은 후, 다음 타자는 나와 가장 가까이 있는
놈이다.”
그로 인해 저 녀석이 자신들을 보고 있다고 깨닫고 튀기
시작했다.
바로 그 순간 다시 명훈의 입이 열렸다.
“모두 스톱. 도망친 녀석은 이 녀석 두 배로 패준다.”
그 한마디에 모두가 굳어 버린 것이다.
결국 지금의 상황까지 오게 된 것이다.
저 성질 더러운 명훈의 모습을 바라보던 그들은 어제의
명호와 승운처럼 고양이 앞의 쥐요, 뱀 앞에 개구리 꼴로
얼어 있었다.
자신들의 친구이자 짱인 충열이를 저 꼴로 만들고 조금
전에 보여준 믿기 힘든 움직임과, 보지도 않고 던진 목각
조각으로 다가가던 녀석을 한번에 기절 시킨 신기.
‘저 자식이라면 정말로 그럴지도 몰라.’
라고 하나같이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정말 알고 있을까?
명훈이는 한다면 하는 성격이라는 것을 말이다.
정말로 그렇게 패줄 의향으로 말한 것임을 누가 짐작이
나 했겠는가?
그들은 운이 좋다면 좋고, 나쁘다면 나쁜 아주 애매모호
한 위치에서 떡이 되도록 맞는 충열이를 바라보았다.
충열이의 얼굴은 이미 울긋 불긋 했다.
화가 나서 그런 것이 아니라 맞아서 부어서 퍼랬고, 부
은 곳은 또 패서 결국 상처가 터지며 붉어진 거다.
전신을 목각으로 패더니 뒤로 휙 집어 던지며 중얼거렸
다.
“에이, 이걸론 감질나서 안 되겠네. 역시 남자는 주먹이
지….”
그 중얼거림을 가까이에 있던 양아치들이 듣지 못할 리
가 없었다.
갑자기 온몸에 닭살이 돋고 소름이 쫙 뻗쳤다.
그대로 주저앉아 버리고 싶을 뿐이었다.
명훈은 그런 녀석들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충열이를
질질 끌고 가더니 벽에 등을 붙였다.
충열이가 허우적거리며 반항했지만, 명훈이 한마디했다.
“이게 아직도 앙탈부릴 힘이 남아 있나? 덜 맞은 건가?”
‘저게 덜 맞은 거라고오오?!’
경악했다.
자신들은 정말 잘못 걸렸음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곧 뼈가 시리도록 맞을 테지만, 아직은 직접 맞지 않았
으니 뼈가 저린 정도로 그친 것이었다.
허둥 바둥 하며 끌려가는 충열의 모습을 보곤 차마 더
이상 볼수 없다는 생각에 모두가 눈을 질끈 감았다.
어째서인지 돼지 한마리가 도살장 끌려가는 듯한 착시
현상을 목격 한 탓이었다.
명훈은 그런 양아치들의 생각에 보답이라도 하듯이 충열
이를 벽에 걸쳐 놓은 체 주먹으로 패기 시작했다.
퍽! 퍽!
쩍쩍, 살과 살이 달라붙는 소리가 들린다.
현기증이라도 일어날 판국이었다.
명훈이는 뭔가 만족스럽고 뿌듯한 듯 웃음을 머금은 미
소로 입을 열었다.
“하하하! 역시 구타는 손맛이지!”
‘구타는 손맛이지, 구타는 손맛이지, 구타는 손맛이지….’
양아치들의 가슴 깊숙한 곳은 후벼 파는 한마디.
마치 마음의 상처이냥 지워지지 않고 남아 있었다.
아니,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실시간 리얼타임으로 들리는 구타음향과 비명소리.
눈을 뜨면 100인치 고화질 HD 텔레비전처럼 선명히 보
이는 구타현장.
저렇게 망가질 순서를 기다리는 자신들은 이곳이 지옥인
것 같았다.
“크하하하!”
퍽퍽퍽!
“억! 억! 억!”
“구타는 손맛이라니까. 구타는 손맛! 크하하!”
“그, 그냐앙… 주겨라….”
“말이 짧네? 남자는 주먹~ 구타는 손맛~ 룽루룬~.”
“아니, 아니아니아니… 주겨주세…요…….”
스르르.
풀썩!
맞다가 지친 충열은 그 말을 끝으로 기절하고 말았다.
맞으면서 생긴 분노와 공포는 맞다보니 결국 모든 고난
과 번뇌를 씻게 되는 계기가 되었고, 그로 인해 충열은 참
인간이 되어 버렸…을 리가 없다.
다만 앞으로는 명훈, 자신 앞에서는 설치며 까불지는 않
을 것이다.
팰 때는 확실하게 패야 한다는 자신의 지론을 오늘도 어
김없이 지킨 것이다.
그가 죽을 거라는 걱정은 전혀 없었다.
자신이 누구인가 검황 아닌가?
사람이 죽지 않을 지경까지만 정하고 팬거다.
물론 병신이 되는 것은 신경 안썼다.
명훈의 요지는 죽지만 않으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충열은 참으로 오래 버텨줬다.
보통 녀석들이었다면 벌써 쓰러지고도 남았을 거다.
역시 맷집이 좋아서 그런지 어제 풀지 못했던 분노를 마
저 풀기에 부족함이 없었던 것이다.
“휴, 다음에 또 한번 붙자. 알겠지?”
명훈의 혼잣말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기절한 충열이가 그 말이 끝나기 무
섭게 경기를 일으키는 것이 아닌가?
마치 어제의 충원이가 떠오를 정도였다.
속 후련하게 패고 이제 충열이 다음으로 자신의 못다 풀
린 분노 및 스트레스 해소용 호구를 찾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충열의 비장한 최후를 목격한 목격자, 양아치 여덟 명.
자신들에게 다가오는 명훈을 보니 도망이라도 치고 싶어
졌다.
그러나 도망치자니 후한이 두려웠다.
그렇다고 맞서자니 이미 공포에 찌들은 몸은 꼼짝달싹
할 수 없었다.
직접 보고 들은(?) 것이 있는데 어떻게 도망을 칠 수 있
겠는가?
어차피 맞을 거라면 조금이라도 덜 맞는 것을 택하고 싶
었다.
그래서 무릎을 꿇었다.
한번만 양해를 봐달라고.
이번 한번만 마지막으로 용서해 달라고….
저 미친놈에게 걸려서 개처럼 맞다가 쓰러진 충열이처럼
되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이런 것을 인과응보라고 하는 건가?
그 순간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
지금까지의 자신들이 저질렀던 잘못들이 주마등처럼 흐
르면서 참회의 눈물을 흘리기 시작한 것이다.
의외의 상황에 명훈은 당황했다.
‘얼래? 내가 벌써 때렸나?’
한참을 곰곰이 생각하니 아니었다.
‘이 자식들 내가 아직 패지도 않았는데 왜 질질 짜고 지
랄들이야?!’
사람 말이라는 것은 아 다르고 어 다르다.
검황의 쫌생이 같은 머리는 같은 상황도 자유롭게 다른
형식으로 바꿔 상상할 수 있는 뛰어난 상상력을 자랑했다.
물론 그 상상력은 타인에게 무한한 해를 주었다.
과거에 검황이 죽었을 때 어째서 초상집이 잔치 집 분위
기였는지를 알려주는 예라 할 수 있었다.
여하튼 명훈이는 자기 멋대로 생각하며 참회의 눈물을
흘리는 여덟 명의 양아치를 그 자리에서 후두려 패버렸다.
다시 신명나는 난타음과 비명소리의 하모니가 허공을 수
놓았다.
차후, 그들의 비명은 사망유희(死亡遊戱)라 불리며 이
고등학교의 전설로 남게 된다.
명훈이는 얼굴이 튄 피를 옷소매로 쓱 닦으며 안으로 들
어갔다.
그러자 좌우로 갈라지며 명훈이가 지나갈 길을 자연스럽
게 만들어 주었다.
명훈은 고맙다고 고개를 까딱거리며 미소를 보여줬다.
명훈은 왕따긴 했지만, 얼굴만은 학교에서조차 인정해주
는 미소년이라 할 수 있었다.
충원이가 명훈이를 더욱 괴롭힌 이유가 명훈이 얼굴 때
문이라는 소문이 돌 정도였으니 말이다.
보기 좋은 미소긴 하지만, 왠지 거림직 하게 다가왔다.
지금까지 이 웃는 얼굴로 사람들 팬 것을 보지 않았던
가?
바로 그때 그 미소를 짓는 얼굴로 머리에서 이마로 한줄
기 피가 흘러내렸다.
주륵.
웃고 있는 얼굴을 타고 턱을 끝으로 바닥에 뚝뚝 떨어졌
다.
사람들은 경악했다.
명훈이가 맞은 장면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피가 흐른다.
명훈이가 자신의 얼굴을 훑었다.
당연히 피가 얼굴에 번진 것은 당연했다.
그것을 태연히 바라보던 명훈.
한마디를 툭 내뱉으며 다시 저쪽으로 달려갔다.
“이런 씹새들이! 맞으려면 곱게 맞지 피는 왜 튀기고 지
랄이야! 지랄이!”
퍽! 퍽!
다시 기절해 있는 녀석들을 발로 차며 패기 시작했다.
그건 거의 광기였다.
학생들은 물론이고 그 자리에는 선생들도 있었다.
하지만, 선생들조차 얼어버린 상태였다.
명훈의 잔혹함에 차마 다가 갈 수 없었던 것이다.
그것은 발정난 개차반과 또라이 개쉬타포역시 마찬가지
였다.
자신들이 손을 댈 수 있는 녀석이 아니라 결정을 내린
표정이다.
다시 노란머리를 구타하던 명훈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 노란머리는 택진이라고 조금 전 다가갔다가 나무에
명중해 기절한 녀석이었다.
정말로 명호는 경고했던 것처럼 그 녀석들 애들 중에서
가장 심하게 팼던 것이다.
주먹으로 패며 깨우더니 다시, 패서 기절 시키고, 기절
하면 패서 깨우고를 세 번 정도 반복하던 악귀 같은 명훈
의 모습이 뇌리 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것이다.
그것을 어떻게 지우겠는가?
잠자리에서 조차 꿈속에 나타나 악몽으로 남을 것만 같
은 장면이었다.
그래서 다짐했다.
명훈이 저 자식은 싸이코다. 건드려봤자 피만 본다. 절
대 건들지 말자. …라고 말이다.
한참 다시 시원하게 팼는지 다시 현관으로 들어서며 멋
쩍은 듯 씨익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아니, 선생님들 수업 안하시고 여기서 뭣들 하고 계세
요?”
“아, 아니 그게 저….”
“하하. 저는 약간 씻구 들어갈게요. 먼저 수업을 진행하
셔도 됩니다.”
“어, 그, 그래.”
명훈은 한번 허리를 꺾고 인사하더니 수돗가로 달려갔
다.
여자애들이 그런 명훈을 한번이라도 더 보겠다는 듯 우
르르 몰려갔다.
물론 무서워서 더 다가가지는 못했지만, ‘멋져, 멋져’를
남발하며 재잘재잘 떠들기 시작하자 끝도 없었다.
큰 사건이 터졌음에도 선생들도 어딘지 기분 나쁘지 않
은 표정이었다.
모든 선생이 명훈의 괴물 같은 모습을 보긴 했지만, 그
냥 건들지만 않으면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거기다가 조금 전 명훈의 시원시원한 말투.
어디 흠 잡을 곳이 없었다.
명훈이 팬 녀석들도 솔직히 이 학교의 이름난 골치덩어
리들이고, 심심하면 패싸움이다 뭐다해서 자신들의 속을
긁던 녀석들이 아니었던가?
사실 선생들도 명훈이가 왕따 당하는 것도 알고는 있었
다.
그러나 왕따 문제는 자신이 직접 나서서 해결하지 않는
다면 자신들이 어떻게 해줄 수 없다는 것을 몹시도 잘 알
고 있었다.
과거 명훈에게서는 그럴 패기도 못 느껴졌고, 결국에는
자살까지 시도 하지 않았던가?
어떤 계기가 있었기에 이렇게 변했는지 알 수는 없었지
만, 나쁠 이유가 무엇이 있겠는가?
앞으로 문제만 일으키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때 개쉬타포가 핸드폰으로 119에 전화를 했다.
“거기 119죠? 여기 패싸움이 일어나서 애들이 크게 다
쳤습니다. 아, 상대방이요? …상대방은 이미 도망쳤구요.
우선 여기위치가…….”
촤악!
시원한 물이 명훈의 얼굴을 깨끗하게 씻어 내렸다.
여기저기에 묻은 핏자국도 지웠고, 수도꼭지에 대고 머
리도 한번 물로 감아줬다.
“아, 속도 후련하고 개운하다. 으쌰!”
장장 두 시간 동안의 일방적인 구타긴 했지만,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명훈은 전생에서도 이렇게 개운하도록 싸워본 것이 언제
인지 아득할 정도였다.
이미 자신은 지존의 자리에 있었기에 누구하나 자신에게
덤비는 이가 없었던 것이다.
처음 위명을 날렸을 때가 떠올랐다.
검황이라는 칭호를 처음 받았던 그 순간.
생각만 해도 흥분된다.
이놈 저놈이 물불가리지 않고 덤벼들었던 것이다.
자신의 삶에서 하오문 때의 삶을 빼고, 그때만큼 신이
났던 적은 없었던 것 같았다.
원하는 만큼 싸웠고, 원치 않을 만큼 덤벼드는 수많은
적들에게 죽을 뻔도 했다.
그러나 행복했다.
자신이 지니고 있는 모든 무위를 펼칠 수 있었기 때문이
었다.
사람들은 그때의 싸움에 ‘뭐뭐쟁투다. 뭐뭐대전이다’ 하
며 이름 붙이고 칭송하기 바빴지만, 그때 싸움터에 있었던
사람들이라면 모두가 생각했다.
세상에 개싸움도 그런 개싸움이 없었다고 말이다.
다만 전투에 참여했던 그들은 모두 생색을 내느라고 다
들 ‘그땐 그랬지’라며 폼이란 폼들을 다잡아댔지만 말이다.
그때 명훈의 눈에 익숙한 누군가가 손을 흔들며 달려오
고 있음을 확인 할 수 있었다.
“헤이 명후운~.”
현민이었다.
명훈이는 현민이의 표정을 보며 반갑게 맞이했다.
어느 세 다가온 현민이가 명훈이의 목을 휘감더니 헤드
락을 걸며 인사했다.
“야! 여기서 뭐해? 수업시간 아냐?”
이미 지쳐있던 명훈.
현민의 등을 탁탁 치며 기브 업을 외쳤다.
그러자 기분 좋게 웃으며 목에 걸었던 팔을 풀어줬다.
“어, 현민이 왔구나? 놀랐잖아.”
명훈의 지친 목소리에 현민이가 짐짓 미안한 듯 대답했
다.
“히히. 장난이야. 장난. 그런데 여기서 뭐해? 수업시간
일텐데? 설마 이번 교시 취는 거야? 선생이 학교에 안나왔
어?”
다시 시작된 현민이의 속사포 공격.
명훈은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냐. 잠시 힘들어서 허락받고 밖에 나온 거야. 지금
씻구 들어가려구.”
그때 현민이 흠칫 놀랐다.
“뭐야, 너 코피 흘렸어? 옷에 웬 피야?”
“아, 아니 그냥….”
현민이만 만나면 왠지 휘둘리는 기분이었다.
속사포 같은 말뿐만이 아니라 자기 혼자 생각하고 답을
내는 현민이의 장단에 명훈은 맞추기 힘들었던 것이다.
“이그 이 바보야. 이렇게 약골들이나 하는 짓을 하니 애
들한테 맞고 다니지. 멍충아!”
현민은 주먹을 쥐고 살짝 명훈의 머리에 꿀밤을 먹였다.
“아야.”
자신도 모르게 흘러나온 명훈의 비명에 현민이 지래 놀
라더니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봤다.
“어? 정말 아픈가 보네? 야, 그럼 양호실로 가야지. 뭐
해 어서 따라와!”
“어, 어….”
명훈은 결국 갈피도 잡기 전에 현민의 질질 끌리듯 양호
실에 가서는 양호선생의 허락을 받고 명훈을 뉘였다.
“너 거기서 푹 쉬다 나와. 선생님한테는 내가 말할 테니
까. 알았지? 그리고 운동 좀 해라. 뭘 믿고 그렇게 약골이
야? 그럼 조금 자라 알겠지?”
그 말을 마치고 현민은 교실로 올라갔다.
그러나 밖에서 현민의 목소리가 들렸다.
명훈을 졸졸 따라다닌 몇몇 여학생들과 마주친 모양이었
다.
그 여학생들은 나름대로 명훈을 질질 끌고 다니는 현민
이가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이름 있는 여자 일진 짱이었
기 때문에 함부로 말도 못하고 쭈물쭈물 거렸다.
“너희들 지금 뭐야? 어서 교실에 안가? 이것들이 빠져가
지고…. 어서가!”
“네 언니….”
“칵! 아참, 너 일학년 아영이지? 이리와 봐. 담배 좀 내
놔봐.”
“저 언니 없는데요?”
“맞고 내놓을래? 그냥 내놓을래? 너 담배 피는거 다 아
는데 지금 빼는 거야? 뒤질래?”
“정말 없어요. 언니. 아침에 담탱이가 압수해 갔단 말예
요. 잉잉.”
아영이란 여학생의 말에 입맛을 다시면 현민.
“쩝. 그럼 내꺼 펴야 하나? 돈도 없는데…. 알았다. 가봐
라. 그리고 뭐 볼게 있다고 양호실 앞은 얼쩡거려? 칵! 어
서 꺼져.”
“네 언니. 안녕히 계세요….”
아영이라는 애들이 사라지는 것을 마저 본 현민.
한참을 두리번거리며 몸을 뒤적이더니 담배하나를 꺼내
들었다.
“에라, 이왕 생각난 김에 한 모금 꼬실리고 들어가야겠
네. 쯥.”
명훈은 밖에서 현민이가 하는 말을 모두 들을 수 있었
다.
저렇게 대놓고 이야기 하는데 어떻게 듣지 않을 수 있겠
는가?
명훈은 피식 웃으며 팔을 머리 뒤로 모아서 팔베개를 했
다.
“훗. 정말 웃기는 애였군. 큭큭.”
명훈은 왠지 현민이라는 여자애의 거침없는 행동이 마음
에 드는 것만 같았다.
여자라고 내숭떠는 것도 나쁘진 않은 명훈이지만, 저렇
게 허울 없이 다가오는 것도 나쁘게 보이진 않았다.
솔직히 지금 현민이가 아니었다면 교실에서 힘겹게 앉아
있었을 것이다.
명훈은 지금 정말 지칠 대로 지쳐있었기 때문이다.
내력이 충만한 것도 아니고, 심폐기능도 약한 명훈이었
기 때문에 이 정도의 움직임을 소화하기엔 무리가 있었던
것 같았다.
사실 조금 전 운동장 수돗가에서 현민이가 살짝 머리를
때렸을 때 골이 울릴 정도였던 것이다.
녀석들을 너무 인정사정없이 패다보니 자신도 모르게 기
력을 다 사용한 모양이었다.
“역시 터무니없을 정도로 약해. 조금 더 내력과 근력을
쌓아야 겠어. 어머니께 아령 좀 사다 달라고 부탁해야
지….”
정말 맥없이 자신을 약하다고 말하는 명훈.
조금 전 자신에게 맞았던 녀석들이 들었다면 경기라도
일으킬만한 소리였다.
조금 전 자신에게 맞았던 녀석들이 들었다면 경기라도
일으킬만한 소리였다.
그 말은 지쳐서 더 이상 때리는 것을 포기했다는 말과
동일했기 때문이다.
명훈은 한참 직사각형에 물결무늬가 있는 하얀 천장을
올려다보고는 힘없이 눈을 감으며 중얼거렸다.
“휴, 그럼 한숨 자볼까?”
눈을 붙이고 뜨니 두 시간 정도 지난 것 같았다.
몸의 근력도 어느 정도 돌아왔고, 피곤도 많이 사라졌음
을 깨달았다.
명훈은 잠시 자신의 몸 상태를 체크해보며 이상이 없음
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자리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은 명훈.
이미 소진되어진 내력이 모두 돌아왔음을 알 수 있었기
에 아직 남아있는 몸의 피로와 놀라있는 근육을 모두 풀기
위해 운기를 시작했다.
마음 편히 삼십분 정도의 운기를 마치고 눈을 뜨자 깊고
맑은 명훈의 눈망울이 드러났다.
“좋은데?”
역시나 였다.
자신이 예상이 옳은 것이다.
이번에도 내력이 늘어났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실전이 정말로 크게 효과가 있음을 알려준 것이었다.
오늘 아침의 두 배 정도크기의 새로운 진기가 단전에 들
어찼음을 확인한 명훈.
펄쩍 뛰고 싶은 만큼 기분이 좋았다.
그러나 지금이 중요할 때였다.
무공은 무식하게 내력만 쌓는다고 다가 아닌 것이다.
뭐, 급한 녀석들 몇몇은 내력을 올려서 환골탈퇴를 시도
하긴 하지만, 성공하는 확률은 지극히 낮았다.
본래 무공이란 내력만이 아닌 정신력과 외공이 바탕인
것이었다.
내력이란 본신의 능력을 몇 배 늘려주는 것일 뿐이지,
그것이 본신의 능력이 아닌 것이다.
그리고 정신력이란 극기에 도전하여 새로운 깨달음을 얻
는 디딤돌이 되어주는 역할을 했다.
이름 있는 명문 정파 애들은 미쳤다고 밤 낯가리지 않고
괜히 칼춤을 춰대는 줄 아는 건가?
정말, 간혹 외공과 내공이 별개라고 착각하는 이들이 있
는데, 이런 놈들은 내력만 모이면 다 되는 줄 알고 속성심
법을 펼치다가 십중팔구 주화입마에 걸리는 녀석들이라 할
수 있었다.
명훈은 전생에 그런 녀석들 치고 잘된 꼴을 본 역사가
없었다.
그놈들 중 대부분이 희대의 악마, 살성, 천살 등등이 이
름의 끝자락에 붙었던 것이다.
대부분 자신이 직접 패죽이긴 했지만, 왠지 그리움이 모
락모락 피어올랐다.
특히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혈천마왕이라 불리던 녀
석.
중원을 홀홀단신으로 정벌하겠다며 이놈 저놈에게 깐쭉
거리다가 결국 검황에게 맞아 죽긴 했지만 말이다.
그러나 혈천마황이란 녀석은 검황 자신도 무시 할 수 없
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검황 담소광 자신도 그의 공격에 죽을 뻔 했다면 믿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렇게 고강하면 뭐하겠는가?
이미 이지를 상실하고 자신의 몸을 마성에 빼앗겨, 뭐가
똥인지 된장인지도 구별 못하는데 말이다.
그는 이미 막무가내로 덤벼드는 미련한 황소에 불과했던
것이다.
명훈은 자신의 가느다란 팔을 내려보며 한숨을 쉬었다.
여하튼 살아남기 위해서 강해져야 한다는 지론.
현세에서도 그 지론이 진실인 것 같았다.
그때 자신이 누워있던 양호실 침대의 커튼이 열리며 누
군가가 들어왔다.
“얼래? 일어났네?”
“현민이구나? 응, 지금 일어났어.”
“큭큭 짜식. 기특하기도 하지. 지금 점심시간이라고 말
해주려 왔지. 너 굶을 까봐 말야. 아, 그렇다고 이 누님의
하해와 같은 마음 씀씀이에 감격할 필욘 없어. 원래 이 누
님은 착하단다. 캬하하하.”
명훈은 정말 기분이 좋은 듯 웃음을 감추지 않았다.
“후후후.”
“짜식 웃긴. 여하튼 밥 잘 먹어라. 밥이라도 잘 먹어야
튼튼해지지. 밥이 보약이란다. 아가야. 킥킥. 여하튼 이 누
님은 이만 간다. 알겠지?”
명훈은 현민이가 간다는 말에 고개를 꺄웃거렸다.
“응? 간다고? 어딜?”
그러자 현민이가 등에 매고 있던 작은 가죽가방을 보여
줬다.
“어딜가긴 피씨방 가지. 얼굴도장 찍었으니 이제 가봐야
지. 교실에 있어봤자 머리만 아프고…. 가서 고스톱이랑
테트리스나 해야지 뭐. 지금 시간에 집에 들어 갈 수도 없
고 말야.”
왠지 약간 침울해 보이는 눈빛을 명훈을 잡아 낼 수 있
었다.
뭔가 자신이 생각하고 있던 현민이와 약간 다른 이질감
이라고 해야 하나?
명훈은 뭔가 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다시 현민이를 부르려는 찰나 현민이가 씨익 웃더니 명
훈의 등을 쌔게 한번 치고 밖으로 나갔다.
“여하튼 이 누님은 이만 간다. 밥 잘 먹고, 알았지? 그
럼, 내일 보자.”
“이, 이봐….”
이미 밖으로 나간 현민이 대꾸할리 만무했다.
명훈은 뭔가 찝찔한 상태로 교실에 올라갔다.
드르륵.
명훈이 없었기 때문인지 좋아라 떠들썩하던 분위기가 명
훈의 등장으로 차갑게 가라앉았다.
탁!
문을 닫고 천천히 자신의 자리에 간 명훈.
조용히 도시락을 꺼내 먹었다.
어느 세 교실에 있던 애들은 자신의 자리에 앉아 입을
다물고 명훈이 밥 먹는 것을 지켜봤다.
믿어지지가 않았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한주먹 거리도 되지 않았던 좃밥이
었던 명훈.
한순간에 싸움꾼으로 변해서 돌아온 것이다.
오늘도 명훈의 신기를 봤다.
어제의 일이 꿈이 아님을 새삼 확인 할 수 있었다.
짱을 포함한 아홉 명을 한순간에 바닥을 눕히는 실력.
어떻게 눕혔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들을 떡으로 만들어서 구급차에 실려 가게 한 사실이
중요한 것이었다.
애들은 명훈이 지금 조용히 밥 먹으며 무슨 생각을 하는
지 들여다보고 싶어졌다.
이제는 명훈의 일거수일투족에 모두 관심이 쏠리는 애들
이었다.
명실 공히 이 학교의 짱이 된 탓이었다.
누구하나 명훈에게 짱이 아니라고 할 수 없었다.
그의 실력을 직접 보지 않았던가?
그리고 그 잔혹한 손속.
아마도 내일이면 이 동내 전체를 떠들썩하게 할 것이다.
바로 그때 뒷문이 열리며 명호와 승운이가 주춤거리며
반으로 들어 왔다.
애들은 흥미 있는 눈길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어제부로 명훈의 꼬봉이 된 그들이다.
그렇지만 속으로는 분명 이를 갈고 있었을 텐데, 오늘의
싸움을 보고 무슨 생각을 했을지 궁금했다.
싸울 때는 선생들조차 무서워서 다가가지 못했고, 싸움
후에는 묵인해 줬다.
그런 상황이었기에 저 녀석들이 어떤 행동을 할지 궁금
해 진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헤헤, 짱. 뭐해?”
“짱 이거 먹을래? 매점에서 사왔어.”
녀석들의 행동에 반애들은 자신도 모르게 웃었다.
그러나 숨을 죽이고 웃을 수밖에 없었다.
명훈이 딱 버티고 자리에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명호와 승운 두 녀석에겐 더욱 신경 쓰였다.
‘푸붓!’ ‘키킥!’하고 웃는 것이 자신들을 비웃는 것 같았
기 때문이었다.
‘저 새끼들이!’
‘참아, 나중에 손봐주면 되.’
둘은 소곤거리며 분을 삭일뿐이었다.
그들은 그 와중에도 여전히 과자 봉지를 든 체 명훈에게
건네고 있었다.
명훈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보다가 피식 웃었다.
그리고는 그 과자 봉지를 받으며 말했다.
“킥킥. 뭐냐 이건.”
“너 주려고 사온 거야.”
“맛있는 거야. 먹어봐….”
둘의 얼굴을 한참 바라보던 명훈이 대답했다.
“킥킥, 그래 좋다. 잘 먹어주마.”
명호와 승운은 명훈이 과자를 받아 들자 기분이 좋았다.
명훈이 자신들을 완전히 받아들인 것만 같았기 때문이
다.
그러나 몰라서 하는 생각이었다.
명훈, 아니 검황은 받는 것은 받는 것이고, 주는 것은
주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승운과 명호 두 녀석이 명훈에게 했던 일을 이
과자 몇 봉지로 넘어 갈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명훈의 기분이 좋았기에 그냥 넘어가 줬
다.
기회는 많이 있기 때문이다.
두 녀석의 정신을 개조해줄 기회는 말이다.
허나, 그러한 사정을 모르는 반애들은 놀랐다.
저렇게 쉽게 용서해 줄 것이라곤 상상도 못한 탓이었다.
그래서 하나같이 생각했다.
‘뭐가 저렇게 시시해? 정말 저걸로 용서해주는 건가?’
아마도, 내일 명훈의 자리에는 과자가 수북히 쌓일 것만
같았다.
반 아이들이 친해지자는 명분으로 사올 과자로 말이다.
다음 날.
명훈은 집에서 나오면서 어머니의 걱정스런 얼굴을 다시
한번 목격했다.
어머닌 학교에서 돌아온 명훈의 옷에 묻은 핏자국을 보
며 눈물을 흘리셨던 것이다.
다시 학교에 나간 명훈이 또 똑같이 괴롭힘을 당한다고
생각하신 모양이었다.
명훈은 그런 어머니를 보며 가슴이 찢어질 듯한 아픔을
느낄 수 있었다.
다시 양아치 녀석들에게 화가 치밀어 오르는 명훈이었
다.
그래서 다짐했다.
앞으로는 절대 옷에 피가 튀지 않도록 패주겠다고 말이
다.
교실에 들어가자 명훈은 흠칫 놀랐다.
애들이 자신의 책상에 쪽지를 붙여놓은 과자를 수북이
쌓아 놓은 탓이었다.
“이, 이게 뭐야?”
명훈은 당혹스러움에 말까지 더듬었다.
그러자 여자애 하나가 얼굴을 붉히며 초콜릿이 듬뿍 들
어있는 상자를 가져오더니 입을 열었다.
“애들이 다시 너랑 친해지구 싶다구 가져왔어. 나두 너
랑 친해지구 싶어서…. 이거 받아 줄래?”
조그맣고 귀여운 여자애였다.
머리 이곳저곳에 살짝 염색한 브릿지도 눈에 들어왔다.
거기다가 교복 마이를 줄여 입었는지 날씬해 보이며 가
슴은 크게 부각되었다.
치마는 짧았는데, 허벅지까지 접어 올려 입은 모습이 누
가 말하는 조금 노는 애 같았다.
명훈이 보기에 스타일이 나빠 보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자신이 조금 더 돋보이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
마음에 드는 명훈이었다.
“좋아. 받아주지. 그런데 넌 이름이 뭐지?”
명훈의 말이 끝나자 애들이 웅성이기 시작했다.
대충 이야기를 들어보니 명훈이 자신이 기억을 잃고 있
다는 소문이 은연중 떠돌았던 모양이다.
그것을 명훈 스스로가 밝힌 것이나 마찬가지니 애들의
놀라움은 클 수밖에 없었다.
그때 명훈이 입을 열었다.
“뭐, 대충 중얼거리는 것들을 들어보니 내가 기억을 잃
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나본데, 그렇다고 너희들이 나에게
했던 행동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조심해라.”
다시 숙연해 지는 분위기.
애들이 고개를 숙이고 침묵했다.
잠시 들떴던 분위기가 명훈의 한마디에 밑바닥까지 가라
앉은 것이다.
그때 명훈이 다시 입을 열었다.
“여하튼 너희가 준 과자는 잘 먹어주마. 고맙다.”
다시 분위기가 웅성이며 애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명훈은 그제야 자신에게 초콜릿 상자를 건넨 여자아이에
게 다시 되물었다.
“그런데 이름이 뭐라고 했지?”
“이미지라고 해.”
“미지? 이미지?”
“응….”
자신을 미지라고 밝힌 여자애가 부끄럽다는 듯이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명훈은 그런 여자애를 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푸하하하! 그게 뭐냐? 미지의 소녀냐? 아니면 이미지
사진이냐? 푸하하하하!’
그러나 이 사회에 잘 살아나가기 위해선 겉과 속은 항시
달라야 하는 법.
명훈은 정말이냐는 듯 밝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쁜 이름이네? 고맙다. 잘 먹을게.”
명훈의 속마음도 모른 체 잔잔한 겉모습에 속아 넘어간
미지.
눈에서 하트모양이라도 그려지는 듯 했다.
미지는 조금 더 용기를 내었다.
“우리 앞으로 친하게 지내자.”
말과 동시에 가볍게 내미는 손은 악수라도 하자는 것 같
았다.
명훈은 그런 미지의 손을 슬쩍 보곤, 자리에 앉으며 말
했다.
“좋아. 잘 지내보자.”
미지는 자신이 힘들게 뻗은 손을 거들떠도 보지 않은 명
훈이 야속하게만 느껴졌다.
인간을 망각의 동물이라 했던가?
그동안 자신이 명훈을 무시해왔던 행동은 이미 그녀의
머릿속에선 남아 있지 않은 듯 했다.
다만 악수를 무시당하자 애들이 보고 웃는 것같이 느껴
질 뿐이었다.
머쓱하게 손을 수거한 미지는 다시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럼 앞으로 잘 부탁해~.”
명훈은 그런 미지에게 오른 손을 들어 알겠다고 수긍해
줬다.
그때 뒷문이 열리면서 현민이가 들어오더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와우! 이게 다 뭐다냐?”
명훈이의 앞자리에 수북이 쌓여있는 과자를 보며 놀란 목
소리였다.
“현민이 왔냐?”
“그래. 누님께서 오셨다. 어쩔래. 킥킥. 그런데 명훈아,
다 이거 네꺼냐?”
명훈이가 인사를 나누면서도 현민이의 시선은 과자에 쏠려
있었다.
명훈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자 현민이가 입을 열었
다.
“와우, 무슨 과자 장사라도 할 생각이냐? 왠 과자를 이
렇게 사왔어? 이 누님에게 헌납 좀 해라.”
명훈이가 수긍하기도 전부터 자신이 먹을 과자를 고르는
현민이었다.
명훈은 그런 현민이를 보고 피식 웃었다.
절반정도를 자신의 자리로 옮긴 현민.
자신의 작은 가죽가방에서 뭔가를 주섬주섬하더니 큰 비
닐봉지를 꺼내서는 과자를 싸그리 몰아 담았다.
명훈은 그런 현민이의 모습에 결국 웃음을 터트리고 말
았다.
“푸하하하! 그 봉지는 뭐야? 하하.”
그러자 현민이가 멋쩍은 듯 입을 열었다.
“새꺄 뭘 웃어. 누님 뻘쭘해지게….”
뻔뻔한 현민의 얼굴이 붉어진 것을 본 명훈은 눈을 휘둥
그렇게 떴다.
설마 현민이 얼굴이 저토록 여성스럽게 변할 것이라곤
상상도 못한 명훈이었다.
그래서 떠뜸거렸다.
“아, 아냐. 장난이야. 괜찮으니 많이 먹어. 그런데 그 봉
지는 정말 뭐야?”
“응? 이거?”
명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 장 볼 때 필요하거든. 이거 없으면 봉지 값으로
50원씩 나가거든.”
약간 쑥스럽다는 표정으로 말하는 현민이었다.
그런 현민이 신선하게만 다가오는 명훈.
다시 되물어보았다.
“그런데 장을 본다구?”
“그럼 당연하지. 먹고 살려면 장을 봐야지. 안 그래?”
“그, 그렇긴 하지….”
그런 식으로 이야기가 얼버무려지자 그제야 현민이의 얼
굴에 다시 장난끼 어린 미소가 그려졌다.
“쳇, 여하튼 잘 먹어주마. 고맙다 짜샤.”
현민이는 그 과자를 만족스럽게 바라보더니 행복한 미소
를 그렸다.
의외로 작은 것에 행복해 하는 현민이었다.
교실에선 애들이 숨을 죽이고 그들 둘의 노닥거림을 지
켜보았다.
현민이도 현민이지만, 저렇게 현민의 푸닥거리를 자연스
럽게 받아주면 명훈이가 신기하게 보였다.
과거 현민이가 명훈이를 챙겨준 것은 사실이지만, 솔직
히 저렇게까지 대해줄 만한 일은 아닌 것 같았기에 애들로
서는 상당히 배가 아팠다.
이미 명훈은 왕따가 아닌 이 학교의 짱 명훈이었기 때문
이다.
특히나 멀리서 명훈과 현민이를 바라보던 미지의 눈에선
질투의 불길이 타올랐다.
현민이가 무서워서 아무런 말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일 뿐
이지 속은 바짝바짝 마르고 있었다.
그때 현민이가 주위를 한번 둘러보더니 명훈에게 속삭이
듯이 입을 열었다.
“야, 너 그거 알아?”
“뭘?”
명훈은 뜬금없는 현민이의 말에 의문을 표했다.
“돼지새끼 있잖아.”
“돼지?”
“아휴, 답답하게도 말 못 들어 처먹네. 충원이 말이야.
돼지 충원.”
그제야 명훈은 피식 웃으며 알아듣겠다는 듯 고개를 끄
덕였다.
“그런데 충원이가 왜?”
현민이가 조심스럽게 뒤를 보며 명훈이에게 대답했다.
“저기 뒤에 봐. 충원이가 학교에 안나왔지?”
멀건히 현민이의 눈짓을 따라 충원이의 자리를 같이 봐
준 명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런데 그게 어쨌는데.”
“이틀 전에 난 충원이가 학교를 땡땡이 친 줄만 알았는
데, 누구한테 떡이 되도록 맞아서 병원에 실려 간거래.”
순간 교실에서 귀를 기울이며 현민이의 이야기를 듣던
애들은 숨이 멎는 것 같은 기분을 만끽 할 수 있었다.
명훈이는 무슨 이야긴가 한참 긴장을 하다가 현민이의
말을 마저 듣고는 피식 웃었다.
“어라어라? 웃어? 충원이가 맞았다는 데 웃어? 하긴 웃
을 만도 하겠다. 널 그렇게 괴롭혔던 녀석이니 말야. 푸하
하. 통쾌하다. 유쾌 상쾌 통쾌! 푸하하하! 내가 그 녀석 설
치고 다닐 때부터 언제 한번 그렇게 될 것 같았다구. 킥킥
킥.”
명훈이가 맞장구를 쳐주며 고개를 끄덕여줬다.
그러고 보니 현민이는 학교에 잘 안 나와서 학교 소식에
늦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시 현민이가 입을 열었다.
“아, 그런데 그게 내가 알아봤거든?”
“뭘 알아봤는데?”
“아, 글쎄 알고 보니 충원이를 팬 녀석이 우리 학교 애
라는 거야. 참나, 난 정말 놀랐다니까? 그런데 우리 학교
에서 충원이랑 붙을 만한 녀석이 있었나?”
현민은 정말 의문스러운 듯 고개를 꺄웃 거렸다.
그러나 정작 애들의 경악어린 표정은 보지 못했다.
만약 봤다면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았으리라.
애들의 경악어린 얼굴이 이렇게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
다.
‘네 옆에 있잖아!’
…라고 말이다.
하지만 아직 현민이의 비밀스런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
다.
“그리고 말야. 충원이 형인 충열이 오빠 말야. 우리학교
짱 말야.”
“응.”
명훈이 싱글거리며 자신의 말에 호응을 잘해주자 기분이
좋아진 현민은 신나서 떠들기 시작했다.
“그 오빠도 누구한테 맞아서 병원에 실려 갔다더라?”
“그래?”
명훈이 쌩뚱맞은 표정으로 대꾸를 하자 현민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마저 이었다.
“그 오빠 유명하잖아. 조폭에서 스카웃했다 뭐했다 하
며. 타 학교에서도 그 오빠 때문에 우리 애들 못 건드리는
거거든.”
뜻밖의 소식에 명훈이 놀라 눈을 크게 떠서 현민이를 바
라보았다.
그러자 현민이가 팔짝뛰며 강조했다.
명훈이의 눈초리가 ‘설마’하는 것 같아 보였기 때문이었
다.
“정말이야. 그런데 그 오빠를 때려눕힌 사람도 우리 학
교 학생이라는 소문이야. 놀랍지? 그치?”
그때 교실에 있던 애들의 표정이 다시 경악으로 변했다.
이번에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 사람도 네 옆에 있잖아!’
…라고 말이다.
하지만, 이야기 하느라 한껏 흥이 난 현민이는 이번에도
그런 애들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그치? 놀랍지? 놀랍잖아~.”
지금까지 잘 수긍해주던 명훈이가 가만히 있자 자신에게
동조하길 원한 현민이 닦달하기 시작했다.
명훈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다른 생각을 하느라 잘 못 들었던 탓이다.
“응, 응. 그래 놀라워. 그런 일이 있었구나.”
현민이가 이번엔 무슨 말을 했는지 알아듣진 못했지만,
수긍하지 않는다면 계속이고 들러붙을 것 같았기에 대충
끄덕여준 것이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그게 끝이 아니야. 그 오빠랑 같
이 어울리는 일진 오빠들까지 아홉명이 단번에 쓰러졌데.
킥킥.”
“어, 그래?”
명훈이 씁쓸하게 웃었지만, 현민이는 알아차리지 못하고
연신 킥킥 거릴 뿐이었다.
“이번 건 뻥이 좀 심하지? 그래도 재밌잖아. 그 오빠들
이 어떤 오빠들인데 한명한테 동시에 아홉명이나 쓰러지겠
어. 킥킥킥킥.”
여전히 신이 난 현민.
명훈은 여전히 씁쓸히 웃었고, 차마 뭐라 말도 못하고
답답한 학급 애들은 속이 터질 것만 같았다.
‘네 옆에 있잖아! 좀 알고 오려면 정확히 좀 알고 왓!’
역시나 관심은 잿밥에 있는 현민이었기에 여전히 그런
애들의 염원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에게~. 별로 놀랍지 않은 표정이다. 췟!”
명훈에게 특별한 반응이 없자 현민은 자신도 모르게 삐
짐 모드로 들어섰다.
“난 일부러 알려주려고 아침 일찍 왔건만….”
그쯤 되자 곤란해진 것은 명훈이었다.
당혹한 표정으로 허둥거리기 시작했다.
요 이틀 동안 냉소적인 모습만 보여줬던 명훈의 모습과
사뭇 이질적으로까지 느껴질 정도였던 것이다.
뭐, 따지고 본다면 왕따에서 짱이 된 것도 상당이 이질
적이긴 하지만 말이다.
“아, 아냐. 정말 재밌었어.”
“췟! 됐네요.”
“아, 아니라니까? 정말로 놀라서 굳은 거였어.”
그쯤 되자 현민의 분위기가 다시 부드러워졌다.
하지만, 명훈은 나름대로 심각했다.
자신이 어째서 이렇게까지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
기 때문이다.
다만 지금은 계속 이렇게 해야만 할 것만 같았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래? 정말이지? 킥킥. 짜식 정말 다 컸네?”
“응?”
“이제는 누님 위로할 줄도 알고 말야. 아주 기분이 좋은
데? 짜샤 앞으로도 이렇게 웃으면서 지내란 말야. 알겠
어?”
“으, 응….”
여전히 명훈은 이해 할 수 없었다.
답답할 정도로 말이다.
현민이만 옆에 있으면 자꾸 그녀의 페이스 휘말려 들어
가는 것이었다.
원치 않음에도 말이다.
기분도 나쁘지 않았기에 묘했다.
그렇다고 그녀를 사랑하는 것도 아니었기에 더욱 황당했
다.
명훈은 마치 그녀를 과거부터 알고 지낸 사람인 것 같다
는 기분이 들었다.
그때 현민이 조용히 입을 열더니 혼잣말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