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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룬 아일랜드의 비밀 (73/82)

제2장 룬 아일랜드의 비밀

르네상스 혈맹의 유저들이 치열하게 전투를 벌이고 있는 그 시각.

천휘는 일행의 후미에서 카이젠과 오베른, 로즈란과 로렌을 소환하고는 어떻게 악마 고담을 상대할 것인지 의논하고 있었다.

“녀석을 마법으로 묶어둘 수 있겠어?”

“불가능해요. 이전에도 7서클 속박 마법인 데스티네이션 웹을 사용했지만, 고작해야 3초를 묶어두는 것에 불과했어요.”

로즈란의 말에 천휘는 얼굴을 찌푸렸다. 고작 3초로는 녀석을 처치할 수 없었다. 강시들이 최강의 공격을 퍼붓는다 해도 드래곤 수준의 생명력을 지닌 녀석이라 별 소용이 없을 것이다.

“주인, 그보다 중요한 건 녀석의 공격을 어떻게 방어할 것이냐 하는 점이다. 녀석의 채찍은 저따위 마녀가 휘두르는 채찍과는 궤를 달리한다.”

“오베른 말이 맞습니다, 주인님. 지옥의 유황불이 활활 타오르는 녀석의 채찍에 한 번이라도 가격당하면 눈앞의 이방인들은 일거에 사라지게 될 겁니다.”

“흠.”

오베른과 카이젠의 말처럼 녀석을 공격하는 것보다 녀석의 채찍을 어떻게 방어하느냐 하는 것이 더욱 중요했다.

녀석의 화염 채찍은 마녀의 그것과 생김새는 비슷했지만 채찍에서 타오르고 있는 화염의 수준이 달랐다.

지옥불의 마녀가 휘두르는 채찍이 4서클 마법인 플레어 정도의 위력을 발산한다면, 악마 고담의 채찍에는 8서클 마법인 헬파이어와 맞먹는 화염이 타오르고 있는 것이다.

“오베른, 너로서도 힘들겠지?”

강시들 중 가장 방어력이 높은 이는 오베른이었다.

카이젠은 속도를 중시하는 쾌검을 구사하는 반면, 오베른은 무게를 중시하는 중검을 구사해 그의 전신에는 강도가 단단한 풀 플레이트 갑옷이 착용되어 있었다.

“나 역시 고작해야 3분 정도를 버틸 수 있는 게 전부다. 저번에도 보았듯이 녀석의 공격은 몸으로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니까.”

“흠… 그럼 정말 큰일인데. 녀석의 힘을 약화시키려면 이 토템을 정해진 위치에 놔야 하고. 그러려면 최소한 5분 정도는 시간을 끌어야 하는데 말이야.”

지저 세계에서 중급 마수들을 상대할 때도 이러한 무기력감은 느껴 보지 못했건만, 이번 상대는 정말 차원을 달리하는 녀석이었다.

‘어쩌면 생령강시를 만들 수 있을지도…….’

높은 수준의 강시를 제작하려면 그만큼 제물로 쓰일 녀석도 강해야 한다. 이미 생령강시에 대한 천휘의 이해도는 충분한 상태. 그는 녀석을 제물로 삼아 생령강시를 제작할 흑심을 품고 있었다.

“주인.”

“왜?”

천휘가 따로 흑심을 품고 있는 사이, 로렌이 평소와 사뭇 다른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녀석을 맡아보지.”

“네가?”

“활쟁이, 아무리 너라 해도 녀석의 채찍을 피하는 건 무리야. 그 예로 저번에도 네가 깐죽대다 가장 먼저 죽었지 않나.”

카이젠의 말대로 지난번 악마 고담을 상대했을 때, 로렌이 가장 먼저 녀석의 채찍에 휘감겨 목숨을 잃었다. 활을 쓰는 주제에 선두에서 녀석을 상대하려 한 자만심 때문이었다.

“그때와는 달라. 긴말하지 않겠다, 주인. 내가 녀석을 맡겠다. 그사이 주인은 그 토템을 설치해라.”

“무리라니까 그러네.”

“그래요, 로렌. 아무리 당신이라 해도 녀석의 공격을 회피하는 건 무리예요. 차라리 오베른과 카이젠이 번갈아가며 녀석을 상대하는 것이 더 나을 거예요.”

“…….”

다른 강시들의 말에도 로렌은 꿈쩍 않고 천휘를 바라보았다. 기이한 열망이 깃든 그의 눈을 천휘는 피할 수가 없었다.

“좋아.”

“뭐라고요?”

“말도 안 된다, 주인!”

“그럴 수는 없습니다, 주인님.”

천휘의 결단에 세 강시들이 한사코 만류했다. 하지만 이미 천휘는 결심을 한 상태였다.

“로렌은 할 수 있을 거다. 그러니 잔말 말고 너희는 얼른 녀석을 견제할 방법을 강구해봐. 너희가 최대한 견제를 해줘야 로렌이 좀 더 쉽게 녀석의 공격을 피할 수 있을 거다. 그리고 로렌!”

“말하라, 주인.”

“네가 할 일은 우리가 토템을 설치할 때까지 녀석의 주의를 분산시키는 거다. 어떤 수단을 쓰든 네 녀석의 몸이 부서지든 반드시 해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주인을 비롯한 이방인들이 모두 전멸하겠지.”

로렌의 말에 천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들이 내게 어떤 존재들인지 너도 잘 알 거다.”

“목숨 바쳐 주인의 명을 이행하지.”

물론 이들은 영원한 삶이 보장된 강시들이다. 하지만 이미 죽음을 경험한 자들이었기에 죽음이란 더욱 두려운 것이었다.

영원한 어둠에 갇혀 아무것도 할 수 없고 그저 무의 존재가 되어 시간을 허비하는 것.

죽음은 그런 것이었다.

로렌은 그런 끔찍한 경험을 감내하면서도 이렇듯 자신의 몸을 내던지려 하고 있는 것이다.

* * *

“모두들 수고하셨습니다. 자, 이제 이쯤에서 야영지를 마련하고 휴식을 취하겠습니다. 야영 스킬이 있으신 분들은 야영지를 마련해주세요.”

악마의 틈새로 들어선 지 게임 시간으로 하루가 지났다.

그동안 유저들은 지옥불의 마수와 정령을 상대로 치열한 접전을 펼쳤고, 그 와중에 목숨을 잃고 강제로 접속이 종료된 이들도 부지기수였다.

하지만 지옥불의 마수와 정령을 잡으면 잡을수록 유저들은 희열을 느꼈다.

엄청난 경험치의 상승과 레어 등급 이상의 아이템.

워낙 수준이 높기 때문인지 녀석들이 안겨 주는 경험치는 막대했다. 레벨이 300이 채 되지 않은 유저들은 3마리 정도를 잡으면 곧바로 레벨 업이 될 정도였다.

게다가 드롭하는 아이템들도 엄청나게 좋은 옵션이 붙은 것들이 많았다. 특히 그중에서도 콘푸로스트라는 유저가 획득한 지옥불의 인장은 무려 유니크 등급의 반지였다.

[지옥불의 인장]

지옥불의 악마 고담이 부여한 인장.

지옥의 유황불을 자유자재로 부리는 악마 고담은 마신조차도 고개를 저을 정도로 강대한 악마. 녀석의 힘은 세상의 용암을 한꺼번에 일으킬 만큼 방대하다.

등급:유니크 내구력:300/300

분류:반지

제한:최소 레벨 350

옵션:물리 방어력 +100

마법 방어력 +100

불 저항력 +30%

불 계열 추가 데미지 +15%

힘 +50

악마와도 같은 힘을 지닌 지옥불의 인장은 유저들 간에 묘한 경쟁심을 유발시켰고, 결국 유저들은 눈에 불을 켜고 보다 강력한 지옥불의 마수나 정령을 찾아 쓰러트렸다.

그로 인해 천휘가 생각했던 이틀이라는 시간을 절반으로 단축해 만 하루 만에 악마의 틈새 끝자락까지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아! 팔다리가 다 욱신거리네. 천휘 동생은 우리가 죽기 살기로 싸우고 있는 동안 뭘 하고 있었던 거야?”

단장 중 유일하게 야영 스킬을 익히고 있는 하린이 야영지를 구축하며 천휘에게 물었다. 그녀의 물음에는 전에 없던 표독스러움이 묻어 나왔다. 그만큼 지옥불의 마녀들을 상대했던 것이 힘겨웠던 모양이었다.

“악마 고담을 상대할 비책을 마련하고 있었죠. 아무래도 상대가 상대이니까요.”

“그래서 비책은 세웠어용?”

눈송이의 귀여운 물음에 천휘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확실한 방책은 없는 모양이지?”

그의 얼굴을 살핀 로빈의 물음에 천휘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런 희생 없이 녀석을 처치할 방법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강시들뿐 아니라 유저들의 희생도 감수해야 되겠어. 녀석은 그 정도로 강해.”

“하! 천하의 천휘가 저런 말을 할 정도라니. 이거 진짜 목숨 내놓아야 하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

“그러니까 우리 단장들이 더 노력해야지. 안 그래?”

하린의 말에 모두가 굳은 얼굴로 결의를 다짐했다.

“유저들의 피해는 최소로 줄여야 해. 라푼 녀석에게서 연락이 왔는데, 아무래도 임페리얼 길드의 배가 이곳 세틀러 제도에 거의 도착한 모양이야.”

“헉! 벌써?”

천휘의 설명에 카멜이 깜짝 놀란 듯 소리쳤다.

“그래. 게다가 아르니안 대륙을 떠나온 다른 길드들도 거의 차이가 없어. 임페리얼 길드를 바짝 뒤쫓아 이곳으로 다가오고 있어.”

“…….”

“…….”

천휘의 말에 모두의 얼굴이 조금 전보다 더욱 굳어졌다.

악마 고담을 상대하는 것은 가능성이 희박하긴 했지만,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일이었다.

반면, 저들이 이곳으로 도착하는 것은 그것과 별개의 문제였다. 최소 2주 정도는 더 여유가 있다고 판단했던 이들에겐 계획보다 빠른 그들의 진출이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나저나 블랙 녀석은 어디로 갔어? 안 보이네?”

한창 이야기를 나누던 천휘는 단장 중 유일하게 보이지 않던 블랙헤드를 찾았다. 행여나 유저들을 위해 음식을 만들고 있나 싶어 모닥불 주변도 살폈지만, 그 어디에서도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몰랐냐?”

“뭐가?”

“그 자식 이번에 여자 친구 생겼다.”

“여자 친구?”

너무도 뜻밖인지라 천휘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만큼 블랙헤드에게 애인이 생겼다는 것은 충격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그래. 쟈넷이라는 여성 유저인데, 이번에 평원에서 함께 전투를 하면서 친해진 모양이더라. 블랙 녀석이 몇 번 도와준 모양인데, 그 모습에 반했나 봐.”

“오! 그래? 그럼 축하해줘야겠네.”

“그래야지.”

그렇게 각자 친분이 있는 사람들끼리 휴식을 취하던 르네상스 혈맹의 유저들은 이내 천휘의 쩌렁쩌렁한 목소리에 모닥불을 끄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느 정도 휴식을 취하셨죠? 본격적으로 악마 고담을 상대하기에 앞서 몇 가지 공지 사항이 있습니다. 잘 들어주세요.”

천휘는 악마 고담이 봉인되어 있는 협곡의 끝으로 향하기 전, 유저들에게 임페리얼 길드와 여타 길드들이 이곳 세틀러 제도에 거의 다다랐음을 알렸다. 그러자 단장들과 마찬가지로 유저들의 얼굴이 굳어지며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더 이상은 시간을 끌 수 없습니다.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중앙 평원에 우리의 근거지가 될 마을을 건설해야 하며 이 세틀러 제도에 대한 정보도 모아야 합니다.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이 세틀러 제도의 주인이 우리라는 것을 저들에게 보여 줍시다!”

천휘의 외침에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유저들의 얼굴엔 어느새 두려움이 사라지고 독기와 굳은 결의만이 엿보일 뿐이었다.

“악마 고담은 말 그대로 악마적인 무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가 전부 공격을 퍼부어도 녀석은 끄떡하지 않을 겁니다. 다만, 대마법사 룬이 남긴 이 봉인 토템이 설치되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이 봉인 토템으로 녀석의 힘을 최대한 약화시킨다면 승기는 우리에게 있을 것입니다. 이 봉인 토템을 저와 제 강시들이 함께 힘을 모아 설치할 것입니다. 그 후에 여러분이 힘을 모아 녀석을 상대해주십시오.”

천휘는 유저들의 희생을 최소화하기 위해 자신과 강시들이 희생할 것임을 천명했다. 운이 좋으면 사망을 면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천운이나 마찬가지였다.

“악마 고담 레이드! 시작하겠습니다!”

천휘와 네 강시를 필두로 르네상스 혈맹의 유저들이 협곡의 끝자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 누구도 대화를 나누지 않을 정도로 유저들은 긴장해 있었지만 이전만큼 두려운 기색은 없었다.

“저 녀석이 악마 고담입니다.”

“…….”

어둠의 안개가 조금씩 흐릿해지며 5미터 정도의 거대한 실루엣을 드러냈다.

머리의 양쪽에 달린 굽은 뿔은 녀석의 강대함을 보여 줬고, 사이클롭스나 미노타우로스보다 탄탄한 근육은 녀석의 단단함을 드러내고 있었다. 더불어 녀석의 등에 매어진 붉은색 휘장은 녀석의 위치가 마계에서 어느 정도인지를 여실히 드러내주고 있었다.

“저 녀석의 오른손에는 지옥불의 채찍이 들려 있습니다. 그리고 왼손으로는 자유자재로 불 계열 마법을 구사하죠. 잘 보십시오. 지금부터 녀석의 전투 방식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천휘의 설명에 유저들이 침을 꿀꺽 삼켰다.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강력한 보스 몬스터. 그러한 보스 몬스터를 단 몇 명이서 상대하려 하고 있었다.

“로렌.”

“최선을 다하겠다.”

평소와는 다른 경직된 모습에 천휘는 녀석이 일을 그르칠까 염려되었다.

빡!

“크윽! 이런, 젠장! 무슨 짓이야, 칼쟁이!”

그런 천휘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카이젠이 녀석의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이 바보 같은 활쟁이야! 그딴 얼굴로 저 녀석의 공격을 회피할 수 있을 것 같아? 평소의 그 거슬리는 웃음소리는 어디다 처박아뒀냐?”

“…큭큭큭! 으하하하! 활쟁이, 네 말이 맞다! 이런 모습은 내게 어울리지 않지.”

카이젠의 한마디에 그제야 로렌이 평소처럼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천휘는 그런 그를 보며 안심이 된 듯 입가에 미소를 그렸다.

“시작하자!”

휙휙-

천휘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로렌이 앞으로 뛰쳐나갔다. 다크 엘프 특유의 표홀하고도 가벼운 움직임은 마치 나비를 연상시킬 정도였다.

“우리도 가자.”

로렌이 녀석의 주의를 분산시킬 동안, 천휘는 나머지 강시들과 함께 봉인 토템을 설치할 위치를 향해 최대한 발소리를 죽이며 다가갔다.

“하앗! 데몬 애로우!”

멀리서 로렌이 녀석의 채찍을 영민하게 피해내며 화살을 쏘아대는 모습이 보였다. 아직까지는 제 몫을 충분히 해주고 있어 천휘는 한시름 걱정을 덜어냈다.

“봉인!”

파아아앗!

[띠링! 대마법사 룬의 봉인 토템 첫 번째를 성공적으로 설치하셨습니다.(1/3)]

봉인의 주술이 담긴 아카르의 주술 지팡이를 이용해 천휘가 대마법사 룬의 봉인 토템을 활성화시켰다.

주변으로 퍼져 가는 새하얀 빛 무리.

그 순간, 악마 고담이 괴로운 듯 협곡을 뒤흔드는 포효를 터트렸다.

크아아앙!

[띠링! 악마 고담의 포효로 5분간 공격 속도와 이동 속도가 30% 저하됩니다.]

[띠링! 악마 고담의 포효로 10초간 움직일 수 없습니다.]

악마 고담의 포효는 흡사 드래곤의 피어처럼 천휘와 강시들을 속박했다. 심지어는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사태를 관망하고 있던 유저들까지 휩쓸릴 정도였다.

“여자의 변신은 무죄!”

하지만 단 한 명만은 악마 고담의 포효에도 움직임이 제한되지 않았다. 온갖 액세서리들로 온몸을 도배해 마법에 대한 엄청난 저항력을 가지고 있는 그녀, 미온이었다.

‘미온, 땡큐!’

미온의 상태 회복 마법에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된 천휘가 그녀에게 감사의 마음을 눈빛으로 전했다.

그렇게 미온은 천휘를 비롯한 모든 강시들의 상태까지 한 번에 회복시켰다.

파르륵!

쾅!

“커허억!”

‘로렌!’

두 번째 봉인 토템을 설치할 곳으로 다가가던 천휘는 갑작스러운 충격음과 신음 소리에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아니나 다를까 녀석의 지옥불 채찍에 가격당했는지 로렌의 몸에서 청염의 지옥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제가 녀석을 돕겠습니다.”

“조심해.”

더 이상은 로렌 혼자서 녀석의 공격을 모두 감당할 수는 없었다. 그나마 강시들 중 가장 몸이 날랜 카이젠이 나서며 로렌을 지원했다.

‘어서 빨리 끝내야 한다.’

한시라도 빨리 봉인 토템을 설치해 혈맹 유저들의 힘을 끌어내야 한다는 생각에 천휘의 발걸음은 저절로 빨라졌다. 더 이상 시간을 끌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파아아앗!

[띠링! 대마법사 룬의 봉인 토템 두 번째를 성공적으로 설치하셨습니다.(2/3)]

드디어 두 번째 봉인 토템을 설치했다.

크아아앙!

다시 한 번 주변을 뒤흔드는 녀석의 포효 소리.

이번에도 역시 움직임이 제한되는 페널티가 있었지만, 미온의 임기응변으로 인해 곧바로 다시 움직일 수 있었다.

문제는 카이젠과 로렌이었다.

사르르륵!

흡사 뱀의 혓바닥처럼 사이하게 움직이는 악마 고담의 지옥불 채찍에 두 강시는 더 이상 피할 길이 없음을 깨달았다. 녀석의 채찍 공격은 도저히 피할 만한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왼쪽이다, 활쟁이.”

“너는 오른쪽이야, 칼쟁이.”

빠르게 접근해오는 녀석의 지옥불 채찍을 피하며 로렌과 카이젠이 좌우로 흩어졌다.

하지만 지옥불 채찍은 그 길이가 엄청나 좌우로 두 강시가 흩어졌다고 해도 그 범위를 벗어날 수는 없었다.

“데몬 스피어!”

“라그나 블라스트!”

이제껏 수세만 펼치던 두 강시가 드디어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공격은 악마 고담이 아닌 지옥불 채찍을 향한 것이었다. 자신들이 움직일 공간을 위해 지옥불 채찍의 움직임을 제한하고자 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지옥불 채찍의 사이한 움직임을 완벽하게 봉쇄할 수 없었다. 순식간에 두 강시의 공격에서 벗어나며 거의 동시에 두 강시의 가슴으로 지옥불 채찍이 날아들었다.

퍼벅! 퍼벅!

연달아 가죽이 찢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두 강시의 신형이 끈 떨어진 연처럼 허공을 날아가 협곡 좌우의 절벽에 쏜살같이 부딪쳤다.

“제길!”

“우리 차례예요, 오베른!”

“반드시 녀석의 얼굴에 한 방 먹여 주지!”

카이젠과 로렌이 사망하자 드디어 오베른과 로즈란이 나섰다. 이제는 천휘를 호위할 마지막 전력마저 떨어져 나간 것이다.

카이젠과 로렌을 잃은 천휘는 살짝 동요했지만, 다시 마음을 다잡고 마지막 봉인 토템을 설치할 곳으로 빠르게 나아갔다.

“봉인!”

[띠링! 대마법사 룬의 봉인 토템 세 번째를 성공적으로 설치하셨습니다.(3/3)]

[띠링! 대마법사 룬의 봉인 결계가 활성화되었습니다.]

[띠링! 악마 고담의 힘이 50% 저하됩니다.]

스차아앗!

다른 봉인 토템을 설치할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빛 무리가 협곡 안으로 퍼져 나갔다. 신성함마저 느껴지는 그 빛 무리는 이내 거대한 반구의 형태로 악마 고담을 감쌌다.

우워어엉!

쿵! 쿵!

오베른과 로즈란을 향해 마법과 채찍을 동시에 구사하던 악마 고담은 대마법사 룬의 봉인 결계가 활성화되자 괴로워하며 발까지 동동 굴렀다.

“지금입니다! 녀석을 처치하세요!”

결계가 완성된 지금, 천휘는 곧바로 유저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전사들은 이열 종대로!”

“마법사들은 후열 종대로!”

“와아아아!”

카멜과 로빈의 지시하에 유저들이 대열을 갖추며 악마 고담을 향해 득달같이 내달렸다.

그중에서도 특히 카멜을 비롯한 선두열 전사들의 위용이 대단했다. 르네상스 혈맹에서도 가장 레벨이 높은 전사군으로만 구성된 선두열은 최대한 빠르게 악마 고담의 생명력을 깎아내기 위해 가장 자신 있는 스킬들을 연이어 전개했다.

“마법 전개!”

선두열 전사들이 악마 고담에게 접근해 근접 공격을 펼치고 있을 때, 마법사들은 2열 전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마법을 전개했다.

로빈을 비롯한 모든 마법사들은 하나같이 손에 푸른 냉기의 마나를 품으며 얼음 마법을 준비했다. 지옥의 유황불을 다루는 악마 고담에게 얼음 마법은 2배의 데미지를 입힐 것이라는 사실을 모두 알고 있었던 것이다.

“아이스 스피어!”

“아이스 블라스트!”

“아이스 볼!”

얼음 마법은 사냥에서 불 계열 마법에 비해 그 효용성이 떨어진다. 위력도 부족하고, 시각적인 효과도 불 계열 마법에 비하면 약하다. 그로 인해 대부분 마법사 유저들의 얼음 마법은 수준이 낮고, 그것으로는 악마 고담에게 피해를 입히기가 힘들었다.

“이건 어떠냐! 빙결의 여신이여, 당신의 아름다움과 잔혹함을 본받아 이 땅에 당신의 염원을 뿌릴지니! 블리자드(Blizzard)!”

이어서 로빈이 마법을 전개했다. 긴 진언을 읊고 전개된 마법은 7서클 최강의 얼음 마법인 블리자드!

악마 고담의 가슴 위로 강렬한 눈 폭풍이 일며 녀석에게 막대한 피해를 안겨 줬다.

“모두 피하세요! 하쿠나 마타타!”

눈 폭풍이 몰아치기가 무섭게 지하의 심연에서 거대한 빙산의 일각이 모습을 드러냈다.

눈송이 홀로 마법을 구현한 것이 아닌, 얼음소녀라 불리는 소녀 유저들과 동시에 펼친 합동 마법.

그 절대의 위력 앞에 봉인의 결계에 몸부림치던 악마 고담의 이성이 되돌아왔다.

크워어엉!

악마 고담의 입에서 야수와도 같은 포효가 흘러나왔다. 다행히 사제 유저들이 상태 회복 마법을 펼친 덕분에 별다른 충격을 입진 않았지만, 심신을 뒤흔드는 그 포효에 유저들의 마음은 절로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혼돈의 외침! 크헝! 모두 정신 차리세요! 기껏해야 몬스터에 불과합니다! 이길 수 있어요!”

유저들의 행동이 위축되어 처음보다 굼뜨게 변할 것을 본 카오스 팔라딘인 카멜이 혼돈의 외침을 터트렸다.

모든 상태 이상 마법에 대한 저항력을 상승시켜 주는 놀라운 신성 마법이었지만, 생명력과 마나를 절반이나 소모시켜야 한다는 단점 때문에 자주 사용할 수는 없었다.

“저 녀석도 이제 많이 지쳤을 것이랑깨요! 모두 힘을 합하믄 금방 죽여 블 수 있당깨요!”

“큭큭! 맞아! 이미 승기는 넘어왔어!”

“호호! 그러게요.”

블랙헤드의 구수한 사투리에 유저들이 평온을 되찾았다.

그리고 다시 이어진 대규모 레이드! 이제 남은 것은 유저들의 희생을 얼마나 최소화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크워어엉!

쿵!

“드디어 녀석이 무릎을 꿇었다!”

“이제 조금만 더 하면!”

무려 3시간에 걸친 긴 사투 끝에 악마 고담의 굳건했던 무릎이 강렬한 충격음과 함께 바닥에 떨어졌다.

녀석을 드디어 처치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유저들의 마음이 들뜨고 있었다.

그 모습에 천휘가 착잡한 얼굴로 유저들을 바라보았다.

‘악마 고담을 생령강시로 제작하는 것은 나 개인의 이익을 위한 일이다. 이제 와서 내가 저 녀석을 생령강시로 제작한다면 당연히 유저들의 입장에서는 큰 반감이 들겠지. 어떻게 하지……. 저 녀석이 아니라면 생령강시의 제물이 될 녀석을 다시 구하기도 쉽지 않을 텐데.’

천마강시나 음양마령강시는 죽은 시체를 가지고 제작하는 것이기에 어떤 시체로도 만드는 것이 가능했다.

하지만 생령강시는 말 그대로 살아 있는 생명을 강시로 제작하는 일이라 그만큼 정신력이 뛰어난 녀석으로만 만들 수 있었다.

천휘 자신이 판단하기에는 생령강시로 제작되려면 최소한 500레벨 이상의 보스 몬스터여야만 하는데, 지금 당장 그 정도 수준의 보스 몬스터를 찾기란 요원한 일이었다.

“무슨 일이야?”

“뭐가?”

천휘의 얼굴이 똥 씹은 것처럼 일그러져 있자 슬그머니 미온이 그에게 다가왔다.

“남들은 다 좋아서 안달이 났는데 너 혼자만 인상을 찌푸리고 있잖아. 무슨 일인데? 혼자 끙끙 앓지 말고 내게 속 시원히 털어놔봐.”

“…….”

“말 안 하면 일주일간 너 얼굴도 안 볼 거야!”

“킥! 아이고! 무서워라. 쳇! 사실은…….”

천휘는 자신의 속내를 미온에게 털어놨다. 생령강시에 관한 기본적인 설명부터 악마 고담을 그 생령강시로 만들고 싶어 하는 자신의 마음까지 모두 이야기한 것이다.

“뭐야, 그런 걸 가지고 끙끙 앓은 거야?”

“…난 지금 심각하거든?”

천휘의 설명을 다 들은 미온은 한심하다는 듯 그를 바라보며 핀잔을 주었다.

“바보야, 그게 왜 네 욕심에만 치우친 것이라고 생각하는 건데. 이미 네가 강시술사라는 것은 우리 혈맹의 모든 유저가 알고 있는 사실이야. 그리고 네 강시들이 얼마나 유용하게 쓰이는지도 모두 알고 있고. 넌 잘 모르겠지만, 너에 대한 유저들의 믿음은 거의 절대적이라고까지 할 수 있을 정도야. 물론 저 정도 강력한 녀석을 잡는다면 엄청난 아이템이 떨어지긴 하겠지. 하지만 저 녀석을 강시로 제작하는 것에 대한 효용이 더 클 것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유저는 단 한 명도 없어!”

“…그럴까?”

“당연하지!”

미온의 격려에 힘을 얻은 천휘는 그제야 한결 마음이 편안해진 듯 그녀의 손을 꼭 붙잡았다.

“고마워.”

“닭살 돋으니까 어서 가봐. 저러다 저 녀석 강시로 만들기도 전에 죽어버리겠다.”

“큭큭! 알았어. 이번 일만 끝나면 주말에 데이트 한번 하자.”

“누구 마음대로? 일 없거든?”

“큭큭!”

미온의 까칠한 반응에 천휘는 웃으면서 악마 고담과 치열한 전투를 펼치고 있는 유저들의 앞에 섰다. 이미 악마 고담은 더 이상 버틸 힘이 없는지 제대로 된 공격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 형국이었다.

“모두 절 주목해주세요!”

“어라? 맹주잖아? 갑자기 왜 저러지?”

“뭔가 할 말이 있나 본데?”

천휘의 외침에 마법사 유저들이 마법을 전개하다 말고 그를 바라보았다. 전사군의 유저들도 더 이상 공격하지 않고 그저 악마 고담의 움직임을 경계하며 천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제가 이번에 기존의 강시보다 더욱 뛰어난 강시를 제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 그럼 카이젠이나 로즈란보다 더 강력한 강시를 볼 수 있다는 건가?”

“역시 맹주 오빠는 대단하다니까!”

천휘의 외침에 유저들이 흥미로운 얼굴로 감탄했다. 하지만 그런 말을 꼭 이런 자리에서 해야 하나 싶어 몇몇 나이 먹은 유저들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그걸 밝히는 이유는 뭔가, 맹주?”

“이번에 만들 수 있게 된 강시는 시체가 아닌, 살아 있는 생명이 필요합니다.”

“살아 있는 생명?”

강시란 보통 시체를 특수한 방법으로 제련해 완성시키는 일종의 언데드였다. 그러한 기본 지식은 강시에 대해 잘 모르는 이들도 알고 있을 정도로 널리 알려진 부분이었다.

그런데 천휘의 말은 그런 선입관을 타파하는 새로운 개념을 제시하고 있어 유저들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살아 있는 생명이 강시화가 되는 과정을 견디려면 상당한 인내와 정신력이 필요합니다. 그만큼 엄청난 고통이 뒤따르게 될 테니까요. 그래서 저는 생각했습니다. 지금 저 눈앞에 보이는 악마 고담을 생령강시로 제작하면 어떨까 말이지요.”

“저 녀석을?”

천휘의 말에 유저들이 금세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자신들이 겨우겨우 사냥하고 있는 보스 몬스터를 죽이지 않고 날름 강시로 제작해버린다니, 유저들의 입장에서는 실로 황당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런 황당함은 얼마 가지 않았다.

“그렇게 해요, 맹주 오빠!”

“맞아요! 어차피 이 퀘스트도 오빠가 발견하신 거잖아요!”

“듣고 보니 그러네. 게다가 맹주가 강해지면 우리 혈맹의 힘도 더 강해지는 것 아닌가?”

“저런 무지막지한 녀석을 강시로 제작하면 우리 섬의 수호신이 될 수도 있겠어.”

“난 찬성!”

“나도 찬성!”

“당연히 찬성이지!”

과연 미온의 말대로 천휘에 대한 유저들의 믿음은 대단했다. 자신들이 거머쥘 막대한 이익을 이렇듯 쉽게 양보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들의 믿음을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여러분!”

천휘는 진심으로 모든 유저들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그리고 곧바로 악마 고담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모두 비키세요.”

“조심하세요, 맹주 형! 저 자식 아직 꿈틀거려요.”

한 10대 유저의 걱정 어린 말을 들으며 천휘는 악마 고담의 주위를 맴돌았다.

‘생령강시는 여느 강시와 달리 따로 화합된 시약에 며칠 동안 담가둘 필요는 없어. 미리 제작해둔 이 시약을 입 안으로 흘려 넣기만 하면…….’

생령강시를 제작하는 데 가장 심혈을 기울여야 할 것은 시약 화합물도, 시간을 잘 조절하는 일도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생명의 근원이 되는 심장과 시약 화합물이 얼마나 잘 조화를 이루느냐 하는 것이었다.

심장은 피를 만들어 전신으로 공급하는, 말 그대로 생명체에게 있어 생명 그 자체로도 볼 수 있는 기관이다.

이제 천휘가 시약 화합물을 녀석의 입 안에 흘려 넣으면, 그것은 식도를 따라 혈관으로 이동되어 결국에는 심장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심장에 도달한 시약 화합물은 피를 대신해 녀석의 전신으로 퍼져 나갈 테고, 그럼 녀석은 곧 생명을 유지한 채 생령강시로 탈바꿈하게 된다.

천휘는 훌쩍 위로 뛰어올라 녀석의 어깨에 발을 내디뎠다. 그 과감한 행동에 몇몇 유저들이 비명을 내질렀지만 그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설사 녀석이 갑자기 공격한다 해도 한 번 정도는 충분히 피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 때문이었다.

“이거나 처먹어! 새캬!”

천휘는 악마 고담의 벌어진 입 사이로 시약 화합물을 흘렸다.

녀석의 거대한 목구멍으로 천천히 흘러 내려가는 시약 화합물. 일견 투명한 색을 띠고 있어 평범한 물처럼 보이지만, 실은 엄청 비싼 시약들이 모조리 첨가된 수천 골드짜리 액체였다.

부르르!

시약 화합물이 식도를 타고 내려감과 동시에 잠잠했던 녀석의 동체가 들썩이기 시작했다. 행여나 그 짧은 사이 체력을 비축해 다시 날뛸 수도 있어 유저들은 한껏 긴장하며 전투태세를 갖췄다.

“흐읍!”

다른 유저들이 뭘 하건 말건 천휘는 마나를 끌어올리며 시약 화합물의 움직임을 관조했다.

시약 화합물은 천천히 식도를 따라 흐르다가 위와 장을 거쳐 어느 순간 혈관으로 슬며시 흘러갔다. 그리고 빠른 속도로 급물살을 타듯 심장으로 흘러 들어갔다.

크허어엉!

들썩들썩.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나라고 알겠어? 저 자식이 벌이는 일 중에 정상적인 게 있었어야지.”

천휘가 시약 화합물을 관조하는 사이, 유저들은 어느새 자리를 잡고 삼삼오오 모여 천휘와 악마 고담의 모습을 연극 공연 보듯 쳐다봤다.

그도 그럴 것이 악마 고담의 어깨 위에 앉아 녀석의 내부를 관조하는 천휘의 모습은 마치 목말을 타고 있는 어린아이 같았고, 시약 화합물이 각 기관으로 옮겨질 때마다 끔찍한 고통에 비명을 내지르며 어깨를 들썩이는 악마 고담의 모습은 자못 코믹했기 때문이다.

“강시라……. 저런 무지막지한 놈을 강시로 만들면 대체 얼마나 강할까?”

천휘의 제자 중 한 명인 김전일의 한마디에 유저들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그들도 그제야 생령강시의 제물이 얼마나 대단한 녀석인지 깨달은 것이다.

오른손으로는 지옥불의 채찍을 휘두르고, 왼손으로는 8서클 흑마법까지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어마어마한 녀석. 봉인 토템이 아니었다면 수백 명의 유저들이 달려들었어도 잡지 못했을 사상 최강의 보스 몬스터.

그 녀석이 이제 한 사람의 소유가 되려 하고 있었다.

유저들은 문득 엄습하는 위화감에 몸이 저절로 떨렸다.

‘이제 막바지다!’

드디어 시약 화합물이 심장에 도달했다.

이제 남은 것은 녀석의 심장이 제 역할을 다해 시약 화합물을 전신으로 발산하는 일뿐이었다.

천휘는 녀석의 내부를 관조하며 시약 화합물이 언제 심장에서 발산되는지 기다렸다.

‘지금이다!’

심장에서 피가 아닌 시약 화합물을 내뿜기 시작했다.

천휘는 다급히 자신의 마나를 녀석의 심장으로 전달했다. 그의 마나는 곧바로 시약 화합물과 함께 움직이며 녀석의 전신으로 뻗어 나가더니, 녀석의 신체를 재조성하기 시작했다.

본래부터 단단했던 녀석의 피부는 강철보다 더 단단하게 변해갔고, 거대했던 체구는 10미터까지 부풀어 올라 작은 빌딩을 연상시켰다.

신체의 변화.

녀석은 이제 악마가 아닌 생령강시로서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되었다.

[띠링! 생령강시를 제작하셨습니다.]

[명성이 1만 상승합니다.]

[모든 스탯이 20 증가합니다.]

그 누구도 성공하지 못했던 생령강시의 탄생!

천휘의 사문이라 할 수 있는 고루문 역사를 뒤져 봐도 생령강시는 단 한 번도 출현하지 않았다.

이름:악마 고담

등급:생령강시

생명력:180,000 마나:120,000

<기본 스탯>

근력:4,200 민첩:1,620 체력:1,880

지혜:760 지력:940

여느 강시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최강의 강시!

룬 아일랜드의 수호신으로 명성을 떨칠 생령강시가 탄생한 순간이었다.

* * *

[띠링! 퀘스트 ‘악마의 틈새’를 완료하셨습니다.]

[띠링! 레벨이 1 상승하셨습니다.]

악마 고담을 생령강시로 제작해버린 천휘와 유저들은 모두 함께 퀘스트 완료를 위해 아즈카 마을로 향했다.

“와! 나 레벨이 5개나 올랐어!”

“난 8개! 이거 완전 대박이잖아?”

어마어마한 보상 경험치에 유저들이 놀라는 사이, 천휘는 족장인 아카르와 이야기를 나눴다.

[이것은 대마법사 룬의 수정구. 악마 고담을 처치한 그대에게 이것을 주도록 하지.]

천휘는 보상으로 대마법사 룬의 수정구를 그녀에게서 받아냈다. 별다른 옵션도, 효용도 없는 수정구. 천휘는 그것을 로즈란에게 건넸다.

“영상 기억 마법이 저장되어 있는데요?”

“영상 기억? 대마법사 룬이 남겨 놓은 영상인가? 구현할 수 있겠어?”

“그럼요.”

“그럼 마법을 펼쳐 봐.”

“네.”

천휘와 로즈란의 대화에 모든 유저들이 흥미로운 얼굴로 대마법사 룬의 수정구를 바라보았다.

로즈란이 수정구에 마나를 주입하는가 싶더니 곧바로 하늘이 어두워지며 허공에 거대한 크기의 영상이 모습을 드러냈다.

[악마 고담을 물리친 영웅이여.]

인자한 이웃집 할아버지를 연상시키는 대마법사 룬의 등장에 유저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그대는 이곳 룬 아일랜드의 사람은 아닐 터. 분명히 아르니안 대륙의 인간이겠지. 그대의 용기와 정의로움에 무한한 고마움을 느끼고 있네.]

대마법사 룬의 영상은 마치 실제로 그와 마주하고 있다는 착각마저 들 정도로 깨끗했다. 무려 1천 년이 지난 영상이라고는 도저히 생각되지 않을 정도였다. 그만큼 그의 마법은 어마어마했다는 소리였다.

[그대가 이곳 룬 아일랜드를 찾아왔다면 세상은 혼돈으로 물들었을 터. 평화로운 아르니안 대륙에 천재지변이 일어나고, 몬스터들이 봉기해 인간들이 어깨를 기댈 언덕을 찾아 이곳까지 흘러왔겠지.]

마치 지금의 상황을 꿰뚫어 보기라도 한 듯 대마법사 룬은 정확하게 현 상황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이제 그대는 이곳 룬 아일랜드를 기반 삼아 저 흉악한 몬스터들을 물리치고 아르니안 대륙의 평화를 되찾고자 하겠지. 영웅이여, 그대에게 룬 아일랜드의 비밀을 알려 주도록 하겠네.]

드디어 원하던 말이 나왔다. 천휘를 비롯한 유저들은 기대 어린 눈빛으로 대마법사 룬의 영상에 집중했다.

[룬 아일랜드에는 동서남북으로 네 개의 샘이 있네. 그 이름은 불의 샘과 물의 샘, 바람의 샘과 땅의 샘이라네. 그 네 개의 샘에서 물을 떠와 아즈카 마을 중앙에 위치한 정화의 샘에 담아보도록 하게. 그러면 곧 룬 아일랜드의 비밀이 풀릴 것이네.]

“지금 당장 파티를 이뤄 네 개의 샘에서 물을 떠와주십시오!”

“우리가 직접 가마.”

“수고해주세요.”

대마법사 룬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천휘가 지시를 내렸다. 어떤 비밀이 감춰져 있을지 궁금한 것은 천휘나 유저들이나 마찬가지. 단장들이 직접 나서서 샘이 위치한 네 곳으로 일정 수의 유저들을 이끌고 길을 떠났다.

[세상의 평화가 그대와 함께하기를…….]

대마법사 룬이 남긴 영상은 자애로운 마지막 말과 함께 끝이 났다.

밝혀진 룬 아일랜드의 비밀. 이제 그것을 확인하는 일만 남았다.

그로부터 반나절이 흘렀다. 샘의 물을 가지러 떠난 유저들이 속속 마을로 귀환했고, 북으로 떠난 카멜과 유저들을 마지막으로 모든 샘의 물이 모였다.

“자, 이제 시작합니다!”

“우오오오!”

유저들이 가져온 네 곳의 물을 천휘가 한꺼번에 정화의 샘에 부었다.

퍼어엉!

“모두 피하세요!”

그러자 강렬한 폭음과 함께 정화의 샘이 들끓기 시작했다.

우르르르!

“땅이 흔들린다!”

급기야 땅까지 흔들리며 정화의 샘 부근이 쩍쩍 갈라졌다.

유저들은 난데없는 이 천재지변에 깜짝 놀라 멀찌감치 정화의 샘에서 떨어졌다.

“뭐가 어떻게 된 거지?”

흔들리는 지축을 느끼며 유저들의 호기심은 커져만 갔다.

그때, 그런 호기심을 자극하듯 정화의 샘에서 갑자기 상아색의 뾰족한 첨탑 하나가 하늘로 솟구치기 시작했다.

“탑?”

“뭐지, 저 탑은?”

마치 어린 시절 로봇 만화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첨탑이었다. 금세라도 저 안에서 거대한 로봇이 튀어나올 분위기였다.

[띠링! 대마법사 룬의 기적이 담긴 마나의 수호탑이 세워졌습니다.]

[룬 아일랜드에 산재하는 마나가 두 배로 증폭됩니다.]

[룬 아일랜드의 해안을 경계로 거대한 마나의 막이 형성됩니다. 이는 외부에서 룬 아일랜드로 향하는 일체의 마법을 차단하며, 공격 마법은 물론이고 공간 이동 마법도 방어합니다.]

룬 아일랜드의 비밀!

그것은 대마법사 룬이 남겨 놓은 기적이었다.

일체의 마법에 대한 절대적인 방어. 게다가 마나의 절대량이 늘어나 이 안에서 펼쳐지는 모든 마법은 2배의 위력으로 상대를 향할 것이다.

르네상스 혈맹은 그렇게 최고의 창과 최고의 방패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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