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세틀러 제도의 발전
“왼쪽을 더 세게 잡아당기세요!”
“영차! 영차!”
“이번에는 오른쪽요!”
그랜저가 이끄는 임페리얼 길드는 룬 아일랜드와 다소 떨어진 아제로스라는 섬에 정착했다. 배를 댈 만한 해변이 한 곳밖에 없는 룬 아일랜드와 달리 아제로스 섬은 사면이 모두 배를 댈 수 있을 만한 백사장으로 되어 있었다.
임페리얼 길드는 아제로스 섬의 북쪽 해안에 정착해 한창 마을을 건설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이 정도면 일주일이면 어느 정도 구색은 갖출 수 있겠지?”
“그렇긴 한데, 물자가 많이 부족해. 레만 녀석이 유저들을 이끌고 섬을 탐사하고 있긴 하지만, 워낙 울창한 정글이 펼쳐져 있어서 그마저도 쉽지 않아.”
“흠… 확실히 식량이나 식수가 떨어지긴 했지. 하지만 마을을 건설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야. 유저들에게 일러서 조금만 참아주라고 해. 대대적인 섬 탐사는 마을이 건설된 이후에 시작하겠어.”
“그렇게 전하지.”
그랜저가 서 있는 곳은 해안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해안가 인근의 언덕 위였다. 그곳에서 그는 전반적인 상황을 점검하고 있었다.
‘…헤라.’
고개를 돌려 수평선을 바라보던 그랜저는 문득 얼마 전 헤어진 헤라의 얼굴이 떠올랐다. 결국 그녀는 자신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고 학교를 떠났다. 신학기가 시작되어 학교 분위기가 어수선했지만 그녀의 결심은 꺾을 수가 없었다.
‘잘 지내고 있겠지?’
주변 사람들을 은연중 깔보고 무시하는 성격을 지닌 그랜저에게 있어 헤라는 애인 그 이상의 존재였다. 자신이 무슨 일을 벌이건 그녀는 늘 자신의 편을 들어주었고, 자신이 간혹 실수를 하더라도 늘 웃음으로 대해줬다.
그런 그녀가 자신에게서 마음이 떠나 재수 없는 밥버러지에게 연심을 품었다는 것을 안 순간, 자신은 그녀에 대한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그리고 그렇게 그녀를 내쳤다.
“쳇! 나도 쓸데없이 감상적이 되었네.”
헤라에 대한 것은 더 이상 떠올려서는 안 될 사항이었다. 길드의 유저들도 그랜저 앞에서는 헤라에 대한 이야기를 절대 꺼내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랜저의 머릿속에서는 여전히 헤라의 얼굴이 맴돌고 있었다.
* * *
“대충 이 정도면 마을의 구색을 갖춘 것 같아.”
“데브라 말이 맞다. 이제는 최소한의 인원만 이곳에 남겨 두고, 이 구아라 섬에 대한 정보를 모아야 할 때다.”
마제스티 길드는 세틀러 제도의 남서쪽에 위치한 구아라 섬에 정착했다. 여느 섬과 크게 다를 바는 없었지만, 섬 한가운데로 강이 흐르고 있다는 사실이 아렌으로 하여금 이 섬을 선택하도록 만들었다.
그렇게 구아라 섬에 정착하고 2주가 흘러 마제스티 길드는 컨퀘스트라는 이름의 마을을 건설했다. 마을의 이름을 정복이라는 의미의 컨퀘스트로 지은 것은, 말 그대로 세틀러 제도 전체를 자신들 마제스티 길드의 발아래 놓겠다는 의미였다.
“한 번에 모든 섬을 다 돌아볼 수는 없습니다. 천휘 녀석이 차지하고 있는 룬 아일랜드 역시 무려 두 달에 걸쳐 섬에 대한 정보를 모았을 정도로, 이 제도의 섬들은 자연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곳입니다. 게다가 아는 것이 하나도 없는 만큼 위험도도 높지요. 하지만 우리에겐 시간이 없으니 최대한 정예들을 추려서 섬에 대한 정보를 알아나가도록 할 것입니다.”
아렌의 대략적인 의견 제시에 요한이 딴죽을 걸었다.
“우리에게 시간이 없는 것은 옳은 소리이지만, 정예만을 추려서 섬에 대한 정보를 수집한다는 것은 좋은 생각이 아니오. 우리 길드의 유저들은 오랜 항해와 적성에도 맞지 않는 막노동으로 심신이 지쳐 있소.”
“맞는 말이다. 확실히 주변에서 들려오는 원성이 적지 않아. 이대로 가다간 우리끼리 분열할지도 모르겠어.”
요한의 말을 거인 토르가 거들었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아렌 자신도 그에 대한 뾰족한 대책이 없는 듯 다른 이들의 생각을 물었다.
“우리가 게임을 하는 가장 큰 이유가 무엇이겠나.”
“즐거움을 찾는 것 아니겠습니까.”
신선의 물음에 아렌이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일반적인 유저들의 즐거움은 몬스터를 사냥해 경험치를 쌓고 아이템을 획득하는 것이네. 그러니 정예를 뽑아 섬에 대한 정보를 모으는 것보다는 모든 유저가 함께 섬 내부를 탐사하는 것이 좋을 듯하네. 유저들은 기본적으로 미지의 장소에 대한 모험을 좋아하니까 말이야.”
“그리되면 컨퀘스트는 누가 지킵니까? 이곳을 완전히 비워두고 갈 수는 없는 노릇인데요.”
“내가 지키겠네.”
신선의 대답에 유저들이 어느 정도 수긍하는 눈치였다. 지존 12인 중에서도 수위에 꼽히는 신선이라면 어느 정도 안심이 된다는 눈치였다. 어차피 다른 섬들도 섬을 개발하기 위해 전력을 다하고 있는 만큼 큰 위험은 없을 것이다.
“그럼 모두들 찬성하는 것으로 알고, 이번 주말에 아제로스 탐사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렌이 이끄는 마제스티 길드를 필두로 다른 길드들도 차례로 자신들이 정착한 섬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다.
섬의 지형과 섬에 서식하고 있는 몬스터, 거기에 더해 식량이 될 만한 열매와 채소, 그리고 섬에 위치한 던전에 대한 것까지.
대부분 르네상스 혈맹과 엇비슷한 절차를 밟고 있었지만, 그들은 각자의 특색에 맞춰 발전해나가고 있었다.
그로부터 현실 시간으로 두 달이 지났다.
* * *
“오늘부터 방학이다. 올해부터 방침이 바뀌어 보충수업은 사라졌지만, 어느 정도는 공부를 해둬라. 하루 종일 놀지만 말고.”
“그러는 선생님이야말로 새벽까지 『오벨리스크』에 접속하지나 마시죠? 선생님이 무슨 좀비도 아니고 두 눈이 퀭해가지고서는.”
“푸하하하! 좀비래! 확실히 선생님은 좀비에 근접해.”
“…방학 숙제를 내주겠다.”
좀비라는 말에 영완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러나 아이들은 아직도 사태 파악을 못하고 웃고 떠들기에 바빴다.
“고등학생인데 방학 숙제는 무슨. 큭큭!”
“야야, 그만 해. 선생님 삐치시겠다.”
어느덧 이런 농담까지 주고받을 정도로 아이들과 친해지긴 했지만, 영완은 저런 말을 듣고도 가만히 있을 만큼 착한 담임이 아니었다.
“내가 내주는 방학 숙제를 해오지 않은 녀석들에겐 온 학교의 화장실 청소를 한 학기 동안 시키겠다. 더불어 교장실 청소와 교무실 청소까지 맡기도록 하지.”
“…에이! 농담이시죠?”
“당연히 농담이겠… 지?”
아이들의 애절한 말에도 영완의 표정은 진지했다. 농담이 아니라는 것을 얼굴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너희에게 내줄 방학 숙제는 한 사람당 사회봉사를 10번씩 총 50시간을 해오는 것이다. 거짓으로 서류를 작성해올 생각은 꿈에도 하지 마라. 그 정도는 전화 한 번이면 다 파악할 수 있으니까 말이야.”
“50시간!”
“말도 안 돼! 그건 너무 많다고요!”
영완의 말에 아이들이 울상을 지으며 소리쳤다. 하지만 영완은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심드렁한 표정으로 말했다.
“난 분명히 말했다. 해오지 않은 녀석들은 2학기 내내 화장실 청소를 시킬 거야. 학교와는 상관없는 지극히 내 개인적인 방학 숙제이다만… 후후, 알아서 잘 생각하고 판단해라.”
영완의 얼굴에 드러난 사악한 미소는 아이들의 표정이 절로 찌푸려지게 만들었다.
“이로써 종례를 마치도록 하마. 반장.”
“차렷! 경례!”
꾸벅.
영완이 내준 방학 숙제에 불만이 많은 듯 아이들은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것만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그런 녀석들의 반응이 어찌나 우스꽝스러운지 영완은 터져 나올 것 같은 웃음을 간신히 참으며 교실을 나섰다.
“이제 끝난 거야?”
“어? 기다리고 있었어?”
“그런 건 아니고, 조금 전까지 안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거든.”
미연의 말에 영완은 복도 저편을 바라보았다. 과연 그곳에는 2학년 생물 담당 교사인 안선영 선생이 걸어가고 있었다.
“오늘이지?”
“응.”
“바로 갈 거야?”
“왜? 집에 가서 옷이라도 갈아입고 갈까?”
“아니. 지금도 충분히 깔끔해.”
“큭큭! 너도 꽤나 신경 쓰고 온 모양인데?”
“당연하지. 상견례 자리인데 이 정도는 되어야지.”
영완의 옷차림은 평상시와 다를 바 없는 깔끔한 정장 차림이었지만, 미연은 봄이 지나고 여름이 찾아오는 계절임에도 노란색의 나풀거리는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영완의 부모님과 미연 자신의 부모님이 함께 만나는 상견례를 위한 차림새였다.
“아무튼 일단 교무실로 가자. 상견례 한다는 것은 나중에 선생님들께 알리고.”
“결혼식 할 때 청첩장이나 돌리면 되지. 괜히 설레발 떨 건 없으니까.”
“설레발이라고 할 것까진 없잖아. 그냥 알려도 되는 거지. 꼭 그렇게 말해야 돼?”
“…네가 먼저 나중에 알리자며.”
“그건 그거고!”
두 사람의 결혼이 가시권에 들어오자 미연은 요새 들어 부쩍 날카롭게 반응하고 있었다.
그것이 결혼 스트레스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영완은 군말 없이 그녀의 화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알았어. 그럼 일단 오늘 상견례를 한다고 하자. 결혼은 나중에 알리더라도, 너와 나의 관계가 이 정도까지 진전되었다는 것을 알리는 건 나쁘지 않잖아. 그렇지?”
“마음대로 해!”
끝까지 날카로운 반응을 보이는 미연을 보며 영완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리고 그녀의 뒤를 따라 교무실로 들어섰다.
“오늘 회식이 있는 건 선생님들도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교장 선생님도 참석하시는 자리이니만큼 모두들 함께해주길 바랍니다.”
두 사람이 교무실로 들어서자 마침 교감 선생님이 회식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선생님. 저희 둘은 오늘 회식에 참석 못할 것 같은데요.”
“무슨 일이지, 서 선생?”
“저희 두 사람은 오늘 양가 부모님과 상견례가 있습니다.”
“상견례?”
“이야! 두 사람 사이가 그렇게까지 진전됐었나?”
영완의 말에 교사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축하의 말을 건넸다. 그러나 단 한 사람, 시영만은 아니꼬운 얼굴이었다.
“그런 일이라면 어쩔 수 없지. 하지만 다음 회식 때는 꼭 참석하도록 하지, 두 사람 모두.”
“그렇게 하겠습니다, 선생님.”
이윽고 교감 선생님이 교무실에서 나가자 개인적인 친분이 두터운 동료 교사들이 영완과 미연에게 다가왔다.
“서 선생, 이 선생, 두 사람 모두 축하해.”
“그래. 올해가 가기 전에 결혼해버려. 국수, 아니지 요새는 보통 호텔 뷔페로 하던데, 우리 뷔페 먹여 줘야지. 안 그래?”
“그러게요. 아무튼 축하하고, 방학 때 기회 되면 다 같이 모여서 둘의 연애담도 좀 듣고 하자고. 알았지?”
“네, 그렇게 할게요.”
축하의 말을 건네던 동료 교사들이 물러나자 영완은 미연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섰다. 약속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까닭이었다.
“이야기 좀 하자.”
“…무슨 이야기?”
“잠깐이면 돼.”
“…차에서 기다리고 있어. 금방 갈게.”
“알았어.”
막 교무실을 나선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던 사람은 다름 아닌 이시영이었다. 그는 굳은 얼굴로 교무실 문 앞에 서 있었다.
“좀 걸을까?”
“좋을 대로.”
영완과 시영은 본관을 벗어나 별관 건물로 향했다. 그곳에 커피 자판기가 있어 조용히 이야기를 나눌 만한 벤치가 놓여 있었다.
“자, 받아라.”
커피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은 시영이 영완에게 건넸다. 평소와 다른 녀석의 행동에 영완은 신경이 쓰였지만, 일단 호의를 보이는 만큼 군말 없이 커피를 받아들었다.
“결혼식 날짜는 잡혔냐?”
“오늘 잡아야겠지.”
“그래…….”
“…….”
질긴 악연으로 점철된 둘의 관계였다. 현실에서건, 그리고 가상현실에서건 둘의 악연은 쉽게 풀릴 만한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난 네 녀석이 싫다.”
“후후, 피차일반이겠지.”
“네 녀석과의 악연은 대학 때부터였지.”
“우리의 악연은 내가 아닌 네가 만든 것이었어.”
두 사람은 대학 시절 같은 레저 동아리 출신이었다. 비록 학과는 달랐지만, 같은 동아리였던 탓에 처음에는 제법 친한 관계를 유지했었다.
사건의 발단은 시영이 동아리 선배와 다른 여자를 사이에 두고 양다리를 걸치는 것을 영완이 목격한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영완은 시영처럼 여러 여자들을 동시에 만나는 것을 용납하지 못했다.
결국 영완은 시영과 대판 싸움을 벌이게 되었고, 시영은 그 일이 터지고 나서 사귀고 있던 여자들과 모두 헤어지고 말았다.
“난 네놈의 쓸데없는 정의감이 싫었어.”
“난 네놈의 쓸데없는 우월감이 싫었지.”
“…내가 왜 많은 여자들을 두고 희영을 택했는지 아냐?”
“다른 이유가 있는 거냐?”
의미심장한 시영의 말에 영완은 표정을 바꾸며 물었다.
“네가 그녀를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지인에게 듣게 되었지. 그리고 나는 그녀에게 접근했고, 결국 그녀와 널 떼어놓을 수가 있었어.”
“이런 개자식이!”
와락!
시영의 비열함에 분노하며 영완이 그의 멱살을 잡았다.
“너 때문에! 너 같은 개새끼 때문에 그녀가!”
“큭! 아직도 그녀 때문에 분노하고 있군. 역시 넌 아직도 그녀를 좋아하고 있었어.”
“…….”
답답한지 시영의 목소리는 쇳소리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가 내뱉는 말에서 영완은 왠지 모를 한을 느낄 수가 있었다.
“넌 언제나 그런 식이었어. 아닌 듯 행동하면서 늘 그녀를 마음에 품으며 날 암중으로 옭아맸어. 그런 너 때문에 결국 그녀도 날 떠나고 말았어!”
시영의 말을 들으며 영완은 그 역시 희영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처음에는 비록 불순한 의도로 그녀에게 접근했지만, 그녀에 대한 그의 마음만은 진심이었던 것이다.
“난 더 이상 그녀를 원하고 있지 않아.”
“거짓말! 거짓말하지 마, 이 자식아!”
이번에는 반대로 시영이 영완의 멱살을 붙잡았다. 그의 눈에는 보는 이를 두렵게 만드는 광기까지 어려 있었다.
“진심이다. 난 이제 그녀를 원하고 있지 않아. 내게는 미연이 있으니까.”
“…아니, 넌 분명히 아직도 그녀를 원하고 있어. 그러면서도 이 선생과 결혼하려 하는 것은 그녀를 잊지 못할 것 같기 때문이지. 이따위 연극이 내게도 통할 것 같아!”
영완은 제멋대로 모든 것을 파악하는 시영을 한심한 듯 쳐다보며 양손을 들어 멱살을 잡고 있는 녀석의 양손을 뿌리쳤다.
“이 멍청한 자식아, 세상 남자들이 다 너 같은 줄 알아? 네 말대로 난 그녀를 사랑했어. 하지만 그건 말 그대로 과거일 뿐이야. 난 이제 더 이상 그녀에게 미련 따윈 없어. 내겐 이제 미연만 있을 뿐이야. 그러는 너야말로 그녀에게 미련이 있는 것 아닌가? 이미 그녀와 헤어진 마당에 이제 와서 이 지랄을 떠는 이유가 뭔데?”
“…….”
영완의 반격에 시영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그러나 그의 입은 한참이 지나도록 떨어지지 않았다.
“너… 아직도 그녀를 사랑하고 있는 거지?”
“…….”
“그녀가 나 때문에 널 떠났다고 생각하는 거냐?”
“…….”
“이거 알고 보니 정말 바보 같은 자식이었군.”
“뭐라고!”
영완의 도발에 그제야 시영이 반응하며 소리쳤다. 하지만 그에 기죽지 않고 영완은 학교가 떠나가라 크게 소리쳤다.
“그녀가 널 떠난 건 순전히 네 탓이지, 내 탓이 아니다! 그녀는 널 사랑했어! 사랑했기 때문에 너 같은 녀석과도 계속 함께할 수 있었던 거고! 알아들어? 너 같은 자식이 어떻게 할 수 있을 만큼 그녀는 쉬운 여자가 아니야!”
“빌어먹을! 그녀가 날 떠난 건 모두 네 탓이야! 최근에 그녀는 내가 아닌 널 바라보고 있었어! 네 녀석의 일거수일투족을 그녀는 눈에 담고 있었단 말이다!”
시영의 말에 영완이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사실 여부를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언젠가부터 그녀와 내 사이는 소원해지기 시작했어. 내 행동은 예전과 달라진 바가 없어. 과거에는 어땠는지 몰라도, 나도 요 몇 년간 과거와는 달리 오로지 그녀만을 바라보고 살았었으니까.”
처절하기까지 한 시영의 말을 들으며 영완의 눈은 다시 평소로 돌아왔다. 그의 눈에 더 이상 당황함은 깃들어 있지 않았다.
“그래서?”
구구절절한 시영의 말을 들은 영완의 반응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이 자식이! 그래서라니! 우리가 이렇게 된 게 다 너 때문이라고!”
“병신 새끼.”
퍼억!
시영의 한탄에 영완의 주먹이 그의 왼쪽 옆구리에 틀어박혔다.
“커헉!”
생각지도 못했던 영완의 주먹질에 시영은 무척이나 고통스러운지 신음을 토해내며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잘 들어, 병신 새꺄. 일이 그렇게 된 건 나 때문이 아니라 너 때문이야. 네 녀석은 스스로가 변했다고 생각하겠지만, 그건 그저 네 생각일 뿐이야. 옆에서 지켜보는 넌 그저 망나니에 불과했어. 제아무리 널 사랑하는 그녀라 할지라도 그런 모습을 보면서 참을 수 있었겠어? 아직도 그녀를 사랑한다고? 그럼 병신아, 당장 달려가서 그녀에게 사랑한다고 말해! 여기서 질질 짜지 말고!”
영완의 통렬한 비판에도 시영은 여전히 고통스러운 듯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정도로 가슴이 아픈 척 엄살떨지 마라. 지난 몇 년 동안 난 너희 둘을 보면서 더 가슴 아팠으니까.”
“……”
영완은 그 말을 끝으로 여운을 남기며 그 자리를 떠났다.
홀로 남은 시영은 뜨거운 햇볕을 온몸으로 견뎌 내며 자리에서 일어설 줄을 몰랐다.
“…빌어먹을.”
* * *
“준비됐어?”
“어. 그런데 좀 떨려.”
“나도 떨려. 하지만 양가 부모님들께서 기다리고 계실 거야. 어서 들어가 보자.”
“응.”
약속했던 호텔에 도착한 둘은 떨리는 마음을 안고 호텔 레스토랑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종업원의 안내를 받아 예약했던 방으로 조심스럽게 들어섰다.
“으하하하! 그런 녀석이 이렇게 커서 벌써 결혼을 운운하다니 우습지 않소이까, 사돈?”
“그렇군요. 확실히 사위 녀석이 범상치는 않게 들리는군요.”
어색할 것이라 생각했던 방 안은 예상과 달리 무척이나 떠들썩했다. 심지어 식탁 위에는 여러 개의 비워진 맥주병까지 있을 정도였다.
“오늘의 주인공들이 오네요.”
“이제 그만 좀 마셔요.”
“으하하하! 그래야 할 것 같군. 영완아, 이리 앉아라.”
“…네.”
영완과 달리 그의 아버지인 서준욱은 무척이나 호탕한 사내였다. 얼굴도 곱상한 영완과 달리 산적을 연상시킬 정도로 우락부락했다.
그에 반해 영완의 어머니인 강민희는 중년의 미부였다. 젊은 시절에는 지나가는 남자들의 시선을 확 빼앗았을 정도로 그 미색이 뛰어났다.
“아버님, 어머님, 그간 강녕하셨지요?”
“오! 우리 예쁜 며늘아기, 오늘따라 더 예뻐 보이는구나.”
“이이는 주책도. 오랜만이구나, 미연아.”
“네. 자주 찾아뵙지 못해 죄송해요.”
“바쁜 것 다 아니까 그런 생각 하지 마라. 그래도 네 덕분에 명절 때도 잘 찾아오지 않던 이 녀석을 한 달에 한 번은 볼 수 있어서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 호호호!”
그렇게 대충 인사를 마친 둘은 양가 부모님 곁에 서로 마주 보며 앉았다.
“으하하하! 이렇게 다들 모이니 그야말로 선남선녀로군! 아니 그렇습니까, 사돈.”
“허허! 정말 그렇군요. 너무도 잘 어울리는 한 쌍입니다.”
“우리 이럴 게 아니라 오늘 이 자리에서 결혼식 날짜를 잡아버리는 게 어떻겠습니까.”
“허허! 사돈 참 성미도 급하시군요. 하지만 저 역시 젊었을 적에는 활화산이라고 불렸던 남자입니다. 혹시 사돈께서도 결혼식 날짜를 잡아오셨습니까?”
“으하하하! 과연 사돈과 저는 마음이 잘 맞나 봅니다.”
호탕한 준욱에 비해 영목은 무척이나 점잖은 성격이었지만, 술을 좀 들이켜서인지 한껏 상기된 얼굴이었다.
영완의 어머니인 민희와 미연의 어머니인 상희 역시 그런 둘을 즐거운 듯 바라보고 있었다.
“하나 둘 하면 서로가 받아온 날짜를 공개하는 겁니다.”
“좋습니다, 사돈.”
“하나, 둘, 셋!”
두 사람은 서로가 적어온 날짜를 공개했다.
10월 13일.
마치 서로 짜기라도 한 듯 양측에서 공개한 날짜는 일치했다.
“으하하하! 어쩜 이렇게 마음이 잘 맞을 수 있는 겁니까, 사돈!”
“허허! 그러게 말입니다. 이거 하늘이 하루라도 빨리 욘석들을 맺어주라는 뜻인가 봅니다.”
“호호! 잘됐네요, 사돈.”
“그러게요, 사돈. 그 날짜가 길일이라고 하니 그날로 정하도록 해요.”
“…….”
“…….”
그렇게 양 집안은 일사천리로 결혼식 날짜를 정해버렸다. 정작 당사자인 영완과 미연은 일언반구도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아가야.”
“네, 아버님.”
평소에는 결코 볼 수 없는 조신한 미연의 자태.
그런 그녀의 가식적인 모습을 보고 영완은 한쪽에서 킥킥대며 웃었다.
“우리 아들이 못난 구석이 많다만, 네가 잘 이해해주고 서로 아끼며 살아야 한다.”
“서로에 대한 마음만은 변치 않으며 살게요.”
“으하하하! 암, 그래야지.”
똑 부러지는 미연의 말을 들으며 준욱은 호탕하게 웃었다. 이윽고 준욱에 이어 영목도 영완을 점잖은 목소리로 불렀다.
“서 서방.”
“네, 장인어른.”
“천둥벌거숭이 우리 딸, 잘 부탁하네.”
“아빠!”
“저희 아버님 말씀처럼 서로 늘 아끼며 살아가겠습니다.”
그렇게 형식적인 상견례는 끝났다.
영완과 미연, 두 사람은 부모님들과 헤어져 영완의 차에 올랐다.
“생각보다 양가 부모님들께서 쉽게 친해지신 것 같지?”
“아버님이 워낙 남자다우시니까. 그런데 예상보다 좀 빨리 결혼식 하게 된 것 같지 않아?”
“아무래도 우리 둘 다 나이가 있으니까. 어서 손자를 보고 싶으신 거겠지.”
“손자…….”
“흠흠!”
손자라는 이야기에 차 안의 분위기는 어색하게 변했다. 하지만 이윽고 울리는 벨 소리에 어색했던 차 안의 공기가 흐트러졌다.
“하린 누님이신데?”
“언니가? 얼른 받아봐.”
하린에게서 걸려 온 전화에 영완은 얼른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하이! 오늘 상견례는 잘 치렀어?)
“그럭저럭요. 그나저나 이 시간에 웬일이세요?”
보통 하린은 저녁 시간에는 학원에서 돌아오는 아이들을 챙겨 주느라 『오벨리스크』에 접속하지 못한다. 때문에 이 시간에 하린과 연락하는 것은 그야말로 하늘의 별 따기나 마찬가지였다.
(아이들이 오늘 방학했거든. 마침 애 아빠도 휴가 냈고. 그래서 아이들이랑 애 아빠를 시댁으로 놀러 보냈어. 호호호! 오늘부터 자유야.)
“…대단하시네요, 누님.”
(뭘 이 정도 가지고. 아, 맞다. 이게 아닌데. 그 소식 들었어?)
“무슨 소식요?”
다급한 말투의 물음에 영완이 궁금한 듯 되물었다.
(전쟁이 터졌어!)
“전쟁이요? 설마 『오벨리스크』?”
(당연하지! 모나크에서부터 앙숙지간으로 발전한 용병 길드와 드림 길드 간의 전쟁이래. 마침 두 길드가 차지한 섬이 인근에 있어 얼마 전부터 서로 간에 소소한 전투가 벌어졌다나 봐.)
“알았어요. 저랑 미연이도 얼른 접속하도록 할게요.”
(그래. 미안하지만 상황이 급박하니까 얼른 접속해줘.)
하린이 전화를 끊자마자 영완은 차에 시동을 걸었다.
“무슨 일인데 그렇게 서두르는 거야? 하린 언니가 뭐라고 했어?”
“전쟁이 터졌대.”
“전쟁?”
“응. 드림 길드와 용병 길드 간의 전쟁이야.”
“용병 길드라면 아르샤빈이 이끄는 길드 아냐?”
몇 달 전, 용병 길드가 세틀러 제도에 입성했을 때 천휘는 그들이 섬에 정착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그때의 인연으로 미연 역시 용병왕 아르샤빈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렇지. 마찬가지로 드림 길드도 시영이 녀석이 이끄는 임페리얼 길드와 인연이 있어.”
“그렇다면…….”
“그래. 어쩌면 두 길드 간의 전쟁을 빌미로 세틀러 제도에 대대적인 전쟁이 발발하게 될 거야.”
영완의 말에 미연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하지만 금세 평소의 얼굴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녀의 얼굴에 떠오른 것은 자신감이었다.
“용병 길드를 도와줄 거야?”
“그래야겠지. 아르샤빈과는 친분이 있으니까. 그리고 오베른과의 인연도 있으니.”
영완의 말에 미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녀의 얼굴에 살짝 그림자가 드리웠다.
‘결혼을 해서도 『오벨리스크』를 해야 하는 건가.’
물론 미연 자신도 『오벨리스크』를 무척 즐겨 하고 있었다. 문제는 영완이 『오벨리스크』를 너무 광적으로 즐긴다는 데 있었다.
그는 『오벨리스크』의 수십만 유저 중에서도 정점에 올라 있는 남자. 그 자리를 지키기 위해 매일같이 새벽까지 『오벨리스크』를 플레이하고 있었다.
‘그런 건 싫어.’
미연은 좀 더 현실적인 결혼 생활을 원했다.
주말이면 데이트도 즐기고, 1박 2일로 여행도 가서 남들처럼 깨소금 쏟아지는 결혼 생활을 꿈꿨다.
하지만 지금처럼 영완이 『오벨리스크』를 지속적으로 즐긴다면 그것은 물거품이 될 공산이 컸다.
철컥!
“뭐야? 갑자기 문은 왜 열어? 이제 출발할 건데.”
“나 오늘은 혼자 집에 갈래.”
“내가 데려다줄게. 얼른 타.”
“됐어!”
쾅!
차 문을 확 닫고 내리는 미연을 영완은 황당한 듯 쳐다봤다.
“뭐야? 갑자기 왜 저러지?”
뭔가 또 기분 상하는 일이 있는지 미연은 토라진 기색으로 차에서 멀어져 갔다.
“쳇! 갈 테면 가라.”
그녀가 갑자기 역정을 내는 것이 영완도 짜증났던지 차에서 내리지 않고 액셀을 거칠게 밟아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휘잉!
“…….”
미연의 옆에서 차를 세울 법도 하건만 영완은 야멸치게 쌩하고 지나갔다.
그런 영완의 차를 바라보는 미연의 볼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바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