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5장. 르네상스 혈맹 (66/82)

제5장. 르네상스 혈맹

“모두들 작업 속도를 올리시오! 거기 붉은 수염 드워프! 자꾸 그렇게 맥주 통만 잡고 있을 거요? 내일까지 작업 마무리해야 한단 말이오!”

“쳇! 고작해야 맥주 몇 모금 마신 걸로 그리 쩨쩨하게 굴 건가!”

“정녕 몇 모금이오? 조금 전부터 지켜보고 있었소! 벌써 30분째 맥주 통만 붙잡고 있지 않았소!”

“끄응!”

테크토의 강한 항변에 붉은 수염을 멋지게 기른 드워프는 앓는 소리를 내뱉으며 자신의 위치로 돌아갔다.

테크토의 진두지휘 아래 NPC들이 승선할 거대한 배의 제작이 마무리 단계에 이르렀다.

길이 100미터, 너비 25미터.

또한 혹시 모를 파손 위험에 대비해 아예 갑판을 떼어버리고, 잠수함처럼 철제 합판을 덧대어 지붕을 씌웠다.

지붕 아래로는 총 3층으로 제작하여 되도록 많은 수의 NPC들을 승선시킬 수 있게 했다.

테크토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제작의 총감독을 맡았다는 것이 부끄러울 만큼 조악한 선박이었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음을 알고 있기에 묵묵히 감독에 매진했다.

“테크토.”

“아, 오셨습니까.”

“소형 대포 10문의 제작이 끝났네.”

“오! 그렇습니까?”

드디어 기다리고 있던 대포가 도착했다. 비록 제대로 된 광석이나 용광로가 없어 급조해서 만들었다고는 하나, 최고의 장인들이라는 드워프들이 제작한 대포다.

목표로 삼은 섬까지 이동하는데 조우할 수 있는 해왕류 몬스터들을 상대로는 충분히 위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이순신으로 운반해주시겠습니까? 지금 곧 이순신의 포문에 대포들을 부착해야겠습니다.”

“우리도 도와주지. 아, 그리고 선수와 선미에 부착할 대포는 따로 제작했네. 우리들이 가지고 온 합금을 이용해 만든 캘버린포라네. 위력은 여느 소형 대포에 비해 1.5배를 상회하지.”

“오오! 바렌트 왕실에만 납품하셨다는 바로 그 대포로군요. 죄송스러운 말씀이지만, 대포의 위력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싶습니다. 그래야 추후에라도 캘버린포를 믿고 해왕류 몬스터들과 전투를 벌일 수 있지 않겠습니까?”

“당연히 그래야지. 그렇지 않아도 해안가에 캘버린포와 소형 대포들의 시험 사격을 준비시켜 뒀네.”

아칸의 자신만만한 대답에 테크토는 들뜬 목소리로 소리쳤다.

“가보시죠!”

웅성웅성.

“저 드워프들이 뭐 할 작정이지?”

“세상에! 저건 대포 아냐? 페난 부근에 대형 몬스터라도 나타난 건가?”

강철 사슬 일족 드워프들이 해안가로 대포들을 끌고 오자, 페난으로 피난을 온 NPC들과 유저들이 요란을 떨었다.

NPC들로서는 처음 보는 대포의 모습에 신기해했고, 유저들 역시 아르니안 대륙에서 처음 모습을 드러낸 대포에 관심이 집중되었다.

“어라? 저기에 포탄은 왜 집어넣는 거지?”

“서, 설마!”

“젠장! 저 땅딸보 녀석들이 미쳤나!”

강철 사슬 일족 드워프들이 대포의 포문을 조정하고는 이내 포탄과 화약을 그 안에 집어넣기 시작했다.

대포를 제작하는 그들은 당연하게도 포술에 제법 일가견이 있었던 것이다.

문제는 대포들의 포구가 유저들이 모여 있는 방향을 향한다는 사실이었다.

대포의 위력이 어느 정도인지 대포를 처음 접하는 그들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었지만, 워낙 현실감이 반영된 『오벨리스크』인지라 실제로 자신들이 대포에 겨냥당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다치기 싫으면 모두 물러나라!”

끼이익-

테크토와 함께 해안가로 나온 아칸은 모여 있는 인파를 향해 소리쳤다. 그와 동시에 포구가 45도 각도로 하늘을 향했다.

“열 문의 소형 대포와 두 문의 캘버린포가 일제사격을 하면, 작은 산 하나 정도는 먼지로 만들 수가 있다네.”

아칸의 말이 사실이라면 거의 7서클 광역 마법 파이어 레인(Fire Rain)과 맞먹는 파괴력이었다.

테크토는 조금 놀란 눈빛으로 아칸을 바라봤다.

“사격 준비!”

아칸의 외침에 각 대포를 책임지고 있는 드워프들이 발사 장치를 움켜쥐었다. 대포의 위력을 익히 알고 있는지라 강심장인 그들도 잔뜩 긴장한 눈빛이었다.

“발사!”

펑! 펑! 펑!

대포들이 연이어 불을 뿜었다.

청천벽력과도 같은 굉음!

주변을 가득 메우고 있던 인파들의 손이 저절로 귀를 틀어막았다.

콰앙! 콰앙! 콰아아앙!

이윽고 페난 북쪽의 작은 야산에 집중적인 폭발이 일어났다.

눈을 어지럽히는 불꽃과 자욱한 연기.

조금 전까지만 해도 페난 북쪽에 우뚝 서 있던 야산이 지도상에서 깨끗하게 사라졌다.

“…….”

“…….”

마법을 상회하는 엄청난 대포들의 위력!

사람들은 그 끔찍한 위력에 할 말을 잃고야 말았다.

* * *

천휘가 페난을 떠난 지 정확히 사흘이 흘렀다. 그러나 약속된 기일에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거기에 더해 희귀한 마법 시약을 찾아 떠난 로빈 일행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사이, 페난으로 정체를 알 수 없는 무리들이 차츰차츰 모여들었다.

“테릭이라고 합니다. 카오스 팔라딘이신 마스터 카멜의 부름을 받고 찾아왔습니다.”

가장 먼저 페난으로 찾아온 이들은, 하나같이 플레이트 갑옷 세트로 무장한 팔라딘과 다크 팔라딘들이었다.

화신의 사막 원정에서 명성을 떨친 카멜은 아르니안 대륙을 돌며 방랑하는 성기사들을 끌어 모았다.

그들은 퀘스트 수행에 실패하며 교단에서 축출된 이들이었고, 교단에서 축출된 탓에 여느 성기사들과 같이 신의 축복조차 받을 수 없었다.

신의 축복을 받지 못하는 그들은 망캐(망한 캐릭)가 되어 캐릭터를 지울지 말지 고민하고 있었다.

카멜은 그런 방랑 성기사들을 규합해 그들에게 혼원신공을 전수했다. 아직 대성을 하지 못해 반쪽짜리 혼원신공을 전수했을 뿐이지만, 그들에게는 크나큰 힘이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카멜에 이어 새로운 카오스 팔라딘으로 향해 가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화신의 사막 원정에서 생명의 여신 미온 님의 도움으로 살아난 게릭이라고 합니다. 저와 함께 온 이들도 모두 마찬가지! 우리는 미온 수호대예요!”

카오스 팔라딘들에 이어 우락부락한 사내들의 집단인 미온 수호대가 찾아왔다.

그들은 모두 화신의 사막 원정에 참가했을 만큼 대단한 실력자들이었다. 그들이 이렇게 함께하게 된 계기는 오로지 미온을 향한 동경 때문이었다.

그들에게 있어 죽음의 위기에서 몇 차례나 구원의 손길을 보내준 미온은 여신이나 마찬가지였고, 대부분이 노총각이었던 그들은 이제 미온을 향한 맹목적인 사랑으로 이렇게 모임까지 만들게 된 것이다.

“안녕하세용! 얼음마녀 눈송이 언니를 동경해서 마법사가 된 토토예용! 모두 아리따운 얼음소녀들이랍니당!”

마지막으로 합류한 이들은 어린 소녀들이었다.

코스튬을 하는 것인지 그들은 화려하지만 실용적이지 못한 의상을 착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들의 실력은 단연 발군이었다. 하나같이 얼음 마법을 익힌 그녀들은 최하 4서클의 마법사들이었고, 그녀들이 눈송이와 함께 펼쳐 내는 하쿠나 마타타는 말 그대로 바다까지 얼릴 정도로 위력적인 마법이었다.

“모두 반가워요. 다들 아시겠지만 지금의 대륙은 파멸의 폭풍이 불고 있어요.”

그들을 맞이한 이는 미온이었다. 천휘가 없는 페난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이는 바로 그녀였다.

“하지만 우리는 새로운 땅을 발견했어요. 몬스터들이 군림하고 있는 대륙이 아닌 우리만의 힘으로 개발할 수 있는 새로운 땅이죠. 그곳으로 떠나기 위해 모두 힘을 모아 준비를 하고 있어요. 여러분도 새로운 땅의 주인이 되고 싶다면 저희를 도와주세요.”

미온의 말에 세 무리는 일손이 부족한 페난에서 일을 거들기 시작했다.

카오스 팔라딘들은 부상을 입은 NPC들의 회복에 전념했고, 미온 수호대의 유저들은 크고 작은 잡일을 전담했다. 그리고 얼음소녀들은 페난의 유저들을 규합해 페난 인근의 몬스터 사냥을 도맡았다.

그렇게 조금씩 출항의 깃발이 세워지고 있었다.

* * *

“페난 쪽 일은 잘 마무리되고 있는 거지?”

“이미 모든 준비가 완벽하게 끝났어. 이제 영완이 너와 준우 일행만 돌아오면 돼.”

영완과 미연은 무척이나 초췌한 얼굴이었다. 두 사람 모두 『오벨리스크』에서의 일로 밤을 지새운 탓이었다.

그런 상태로 늦지 않고 학교에 출근한 것 자체가 어떻게 보면 용한 일이었다.

“나도 그렇고, 준우 쪽도 그렇고 둘 다 죽어버려서… 내일 새벽에나 페난에 도착할 것 같아.”

“알고 있어. 하지만 최대한 서두르는 게 좋을 거야. 페난에서의 일도 심상치 않아. 속속들이 유저들이 모이면서 유명 길드도 보이고 있거든.”

“임페리얼 길드는?”

유명 길드라는 말에 영완이 얼굴을 굳히며 물었다.

“다행히 아직 임페리얼 길드의 유저들은 보이지 않아. 하지만 최강의 사내가 페난으로 들어섰어.”

“최강의 사내? 빌어먹을! 아렌 녀석이?”

비록 그랜저에게 패하기는 했으나, 천휘는 여전히 아렌을 아르니안 대륙 최강의 사내라 생각하고 있었다.

게다가 그의 주변에는 신선이나 데브라처럼 지존 12인의 무리들이 모여 있었다.

그랜저의 임페리얼 길드를 제외하고는 유일하게 자신과 맞설 수 있는 인물이 바로 아렌인 것이다.

“말도 마! 화신의 사막 이후에 세력을 결성했는지 그의 주변으로 수백 명의 유저들이 동행하고 있어. 게다가 하나같이…….”

“비범했겠지. 녀석은 충분히 그럴 능력이 있으니까.”

“맞아. 대부분이 트리플 마스터였어. 게다가 낯익은 인물들도 꽤나 많은 걸로 봐서는, 아무래도 화신의 사막 원정에 참여했던 유저들을 대거 포섭한 모양이야.”

미연의 말에 영완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아렌은 그런 인물이었다.

눈에 보이지 않아도 늘 신경이 쓰이는 사내!

괜히 최강이라는 수식어가 그의 이름 앞에 붙여진 것이 아니었다.

“데브라나 신선도 있어?”

아렌이 무서운 점은 그의 주변에 지존 12인 중 2명이나 있다는 사실이었다. 비록 개개인은 천휘의 힘에 미치지 못하지만, 그들이 힘을 모은다면 충분히 그를 위협할 수도 있었다.

“데브라나 신선은 물론이고, 거기에 더해 다른 사람들도 눈에 띄어. 그것도 데브라나 신선에 준하는!”

“…설마 다른 지존 12인?”

“빙고!”

“어떻게 그럴 수가!”

데브라나 신선은 아렌과 친분이 있기에 동행한다 해도, 다른 지존 12인들이 아렌과 함께 움직인다는 것은 무척이나 뜻밖의 일이었다.

지존 12인은 모두들 자존심이 드높았다.

지존이라 불리는 만큼 그들이 지닌 힘은 엄청났고, 개개인이 형성하고 있는 세력도 대단했다. 때문에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그들이 함께 힘을 모은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강한 힘을 소유한 이들일수록 용의 꼬리가 되기보다는 뱀의 머리가 되고 싶어 하는 법이기 때문이다.

“나도 잘 모르겠어. 하지만 데브라나 신선 이외에도 로열 하이랜더 브리튼과 빛의 외침 요한, 그리고…….”

“또 있어?”

“응. 거인 토르도 그와 함께 움직이고 있어.”

“끄응! 거인 토르 녀석까지.”

화신의 사막 원정에서 친분을 맺은 거인 토르지만, 이후에는 연락이 끊겨 있었다. 개인적으로 그의 실력이 탐난 천휘는 백방으로 그의 행적을 수소문했지만, 결국 그를 찾지 못했었다.

“그 정도 세력이라면 임페리얼 길드에 준하거나, 혹은 그 이상일 수도 있잖아. 젠장! 임페리얼 길드만 신경 쓰면 되는 줄 알았더니!”

섬의 존재는 어떤 식으로든 드러날 게 뻔했다. NPC들이 퀘스트를 통해 섬의 존재를 알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니까 최대한 빠르게 움직여야 해. 너도 알다시피 그들은 절대 호락호락하지 않아. 분명히 어떤 식으로든 우리를 방해하려 하거나 훼방 놓을 게 뻔해.”

“무슨 말인지 알고 있어. 최대한 빨리 그쪽으로 갈게. 준우 녀석에게도 사망 페널티가 풀리는 즉시 접속하라고 해야겠어.”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페난에서의 일이 벌써부터 꼬이려 하고 있었다. 이 모든 걸 해결하려면 한 가지 방법밖에 없었다.

‘하루라도 빨리 출항하는 수밖에…….’

지금 당장 피오르해를 항해할 선박을 확보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분명히 이번 업데이트와 관련해 테크토와 같은 조선 스킬을 익힌 유저나 NPC들이 모습을 드러내기는 하겠지만, 그들로 하여금 선박을 제작하도록 하는 것은 엄청난 기간이 소요될 수밖에 없었다.

영완은 배가 제작되는 그 기간을 최대한 활용할 생각이었다.

후룩!

목으로 넘어가는 자판기 커피의 향이 오늘따라 달콤하게 느껴졌다.

* * *

스파아앗!

촤아아악!

사망 페널티의 종료와 동시에 『오벨리스크』에 접속한 천휘는 재빨리 주변을 살폈다.

휘몰아치는 파도와 새하얀 백사장이 넓게 펼쳐진 해변.

“켈리만섬인가?”

눈에 익숙한 해변이었다. 심해의 동굴에서 죽은 탓에 이곳 해변에서 부활한 모양이었다.

“이럴 때가 아니지! 당장 페난으로 돌아가야겠어. 가면서 로빈 녀석과 카멜 녀석도 함께 데려가야지. 아공간 오픈! 파뱃 소환!”

끼에에엑!

허공에서 공간의 틈이 벌어지며 거대한 파뱃의 동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녀석은 마치 기지개를 펴듯 길게 울음소리를 내뱉었다.

휘익- 탁!

“페난으로 돌아간다! 가는 길에 카이젠 산맥, 아니 드래곤 산맥도 들를 거야.”

끼에… 엑?

드래곤 산맥은 죽음을 초월한 파뱃조차도 두려움에 떨게 만들 정도로 위험한 땅이었다.

하지만 그곳을 이미 경험한 천휘로서는 그러한 두려움이 덜한 곳이었다.

꽈앙!

“뭐 해! 어서 날지 않고!”

끼에에엑!

천휘의 주먹질에 파뱃은 별수 없이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드래곤 산맥으로 향하기 두려운 녀석의 속도가 다소 처졌지만, 이내 천휘의 주먹이 다시 한 번 녀석의 머리를 두드리자 한계를 뛰어넘는 굉장한 속도로 드래곤 산맥을 향해 날아갔다.

역시 매가 약이었다.

타다닥!

타다닥!

인적이 없는 드래곤 산맥의 작은 봉우리 부근에 미약한 소음이 일었다.

정적을 깨는 발소리.

발소리는 무척이나 다급했다.

“젠장! 저 녀석들은 왜 저리 귀가 밝은 거야!”

“이 바보야! 네 녀석이 기지개를 켠다고 소리를 내지르는데 그럼 안 듣고 배기냐!”

“빌어먹을! 그럼 온몸이 찌뿌드드한데 어떡하라고! 그리고 주변에 저 녀석들이 있을 줄 알았냐!”

두 사람의 뒤로 엄청난 숫자의 사이클롭스들이 지축을 울리며 따라붙고 있었다.

녀석들의 이름은 드래고닉 사이클롭스.

드래곤 산맥 전역에 퍼져 있는 드래곤의 마나에 감응하며 태어난 드래곤 산맥의 패자들이었다.

그런 녀석들이 무려 수십이나 되어 두 사람을 쫓고 있었다.

“젠장! 너랑 말을 섞어봐야 내 손해지. 그나저나 이대로는 저 녀석들에게 또다시 죽음을 면하기 어렵겠어. 어쩌지?”

“어쩌긴 뭘 어째! 천휘 녀석에게 연락을 취하고, 녀석이 이곳으로 오기만을 기다려야지! 아무튼 그 전까지는 무조건 살아 있어야 돼!”

밑도 끝도 없는 작전이었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는 확실히 그 방법밖에 없었다. 드래고닉 사이클롭스들에게는 5서클 이하의 마법은 통하지도 않았고, 카멜의 카오스 미러도 오랜 시간 버티지 못했다.

삼십육계 줄행랑.

지금은 그 길만이 살길이었다.

“이쯤인 것 같은데.”

친구들의 SOS 요청에 천휘는 파뱃을 재촉해 최대한 빨리 드래곤 산맥에 들어섰다.

하지만 문제는 드래곤 산맥이 워낙 방대하다는 것이었다.

드래곤 산맥을 횡단한 천휘였지만, 드넓은 드래곤 산맥의 지리를 전부 알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종종 야생 와이번들이 파뱃을 노리고 날아들어, 녀석들을 처치하는 것 역시 시간을 잡아먹는 요인 중 하나로 작용했다.

끼에에엑!

“뭐야! 또? 젠장! 파뱃! 전속력으로 녀석을 따돌려…….”

멀리서 들려오는 와이번의 울음소리에 천휘는 파뱃에게 명령을 내리며 무심코 그쪽을 향해 눈길을 돌렸다. 그러다 수십 마리의 그레이 와이번들이 산봉우리에서 날아오르는 광경을 목격할 수 있었다.

“제, 젠장! 파뱃, 무조건 따돌려!”

끼에에엑!

천휘의 다급한 음성에 파뱃이 길게 울음을 토해내며 속력을 올렸다. 하지만 문제는 그레이 와이번이 와이번 중에서도 가장 비행 속도가 빠르다는 데 있었다. 녀석들의 무력은 다른 와이번들에 비해 떨어지는 반면, 비행 속도는 마수인 가고일과 견줄 정도로 뛰어났다.

“이러다간…….”

그레이 와이번 무리와의 거리가 점점 좁혀졌다. 이대로 시간이 흐른다면 꼼짝없이 녀석들에게 따라잡힐 것만 같았다.

“젠장! 이대로 아무 데나 내려야…….”

콰앙!

일단 공중에서 녀석들을 상대할 수는 없기에 아무 곳에나 내려앉으려 했던 천휘는 조금 떨어진 봉우리에서 들려온 충격음에 고개를 돌렸다.

“찾았다! 파뱃! 왼쪽의 봉우리로 날아가! 어서!”

끼에에엑!

충격음이 터져 나온 봉우리 정상에는 그토록 찾아 헤매던 로빈과 카멜이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주변으로는 천휘도 익히 알고 있는 드래고닉 사이클롭스들이 흉성을 토해내며 두 친구를 에워싸고 있었다.

“빌어먹을! 천휘 이 녀석은 왜 안 오는 거야!”

“네 녀석이 지랄만 안 했어도 충분히 피해 다니며 녀석과 합류할 수 있었거든?”

“또 그 소리냐? 이미 지나간 일 가지고 그만 좀 쪼아대! 이 소심한 자식아!”

“누구보고 소심하대!”

드래고닉 사이클롭스들에게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둘은 계속해서 말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하지만 둘의 눈은 주변을 날카롭게 바라보고 있었다.

여차하면 공격을 퍼부을 태세!

둘의 양손에는 응축된 마나가 모여들고 있었다.

크워어엉!

크워어엉!

드래고닉 사이클롭스들의 포효!

고작 수십에 지나지 않는 그들의 포효에 드래곤 산맥이 요동쳤다. 드래곤 산맥에 서식하는 다른 몬스터들은 그들의 포효에 모습을 감췄고, 놀란 짐승들은 소리의 근원지에서 빠르게 멀어져 갔다.

“큭!”

“커헉!”

드래고닉 사이클롭스의 엄청난 포효에 로빈과 카멜은 옅은 신음과 함께 안색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녀석들의 포효가 자신들이 힘들게 모은 마나를 흐트러지게 만든 탓이었다.

감히 공격할 엄두조차 낼 수 없게 만드는 압도적인 강함!

둘은 직감적으로 이 자리에서 자신들이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끼에에엑!

마지막 공격을 퍼붓고 장렬하게 산화하겠다는 생각으로 두 사람이 눈을 마주친 순간! 공중에서 귀에 낯익은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파뱃!”

“천휘야!”

공중을 바라본 둘은 천휘를 태운 파뱃의 신형을 보며 소리를 내질렀다.

“파뱃의 발목을 잡아!”

두 사람이 기뻐하건 말건 천휘는 소리쳤다.

파뱃이 봉우리를 지나는 순간 두 사람을 정확하게 낚아채지 못한다면, 뒤쫓아 오는 그레이 와이번들의 공격에 자신조차 위험해질 수 있는 노릇이었다.

“아나! 우리가 무슨 스턴트맨이냐고!”

“이런 데서 허무하게 뒤지기 싫으면 잡아!”

휘이익-

카멜의 불평에 천휘는 다급하게 소리쳤다.

그리고 이내 파뱃의 거대한 동체가 산봉우리 위를 스치듯 지나쳤다.

녀석의 활공으로 인한 엄청난 풍압!

하지만 카멜과 로빈은 두 눈을 부릅뜨고 파뱃의 다리를 온몸으로 끌어안았다.

“꽉 잡아! 파뱃! 날아올라!”

끼에에엑!

다행히 두 사람을 잘 낚아챈 파뱃은 커다란 포물선을 그리며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그에 드래고닉 사이클롭스들은 광분하며 산봉우리를 깨부쉈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들이 제아무리 드래곤 산맥의 패자라고 해도 하늘을 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제 저 녀석들만 떨어트리면 되는 건가?”

무사히 카멜과 로빈을 위기에서 구해냈지만, 정작 천휘의 위기는 끝나지 않았다. 여전히 그레이 와이번들이 맹렬하게 파뱃을 뒤쫓고 있었던 것이다.

“로빈, 저 녀석들을 향해 마법을 펼쳐!”

마치 암벽 등반을 하듯 다리에서 등 위로 올라온 로빈을 향해 천휘가 소리쳤다.

“헉! 저 녀석들은 또 뭐야?”

천휘의 외침에 먼저 반응한 것은 카멜이었다.

지근거리에서 뒤쫓아 오는 수십 마리의 그레이 와이번들을 보며 경악을 금할 수가 없었다.

“와이번들은 원래 마법 저항력이 좋아서 저 많은 숫자를 일거에 쓰러트릴 수는 없어. 게다가 이렇게 흔들리는 와중이라면 마법의 위력도 현저하게 저하된다.”

“알고 있어. 그러니까 저 녀석들을 공격 마법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떨쳐 내야 하는 거야.”

“다른 방식?”

“그래. 이를테면 다크니스 마법으로 녀석들의 눈을 멀게 한다든가.”

“…다크니스 마법은 흑마법이거든?”

“…그러니까 이를테면이라니까?”

천휘의 말에 로빈은 곰곰이 자신의 마법을 되짚었다.

확실히 천휘의 말처럼 굳이 공격 마법이 아니어도 녀석들을 떨칠 방법은 무궁무진했다.

“윈드(Wind)!”

휘이잉!

로빈은 먼저 시험해볼 요량으로 가장 빠르게 뒤쫓아 오는 그레이 와이번에게 윈드 마법을 펼쳤다.

살상력이 전무한 윈드 마법이 녀석의 양 날개를 휘감자, 녀석은 허우적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좋았어!”

“야! 지금이 실험을 해볼 때냐!”

자신의 생각이 어느 정도 들어맞자 로빈은 쾌재를 불렀다. 그러나 그러는 순간, 그레이 와이번은 빠른 속도로 접근해 어느새 파뱃의 꼬리를 공격하려 하고 있었다.

“어림없지! 세상을 떠도는 자유로운 바람이여, 이곳에서 그 자유로움을 잠시 접고 광포한 그대의 모습을 드러낼지니, 윈드 토네이도(Wind Tornado)!”

이윽고 펼쳐지는 광포한 바람의 춤!

순식간에 바람의 흐름이 완전히 뒤바뀌며 그레이 와이번들의 균형이 무너졌다.

급기야 땅으로 곤두박질치는 녀석들까지 나올 정도!

그렇게 일행은 그레이 와이번을 떨어트리고 무사히 페난으로 향할 수 있었다.

* * *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저 작은 어촌에 불과했던 페난은 어느새 라그혼 왕국의 수도 이그나혼에 못지않은 대륙의 중심지로 성장했다.

완벽하게 폐허가 된 인근의 마을들과는 달리 페난은 천휘 일행의 도움으로 주민 NPC들이 몬스터들의 습격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고, 더불어 부서진 마을의 건물들을 드워프들이 다시 짓기까지 했다.

게다가 갈 곳을 잃은 수많은 NPC들과 유저들이 페난을 찾으면서 급속도로 발전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은인께서는 저희 마을의 지분을 원하신다는…….”

“페난 마을을 이만큼이나 재건할 수 있었던 공이 누구에게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야 은인과 그 동료 분들의 도움 아니겠습니까.”

촌장의 말에 천휘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마을의 지분 5%를 저에게 주십시오. 이후에도 물심양면으로 페난을 돕도록 하겠습니다.”

페난은 이제 더 이상 작은 어촌이 아니다. 어엿한 항구로 발돋움하고 있는 노른자위 땅이다.

게다가 앞으로 먼 바다로 나가 섬 생활을 시작할 천휘 일행에게 페난은 대륙과의 교역을 위한 요충지였다.

“은인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의당 그렇게 해야지요.”

[띠링! 페난 마을의 지분 5%를 확보하셨습니다.]

[페난 마을이 거둬들이는 세금의 5%를 한 달에 한 번씩 지급받습니다.]

아직까지는 발전되고 있는 마을이지만, 이후에는 대륙 최고의 도시로 우뚝 설 페난이다.

페난의 세금 5퍼센트라면 추후에 천휘의 자금줄이 되어 고스란히 무력으로 환산될 것이다.

천휘는 그러한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 * *

“정말 거대하군.”

“잡느라 죽는 줄 알았습니다.”

“허허! 피오르해를 군림하던 제왕 흰 고래야. 이런 녀석을 잡았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대단한 거야.”

“하하! 그런가요?”

드디어 흰 고래 라푼을 강시로 제작하기 위해 페난에서 약 5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작은 만으로 이동했다.

작은 만이라고는 해도 그 면적은 꽤나 넓었다.

그러나 머리부터 꼬리까지 300미터를 너끈히 상회하는 흰 고래 라푼의 육중한 시체가 만으로 들어서자, 만은 실로 가득 채워진 느낌이었다.

천휘는 테크토와 드워프들의 힘을 빌려 만을 막았다. 그들뿐 아니라, 힘깨나 쓴다는 페난 마을의 청년 NPC들까지 모조리 총동원해 이틀 만에 흰 고래 라푼을 강시로 제작할 작은 호수를 만들어낸 것이다.

“이제부터는 이 주변으로 아무도 못 오게 해라.”

[알겠다, 주인.]

“테크토 형님도 이제 페난으로 돌아가세요. 열흘 정도면 강시가 완성될 겁니다.”

“그렇게 하지. 그사이 드워들에게 조선 기술을 가르치면 되니까 말이야.”

이름 모를 만, 아니 이제는 호수가 되어버린 그곳에 천휘 홀로 남았다.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주변에 오베른과 강쇠, 그리고 돌쇠들을 배치시켰다.

“라푼…….”

서늘한 바닷바람이 유난히 차갑게 느껴졌다.

거대한 산과도 같은 흰 고래 라푼의 시체.

한때 마의 바다 피오르해에서 제왕으로 군림하던 녀석이 이렇게 차디찬 시체가 되어 눈앞에 쓰러져 있었다.

“지금은 이런 감상에 빠져 있을 때가 아니지. 어디 시작해볼까?”

천휘는 흰 고래 라푼을 천마강시로 제작할 요량이었다.

처음에는 시약을 아끼기 위해 혈강시로 제작하려 했으나, 흰 고래 라푼의 시체라는 천고에 다시없을 뛰어난 시체를 가지고 고작 혈강시로 제작할 수는 없었다.

“최소한 이성은 가져야겠지. 비록 오베른처럼 단순 무식하게 변한다고 해도 말이야.”

천휘는 호숫가에 마련한 나룻배를 타고 천천히 호수의 중심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거대한 흰 고래 라푼의 시체 지느러미 부근까지 도달한 후, 그곳에서 아공간을 오픈해 마법 시약을 하나씩 꺼내기 시작했다.

“이 정도로 많은 시약을 한꺼번에 써야 하다니… 빌어먹을! 이 정도 양이면 천마강시 오십 구는 만들 텐데.”

아공간에서 끊임없이 쏟아지는 마법 시약!

시약은 작은 물병 정도가 아니라, 하나같이 커다란 드럼에 막대한 양이 담겨져 있었다.

“시작은 이것부터!”

천마강시 제작을 위한 시약 화합물은 맹독을 기반으로 해야 한다. 때문에 오베른을 천마강시로 제작할 당시에도 아르니안 대륙에서 내로라하는 최고의 독성을 지닌 시약들만 추려 사용했었다.

상상조차 하기 싫은 천문학적인 액수!

천휘는 그때부터 강력한 독성을 내뿜는 몬스터나 마수만 보면 눈에 불을 켜고 시약을 뽑아냈었다.

그리고 지금 그 노력의 결실을 맺을 수가 있었다.

“그린베레의 혀.”

그린베레는 무려 레벨 350의 몬스터다.

과거 백악기 시대에 존재했다고 전해지는 시조새와 흡사하게 생긴 녀석은, 기다란 혀에 맹독을 품고 부리로 공격을 가하며 상대에게 맹독을 선사한다.

그린베레는 천휘가 사냥한 몬스터가 아니라 하린과 카멜의 합작품이다. 종종 사냥을 함께하며 이뤄낸 결실이었다.

“다음은 이것!”

그린베레의 혀를 있는 만큼 모두 쏟아 붓고는 곧바로 맹독 수염 일족 리자드맨의 수염을 호수에 쏟아 부었다.

리자드맨 일족 중에서도 가장 사냥하기 까다롭다는 맹독 수염 일족은 바로 로빈과 눈송이가 함께 사냥하며 얻은 부산물이었다.

천휘는 자신이 얻은 것과 동료들이 얻은 시약들을 자신이 정한 순서에 따라 호수에 투하했다. 그것들 중에는 로빈과 카멜이 목숨까지 소비하며 구한 거인의 겨드랑이 털도 있었다.

“좋았어!”

그렇게 한 시간이 지났다. 시약을 넣는 순서는 물론이고, 양까지 조절한 탓에 시간이 생각보다 조금 오래 걸렸다.

부글부글.

청아한 빛을 발산했던 호수에서 거무튀튀한 기포가 피어올랐다. 거기에 더불어 호수에 짙은 독 안개가 피기 시작했다.

“마지막인가.”

예전 오베른을 천마강시로 제작할 때는 마지막 시약으로 그린 드래곤의 체액을 택했었다. 그것이 천휘가 구할 수 있는 최고의 맹독성 시약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천휘의 손안에 들린 시약은 그보다 좀 더 독성이 강한 것이었다.

“후후! 이 녀석을 잡으려고 오베른마저 죽임을 당했었지.”

마신을 만나기 위해 갔었던 지저 세계에서 천휘는 수많은 마수들과 조우할 수 있었다.

그들은 대부분 중급 이상의 마수들이었고, 그중에는 특이한 능력을 지닌 녀석들도 무척이나 많았다.

그러한 마수들 중 메두사라는 녀석이 있었다.

녀석은 메두사라는 이름답게 수많은 실뱀을 수족처럼 부리는 거대한 뱀이었다.

또한 중급 마수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중급 마수들이 두려워할 만큼 무서운 녀석이었다.

녀석의 독은 하나가 아니라 수많은 실뱀들을 통해 경우에 따라서 수십, 어쩌면 수백 가지의 다양한 종류의 독을 사용할 수가 있었다.

그중 가장 무서운 것은 바로 부식 독이었다. 닿는 모든 것을 순식간에 부식시켜 버리는 녀석의 부식 독은 중급 마수 중 가장 단단한 비늘로 몸을 감쌌던 라이콘드라는 녀석의 비늘까지 눈 깜짝할 새에 부식시켜 버릴 정도였다.

천휘는 녀석을 잡기 위해 오베른을 희생시키고, 변강쇠와 돌쇠를 동귀어진시켰을 정도였다.

당시의 아찔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메두사의 체액을 마지막으로 호수에 떨어트렸다.

푸슈욱! 푸슈욱!

메두사의 체액이 떨어지고 얼마 되지 않아 호수가 격렬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사이 천휘는 나룻배를 몰아 땅 위로 올라서 그 광경을 지켜봤다.

“이제 기다리기만 하면 돼.”

잠시 반응을 살피던 천휘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자신의 경험으로 미루어볼 때 시약 화합은 다행히도 성공을 한 모양이었다.

피오르해를 주름 잡았던 흰 고래 천마강시!

천휘는 녀석이 피오르해를 다시 휘젓고 다닐 그날을 떠올리며 페난으로 향했다.

* * *

“당신 뭐야! 왜 남의 노점을 방해하는 거야!”

“그러니까 여기는 우리가 어제부터 미리 찜해둔 곳이라니까!”

“아놔! 말도 안 되는 억지 부리고 있네. 길거리에서 노점 하는데 자리를 찜해? 이 자식들 순 날강도 아냐!”

“뭐? 날강도? 이 새끼가 진짜!”

언제나 빛이 있으면 어둠도 있는 법이다.

페난은 사상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급속도로 발전하고 있었지만, 아직 경비대나 치안대가 꾸려지지 않아 마을 내에서의 치안은 최악에 가까웠다.

때문에 유저들이 서로의 이권을 위해 크고 작은 분쟁을 일으켰고, 급기야는 길드전으로까지 분쟁의 불길이 확산될 지경에 이르렀다.

하지만 분쟁은 늘 불길이 타오르기 전에 수그러들었다. 페난에서 가장 거대한 세력을 구축하고 있는 마제스티 길드 때문이었다.

최강의 사내 아렌을 중심으로 모인 그들은 지존이라는 뜻의 마제스티(Majesty) 길드를 형성했고, 페난의 경비대를 자처하며 치안 유지에 심혈을 기울였다.

“뭐야! 누가 길거리 한복판에서 무기를 빼들래!”

“넌 또 뭐야!”

“이 새끼가! 내가 누군지 알아? 내가 바로 그 유명한 마제스티 길드의 길원이시다!”

“헉! 마제스티 길드!”

“쳇!”

마제스티라는 이름만 들어도 유저들은 다툼을 멈췄다. 그들이 어떤 식으로 치안을 유지하고 있는지 대부분의 유저들이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철저하게 무력을 동원해 치안을 유지했다.

최강의 사내 아렌을 후광으로 마제스티 길드의 길원들은 페난을 돌아다니며 다툼을 애초에 원천 봉쇄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또 다른 불평을 자아내고 있었다.

세력이 없는 자들의 설움!

페난은 이제 마제스티 길드와 반마제스티 유저들 간의 보이지 않는 알력 싸움의 장이 되고 말았다.

“더 이상 두고 볼 수만은 없다, 천휘야.”

“그래. 그 녀석들, 이제 우리까지 압박해오고 있어. 천휘 동생이 결단을 내려야 할 때야.”

“흐음.”

로빈과 하린의 말에 천휘는 얼굴을 굳혔다. 들려오는 소문만으로도 녀석들은 확실히 도를 넘고 있었다.

“아렌 녀석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야. 하지만 우리는 저들에 비해 세력이 약해. 저들은 수백의 유저들이 함께하고 있는데, 우리는 고작해야 수십이잖아.”

“드워프들도 있잖아!”

“카멜, 너 바보냐? 드워프들은 NPC야. 게다가 저들은 논외 전력이라는 것도 모르냐? 저들은 앞으로 우리의 생산 시설을 책임질 충실한 일꾼이지, 우리의 전력이 아니야!”

“끙! 그런가?”

천휘의 일목요연한 설명에 카멜이 목을 움츠렸다.

“송이야, 정확히 우리와 뜻을 함께하겠다고 찾아온 이들의 숫자가 얼마나 되지?”

“우리까지 합하면 한 150명쯤 돼용.”

“마제스티 길드는?”

“얼추 600에서 700명 정도 될걸용? 중요한 건 마제스티 길드의 압박에 시달리다 못해 결국 그쪽으로 붙는 이들도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다는 거예용. 이런 추세라면 열흘 안에 천 명을 돌파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용?”

“…많네.”

눈송이의 보고에 천휘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확실히 로빈과 하린의 말처럼 이대로는 재미없어진다.

“앞으로 합류할 인원은?”

“곧 진 마탑의 탑주님께서 도착하실 거야. 지금 대륙의 정황으로 봤을 때… 아마도 이곳에 도착하시는 분들은 적어도 5서클 이상의 고위 마법사일 가능성이 커. 대략 30명 정도?”

“그리고?”

“내가 아는 아그들이 이곳으로 오고 있단디? 나처럼 다들 요리를 하거나, 그림을 그리는 등 전투와는 관련 없는 아그들이지만… 그래도 받아줄 거제?”

“얼마나 되는데?”

“한 50명은 될 것 같은디?”

더 이상의 증여 인원은 무리였다. 이순신도 거의 포화 상태고, 흰 고래 라푼이 짊어질 거대한 선박도 자신들을 따를 NPC들을 태우려면 자리가 부족할 지경이었다.

‘이제 열흘이면 페난을 떠날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우리가 이곳을 떠났을 때 아렌 녀석이 이곳 페난을 점거할 수도 있다는 것이지. 그렇게 되면 문제가 심각해. 드워프들의 조선 기술로 인해 항구도시로 발전을 꾀하고 있는 페난이니만큼 빠르게 배를 확보하게 될 수도 있어.’

어차피 언젠가는 테크토가 발견한 섬의 위치가 드러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섬의 위치가 드러났다고 해서 그곳으로 당장 갈 수는 없었다.

최소한 이순신의 절반 규모 정도의 배를 확보해야만 마의 바다라 불리는 피오르해를 헤치고 나아갈 수 있는데, 유저들은 그러한 선박을 제작할 수도, 구할 수도 없었다.

한마디로 말해 페난처럼 피오르해와 근접한 마을들이 항구도시로 발전을 한 후, 그곳에 세워진 조선소에서 배를 구입해야만 바다로 나설 수가 있었다.

천휘는 그 기간을 『오벨리스크』 시간을 기준으로 3개월로 잡고 있었다.

그만큼 페난의 발전 속도는 눈부실 정도였고, 섬과 관련한 퀘스트들도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는 형국이었다.

‘아렌과 그의 동료들이라면 그 시간을 단축할 수도 있어. 놈은 어떤 방식으로든 페난을 집어삼킬 만한 녀석이야.’

될성부른 떡잎은 잘라놔야 안심이 되는 법이다.

그렇게 결심한 천휘의 얼굴에 사악한 미소가 깃들었다.

“또 나왔어! 저 표정!”

“저 표정 나왔으면 끝난 거야.”

“죽었어! 마제스티 녀석들!”

천휘의 사악한 미소에 대한 일행의 맹신!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천휘는 그러한 말들이 별로 달갑지 않았다.

“…어이, 어이, 다 들리거든?”

* * *

천휘는 일단 NPC들과 동료들을 쿠닉섬으로 이동시켰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처음 테크토와 만났던 그 섬으로 이동시킨 것이다.

이틀 후, 천휘는 테크토가 이순신을 제작했던 그 거대한 언덕 위에서 자신과 뜻을 함께하게 된 모든 이들을 불러 모았다.

“제 이름은 천휘입니다. 여러분을 이렇게 한자리에 모이게 만든 장본인이기도 하죠. 저는 그저 여러분과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청년입니다. 이 자리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손에 땀이 나고, 얼굴이 화끈거리는 소심남이기도 합니다.”

“하하하하!”

천휘의 농에 사람들이 박장대소를 터트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이 자리에 선 것은 여러분과 한 이름 아래에서 한뜻을 품기 위함입니다.”

“…….”

본론이 시작되자 모두의 입이 닫혔다.

“그렇다고 해서 길드를 형성하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길드라는 것은 본래 조합이라는 좋은 의미를 지니고 있지만, 저 자신은 길드라는 말을 무척이나 싫어합니다. 저는 길드를 오로지 이권 다툼을 위한 단체로밖에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저는 우리의 모임을 혈맹이라는 말로 대체하고자 합니다. 피로 이루어진 맹세! 저는 여러분을 한 가족으로 삼고 싶습니다. 더불어 위아래의 구분 없이 그저 사람과 사람의 만남으로 여러분과 함께하고 싶습니다!”

“우오오오!”

가슴에 와 닿는 천휘의 발언에 모두의 가슴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그들의 가슴에 뜨거운 기운이 치솟았다.

“그리고 저희 혈맹의 이름을 신시대를 개척하자는 의미에서 르네상스로 짓고자 합니다!”

“르네상스 혈맹!”

“최고다! 멋진 이름이야!”

르네상스(The Renaissance).

재생, 부흥이라는 뜻을 품은 그 감미로운 말에 좌중의 얼굴은 희열로 물들었다.

“르네상스 혈맹! 앞으로 우리는 이 아르니안 대륙의 부흥을 위해 움직일 것입니다! 그리고 나아가 아르니안 대륙의 질서를 새로이 쓸 것입니다!”

“르네상스 만세!”

아르니안 대륙의 전역을 뒤흔든 르네상스 혈맹의 깃발은 그렇게 그 시작을 알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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