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8장. 세틀러 제도 (69/82)

제8장. 세틀러 제도

옥토퍼스와의 전투 이후 르네상스 혈맹은 별 무리 없이 피오르해를 나아갈 수 있었다.

아무래도 옥토퍼스로 인해 주변의 몬스터들이 모두 도망을 간 듯했다.

덕분에 르네상스 혈맹은 테크토가 발견한 제도로 빠르게 접근할 수 있었다.

[으하하하! 주인! 드디어 섬이 보인다!]

“그래!”

가장 시야가 넓은 덕에 파수꾼 역할을 하던 로렌이 특유의 웃음과 함께 크게 소리쳤다. 그에 천휘는 돛대를 타고 위로 올라갔다.

“뭐야! 안 보이잖아!”

하지만 천휘의 눈으로는 로렌이 발견한 섬을 볼 수가 없었다. 그로부터 30분이 지나서야 로렌이 발견한 섬이 아주 희미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섬이다!”

“오오! 드디어!”

“왔구나! 우리들의 파라다이스!”

천휘가 섬을 발견하자 나머지 유저들도 차례차례 섬을 확인할 수 있었다.

무려 26일간의 항해!

유저들은 마치 신대륙을 발견한 듯 환호했다.

[띠링! 새로운 땅 세틀러 제도를 발견하셨습니다.]

[명성이 5,000 상승합니다.]

[대륙의 지도에 세틀러 제도가 추가됩니다.]

“쳇! 이젠 별수 없이 모든 이들이 이곳을 알게 된 건가?”

섬에 접근하자 유저들의 귓가에 알림음이 들려왔다.

그들이 발견한 새로운 땅, 세틀러 제도!

총 10개의 섬이 일정 거리를 유지하며 모여 있는 피오르해 최남단에 위치한 제도였다.

“이미 예상했던 부분 아닌가. 우리는 다른 유저들이 이곳에 도착할 때까지 최대한 기반을 다져야만 하네.”

“당연하죠. 아무튼 테크토 형님이 말씀하신 가장 큰 섬으로 이동하죠.”

“그러세.”

테크토는 이순신의 키를 조종해 세틀러 제도 안으로 들어섰다. 라푼도 거리를 유지하며 그 뒤를 따랐다.

“조용하네요.”

“이런 조용함도 조만간 사라질 거네.”

“…그렇겠죠.”

유저들이 이 땅에 들어서면 이 조용했던 섬은 개척의 나팔로 인해 소란스러워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선두에 르네상스 혈맹이 있을 터였다.

“얼마나 더 가야죠?”

“조금만 더 가면 되네. 그보다 주변 경계를 게을리 하지 말도록 전하게. 멀록이나 샤크맨들이 언제 습격할지 모르니 말이야.”

“그렇게 하죠.”

테크토의 말에 따라 천휘는 유저들과 강시들에게 주변 경계를 지시했다. 하지만 다행히 일행이 섬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런 사건도 일어나지 않았다.

“바로 이곳일세!”

“오! 정말 다른 섬들보다 훨씬 큰데요?”

“그렇지. 게다가 섬의 남쪽 외곽에 있어 방어에도 용이하네. 이 세틀러 제도에서 이보다 좋은 섬은 없다고 장담하네.”

“그러네요. 일단 이곳에서 정박하도록 하죠.”

이순신이 이름 모를 섬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유저들의 환호성은 커졌다. 심지어 어떤 유저들은 바다에 뛰어들어 한발이라도 먼저 섬에 도착하려 했다.

[띠링! 세틀러 제도 내의 룬 아일랜드(Rune Island)를 발견하셨습니다.]

[명성이 1,000 상승합니다.]

르네상스 혈맹이 정착할 섬의 이름은 룬 아일랜드였다.

마법사들이 쓰는 언어인 룬 문자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제법 마음에 드는 이름이었다.

“모두 화물을 들고 내리세요!”

유저들과 NPC들은 이순신에서 내리며 엄청난 양의 화물을 수송했다. 그 화물들의 대부분은 마을을 건설할 목재들이었다.

“카멜.”

“무슨 일이야?”

“카오스 팔라딘들과 함께 주변의 몬스터들을 정리해줘. 이 해안가 주변에 항구를 건설해서 차츰차츰 마을을 넓혀야 하니까 말이야.”

“알았다.”

천휘는 이번 일을 계획하기에 앞서 예전 중세 시대 때 유럽인들이 어떤 식으로 신대륙을 개척했는지 조사했다.

유럽인들은 아메리카 신대륙을 발견하고는 대량의 물자를 동원해 해안가 주변에 항구를 건설했다. 그리고는 항구를 중심으로 마을을 건설해 신대륙을 개척해나갔다.

천휘 역시 그와 비슷한 길을 걸을 생각이었다. 이는 다른 이들과 여러 차례 대화를 통해 얻어낸 결론이었다.

“테크토 형님, 수고해주세요.”

“알겠다. 여러분도 도와주십시오.”

“그렇게 하지.”

테크토는 강철 사슬 일족과 화염의 망치 일족을 이끌고 목재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향했다. 더불어 NPC들 중에서도 손재주가 좋은 이들을 선별해 미리 구상해놓은 설계도에 따라 인원을 배치했다.

예상대로라면 대략 닷새 정도면 어느 정도 구색을 갖춘 주거지를 마련할 수 있었다.

그 외에도 마법사들은 디그 마법과 각종 대지 계열 마법을 이용해 땅을 고르는 작업을 시작했다.

그러한 작업은 이후 페난에서 구해온 농작물이 잘 성장하는 밑거름이 될 것이다.

또한 천휘는 돌쇠들과 다크 엘프 강시들을 짝지어 해안가 주변의 경계를 맡겼다. 행여나 있을 몬스터들의 위협으로부터 NPC들을 지키기 위함이었다.

그렇게 룬 아일랜드에서의 하루가 흘렀다.

* * *

새로운 땅의 도래!

유저들을 위한, 유저들에 의한, 유저들만의 공간!

르네상스 혈맹이 세틀러 제도를 발견함과 동시에 『오벨리스크』 팬 사이트인 오시리스에 공지 사항이 올라왔다.

몬스터들의 습격으로 폐허가 되어버린 아르니안 대륙을 떠나 새로운 땅이 등장했다는 내용의 글이었다.

[제목:새로운 땅, 세틀러 제도!]

대형 몬스터들의 천국이 되어버린 아르니안 대륙.

삶의 터전이었던 아르니안 대륙이 무너져 내린 모습에 유저 분들의 분노가 어마어마하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농간이 아닌 새로운 세계로의 전환을 위한 필수불가결한 변화입니다.

이제 『오벨리스크』는 유저들이 주인이 되어 만들어가는 공간으로 변모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에 앞서 일종의 실험대가 될 새로운 땅, 세틀러 제도가 공개되었습니다.

이미 어떤 유저 분들에 의해 발견된 세틀러 제도는 총 10개의 섬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후의 내용은 세틀러 제도와 관련된 전반적인 설명이었다. 공지 사항을 대충 읽어 내려가다가 마지막 내용에 주목했다.

…(중략)… 마지막으로 세틀러 제도의 각 섬에는 비밀이 감춰져 있습니다. 그 비밀은 미리 밝힐 수 없지만, 그것이 매우 큰 메리트를 감추고 있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자! 이제 유저 여러분을 무한 경쟁으로 이끌 세틀러 제도로 향하십시오! 그곳에서 여러분이 추구하는 세상을 건설하십시오!

“비밀이라…….”

비밀이 있다면 파헤치면 되는 문제였다.

어차피 다른 유저들보다 최소한 한 달, 어쩌면 몇 개월을 앞선 자신들이었다. 어떤 비밀이든 그 안에만 찾아내면 되는 것이다.

“그나저나 왜 이렇게 안 오는 거야?”

넷북으로 오시리스 게시판을 보던 영완은 불평을 늘어놓으며 시간을 확인했다.

시계는 약속 시간에서 30분이나 지난 1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하여간 느려 터져서는.”

영완은 결국 핸드폰을 꺼냈다. 약속에 늦는 미연을 탓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어느새 뒤로 다가온 미연이 영완의 핸드폰을 낚아채며 그의 옆에 앉았다.

“넌 어떻게 만날 때마다 거기에 접속해 있냐? 네 머릿속에 대체 뭐가 들었는지 궁금하다야.”

“쳇! 오자마자 잔소리냐? 왜 이렇게 늦은 거야?”

“지긋지긋한 교통 대란 때문에 늦었다! 왜!”

“뭐야? 차 끌고 온 거야?”

“간만에 하는 주말 데이트니까 교외로 나가려 했지.”

미연의 말에 영완은 머리가 아픈 듯 이마를 짚었다.

“그냥 이 근처에서 놀면 안 될까?”

“잠깐 드라이브나 하고 오는 건데, 뭐. 아무튼 얼른 가자.”

“…하아!”

영완은 마치 도축장에 끌려가는 돼지처럼 미연의 손에 이끌려 어쩔 수 없이 그녀의 차, 포르줴에 탔다.

“그나저나 너 계속 학교 다닐 거야?”

“왜?”

“네가 굳이 학교 다닐 필요는 없잖아. 이제 학교로 온 목적은 어느 정도 달성한 것 아냐?”

그녀가 예슬고의 교사가 된 이유는 전적으로 영완에게 있었다. 이제 영완과 이토록 가까운 사이가 되었으니, 더 이상 교사 생활을 지속할 필요는 없었다.

“이왕 시작한 일, 일 년 정도는 해보려고. 게다가 은근히 적성에도 맞고.”

“그래도 부모님이 뭐라 말씀 안 하셔?”

미연의 아버님은 이름만 대면 제법 알아주는 대기업의 오너시다. 게다가 어머님 역시 그 대기업 산하 종합병원 원장님이셨다.

한마디로 그녀는 상위 1퍼센트, 아니 어쩌면 상위 0.1퍼센트의 귀족이라는 소리였다. 그런 그녀가 뭐가 아쉬워 교사 생활을 한단 말인가.

“그냥 잔소리는 좀 하시는데,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니까 별말씀 안 하시던데?”

“뭐?”

아직도 적응되지 않는 미연의 직접적인 애정 표현에 영완은 살짝 얼굴을 붉혔다.

“아무튼 그 얘기는 나중에 하고 얼른 출발하자. 오늘은 내가 운전할게.”

“그게 낫겠다. 난 교외는 잘 모르거든. 게다가 네 차를 몰면 나중에 내 차 몰 때 기분이 어색해서 별로야.”

“남자가 쪼잔하긴.”

“야! 여기에서 쪼잔이 왜 나와, 쪼잔이! 그냥 내 느낌을 말하는 것뿐인데!”

“몰라. 그냥 넌 좀 쪼잔해.”

“…….”

비수가 되어 가슴을 쑤시는 미연의 한마디에 영완은 시무룩한 표정으로 창밖을 바라봤다. 그리고 이윽고 차가 출발하자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 안 쪼잔한데…….”

“풋!”

시원한 바람이 창문을 타고 흘러 들어왔다. 『오벨리스크』에서의 바람보다는 좀 더 시원하고 따뜻한 느낌의 바람이었다.

“어디로 가는 거야? 양수리 쪽으로 가는 거 아니었어?”

“뭐야! 응큼하게! 그런 거 아니거든!”

“아, 아니, 나는 그런 뜻이 아니라…….”

미연의 표독스러운 반응에 놀라 영완은 말까지 더듬었다.

양수리에는 먹을 것도 많고 볼거리도 많지만, 그만큼 러브호텔도 많았다. 미연은 바로 그 러브호텔과 관련하여 날카로운 반응을 보인 것이다.

“됐어! 조용히 해! 그런 흑심을 품고 있었다면 꿈 깨셔! 난 그렇게 쉬운 여자 아니니까!”

“언제 쉬운 여자라고 했나…….”

평소 같았으면 웃고 넘겼을 이야기임에도 오늘따라 미연은 날카로운 반응을 보였다. 영완은 괜히 혼잣말을 중얼거리고는 무안한 듯 창밖을 바라봤다.

* * *

흔들흔들.

“…일어나.”

“응?”

비비적비비적.

언제 잠이 들었는지 영완은 졸린 눈을 비볐다.

“일어나라고. 다 왔으니까.”

“그래? 으하암! 여기가 어딘데?”

아직 졸린 듯 영완은 하품을 하며 창밖을 바라봤다.

창밖에는 유려한 산세와 함께 속이 다 비칠 정도로 맑은 호수가 펼쳐져 있었다.

“와! 여기가 어디야? 경치 너무 좋은데?”

철컥-

자연 풍경이 마음에 든 듯 영완은 차에서 내리며 호수로 다가갔다. 그리고 기지개를 켜며 눈을 감고는 맑은 공기를 들이마셨다.

“이야! 공기도 좋고. 네가 이런 데를 좋아할 줄 몰랐는데? 그나저나 여기가 어디……?”

미연을 찾기 위해 뒤를 돌아본 영완은 낯선 풍경에 눈이 커졌다.

“쏘리.”

“…뭐야? 저 건물은?”

맑은 호수를 앞에 두고 미연이 서 있는 방향에 커다란 저택이 세워져 있었다. 이런 경우에 저택이라기보다는 별장이라는 말이 더 어울릴 듯했지만, 아무튼 영완은 저택을 바라보며 기묘한 이질감을 느낄 수 있었다.

“우리 집 별장이야. 여긴 청평이고.”

“별장? 뭐야? 아까는 러브호텔 운운하더니! 네가 더 응큼한 거 아냐? 하하하!”

영완은 애써 드는 위화감을 떨쳐 버리려 일부러 과장되게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미연의 반응에 마음이 불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너 설마?”

“쏘리. 우리 부모님이 널 꼭 보고 싶다고 하셔서.”

“…야! 어떻게 나한테 한마디 상의도 없이…….”

“미안하게 됐군.”

막 미연에게 따지려던 영완은 별장에서 나오는 중년 사내로 인해 뒷말을 흐릴 수밖에 없었다.

“안녕하십니까. 서영완이라고 합니다.”

직감적으로 미연의 아버지임을 깨달은 영완은 빠릿빠릿한 태도로 인사를 건넸다.

“어서 오게. 기다리고 있었네. 김영목이라고 하네. 안사람이 음식을 만들어놓고 기다리고 있으니, 일단 안으로 들세.”

“네.”

영완은 영목을 따라 별수 없이 별장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면서도 눈빛으로 미연에게 끊임없이 불만을 토로했다.

‘이럴 거면 진작 얘기나 해주든가!’

‘얘기해줬으면 따라왔을까?’

‘…끙!’

‘거봐.’

눈빛으로 대충 이런 식의 말을 나누며 둘은 별장 안으로 들어섰다.

별장 안은 호화로운 외양과 다르게 심플하게 꾸며져 있었다. 내심 앤티크 스타일의 고풍스러운 가구들로 꾸며졌을 것이라 생각했던 영완에게는 색다른 풍경이었다.

“엄마.”

“왔어? 그분은?”

“저기.”

영완이 별장 내부를 살피는 동안, 미연은 그녀의 어머니 상희에게로 다가가 살갑게 말을 건넸다.

“확실히 네 말대로 건실하게 생겼네. 네 아빠와는 달리 귀여운 구석도 있어 보이고.”

“응. 나랑 동갑이긴 하지만 귀여운 구석이 있지. 하지만 든든할 때가 더 많아.”

“벌써부터 편드는 거 봐라. 아무튼 얼른 소개나 시켜 줘봐.”

상희의 말에 미연이 샐쭉 웃으며 영완을 불렀다.

“영완아.”

“응? 아, 안녕하세요. 서영완이라고 합니다. 듣던 대로 정말 미인이신데요?”

“호호! 그래요?”

영완의 칭찬에 상희가 싱그러운 미소를 그렸다.

“점심때가 다 되었으니, 일단 점심부터 들도록 하지.”

“다 준비했어요.”

“수고했어, 당신. 미연이도 얼른 앉아라.”

“그럴게요.”

영목의 말에 모두 식탁에 앉았다.

식탁 위에는 마치 명절을 연상시키듯 잡채며, 전, 그리고 나물 무침들이 한가득 차려져 있었다. 게다가 식탁 중앙에는 절로 군침이 돌게 만드는 소갈비가 자리하고 있었다.

“들지.”

“맛있게 먹어요.”

“감사합니다, 어머님. 맛있게 먹겠습니다.”

다소 불편한 자리였지만, 영완은 무척이나 맛있게 점심을 먹을 수가 있었다. 최근 이렇게 많이 먹은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밥까지 두 공기를 먹으며 포만감을 만끽하고 있었다.

“여보, 나 녹차 좀 끓여 줘. 자네는 뭘 마실 텐가?”

“저도 녹차 마시겠습니다.”

“그렇게 하게.”

상희와 미연이 주방에서 녹차와 다과를 준비하는 동안 영완은 영목과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꽤나 불편한 자리였지만, 영완은 왠지 모르게 별로 불편함을 느끼지 못했다.

“자네, 선생이라고 했나?”

“네. 교직에 몸담고 있습니다.”

“흠… 교직이라……. 참으로 좋은 직장에 다니는군. 우리 아이는 어떻게 만났나?”

“아는 동료 교사의 소개로 알게 되었습니다.”

형식적인 대화가 오고 갔지만 두 사람의 태도는 무척이나 진지했다.

“우리 미연이 어디가 좋지?”

의례적인 질문.

하지만 영완은 영목과의 대화에서 이보다 중요한 질문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르겠습니다. 그냥 미연이는 있는 그대로가 좋습니다. 그녀의 왈가닥 성격이 좋고, 미묘하게 순수한 마음도 좋습니다.”

“미묘하게라……. 확실히 우리 미연이가 순수하다고만은 볼 수 없지. 우리 미연이 나이가 몇인지 알고 있나?”

“올해 서른한 살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 벌써 서른 줄을 넘었어. 서른 줄이 넘도록 우리에게 제 남자 친구를 보인 적은… 처음이네.”

“…….”

영목의 말이 내포하는 뜻이 뭔지 모를 영완이 아니다. 하지만 함부로 그와 관련된 이야기를 입 밖으로 내뱉을 수는 없었다.

“우리 아이는 자네와 결혼도 염두에 두고 있는 모양인데… 자네는 어떤가?”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부분이었다. 그녀와 사귀게 된 지도 얼마 되지 않았고, 아직 그녀와는 서로가 알아가야 할 것이 많다고 생각했다.

영완은 무심코 영목의 물음에 미연을 바라봤다.

환한 얼굴로 상희와 대화를 나누며 과일을 깎고 있는 그녀의 모습에 절로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저런 여자를 놓치면 평생 후회할 것 같습니다.”

제법 당찬 영완의 대답에 영목이 너털웃음을 지었다.

“허허! 그런가?”

영목은 그제야 웃음을 지으며 편하게 영완을 대했다. 영완은 그에게서 마치 친아버지와 같은 따뜻함을 느낄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상희 역시 친어머니처럼 대해주셨다. 일부러 반찬도 숟가락에 올려 주고, 갈비도 챙겨 주었다. 게다가 그 특유의 싱그러운 미소는 영완으로 하여금 푸근함을 안겨 줬다.

‘좋으신 분들이네.’

드라마에서 가끔 보면 부잣집 사람들은 무척이나 냉철하고 이성적인 면이 많았다.

하지만 미연을 비롯한 그녀의 부모님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녀의 가족에게는 가족의 따스함이 있었다.

* * *

“이렇게 빨리 날짜를 잡자고?”

“뭐 어때? 후딱 해치우고 같이 사는 거지.”

“야, 결혼이 무슨 장난인 줄 알아?”

“장난 아닌 거 다 알거든? 내가 무슨 어린애인 줄 알아? 너 나 좋아, 안 좋아?”

“…하아! 그렇게 직접적으로 물어보면… 좋아! 됐냐?”

미연의 직접적인 물음에 영완이 지지 않고 대답했다.

영완은 어렸을 때부터 사랑한다는 말은 아무리 해도 넘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제 미연에 대한 마음이 확고해진 이상, 그녀에 대한 애정 표현도 마음에서 우러나오고 있었다.

“호호! 그래, 그럼 된 거지. 아무튼 날짜는 이번 여름방학으로 잡는다.”

“대체 한여름에 결혼하는 사람이 어디 있냐고.”

미연의 부모님을 뵌 바로 다음 날, 미연은 다짜고짜 영완을 이끌고 그의 부모님을 찾아뵀다. 그리고는 일사천리로 결혼을 허락받고는 이렇게 학교 점심시간을 이용해 결혼식과 관련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었다.

“결혼… 하나 보네요?”

“아, 그렇게 됐네요.”

영완과 미연의 대화를 들었는지 희영이 다가와 물었다. 미연이 누군가로부터의 전화를 받고 자리를 비운 사이였다.

“언제 그렇게…….”

언제 그렇게 가까워졌는지 묻는 듯했다. 그에 영완은 거리낌 없이 말했다.

“사랑하는 사이에 기간이 중요하나요. 전 누군가를 아주 오랫동안 사랑했지만 결실은 맺지 못했죠. 반면, 지금은 사랑한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이미 결실을 눈앞에 두고 있네요.”

뼈가 깃든 말이었다.

영완은 그렇게 말하며 모니터를 바라봤다. 오늘 처리해야 할 공문이 여러 개 쌓여 있는 탓이었다.

그런 그를 바라보는 희영의 눈빛이 묘하게 흔들렸다.

* * *

“자, 드디어 목책의 건설이 끝났네.”

“수고하셨어요.”

룬 아일랜드에 도착한 지 『오벨리스크』 시간으로 보름이 흘렀다.

그동안 르네상스 혈맹은 처음 정박한 해안 주변으로 마을을 건설했다.

배가 정박할 수 있는 선착장은 물론이고, 50채의 주거지를 마련했다. 더불어 마을의 여러 가지 대소사를 관장할 마을 회관도 건설했다.

그 외에 주거지 주변으로 땅을 개간해 농작물의 씨앗을 심었으며, 천휘가 이끄는 강시들은 마을 주변의 몬스터들을 모조리 소탕했다.

그리고 마침내 마을을 보호할 목책도 마련되었다.

“아직 보완할 부분도 많지만, 이 정도면 어느 정도 항구 마을의 구색은 갖춘 것 같은데… 이제 슬슬 섬의 다른 지역으로 진출해야 하지 않겠나?”

“그래야죠.”

은근한 테크토의 물음에 천휘가 고개를 끄덕였다.

세틀러 제도의 발견으로 유저들은 대략 3개월 이내에 이곳에 도착할 가능성이 컸다.

지금 당장은 배도 없고 항해도도 없어 항해를 시작할 수는 없겠지만, 괜히 의지의 한국인이라는 말이 나왔겠는가? 게임에서만큼은 한국인은 불가능한 것도 가능으로 만들어버리는 놀라운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천휘 또한 그러한 사실을 알고 있기에 되도록 빨리 룬 아일랜드를 탐사하고, 르네상스 혈맹이 최종 근거지로 삼을 땅을 물색해야 했다. 더불어 오시리스에 거론된 것처럼 섬의 비밀도 알아내야 했다.

“각 단장들에게 연락을 취해주세요. 회의를 해봐야 할 것 같네요.”

“그렇게 하마.”

천휘는 룬 아일랜드에 들어선 후, 혈맹을 여러 개의 단으로 나눠 친분이 있는 이들에게 단장을 맡겼다.

로빈은 마법사들을 주축으로 하는 마법사단의 단장이었고, 카멜은 전사들과 팔라딘들을 중심으로 하는 전투사단의 단장이었다.

더불어 눈송이는 10대들을 중심으로 하는 꽃남꽃녀사단의 단장이었고, 하린은 모험가들을 주축으로 하는 탐험사단의 단장이었다.

블랙헤드는 모든 생산직 유저들이 속한 명품사단의 단장이었고, 미온은 사제들이 속한 신성사단의 단장이었다.

마지막으로 테크토는 드워프 일족과 함께 건설사단을 만들어 아칸, 김리와 건설사단의 단장을 맡았다. 건설사단은 항구 마을의 발전과 관련된 제반적인 사항을 총괄하는 사단이었다.

“무슨 일이야?”

“모두 모이면 이야기하자.”

가장 먼저 도착한 이는 로빈이었다. 마법사단에게 배정된 건물이 마을 회관과 가장 가까웠던 탓에 먼저 도착할 수 있었다.

이윽고 차례로 단장들이 들어오며 마을 회관에 마련된 회의실에 자리했다.

“어느 정도 항구 마을의 건설이 궤도에 올랐으니, 이제 섬 중앙으로 진출할까 합니다. 더불어 섬의 다른 지역에 서식하고 있는 몬스터들도 모두 소탕하고, 혹시 이 섬에 거주하고 있을 원주민 NPC들과도 교류할 것입니다.”

“너무 무리하는 거 아냐?”

천휘의 제안에 로빈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몬스터를 소탕하는 것은 유저들에게 맡길 거야. 그들도 레벨을 올릴 사냥터가 필요하니까. 어차피 몬스터들은 계속해서 리젠될 테지만, 리젠될 지역을 제한하는 것이 필요해. 그렇지 않으면 도시를 건설할 부지를 마련하는 것조차 어려울 테니까. 몬스터 소탕은 로빈 너의 마법사단과 카멜의 전투사단에 맡길게. 더불어 눈송이의 꽃남꽃녀사단과 미온의 신성사단도 몬스터 소탕에 힘을 보태줘.”

천휘가 호명한 사단은 대부분이 전투와 관련된 사단이었다.

오랜 항해로 인해 사냥을 하지 못한 유저들은 최근 레벨 업과 관련해 불평을 털어놓고 있는 실정이었다. 이번 몬스터 소탕 작전을 통해 그러한 불평들을 어느 정도 잠식할 필요성이 있었다.

“블랙.”

“뭘 시킬 거냥깨! 네가 그라고 부르믄 무서워브러야.”

“쿡쿡! 무서워할 필요 없어. 명품사단은 지금까지 해왔던 대로 생활용품을 계속 만들어줘. 더불어 대장장이 유저들 중 채굴 관련 스킬 레벨이 가장 높은 분을 추천해줘. 혹시 이 섬에 광산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알아봐야지.”

“그런 거라믄 난쟁이들이 낫지 않겄냐?”

확실히 드워프들은 채굴의 스페셜리스트였다. 하지만 천휘의 생각은 달랐다.

“이 섬은 아직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 몰라. 자칫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일이야. 그러니 목숨이 하나밖에 없는 드워프들을 위험한 일에 투입할 수는 없어. 게다가 그들은 지금 주거지 건축에 전념해야 해.”

“아, 그랄 수도 있겄네잉. 알았당깨.”

명품사단은 여러모로 쓸모가 참 많았다.

그들 중에는 블랙헤드와 같이 요리 스킬을 익힌 이들도 있었고, 드워프들이 만들기 꺼려하는 농기구를 전문적으로 제작하는 이도 있었다.

아직 레벨이 떨어지고 스킬 숙련도가 단계에 이르지 못해 다소 수준은 낮았지만, 르네상스 혈맹의 꾸준한 지원 아래 열심히 스킬을 수련하다 보면 그 이름처럼 언젠가는 명품을 만들 수도 있을 터였다.

“천휘 넌 뭐 할 건데?”

“나는 하린 누님의 모험가 길드와 함께 이 섬의 지도를 제작하는 작업을 할 거다. 발전에 도움을 줄 광산이나 던전 등을 찾아볼 생각이야. 더불어 각 섬에 숨어 있다는 비밀도 파헤칠 요량이고.”

“아, 천휘 동생도 오시리스에 게시된 공지 사항 읽었구나? 하긴 그런 건 빨리 알아낼수록 좋지. 내가 열심히 도와줄게.”

“부탁해요, 누님.”

그렇게 일행은 흩어졌다. 룬 아일랜드의 본격적인 개척이 시작되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