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장 선택
영완이 내미는 미끼는 시영의 입장에서 거부할 수 없는 마수와도 같았다.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쳐들어온 여진의 화려한 언변에 시영은 미처 거부할 틈도 없이 카메라 촬영을 허락하고 만 것이다.
“그럼 가보겠어요. 시간과 관련해서 따로 연락을 드릴게요.”
“알겠습니다.”
여진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번 특집 방송과 관련해 총연출을 맡은 그녀였기에 한시도 쉴 틈이 없었다.
“미꾸라지 같은 자식! 어떻게든 정면 승부를 하겠다 이거지?”
시영의 입장에서는 사실 정면 승부보다는 지리를 이용한 게릴라식의 전투가 더 좋았다. 자신들이 지리적인 이점을 살린다면 승률이 더 올라간다는 것은 자명한 이치였다.
하지만 늘 그렇듯 영완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응?’
영완에 대한 복수심으로 불타오르던 시영은 창밖을 바라보다가 낯익은 여인을 발견했다.
“희영이가 웬일이지?”
시영이 여진과 만난 곳은 그의 집 근처 카페였다. 희영과의 추억도 깃든 소중한 장소라, 그녀와 헤어진 후에도 시간이 날 때마다 이곳을 오곤 했었다.
“어라?”
카페 주변을 배회하던 희영은 뭔가 고민하는 눈치였다. 그러다 결심이 섰는지 당당하게 시영이 앉아 있는 카페로 들어섰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는가 싶더니 이내 시영이 앉아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시영은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장식에 가려 그녀는 그를 알아보지 못한 모양이었다.
“헛!”
“잘… 지냈어?”
시영을 확인한 희영은 헛기침까지 들이켤 정도로 놀란 눈치였다. 그런 그녀의 반응을 보며 시영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별한 연인끼리 건넬 수 있는 지극히 형식적인 인사.
그런 시영을 보며 희영은 여전히 말도 못하고 있었다.
“여긴 웬일이야?”
많은 속뜻을 내포하고 있는 물음.
희영은 그 물음에 선뜻 답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했다.
“일단 거기 앉아.”
“아니야. 난 저쪽에…….”
“이쪽으로 앉아. 오랜만에 커피나 함께 마시게.”
결국 맞은편에 희영을 앉힌 시영은 그녀가 이곳에서 가장 자주 즐겨 마셨던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그나저나 정말 여긴 웬일인데?”
“그냥…….”
시영의 물음에 희영이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녀답지 않게 뭔가 쑥스러운 얼굴이었다.
“…여긴 자주 와?”
뭔가 비밀스러운 게 있는 것 같았으나, 시영은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지 않고 다른 질문을 했다.
“가끔. 여기 아메리카노 맛있잖아. 그러는 넌?”
“나? 흠… 나도 가끔 와.”
“…….”
“…….”
할 말이 없어진 둘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그러다 먼저 말문이 트인 쪽은 희영이었다.
“…아무래도.”
“응?”
“…아무래도 나 널 아직도 사랑하는 것 같아.”
“…….”
희영의 용기 있는 고백에 시영의 얼굴이 붉어졌다. 하지만 그는 붉어진 얼굴을 하고서도 약간은 냉랭하게 반응했다. 그러나 심장은 미친 듯이 요동치고 있었다.
“기다릴게. 네가 다시 전화해줄 때까지.”
그에게서 당장 대답을 바라지는 않는지 희영은 그렇게 말하면서 자리에서 일어서려 했다.
“갑자기 왜 마음이 바뀐 거야?”
냉랭하기 짝이 없는 시영의 물음. 하지만 희영은 조금도 얼굴을 찌푸리지 않고 입을 열었다.
“내 마음은 이전부터 바뀌지 않았어. 다만…….”
“다만?”
말꼬리를 잇지 못하는 희영을 바라보며 시영이 다급하게 물었다.
“네가 나에 대한 사랑이 식었다고 느껴서 그런 것뿐이야.”
“사랑이 식어? 너에 대한 내 마음이 식었다는 거지, 지금?”
“응. 난 그렇게 느꼈었어.”
희영의 말에 시영은 문득 얼마 전에 영완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네 녀석은 스스로가 변했다고 생각하겠지만, 그건 그저 네 생각일 뿐이야. 옆에서 지켜보는 넌 그저 망나니에 불과했어. 제아무리 널 사랑하는 그녀라 할지라도 그런 모습을 보면서 참을 수 있었겠어? 아직도 그녀를 사랑한다고? 그럼 병신아, 당장 달려가서 그녀에게 사랑한다고 말해! 여기서 질질 짜지 말고!’
영완의 말이 벼락과도 같은 한 줄기 뇌전이 되어 시영의 뇌를 관통했다. 그는 벌떡 일어나며 희영의 손을 잡았다.
“널 사랑해! 나와 결혼해줘!”
* * *
“안녕하세요. 여러분의 사랑하는 MC 가윤이에요. 지금 제가 서 있는 이곳은 임페리얼 길드가 차지하고 있는 아제로스 섬의 중앙 고원지대예요. 어때요? 아제로스 섬의 아름다운 풍경이 보이시나요?”
임페리얼 길드와 르네상스 혈맹이 고원에 함께 모임과 동시에 카메라 촬영은 시작되었다. 하지만 카메라가 돌건 말건 각 진영의 유저들은 잔뜩 긴장해 있었다.
저벅저벅.
저벅저벅.
모두가 숨죽이는 동안 양 진영에서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세 사람이 앞으로 나섰다. 그들 중 덩치가 큰 사내 둘은 각 진영의 표식이 그려진 거대한 깃발을 들고 있었다.
“드디어 이렇게 너와 만나는구나.”
“이것도 다 인연이겠지.”
일정 거리를 유지한 채 천휘와 그랜저는 대화를 나눴다. 마치 오래된 친구처럼 둘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들은 너무도 부드러웠다.
“인연이 아니라 악연이겠지. 그것도 지긋지긋한 악연!”
“큭큭! 그래. 그 악연의 사슬을 오늘 반드시 끊어내고야 말겠다.”
“두말하면 잔소리겠지.”
그러나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 전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평상시처럼 서로에게 이를 갈며 살기를 풀풀 풍겼다.
“오늘이 네놈 제삿날이다.”
“그건 네 생각이고.”
휙- 휙-
둘은 마지막으로 서로에게 독설을 내뿜고는 자신의 진영으로 몸을 돌렸다.
드디어 결전의 때가 도래했다.
“돌격하라!”
“와아아아!”
르네상스 혈맹의 선봉인 카멜과 성기사들이 일제히 함성을 내지르며 앞으로 달려 나갔다.
그들의 손에는 화염의 망치 일족이 직접 제작한 타워 실드와 기사용 랜스(Lance)가 들려 있었다.
“적들을 쳐부숴라!”
“우오오오!”
반면, 임페리얼 길드 진영에서는 철혈의 전사 레만이 선봉으로 나섰다. 그를 따르는 유저들은 흡사 거친 야만인을 연상시킬 만큼 우락부락한 근육을 자랑했다. 게다가 그들의 손에 들린 것은 그 근육만큼이나 무식한 거대 도끼들이었다.
힘과 힘의 격돌!
카멜을 위시한 르네상스 혈맹의 성기사들은 거대한 기사용 랜스를 앞으로 꼿꼿이 세우며 돌격했고, 레만을 위시한 임페리얼 길드의 전사들은 거대한 도끼를 위로 추켜올린 채 발을 놀렸다.
콰앙! 콰앙!
“끄윽!”
“커흑!”
양 진영에서 동시에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바로 선봉에 섰던 카멜과 레만의 것이었다. 워낙 실력이 대등하다 보니 서로를 향한 공격에 타격을 입은 것이다.
“실드 차지(Shield Charge)!”
둘의 대결은 무승부였을지언정 전사들 간의 격돌은 그렇지 않았다.
기사용 랜스로 상대방의 돌격 속도를 줄인 성기사들은 곧바로 거대한 타워 실드를 활용해 실드 차지를 펼쳤다. 모두 실드의 오러를 덧씌울 수 있는 경지에 도달한 덕에 그들의 실드 차지는 거대한 바위도 부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콰앙!
마치 포탄이 지면을 강타하는 것 같은 폭음이 전장에서 연이어 터져 나왔다. 그와 동시에 자욱한 먼지가 고원을 뒤덮었다.
“모두 공격에 대비하세요!”
자욱한 먼지로 인해 시야를 확보할 수 없자 카멜이 소리쳤다. 그에 성기사들이 타워 실드에 몸을 가리며 주변의 소음에 집중했다.
“죽어라!”
“허억! 어느새!”
그러나 임페리얼 길드의 도끼 전사들은 하나같이 은폐 스킬을 익히고 있었다.
은폐 스킬은 자신의 마나와 기척을 감추는 어쌔신 전용 스킬. 하지만 이들은 그랜저의 지원에 의해 특별히 은폐 스킬을 익히고 있었다.
“당황하지 말고 포스 실드를 펼치세요!”
“포스 실드(Force Shield)!”
카멜의 외침에 상대의 은신 공격에 맞서 성기사들이 신성 마법 포스 실드를 펼쳤다.
“소용없다! 그런 종잇장으로는 우리의 도끼를 막을 수 없어!”
“하아압!”
우우웅!
공기를 가르는 파공성이 심상치 않았다. 저들의 말대로 어쩌면 성기사들이 펼친 포스 실드가 깨질 수도 있어 보였다.
그러나 성기사들은 여전히 한 치의 의심조차 없는 눈빛으로 방패를 잡은 왼손에 힘을 실었다.
“실드 브레이커(Shield Breaker)!”
상대 전사들의 도끼가 성기사들의 타워 실드를 두드리기 직전, 카멜이 야수와도 같은 포효를 내지르며 스킬을 전개했다. 그러자 타워 실드 위에 겹쳐졌던 포스 실드가 전방으로 비산하며 마나의 칼날을 만들었다.
“크아악!”
“커허억!”
전세는 역전했다. 실드 브레이커에 의해 포스 실드가 깨지며 마나의 칼날이 휘몰아쳤고, 그로 인해 임페리얼 길드의 전사들은 비명을 내지르며 뒤로 튕겨져 나갔다.
“파워 대시(Power Dash)!”
상대가 튕겨져 나감과 동시에 성기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전방으로 뻗어나갔다. 그리고 어느새 기사용 랜스를 버리고 그들의 오른손에는 각자 주무기로 사용하는 것들이 들려 있었다.
“끝이다!”
홀리 블레이드를 머금은 성기사들의 필살 공격에 임페리얼 길드 전사들 태반이 목숨을 잃었다.
숨 쉴 틈조차 주지 않는 연계 공격!
임페리얼 길드는 그저 단순히 전사들의 조합을 내보냈을 뿐이지만, 카멜을 위시한 르네상스 혈맹의 성기사들은 룬 아일랜드의 강력한 몬스터들을 상대로 늘 대규모 전투를 펼치며 실전 경험을 쌓아왔다.
그들은 애초에 성기사들의 상대가 될 수가 없었다.
부우우!
“으드득! 모두 퇴각하라!”
임페리얼 길드의 진영 쪽에서 나팔 소리가 울렸다. 그러자 레만이 분한 듯 이를 갈며 소리쳤다.
“우오오오! 이겼다!”
“와아아아!”
고원을 울리는 승리의 함성.
르네상스 혈맹은 벌써부터 이긴 것처럼 소리를 내질렀다.
“오오! 여러분, 보셨어요? 저 강대한 임페리얼 길드의 전사들을 상대로 르네상스 혈맹이 압도적인 무력을 선보였어요. 아아, 정말 강하네요. 특히 카오스 팔라딘이라고 불리는 카멜 님, 우람한 덩치가 너무 매력적이네요! 앗! 이번에는 양 진영이 본격적으로 길드전을 벌일 모양이네요! 고원에 살기와 투기가 뒤섞여 번들거리고 있어요!”
MC 가윤의 시끌벅적한 해설에도 임페리얼 길드와 르네상스 혈맹은 상대방에 대한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서로에 대한 탐색을 끝내고 본격적으로 전면전을 펼칠 요량으로 유저들이 각 직업군별로 진형을 갖췄다.
“돌격!”
“돌격하라!”
“으아아아!”
“우오오오!”
조금 전의 격돌로 뜨겁게 달궈진 전장은 유저들을 흥분시켰다. 승리한 쪽도, 패한 쪽도 마찬가지였다.
천휘와 그랜저의 외침에 양 진영이 서로를 향해 빠르게 나아갔다.
최강의 자리를 위한 격돌!
유저들은 한 명이라도 더 상대편을 죽이기 위해 악착같이 움직이고 또 움직였다.
전사들은 무기를 휘둘렀고, 마법사들은 마법을 펼쳤다.
사제들은 아군을 위해 쉴 새 없이 회복 마법을 펼쳤고, 레인저와 궁수들은 빠르게 화살을 날렸다.
치열하고도 팽팽한 접전.
그 와중에 천휘와 그랜저가 중앙에서 만났다.
챙챙!
“기어코 여기까지 찾아오고 말았어.”
“언젠가는 일어날 일이었지. 큭큭!”
병장기가 부딪치는 전장 한복판에서 두 사람은 오직 상대방만을 응시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마치 전쟁 따위는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식의 만남.
그러나 둘 사이에 흐르는 기류는 유저들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싸울 공간을 만들게 할 만큼 흉흉했다.
“긴말 필요 없겠지. 오늘 너와 나, 둘 중 한 사람은 반드시 게임을 접게 될 거다.”
뒤를 돌아보지 않겠다는 그랜저의 말에 천휘가 조소를 흘렸다.
“배수진을 치겠다는 건가. 큭큭!”
“널 반드시 이겨야겠거든.”
알 수 없는 패배감에 젖어 있는 그랜저를 보며 천휘는 얼굴을 잔뜩 일그러트리고는 주먹을 가슴 부근으로 끌어올렸다.
“널 이겨야 하는 건 이쪽도 마찬가지다.”
“어찌 됐건 지는 건 너다! 타앗!”
“하앗!”
둘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서로를 향해 쇄도했다. 한 치의 양보도, 머뭇거림도 없는 움직임.
그렇게 천휘의 주먹과 그랜저의 소울 소드가 부딪쳤다.
쾅!
“큭!”
“쳇!”
전장의 소음에 가려 충격음이 크진 않았지만, 부딪친 당사자들은 옅은 신음을 토해냈다. 둘 모두 단 한 번의 격돌로 피해를 입을 만큼 대등한 실력이었다.
“네놈은 언제나 그런 식이었어. 앞에서는 웃는 척하며 뒤에서 뒤통수를 치는!”
그랜저의 소울 소드가 바삐 움직였다. 마치 환영이 보이는 듯한 착각이 일 정도로 녀석의 소울 소드는 빠르고 치명적이었다.
“그건 네놈의 과대망상일 뿐이다! 난 그런 적도 없고, 그런 의도로 네놈을 대한 적도 없어. 하지만 넌 어땠지? 대학 시절부터 네놈은 날 배척했어. 내가 그 이유를 말해줄까?”
천휘의 주먹도 그랜저의 소울 소드만큼이나 빨랐다.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천휘의 주먹은 그랜저의 소울 소드보다 훨씬 더 진중함이 깃들어 있다는 것이었다.
천휘의 주먹이 허공을 가르며 그랜저의 소울 소드를 압박했다.
“말해봐!”
천휘에게 지기 싫은 듯 그랜저의 소울 소드가 더욱 짙게 빛을 발하며 울음을 토해냈다.
영혼의 울음.
그만큼 그랜저가 지금 대결에 집중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넌 어렸을 때부터 뭐든지 가지고 싶은 건 다 가져야 직성이 풀렸겠지. 그런 철부지였고, 병신이었으니까. 그러다 대학을 갔는데 왠지 모르게 너보다 인기가 많았던 내가 부러웠던 거야. 안 그래?”
사실 천휘가 한 말은 마음에도 없는 말이었다. 당시의 자신은 여자들에게도 그다지 인기가 없었고, 몇몇 남자 동기들과만 어울렸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그런 식으로 말한 것은 그랜저 녀석의 심기를 흐트러트리며 대결에서 우위를 점하려는 이유에서였다.
“빌어먹을! 그래, 그거다! 왜! 그게 뭐 어때서! 하앗! 소울 디바이드(Soul Divide)!”
“뭐라고? 크윽!”
그랜저의 발악적인 외침에 놀란 천휘는 그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흘려 내지 못하고 타격을 입었다. 영혼의 쪼개짐으로 인한 강렬한 일격이었다.
“네 녀석이 그걸 알고 있었다니 의외야. 무심한 네 녀석은 그런 것 따위는 모르는 줄 알았더니. 아니지. 그걸 알고 있었으면서 그런 식으로 행동했다면 더 재수 없는 놈이잖아!”
다소 흥분했는지 그랜저의 소울 소드가 미친 듯이 춤을 췄다. 조금 전 충격의 여파가 남아 있는 천휘로서는 어쩔 수 없이 계속 수세에 몰릴 수밖에 없었다.
반전을 꾀하려면 녀석이 펼친 소울 디바이드처럼 강력한 스킬을 전개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1초에서 2초라도 시간을 벌어야 했다.
“그러는 너야말로 재수 없는 놈이다! 오로지 돈으로만 친구를 사려는 새끼! 돈으로만 여자를 사는 너 같은 새끼 따위는 죽어버려!”
“이 새끼가 진짜! 네가 봤어? 봤냐고!”
“그래! 봤다, 이 새끼야! 파멸의 대지!”
콰앙!
그랜저가 흥분하는 사이, 그의 소울 소드가 살짝 멈췄다. 아주 찰나의 시간이었지만, 스킬 숙련도가 높은 천휘로서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쳇! 피했나.”
그러나 그랜저 역시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허공으로 뛰어오르며 파멸의 대지가 지닌 스턴 효과에서 벗어난 것이다.
“뭘 봤다는 거야, 새끼야.”
어느새 그랜저는 흥분을 가라앉힌 듯 눈빛이 달라져 있었다. 하지만 천휘는 느낄 수 있었다. 녀석은 지금 흥분이 가라앉은 것이 아니라, 터지기 일보 직전인 상태였다.
“넌 일부러 동아리 동기들을 불러 술을 샀어.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는데, 분명히 하늘 땅 바다라는 전통 주점이었지.”
“큭큭! 자세히도 기억하는군.”
두 사람은 서로에게 무기만 겨누지 않고 있을 뿐, 오러를 끌어올렸다.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그 기세에 그들의 주변으로는 그 어떠한 소음도 들려오지 않았다.
“나중에 들었는데… 그곳에서 네 녀석이 동기들에게 나와 친하게 지내지 말라고 했다면서. 큭큭! 이후에도 여러 번 술을 사줬고.”
“병신 같은 새끼들. 그걸 또 쪼르르 달려가서 나불거렸다 이 말이지?”
그랜저의 말에 천휘의 눈에 짙은 스산함이 어렸다.
“여자와 관련된 것도 다 말해줘?”
“…그럴 필요는 없겠지.”
그랜저 자신의 여자관계가 복잡하다는 것은 굳이 인식시켜 주지 않아도 알고 있는 일이었다. 그랜저의 눈에도 어느새 스산함이 어려 있었다.
“죽어!”
“뒤져 버려!”
그렇게 서로를 응시하던 둘은 서로를 향해 소리치며 쇄도했다. 물 흐르듯 이어지는 수준 높은 공방에 그들 주변으로 작은 회오리바람이 일었다. 그리고 그것은 점차 커지더니 주변을 조금씩 잠식하기 시작했다.
깡! 서억-
“헉헉! 또 어디야?”
주변에 있던 상대를 모두 해치운 카멜은 생명력이 바닥을 가리키는 와중에도 주변을 살폈다. 아직 기력이 남아 있을 때 임페리얼 길드의 전사를 하나라도 더 줄이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어떻게 된 것인지 자신의 주변에는 아군도, 적군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정체를 알 수 없는 회오리바람만이 전장을 이리저리 누비며 자신의 주위를 맴돌고 있을 따름이었다.
“설마? 천휘?”
회오리바람 사이로 얼핏 보이는 얼굴은 분명히 천휘였다. 게다가 그와 함께 있는 녀석은 틀림없이 그랜저였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이거?”
어떻게 두 사람이 회오리바람에 갇힌 채 대결을 펼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지만, 카멜은 둘에 대한 신경을 접고 그 주변에서 휴식을 취하기 시작했다.
다른 유저들은 접근도 하지 않는 이곳은 이 전장에서 유일하게 마음 놓고 쉴 수 있는 공간이었다.
* * *
“빨리빨리!”
“허억허억! 넌 몽크라서 괜찮을지 모르겠지만, 난 사제란 말이야! 직업 특성상 무리야!”
“그럼 이거 마셔!”
“이게 뭔데?”
“일단 마셔!”
미온의 독촉에 헤라는 그녀가 건넨 물약을 훅 들이켰다.
“오! 이거 기력이 회복되네?”
“당연하지. 이 몸의 특제 자양강장제니까! 아무튼 이제 다시 뛰어! 이러다 걔네들 진짜 서로를 죽일지 몰라. 당연히 천휘가 이기겠지만.”
“무슨 소리야! 둘이 붙으면 당연히 그랜저가 이기지.”
“얘가 무슨 말을! 당연히 천휘가…….”
“…훗! 일단 뛰기나 할까?”
“그래. 그게 좋겠어. 후훗!”
미온과 헤라는 라푼을 타고 조금 전 아제로스 섬에 도착했다. 그리고 곧바로 길드전이 벌어지고 있을 고원을 향해 달리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어? 원래 너 나 싫어했던 거 아니었어?”
“싫어하긴 개뿔. 남자들끼리의 문제에 우리가 나서는 것도 웃기는 일이잖아. 사실 처음에 영완이가 너 좋아한다고 했을 때는 네가 좀 싫었는데, 과거는 과거니까. 나 그렇게 속 좁은 여자 아니야.”
“후훗! 그래. 넌 말 그대로 쿨하지. 하지만 걔네들 문제… 은근히 심각해.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부정적인 헤라의 말에 미온도 살짝 불안한 눈빛이었다. 하지만 이내 마음을 다잡은 듯 굳은 얼굴로 말했다.
“알아. 꼭 네 문제가 아니더라도 둘이 꼬인 게 많다는 걸. 하지만 무슨 어린애들 장난도 아니고, 고작 대학 시절 서로 가치관이 안 맞았다고 저러는 거 보면 너무 유치해.”
“…사실 좀 그런 건 있지. 둘 다 유치한 거 빼면 시체니까. 후훗!”
“좀 아네? 아무튼 우리 둘이 나서서 그 둘을 좀 화해시키자. 어차피 길드전이 발발한 것은 우리 힘으로 막을 수는 없는 일이고.”
미온의 목적은 그것이었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천휘가 그랜저에 대한 복수심으로 『오벨리스크』를 해왔다는 것을 말이다. 더불어 그것을 이루지 못하면 『오벨리스크』를 그만두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 복수라는 것은 애매모호했다. 제아무리 르네상스 혈맹이 강하다고 해도 이곳은 현실이 아닌 가상현실이다. 불사의 몸을 지니고 있는 것은 물론이고,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언제 어디서든 생활이 가능했다.
한마디로 천휘가 바라는 복수는 이룰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더불어 그렇게 되면…
‘내 신혼 생활도 끝장이야!’
아예 『오벨리스크』를 하지 않는 것은 영완에게 죽으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런 기세라면 영완은 결혼을 하고 나서도 퇴근하자마자 새벽까지 게임을 할 것만 같았다.
‘그것만은 막아야 해! 내 꿈같은 신혼!’
꿀맛 같은 신혼을 위해서는 반드시 영완이 『오벨리스크』에 소모하는 시간을 줄여야 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오벨리스크』에 대해 남아 있는 미련을 없애야 했다.
그것을 위해 미온은 헤라를 찾았다.
마침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녀 역시 시영과 결혼하기로 약속했다고 했다. 더불어 그녀도 미온과 마찬가지로 시영이 『오벨리스크』를 좀 줄였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고, 서로 힘을 합하면 뜻한 바를 이룰 수 있을 듯했다.
두 사람은 그것을 위해 이토록 바삐 뛰는 것이었다.
달콤한 신혼을 위해!
* * *
“파이어볼!”
“워터 볼(Water Ball)!”
폭염법사 알무니아는 대규모 길드전이 발발하자마자 플라이 마법을 이용해 하늘로 날아올랐다. 하늘에서 대규모 화염 마법을 전개할 작정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이내 함께 하늘로 날아오른 로빈에 의해 물거품이 될 수밖에 없었다.
“…지난 아고르 해전에서 마지막에 운석을 떨어트린 것이 너로군.”
“그렇다면?”
“…….”
로빈의 심드렁한 말에 알무니아는 살짝 두려운 기색이 엿보였다. 오로지 화염 마법을 익혀 이 정도 경지에 오른 자신이다. 그럼에도 그는 화염 마법의 최고봉이라는 헬파이어조차 제대로 익히지 못했다.
최근에 어렵사리 마법서를 구해 익히긴 했지만, 실전에 펼칠 정도로 수련을 하지 못한 것이다.
그런데 상대는 고대 마법이라 일컬어지는 메테오 마법을 펼칠 수 있는 것은 물론, 물 계열 마법까지도 익히고 있었다. 그것도 자신의 파이어볼을 같은 계열의 마법으로 막아낼 정도로 완벽히!
“으드득! 질 수 없지! 파이어 랜스, 트리플!”
알무니아는 4서클 마법인 파이어 랜스를 무려 3개나 생성시켜 로빈에게로 날려 보냈다.
“호오!”
그 모습에 로빈은 처음으로 살짝 놀라는 기색이었다. 3서클의 파이어볼 마법도 아니고, 4서클의 파이어 랜스 마법을 한 번에 3개나 생성시킬 수 있는 방법은 자신이 아는 내에서는 분명히 없었다. 그런데도 상대방은 그것을 해냈다.
로빈은 시간차를 두고 자신에게 날아드는 파이어 랜스 마법을 블링크와 워터 실드 마법을 적절히 활용해 막아냈다.
“어떻게 한 것이지?”
“뭘 말인가?”
“4서클 이상의 마법은 두 개 이상 중첩이 되지 않아. 그런데도 그대는 무려 세 개의 파이어 랜스를 만들어냈지. 새로운 마법이라도 익힌 것인가?”
“…….”
대결을 펼치던 와중에 갑자기 질문이라니, 알무니아는 어이없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역시 가르쳐 줄 수 없는 건가? 흠… 어떻게 했을까. 메모라이즈를 했다면 그 정도로 똑같은 위력의 파이어 랜스를 생성시킬 수 없었을 테고. 흐음.”
마치 보란 듯이 알무니아를 앞에 두고 사색에 잠기는 로빈을 보며 알무니아는 이를 갈았다.
적을 앞에 두고 사색이라……. 알무니아 입장에서는 치욕도 이런 치욕이 없을 정도였다.
“이런, 빌어먹을! 이거나…….”
“아! 혹시 당신 트리플 캐스팅 스킬을 익힌 건가?”
막 마법을 펼치려던 알무니아는 갑작스러운 로빈의 물음에 얼떨결에 대답했다.
“그, 그런데?”
“오! 정말 대단해! 트리플 캐스팅이라니! 정말 그 꿈의 스킬이 있긴 했었어!”
“…….”
평상시의 침착한 모습과 달리 로빈은 지금 너무나 흥분한 상태였다. 그도 그럴 것이 트리플 캐스팅은 로빈이 가장 얻고 싶어 했던 마법사 전용 스킬이었다.
한 번에 3가지 마법을 동시에 캐스팅할 수 있는 최고의 스킬. 운용 여부에 따라 한 단계 위의 마법사도 충분히 상대가 가능하게 만들어주는 스킬이었다.
더불어 최근에 자신이 익히고 있는 최강의 마법을 익히는 데 반드시 필요한 스킬이기도 했다.
“미친놈이로군! 파이어 블라스트(Fire Blast)!”
로빈의 반응을 이상하게 여긴 알무니아가 불꽃의 숨결을 내뿜었다.
허공을 수놓는 화염!
로빈은 피할 생각도 하지 않고 그것을 온몸으로 받아냈다.
“미, 미친 새끼!”
파이어 블라스트는 무려 5서클 마법이다. 그 위력도 대단해 화염에 닿기만 하면 단단한 바위도 녹일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런 마법을 직격으로 맞았으니 알무니아는 로빈이 반드시 죽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호! 제법 대단한 마법이었어.”
“이, 이럴 수가!”
하지만 바람에 의해 화염이 사방으로 비산하자 그 안에서 멀쩡한 로빈이 모습을 드러냈다. 심지어는 그을린 곳조차도 없을 만큼 멀쩡했다.
“이 로브가 5서클 이하의 마법은 튕겨 내거든.”
“…빌어먹을!”
로빈의 장난스러운 말에 알무니아가 입술을 질끈 깨물어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트리플 캐스팅이 탐나긴 하지만… 아무래도 지금은 그걸 염두에 두고 있을 상황이 아니겠지? 잘 가라.”
“누구 마음대로!”
로빈이 본격적으로 블링크 마법을 전개하며 알무니아에게 다가갔다. 반면, 알무니아는 어떻게든 거리를 벌려 보고자 안간힘을 썼다.
“윈드 커터!”
“실드!”
“윈드 레스트레인(Wind Restrain)!”
본격적으로 바람 계열 마법을 난사하자 알무니아는 방어 마법을 펼치기 바빴다.
그러던 중, 로빈이 회심의 마법을 펼쳤다.
“으윽! 이, 이건 뭐지?”
“고대 마법이지. 바람의 속박이라는.”
“고대 마법?”
“그래. 한 가지 알려 줄까? 우리 룬 아일랜드는 이미 섬의 비밀을 풀었다. 우리 섬에는 이처럼 고대 마법과 악마의 수호신이 숨어 있었지.”
“고대 마법과 악마의 수호신?”
“거기까지! 다음은 나중에 하지. 임페리얼 길드가 무너지고 나서 말이야. 윈드 슬래쉬(Wind Slash)!”
바람이 붙잡고 있는 알무니아의 신형을 향해 로빈이 반월 모양의 날카로운 바람을 쏘아 보냈다.
폭염법사 알무니아의 죽음.
워낙 치열한 전장이기에 그의 죽음을 확인한 이는 그리 많지 않았다.
* * *
“벌써 두 시간이나 흘렀어요, 여러분! 그런데 아직도 전투는 치열해요. 하지만 제 개인적인 소견으로는 아무래도 아직 숫자가 많이 남은 임페리얼 길드가 우세하지 않나 싶네요. 이대로 최고의 길드라는 르네상스 혈맹이 지는 것일까요?”
MC 가윤의 말처럼 전투는 여전히 치열했다. 그러나 거의 2배에 달하는 유저를 전투에 내보낸 임페리얼 길드가 겉보기에는 더 우세해 보였다.
하지만 실상은 정반대였다.
“천둥 회 뜨기!”
“끄아악!”
“카오스 슬래쉬!”
“커허억!”
임페리얼 길드의 간부급 유저들은 대부분 목숨을 잃었다. 그만큼 르네상스 혈맹 유저들은 룬 아일랜드에서 많은 성장을 이뤘다.
하지만 반대로 르네상스 혈맹의 간부급 유저들은 대부분 생존해 있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근접전에서 위력을 발휘하는 카오스 팔라딘 카멜과 식객 블랙헤드를 막을 수 있는 유저는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종횡무진 전장을 누비며 적을 처치했고, 반대로 위험에 빠진 아군은 구해냈다.
그렇게 그들이 활약하는 동안 천휘는 여전히 그랜저와 대결을 펼치고 있었다.
둘의 주변을 에워싸던 선풍(旋風)은 이제 거대한 용권풍(龍卷風)이 되어 주변을 초토화시키고 있었다.
“이 빌어먹을 자식!”
“그건 네놈이고!”
“이제 좀 뒤져라! 자식아!”
“누가 할 소리!”
최근에 샤이어와 관련해 이래저래 업무가 바빴던 천휘는 레벨 업을 할 기회가 마땅치 않았다. 그래도 틈틈이 미온과 파티를 이뤄 룬 아일랜드에서 가장 강력한 몬스터인 천둥 외뿔 도마뱀을 사냥하며 경험치를 쌓았다.
반면, 그랜저는 모든 업무를 알무니아와 세스크에게 맡기고 자신은 아제로스 섬의 모든 던전과 사냥터를 돌아다니며 레벨 업에 열을 올렸다.
그 결과 지금처럼 둘은 대등한 대결을 펼치게 된 것이다.
“헉헉헉!”
“후욱! 후욱!”
무려 2시간째 대결하고 있는 그들이었다.
두 사람 간의 실력이 워낙 대등해 조금이라도 집중력이 흐트러지면 패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그로 인해 둘의 체력 및 심력 소모는 어마어마했다.
“많이 컸구나, 그랜저. 허억허억!”
“누가 할 소리! 후욱후욱!”
둘은 서로를 노려보며 말을 하는 순간에도 열심히 숨을 고르고, 기력을 보충했다. 하지만 그것으로 보충할 수 있는 기력과 체력은 한계가 있었다. 아무래도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이번에야말로 승부가 날 것 같았다.
“그럼 어디…….”
[잠깐만!]
“어라?”
[여기 좀 봐!]
막 발을 떼려던 두 사람은 희미하게 들려오는 낯익은 목소리에 주변을 살폈다. 자신들의 주변에 위치한 용권풍 너머에서 반가운 두 여인이 애타는 심정으로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
“…우리를 말리려는 모양이지?”
“그렇겠지.”
“바보들이군, 정말. 으하하하!”
“하하하!”
천휘와 그랜저는 한바탕 크게 웃고는 동시에 웃음을 멈추며 서로를 향해 쇄도했다.
휘이잉!
“꺄아악!”
“아, 아무래도 안 되겠어! 더 이상은 무리야! 어서 피하자!”
둘의 대결이 다시 본격적으로 시작되자 용권풍이 하늘로 치솟으며 주변의 모든 것을 빨아들였다.
결국 미온과 헤라는 그 주변에서 멀어지며 떨리는 눈으로 둘을 바라보았다.
“제발!”
“제발!”
둘은 자신들의 연인을 위해 두 눈을 꼭 감고 기도했다. 그녀들이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뿐이었다.
쿵! 쿵!
천휘의 주먹과 그랜저의 소울 액스가 맞부딪치며 격렬한 충격음이 전장을 갈랐다.
어느새 전쟁은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임페리얼 길드와 르네상스 혈맹 모두 눈치만 보며 일정 거리를 유지하고 떨어져 있는 상황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무려 2시간이나 이어지는 전투로 인해 유저들의 심신이 노곤해진 탓이었다.
물론 개중에 전투에 참여하지 않아 아직 기력이 남아도는 이들도 있었지만, 그들은 잉여 전력에 불과했다.
“저 둘이야말로 진정한 아르니안의 패자가 될 이들이야.”
“오늘 전쟁을 치러봉깨 아무래도 우리 르네상스 혈맹이 독주 체제로 나아갈 수는 없을 것 같응디?”
“확실히 그랜저는 우리 힘으로는 상대할 수 없을 것 같다. 저치, 어떻게 된 일인지 아렌보다도 강해진 것 같아. 대단한 실력이야, 정말.”
천휘과 그랜저의 대결은 그야말로 경천동지할 격돌이었다. 그들의 신위를 보며 블랙헤드와 카멜은 인상까지 찌푸릴 정도였고, 로빈 역시 그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만큼 둘의 신위는 상상을 초월했고, 범인의 눈으로는 감히 가늠할 수 없을 정도였다.
자신의 실력에 대한 자부심이 가득했던 그들로서는 둘의 대결로 인해 자괴감마저 생길 지경이었다.
쾅! 쾅!
“커헉!”
“크윽!”
그랜저의 소울 액스가 순간 흐릿해지며 천휘의 주먹이 그의 가슴을 강타했다. 어찌나 강맹한지 그랜저의 흉갑이 흉측하게 침몰됐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랜저의 순간적인 공격으로 인해 천휘 역시 왼쪽 어깨가 찢겨져 나가는 부상을 입어야 했다.
“쿨럭! 어서 날 죽여라!”
“…….”
이제는 정말 생명력이 다했는지 그랜저는 땅바닥에 누워 피를 게워내고 있었다. 그런 그를 보며 천휘가 이제껏 유지하고 있던 파멸의 휘장을 취소시켰다.
휘이잉!
파멸의 휘장이 취소되자 주변을 에워싸던 용권풍이 하늘로 치솟으며 사라졌다. 마치 승천하는 용처럼 치솟는 용권풍을 보니, 사람들이 거대한 회오리바람을 일컬어 왜 용권풍이라고 하는지 알 것 같았다.
“날 동정하는 거냐. 쿨럭!”
“동정은 개뿔. 네놈한테 동정 같은 걸 할 바에야 차라리 지나가는 똥개한테 개밥을 사주겠다.”
“그럼 어서 날 죽이라고!”
“…….”
그랜저의 발악과도 같은 외침에도 천휘는 선뜻 주먹을 내지르지 못했다.
천휘가 그렇게 머뭇거리는 사이, 헤라와 미온이 그들 곁으로 다가왔다.
“이제 그만 해.”
“그래. 다 끝났어.”
“뭐가 다 끝났다는 거야! 쿨럭! 저 녀석과 난 아직 해결해야 할 빚이 남아 있어! 쿨럭쿨럭!”
이제는 정말 마지막인지 그랜저가 계속해서 피를 한 사발씩 게워냈다.
“우리 결혼할 거야.”
미온이 먼저 천휘를 향해 팔짱을 끼었다.
“우리도 결혼할 거야.”
“정말?”
헤라가 그랜저를 부축하며 말하자 천휘는 살짝 놀란 눈치였다. 하지만 이내 진심으로 헤라에게 축하의 인사를 건넸다.
“축하해. 저런 거지 같은 자식이 네 배우자라는 게 좀 안타깝긴 하지만, 잘 구슬려서 사람 좀 만들어봐.”
“저 자식이 끝까지… 쿨럭쿨럭!”
끝까지 그랜저의 속을 긁는 천휘를 보며 미온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리고 번개같이 천휘의 품으로 파고들어 그의 복부에 주먹을 꽂았다.
퍼억!
“커헉! 뭐, 뭐야! 갑자기 왜 때려? 쿨럭쿨럭!”
괴로워하는 천휘를 보면서도 미온은 계속해서 그를 구타했다. 미온 역시 퍼펙트 마스터까진 아니어도 350레벨을 넘은 탓에 그녀의 주먹 하나하나는 생명력이 바닥을 기고 있는 천휘에게 치명적일 수밖에 없었다.
“쿨럭쿨럭! 대, 대체 왜 나한테…….”
“꼴좋다. 쿨럭쿨럭!”
결국 그랜저와 나란히 눕게 된 천휘는 어이없는 얼굴로 미온을 바라보았다.
“우리 결혼할 거지?”
“새삼스럽게 그건… 쿨럭쿨럭!”
“잘 들어둬. 나랑 결혼하려면 일단 이 『오벨리스크』부터 끊어!”
“뭐, 뭐라고? 커헉! 쿨럭쿨럭!”
생각지도 못했던 미온의 말에 천휘는 당황하며 더욱 요란스럽게 기침을 해댔다. 그 역시 조금 전의 그랜저처럼 피를 한 사발씩 토해냈다.
“완전히 끊으라는 게 아니야. 하지만 하루에 한 시간 이상은 불가야! 난 결혼을 하면 좀 더 달콤하고 꿀맛 같은 시간을 보내고 싶단 말이야! 그런데 이대로라면 넌 결혼해도 『오벨리스크』만 할 거 아냐! 절대 안 돼!”
“나도 마찬가지야! 너도 나와 결혼하고 싶으면 이 『오벨리스크』부터 끊어! 안 그러면 국물도 없어!”
미온과 헤라의 폭탄 발언에 천휘와 그랜저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이 두 여인의 말이 진심임은 둘 모두 느끼고 있었다.
“하, 하지만…….”
“하지만은 무슨 하지만이야! 무조건 그렇게 해! 알았어?”
“…휴!”
“어쭈구리! 대답 안 한다 이거지? 당장 너희 집에 전화해서 시아버님께…….”
“해! 한다고! 해! 흑흑! 『오벨리스크』 끊으면 될 거 아냐!”
부모님의 잔소리는 그 어떤 보스 몬스터보다 무서운 최강의 공포다. 그것을 단 10분도 견디지 못하는 천휘이기에 미온은 그것을 빌미로 약속을 받아내고야 말았다.
“넌 어떡할래?”
미온과 천휘를 가리키며 말하는 헤라.
그랜저는 고개를 떨어트리며 나지막하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알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