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거인의 계곡
우우웅!
산골짜기를 따라 스산한 바람이 불어왔다.
카이젠 산맥의 웅장한 산등성이에서 불어오는 삭풍은, 그곳을 침범한 이방인들에게는 너무도 가혹한 형벌이었다.
“으으! 추워. 야, 로빈, 망토 남은 것 없냐? 그거 되게 따뜻해 보이는데?”
“내가 입은 건 망토가 아니라 마법사들이 착용하는 로브거든? 너는 착용 제한에 걸려 입지도 못해.”
“그래? 젠장! 너무 추운데.”
로빈의 말에 카멜은 오들오들 떨며 주변을 거닐고 있는 오베른과 닌자거북, 그리고 로렌을 바라봤다.
“너희들은 당연히 안 춥겠지?”
[추운가? 흠… 그러고 보니 춥다거나 뜨겁다는 감정은 없군. 활쟁이, 자네는 어떤가?]
[으하하하! 추위 따위는 내게 아무런 영향도 끼칠 수 없지!]
오베른과 로렌에게 있어 추위나 더위는 먼 나라 이야기였다. 온도를 느끼는 온점이나 냉점, 혹은 고통을 느끼는 통각이 없는 그들의 이름은 강시였다.
“…빌어먹을! 나도 이참에 천휘에게 강시로 제작해달라고 해볼까? 왜 무협 소설 보면 살아 있는 인간도 강시로 만들기도 하지 않나?”
“친구야, 제발 우리 개념 좀 가지고 살자. 그게 말이나 되냐? 아무튼 넌 저쪽 산등성이나 잘 찾아봐. 난 이쪽 면을 살필 테니. 이제 거인의 손가락이라는 시약만 확보하면 되니까.”
“쳇! 그놈의 거인 자식들은 왜 보이질 않는 거야!”
괜히 거인들에게 화풀이를 하는 카멜을 보며 로빈은 고개를 내저었다.
하지만 그의 행동도 이해가 갔다.
벌써 카이젠 산맥에 들어선 지 이틀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페난 주변에서 얻을 수 있는 시약은 하린과 눈송이에게 맡긴 채, 자신들은 강시들과 함께 좀 더 구하기 어려운 시약들을 찾아 이곳으로 온 것이다.
카이젠 산맥에서 찾아야 하는 시약은 총 3가지.
카이젠의 높은 산봉우리에서만 서식한다는 카이젠 그리폰의 알과 붉은 반점 일족의 여왕 거미 눈, 마지막으로 지금 그들이 찾고 있는 거인의 겨드랑이 털이었다.
카이젠 그리폰의 알과 붉은 반점 일족의 여왕 거미 눈은 손쉽게 구할 수 있었다. 다행히 녀석들의 서식지를 바람의 씨앗 일족 엘프 모험가로부터 알아낸 탓이었다.
문제는 거인의 겨드랑이 털이다.
거인, 즉 자이언트라 불리는 녀석들은 주로 리버훌 성국에 서식하고 있었다.
리버훌 성국 북동부 끝자락인 거인의 섬이라는 곳이 유일하게 밝혀진 거인들의 서식지였던 것이다.
수많은 몬스터들이 대륙을 점령하고 있는 지금, 대륙의 반대편이라 할 수 있는 리버훌 성국까지 갈 수는 없는 일. 때문에 그나마 각양각색의 몬스터들이 서식하고 있는 카이젠 산맥으로 들어설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일행은 지난 이틀 동안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했다. 거인의 겨드랑이 털은 고사하고, 거인의 발자국조차 발견하지 못한 것이다.
“로렌, 다크 엘프들이 아직 찾지 못했대?”
아무리 살펴봐도 보이지 않는 거인들.
로빈은 그나마 산맥 이곳저곳으로 흩어져 있는 다크 엘프 강시들에게 희망을 걸고 물었다.
[흐음… 아직까지는 아무런 소식이 없다. 으하하하! 거인 녀석들이 이 몸이 오신다는 걸 알고 모두 숨은 모양이군!]
[무슨 소리냐, 활쟁이! 다 나 때문이다! 내 검이 두려워 숨은 것이야!]
[이 빌어먹을 칼쟁이가! 네놈의 칼보다야 내 활이 훨씬 더 무섭다는 걸 모르느냐!]
“…하아!”
금방이라도 대결을 펼칠 것만 같은 둘의 모습에 로빈은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러다가 우리 다 된 밥에 코 빠트리는 거 아닌지 몰라. 휴우!”
결국 로빈 일행은 카이젠 산맥에 들어선 지 이틀째가 되는 날도 거인들을 찾지 못한 채 이름 모를 산등성이에서 노숙을 할 수밖에 없었다.
“야, 바람에 불 꺼진다! 나무 좀 더 가져와!”
“여기, 여기!”
바람이 몰아치는 산등성이에서의 노숙은 말 그대로 최악이었다. 제아무리 장작에 불이 붙어도 갑자기 불어 닥치는 바람에 의해 꺼지기 일쑤였고, 일몰과 함께 찾아오는 매서운 추위는 두 사람을 움츠러들게 만들었다.
[바위를 주변에 둘러쳤다!]
[으하하하! 지붕도 완성이다!]
“휴우! 이제 좀 됐네.”
“빌어먹을! 이게 웬 개고생이야!”
그나마 오베른이 모닥불 주변에 바위를 움직여 방벽을 만들고, 로렌이 나뭇가지들을 옭아매어 지붕을 만들자 어느 정도 잠을 청할 만큼의 여건은 마련되었다.
“술이나 마시자!”
“좋지!”
[으하하하! 역시 남자의 로망은 술이다!]
[확실히 주인도 없으니 술이 당기긴 하군.]
카멜이 가방에서 꿍쳐 놓은 과실주 몇 병을 꺼냈다. 엘프들을 도와주고 보상으로 받은 과실주들이었다.
“캬아! 맛 좋다!”
“역시 엘프들이야! 이런 맛이라니!”
[목 넘김이 좋군.]
[쳇! 엘프 자식들, 과실주 하나는 일품이군. 으하하하! 인정해주지!]
각기 한 병씩 들고 과실주를 시음한 일행은 한결같이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렇게 왁자지껄 몇 모금씩 기울이던 일행은 이내 진중한 얼굴로 변하며 술병을 내려놓았다.
“내일까지 찾지 못한다면…….”
“천휘 녀석이 조만간 우리를 찾아올 텐데…….”
[그렇게 되면…….]
[…주인의 피리 소리는 너무 괴로워.]
모두들 은연중 천휘를 두려워했다.
특히 천휘의 피리에 의해 직접적인 충격을 여러 번 겪어본 로렌은 더욱 정도가 심했다.
로빈이나 카멜 역시 천휘가 두려운 것은 마찬가지다.
현실에서는 별로 그렇지 않았지만, 게임에서만큼은 유독 냉정하고 독한 면이 있는 천휘다.
만약 자신들 때문에 이번 계획이 실패라도 한다면… 그가 들들 볶는 것을 견딜 자신이 없었다.
“반드시 내일 찾아내야 해! 무슨 방도가 없을까?”
[이런 식으로 이 잡듯 뒤져 봐야 별 소용이 없다. 벌써 내 부하들이 여럿 목숨을 잃었다. 너희들 이방인의 냄새를 맡고 카이젠 산맥의 흉맹한 몬스터들이 몰려들고 있는 형국이야.]
로렌이 특유의 웃음까지 잃은 채 진지한 어조로 말하자 모두의 이목이 그에게로 집중되었다.
[드래곤 산맥으로 가자.]
“뭐, 뭐라고?”
“드래곤 산맥이 어떤 곳인지 알고나 하는 소리냐? 그 드래곤 산맥이라고! 드래곤 산맥!”
카이젠 산맥과 산줄기가 이어져 있다고는 하나, 드래곤 산맥과 카이젠 산맥의 악명은 차원이 달랐다.
카이젠 산맥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수많은 유저들의 사냥터로 전락했을 만큼 위험도가 많이 감수한 곳이고, 드래곤 산맥은 여전히 난공불락의 험지로 각인되어 있을 만큼 공포의 상징이었다.
[어차피 이곳에 있어봤자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설사 목숨을 잃는다 해도 단 한 마리의 거인만 잡으면 되는 것 아닌가. 나와 오베른, 그리고 다른 수하들 역시 부서진다 해도 주인의 권능으로 되살아날 수 있다. 두 사람 역시 이방인이기에 무한의 생명이 보장되어 있으니 한 번쯤 시도해볼 만하지 않은가?]
“흠… 확실히 그렇긴 하네.”
“이곳에서 죽치고 있어봐야 답이 나오는 상황도 아니긴 하지만…….”
드래곤 산맥이 주는 거대한 공포의 기운. 그러나 이곳 카이젠 산맥보다는 그곳이 더욱 가능성이 있었다.
[간만에 좋은 의견을 내놓았군, 활쟁이. 망설일 것이 뭐가 있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의기만이 우리로 하여금 뜻한 것을 이뤄줄 것이다.]
이어지는 오베른의 설득.
두 사람은 결국 서로 눈을 마주치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후우!”
드래곤 산맥.
결국 그 공포의 험지에 두 사람은 발을 들여놓을 수밖에 없었다.
* * *
꾸에에엑!
까아아악!
“…….”
“…….”
정체를 알 수 없는 기괴한 소리들. 게다가 온몸을 옭아매는 끈적끈적한 기운들.
카이젠 산맥을 따라 드래곤 산맥에 들어선 순간부터 두 사람은 말문이 닫혔다.
[으하하하! 나의 고향인 심연의 대지와 견줄 정도의 기운이군! 좋아, 좋아!]
[강력한 녀석들이 즐비해! 오랜만에 투지가 끓어오르는군!]
그에 반해 오베른과 로렌은 즐거움을 만끽하고 있었다.
사뭇 대조적인 일행의 모습이지만 모두의 눈에 긴장감이 어려 있는 것은 다르지 않았다.
스르륵-
챙!
화르륵!
잔뜩 긴장해 있는 일행 앞에 뭔가 이질적인 존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에 카멜은 무기를 꺼내들었고, 로빈의 양손에는 화염이 불타올랐다.
[아아, 걱정 마라. 내 부하야. 음음… 아, 그래?]
일행의 앞에 나타난 이는 로렌이 부리는 다크 엘프 강시 중 하나였다. 그는 로렌에게 다가가 눈빛으로 자신들이 찾아낸 결과물을 보고했다.
“뭐래?”
[으하하하! 드디어 찾은 것 같다! 내가 뭐랬나! 이곳에 있을 것이라 하지 않았나!]
“오오! 정말? 어딘데?”
카멜의 호들갑에 로렌이 당당하게 일행이 거닐고 있는 산 반대편을 가리켰다.
[으하하하! 저 산 너머에 울창한 침엽수들로 가려진 계곡의 입구가 있다고 한다. 그곳에서 거인의 발자국이 발견되었다.]
“…….”
“…….”
이 근방에서 발견된 줄 알고 기뻐하던 두 사람은 이어지는 로렌의 말에 얼굴이 사색으로 변했다.
“…역시 우리.”
“…죽는 거겠지?”
언뜻언뜻 보이는 대형 몬스터들의 실루엣.
카멜과 로빈은 지금 이 순간 천휘가 너무도 원망스러웠다.
콰앙!
“윽! 뭐가 이렇게 힘이 센 거야!”
“이 바보야! 녀석은 변강쇠와 같은 다크 미노타우로스야! 변강쇠 녀석 얼마나 힘이 센 줄 몰라서 그래! 부딪치지 말고 피해!”
“그러니까 그게 말처럼 쉽냐고!”
로빈 일행은 채 얼마 가지 않아 드래곤 산맥 초입에 서식하는 몬스터 무리와 조우했다.
5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체구를 지닌 채 잘 벼려진 거대한 배틀액스를 들고 있는 다크 미노타우로스.
체구는 작지만 민첩한 몸놀림으로 쉬지 않고 투창을 내던지는 잿빛 비늘 일족 리자드맨 전사.
마치 전사와 궁수의 조합처럼 근거리 공격과 원거리 공격이 잘 조합된 두 몬스터 무리는, 과거에도 함께 드래곤 산맥으로 들어서는 이방인들을 상대했던 듯 유기적으로 움직이며 로빈 일행을 괴롭히고 있었다.
[으하하하! 감히 이 몸에게 투창 공격을 해? 이 몸의 광속과도 같은 화살로 모조리 꼬치로 만들어주지! 데몬 스피어(Demon Spear)!]
[하하! 덩치만 크다고 해서 강하다는 보장은 없지! 오늘 내가 너희들에게 신천지를 보여 주마! 드래곤 스크류(Dragon Screw)!]
카멜과 로빈이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음에도, 로렌과 오베른은 마치 놀이동산에 놀러온 아이들처럼 기쁜 표정으로 몬스터 무리를 헤집고 다녔다.
오베른은 철저하게 다크 미노타우로스를 상대하며 녀석들을 하나 둘 처치해나갔고, 로렌은 신기에 가까운 궁술을 발휘해 멀리서 투창을 내던지는 잿빛 비늘 일족 리자드맨 전사를 요격했다.
스윽-
음메에에!
거기에 더해 닌자거북들은 수장 레오나르도를 중심으로 2인 1조를 이뤄 다크 미노타우로스들을 암습했다.
뛰어난 암살자인 그들은 무리하게 다크 미노타우로스의 심장이나 머리를 공격하지 않고 발목을 공격해 움직임을 제한시켰다.
그 정도만으로도 녀석들을 상대하는 오베른이나 카멜에게는 충분할 정도의 여유를 가지게 만들 만큼 효과적이었다.
“이러다 날 새겠다! 젠장!”
아직 로렌이 가리킨 산을 넘지도 못한 상황이었다.
이제 얼마 지나지 않으면 약속했던 3일의 기한이 지나버린다. 어떻게든 그 전에 산을 넘어 거인의 겨드랑이 털을 확보해야 했다.
[흠… 듣고 보니 이런 곳에서 시간을 지체할 상황이 아니다, 활쟁이.]
[으하하하! 네 말이 맞다, 칼쟁이! 모두 뒤로 물러나! 내가 길을 열겠다!]
[무슨 소리! 내가 길을 연다! 활쟁이 네놈은 내 보조나 맞춰라!]
[이 빌어먹을 칼쟁이가 누구보고 보조를 하라는 거야! 네놈의 무딘 칼로 이 소 대가리와 도마뱀 대가리 녀석들을 일거에 쓸어버릴 수 있을 것 같으냐!]
서로 협력하면 더욱 손쉽게 해결할 수 있는 일을 가지고 둘은 끝내 말다툼을 벌였다.
하지만 둘의 말다툼은 로빈의 나지막한 한마디에 멈출 수밖에 없었다.
“천휘한테 연락을…….”
[칼쟁이! 왼쪽을 맡아라!]
[활쟁이! 너는 오른쪽이다!]
오베른의 검에 짙은 황금빛 오러 블레이드가 맺혔다.
그랜드 소드마스터의 경지에서 머물러 있던 그가 조금씩 소드엠페러의 경지를 엿보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듯, 그의 오러 블레이드 색깔이 찬연한 황금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로렌의 활 힐프리거에도 자욱한 검은 연기의 회오리가 깃들기 시작했다. 평소 때의 웃는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명사수의 진중한 얼굴이 자리하고 있었다.
[드래곤 토네이도(Dragon Tornado)!]
[데몬 이터(Demon Eater)!]
길을 열기 위한 둘의 최강 스킬이 치열했던 전장을 휩쓸었다.
오베른의 클레이모어에서 뿜어져 나온 드래곤 형상의 회오리바람은 몬스터 무리를 나가떨어지게 만들었고, 로렌이 만들어낸 짙은 어둠은 몬스터 무리를 마계의 구렁텅이로 사라지게 만들었다.
“…이럴 힘이 있었으면 진작 했어야지!”
둘의 강력한 콤보 공격에 카멜이 버럭 하며 소리쳤다.
[으하하하! 언제나 영웅은 마지막에 오는 법!]
[이런 자식들을 상대로 이런 기술은 사치다!]
어느 하나 제대로 된 정신이 박혀 있지 않은 빌어먹을 강시들.
로빈과 카멜의 정신은 점점 더 황폐해져 가고 있었다.
“헉헉! 더 이상은 못 뛰겠어!”
“젠장! 이래서 마법사들이 싫다니까! 얼른 업혀!”
“헉헉! 현실에서는 내가 너보다 더 체력 좋거든! 그럼 실례하마!”
카멜은 숨을 헐떡이는 로빈을 등에 업고 재빠르게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런 그들을 1미터 크기의 날렵한 몸체를 지닌 새 수백 마리가 뒤쫓고 있었다.
“그러게 왜 가만히 있는 새는 건드린 거냐고!”
[으하하하! 간만에 새 한 마리 잡아먹을 요량이었지! 사실 요새 온 산맥을 뒤지느라 요기를 제대로 못하지 않았나!]
“너 강시거든!”
[으하하하! 습관이야, 습관!]
“으으으!”
사건의 발단은 역시나 로렌이었다.
마치 타조처럼 두 발로 숲을 거닐고 있는 새 한 마리를 발견한 그는, 오랜만에 포식을 하겠다며 화살로 새를 공격했다.
하지만 그 새는 놀랍게도 부리로 로렌의 화살을 낚아챘고, 로렌은 녀석을 죽이기 위해 또다시 화살을 날렸다.
문제는 그 이후에 벌어졌다. 기운을 머금고 나아간 로렌의 화살이 새의 날갯죽지를 꿰뚫자 녀석은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질렀다.
이윽고 나타난 수백 마리의 새 무리. 이름조차 알 수 없었지만 녀석들은 강했다.
오베른의 클레이모어를 막아내는 단단한 부리, 카멜의 공격을 회피해내는 유연한 몸놀림, 거기에 더해 녀석의 발톱에서는 치명적인 독까지 새어나왔다.
또한 전투 능력도 좋아 일행으로 하여금 결국은 도망칠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조금만 더 가면 산을 넘을 수 있다.]
조금이라고는 하지만 산 너머로 넘어갈 수 있는 능선은 여전히 멀었고, 오르는 길은 험준했다. 게다가 등 뒤에는 칙칙 울음소리를 내며 추격하는 새 무리까지있었다.
극단적으로 치닫는 최악의 전개!
[으하하하! 빌어먹을 새 대가리들! 이거나 먹어라! 데몬 애로우(Demon Arrow)!]
칙칙!
로렌의 공격으로 더욱더 빨라지는 새들의 추격 속도를 보며, 로빈은 진심으로 저 빌어먹을 강시 녀석을 죽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도, 도착했다!”
[얼른 비켜라, 이방인!]
“히익!”
“뭐, 뭐 하려고!”
로렌과 오베른에 이어 로빈을 업은 카멜이 능선에 도착했다. 그러자 오베른은 자신의 거대한 클레이모어를 양손으로 거머쥔 채 새 무리가 올라오는 경사면을 두드렸다.
[드래곤 크레이터(Dragon Crater)!]
콰아아앙!
오베른의 클레이모어가 땅을 파고들자 산맥을 뒤흔드는 충격음이 울려 퍼졌다. 그리고는 땅이 갈라지며 거대한 파편들이 경사면을 따라 새 무리를 향해 굴러가기 시작했다.
“오오! 굿 아이디어!”
“생각보다 똑똑하잖아!”
그동안 오베른을 무식하다 여겼던 둘은 훌륭한 계책으로 새 무리를 쫓아내자 그가 다르게 보일 정도였다.
[어라? 이럴 줄 몰랐군. 난 이곳에 구멍을 뚫어 녀석들을 그 안에 빠트릴 생각이었는데 말이야.]
휘청!
“그럼 그렇지.”
“…하아! 최고다, 진짜.”
이어지는 오베른의 말에 두 사람은 조금 전까지 가지고 있었던 생각이 얼마나 큰 착오였는지 알게 되었다.
“어쨌든 저건 임시방편에 불과해. 어서 움직이자! 거인 녀석들은 어디 있어?”
[으하하하! 바로 저기다!]
로렌이 가리킨 방향에는 작은 계곡의 입구가 보였다.
거인들이 그 안에서 살고 있다고 보기 어려울 만큼 계곡의 입구는 작았다.
“저렇게 조그마한 계곡에 거인들이 살고 있다고?”
[으하하하! 거인들이라고 해봐야 이곳 드래곤 산맥에서는 약자에 불과하지. 때문에 저렇듯 비좁은 곳에서 서식하는 것이고.]
“뭐야? 네가 그런 건 또 어떻게 아는데?”
[그저 느낌? 으하하하! 내 느낌은 틀리는 법이 없지!]
“…잘났다그래.”
일행은 결국 로렌이 가리키는 계곡의 입구를 향해 빠르게 전진했다.
“명심해. 단 한 녀석만이라도 잡으면 곧바로 돌아가는 거야. 괜히 다른 녀석들까지 잡으려고 설치지 마!”
[으하하하! 알았다니까 그러네.]
[이방인 자네의 말은 충분히 알아들었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 왜 눈빛은 피하는 건데!”
천휘가 아니면 도저히 제어가 불가능한 녀석들. 로빈과 카멜은 그저 한숨만 푹푹 내쉴 뿐이었다.
[내가 앞장서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베른이 앞으로 나서자 든든했다. 소드엠페러의 경지를 넘보는 최강의 기사가 아닌가.
일행은 오베른을 필두로 계곡 안으로 들어섰다.
[띠링! 미발견 필드 ‘거인의 계곡’을 발견하셨습니다.]
[일주일 동안 경험치 150%, 아이템 드롭률이 150% 상승합니다.]
졸졸졸.
계곡 안은 시냇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릴 만큼 조용하고 평온했다. 하지만 포악한 거인들이 서식하는 곳이니만큼 긴장을 늦출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우르릉! 콰앙!
“…갑자기 웬 날벼락이야?”
계곡의 안쪽에 떨어진 벼락.
갑작스런 벼락의 출현에 로빈과 카멜의 얼굴이 잔뜩 굳어졌다. 반면, 오베른과 로렌의 얼굴에는 희색이 돌고 있었다.
[나 먼저 가지!]
[무슨 소리야! 내가 먼저다! 으하하하!]
“야! 우릴 두고 가면 어떡해!”
“같이 좀 가자고!”
이렇다 할 말도 없이 전방으로 내달리는 오베른과 로렌을 보며 로빈과 카멜도 부리나케 그 뒤를 따랐다.
[으하하하! 거인들의 천국이구나!]
[모조리 내 밥이다!]
“허어억!”
“제, 젠장!”
굽이치는 계곡에서 모퉁이를 돌자 수십, 아니 수백의 거인들이 삼삼오오 모여 서로 간의 힘을 겨루고 있었다.
다크 미노타우로스에 비견되는 거대한 체구.
하지만 다크 미노타우로스처럼 무식하게 근육만 발달한 것이 아니라, 잔근육이 발달해 움직임도 민첩했다.
게다가 녀석들의 양손에 무기를 들지 않고 있는 것으로 봐서는 박투술을 즐기는 듯했다.
우오오오!
로빈 일행의 출현에 거인들이 계곡이 떠나가라 함성을 내질렀다. 침입자에 대한 경고의 표시임과 동시에 호승심을 끌어올리기 위한 일종의 의식인 듯했다.
“…우리는 그냥 뒤로 물러나 있을까?”
“…그러는 게 좋겠지?”
본래 카멜과 로빈은 유저들 중에서도 최고의 실력을 지닌 이들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의 그들은 그저 나약한 이방인에 지나지 않았다.
거인들의 평균 레벨은 350.
리버훌 성국에 있는 거인의 섬도 길드 단위가 아니면 사냥이 불가능할 정도로 위험한 곳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보기에 거인의 섬보다 이 거인의 계곡이 훨씬 더 위험해 보였다.
적어도 거인의 섬은 넓은 범위에 거인들이 흩어져 있었지만, 이곳 거인의 계곡은 아주 비좁은 공간에 수백의 거인들이 무리를 이루며 돌아다니는 이유에서였다.
[타앗!]
[으하하하!]
상대가 350레벨의 거인들이건 말건, 오베른과 로렌은 호기롭게 녀석들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거인 녀석들 역시 만만치 않은 이들이었다. 이제껏 모든 몬스터들을 우후죽순 쓰러트리던 오베른의 공격을 가볍게 양팔을 교차하는 것만으로 막아낸 것이다.
우오오오!
찌릿찌릿.
게다가 한 거인은 양손에 벼락을 생성시켰다. 말로만 듣던 스톰 자이언트(Storm Giant)인 모양이었다.
녀석은 양손에 생성시킨 벼락을 후방에서 기회를 엿보던 로빈과 카멜에게 내던졌다.
“저런 사기가 어디 있어! 세상 모든 파멸을 막아낼 수 있는 절대의 마나여! 파멸로부터 나를 보호하라! 앱솔루트 실드(Absolute Shield)!”
“젠장! 카오스 실드(Chaos Shield)!”
스톰 자이언트의 벼락을 방어하기 위해 두 사람은 펼쳐 낼 수 있는 최고의 방어 마법을 펼쳤다.
콰아앙!
제법 묵직한 충격음.
다행히 두 사람이 겹쳐 놓은 방어막에 녀석의 벼락은 소멸되고 말았다. 문제는 녀석이 연거푸 벼락을 뿌려 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크윽! 로렌! 저 녀석 좀 어떻게 해봐!”
[으하하하! 생각보다 이 녀석들 강한데?]
카멜의 외침에 로렌이 조금은 벅찬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오베른과 로렌으로서도 한꺼번에 달려드는 거인 수백 마리를 상대로는 힘에 부칠 수밖에 없었다. 아니, 오히려 현저하게 밀리고 있는 형국이었다.
“천휘한테 죽기 싫으면 한 놈만 족쳐!”
[…이방인의 말, 처음으로 끌리는군.]
[…그러게 말이야. 칼쟁이, 내가 화살로 겨냥하는 놈만 쳐라! 이방인, 너희들은 그놈에게서 겨드랑이 털을 뽑아내고!]
처음으로 마음이 맞은 이들!
그들은 순식간에 거인 한 마리를 처치하고 겨드랑이 털을 뽑아냈다.
그러나 그들은 이내 거인들에게 둘러싸여 차디찬 시체가 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