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장 최후의 무대
“그쪽은 어떻대?”
“다행히 강시들이 분전해준 모양이야. 마무리는 괴물 녀석이 한 모양이고.”
“역시… 이젠 강시들만으로는 유저들을 상대하는 게 좀 버거워졌어.”
수심에 찬 천휘를 보며 로빈이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그런 말이 나와? 무려 마제스티 길드의 정예를 고작 수십 명이 막아냈단 말이다.”
“그래봐야 오백도 채 안 되는 인원이야.”
“그 오백이 바로 이 『오벨리스크』 최고의 랭커들이란 말이다!”
천휘의 말을 잘라내며 카멜이 버럭 화를 토해냈다. 말도 안 되는 역량을 지닌 강시들만 생각하면 절로 한숨이 나올 지경이거늘, 그들이 약하다는 투로 말하는 천휘가 아무래도 못마땅한 모양이었다.
“아아, 그 문제는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고. 배는 다 고쳤어?”
“다행히 이번에 테크토 형님께 직접 조선 스킬을 사사한 몇몇 장인 유저들이 함께해서 시간 안에는 충분히 가능할 것 같다.”
로빈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천휘가 임페리얼 길드와 관련된 것을 물었다.
“그들이라면 모두 아제로스 섬으로 철수했다.”
“모두? 그럼 따로 정찰하는 인원을 배치하지 않았다는 거야?”
다소 의외라는 듯 천휘가 물었다.
“그들 입장에서는 카라얀 마을이 마제스티 길드에게 무너진 이상 그럴 겨를이 없었겠지. 어느 정도 이해가 가는 게 그들은 전투에 가장 적합하게 함선을 개조했을 거야. 그렇다면 여유분의 식량이나 식수를 확보하지 못했을 테고 말이야.”
“결국 물자가 떨어져서 모두 철수시켰다? 그랜저 그 자식이 그 정도로 멍청한 놈은 아닌데. 설마…….”
예전부터 그와는 이래저래 충돌이 많았지만, 녀석의 능력만큼은 천휘도 인정하는 바였다. 오직 돈으로만 지금의 임페리얼 길드를 이룩했다고 보기에는 힘들었다. 그만큼 임페리얼 길드는 르네상스 혈맹의 최대 라이벌이었다.
‘고작 마을이 무너졌다고 해서 당황할 녀석이 아니야. 조금 시간이야 걸리겠지만 녀석의 자금력이라면 무너진 마을 정도는 금세 복구할 수 있을 테니까. 역시 현실에서의 일 때문인가? 그렇다면 희영이 때문에?’
천휘는 녀석과 근래에 학교에서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당시의 시영은 희영과 관련해 심적으로 무척이나 불안해 보였다.
“짐작 가는 거라도 있는 표정인데?”
의미심장한 로빈의 물음에도 천휘는 대꾸하지 않은 채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녀석을 걱정할 때가 아니다. 이번에 임페리얼 길드를 확실하게 무너트리지 않으면 차후에 우리에게 어떤 식으로 피해를 입힐지 몰라.”
“카멜 말이 맞다. 어차피 칼을 빼어든 거 지금은 앞만 바라볼 때다.”
“…….”
카멜과 로빈의 말에 천휘가 뭔가를 결심한 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이순신에 마련된 선실에서 나서며 수리 작업이 진행 중인 조선소로 향했다.
“왔나?”
“바쁘시네요.”
“이번 해전에서 완벽하게 패배한 탓에 이래저래 손 가는 곳이 많아서 말이지. 그래도 자네가 제때 와준 덕분에 항구까지 무너지진 않았네. 고맙네.”
“동맹을 맺었으니 이 정도는 당연한 거죠.”
진심이 느껴지는 용병왕 아르샤빈의 말에 천휘도 꾸미지 않고 있는 그대로 말했다.
“이제부터는 어떻게 할 텐가?”
아르샤빈의 물음이 지닌 의미는 명백했다. 이대로 해전에서 패하고 가만히 저들을 두고 보고만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그럴 수는 없지요. 그와 관련해서 이야기를 나누고자 찾아온 겁니다.”
“말만 하게.”
“식량과 식수를 지원해주십시오. 준비되는 대로 이웃의 트와이트 섬을 포격하고 곧바로 아제로스 섬으로 향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용병 길드가 이곳 아고르 섬에서 힘을 기를 때까지 드림 길드의 발목을 붙잡아두겠다는 말입니다.”
“아!”
용병 길드도 그렇지만, 드림 길드 역시 항구를 방어할 시설이 마련되지 않았다. 물론 소수의 소형 대포는 배치되어 있겠지만, 사정거리가 소형 대포보다 긴 캘버린 포로 외곽에서 포격하면 드림 길드의 항구는 순식간에 무너질 것이 분명했다.
그 정도만 해도 용병 길드에게는 충분히 시간을 벌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었다.
“그렇게 해야지! 당연히 그렇게 해야지! 울프!”
“네, 마스터!”
“당장 보급 창고로 가서 식량과 식수를 최대한 르네상스 혈맹의 함선에 실어라!”
“하지만 그렇게 했다간…….”
용병 길드는 타 길드에 비해 그렇게 여유 자금이 풍족하지 않았다. 그런 자금력으로 어떻게 함선을 제작해 이곳 세틀러 제도까지 항해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걱정 마십시오. 이번 전투가 끝나면 반드시 그에 합당하는 금액으로 보상하겠습니다.”
“하하하! 잘 들었겠지, 울프?”
“알겠습니다, 마스터. 그리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마치 작당이라도 한 듯 천휘의 말에 아르샤빈과 울프는 빠르게 일을 진행시켰다.
그리고 아르샤빈이 내미는 종이 한 장.
“차용증서네. 이런 건 친한 관계일수록 확실하게 해야 하는 거라네.”
“큭! 그렇게 하죠.”
* * *
베론 항에서 보급 물자를 확보하고, 파손된 함선을 수리하는 동안 하루가 흘렀다.
“이제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건투를 비네.”
“출항!”
용병 길드의 환대를 받으며 르네상스 혈맹의 함선이 항구를 벗어났다.
“빠르게 트와이트 섬으로 나아간다!”
천휘의 지시에 전 함선이 이순신을 중심으로 화살 대형을 이뤘다. 그 모양이 마치 화살촉과 같다 해서 붙여진 화살 대형은 빠르게 바다를 가로지를 때 주로 쓰였다.
뎅뎅뎅!
“빌어먹을! 르네상스 혈맹이다!”
“수리가 끝난 함선들은 얼른 출항해!”
르네상스 혈맹이 트와이트 섬의 만으로 들어서자 트와이트 섬 유일의 항구 크레임이 들썩였다.
다급히 몇몇 카락급 함선에 유저들이 타고 출항했고, 만 양쪽 끝에 마련된 방어 탑으로 발 빠르게 유저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래봤자 소용없지. 포격 준비!”
드림 길드의 대응이 궁금하긴 했지만 자신들은 시간의 여유가 없었다. 빠르게 저들을 처리하고 임페리얼 길드에서 대비하기 전에 그곳으로 향해야 했다.
구구궁!
로빈이 펼친 확성 마법으로 천휘의 지시는 전 함선에 이어졌다. 하나같이 야산 하나 정도는 가뿐히 날려 버릴 수 있는 캘버린 포였다.
“발사!”
바다를 쩌렁쩌렁 울리는 천휘의 외침. 그와 동시에 귀를 울리는 포격음이 들려왔다.
퍼엉! 퍼엉! 퍼엉!
일제히 발사된 캘버린 포의 거대한 포탄들. 그것들은 허공을 날아 각기 지정된 장소로 향했다.
“저, 저건!”
“그때 그……!”
이미 일전의 해전에서 용병 길드가 캘버린 포를 사용하는 것을 목격한 드림 길드였다. 그러한 포탄이 한두 발도 아니고 무려 수십 발이 허공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피해!”
포탄이 날아오는 궤적을 바라보며 유저들이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더 이상 저항은 무의미했다. 저 거대한 포탄의 위력은 마법이나 스킬로 어찌할 수 없는 불가항력의 힘이었다.
콰앙! 콰앙!
“끄아악!”
“꺄아악!”
유난히 폭음이 크게 울리며 드림 길드 유저들의 비명 소리가 흘러나왔다.
집중적인 포화에 드림 길드는 변변한 대응조차 하지 못하고 항구 크레임이 완벽하게 부서지는 것을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압도적인 힘과 기술.
르네상스 혈맹은 지금 보여 주는 집중 포화로 다시는 자신들을 거역하지 못하도록 본보기를 보인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항구 크레임은 무너졌다.
* * *
“내 말 듣고 있는 거지?”
“…아, 뭐라고 그랬지?”
“젠장! 미치겠네. 너 대체 이런 비상시국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내 말 못 들었어? 조금 전에 항구 크레임이 폭격을 당했다니까!”
“폭격?”
알무니아의 말에 그제야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파악한 그랜저가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르네상스 혈맹이 움직인 거냐.”
그랜저는 르네상스 혈맹이 예상보다 빠르게 움직인 것이 놀라운 눈치였다.
알무니아도 그 마음을 이해한다는 듯 말했다.
“생각보다 녀석들의 행보가 빨라. 아무래도 녀석들에게 뛰어난 수리공들이 있는 모양이야.”
“물자는?”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이렇게 된 이상 뻔하지 않겠냐?”
“쳇! 빌어먹을 용병 길드 자식들! 아예 르네상스 혈맹의 개가 되었군.”
용병 길드의 자금력은 이미 파악한 상태였다. 그들로서는 르네상스 혈맹을 지원할 만큼 물자가 넉넉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선뜻 식량이며 식수를 내주었다는 것은, 그만큼 르네상스 혈맹의 비호 속에서 힘을 키워나가겠다는 뜻이나 마찬가지였다.
“녀석들의 방향은?”
“…….”
“말 안 해도 알겠군.”
“휴!”
절로 한숨이 나오는 상황이었다.
이전 해전에서 녀석들을 패퇴시킨 이상 전쟁은 피할 수가 없었다. 다만, 문제는 자신들의 근거지인 카라얀이 비겁한 마제스티 길드 놈들에 의해 방어 기능을 완전히 상실했다는 데 있었다.
“카라얀을 버린다.”
“뭐라고?”
갑작스러운 그랜저의 말에 알무니아가 화들짝 놀라며 물었다.
“어차피 카라얀은 더 이상 제 구실을 못해. 으드득! 마제스티 놈들만 아니었어도!”
그랜저의 말처럼 카라얀은 마을 회관마저 완벽하게 무너졌을 정도로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그로 인해 임페리얼 길드의 그 많은 유저들이 따로 천막을 설치하고, 그 안에서 생활하고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여길 눈 뜨고 뺏길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
“어차피 녀석들도 이곳에서 오래 진을 칠 수는 없을 거다. 제아무리 용병 길드 녀석들에게 물자를 지원받았다고 해도 한계는 분명히 존재할 테니까. 그리고 난 천휘 그 녀석을 아주 잘 알아. 우리가 카라얀을 비운 것을 알면 어떻게든 날 잡기 위해 섬 안으로 들어올 거다. 확실해.”
“그 정도로 녀석이 널 싫어하는 거냐?”
천휘와 그랜저의 관계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알무니아 자신이 판단하기에 둘 사이에 파인 감정의 골은 훨씬 더 깊은 듯했다.
“싫어한다기보다는 날 어떻게든 이기려 하는 녀석이지. 나 때문에 천 제국에서 이쪽으로 넘어왔을 정도?”
“헉! 그럼 소문이 사실인 거냐? 녀석이 정말 드래곤 산맥을 넘어왔다는 거야?”
“사실이지. 내가 듣기로 녀석은 분명히 천 제국에서 처음 게임을 시작했었으니까. 처음에 난 녀석이 캐릭터를 지우고 다시 아르니안 대륙에서 게임을 시작하는 줄 알았지만 아니었어. 녀석은 분명히 드래곤 산맥을 넘은 거야.”
“…진짜 대단한 녀석이네.”
“여러 의미로 대단한 녀석이긴 하지.”
드래곤 산맥은 말 그대로 드래곤들이 서식하는 사상 최악의 금지다. 그것은 천 제국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드래곤 산맥을 천룡산맥이라 부르며 경원시하고 두려워한다.
그 누구도 뛰어넘지 못한 마의 산맥.
그런데 그곳을 홀로 넘었다니…….
새삼 천휘라는 남자가 무서워지는 알무니아였다.
“나에 대한 녀석의 복수심은 진짜다. 나 역시 녀석에게는 갚아줘야 할 것이 있고. 하지만 이곳에서는 녀석을 이기기 요원해. 우리의 함선과 대포로는 르네상스 혈맹을 이길 수 없으니까.”
“그래서 지상에서 맞붙자?”
“그래. 지상에서라면 충분히 이길 가능성이 있어.”
불타오르는 그랜저의 눈빛을 보며 알무니아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자신감이었다. 자신들이 창설하고 이만큼 세력을 키운 임페리얼 길드에 대한 자신감.
“반드시 이긴다!”
“당연하지!”
임페리얼 길드의 함선은 그길로 모두 유일하게 아직 주인이 정해지지 않은 바로크 섬으로 향했다. 카라얀을 비운다고는 해도 함선까지 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더불어 그랜저를 위시한 임페리얼 길드의 유저들은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아제로스 섬 중앙에 위치한 고원지대로 이동했다.
일보 전진을 위한 이 보 후퇴.
다소 치욕스러웠지만 지금으로서는 그것이 그들에게는 최선이었다.
* * *
“어째 조용한걸?”
휘잉!
트와이트 섬을 떠나온 르네상스 혈맹의 함선들은 대략 한 시간 만에 아제로스 섬까지 진출했다. 그리고 아제로스 섬을 빙 돌아 북쪽의 카라얀 항 앞에서 멈췄다.
“이거 우리가 원하는 반응이 아닌데?”
“불길해. 이 자식들… 설마!”
“왜 그래?”
갑작스러운 천휘의 반응에 카멜이 의아한 듯 물었다.
“하린 누님, 혹시 이글 아이(Eagle Eye) 스킬로 마을을 자세히 보실 수 있을까요?”
“좀 멀긴 하지만 가능할 것 같아. 지금 해봐?”
“네!”
영문도 모른 채 하린은 천휘의 말에 따라 이글 아이 스킬을 활성화시켰다. 그러자 눈동자가 매의 그것처럼 확장하더니 하린의 시야가 카라얀까지 이어졌다.
“어때요?”
“흠, 이상한데? 너무 멀어서 아주 자세히 볼 수는 없었지만…….”
“없었지만?”
“아무도 없어.”
“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성질이 급한 카멜의 물음에 하린이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말 그대로야. 아무것도 없어. 유저들도 없고, 항구를 방어할 대포도 없어. 저길 봐. 단 한 척의 함선도 없잖아.”
“어라? 그러고 보니?”
하린의 말에 그제야 유저들이 함선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카라얀을 볼 때부터 들었던 묘한 위화감의 정체가 바로 그것이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네.”
“설마 카라얀을 버리고 도주한 건가?”
“그럴 리가. 카라얀은 그들의 근거지야. 근거지를 버릴 수 있겠어?”
“다른 곳으로 이주한 건가? 바로크 섬이 비어 있잖아.”
현실과 동떨어진 카라얀의 모습에 온갖 추측이 난무했다. 하지만 그 누구도 명확한 해답을 내릴 수는 없었다. 그것은 천휘 역시 마찬가지였다.
“일단 몇 명을 선발해서 카라얀으로 향하는 것이 낫겠어. 함정일 수도 있으니 모두 카라얀으로 향하는 것은 무리고. 누가 가볼까? 카멜 네가 가볼래? 함정이라고 해도 너라면 빠져나올 수 있잖아.”
“나도 같이 가마.”
천휘의 말에 로빈도 함께 나섰다. 최강의 물리 방어력을 자랑하는 카멜과 명실상부 르네상스 혈맹의 최고의 마법사인 로빈이 나서준다면, 행여 함정에 걸리더라도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을 것이다.
“부탁한다.”
그렇게 로빈과 카멜은 단둘이서 조각배를 타고 카라얀으로 노를 저어갔다. 간간이 로빈이 윈드 프레스(Wind Press) 마법을 펼쳐 조각배는 빠르게 카라얀으로 나아갔다.
“정말 아무도 없는 모양이네용?”
“그랑깨 말이다잉. 아무런 공격도 없어 븐디?”
눈송이와 블랙헤드의 말처럼 카라얀에서 이어지는 대응은 아무것도 없었다. 두 사람이 타고 있는 조각배를 향해 날아오는 포탄도 없었고, 휘황찬란한 마법도 없었다.
한없는 적막.
천휘는 그제야 진짜로 임페리얼 길드가 카라얀을 버리고 다른 곳으로 이동했음을 깨달았다.
르네상스 혈맹은 그렇게 카라얀으로 무혈입성할 수 있었다.
<르네상스 혈맹은 보라!>
“뭐야, 이건?”
“임페리얼 길드에서 남겨 놓은 것 같은데?”
함선에서 내려 카라얀을 수색하던 중 한 유저가 게시판을 하나 발견했다. 그리고 그곳으로 모든 유저들이 모여들었다.
<마제스티 길드의 파렴치한 공격으로 카라얀은 쑥대밭이 되었다. 그러나 본 길드는 그대들에 대한 원한을 반드시 갚아야겠다. 오라! 전장으로! 우리는 섬 중앙의 고원에서 너희를 기다리고 있겠다!>
“선전포고인가?”
“그런 셈이겠지?”
게시판의 내용은 결국 길드전을 요청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물론 지금까지도 충분히 길드전이라고 부를 수 있었지만, 그것은 해전이었다.
길드전의 꽃은 뭐니 뭐니 해도 땅에서 펼쳐지는 대규모 전투.
임페리얼 길드는 그것을 바라고 있었다.
“어쩔 거야?”
“흠.”
로빈의 물음에 천휘는 살짝 고민하는 눈치였다.
게시판에 적혀진 것처럼 천휘 역시 이번 기회에 확실하게 임페리얼 길드를 무너트릴 심산이었다.
피차 최고의 길드라는 자부심을 가지는 만큼 어느 쪽이 진정한 최강인지 가리고자 한 것이다.
더불어 자신의 가슴속에 남아 있는 그랜저에 대한 원한도 청산하고자 했다.
“여기까지 와서 고민할 필요는 없겠지. 뭐, 이곳이 저들의 앞마당이니만큼 필요 이상의 피해를 입을 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지지 않아.”
카멜이 천휘의 말을 자르며 말했다.
“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든 우리는 그 이상이다.”
“맞아용. 우리는 지지 않아용.”
“송이 말이 맞당깨. 저것들이 뭔 꼼수를 부린다고 혀도 우릴 이길 순 없당깨.”
남들이 보면 그들의 지나친 자신감이 곧 자만으로 보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자만이 아니라 진정 그렇게 생각했다. 그들은 힘이 있었고, 그 힘을 위해 여태 최선을 다해왔다. 질 이유도 없고, 질 수도 없었다. 그것이 르네상스 혈맹이었다.
“너희 말이 맞아. 하지만 블랙 말대로 녀석들이 무슨 꼼수를 부릴지 몰라. 하린 누님.”
“왜 그래, 동생?”
천휘의 부름에 하린이 웃으며 나섰다.
“얼핏 들었는데, 누님 친구 분 중에 『오벨리스크』 전문 게임 방송국 PD가 있다고 하셨죠?”
“그랬지. 나와 젊었을 때부터 친한 친구라 최근에도 가끔 만나. 그런데 그건 왜?”
“그거 방송국에서도 직접 방송을 진행하기도 한다죠? 게임 내에서 말이에요.”
천휘의 물음에 하린이 아닌 눈송이가 나서서 말했다.
“저도 알아용. 그 방송국은 『오벨리스크』 회사에서 직접 방송에 관여한다고 해용. 그래서 그들의 편의를 위해 『오벨리스크』 내에서 여러 가지 방송 장비들을 제작해줬대용. 게다가 언제 어디든 갈 수 있도록 공간 이동 관련 아이템도 가지고 있다고 하던데용?”
“뭐야? 송이 너 어떻게 그렇게 잘 아는 거야?”
“후훗! 그 방송국에 제 남친이 다니거든용.”
“나, 남친?”
“너 중딩 아니었어?”
갑작스런 눈송이의 폭탄 발언에 모두의 이목이 그녀에게 쏠렸다.
“무슨 말이에용! 저 이제 고딩이거든용?”
“…….”
“…….”
너무도 당당한 그녀의 말에 주변 사람들의 말문이 그만 턱 막혔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중딩이나 고딩이나 피차일반이었다.
“자, 송이에 관련된 건 나중에 생각하고. 그럼 하린 누님과 송이가 지인들에게 연락해서 그 방송국과 날 연결시켜 줘봐. 그리고 유저들에게는 일단 이곳에서 진을 형성한다고 전하고. 게시판에는 이렇게 적혀 있지만, 언제 저들이 기습 공격을 해올지 모르니까 정찰도 꼼꼼하게 하고.”
“알았어, 동생.”
“알았어용.”
천휘의 말에 하린과 눈송이가 접속을 종료했다. 아무래도 밖에서 따로 만나 의논할 생각인 듯했다.
더불어 아제로스 섬에 상륙한 르네상스 혈맹은 카라얀을 벗어나지 않고, 임페리얼 길드가 그랬던 것처럼 중앙 광장에서 임시적으로 휴식을 취할 천막을 꾸렸다.
그리고 그 모습을 카라얀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서 많은 눈들이 지켜보고 있었다.
“보고에 의하면 녀석들이 카라얀을 제집처럼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움직일 기미는?”
“아직까지는 없는 것 같아.”
“그럴 테지. 천휘 그 자식이 내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만큼 바보 천치는 아니니까 말이야.”
그랜저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여유로운 표정이었다. 그에 반해 알무니아는 뭔가 껄끄러운 듯했다.
“따로 알아보지 않아도 되겠냐? 상대는 사사건건 우리에게 물을 먹였던 사내다. 우리가 지닌 힘에 대한 믿음은 있지만, 그래도 르네상스 혈맹은 강해. 허투루 여길 수 없다는 것 잘 알잖아.”
“허투루 보지 않아. 하지만 그렇다고 녀석들의 실력을 과대평가하지도 않아. 더욱이 지금 천휘 그 녀석에게는 최후의 카드가 없어.”
“최후의 카드?”
의미를 알 수 없는 그랜저의 말에 알무니아가 의아한 듯 물었다.
“마제스티 길드 소식 들었냐?”
“갑자기 웬 마제스티 길드 이야기?”
“녀석들이 룬 아일랜드로 쳐들어간 건 알고 있지?”
심각한 얼굴의 그랜저를 보며 알무니아도 그제야 귀를 열고 그의 말에 집중했다.
“알고 있지. 요새 그것 때문에 다들 말이 많으니까. 팬 사이트인 오시리스를 가보아도 다 그 말들뿐이고. 그런데 그건 왜?”
“마제스티 길드의 저력은 대단해. 우리 임페리얼 길드도 그쪽과 정면으로 맞대결하면 승률이 반반이라고 생각할 정도니까.”
“그야 그렇지. 어찌 되었건 지존들이 많이 포함된 곳이니까. 말 돌리지 말고 요점만 말해봐.”
그랜저는 본래 이렇듯 말을 돌려서 하는 타입이 아니다. 이런 경우에는 그조차도 확신이 서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알무니아는 그의 예상이 어긋나는 경우를 거의 보지 못했다.
“르네상스 혈맹의 주 전력은 이곳에 있어. 그런데 어떻게 마제스티 길드의 기습을 막아낼 수 있었을까? 우리의 근거지인 카라얀은 저렇듯 쑥대밭이 되었는데.”
“또 다른 전력이라면… 설마?”
“그래, 그 설마야. 내 생각에는 천휘 녀석의 강시들이 수백에 달하는 마제스티 길드의 유저들을 막아냈을 거야.”
“말도 안 돼! 마제스티 길드에는 그랜저 너와 비슷한 수준의 유저가 다섯이나 된다고. 그런데 어떻게!”
알무니아의 호들갑도 이해가 되었다. 강시들이 제아무리 강하다 해도 마제스티 길드의 주축 간부들을 모조리 상대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과거 화신의 사막에서는 분명히 그 강시들에 의해 자신들이 죽임을 당했지만, 그건 과거의 편린에 지나지 않았다. 지금이라면 제아무리 강시들이 강하다 해도 충분히 이길 자신이 있었다.
그러한 자신감이 그랜저의 말에 대한 불신을 낳았다.
“천휘가 제작하는 강시들은 녀석으로 하여금 무려 드래곤 산맥을 넘게 했을 정도로 강해. 게다가 지금은 그때보다 훨씬 더 발전했을 거다. 그들이 아니라면 마제스티 길드를 패퇴시켰다는 것이 말이 안 돼.”
“…그럴 수가.”
강시술사는 일종의 소환사나 정령사라고 볼 수도 있었다. 소환사가 소환하는 소환수나, 정령사가 소환하는 정령들은 아무리 강해봐야 한계가 있었다.
그런데 천휘가 제작한 강시들은 그러한 상식을 뛰어넘어버렸다. 일반 유저들도 아니고, 무려 마제스티 길드의 유저들을 막아냈다는 것은 그만큼 엄청난 무력을 지니고 있다고 봐야 옳았다.
“하지만 우리에겐 다행이지.”
“다행?”
“그래. 생각해봐. 강시들은 지금 룬 아일랜드에 있어. 알고 있지? 소환사와 소환수가 일정 거리 이상 떨어져 있으면 역소환과 재소환이 되질 않는다는 것을 말이야.”
“그렇다는 이야기는…….”
“큭큭! 결국 녀석은 최후의 카드를 쓸 수 없게 되었다는 거지.”
비열한 그랜저의 웃음에 동화되듯 알무니아도 비릿한 조소를 흘렸다. 아무래도 행운의 여신은 자신들의 손을 들어주는 모양이었다.
* * *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영완이라고 합니다.”
다음 날 오전.
영완은 하린의 소개로 『오벨리스크』 전문 방송국 혼 미디어의 PD와 만남을 가질 수 있었다.
“장여진이라고 해요. 하린이에게서 말씀 많이 들었어요. 실제로 뵈니 훨씬 미남이시네요.”
“하하하! 감사합니다. 그러는 장 피디님도 꽤 미인이세요.”
하린의 주선으로 카페에서 단둘이 만나게 된 두 사람은 훈훈한 분위기 속에서 커피를 주문했다.
“하린이에게서 대충 이야기는 들었지만… 영완 씨가 좀 더 자세하게 말씀해주시겠어요?”
“그러죠.”
영완은 자신이 생각했던 바를 여진에게 설명했다.
“그러니까 조만간 영완 씨가 이끄는 르네상스 혈맹과 임페리얼 길드 간에 길드전이 벌어진다는 건가요? 그것도 임페리얼 길드의 근거지인 아제로스 섬에서?”
“사실입니다. 제가 원하는 건 장 피디님께서 임페리얼 길드의 마스터와 논의를 하셔서 이번 길드전과 관련해 영상을 제작, 방영했으면 한다는 것입니다.”
“너무 좋은 제안이네요. 아르니안 대륙 최강 길드 간의 격돌을 독점으로 방영할 수 있다니! 이건 분명히 대박날 거예요!”
영완의 말에 여진이 흥분한 듯 소리쳤다. 그녀의 우렁찬 목소리에 주변 사람들이 수군거리며 그녀를 쳐다볼 정도였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는 그런 시선을 느끼지 못하는지 계속해서 침을 튀겨 가며 말했다.
“당장 방송국에 연락해서 특집 일정을 잡아야겠어요. 그리고 임페리얼 길드의 마스터인 그랜저 님과도 연락을 해야겠고. 아, 또 뭘 해야 하지? 에… 또.”
여진은 자신의 수첩에 빠르게 이것저것을 적어나가며 이번 길드전을 어떻게 카메라에 담을지 고민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며 영완은 과연 프로는 다르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다.
“저 그럼 이만…….”
더 이상 할 이야기가 없어진 영완은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다. 그는 어색한 분위기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아, 제가 너무 혼자 딴생각만 했네요. 아직 물어볼 게 몇 개 더 있어요.”
“말씀하세요.”
여진의 말에 영완은 들썩이던 엉덩이를 의자에 붙이며 말했다.
“날짜와 시간은 어떻게 되죠?”
“아직 정해진 건 없지만 대략 내일쯤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물자가 넉넉하지 못하니 시간을 끌면 끌수록 우리 르네상스 혈맹에는 불리하니까요.”
“그러네요. 그럼 차후에라도 꼭 시간을 알려 주세요. 그래야 저희가 미리 카메라들을 배치하죠.”
“네.”
긁적긁적.
영완의 대답을 빠르게 수첩에 적은 여진은 또 물었다.
“장소는 정확히 어디예요? 미리 그쪽으로 카메라맨들을 파견해야 돼서.”
“아제로스 섬 중앙에 위치한 고원지대입니다. 저쪽에서 일방적으로 통보한 것이긴 하지만, 알아본 바에 의하면 대규모 전쟁을 벌일 만한 장소가 아제로스 섬에는 그곳뿐이더군요. 저쪽에서 꼼수를 부리지 않는다면 그곳에서 길드전이 벌어질 겁니다.”
“아제로스 섬 중앙의 고원지대라……. 알겠어요. 이제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물을게요.”
“그러시죠.”
여진의 말에 영완이 웃으며 대답했다.
“이번 길드전을 굳이 하겠다는 저의가 뭐죠?”
“…네?”
당황스러운 그녀의 물음에 영완은 다소 놀란 눈으로 되물었다.
“이미 르네상스 혈맹은 최고의 길드로 주가가 상승하고 있어요. 비록 선전포고를 임페리얼 길드에서 걸어왔어도, 불리한 환경에서 전투를 펼쳐야 하는 르네상스 혈맹이 굳이 길드전을 강행하겠다는 저의가 궁금해요.”
“저의라…….”
여진의 입장에서는 분명히 그렇게 보일 수도 있었다. 르네상스 혈맹에서 굳이 페널티를 감수하면서까지 길드전을 펼칠 이유는 없었던 것이다.
“그냥 누가 최고인지 옥석을 분명히 가리고 싶어서 말이죠. 개인적으로 셈을 치러야 할 부분도 있고.”
“개인적인 부분까지 물어보면 실례겠죠?”
다소 조심스러운 여진의 물음에 영완은 그저 입가에 미소만 그리고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여진은 자못 실망한 눈빛이었지만, 영완은 그런 그녀의 눈빛을 외면하며 창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제대로 한판 붙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