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6장 아르고 해전 (77/82)

제6장 아르고 해전

“포격하라!”

퍼엉! 퍼엉!

천휘의 외침에 포신이 불을 뿜으며 임페리얼 길드의 함선을 향해 포탄을 토해냈다. 어정쩡하게 날아가던 드림 길드와 용병 길드의 소형 대포와는 달리 르네상스 혈맹의 포탄은 아주 정확하게 임페리얼 길드의 함선 위로 떨어졌다.

콰앙! 콰앙!

“빌어먹을! 모두 선수를 돌려라!”

조금 전의 공격으로 2척의 배가 완파되고, 여러 척의 배 곳곳이 파손되는 피해를 입었다.

그랜저는 생각지도 못했던 배후 공격에 욕설을 내뱉으며 조타수에게 지시를 내렸다.

퍼엉! 퍼엉!

“마법사들은 포탄을 막아라!”

조타수들이 배를 우회시키는 동안 다시 한 번 르네상스 혈맹의 함선이 불을 뿜었다.

여지없이 똑바로 날아드는 포탄들.

하지만 알무니아의 지휘 아래 마법사 유저들이 방어 마법을 펼치며 맹렬한 속도로 날아오던 포탄을 막아냈다.

“호! 제법 연습을 많이 한 모양이야. 포탄을 막아내려면 최소한 4서클 이상의 마법사 세 명이 정확히 한점에 집중해 실드 마법을 펼쳐야 가능한데 말이야.”

“저들도 이번 전쟁을 위해 준비를 많이 했겠지. 캘버린 포를 준비할까?”

테크토의 노력으로 이순신의 포문에는 모두 캘버린 포가 배치되어 있었다. 게다가 강철 사슬 일족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덕에 적중도도 일반 소형 대포에 비해서 뛰어났다. 이순신이 일제 포격을 개시한다면 그랜저가 타고 있는 주함은 순식간에 산산조각 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쉽게 끝내면 재미없지. 그리되면 그랜저 녀석은 미꾸라지처럼 진흙 속에 숨으려고만 할 거야. 진흙을 빠져나온 지금이 녀석을 잡아낼 절호의 기회야. 그때까지 기다릴 수는 없지. 계속해서 소형 대포로만 포격하라 일러.”

“오냐.”

임페리얼 길드의 함선이 방향을 트는 동안 다시 한 번 포격이 이뤄졌다. 그 결과 무려 20척에 달하던 2개의 함대가 15척까지 줄어들고 말았다.

“이쪽에서도 포격하라!”

어느 정도 방향을 튼 그랜저는 나머지 함선들의 상태를 확인하며 명령을 내렸다. 5척이 줄긴 했지만, 함선의 숫자는 엇비슷한 정도였다.

퍼엉! 퍼엉!

콰앙! 콰앙!

“크윽! 어, 어찌 이럴 수가!”

내심 최강의 해군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했던 그랜저의 자신감은 단 한 번의 포격으로 산산이 부서졌다.

아군이 쏘아낸 10발의 포격 중 대여섯 발이 상대의 함선 인근을 두드린 데 반해, 상대의 포격은 거의 대부분의 포격이 아군 함선의 갑판 위로 떨어져 내렸다.

게다가 분명히 소형 대포의 포탄이건만, 그 위력은 자신이 알고 있는 소형 대포의 포탄과는 궤를 달리하는 것이었다.

“젠장! 충각으로 상대 함선을 들이받아버려!”

그랜저가 발악하듯 소리쳤다. 포격전으로는 도저히 승산이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이렇게 된 이상 선상 전투로 끌고 가야 실낱같은 승리의 열쇠를 거머쥘 수 있을 듯했다.

“후후, 결국 이렇게 나오는 건가?”

행여나 그랜저 녀석이 꽁무니를 내뺄까 노심초사하던 천휘는 아군을 향해 달려드는 임페리얼 길드의 함대를 보며 고소를 흘렸다.

“어떻게 할까?”

필사적으로 충각을 들이미는 임페리얼 길드의 함선들을 바라보면서도 로빈은 전혀 당황하지 않은 목소리로 물었다.

“괜히 배를 파손시킬 수는 없지. 그랬다간 테크토 형님에게 잔소리를 곱절로 들어야 할 테니까. 모두 좌우로 흩어지라고 전해. 녀석이 바라는 대로 해줄 수는 없지. 큭큭!”

천휘의 지시에 따라 르네상스 혈맹의 배가 빠르게 우회하며 좌우로 분산되었다.

“그랜저!”

“나도 보고 있어! 조타수에게 전속력으로 이곳을 빠져나가라고 일러! 그리고 크게 우회해 반대로 우리가 녀석들을 멀리서 에워싼다! 또한 레만 녀석에게 그쪽 일을 빨리 처리하고 지원하라고 해둬!”

르네상스 혈맹의 포문이 아군을 향해 있다는 것을 눈치 챈 그랜저는 최대한 빠르게 적군의 포위망을 벗어나가고자 함선의 속력을 높였다.

“포격하라!”

그랜저의 생각을 미리 읽기라도 한 듯 천휘가 포격 명령을 내렸다. 이번에는 이순신의 캘버린 포까지 총동원한 공격이었다.

콰앙! 콰앙!

여기저기에서 폭음이 울렸다. 그중에는 작은 야산 정도는 한 방에 날려 버릴 수 있는 캘버린 포의 폭음도 담겨 있었다.

“세, 세상에! 단 한 번의 포격으로 네 척의 함선이!”

“…우물쭈물하지 말고 더 노를 저으란 말이다! 녀석들의 포격 범위에서 벗어나야 한다!”

상상을 초월하는 적군의 포격에 유저들은 말까지 더듬거리며 당황했다.

그랜저 역시 캘버린 포가 지닌 위력에 순간 할 말을 잃었지만, 얼른 정신을 차리고 다급하게 지시를 내렸다.

“좋아. 이 정도면 충분해.”

“녀석들이 우회해서 우리를 에워싸려 하고 있다. 어떻게 하지?”

“저 괴물 같은 대포가 있는 이상 해전에서 우리가 승리할 수 있는 방법은 선상 전투로 끌고 가는 수밖에 없다. 제3함대의 세스크에게 일러 좌측을 맡게 하고, 우리는 우측을 상대한다. 대포에 배가 파손되건 말건 신경 쓰지 말고 어떻게든 녀석들에게 접근하라고 일러!”

“하지만 배가 파손되어서는…….”

카락급의 함선을 제작하는 것만 해도 천문학적인 액수의 금액이 소모된다.

이미 침몰한 함선만 따져 봐도 임페리얼 길드는 천문학적인 피해를 입은 상황. 더 이상 피해를 입게 되면 제아무리 자신들이라 해도 회생 불가능할 수밖에 없었다.

“함선은 언제든지 다시 만들 수 있다. 하지만 이번 전투에서 패하게 되면 미래는 없어! 언제까지고 르네상스 혈맹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단 말이다!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야! 절대!”

천휘에 대한 복수심으로 그랜저는 평소의 냉철함을 잃어버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알무니아로서는 그의 지시를 따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가 아니었다면 지금의 임페리얼 길드는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지시를 내리마.”

알무니아의 지시에 따라 광속의 격투가 세스크가 이끄는 제3함대가 좌측으로 빠져나갔다. 그리고 그랜저가 이끄는 제1함대는 우측으로 빠르게 파도를 갈랐다.

“저들이 좌우로 함대를 분산시켰다.”

“과연 그랜저로군. 순간적인 대응이 기가 막혀. 물론 나 같았으면 이대로 빠져나가 함선을 온전히 보존했겠지만 말이야.”

이순신 위에서 사태를 관망하던 천휘는 이내 로빈에게 지시를 내렸다.

“어차피 이번 전쟁은 서로가 끝을 봐야 한다. 녀석들이 원하는 대로 선상 전투로 이끌어. 압도적인 힘의 차이를 녀석들에게 느끼게 해주지!”

“알았다! 포격을 중지하라! 조타수는 충각을 앞세워 녀석들의 함선을 향해 돌격하라!”

로빈의 지시에 순식간에 대포를 다루고 있던 유저들이 포문을 닫고 선상으로 집결했다. 그들은 대포를 다루는 데에도 능했지만, 본래의 전투력 역시 무척이나 뛰어났다.

“돌격하라!”

“와아아!”

이순신을 비롯한 모든 함선의 조타수들은 하나같이 중급의 레벨에 이른 조타 스킬을 보유하고 있었다.

특히 이순신의 키를 맡고 있는 나미라는 여성 유저의 조타 스킬은 발군이었다. 무려 중급 8레벨에 이른 그녀의 조타 스킬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거기에 더해 이순신에만 장착되어 있는 철제 충각의 위력은 대번에 거대한 해안 절벽을 부숴버릴 정도로 대단했다.

그런 이순신의 충각이 임페리얼 길드의 부길마 중 한 사람인 광속의 격투가 세스크가 이끄는 제3함대의 주함을 향해 돌진했다.

콰아앙!

캘버린 포가 내뿜는 폭음보다 몇 배는 더 강렬한 폭음이 전해졌다. 이순신의 충각은 캐러벨급의 함선을 두 동강 내고는, 그 뒤에 따르는 카락급의 함선 한 척을 더 침몰시키고서야 움직임을 멈췄다.

“배를 버리고 적 함선의 갑판 위로 올라라!”

조금 전의 돌격으로 함선을 잃어버린 광속의 격투가 세스크가 유저들과 함께 이순신을 비롯한 르네상스 혈맹의 함선 위로 올라섰다.

“죽인다, 놈!”

해전의 치욕스러운 패배를 만회하려는지 세스크가 빠르게 천휘를 향해 쇄도했다. 어찌나 살기를 풀풀 풍기는지 마치 한 마리의 맹수를 보는 것만 같았다.

“어디서 깝치냥깨!”

까앙!

하지만 세스크의 움직임은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블랙헤드에 의해 저지되었다.

“상대할 수 있겠냐?”

광속의 격투가 세스크는 임페리얼 길드의 주축 간부답게 무려 퍼펙트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사내였다. 물론 블랙헤드 역시 부단한 노력으로 얼마 전 퍼펙트 마스터에 오르긴 했지만, 천휘가 보기에는 살짝 밀리는 듯했다.

“나만 믿으랑깨! 나도 단장이어야!”

“쿡쿡! 그래, 네게 맡기마!”

블랙헤드의 식칼 다루는 솜씨는 카멜과 비등비등했다. 게다가 원체 전투 감각이 좋은 녀석인지라 카멜과의 대결에서도 결코 밀리지 않았다.

“애송이는 꺼져! 내 상대는 오직 저 개잡종뿐이다!”

“워매! 이 경을 칠 놈을 보소. 감히 누구보고 개잡종이라 한당가! 너야말로 상종 못할 개잡종이고마잉!”

챙!

조금 전 녀석의 권격을 받아낸 블랙헤드는 방심하지 않고 유니크 식칼 지옥의 나락을 위로 끌어올렸다.

“마늘 다지기!”

선제공격은 블랙헤드의 식칼에서 뿜어져 나왔다. 조금 전의 부딪침으로 상대의 주먹이 예사롭지 않음을 깨달은 것이다.

“어림없다! 하앗! 슬라이드 스텝!”

하지만 블랙헤드의 식칼은 세스크의 몸에 닿을 수가 없었다. 마치 미끄러지듯 움직이는 세스크의 발걸음에 그의 식칼은 허공을 갈랐다.

“피스트 캐논!”

“커허억!”

세스크의 주먹이 빈틈을 노리고 블랙헤드의 등을 강타했다. 허리가 꺾이는 충격에 블랙헤드는 앞으로 나뒹굴며 고통을 호소했다.

“후후, 고작 그 정도 실력으로 나와 맞서겠다는 것이냐?”

단숨에 승기를 잡은 세스크는 고소를 흘리며 블랙헤드를 비웃었다.

“끄응! 확실히 강하긴 하구마잉.”

등으로 전해지는 고통에 블랙헤드는 신음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허지만 말이다잉, 그 정도 주먹질로는 날 이길 수 없당깨.”

“입만 산 놈. 타앗! 슬라이드 스텝!”

빠르게 블랙헤드를 처치하고 아군을 도우려는 심산으로 세스크는 곧바로 신형을 날렸다. 조금 전과 같은 미끄러지듯 움직이는 발걸음이었다.

“감자 깎기!”

“허억!”

단 한 번 봤을 뿐이지만, 블랙헤드는 녀석의 신형을 단숨에 포착하고는 지옥의 나락을 좌에서 우로 휘둘렀다. 옆으로 움직이는 그에게는 위에서 아래로 베어가는 공격보다 이와 같은 공격이 효율적임을 본능적으로 안 것이다.

자신의 약점을 순식간에 알아챈 블랙헤드의 공격을 보며 세스크는 허공으로 뛰어올랐다. 하지만 그것도 미리 예상한 듯 수평으로 베어가던 식칼이 방향을 바꿔 허공으로 치솟았다.

“죽으랑깨!”

놀랍도록 재빠른 방향 전환에 세스크의 얼굴이 사색으로 변했다. 그러나 이내 그의 만면에 조소가 그려졌다.

“고작 그 정도인 거냐?”

허공으로 치솟던 블랙헤드를 향해 세스크의 다리가 위에서 아래로 천천히 움직였다. 너무나 느려 보는 이로 하여금 안타깝게 느껴질 정도였지만, 그 안에 내포된 힘은 주변의 공기까지 뒤흔들 만큼의 위력이었다.

“크럼블 마운틴(Crumble Mountain)!”

태산도 무너트릴 기세의 내리찍기!

엄청난 풍압을 동반한 세스크의 공격에 지옥의 나락을 내뻗던 블랙헤드가 죽음을 직감했다.

하지만 갑자기 날아든 한 인영에 의해 세스크의 공격은 무위로 돌아가고 말았다.

“안 돼! 피해요!”

쾅!

“꺄아악!”

“쟈, 쟈넷!”

“쳇! 빌어먹을 계집이로군!”

블랙헤드를 대신해 세스크의 공격을 받은 인영은 다름 아닌 쟈넷이었다. 처음부터 블랙헤드와 세스크의 대결을 지켜보던 그녀가 결정적인 순간 블랙헤드를 대신해 몸을 날린 것이다.

“나, 난 걱정 말고 어서 저자를!”

다행히 미리 온갖 신성 마법을 걸어뒀던 덕에 쟈넷은 즉사를 면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헌신으로 목숨을 부지한 블랙헤드의 분노는 어마어마했다.

“죽이고야 만당깨!”

“후후, 계집 때문에 목숨을 구원받은 병신치고는 말이 많군.”

끝까지 자신을 도발하는 세스크를 보며 블랙헤드의 머리는 차갑게 식었다.

그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던 로빈이 소리쳤다.

“도와줄까?”

“됐당깨.”

착 가라앉은 블랙헤드의 음성에 로빈이 고개를 끄덕이며 다른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에 대한 믿음이었다.

“생각보다 더 무식한 녀석이었군. 나 같으면 동료의 도움을 받아서 목숨이라도 부지할 텐데 말이야.”

“쟈넷을 다치게 한 죄, 내 손으로 물을 것이랑깨!”

“후후, 꼴에 남자라고 여자 앞에서 재는 것인가? 영락없는 병신이군.”

“병신은… 바로 네 녀석이랑깨!”

블랙헤드는 곧바로 세스크를 향해 식칼을 휘둘렀다. 스킬을 배제한 공격이었기에 쉬이 막을 수 없을 만큼 쾌속했다.

“고작 이 정도냐?”

하지만 광속의 격투가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세스크의 몸놀림을 재빨랐다. 마치 다람쥐가 나무를 오르듯 표홀하게 검격을 피해냈다.

“…….”

세스크의 도발에도 블랙헤드는 묵묵히 식칼을 휘둘렀다.

점점 빨라지는 식칼의 궤적.

급기야 세스크조차도 여유롭게 피할 수 없는지 이마에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이, 이 자식이!”

얼른 몸을 빼내 녀석이 그리는 식칼의 궤적에서 피하려 했지만, 이미 블랙헤드의 식칼은 사방을 에워싸고 있는 형국이었다.

독 안에 든 쥐.

세스크는 지금 딱 그 짝이었다.

“크윽!”

결국, 드디어 블랙헤드의 식칼이 세스크의 표홀한 움직임을 따라잡아 어깨에 상처를 입혔다.

“이런, 빌어먹을! 슬라이드… 크아악!”

막 스킬을 전개하려던 세스크는 옆구리와 허벅지를 동시에 관통하는 끔찍한 고통에 비명을 토해냈다.

“네 녀석은 사람을 잘못 봤당깨. 네놈이 속한 허접한 임페리얼 길드와는 차원이 다른 곳이 우리 르네상스 혈맹이여. 내가 순전히 천휘와의 친분으로만 단장 직에 올랐다고 생각하믄 큰 오산이랑깨!”

마치 훈시와도 같은 블랙헤드의 외침에도 세스크는 식칼을 피하는 데 급급했다.

“이런 말 해서 뭐 하겄냐만은… 똑똑히 들어두랑깨! 임페리얼 길드는 오늘을 기점으로 조만간 세틀러 제도에서 발을 붙이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여! 하앗! 천둥 회 뜨기!”

“크아아악!”

블랙헤드의 식칼 지옥의 나락이 번쩍하며 세스크의 가슴을 갈랐다. 눈으로 좇을 수도 없을 정도로 쾌속한 공격이었다.

“쟈넷, 괜찮은가?”

“네, 괜찮아요.”

세스크를 쓰러트리자마자 쟈넷을 챙기는 블랙헤드를 보며 로빈은 흡족한 듯 웃었다.

쿠웅!

그랜저가 몰고 있던 캐러벨급의 함선 선수에 위치한 충각이 르네상스 혈맹의 함선을 들이받았다. 그는 영악하게도 동급의 함선이 아닌 카락급의 함선을 들이받으며 그 함선을 침몰시켰다.

“모두 적의 배에 올라라!”

“녀석들이 배에 오르지 못하도록 저지하라!”

그랜저의 명령에 따라 임페리얼 길드의 유저들이 빠르게 르네상스 혈맹의 배 위로 이동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을 예측이라도 한 듯 르네상스 혈맹은 저들이 넘어오지 못하도록 마법을 전개하고, 화살을 쏴댔다.

“크악!”

“커허억!”

“최대한 녀석들의 공격을 피하면서 올라라!”

순식간에 수십의 아군이 목숨을 잃었지만, 그랜저의 지시를 받은 임페리얼 길드의 유저들은 끈질기게 상대편 갑판으로 넘어갔다.

“쳇! 결국 이렇게 될 수밖에 없나. 마법사들은 모두 뒤로 물러나시오! 전사들과 성기사들은 녀석들을 상대하라!”

어떻게든 갑판 위로 오르는 것만은 저지하려 했지만, 그것은 사실 불가능한 일이었다. 별수 없이 해전이 선상 전투로 이어지며, 카멜은 자신을 따르는 성기사들과 함께 데몬 슬레이어를 꺼내들었다.

“속전속결로 처리한다! 하앗!”

“알겠습니다!”

카멜의 지시에 성기사들이 그를 따르며 임페리얼 길드의 유저들을 도륙했다. 하나같이 350레벨을 넘어선 성기사들과 퍼펙트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카멜의 전투력은 가히 폭풍과도 같았다.

“저 자식이 카오스 팔라딘이라는 카멜인가?”

“그런 모양이다.”

멀리 떨어진 곳에서 카멜을 알아본 그랜저는 알무니아의 대답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허공으로 치솟았다. 그리고 몇 개의 함선을 뛰어넘어 카멜이 위치한 캐러벨급의 함선으로 이동했다.

카앙!

“크윽! 웬 놈이냐!”

측면에서 들어오는 갑작스러운 공격을 간신히 막아내며 뒷걸음질 친 카멜은 분노를 토해내며 소리쳤다.

“큭큭! 네 녀석이 천휘 그 개자식의 친구라는 카멜인가?”

“그랜저?”

난데없는 그랜저의 등장에 카멜의 눈이 왕방울처럼 커졌다. 하지만 이내 상황을 파악한 그는 데몬 슬레이어를 거칠게 거머쥐며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동안 쥐새끼처럼 숨어 지내더니 어느새 쥐구멍에서 빠져나온 모양이군.”

“쥐새끼도 쥐새끼 나름이겠지. 네가 생각하는 그 쥐새끼는 눈앞에서 알짱거리는 도둑고양이 정도는 쉽게 처치할 수 있을 만큼 날카로운 이빨을 지니고 있으니까 말이야.”

“과연 천휘 말대로 말솜씨는 뛰어나군. 하지만 과연 그 실력도 그 나불거리는 입을 쫓아갈 수 있을까?”

카멜은 더 이상 설전을 벌이기 싫은 듯 한발 앞서 선제공격을 펼쳤다.

카앙! 카앙!

귀를 따갑게 만드는 금속음이 터져 나왔다.

혼돈의 힘을 사용하는 카멜과 영혼의 힘을 사용하는 두 절대 고수의 격돌에 주변의 유저들은 최대한 멀찌감치 떨어져서 전투를 벌였다.

“퍼펙트 마스터의 경지에 도달했군!”

“피차일반이다!”

카멜의 뛰어난 무위에 그랜저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우리 길드에도 퍼펙트 마스터는 나를 비롯해 레만과 세스크뿐이다. 이렇게 되면 저쪽에도 최소한 둘 이상의 퍼펙트 마스터가 있다고 봐야 하나?’

룬 아일랜드에 파견된 정보원들에게서 듣지 못했던 사실이었다. 그들이 모아온 정보에 따르면 르네상스 혈맹에는 오직 천휘만이 퍼펙트 마스터에 올랐을 뿐이었다.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이렇게 떡하니 또 다른 퍼펙트 마스터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무슨 잡생각이 그리 많은 거냐! 카오스 블레이드!”

까앙!

자신을 앞에 두고 딴생각을 하고 있는 그랜저의 작태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카멜이 필살의 공격을 전개했다.

“큭!”

순간적으로 몸을 빼내며 검을 들어올렸지만, 그랜저가 입은 충격은 그리 작지 않았다. 혼돈의 힘은 그만큼 무섭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죽어라! 놈!”

그랜저가 고통에 신음하건 말건 카멜은 재차 공격을 감행했다. 수직으로 쏟아지는 흉흉한 공격에 그랜저는 자신의 힘을 폭발시켰다.

“소울 스피릿!”

그랜저의 전신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영혼이 깃들었다. 그와 동시에 전방으로 튕기듯 쏘아지는 그랜저의 신형. 그는 카멜의 품 안으로 파고들어 영혼의 검을 그의 복부에 적중시켰다.

“커허억!”

생각지도 못했던 반격에 카멜은 갑판을 휙 날아가 선실 문에 부딪혔다. 그리고도 날아가는 힘은 줄지 않아 그의 몸은 선실 내벽까지 날아가서야 멈출 수 있었다.

“하아앗!”

그렇게 처박고도 부족한지 어느새 그랜저의 신형이 카멜을 향해 쇄도했다. 그런 그를 바라보며 카멜이 황급히 데몬 슬레이어를 들어올렸다.

“카오스 실드!”

카멜의 주변으로 둥근 막이 형성되며 그를 감쌌다. 모든 공격을 무위로 돌리고, 오히려 상대에게 200퍼센트의 데미지를 입히는 혼돈의 방패였다.

“소울 액스!”

그런 카멜을 바라보며 그랜저의 손에 들린 무기가 검에서 도끼로 변화되었다. 보기만 해도 거대하기 짝이 없는 영혼의 도끼가 혼돈의 방패를 향해 날아들었다.

콰아앙!

함선을 뒤흔드는 강렬한 충격에 치열한 난전을 펼치던 유저들의 시선이 선실로 향했다.

“카오스 팔라딘 카멜을 처치했다!”

“와아아!”

르네상스 혈맹의 주축 간부 중 한 사람인 카멜의 죽음.

이에 임페리얼 길드의 사기는 상승했고, 반대로 르네상스 혈맹의 사기는 저하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선상 전투의 승패를 좌우할 정도로 커다랗게 다가왔다.

“천휘야!”

“파멸의 안식!”

콰앙!

“왜 갑자기?”

신나게 임페리얼 길드의 유저들을 처치하던 천휘는 갑작스러운 로빈의 외침에 퉁명스럽게 되물었다.

“카멜이 당했다. 아무래도 저쪽으로 그랜저가 향했던 모양이야.”

“카멜이? 빌어먹을!”

로빈의 말에 천휘가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이마에 힘줄이 솟아올랐다.

“그것뿐만이 아니야. 반대편의 유저들이 하나 둘 쓰러지고 있어. 이런 추세라면…….”

로빈의 뒷말은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전멸.

반대편의 유저들 중 가장 강한 카멜이 죽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빌어먹을! 개자식! 우리도 이쪽 빨리 처리하고 저쪽으로 합류해야겠어. 손에 사정을 두지 말고 모조리 처치해…….”

퍼엉!

쾅!

“크윽! 무슨 일이지?”

갑작스러운 포격에 이순신의 선체가 크게 뒤흔들렸다. 워낙 단단한 외장갑을 부착한 덕에 파손된 부분은 적었지만, 피해가 지속되면 이순신도 무사할 수는 없었다.

“제3함대다! 레만이 이끄는 녀석들이 용병 길드를 모두 박살내고 이쪽을 지원하고 있어!”

“…….”

로빈의 말에 천휘의 표정이 흉신악살과도 같이 일그러졌다. 생각지도 못했던 반전이었다. 자신의 계산으로는 용병 길드가 충분한 시간 동안 녀석들을 저지할 수 있을 줄 알았다. 아무래도 저쪽에도 뭔가 변수가 끼어든 모양이었다.

“어떻게 할까?”

로빈의 물음에 천휘의 장고가 길어졌다.

전투를 지속해서 이순신이 부서지든 말든 악착같이 녀석들의 수를 줄일 것인가. 그도 아니면 일단 용병 길드가 있는 아르고 섬으로 피신할 것인가.

어느 쪽도 일장일단이 있었지만, 천휘는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이대로 꼬리를 말아야 하는 건가.’

서로가 입은 피해는 엇비슷했지만, 아무래도 유저들의 수가 적은 르네상스 혈맹이 타격이 더 클 수밖에 없었다.

“천휘야!”

계속되는 포격으로 이순신이 받는 피해가 가중되자 로빈이 애타는 심정으로 소리쳤다.

“젠장! 조타수들에게 일러서 당장 해역을 벗어나라고 해! 목적지는 아르고 섬의 항구 베론이다!”

천휘는 결국 지금의 상황에서 최선의 선택을 취했다. 하지만 가슴을 짓누르는 패배감은 그로 하여금 입술을 꽉 깨물게 만들었다.

“키를 돌려라!”

“목표는 베론이다!”

어쩔 수 없는 선택.

그러나 아직 선상에는 임페리얼 길드의 유저들이 남아 있었다.

“파멸의 축제!”

“크아악!”

조금 전까지 슬렁슬렁 움직이던 천휘의 신형이 귀신처럼 누비며 임페리얼 길드의 유저들을 바다로 떨어트렸다. 죽이려는 게 아닌 바다로 떨어트리려는 목적이었기에, 금세 선상에서 임페리얼 길드의 유저들은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녀석들이 도주한다!”

“큭큭! 드디어 사태를 파악한 건가! 놈!”

차분히 르네상스 혈맹의 유저들을 모두 처리한 그랜저는 이제 막 르네상스 혈맹의 주함인 이순신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천휘는 그것을 귀신같이 알아내고는 아르고 섬의 항구인 베론을 향해 뱃머리를 돌린 것이다.

“레만에게 일러라! 녀석들을 끝까지 뒤쫓으며 포격하라고!”

“알았다!”

“우리도 녀석의 후미를 뒤쫓는다! 녀석들이 베론으로 들어서지 못하게 막아!”

르네상스 혈맹이 뱃머리를 베론으로 돌리면서 해상에서 때 아닌 추격전이 벌어졌다.

레만이 이끄는 제3함대가 측면에서 움직이며 포격을 개시했고, 어느새 따라붙은 그랜저의 제1함대도 선수포를 이용해 쉬지 않고 포탄을 쏘아댔다.

“배리어!”

쾅!

“마법사들은 쉬지 않고 방어 마법을 펼쳐서 포탄을 저지하세요!”

후미에서 날아오는 포탄을 5서클 배리어 마법으로 막아낸 로빈이 목이 터져라 소리쳤다.

“아이스 실드!”

“플레임 실드!”

쾅!

쾅!

로빈의 말에 따라 마법사들이 마나를 쥐어짜내 방어 마법을 펼쳤다. 이미 이와 관련해 지속적으로 수련을 해왔기에 마법사들은 효과적으로 날아오는 포탄을 막아내고 있었다.

“천휘 동생! 임페리얼 길드의 함대가 베론으로 들어서는 길목을 막아섰어!”

유일하게 파수 스킬을 중급까지 익힌 하린의 외침에 천휘가 급히 전방을 바라보았다. 과연 그녀의 말대로 베론 코앞에서 새로운 함대가 모습을 드러내며 항구로 들어가는 길목에 진형을 이루고 있었다.

“로빈, 네가 일전에 익힌 고대 마법 펼칠 수 있겠어?”

로빈은 아즈카 마을에서 발견한 고대 마법 중 한 가지를 익혔다. 하지만 마법 체계가 사뭇 다른 고대 마법인지라, 그 역시도 아직까지 제대로 된 위력을 발휘할 수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해봐야지.”

베론으로 들어서는 길목을 막아선 함선은 총 5척.

이미 지척까지 따라붙은 임페리얼 길드의 제1함대를 떨쳐 내고 항구로 들어서려면 로빈이 익힌 고대 마법의 힘이 절실했다.

“내게 업혀.”

“그래.”

천휘는 로빈을 등에 업고 이순신의 갑판에서 뛰어올랐다. 그리고 순차적으로 아군 함선을 뛰어넘어 함대의 선두에서 움직이고 있는 눈송이의 함선에 도착했다.

“천휘 오빠!”

“선수에서 모두 비켜!”

눈송이를 뒤로하고 천휘는 곧바로 로빈을 등에 업고 선수로 향했다.

“이제 네 차례다!”

“맡겨 둬라.”

겨우 5척의 카락급 함선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르네상스 혈맹의 움직임을 저지하기에는 충분했다. 단 5분만 지체되더라도 후미와 측면에서 임페리얼 길드의 제1함대와 제3함대가 충각을 부딪쳐 올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되면 해전에서 패퇴하는 것은 물론이고, 수백에 달하는 르네상스 혈맹의 유저들이 떼죽음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

로빈은 지금 수백의 유저들의 목숨을 어깨에 짊어지고 뱃머리에 섰다.

‘반드시 성공한다!’

수식을 알고 있으면서도 이제껏 단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을 만큼 그가 익힌 고대 마법은 난해하기 짝이 없었다.

로즈란의 지도 아래 7서클을 넘어 8서클 초입에 도달했음에도 그랬다.

“마나 안정!”

로빈은 고대 마법을 펼치기에 앞서 원진 마법을 이용해 주변의 마나를 최대한 평온한 상태로 만들었다.

“우주를 떠돌아다니는 파괴의 파편이여, 차원의 경계를 넘어 세상에 현신할지니! 메테오 스트라이크!”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는 로빈의 집념이 빛을 발하며 조금 전까지 맑았던 하늘에 먹구름이 잔뜩 끼기 시작했다.

“이, 이게 무슨 조화지?”

“기후 변화 마법이라도 펼치는 건가?”

갑작스럽게 어두워진 하늘을 보며 임페리얼 길드의 유저들이 당황한 기색을 내비쳤다.

그것은 그랜저와 알무니아 역시 다르지 않은지 불안한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봤다.

“서, 설마!”

“왜 그래, 알무니아?”

뭔가 알고 있는 듯 말을 더듬는 알무니아를 보며 그랜저가 물었다.

“기후 변화 마법은 이렇듯 순식간에 먹구름을 형성할 수 없어. 그렇다는 것은 내가 알지 못하는 고위의 마법이라는 건데……. 내가 알기로 이런 변화를 일으키는 마법은…….”

“뭔데 그래?”

“허억!”

그랜저의 물음에도 알무니아는 비명을 내지르며 하늘을 가리켰다.

먹구름 사이로 언뜻 보이는 거대한 불덩어리!

그것은 빠른 속도로 베론 항구로 들어서는 길목에 있던 5척의 함선 위로 떨어져 내렸다.

콰아아앙!

세틀러 제도를 뒤흔드는 끔찍한 폭발이 일어났다. 그 폭발이 만들어낸 거대한 물보라에 르네상스 혈맹의 함선은 물론이고, 뒤따라오던 임페리얼 길드의 함선마저 휩쓸리고 말았다.

“키를 잡아!”

“모두 노를 잡으세요! 이 파도를 넘어야 합니다!”

생각보다 여파가 엄청난 탓에 미리 대비하고 있던 천휘조차 당황스러운 얼굴로 유저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운석이 떨어져 내린 곳에서 가장 가까이 있었기에 자칫 잘못하다가는 폭발이 만들어낸 와류에 함선이 박살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돛을 모두 접고 죽기 살기로 노를 저으세요!”

때 아닌 파도와의 사투!

상황은 이전보다 더욱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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