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흰 고래 라푼
눈보라 수염 일족 트롤의 침략으로 켈리만 마을은 더 이상 사람이 살지 않는 죽음의 마을이 되고 말았다.
유일하게 살아남은 벤너는 풀숲에 숨어 지인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똑똑히 목격했다. 여느 아이들 같았으면 그것만으로도 정신 장애를 일으키기에 충분했지만, 벤너는 심지가 무척이나 굳은 아이였다.
“이 언덕을 넘어가면 그 흰 고래의 동굴이라고?”
“응. 하지만 녀석은 무척이나 교활한 녀석이라 그곳에는 눈보라 수염 일족의 마을이 자리하고 있어. 녀석들을 모두 처치하지 않는 이상 그 동굴로 들어갈 수 없어.”
“흠… 그렇단 말이지.”
눈보라 수염 일족 트롤을 모두 처치하고 나서 흰 고래를 찾아간다면 너무 시간이 많이 소요되었다. 만에 하나라도 그사이에 켈리만의 주민들이 목숨을 잃게 되기라도 한다면 퀘스트는 실패로 돌아가고 말 것이다.
“로즈란, 네 마법으로 녀석들을 일거에 몰살시킬 수는 없는 거야?”
[절 뭐로 보시는 거예요? 시간만 충분하다면 그까짓 녀석들쯤이야 모조리 처치할 수 있어요.]
“그래? 그렇다면 한번 해봐. 카이젠 녀석이 시간을 버는 동안 네가 마법을 펼쳐. 카이젠은 마법이 펼쳐지는 순간에 맞춰 아공간으로 보내버리면 그만이니까.”
천휘의 지시에 로즈란이 지팡이를 세게 움켜쥐었다.
그녀의 손에 들린 지팡이는 새싹의 지팡이라는 유니크 지팡이였다.
그것은 카이젠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에게도 학살자의 검이라는 새로운 유니크 검을 하나 쥐여 준 것이다.
그것은 흰 고래 라푼에 대한 테크토의 설명 때문이었다.
‘흰 고래 라푼은 마의 바다라 불리는 이곳 피오르해에서도 최상위에 속하는 마물이다. 고서에 의하면, 대왕 오징어 크라켄과 정체를 알 수 없는 리바이어던이라는 두 마물과 함께 흰 고래 라푼은 피오르해의 왕으로 군림하고 있다고 한다. 추정 등급은 S급이고 최소 레벨은 500일 거다. 보스 몬스터 중에서도 상위에 속하는 녀석인 게지. 조심해, 아우. 아무리 강한 아우라고 해도 녀석을 사냥하려면 목숨을 내놔야 할 거야.’
테크토의 말이 사실이라면 천휘를 비롯한 두 강시가 힘을 합한다고 해도 녀석을 처치하는 것은 요원한 일이었다. 시간이 넉넉하다면 유저들을 끌어 모아 레이드를 펼쳤겠지만, 지금은 그럴 수도 없는 일이었다.
결국 천휘로서는 아공간을 뒤져 최고의 아이템들로 카이젠과 로즈란을 장비시키는 것만이 유일한 대비책이 될 수밖에 없었다.
로즈란은 천휘에게 받은 새싹의 지팡이를 쥐고 눈을 감으며 진언을 읊기 시작했다. 이제껏 위력이 약하고 단발적인 저서클의 마법을 주로 사용했던 그녀가 8서클의 최고위 마법을 펼치려는 심산이었다.
“카이젠, 녀석들의 주위를 분산시켜.”
[알겠습니다.]
천휘의 명령에 카이젠이 빛살보다 빠르게 눈보라 수염 일족 마을로 쇄도했다. 천휘와 보조를 맞추지 않는 상황이라면 그의 움직임은 가히 벼락과도 같았다.
크워어엉!
카이젠의 침입에 눈보라 수염 일족 트롤들이 마을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마을이라고 해봐야 그저 나뭇가지를 조악하게 쌓아 만든 보금자리일 뿐이었다.
[주인님께서는 주의를 분산시키라고 하셨지만…….]
카이젠은 눈보라 수염 일족 트롤들의 공격을 피해내며 마을 안으로 향했다. 그러자 나뭇가지 더미 안에 있던 트롤들까지 모조리 튀어나와 카이젠은 순식간에 녀석들에게 포위되고 말았다.
“저 형, 괜찮을까?”
“당연하지. 그보다… 너 이 자식, 계속 싸가지 없이 반말할 거냐? 계속 말꼬리 줄이면 재미없을 줄 알아.”
그렇게 천휘가 벤너와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는 사이, 감겼던 로즈란의 두 눈이 빛을 발했다.
“카이젠! 준비 끝났다! 이제 돌아와!”
[기다리십시오, 주인님!]
천휘의 지시에 카이젠이 학살자의 검을 양손으로 거머쥐며 하늘 높이 뛰어오르더니, 그대로 땅으로 푸욱 꽂아 넣으며 외쳤다.
[라그나 퀘이크(Ragna Quake)!]
콰아아앙!
카이젠이 꽂아 넣은 학살자의 검을 중심으로 거대한 지진이 일어났다. 오베른의 드래곤 크레이터와 비슷한 계열의 스킬이었지만, 그것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위력이 대단했다.
순식간에 균열을 일으키는 지반.
그리고 지진의 여파로 온몸이 마비되어 허우적거리고 있는 눈보라 수염 일족 트롤들.
“카이젠 역소환!”
그사이 카이젠이 천휘의 아공간으로 되돌아갔다.
[하늘을 떠도는 전자의 입자들이여, 모든 것을 무로 되돌리는 벽력의 기운이여, 이곳에 머무는 죄악의 근원을 씻어낼지니, 썬더 스톰(Thunder Storm)!]
우르릉! 콰앙!
콰앙! 콰앙!
카이젠이 역소환된 눈보라 수염 일족 마을에 거대한 벼락의 폭풍이 일기 시작했다.
하늘을 울리는 벼락과 함께 땅을 뒤흔드는 벽력이 마을을 뒤덮으며, 마을의 모든 것을 깨끗이 지워나가기 시작했다.
“과연 로즈란이군!”
썬더 스톰의 어마어마한 위력을 직접 눈으로 감상하며 천휘는 작은 희열을 느꼈다. 한 방으로 모든 것을 쓸어버리는 로즈란의 마법은 그 자체만으로도 아름답기 짝이 없는 예술의 향연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름다워!”
미를 보는 기준은 아이나 어른이나 같은 모양인지 벤너 역시 탄성을 터트렸다.
그렇게 두 사람이 감탄에 감탄을 하고 있을 무렵, 눈보라 수염 일족 마을을 뒤덮던 벼락이 조금씩 수그러들기 시작했다.
[어땠어요, 주인님?]
수그러드는 벼락과 동시에 로즈란이 농염한 표정으로 천휘에게 다가왔다. 종종 잊을 때도 있지만, 그녀는 하이 엘프 퀸으로서 살아생전 요염함을 뽐내던 여인이었다.
“죽이는데?”
[호호! 감사해요, 주인님.]
천휘의 칭찬에 로즈란은 간드러지는 웃음과 함께 그의 품에 안겼다. 언제부터인지 그녀는 이렇듯 자주 천휘의 품에 안기는 버릇이 생겨 버렸다.
“자, 그럼 이제 진짜 적을 상대해보실까?”
폐허가 되어버린 눈보라 수염 일족 마을. 그 안에서 드러나는 거대한 동굴의 입구.
암흑으로 물든 그 동굴의 입구를 보며 천휘가 다소 긴장한 어투로 중얼거렸다.
마의 바다 피오르해의 제왕 흰 고래 라푼.
드디어 녀석과 조우할 시간이었다.
* * *
[띠링! 미발견 던전 ‘참회의 동굴’을 발견하셨습니다.]
[일주일 동안 경험치 150%, 아이템 드롭률이 150% 상승합니다.]
“참회의 동굴?”
조금은 낯설게 느껴지는 던전 이름에 천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주민들을 잡아먹는 식인 고래가 사는 곳이라면 참회가 아니라 참혹, 혹은 참살이 더 어울리는 이름이 아닌가.
[왜 그러세요, 주인님?]
“아무것도 아냐. 일단 이 동굴을 따라 쭉 가보자. 벤너는 강쇠의 품에서 떠나지 말고.”
“응, 형.”
어떤 위험이 도사릴지 알 수 없는 곳에서 벤너를 보호하며 움직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천휘는 카이젠과 로즈란 말고도 혹시 몰라 데려온 변강쇠를 소환해 벤너의 보호를 맡겼다.
[전방에 무리가 나타났습니다.]
선두에서 걷던 카이젠의 말에 천휘는 재빨리 변강쇠로 하여금 벤너를 감싸도록 명했다.
“어떤 녀석들이야?”
[비린내가 심하게 나는 것으로 봐서는…….]
“비린내? 그럼 또 멀록?”
[멀록과 같은 날파리들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보다 훨씬 강력한 녀석들입니다. 굳이 비유를 하자면… 심연의 밀림에 서식하는 중급 마수 정도는 되는 것 같습니다.]
카이젠의 설명에 천휘가 크게 놀랐다.
“중급 마수? 비린내라면 어인일 텐데… 어인이 중급 마수 수준이라 이거지?”
[그렇습니다.]
중급 마수에 버금가는 힘을 지닌 녀석들이 무리를 형성해 나타난다면, 제아무리 일행이 지닌 전력이라 해도 꽤나 많은 시간이 소요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되면 켈리만 마을의 NPC 구출은 필패였다.
“젠장!”
이대로 전방의 무리를 상대할 수는 없었다.
시간을 아끼자면 녀석을 피해 움직여야 하는데 그럴 수도 없었다.
동굴은 커다란 입구에 비해 그 통로가 좁았다.
천장은 높았지만 그뿐이었다. 천장이 높다고는 해도 뛰어올라 무기를 휘두르면 충분히 닿을 높이였다.
도저히 피할 수가 없는 환경이었다.
“로즈란, 혹시 녀석들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천휘는 결국 가장 다재다능한 로즈란에게 조언을 구했다.
[글쎄요. 카이젠의 말대로 중급 마수 정도라면 마나에도 민감하게 반응해서 하이드 마법을 펼친다고 해도 들킬 것 같은데. 천장의 높이가 낮지만 않다면 플라이 마법으로 피할 수도 있었을 텐데… 죄송해요.]
로즈란으로서도 방법이 없었다.
넓은 전장이었다면 충분히 방법이 있었겠지만, 환경의 제약이 있는 던전 안에서는 그러한 방법들이 대부분 통용되지 않았다.
“피할 수 없다면… 지금 이 순간을 즐겨야겠지. 카이젠, 녀석들을 모조리 처치하면서 움직인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주인님.]
천휘의 선택은 정면 돌파였다. 시간이 넉넉하다면 조금 더 여러 가지 계책들을 논의했겠지만, 지금은 그러한 시간도 아까웠다.
단 하루! 하루 안에 켈리만의 주민들을 구출해내야 한다.
“이 동굴이 무너지지 않는 선에서 최선을 다해라, 카이젠. 내 걱정은 하지 말고.”
[기대에 부응하겠습니다.]
이제껏 천휘는 자신의 무력 향상을 위해 카이젠의 힘을 최대한 아꼈다. 강대한 적을 상대할 때는 자신이 항상 앞장서서 싸웠고, 수많은 몬스터들을 상대할 때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지금은 긴급 상황이다. 얼마나 깊을지 가늠할 수 없는 마당에 무작정 고집을 부릴 수는 없었다.
카이젠의 기세가 변했다. 억눌려 있던 폭군의 성정이 되살아난 것이다.
“…이거 내가 잠들어 있던 괴물을 깨운 거 아냐?”
[그럴지도요…….]
바라보는 것조차 위험스럽게 느껴질 정도의 기세.
천휘는 뭔가 불안한 기분이었다.
* * *
카악! 카악!
“…상어냐? 아니지. 상어 인간이라고 해야 하나?”
[모양새하고는. 쯧쯧!]
일행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 몬스터는 이제껏 『오벨리스크』에서 공개되지 않은 샤크맨이었다.
상체는 거대한 상어의 형상을 하고 있었지만, 팔다리가 달린 것이 육지에서도 활동할 수 있는 어인의 한 무리인 듯했다.
[으흐흐!]
그런 샤크맨을 바라보며 카이젠은 기괴한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는 천휘의 명령이 채 떨어지기도 전에 샤크맨을 향해 쇄도했다.
샤크맨의 무기는 거대한 삼지창이었다.
3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체구와 오우거를 연상시키는 우락부락한 근육, 거기에 더해 크고 날카로운 이빨이 무성한 거대한 아가리까지. 녀석은 역시나 중급 마수와 비견될 만했다.
[으하하하! 모조리 죽여주마!]
로렌을 연상시키는 웃음과 일갈.
어느새 그의 검에는 검붉은 오러 블레이드가 맺혔다.
카악! 카악!
카이젠의 쇄도에 선두에 서 있던 샤크맨 하나가 삼지창을 위에서 아래로 내리그었다.
삼지창에 실린 힘이 어찌나 강맹한지 그 주변으로 풍압이 일어나는 듯했다.
콰아아앙!
동굴이 뒤흔들릴 정도의 강력한 충격.
그러나 카이젠은 삼지창의 충격이 닿는 곳에 자리하지 않았다. 어느새 샤크맨의 단단한 가죽을 꿰뚫고 대가리를 잘라내고는 샤크맨 무리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광란의 칼부림.
웅웅!
학살자의 검이 카이젠의 움직임과 공명하며 짙은 울림까지 만들어내고 있었다.
“저 자식, 그동안 나한테 당한 화풀이하고 있는 거 아냐?”
정확하게 샤크맨의 대가리만 잘라내며 샤크맨들을 농락하고 있는 카이젠을 바라보며 천휘가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말이 나와서 하는 건데요. 카이젠이 아공간에서 주인님 자꾸 씹…….]
[다 들리거든! 이 망할 할망구야!]
[꺄아악! 누가 누구보고 할망구래! 죽어!]
“…….”
본의 아니게 전투에 합류한 로즈란은 블링크 마법을 연이어 전개하며 카이젠에게 다가갔다.
그녀의 양손에는 어느새 초고열의 화염이 이글거리는 5서클 마법 플레임 핸드(Flame Hand)가 펼쳐지고 있었다.
[죽어!]
[누가 먼저 망발을 지껄였는데!]
카이젠과 로즈란은 서로 드잡이질을 펼치면서도 빠르게 샤크맨들을 처치해나갔다.
로즈란의 플레임 핸드를 카이젠이 절묘하게 피해내면 여지없이 그곳에 샤크맨이 자리하고 있었고, 반대로 카이젠이 공격을 감행하면 로즈란이 서 있던 자리에 샤크맨이 서 있었다.
결국 서로를 향한 공격이 매번 무위로 돌아가면서 죽어나는 것은 샤크맨들이었고, 덕분에 전장은 빠르게 정리되어갔다.
“나 저 형이랑 누나 무서워.”
“…내가 봐도 저 연놈들이 무섭다. 하아!”
그 모습을 지켜보며 두려움에 떨고 있는 벤너의 말에 천휘 역시 한숨을 내쉬며 동조했다.
잊고 지낼 때가 많지만, 저 둘은 마법과 검의 절대자들이었다.
* * *
벤너에게서 퀘스트를 받고 대략 18시간이 흘렀다.
대충 시간을 가늠해보니 앞으로 이곳 시간으로 2시간 후에 현실에서 정각 6시가 된다.
결국 천휘는 오늘도 날을 새고 출근을 해야 하는 처지가 된 것이다.
‘그나마 오늘은 토요일이니 조금 낫겠지.’
오전 수업만 있는 토요일은 학생에게나 교사 모두에게 즐거운 날이었다.
문제는 아무리 전진을 해도 흰 고래는커녕 샤크맨만 부지기수로 모여든다는 것이었다.
다행히 길이 한 갈래로만 이어져 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천휘는 벌써 퀘스트를 포기하고 말았을 것이다.
“이러다가 흰 고래 녀석이 여자들을 모두 먹어치우겠어.”
동굴을 걷다가 천휘가 무심코 말을 내뱉었다. 그만큼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으아앙! 엄마!”
천휘의 나지막한 말에 벤너가 울음을 터트렸다. 첫인상은 제법 강단 있는 소년인 것 같았지만, 역시나 애는 애였다.
음메에에!
벤너가 울자 그를 안고 있는 변강쇠도 울부짖었다.
녀석이 왜 우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녀석의 울부짖음에서 진한 슬픔이 느껴지는 것으로 보아, 벤너의 슬픔을 공유하고 있는 듯했다.
“…로즈란, 다시 한 번 마법을 펼쳐서 흰 고래 녀석의 위치를 찾아봐. 불가능한 퀘스트가 부여되었을 리는 없어.”
[…알겠어요, 주인님.]
천휘의 지시에 로즈란이 힘없이 말했다. 그녀 역시 벤너의 슬픔을 느끼고 있는 듯했다.
[모습을 드러내라, 흰 고래야! 주변의 모든 것을 내 앞에 비출지니, 옵저버(Observer)!]
간절한 소망을 담아 로즈란이 마법을 전개했다.
이윽고 전면에 그려지는 주변의 상황들. 그중에서도 유독 밝은 빛을 토해내는 점이 있었다.
[있어요! 드디어 찾았어요!]
밝은 빛을 토해내는 점을 바라보며 로즈란이 소리쳤다.
“거리는?”
로즈란의 외침에 천휘가 빠르게 물었다.
[앞으로 10분 정도만 걸으면 될 것 같아요. 문제는…….]
“나도 알아. 녀석의 주변에 샤크맨이 바글거리는 거겠지. 상관없어! 최후의 일전이다. 강쇠, 너는 벤너를 보호하면서 마찬가지로 켈리만 마을의 여인들을 이끌고 동굴을 빠져나가.”
음메에에!
둥둥!
천휘의 지시에 변강쇠가 고릴라처럼 가슴을 두드리며 울부짖었다. 자신감을 나타내는 녀석만의 표현이었다.
“로즈란, 너는 말 안 해도 뭘 해야 하는지 알겠지?”
[호호! 걱정 마세요. 이번에는 최강의 화염 마법을 보여 드릴게요.]
그동안의 경험으로 샤크맨이 화염 마법에 취약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흰 고래 역시 그러리라는 보장은 없지만, 샤크맨들은 그녀의 강력한 화염 마법에 궤멸하거나, 혹은 그에 준하는 타격을 입을 것이 분명했다.
“우리는 처음부터 최강의 공격으로 녀석을 상대한다. 어쭙잖은 공격은 통하지 않을 거다.”
[걱정 마십시오. 최근에 새로 익힌 기술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천휘가 느끼기에 로즈란도 그렇고, 카이젠 역시 처음 음양마령강시가 되었을 때보다 훨씬 강해진 것 같았다.
엄청난 마법적 능력에 비해 신체적 능력이 취약했던 로즈란은 음양마령강시로 탈바꿈하면서 신체적 능력이 극대화되었다.
그에 반해 카이젠이 음양마령강시로 탈바꿈하며 얻게 된 것은, 강력한 몬스터들을 상대하며 그동안 미진했던 그 자신만의 검술을 한 단계 성장시켰다는 점이었다.
“최후의 만찬을 즐겨 보자!”
음메에에!
[충!]
[호호호!]
일행은 긴장된 얼굴로 10분을 걸었다.
이윽고 전방에 나타나는 거대한 구멍.
마치 블랙홀을 연상시킬 정도로 칠흑 같은 어둠이 새어나오는 거대한 구멍이었다.
“셋, 둘, 하나!”
구멍 안에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 알고 있는 천휘로서는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하고 싶지 않았다.
천휘의 카운트다운과 함께 일행은 곧바로 구멍 안으로 몸을 내던졌다.
“라푸우우우운!”
구멍 안의 공간은 흰 고래 라푼의 크기를 보여 주듯 상상을 초월하는 크기를 자랑했다.
마치 서울의 상암 월드컵 경기장을 연상시킬 만큼 거대한 공간.
그 공간의 중심에 흰 고래 라푼이 있었다.
뿌우우우우!
천휘의 부름에 흰 고래 라푼이 천장으로 물을 뿜어내며 울부짖었다.
[허공을 메우는 공기의 압박에서 벗어날지니, 레버테이션(Levitation)!]
흰 고래 라푼이 뿜어내는 물줄기가 일행에게로 날아오자, 로즈란이 재빨리 부유 마법을 펼쳤다.
순식간에 떨어지는 속도가 급감한 일행의 발밑으로 흰 고래 라푼이 뿜어낸 물줄기가 지나갔다.
“저기에 우리 엄마가 있어요!”
공간에 들어서자마자 엄마를 찾아낸 벤너.
과연 작은 돌무더기 공간에 수십 명에 달하는 여인들이 온몸에 상처를 안고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로즈란, 강쇠를 저쪽으로 보내! 그리고 나와 카이젠에게는 워터 워크 마법을 펼쳐 줘!”
흰 고래 라푼이 있는 공간에는 마치 호수처럼 물이 고여 있었다. 심해의 바닷물이 들어온 듯했다.
그런 라푼과 싸우자면 물 위를 자유롭게 걸을 수 있는 마법이 필요했다.
[워터 워크(Water Walk)!]
천휘의 지시에 로즈란은 자신을 비롯한 천휘와 카이젠에게 워터 워크 마법을 걸었다.
퐁!
무사히 수면 위로 착지한 천휘와 카이젠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흰 고래 라푼에게로 달려들었다.
“파멸의 휘장!”
천휘는 곧바로 모든 능력을 증가시켜 주는 파멸의 휘장을 전개했다.
모든 능력의 1.5배 증가!
천휘는 순간적으로 450레벨에 근접하는 엄청난 스탯을 보유하게 되었다.
[라그나 베일(Ragna Veil)!]
천휘에 이어 카이젠의 전신에도 보랏빛 마나가 뿜어져 나왔다. 더불어 그의 등에서 붉은색의 오망성이 빛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왼쪽!”
천휘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카이젠의 신형이 흰 고래 라푼의 왼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머리에서부터 꼬리까지 물경 300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크기.
도저히 상대가 불가능할 것만 같은 괴물이었지만, 카이젠과 천휘는 거침이 없었다.
두드려라! 두드리면 열릴 것이다!
천휘와 카이젠의 신형을 따라 흰 고래 라푼의 거대한 두 눈이 좌우로 움직였다.
녀석의 두 눈은 마치 둘을 한낱 날파리로 취급하는 듯 심드렁했다. 확실히 거대한 녀석이 보기에 둘은 날파리나 다름없었다.
뿌우우우우!
둘의 신형이 점점 다가오자 흰 고래 라푼이 울음을 터트렸다.
[띠링! 흰 고래 라푼의 울음으로 인해 10분간 모든 스탯이 10% 감소합니다.]
[띠링! 흰 고래 라푼의 울음으로 인해 이동속도가 30% 감소합니다.]
흰 고래 라푼의 울음은 천휘의 발목을 잡는 데 한몫 톡톡히 했다. 더불어 녀석의 울음으로 인해 수중에서 잠복하고 있던 샤크맨들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쳇! 일반 샤크맨이 아니라 샤크맨 전사쯤 되는 건가?”
흰 고래 라푼을 호위하듯 에워싸며 나타난 샤크맨들은 삼지창이 아닌 각양각색의 무기를 들고 있었다. 게다가 척 보기에도 단단한 푸른색의 비늘 갑옷을 입고 있어 방어력까지 뛰어난 듯 보였다.
‘녀석들은 로즈란에게 맡긴다. 나는 오로지 저 미친 고래 녀석만 공격하는 거다!’
“하앗! 파멸의 대지!”
샤크맨 전사들과 마주치기 직전, 천휘는 수면을 강하게 내리쳤다.
파멸의 대지는 바닥을 내려쳐 충격파를 주변으로 퍼트리는 스킬.
천휘의 스킬에 수면이 강하게 요동쳤다.
“하압!”
파멸의 대지를 전개하자마자 천휘는 하늘 위로 뛰어올랐다. 샤크맨 전사들이 요동치는 파도에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있을 때 흰 고래 라푼에게로 접근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천휘의 작전은 성공하지 못했다. 바다에서 태어난 샤크맨들에게 요동치는 파도는 아무런 제약이 되지 않은 탓이었다.
공중으로 떠오른 천휘를 향해 샤크맨 전사들이 일제히 뛰어올랐다.
수십에 달하는 샤크맨 전사들의 비상!
천휘는 공중에서 녀석들의 비상을 확인하며 기겁했다.
운신이 부자연스러운 허공.
공중에서 녀석들의 공격은 회피가 불가능한 것이었다.
“가엘론!”
샤크맨 전사들의 공격이 성공하기 직전, 천휘가 가엘론을 전개했다.
콰앙! 콰앙! 콰앙!
연달아 터져 나오는 충격음.
“크윽!”
중급 마수에 필적하는 샤크맨 전사들의 공격에 이제껏 위급할 때마다 천휘를 보호했던 가엘론의 방어막에 균열이 일기 시작했다.
급기야는 가엘론의 방어막이 버티지 못하자 천휘는 또다시 스킬을 전개했다.
“림다일!”
힘을 다한 가엘론의 방어막을 지지대 삼아 천휘는 림다일을 전개하고는 흰 고래 라푼이 버티고 서 있는 곳으로 도약했다.
그러나 샤크맨 전사들은 그곳에서도 버티고 서 있었다.
완벽하게 공중을 장악한 샤크맨 전사들.
천휘에게는 더 이상 빠져나갈 구멍이 없어 보였다.
“빌어먹을!”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자 천휘의 입에서 거친 욕지거리가 터져 나왔다.
그 절체절명의 순간! 천휘 자신조차도 잊고 있었던 마룡 오그하트의 가슴과 다리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다.
[띠링! ‘마룡 오그하트의 가슴’의 영향으로 샤크맨 전사들이 상태 이상 공포에 빠졌습니다.]
[띠링! ‘마룡 오그하트의 다리’의 영향으로 샤크맨 전사들이 상태 이상 공포에 빠졌습니다.]
10퍼센트 확률로 발동되는 공포 효과!
그것이 두 아이템에서 동시에 발동되며 천휘를 향한 샤크맨 전사들의 공격이 멈췄다.
“좋았어!”
뜻하지 않았던 행운에 천휘는 즐거워하며 쾌재를 불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후방에서 들려오는 로즈란의 음성에 그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
[모든 것을 불태우는 지옥의 화염이여, 세상을 재로 만드는 화신의 입김이여, 지옥의 업화를 이 땅에 내려 화염의 폭풍을 만들지니, 파이어 스톰(Fire Storm)!]
로즈란이 캐스팅을 끝내고 시전어를 읊었다.
이윽고 광범위하게 불어 닥치는 화염의 폭풍.
천휘는 몸을 잔뜩 웅크리며 온몸으로 화염의 폭풍을 받아냈다.
[저 미친 할망구!]
“이번 일 끝나고 보자, 로즈란!”
멀리서 아스라이 들려오는 카이젠의 음성.
천휘 역시 그와 같은 심정으로 크게 소리쳤다.
뿌우우우우!
열화와도 같은 화염의 폭풍이 지속되자, 급기야 흰 고래 라푼마저도 타격을 입었는지 긴 울음소리를 터트리며 등에 있는 숨구멍을 통해 분수를 뿜어냈다.
엄청난 양의 바닷물이 사방으로 뿜어지자 화염의 폭풍이 조금씩 잦아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미 샤크맨 전사들은 지속적인 화염 데미지를 입고 빈사 상태에 빠져 있었다.
[조심하세요, 주인님! 뇌전의 다발이여, 적을 섬멸하라! 체인 라이트닝(Chain lightning)!]
“이런, 미친!”
[미친 할망구! 진짜 이럴 거야!]
천휘와 카이젠이 뭐라 하건 로즈란은 또다시 마법을 전개했다. 그녀의 손에서 뿜어진 뇌전 다발이 빈사 상태에 빠진 샤크맨 전사들을 두드렸다.
순식간에 한 줌의 재로 변해 뇌전의 제물이 되어버린 샤크맨들.
그러나 뇌전 다발은 피아가 없어 천휘와 카이젠까지도 공격했다.
“크아악!”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카이젠은 상관없었지만, 천휘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전신을 찌릿찌릿 울리는 뇌전의 충격!
천휘로서는 버티기 어려운 고통이었다.
[주인님, 괜찮으세요?]
천휘의 비명에 그제야 로즈란이 그의 안부를 물었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크윽! 이번 일… 나중에 제대로 그 죄를 묻겠다.”
[히잉! 이러실 거예요? 전 주인님이 시키신 그대로 광역 마법을 펼친 것뿐이라고요.]
“…….”
로즈란의 변명에 천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냥 고래나 잡으시죠.]
“…그래야겠다.”
카이젠의 나지막한 말에 천휘는 로즈란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이제부터는 고래 잡을 마법이나 준비해. 오로지 고래만 잡아야 한다!”
[호호! 네!]
“…후우!”
로즈란의 싱글거리는 웃음이 너무도 거슬렸지만, 천휘는 한숨만 쉴 수밖에 없었다.
당장에라도 피리를 꺼내 그녀의 귀 바로 앞에다 몇 시간이고 불어주고 싶었지만, 지금 상대해야 할 적은 그녀가 아니라 흰 고래 라푼이었다.
뿌우우우우!
로즈란의 마법에 의해 샤크맨 전사들이 모두 바다에 수장되었다. 흰 고래 라푼은 이제 자신이 나서야 한다는 것이 귀찮은지 거대한 동체를 조금씩 움직이며 울음을 토해냈다.
“이제부터가 진짜다! 정신 바짝 차려!”
[충!]
더 이상 거치적거리는 샤크맨 전사들이 없으니, 천휘와 카이젠은 마음 놓고 흰 고래 라푼을 향해 공격을 퍼부었다.
콰앙!
퍼엉!
요란한 충격음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하지만 흰 고래 라푼은 아무렇지 않은 듯 그저 멀뚱멀뚱 둘을 바라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라그나 썬더(Ragna Thunder)!]
“파멸의 안식!”
연이어 터져 나오는 둘의 최강 기술들!
그러나 여전히 흰 고래 라푼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녀석에게는 둘의 공격이 그저 모기가 물듯 따끔한 정도에 지나지 않는 듯했다.
[지옥을 지키는 홍염의 성좌여, 지옥의 유황불을 이곳에 내리시어 당신의 손짓으로 눈앞의 적을 불태우소서! 헬파이어(Hellfire)!]
둘의 공격이 계속되고 있을 때, 드디어 로즈란의 캐스팅이 끝났다.
8서클 최강의 대인 마법, 헬파이어.
지옥의 유황불을 소환해 극열의 불길로 모든 것을 재로 만들어버리는 그 마법이 흰 고래 라푼의 머리를 강타했다.
뿌우우우우!
“좋았어!”
제아무리 녀석이라 해도 헬파이어는 꽤나 충격이었는지 고통에 찬 울부짖음이 동굴을 쩌렁쩌렁 울렸다.
“어어!”
그러나 좋은 것도 잠시, 천휘는 당황스러운 소리를 연발했다.
뿌우우우우!
흰 고래 라푼의 몸부림. 그것은 가히 경천동지, 그리고 천지개벽과도 같았다.
그 거대한 동체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잔잔하던 호수는 격렬하게 요동쳤고, 녀석이 터전으로 삼고 있던 동굴은 마치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흔들렸다.
음메에에!
“강쇠!”
때 아닌 자연재해에 켈리만 여인들을 이끌고 동굴을 빠져나가려던 강쇠가 처절하게 울부짖었다.
녀석은 천휘의 명을 이행하고자 수많은 마을 주민들을 마치 생선 꿰듯 줄에 꿰어 자신의 허리에 묶고 동굴 벽을 오르고 있었는데, 갑자기 동굴 벽이 흔들리는 바람에 더 이상 오르지 못하게 된 것이다.
“로즈란, 강쇠를 도와!”
결국 로즈란에게 강쇠를 도우라고 명했다.
로즈란은 켈리만의 여인들에게 무중력 마법을 걸어줬고, 강쇠는 동굴 벽이 흔들리는 와중에도 무사히 처음 일행이 들어섰던 구멍까지 오를 수가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천휘와 카이젠이었다. 둘은 흰 고래 라푼의 거대한 꼬리지느러미에 휘둘리고 있었다.
마치 코끼리가 꼬리로 파리를 쫓듯 녀석은 꼬리지느러미를 십분 활용해 둘을 공격하고 있었다.
뿌우우우우!
“피, 피해!”
게다가 녀석이 내뿜는 물줄기는 조금 전과는 확연히 다른 위력을 지니며 둘을 공격했다. 마치 침을 내뱉듯 소량의 바닷물을 내뿜음에도 불구하고 천휘와 카이젠에게는 무시무시할 수밖에 없었다.
콰앙! 콰앙!
흰 고래 라푼이 본격적으로 공격을 시작하자 천휘와 카이젠은 회피를 거듭할 수밖에 없었다.
감히 대적조차 할 수 없는 꼬리지느러미 공격! 거기에 갑자기 날아오는 물줄기까지!
로즈란의 헬파이어로 인해 광분하고 있는 녀석을 막을 방법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빠지직!
퍼엉!
설상가상으로 녀석의 움직임으로 인해 동굴의 천장까지 무너지기 시작했다. 천장을 지탱하던 돌 부스러기들이 떨어져 내리며 둘을 위협했다. 더 이상 버티다가는 목숨을 부지하기란 요원해 보였다.
‘이대로는 절대 녀석을 잡을 수 없어! 뭔가 타개책이 있어야 하는데.’
흰 고래 라푼의 피부는 마치 강철과도 같았다. 아니, 오히려 강철보다 더욱 단단했다. 때문에 제아무리 카이젠과 천휘의 공격이 강력해도 녀석은 그다지 타격을 입지 않았다.
반면, 녀석은 마법 공격에는 약한 면모를 보였다. 둘의 공격에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다가, 로즈란의 파이어 스톰이나 헬파이어에는 놀랄 만큼 격렬한 반응을 보였었다.
더불어 천휘가 녀석을 공격하며 알아낸 또 한 가지 사실은 녀석이 물줄기가 뿜어져 나오는 구멍에 관해서 지나칠 정도로 예민하게 반응한다는 것이었다.
‘밑져야 본전이지.’
이대로라면 녀석을 사냥하기는커녕 자신들이 죽을 판이었다. 어차피 죽을 것이라면 마지막 도박은 해봐야 한다는 생각으로 로즈란과 카이젠에게 영성으로 지시를 전달했다.
[둘 모두 잘 들어. 이대로는 죽도 밥도 안 돼. 그래서 이제부터 한 가지 도박을 해볼 참이야. 로즈란, 너는 파이어 랜스 마법으로 집요하게 녀석의 숨구멍을 공략해. 마법이 소멸되든 말든 계속해서! 그리고 카이젠은 기회를 엿보고 있다가 녀석의 눈을 공격해. 당연히 최강의 공격으로!]
천휘는 거기까지 둘에게 지시를 내렸다.
그 이후에는 자기 자신이 판단하고 움직여야 할 일. 굳이 둘에게 이야기할 필요는 없었다.
[파이어 랜스(Fire Lance)!]
천휘의 지시에 따라 로즈란이 쉬지 않고 파이어 랜스 마법을 전개했다. 8서클인 그녀로서는 5서클 마법인 파이어 랜스를 캐스팅 없이 시전할 수 있었다.
[하앗! 라그나 블라스트(Ragna Blast)!]
로즈란에 이어 카이젠도 행동을 개시했다. 연이어 강력한 스킬을 구사하며 비교적 피부가 얇은 녀석의 눈을 공략한 것이다.
제아무리 녀석이라 해도 눈은 급소였다. 눈을 방어하지 않고 공격을 허용한다면 그 고통은 엄청날 것임을 알기에, 한쪽 눈을 계속 감으면서 카이젠의 공격을 버텨 냈다.
그사이 천휘는 흰 고래 라푼 녀석의 사각지대에서 그 일련의 움직임들을 자세하게 살폈다. 그리고는 한 가지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다.
‘녀석이 숨구멍에서 물줄기를 뿜어낼 수 있는 간격은 빨라도 5초. 그 안에는 연사가 불가능해. 그 틈을 노려야겠어!’
천휘는 슬그머니 카이젠의 뒤로 움직이며 주변에 떠다니는 바윗조각 위로 올라섰다. 그리고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떨어지는 바윗조각들을 살폈다.
[파이어 랜스를 최대한 빠르게 전개해!]
천휘는 눈빛을 빛내며 영성으로 로즈란에게 지시를 내렸다. 그리고는 공중으로 뛰어올라 떨어지는 바윗조각들을 밟으며 위로, 위로 솟구쳤다.
그 후 마침내 70미터에 달하는 높이까지 도달했을 때, 로즈란과 눈을 마주치며 타이밍을 쟀다.
[파이어 랜스!]
천휘와 눈이 마주친 로즈란이 파이어 랜스를 전개했다.
당연히 흰 고래 라푼 녀석은 그것을 막기 위해 물줄기를 뿜어냈다.
[파이어 랜스!]
그러나 이후부터는 이전까지의 전개와 달랐다. 로즈란이 마나의 반발을 감수하면서까지 채 3초도 되지 않는 짧은 간격으로 다시 파이어 랜스를 전개한 것이다.
“림다일!”
로즈란의 파이어 랜스가 연이어 전개되자, 천휘가 그 틈을 타 딛고 있던 바윗조각을 발판 삼아 흰 고래 라푼의 숨구멍을 향해 날아들었다.
[라그나 블레이드(Ragna Blade)!]
그의 쇄도와 동시에 카이젠의 공격도 변모했다. 이전까지는 광역 스킬만 퍼붓던 그가 일점에 모든 것을 집중하는 라그나 블레이드를 전개한 것이다.
푸욱!
뿌우우우우!
퍼엉!
카이젠이 내지른 학살자의 검이 아주 미세하게 녀석의 눈꺼풀을 파고들었다. 아주 조금 파고들었을 뿐이지만, 그것만으로도 몸에서 가장 민감한 부위인 눈을 공격당한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큰 것이었다.
그러나 카이젠 역시 녀석의 꼬리지느러미 공격에 멀리 나가떨어졌다.
“파멸의 안식!”
카이젠의 공격으로 녀석의 주의가 눈으로 집중되어 있는 그 순간! 필살의 염원을 담은 천휘의 주먹이 숨구멍을 가격했다.
뿌우우우우!
조금 전과는 차원이 다른 끔찍한 울음소리!
그러나 천휘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온몸을 밀어 넣으며 숨구멍 안으로 비집고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가자 숨구멍이 꽉 조였다.
그 안에 끼이게 된 천휘는 아공간에서 재빨리 덩치가 큰 무기들을 꺼내 숨구멍 밑으로 내려 보냈다. 그리고 가장 거대한 그레이트 소드 하나를 꺼내든 후 하늘 위로 높이 추켜올렸다.
[나는 상관 말고 나를 피뢰침 삼아 여기에다 콜 라이트닝을 떨어트려! 녀석이 죽을 때까지!]
[하지만 그렇게 되면…….]
콜 라이트닝은 7서클 마법이지만, 전격 계열 중에서는 가장 강력한 대인 마법이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8서클 대인 마법인 헬파이어보다 강력한 위력을 발휘할 수도 있는 최강의 전격 마법이었다.
그런 콜 라이트닝을 피뢰침이 되어 온몸으로 받아낸다면, 당연히 천휘 자신도 무사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자신의 죽음으로 이 녀석을 잡을 수만 있다면 죽음도 불사할 수 있는 천휘였다.
[떨어트려! 어서!]
천휘의 강한 명령에 로즈란은 결국 못 이기는 척하며 콜 라이트닝을 전개했다.
우르릉! 콰앙!
“끄아악!”
뿌우우우우!
첫 번째 벼락이 떨어졌다.
과연 8서클 대마도사답게 그녀가 불러낸 벼락은 정확하게 천휘가 들고 있는 그레이트 소드 위로 떨어졌다.
벼락은 그레이트 소드를 타고 천휘를 지나쳐 숨구멍을 가득 메우고 있는 철제 무기들을 따라 흰 고래 라푼의 내부에까지 타격을 입혔다.
이전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울부짖음! 거기에 더해 녀석은 미친 듯이 날뛰기 시작했다.
“크윽! 이러다간 천장이 무너지겠어! 카이젠! 뭐 하고 있는 거야! 너도 이 검에다 라그나 썬더를 펼쳐!”
[주, 주인님… 그, 그랬다가는!]
“잔말 말고 얼른 움직이지 못해! 크윽!”
흰 고래 라푼의 계속되는 몸부림에 천휘는 몸이 짓눌리는 느낌이었다. 때문에 점점 숨구멍 깊숙한 곳으로 몸이 가라앉고 있었다.
[라그나 썬더(Ragna Thunder)!]
[콜 라이트닝(Call Lightning)!]
“끄아아악!”
뿌우우우우!
카이젠과 로즈란이 동시에 벼락을 떨어트리자 천휘의 고통은 2배로 늘어났다. 피뢰침 역할을 하고 있는 천휘가 그럴진대, 피부에 닿지 않고 몸 내부로 전류가 그대로 흐르고 있는 라푼은 어떻겠는가.
천휘의 고통이 배가될수록 흰 고래 라푼의 고통은 더욱 커져만 갔다.
‘그래! 조금만 더! 너희들이 내게 벼락을 떨어트리는 것 자체가 고통이겠지만, 조금만 더 힘내!’
주인인 자신에게 공격을 가하는 것 자체가 두 강시에게는 곤욕이라 생각했다. 그들에게는 너무나 가혹한 벌이었지만, 지금으로서는 이 방법밖에 없었다.
[크크크!]
[호호호!]
그러나 정작 두 강시의 표정은 천휘의 예상과는 너무도 달랐다. 마치 그동안 쌓여 왔던 설움과 핍박, 그리고 십 년 묵은 체증이 한 번에 가시는 듯 매우 즐거운 표정으로 벼락을 떨어트리고 있었다.
두 강시에게 지금 이 순간… 이 장소는… 그야말로 천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