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장. 옥토퍼스
마의 바다라 불리는 피오르해.
그곳은 단순히 해왕류 몬스터와 수중 몬스터가 많아 마의 바다라 불리는 것이 아니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뒤바뀌는 기후.
비가 내리다가도 갑자기 눈싸라기가 날리는 것은 다반사였다. 심지어는 뙤약볕이 쨍쨍 내리쬐다가 돌개바람이 부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르네상스 혈맹은 그 모든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수년간 마의 바다를 경험해온 테크토의 조언 덕분이었다.
“돛을 모두 접어라!”
난데없는 돌개바람에 로빈이 크게 명령을 내리자 다크 엘프들이 빠른 속도로 돛을 접었다.
“물살이 거칠어! 있는 힘껏 노를 저어!”
돌개바람의 영향으로 집채만 한 파도가 이순신을 두드렸다. 노를 잡고 있는 돌쇠들은 거대한 파도를 넘기 위해 쉬지 않고 노를 저었다.
“라푼!”
뿌우우우!
이순신에 타고 있는 이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는 데 반해, 라푼의 등 위에 얹혀 가는 이들은 아주 편안하게 항해를 즐기고 있었다.
그것은 모두 라푼의 경이적인 능력 덕분이었다.
[띠링! 라푼의 울음으로 주변의 파도가 잠잠해졌습니다.]
놀랍게도 라푼은 바다를 조종하는 힘이 있었다. 하지만 녀석은 천마강시가 되면서 그 힘을 많이 잃어 자신의 주변 외에는 바다를 조종할 수가 없었다.
“후후! 생각보다 항해가 즐거운데?”
“저걸 보면서도 그런 말이 나와? 지난 일주일간의 항해로 모두들 지쳐 있어. 아무래도 근처 무인도에라도 정박해야 할 것 같아.”
“흠… 확실히 땅이 좀 그립긴 하네. 알았어. 이번 돌개바람만 지나치면 저쪽에 연락을 취해서 근처 무인도로 방향을 틀어야겠다.”
이윽고 돌개바람을 무사히 견뎌 낸 이순신 쪽 일행과 라푼 쪽 일행은 가장 가까운 무인도에 정박했다. 다행히 무인도의 해안가는 절벽이 아닌 백사장으로 이루어져 있어 이순신을 정박시키기에 큰 무리가 없었다.
“너 이 개자식!”
“야야! 왜 그래?”
“몰라서 물어? 니미럴! 우리는 배 위에서 조뺑이 치는데, 네 녀석은 유람 나온 것처럼 편안히 가?”
해변에서 만난 카멜은 다짜고짜 천휘를 향해 양손검을 휘둘렀다. 어찌나 우악스러운지 천휘는 주춤주춤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그게 내 잘못이냐? 라푼을 움직일 수 있는 게 나밖에 없는데 어떡해, 그럼!”
콰앙!
“쳇! 빌어먹을!”
카멜의 공격을 천휘가 가볍게 주먹을 뿌리는 것만으로 막아내자 로빈을 비롯한 일행들이 흉악스러운 얼굴로 하나 둘 모여들었다.
“한 명으로 안 되면…….”
“다굴하면 되는 거 아니겠어?”
“죽여!”
“으아악! 왜 나만 가지고 그래!”
퍼버벅!
결국 천휘는 일행들에게 일제공격을 당하고 말았다. 다행히 손속에 사정을 뒀는지 죽음은 면할 수 있었지만, 온몸에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다.
“많이 아파?”
“미온…….”
그래도 역시 자신을 챙겨 주는 사람은 애인인 미온밖에 없다고 생각하며, 천휘는 애처로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이거 먹고 힘내.”
“…….”
그녀는 최근에 로빈의 도움을 받아 연금술을 익히고 있었다. 그녀가 건넨 것은 다름 아닌 연금술로 만들어진 생명력 회복 물약이었다.
하지만 천휘는 알고 있었다. 그녀가 쿠닉섬의 멧돼지들을 상대로 물약을 실험했다는 것을! 그리고 그 멧돼지들이 모두 게거품을 물고 쓰러졌다는 것을!
천휘는 미온이 만든 물약을 이렇게 불렀다.
농약.
* * *
무인도에 정박한 르네상스 혈맹은 파손된 이순신을 수리하고, 떨어진 식량을 확보하는 데 주력했다.
다행히 무인도에는 단단한 나무들이 많았고, 식량으로 쓰일 만한 과일과 짐승들도 풍족한 편이었다.
“쳇! 왜 우리에게 이런 걸 시키는 건데?”
“우리가 라푼을 타고 가며 편히 쉬었잖아. 그러니까 이런 거라도 해야지.”
“두 분 선생님이야 그렇다 쳐도 우리는 뭐예요! 게임을 하면서 물을 퍼다 나를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요!”
“맞아요!”
라푼에 타고 항해한 천휘와 미온, 그리고 1학년 8반 아이들은 특별히 식수로 쓰일 물을 찾기 위해 무인도 깊숙한 곳으로 들어섰다.
무인도에 넓게 펼쳐진 정글은 햇빛조차 들지 않을 정도로 우거져 있어 일행으로 하여금 짜증을 유발하게 만들었다.
“조금만 참자. 새넌, 아직 못 찾았어?”
“죄송해요. 제가 아직 레벨이 높지 않아서…….”
유일한 물의 정령사 새넌은 수원을 찾기 위해 물의 하급 정령 운디네를 소환했다. 하지만 하급 정령인 운디네로는 이 드넓은 정글을 빠른 시간 안에 탐색한다는 것은 무리였다.
결국 일행은 운디네가 돌아올 때까지 벌써 2시간을 정글에서 헤매고 있었다.
“이번 항해만 끝나면 너희 레벨이나 좀 올리자. 답답해서 살 수가 있나.”
“선생님이 도와주시는 거예요?”
천휘의 말에 고비가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물었다. 다른 아이들도 잔뜩 기대하는 눈빛으로 천휘를 바라봤다.
“나 그렇게 할 일 없는 사람 아니다, 고비야.”
“쳇!”
그러나 천휘가 곱게 아이들의 기대를 들어줄 리 만무했다. 기대를 저버리는 그의 말에 아이들이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대신 내 강시들 중 몇을 붙여 주지. 너희 모두가 트리플 마스터가 될 때까지 말이야.”
“트, 트리플 마스터!”
“선생님 최고!”
“광렙할 수 있겠는데?”
이미 천휘가 강시술사라는 사실을 모르는 아이는 없었다. 더불어 천휘가 부리는 강시들이 얼마나 강한지도 알고 있었다. 천휘가 도와주겠다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일인 것이다.
그동안 레벨이 한참 뒤처져 있던 아이들은 천휘의 말에 날아갈 듯 기뻐했다.
“앗! 운디네가 수원을 찾았나 봐요!”
“그래? 얼른 가보자!”
때마침 새넌의 운디네가 돌아오자 일행은 곧바로 운디네를 따라 수원이 있다는 곳으로 향했다.
콸콸콸!
“오! 제법 규모가 큰 폭포잖아?”
운디네가 안내한 수원은 다름 아닌 폭포였다.
약 20미터 높이에서 떨어져 내리는 폭포의 풍경은 제법 장관이었다.
“일단 너희는 준비해온 물통에 물을 담아라.”
해변에서 기다리고 있을 일행을 위해 한시라도 빨리 물을 날라야 했다. 그 사실을 아이들도 알고 있었기에 군말 없이 천휘의 말을 따랐다.
“응? 저건 뭐지?”
“뭐가?”
“저기 봐. 시커먼 그림자가 있잖아.”
“시커먼 그림자?”
솔비의 말에 고비가 그녀의 손이 가리키는 곳을 쳐다봤다. 확실히 그곳에 뭔가 미심쩍은 그림자가 유유히 물결을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선생님.”
“왜?”
고비의 부름에 천휘가 다가갔다.
“저기 보세요.”
“뭐가 있어?”
조금 전 고비가 그랬던 것처럼 천휘도 그녀가 가리킨 방향을 바라봤다.
“응?”
“뭐가 있죠?”
“그러게.”
폭포수가 떨어지는 바위 부근에 정체를 알 수 없는 그림자가 유유자적 유영하고 있었다.
“왜 그래?”
천휘의 반응에 호기심을 느낀 미온도 다가왔다.
“뭐가 있어서. 일단 물통에 물을 채웠으면 모두 뒤로 물러서.”
아이들을 뒤로 물린 천휘는 조심스럽게 물속에 얼굴을 담갔다. 그림자의 정체를 알기 위함이었다.
‘저, 저건!’
“푸하아!”
“저게 뭐야?”
물속에서 고개를 빼고 숨을 내쉬고 있는 천휘에게 미온이 물었다.
“잉어야. 그것도 엄청난 크기의 잉어.”
“잉어?”
“그래. 저 녀석을 잡아가면 제법 식량에 보탬이 되겠어. 아공간 오픈! 라프라스 소환!”
스파아앗!
라프라프.
본래 라프라스 역시 라푼과 마찬가지로 운송 수단으로 쓰일 예정이었지만, 워낙 라푼의 크기가 거대해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천휘는 물속에 숨어 있는 잉어를 잡기 위해 아공간에서 쉬고 있는 라프라스를 소환했다.
“물속의 잉어를 잡아와.”
라프라프.
중급 마수였던 라프라스는 천휘의 명령에 빠르게 물살을 가르며 잉어에게 다가갔다.
라프라스의 출현에 유영하고 있던 잉어가 눈빛을 빛내며 경계했다
라프라스는 그런 잉어의 눈빛이 가소롭다는 듯 빠르게 녀석에게 다가가더니, 침을 뱉듯 입에서 물줄기를 내뿜었다.
촤르륵!
마치 잠수함이 발사하는 어뢰처럼 물살을 헤치고 나아가는 물줄기를 잉어가 순간적인 가속으로 피해내며 라프라스에게 차지 공격을 가했다.
쿵!
물속을 울리는 충격음!
단단한 등껍질에 비해 취약한 목 부근을 공격당한 탓에 라프라스도 제법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녀석은 대륙의 어떠한 몬스터보다 투쟁심이 강한 마수! 그 정도 충격으론 투지가 수그러들지 않았다.
라프라스는 차지 공격을 감행하고 빠져나가려는 잉어의 꼬리를 입으로 물었다. 그리고는 강대한 힘을 바탕으로 잉어를 물 밖으로 내동댕이쳤다.
“잡아!”
“우오오오!”
물 밖으로 나온 잉어는 아이들의 무차별 공격에 잘 다져진 횟감으로 변모했다.
그렇게 거대한 잉어는 기다란 나무에 꼬치처럼 꿰여 해변으로 옮겨졌다.
“그 잉어는 뭐냐?”
“일용할 양식이지 뭐긴 뭐야. 얘들아, 물통은 이순신에 실어라.”
“네!”
이미 나머지 일행은 출항 준비를 모두 마친 상태였다.
대충 물과 잉어를 배에 싣고 천휘는 테크토와 이야기를 나눴다.
“이제 어느 정도 더 가면 되는 거죠?”
“거리상으로는 절반 정도 왔는데…….”
“그런데요?”
“앞으로도 이 주는 더 가야 해.”
“절반 정도 왔다고 하셨잖아요.”
쿠닉섬을 떠나온 지 일주일이 흘렀다. 그렇다면 앞으로 일주일이면 도착해야 정상인데, 이상하게도 테크토는 앞으로 2주일은 더 가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곳으로 가는 중간에 옥토퍼스 녀석이 자주 출몰하는 해역이 있어.”
“옥토퍼스요?”
“그래. 크기를 짐작조차 할 수 없는 대왕 문어지. 비슷한 종류의 크라켄에 비하면 다소 무게감이 떨어지지만, 녀석을 무시할 수는 없어. 반드시 그쪽은 우회해야 해. 물론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피할 수 있다는 보장은 없어. 녀석은 먹이를 찾아 인근 해역을 떠돌거든.”
“흠… 해왕류 몬스터와 부딪쳐서 좋을 건 없죠.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테크토 형님 말씀대로 우회하는 게 좋겠어요.”
“잘 생각했네.”
그렇게 일행은 무인도를 떠나 다시 항해를 시작했다.
이제까지의 항해와는 사뭇 다른 위험의 그림자가 일행을 뒤따르고 있었다.
* * *
“붉은 입술 일족 하피다! 모두 전투 준비!”
무인도를 벗어나자 일행은 끊임없이 쏟아지는 몬스터들의 습격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처음 일행을 습격해온 몬스터는 멀록이었다.
그들은 멀록 중에서도 가장 전투 능력이 뛰어난 붉은 작살 일족이었다. 일반 멀록들이 200대의 레벨이라면, 이 녀석들은 280대의 레벨과 맞먹는 능력을 지녔다.
하지만 르네상스 혈맹의 힘은 약하지 않아 별 피해 없이 녀석들을 막아냈었다.
그 이후에도 철갑 비늘 일족 샤크맨 무리와 평면 가슴 일족 인어 무리가 쳐들어왔지만, 유저들은 힘을 모아 모두 막아냈었다.
“죽인다, 진짜!”
“저렇게 큰 가슴은 처음 봐!”
무인도를 떠나 항해를 시작한 지 열흘째.
일행을 습격한 몬스터들은 다름 아닌 하피였다.
연예인을 상회하는 매혹적인 미모! 서양 야동을 연상시키는 거대한 가슴!
무엇보다 유저들을 가장 현혹하는 것은 다름 아닌 복장이었다. 말 그대로 가릴 곳만 미묘하게 가린 므흣한 차림.
게다가 자극적인 입술은 남성 유저들의 온몸을 사르르 녹여 버렸다.
[저 날개 달린 것들은 뭐지?]
[하피라는 거다. 마신의 족속들이지.]
[으하하하! 눈요기로는 최고로구나!]
그러나 어디에나 예외는 있는 법이었다.
성 기능을 잃어버린 강시들은 붉은 입술 일족 하피들을 보고도 아무렇지 않았다.
남성 유저 중에서는 마신의 권능을 부여받은 천휘만이 하피의 유혹에서 자유로울 수가 있었다.
“모두 대화는 관두고 녀석들을 모조리 처치해!”
[으하하하! 날아다니는 것들에게 화살만큼 유용한 것이 없지!]
검을 주 무기로 삼는 오베른과 카이젠으로서는 하늘을 날아다니는 하피들을 처치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하지만 로렌은 달랐다. 그는 돛의 가장 높은 곳에 올라가 사방으로 화살을 쏘아대며 하피를 사냥하고 있었다. 게다가 그의 지휘로 다크 엘프 강시들도 각자 활을 들고 하피들을 사냥했다.
꺄아아악!
화살에 맞은 하피들이 비명을 내지르며 갑판 위로 떨어졌다. 개중 몇몇은 바다 위로 떨어지기도 했다.
음메에에!
갑판 위로 떨어진 하피들은 기다리고 있던 변강쇠와 돌쇠들의 무지막지한 공격에 피떡이 되고 말았다.
“휴우! 저만하면 된 건가?”
라푼 쪽은 하피들이 거의 접근하지 않았다.
라푼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피오르해의 제왕으로 군림하던 녀석이다. 지금은 비록 천마강시가 되어 운송 수단으로 쓰이고 있지만, 녀석의 엄청난 기세는 몬스터들이 감히 접근할 수 없을 만큼 대단했다.
“아공간 오픈! 파뱃 소환!”
스파아앗!
끼에에엑!
천휘는 이순신 쪽의 피해를 확인하기 위해 그쪽으로 건너갔다.
“괜찮지?”
“윽! 왔냐? 피해는 거의 없었다. 문제는…….”
“문제는?”
“하아! 직접 눈으로 확인해라.”
로빈은 천휘를 데리고 선수로 걸어갔다. 그곳에서 수십 명의 유저들이 뭔가를 에워싸고 있었다.
천휘는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유저들을 헤치며 그 안으로 걸어갔다.
“이 하피는 내 것이여! 내가 먼저 발견했당깨!”
“내가 먼저 잡은 거 몰라? 이 하피는 엄연히 내 거야!”
“…하아!”
그는 2명의 유저가 부상을 입고 쓰러져 있는 하피의 소유권을 가지고 옥신각신 말다툼을 벌이고 있는 광경을 목격할 수 있었다.
그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천휘 자신도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야, 블랙.”
“자꾸 이라믄 확 죽여 블랑깨! 어서 그 손 못 논당가!”
“못 놔!”
천휘의 나지막한 말을 듣지 못했는지 블랙헤드는 여전히 상대 유저와 다툼을 벌였다. 급기야는 유니크 식칼인 지옥의 나락까지 꺼내들고는 무력을 시위했다.
“블랙!”
“흐미! 깜짝 놀랐당깨. 어라? 천휘 아니여? 아따, 마침 잘 왔시야. 저 자슥이 자꾸 내 하피를 지 거라고 우긴당깨! 얼릉 저것이 내 것이라고 말해주랑깨!”
“하아…….”
블랙의 말에 천휘는 한숨을 내쉬고는 부상에 신음하고 있는 하피를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꺄아아악!
“워매! 이것이 뭔 일이랑가! 뭐 하는 짓이냥깨!”
“누구 마음대로 죽이는 겁니까! 제아무리 맹주라고 해도 이럴 권한은 없는 겁니다!”
천휘가 하피를 처치하자 블랙헤드와 상대 유저가 불같이 분노했다. 하지만 천휘는 그들보다 더욱 일그러진 얼굴로 화를 토해냈다.
“지금이 어떤 때인데 이런 말도 안 되는 일로 드잡이질을 하는 겁니까! 녀석은 그저 몬스터일 따름입니다! 무슨 생각으로 그 하피의 소유권을 주장했는지 내 알 바는 아닙니다만, 공공의 질서를 깨트리는 일은 모두 삼가주세요! 만약 다시 한 번 이런 일로 분란을 일으킬 시에는…….”
천휘의 다음 말은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미 아렌과의 대결로 그 엄청난 무력을 선보인 천휘는 지난 20여 일의 항해에서 일어나는 모든 분란을 일대일 대결로 해결했다.
분란을 일으키는 자들에게 대결을 빙자한 무자비한 구타를 일삼은 것이다.
다소 원시적인 방법이긴 했지만, 아직 혈맹 내의 전반적인 규칙을 세우지 않은 상황에서는 이러한 방법이 최선일 수밖에 없었다.
“그보다…….”
콰아앙!
그때, 굉음과 함께 갑자기 배가 들썩였다. 그 바람에 난간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던 유저 몇몇이 바다로 추락했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주인! 뭔가가 배 아래에서 공격을 해왔다!]
“배 아래에서?”
오베른의 말에 천휘는 재빨리 난간 쪽으로 향했다.
콰아앙!
다시 한 번 터져 나온 굉음!
그로 인해 배는 이전보다 훨씬 크게 흔들렸다.
“으아악!”
순식간에 갑판 위에 있던 유저 수십 명이 비명과 함께 바다에 빠졌다. 다행히 NPC들은 갑판 아래의 선실에서 쉬고 있던 덕에 그들이 바다에 빠지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저, 저게 뭐야!”
“허억!”
간신히 난간을 붙잡아 바다에 빠지지 않은 유저 몇몇이 허공을 가리키며 두려움에 떨었다.
“옥토퍼스다!”
허공에는 빨판이 잔뜩 붙은 거대한 다리 2개가 뱀처럼 꿈틀거리고 있었다.
대왕 문어 옥토퍼스의 출현!
유일하게 옥토퍼스의 정체를 알아본 테크토의 외침에 천휘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해왕류 몬스터 옥토퍼스다!”
“모두 전투태세를 갖추세요!”
유저 수십 명이 바다에 빠졌지만, 그들을 구하기보다는 녀석을 처치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자칫하다가는 이순신이 녀석의 거대한 다리 공격에 부서질 위험이 있었다.
“카이젠! 파뱃을 타고 녀석의 다리를 못 쓰게 만들어!”
[충!]
이미 지저 세계에서 파뱃과 함께 공중 공격을 경험했던 카이젠이었다. 당시에 카이젠은 모기 형상의 상급 마수 수십을 상대로 승리를 거둔 바가 있었다.
“오베른! 너는 강쇠와 돌쇠들을 이끌고 바다로 뛰어들어 녀석의 대가리를 공격해!”
[그렇게 하지!]
강시들은 기본적으로 숨을 쉬지 않는다. 때문에 공기가 없는 바다 속이라 할지라도 하등의 문제가 되지 않았다.
“로렌! 너는 깜둥이들과 화살을 날려서 배를 붙잡고 있는 다리를 잘라버려!”
[으하하하! 내게 맡겨라!]
로렌을 비롯한 다크 엘프 강시들은 유연한 움직임으로 흔들리는 배 위에서도 정확한 사격이 가능했다. 더 이상 이순신이 파손되지 않도록 천휘는 그들에게 배를 붙잡고 있는 다리를 떼어내도록 명령했다.
“전사 유저 분들은 녀석의 다리가 돛을 부수지 못하도록 보호하시고, 마법사 유저 분들은 저 거대한 두 개의 다리를 마법으로 공략하세요! 궁수 유저 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천휘의 발 빠른 지시에 유저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이미 해왕류 몬스터와 부딪칠 것을 각오하고 훈련을 해왔기에, 옥토퍼스가 나타났다고 하여 평정심을 잃은 유저들은 거의 없었다.
“라푼! 넌 멀리 떨어져!”
뿌우우우!
행여나 라푼마저도 옥토퍼스에 공격을 당할까 염려되어 천휘는 녀석을 멀리 떨어지도록 지시했다.
라푼이 나선다면 옥토퍼스쯤이야 손쉽게 처치할 수 있을 테지만, 지금 녀석의 등에는 수백 명의 NPC들이 탑승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라푼은 최후의 순간까지 남겨 둬야 할 마지막 패였다.
“테크토 형님!”
“알았다! 대포를 준비시키겠다.”
해왕류 몬스터를 상대할 때 가장 효과적인 무기는 바로 대포였다.
산 하나를 통째로 부숴버리는 대포의 위력!
녀석을 수면 위로 끌어올릴 수만 있다면 대포의 일제사격으로 단숨에 걸레로 만들 수 있었다.
‘오베른이 제아무리 강해도 수중에서는 제 힘의 절반도 쓰지 못해. 어떻게든 녀석을 수면 위로 끌어올려야 해!’
“로즈란! 물속에서도 호흡할 수 있는 마법 있지?”
[네!]
“내게 걸어줘 봐!”
[바다 속으로 들어가시게요?]
“녀석을 처치하려면 반드시 수면 위로 머리를 내보이게 만들어야 해! 어서 마법이나 걸어줘!”
[알겠어요. 레스퍼레이션(Respiration)!]
[띠링! 레스퍼레이션이 활성화되어 30분 동안 수중 호흡이 가능해집니다.]
풍덩!
로즈란의 마법이 활성화되자마자 천휘는 바다 속으로 뛰어들었다.
‘세, 세상에!’
바다 속으로 뛰어든 천휘는 옥토퍼스의 가공할 크기에 경악했다.
마치 바다를 집어삼킬 듯 옥토퍼스의 기다랗고 거대한 다리 8개가 사방으로 뻗쳐 있었다.
게다가 대가리는 또 어찌나 큰지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을 정도였다. 굳이 비교를 하자면 대학 시절 가본 로마의 콜로세움과 엇비슷한 크기였다.
‘이런 녀석을 어떻게!’
수면 위에서라면 몰라도 수중에서는 도저히 녀석을 잡을 방법이 없어 보였다. 게다가 저토록 거대한 녀석을 수면 위로 끌어올리는 것 자체도 어려운 일이었다.
‘아공간 오픈! 라프라스 소환!’
라프라프.
천휘는 일단 바다에서 자유로운 움직임을 위해 라프라스를 소환하고는 녀석의 목덜미를 붙잡고 단단한 등껍질 위로 올라섰다.
‘가자!’
수중이라 말이 나오지 않아 천휘는 영성으로 라프라스에게 지시를 내렸다.
천휘를 태운 라프라스는 놀라운 속도로 물속을 가르며 옥토퍼스에게로 다가갔다.
* * *
콰아앙!
“으아악!”
“밧줄로 옭아매!”
“으드득! 젠장! 버틸 수가 없어!”
갑판 위를 두드리는 옥토퍼스의 기다란 다리에 유저들이 곤욕을 치르고 있었다.
크라켄이나 옥토퍼스 등 연체 해왕류 몬스터와 부딪칠 때를 대비해 드워프들이 철제 갈고리를 부착한 밧줄 수십 개를 만들어놨지만, 옥토퍼스의 무지막지한 근력에 힘없이 떨어져 나갔다.
“마법사들은 화염 마법으로 공중에 떠 있는 녀석의 다리를 공격하세요!”
“파이어볼!”
“파이어 랜스!”
로빈의 지시에 마법사들이 일제히 거대한 다리를 향해 마법을 난사했다.
퍼엉! 퍼엉!
격렬한 폭음이 연달아 터졌다. 그러나 무식하게 거대한 옥토퍼스의 다리는 잠시 주춤할 뿐, 별다른 타격을 입지는 않은 듯했다.
“젠장! 이런 괴물을 어떻게 상대하란 말이야!”
난간에 매달려 나머지 다리를 공격하던 카멜은 무심결에 화를 토해냈다. 방어력을 무시하는 카멜의 카오스 오러에도 옥토퍼스의 다리는 자잘한 생채기만 날 뿐, 치명적인 상처는 입지 않고 있었다.
“해냈다! 드디어 다리를 하나 떼어… 미치겠군.”
간신히 다리 하나를 떼어내는 데 성공한 카멜과 카오스 팔라딘들은 환호성을 내지르다가 얼굴을 와락 일그러트렸다. 또 다른 다리가 배를 휘감고 있었던 것이다.
유저들의 얼굴에 절망의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었다.
* * *
[녀석의 움직임을 단 3초만 봉쇄해주길 바란다.]
[그 정도 시간만으로 충분하겠어?]
[충분하다. 단 3초면 된다.]
파뱃과 함께 옥토퍼스의 다리를 공략하던 카이젠은 무슨 생각에서인지 로즈란까지 파뱃에 태웠다.
[그 정도 부탁이야 들어줘야지. 조금만 기다려 봐.]
옥토퍼스의 다리는 너무나 길었다. 게다가 재생력이 어찌나 좋은지 간신히 다리를 잘라내면 다시금 다리가 자라나 카이젠을 곤욕스럽게 만들었다.
다리가 재생할 수 없도록 강력한 스킬을 전개하고 싶어도, 귀신같이 알고 피해 다니는 옥토퍼스의 다리로 인해 그 뜻을 이룰 수가 없었다.
결국 카이젠은 녀석의 움직임을 봉쇄할 요량으로 로즈란의 도움을 받기로 한 것이다.
[만년설의 정기여, 자유를 속박으로 혼란을 고요함으로 변화의 시작을 알릴지니, 프로즌 체인(Frozen Chain)!]
[접근하라, 도마뱀!]
끼에에엑!
로즈란의 마법이 전개되기가 무섭게 파뱃이 날갯짓을 하며 옥토퍼스의 다리로 접근했다.
빠지직!
프로즌 체인은 6서클 마법이었다.
얼음덩어리가 순식간에 거대한 고리를 만들며 옥토퍼스의 다리를 옭아맸다. 게다가 프로즌 체인이 적중한 곳은 수면 위로 떠오른 옥토퍼스의 다리 가장 아랫부분이었다.
최대한 많은 부분을 잘라, 그 잘려진 부분만으로 이순신을 공격할 수 없게 만들 의도였다.
[라그나 인페르노(Ragna Inferno)!]
카이젠이 쥐고 있는 학살자의 검이 불을 뿜었다.
지옥의 업화가 학살자의 검에 모여 옥토퍼스의 거대한 다리를 훑고 지나갔다.
콰아앙!
휘이익-
풍덩!
옥토퍼스의 거대한 다리가 잘려 나갔다. 잘려 나간 다리는 문어 통구이가 되어 바다 속으로 사라졌다.
지옥의 업화가 훑고 지나간 탓에 더 이상 재생할 수도 없는 다리!
끈질기게 유저들을 괴롭히던 다리 하나가 카이젠의 손에 떨어져 나갔다.
* * *
‘뭐지?’
옥토퍼스의 대가리를 견제하던 천휘는 무심코 녀석의 눈을 바라보다가, 뇌리를 스치는 이질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녀석의 거대한 눈… 그리고… 어라? 눈이 하나밖에 없잖아?’
아무리 살펴봐도 옥토퍼스의 눈은 하나뿐이었다.
원래부터 눈이 하나였다면, 하나뿐인 눈은 사이클롭스들처럼 머리의 중앙에 위치해야 한다.
‘하지만 녀석의 눈은 왼쪽으로 치우쳐 있어!’
한쪽으로 치우친 눈.
천휘는 곧장 라프라스를 움직여 눈의 정반대 방향으로 나아갔다.
‘저거다!’
반대 방향에서는 마치 뭔가 뜯겨져 나간 듯 함몰되어 있는 녀석의 눈두덩을 발견할 수 있었다.
어떤 미지의 존재가 이 거대한 녀석의 눈을 물어뜯어낸 모양이었다.
‘틈이 있어!’
눈이 있었을 것으로 판단되는 위치에 자그마한 틈이 있었다. 자그맣다고는 하지만, 옥토퍼스의 크기를 감안해볼 때 충분히 천휘를 비롯한 강시들은 드나들 수 있을 듯했다.
‘오베른!’
천휘는 영성으로 오베른을 불렀다.
[무슨 일이지?]
천휘의 부름에 오베른이 곧장 대답했다.
‘내가 있는 쪽으로 와라. 녀석을 침몰시킬 좋은 방법이 떠올랐어.’
천휘의 말에 오베른이 변강쇠와 돌쇠들을 두고 홀로 그가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날 따라와.’
[그러지.]
천휘는 라프라스를 역소환하고 옥토퍼스 몰래 자그마한 틈으로 접근했다. 가까이 다가가자 작았던 틈은 거대한 동굴의 입구가 되어 천휘와 오베른을 맞았다.
둘은 그렇게 그 틈으로 들어섰다.
* * *
퍼엉!
콰앙!
“와아아! 명중했다!”
“쉬지 않고 대포를 쏴라!”
유저들이 갑판 위에서 고전을 하고 있을 때, 배 측면에 있던 드워프들은 신이 나서 포탄을 쏴댔다.
하지만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선수와 선미에 장착된 캘버린포는 가동하지 않고 있었다.
“대포에 맞은 다리가 떨어진다! 썰어버려!”
대포에 연이어 가격당한 다리 하나가 갑판 위로 힘없이 떨어졌다. 엄청난 위력의 포탄은 옥토퍼스의 다리를 잘 다져 놓았다.
“이 자식을 잡아 타코야키를 만들 것이랑깨!”
“오오! 타코야키!”
일본식 문어 빵인 타코야키.
유저들은 블랙헤드의 말에 군침을 흘리며 옥토퍼스의 다리에 공격을 가했다.
“마법사들은 전사들이 잘라놓은 부위에 화염 마법을 펼쳐 재생하지 못하도록 하세요!”
제아무리 힘이 빠진 다리라 하더라도 재생력은 그대로였기에 로빈을 비롯한 마법사들은 분주히 움직이며 잘려진 부위에 화염 마법을 시전했다. 그러자 금방이라도 재생할 것 같았던 다리가 금세 오그라들기 시작했다.
[로즈란!]
[만년설의 정기여, 자유를 속박으로 혼란을 고요함으로 변화의 시작을 알릴지니, 프로즌 체인(Frozen Chain)!]
유저들이 갑판에서 활약하는 동안 카이젠과 로즈란은 나머지 다리들을 공략했다.
로즈란이 마법으로 움직임을 봉쇄하고, 카이젠이 공격을 퍼부어 다리를 잘라내는 전략은 너무도 효율적이어서 벌써 3개의 다리를 무력화시켰다.
[으하하하! 이거나 먹어라! 데몬 이터(Demon Eater)!]
악마의 활 힐프리거가 악마를 불러냈다.
악마는 칠흑 같은 어둠으로 옥토퍼스의 다리를 휘감더니, 이내 마치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옥토퍼스의 다리를 미지의 공간으로 사라지게 만들었다.
유저들과 강시들의 맹활약!
그들의 투지에 옥토퍼스는 점점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 * *
첨벙첨벙.
“후우! 다행히 산소가 있어.”
[바닷물이 이곳까지는 들어오지 않는 모양이다.]
옥토퍼스의 대가리 안으로 들어온 둘은 고여 있는 물을 밟으며 안쪽으로 걸어갔다.
“우리가 찾아야 할 것은 부레야.”
[부레? 그게 뭐지?]
“주로 어류에게 있는 기관인데, 물속에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도록 관장하는 곳이지.”
[그걸 찾아 뭘 할 거지?]
“당연히 부숴버려야지!”
부레는 부력을 담당하는 기관.
부레가 없으면 옥토퍼스는 분명히 수면 위로 떠오를 것이다. 천휘가 노리는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문제는 녀석이 수면 위로 떠오르기 전까지 우리가 무사히 이 안에서 빠져나갈 수 있느냐 하는 거야.”
[빠져나가지 못한다면?]
“…이순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집중포화에 옥토퍼스와 함께 명을 달리하는 거지, 뭐.”
죽는 것이 두렵지는 않지만, 그래도 떨떠름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게다가 최근에 재수 없게도 죽음을 여러 번 당한 탓에 그러한 감정은 더욱 컸다.
“아무튼 얼른 부레를 찾자. 산소로 가득한 기관을 찾으면 될 거야.”
[그러지.]
천휘와 오베른은 좌우로 갈라지며 부레를 찾았다.
워낙 거대한 크기인지라 최대한 빠르게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둘은 쉽사리 부레로 추측되는 기관을 찾을 수가 없었다.
“찾았어?”
[주인이 말한 산소로 가득한 기관은 찾을 수가 없었다.]
“젠장! 어디에 있는 거야?”
[다만…….]
“다만?”
좀체 찾을 수 없어 절로 욕지기가 터져 나왔지만, 이어지는 오베른의 말에 천휘는 반색하며 되물었다.
[공기로 가득한 공간은 찾았다.]
“…그게 그거잖아!”
[멍청하군, 주인. 산소와 공기는 엄연히 다르다.]
“…그래그래. 네 똥 굵다.”
[오! 드디어 인정해주는 건가! 내 똥 역시 굵다!]
“하아! 알았으니까 얼른 안내해!”
오베른의 안내로 천휘는 박동하는 부레를 찾을 수가 있었다. 과연 오베른의 말대로 그 안에는 공기로 가득했다.
“오베른, 이걸 부술 수 있겠지?”
[당연하지 않은가.]
“그저 살짝 찢어내는 걸로는 안 돼. 완벽하게 부수고 찢어버려야 해!”
[…최선을 다해보지.]
천휘의 명에 오베른이 클레이모어에 마나를 주입했다.
오베른의 클레이모어도 천휘가 따로 선물한 아이템이었다.
이름은 늙은 용병의 클레이모어.
조금은 거슬리는 이름이었지만 옵션은 발군이었다. 물리 공격력을 무려 500이나 증가시켜 주는 유니크 아이템인 것이다.
오베른은 늙은 용병의 클레이모어를 양손으로 거머쥐고 부레를 뚫어져라 노려봤다.
천휘는 여차하면 힘을 실을 요량으로 주먹에 파멸의 권능을 주입시켰다.
[드래곤 스크류(Dragon Screw)!]
휘몰아치는 용권풍이 전방으로 쏟아지며 부레를 가격하자 동시에 옥토퍼스의 대가리가 격렬하게 요동쳤다.
“좋았어! 마지막 마무리다! 파멸의 축제!”
행여나 부레가 재생할까 두려워 천휘는 파멸의 축제를 전개하고는 곧장 오베른과 함께 왔던 길로 되돌아갔다.
* * *
[준비하세요. 곧 옥토퍼스의 대가리가 수면 위로 떠오를 거예요.]
“정말입니까?”
어느새 갑판으로 돌아온 로즈란이 로빈에게 말했다.
[주인님께서 그렇다면 그런 거예요. 조금 전 주인님께서 제게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알겠습니다. 모든 마법사들은 자신이 시전할 수 있는 최고의 마법을 준비하세요! 궁수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곧 옥토퍼스의 대가리가 수면 위로 떠오를 것입니다!”
로빈의 외침에 마법사들이 저마다 지팡이를 쥐고 마법을 캐스팅했다. 궁수들도 긴장한 눈빛으로 시위에 화살을 메겼다.
부르륵!
“보인다!”
“녀석의 대가리가 보입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수면 위로 거대한 옥토퍼스의 대가리가 모습을 보였다. 바다 속에서 기다란 다리만을 내놓고 이순신을 집어삼키려던 녀석의 거대한 동체가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지옥을 지키는 홍염의 성좌여, 지옥의 유황불을 이곳에 내리시어 당신의 손짓으로 눈앞의 적을 불태우소서! 헬파이어!]
로즈란의 마법을 시작으로 옥토퍼스의 대가리를 향해 강력한 마법들이 전개되었다. 미리 로빈이 때를 맞춰 마나 증폭 마법진까지 깔아놓은 덕에 마법사들의 마법은 더욱 위력적이었다.
[으하하하! 죽어서 타코야키를 내놔라, 대왕 문어! 데몬 스피어(Demon Spear)!]
거기에 더해 로렌을 필두로 궁수들까지 화살을 쏘아댔다. 미리 준비하고 있던 공격이기에 그들의 화살 역시 무시 못할 위력을 발휘하며 옥토퍼스의 거대한 대가리 위로 쏟아졌다.
“포격 준비!”
로빈의 외침을 들은 테크토 역시 포문에서 포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의 지시에 드워프들이 심지에 불을 붙이기 위해 횃불을 들었다.
선수와 선미에 장착된 캘버린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조준!”
테크토의 외침에 드워프들이 잔뜩 긴장한 눈빛으로 옥토퍼스의 대가리를 바라봤다. 그동안의 포격 훈련으로 그들은 어느 정도 원하는 위치에 포탄을 날려 보내는 수준에 이르렀다.
“발사!”
펑! 펑! 퍼엉!
대포들이 굉음과 함께 포탄을 쏘아냈다.
포탄이 향하는 곳은 당연히 옥토퍼스의 대가리!
쾅! 쾅! 콰앙!
엄청난 물보라와 함께 굉음이 터져 나왔다.
몇몇 포탄은 바다 위로 떨어지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포탄은 정확히 옥토퍼스의 대가리 위로 떨어졌다.
특히 캘버린포의 무지막지한 포탄 두 발은 정확히 옥토퍼스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주, 죽었나?”
누군가의 간절한 외침.
더 이상은 싸울 기력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벌써 2시간이나 지속된 전투!
유저들은 간절한 마음을 담아 옥토퍼스를 바라봤다.
휘이잉!
“…….”
“…….”
조금 전까지만 해도 시끌벅적했던 바다에 적막이 흘렀다. 들리는 것이라고는 바람 소리가 전부였다.
[띠링! 르네상스 혈맹이 최초로 해왕류 몬스터 옥토퍼스를 처치했습니다.]
[명성이 1,000 상승합니다.]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던 유저들의 귀에 기분 좋은 알림음이 들려왔다.
“와아아! 이겼다!”
“잡았다! 우리가 녀석을 잡았어!”
“만세! 르네상스 혈맹 만세!”
저 거대한 옥토퍼스를 처치했다는 기쁨에 유저들이 서로를 얼싸안고 환호성을 내질렀다.
르네상스 혈맹이 모두 함께한 승리!
그들은 이번 전투를 통해서 서로 간의 끈끈함을 거머쥘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앞으로 르네상스 혈맹의 가장 큰 힘으로 작용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