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강철 사슬 일족과의 조우
“으아앙! 엄마, 어디 있어!”
“누가 우리 딸 좀 찾아줘요!”
펜하르트 남부의 해안가에는 터전과 가족을 잃은 수많은 NPC들의 오열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다행히 이 근방에는 몬스터들이 접근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지난 며칠간 몬스터들의 침공을 피해 피난해온 NPC들의 심신은 너무도 지쳐 있었다.
“생각보다 상황이 심각한데?”
“천휘 말대로야. 마치 전쟁이 휩쓸고 간 폐허 같아.”
천휘의 지시에 따라 페난에 도착한 카멜과 로빈은 NPC들의 얼굴에 어린 슬픔과 애환을 느끼며 어두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나저나 다른 사람들은 안 왔나?”
“페난 남쪽 해안가에서 만나기로 했으니까 그쪽으로 가보자.”
카멜의 물음에 로빈이 약속 장소를 떠올리며 남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어라? 저거 미온과 블랙 녀석 아냐?”
“정말이네? 그런데 주변에 NPC들은 또 뭐야?”
“어서 가보자!”
약속 장소에 거의 도달한 둘은 바다를 등지고 NPC들에게 둘러싸인 미온과 블랙헤드를 발견할 수 있었다. NPC들은 마치 아귀처럼 미온과 블랙헤드를 붙잡고 늘어지며 떨어질 줄을 몰랐다.
“미온!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아, 카멜! 우리 좀 도와줘!”
“빵 하나 줬다가 이것들한테 된통 낚였당깨! 우리가 무슨 자선 단체도 아니고. 얼릉 우리 좀 도와달랑깨!”
블랙헤드의 설명에 대충 상황이 어찌 된 것인지 파악한 카멜은 한숨을 쉬며 NPC들을 밀쳐 냈다.
“자, 모두 비켜서세요. 이렇게 달라붙는다고 해서 없는 빵이 나올 리가 있나.”
“어어!”
카멜의 우악스러운 힘에 NPC들이 좌우로 갈라졌다. 하지만 카멜의 힘으로도 어쩌지 못하는 부류도 있었다.
“이방인 언니, 제발 빵 하나만 주세요. 우리 엄마가 아파요!”
“제발 우리 아기 좀 살려 주세요! 며칠째 배를 곯아서 젖이 안 나와요.”
채 5살도 되지 않아 보이는 소녀와 아기를 안고 처절하게 미온의 다리를 붙잡고 있는 젊은 엄마는 도저히 내칠 수 없을 만큼 처절했다.
“아, 어떻게 하지.”
“빌어먹을 운영자들!”
비록 NPC들이라고는 하나,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함께 아르니안 대륙에서 공존해오던 이들이었다. 그들의 처절하고 불쌍한 모습에 일행은 모두 눈시울이 붉어질 수밖에 없었다.
“뭘 어떡해? 이들을 도와줘야지!”
“당연히 도와야죵!”
“하린 누님! 송이야!”
일행이 쩔쩔매고 있을 때 하린과 눈송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블랙, 네 녀석은 당장 음식 만들 준비부터 해.”
“재료가 없당깨요! 이번 업데이트 땜시 운남정도 개박살 나브렀어요.”
“주변에 바다가 있잖아! 우리가 생선을 잡아올 테니, 네 녀석은 NPC들이 먹을 만한 어죽을 끓여. 미온, 너는 돌아다니면서 기력이 쇠한 NPC들에게 회복 마법을 걸어주고!”
하린의 지시에 일행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미온은 주변을 돌아다니며 심신이 피폐한 NPC들에게 회복 마법과 축복 마법을 걸어주었고, 눈송이와 로빈은 마법을 이용해 먼 바다에서부터 생선을 몰아왔다.
유일하게 낚시 스킬을 익힌 하린은 생선을 낚아 올렸고, 붕대 스킬을 익힌 카멜은 극심한 부상을 입은 NPC들에게 붕대를 감아주었다.
마지막으로 블랙헤드는 하린이 낚아 올린 생선을 가지고 최대한 많은 NPC들이 먹을 수 있도록 어죽을 끓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일행은 페난 마을로 피난해온 NPC들에게 구명의 동아줄을 내밀고 있었다.
* * *
“형님, 이제 출발해도 될까요?”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일행이 페난 마을에서 자선 활동을 펼치고 있을 무렵, 천휘와 테크토는 쿠닉 섬에서 선박 이순신을 바다에 띄울 마지막 점검을 마치고 있었다.
“그럼 곧바로 움직이죠. 최대한 빨리 섬으로 이동해야 할 것 같아요.”
“그래야겠지. 알겠네. 바로 출항하지! 닻을 올려라!”
음메에에!
테크토의 지시에 변강쇠가 닻줄을 힘차게 끌어올렸다. 엄청난 크기를 자랑하는 닻이었지만, 굉장한 근력을 지닌 변강쇠에게는 그리 무겁지 않았다.
“돛을 펼쳐라!”
이어지는 테크토의 지시에 로렌이 고개를 끄덕이며 소리쳤다.
[으하하하! 돛을 펴라!]
변강쇠를 비롯한 돌쇠 카이젠 사이클롭스 강시들이 노 젓기 스킬을 익혔다면, 로렌을 비롯한 다크 엘프 강시들은 항해 스킬을 익혔다. 항해 스킬이라고는 해도 그저 바람을 받기 위해 돛을 조종하는 것에 불과했지만, 그것마저도 그들에게는 매우 어려운 것이었다.
[로렌! 세로돛이 너무 펴져서 바람을 받기 어렵잖아! 세로돛을 조금 잡아당겨!]
그리고 가장 지능이 높은 로즈란은 특별히 조타 스킬을 익혔다. 테크토조차도 고개를 저을 만큼 익히기 어려운 조타 스킬이지만, 드래곤에 필적할 만큼 높은 지능을 소유한 로즈란에게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카이젠! 오베른! 너희들은 선수와 선미에서 배에 접근하는 몬스터들을 처치해라!”
[충!]
[나만 믿어라, 주인!]
천휘의 명령에 카이젠과 오베른은 각자의 자리로 향했다. 피오르해를 항해하는 동안 그들은 마치 대포처럼 선수와 선미에서 접근하는 몬스터들을 모조리 제거할 터였다.
“가자! 페난으로!”
* * *
“하린 누님! 생선이 다 떨어져 간당깨요!”
“알았어! 금방 가져갈게!”
“미온! 저쪽에 오크의 녹슨 글레이브에 당한 어린아이가 있어! 당장 상처 치유 마법을 써줘야겠어!”
“응! 그럴게!”
일행이 NPC들을 돌본다는 소문이 퍼지자 인근의 NPC들까지 찾아왔다.
인산인해.
일행의 주변은 발 디딜 틈조차 없이 부상당하고 굶주린 NPC들로 가득했다.
“젠장! 천휘 녀석은 언제 도착하는 거야!”
이곳 페난에서 천휘를 기다리기로 했던 일행은 몰려드는 NPC들이 짜증스러운지 신경질적으로 천휘를 찾았다.
“자식! 내가 없다고 내 욕하는 거냐?”
“천휘야!”
“오라버니!”
이순신보다 한발 앞서 페난에 도착한 천휘는 허공에서 파뱃을 타고 천천히 하강했다.
“끄아아악! 와이번이다!”
“모두 피해!”
파뱃의 모습을 확인한 NPC들은 부상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빠르게 자취를 감췄다. 이미 몬스터에게 된통 당한 그들로서는, 몬스터 중에서도 제법 상위에 속한 와이번이 무서울 수밖에 없었다.
휘익- 탁!
“왜들 저러는 거야?”
자신을 보며 두려움에 떠는 NPC들이 이상한 듯 천휘가 땅에 내려서며 물었다.
“말도 마라. 몬스터들을 피해 여기까지 피난해온 모양인데, 보다시피 모두 크고 작은 부상에 시달리고 있어. 게다가 대부분 몬스터들에 대한 심각한 공포에 젖어 있고.”
“그뿐만이 아냐. 빌어먹게도 대부분이 며칠 동안 쫄쫄 굶은 모양이야. 저기 봐. 다들 도망갔는데도 저 아기를 안고 있는 여자는 아기 먹일 젖을 위해 도망도 못 가고 있잖아.”
천휘는 로빈의 말에 그가 가리킨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잔뜩 두려움에 질린 채로 허겁지겁 어죽을 퍼먹고 있는 여자가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품에는 로빈의 말대로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아기가 새록새록 잠들어 있었다.
“…미친 운영자 새끼들.”
『오벨리스크』를 즐기는 많은 유저들이 그렇듯 천휘 역시 NPC들을 그저 한낱 부속품으로만 여기지 않았다. 그들은 함께 『오벨리스크』를 지탱해나가는 동반자였다.
그런 저들을 운영자들은 단 한 번의 업데이트로 집도, 가족도 잃어버린 피난민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일단 테크토 형님이 손수 제작하신 배가 곧 도착한다. 최소한 500명 정도는 수용할 수 있지. 저기를 봐.”
“어, 엄청나잖아! 저걸 혼자 만드셨다고?”
일견하기에도 현실의 구축함에 비견되는 거대한 크기를 자랑하는 선박이었다. 그 거대한 선박 이순신이 연안에서 페난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카멜과 로빈은 배가 감당할 수 있는 최대 수용 인원을 배에 태워.”
“무작정 움직이려 하지 않을 건데?”
현재 NPC들은 겁에 질려 있었다. 저들에게 새로운 땅으로 이주하라는 것은 또 하나의 시련이었다.
“밥 먹여 준다고 해! 몬스터로부터 지켜 준다고 해! 그것만으로도 충분할 거야!”
천휘의 신경질적인 말에 로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이제까지의 분위기를 봐서 천휘의 말은 충분히 타당성이 있었다.
“넌 뭐 할 건데?”
천휘의 지시에 일행은 각자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이제는 눈빛만 마주쳐도 서로의 생각을 읽을 수 있을 만큼 그들은 마음을 공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늘 그렇듯 일행은 천휘의 행동만은 예측할 수 없었다. 평범한 모습을 보이다가도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돌발행동을 자주 벌이는 그였다.
그런 미온의 마음을 읽었는지 천휘가 살짝 웃었다.
“나? 난 섬에서 가장 필요한 사람들을 찾아봐야지.”
“가장 필요한 사람들?”
“어. 정확히 말하자면 사람들이 아닌… 땅딸보들?”
“땅딸보?”
의아한 미온의 반문에 천휘는 생긋 웃으며 곧바로 파뱃에 올라타고는 하늘 높이 날아올라 해안가를 따라 동쪽으로 향했다.
“드워프 마을은 대부분 바렌트 왕국에 있었으니, 카이젠 산맥을 따라 피난했을 테지.”
일반 NPC들도 중요하지만 천휘에게 더욱 중요한 이들이 있었다. 바로 장인 일족이라 불리는 드워프였다.
앞으로 유저들과 NPC들이 공존하게 될 10개의 섬은 아르니안 대륙에 비해 너무도 열악한 환경을 지니고 있었다. 주거 시설도 마땅치 않고, 몬스터들에 대비할 군비도 다 갖춰지지 않았다.
‘제대로 된 생산 스킬 없이 섬을 개척하는 것은 너무도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 다른 대형 길드에는 생산직 유저들이 꽤나 많아. 한마디로 말해 드워프들을 확보하지 못하면 내가 차지할 섬은 그만큼 발전이 더디게 된다.’
사실 드워프와 관련된 것은 이미 계획하고 있던 부분이었다. 문제는 천휘의 계획이 이번 업데이트를 통해 완전히 뒤틀리고 만 것이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드워프들을 확보해야 한다. 정 안 되면 그들을 죽여서라도 부리는 수밖에.”
이번 업데이트로 인해 천휘 자신도 강시를 제작할 수 있는 마법 시약을 직접 구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물론 아직도 아공간에는 꽤나 많은 양의 시약들이 남아 있긴 했지만, 생산 스킬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려면 지능을 유지할 수 있는 천마강시로 만들어야 했다.
하지만 천마강시를 제작하기 위한 마법 시약의 종류는 너무도 많았다. 더불어 한두 명의 드워프가 아닌 수십, 아니 수백의 드워프가 필요한 천휘로서는 그들을 죽여 강시로 제작하는 것은 그다지 좋은 방법이 아니었다.
차가운 바닷바람을 가르며 허공을 부유하는 천휘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고 있었다.
* * *
“이곳에서 모두 휴식하세!”
천휘가 해안가를 배회하는 그 시각.
그가 그렇게도 찾아 헤매던 드워프, 그것도 그와 인연이 깊은 강철 사슬 일족의 드워프들이 산줄기를 따라 빠르게 남하하고 있었다.
그러나 강인한 장인 일족답지 않게 그들의 얼굴에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심지어 몇몇 드워프 전사들은 부상에 신음하고 있었다.
“듀로탄, 전사들은 어떤가?”
“좋지 않다, 아칸. 과연 카이젠 산맥이라고 해야 하나. 우리 긍지 높은 드워프 전사들로서도 더 이상은 한계다. 카이젠 오우거 한 마리조차 상대할 여력이 없을 지경이야.”
“…좋지 않군.”
강철 사슬 일족 최고의 전사 듀로탄의 입에서 나왔다고는 믿기 힘들 만큼 나약한 말이었다. 그러나 지난 일주일간의 일을 회상한다면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말이었다.
“이곳도 안전하지 못하다, 아칸. 어르신들과 아이들의 체력이 온전치 못하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도 빨리 이 지옥과도 같은 산맥을 벗어나야 한다.”
“…….”
듀로탄의 조언에 아칸의 안색이 파리하게 변했다.
그 역시 알고 있었다. 지금 이곳은 사지라는 것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칸은 선뜻 휴식을 멈추고 남하를 강행할 수도 없었다. 이미 노약자들과 아이들의 체력은 한계에 도달했다. 벌써 일주일째 제대로 휴식도 취하지 못하고 움직이고 있는 실정에서 그들의 나약한 체력이 더 이상 버티리란 만무한 일이었다.
“조금만 더.”
“최악의 수가 될 수도 있다, 아칸.”
“그렇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
“전사들에게 말해두지. 위대한 장인 일족의 혼을 불태우겠다.”
“부탁한다, 듀로탄.”
아칸의 나지막한 부탁에 듀로탄의 강인한 어깨가 흔들렸다. 장인 일족 중에서도 최강의 세를 자랑하던 강철 사슬 일족의 수장인 그가 이토록 나약한 모습을 보인 적이 있었던가.
듀로탄의 눈에서 뜨거운 열기가 일렁이고 있었다.
* * *
“빌어먹을! 결국 아직 여기까지 도달하진 못한 건가?”
벌써 2시간째 해안가를 따라 이동하던 천휘는 보이지 않는 드워프들로 인해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그렇다고 B급 이상의 몬스터들로 득실거리는 내륙 쪽으로 가볼 수도 없고. 이걸 어쩌지…….”
차가운 바닷바람을 맞으며 천휘는 내륙을 바라보았다.
이미 레벨 300을 상회하는 B급의 몬스터들이 완벽하게 장악한 내륙 지역은 말 그대로 지옥이나 다름없었다.
몬스터들을 제외하고 살아 꿈틀거리는 생명체는 전무했고, 있다 하더라도 작디작은 곤충이나 산새들에 불과했다.
아르니안 대륙은 더 이상 NPC들과 유저들이 거닐 수 없는 땅이었다.
“저 녀석들만 어떻게 처리한다면…….”
다행히 자신은 공중을 비행할 수 있는 방법이 있었다.
문제는 공중에도 역시 가공할 몬스터들이 무리를 지어 움직인다는 것이었다.
“빌어먹을! 가고일!”
작은 악마의 형상을 하고 있는 B급 몬스터 가고일들이 내륙의 상공을 배회하고 있었다. 수준은 다소 떨어지지만, 녀석들의 숫자는 이루 헤아릴 수조차 없을 정도로 많았다.
“아무래도 녀석들을 모두 상대할 수는 없겠어. 닌자거북들을 활용해 몬스터들을 회유하면서 움직여야겠어.”
공중으로 움직이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땅으로 움직이면 된다. 게다가 땅에서는 활용할 수 있는 패가 아직 남아 있었다.
천휘는 곧바로 닌자거북들을 소환해 카이젠 산맥으로 향했다.
예전 같았으면 가장 위험했을 그곳이 지금은 오히려 상대적으로 안전한 곳이 되어버렸다.
아르니안 대륙은 지금 무법천지였다.
* * *
크워어엉!
“카이젠 오우거다!”
“무, 무려 세 마리!”
일주일 만에 모처럼 꿀맛 같던 휴식을 취하던 강철 사슬 일족은 채 한 시간도 쉬지 못했다. 카이젠 산맥의 흉포한 사냥꾼인 카이젠 오우거 3마리가 난입한 것이다.
“아이들을 뒤로 물려라! 전사들이 상대한다!”
고작 3마리에 불과했지만 상대는 카이젠 오우거다.
물론 일족 최고의 전사 듀로탄이 2마리까지는 상대가 가능했지만, 그것도 평소에나 가능한 일이었다. 심신이 피폐한 지금의 몸 상태로는 그것마저도 불가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듀로탄은 홀로 나서서 카이젠 오우거들을 상대했다. 일족의 전사 다섯이 그를 돕기 위해 나섰지만, 사지가 성한 곳이 없는 그들은 오히려 듀로탄에게 방해만 될 뿐이었다.
콰앙!
“크윽! 아칸!”
카이젠 오우거의 강맹한 차지 공격에 듀로탄이 뒤로 나자빠지며 다급하게 아칸을 불렀다.
“듀로탄!”
아칸 역시 듀로탄의 패색 짙은 모습에 친우의 이름을 애타게 불렀다.
“당장 일족을 데리고 떠나라! 여기는 내가 맡는다!”
“그럴 수는 없다! 우리는 긍지 높은 강철 사슬 일족! 일족을 버리면서까지 살 수는 없다! 무기를 들 수 있는 모든 사내들은 나서서 카이젠 오우거들을 처치한다!”
듀로탄의 말을 단박에 거절한 아칸은 그 자신부터 무기를 들고 앞으로 나섰다. 장렬한 그의 모습에 나머지 강철 사슬 일족 사내들도 무기를 들고 그의 뒤를 받쳤다.
“아칸…….”
“아무 말 마라, 듀로탄. 이곳에서 우리 강철 사슬 일족의 맥이 끊기는 것은 한탄스러운 일이다만, 그렇다고 동족을 버리고 도망칠 수는 없다!”
아칸의 의기 높은 외침에 듀로탄이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을 내친 카이젠 오우거를 향해 뛰어들었다.
그렇게 카이젠 오우거 셋과 강철 사슬 일족 드워프 사내 20명의 격돌이 시작되었다.
“이야아앗! 대지의 망치!”
듀로탄의 거대한 해머가 오우거의 무릎을 가격했다. 강맹한 일격이었지만, 카이젠 오우거의 두꺼운 가죽을 뚫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는 공격이었다. 그의 오른쪽 어깨가 좀 전의 충격으로 탈골된 탓이었다.
“끄아악!”
“록하임! 빌어먹을!”
듀로탄이 카이젠 오우거 한 마리를 상대로 고전하고 있는 사이, 한 명의 드워프 전사가 목숨을 잃었다. 카이젠 오우거의 흉악한 발길질에 명치를 차이고 만 것이다.
“자리를 벗어나지 마라! 친우의 죽음에 대한 대가는 녀석들의 목숨으로 갚는다!”
록하임의 죽음으로 무너지는 드워프들의 마음을 다잡으며 듀로탄이 카이젠 오우거를 무너트리기 위해 녀석에게 쇄도했다. 일족 최고의 전사인 자신이 나서야 더 이상 헛된 희생을 당하지 않으리라는 생각에서였다.
“죽어라! 놈!”
듀로탄의 해머가 카이젠 오우거의 정강이를 두드리고는 곧바로 가랑이 사이로 솟구쳤다. 녀석의 낭심을 부숴버리려는 심산이었다.
크워어엉!
그러나 카이젠 오우거는 위험을 감지하고 허공으로 껑충 뛰어올랐다. 무려 3미터가 넘는 거대한 체구가 공중으로 뛰어오르자, 신장이 짧은 듀로탄으로서는 녀석을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제, 젠장!”
“듀, 듀로탄!”
듀로탄의 신형이 허공에서 허우적거릴 때 카이젠 오우거가 중력의 법칙에 의거, 땅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또한 녀석은 살심이 가득한 눈빛으로 거대한 주먹을 듀로탄을 향해 내려치고 있었다.
절체절명의 위기!
듀로탄의 위기를 간파한 아칸이 황급히 돕기 위해 그쪽으로 달려갔지만, 이미 카이젠 오우거의 주먹이 듀로탄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그렇게는 안 되지! 파멸의 주먹!”
콰아앙!
크워어엉!
카이젠 오우거의 거대한 주먹에 듀로탄이 피떡이 되려는 그 순간, 정체를 알 수 없는 이가 쏜살같이 달려들며 카이젠 오우거를 밀쳐 냈다.
“이방인!”
듀로탄을 위기에서 구한 이는 다름 아닌 천휘였다. 한눈에 그를 알아본 모단이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녀석들을 처치해!”
모단의 외침에 살짝 손을 흔드는 것으로 답하며 천휘는 닌자거북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닌자거북들이 카이젠 오우거에게 달려들며 순식간에 녀석들을 처치해버렸다.
“이, 이럴 수가!”
“대, 대단해!”
20명 남짓한 드워프들이 달려들었음에도 어쩌지 못하던 카이젠 오우거를 마치 병든 닭의 목을 비틀듯 순식간에 처치한 닌자거북들을 보며 드워프들은 놀람을 금치 못했다.
“이방인!”
“모단!”
안면이 있는 모단이 앞으로 나서자 천휘가 반갑게 맞았다.
“어떻게 된 거냐, 이방인. 아크 리치를 네가 죽인 거냐?”
“그렇게 됐다. 다행히 모두 잘 빠져나갔나 보네?”
천휘가 뒤에서 자신을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는 드워프들을 가리키며 물었다.
“이방인 고맙다! 덕분에 우리 일족이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손까지 꼭 붙잡으며 감사를 표하는 모단을 보며 천휘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어쩌면 일이 잘 풀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다.
“다시 뵙습니다.”
“오랜만일세. 이렇게 또다시 도움을 받을 줄은 몰랐군.”
“아무래도 저희가 인연인가 봅니다.”
“그럴지도 모르지.”
짤막한 대화를 나눈 두 사람은 한동안 서로를 응시하며 입을 닫았다. 각자 할 말이 있는 듯 말을 꺼내기를 주저하고 있는 것이다.
“이방인, 내 부탁이 있네.”
“말씀하십시오.”
결국 먼저 말문을 연 것은 아칸이었다. 궁한 자가 숙이고 들어가는 것은 인지상정이었다.
“보다시피 우리는 지금 위기에 처해 있네. 오랜 시간을 몬스터들에게 쫓긴 탓에 노약자들과 아녀자들의 체력이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지경이야. 게다가 일족의 전사들도 지속되는 전투로 모두 크고 작은 부상에 시달리고 있다네.”
빙 돌려서 말하고 있긴 했지만, 아칸의 말은 결국 일족을 도와달라는 이야기였다.
그의 말에 천휘는 진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아칸의 말은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방인. 아무런 대가 없이 여러분을 도와드릴 수는 없습니다.”
“이, 이방인!”
천휘의 냉정한 말에 모단이 당황한 듯 소리쳤다. 하지만 천휘의 표정은 여전히 냉정하기 그지없었다.
“뭘 바라는 건가?”
아칸이 침중한 얼굴로 물었다. 행여나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해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어차피 예전의 강철 사슬 마을은 더 이상 재건할 수 없습니다. 이미 아르니안 대륙은 몬스터들의 세상이 되어버린 지 오래. 아니 그렇습니까?”
“사실이네. 더 이상 이 땅은 풍요로운 대지가 아닐세. 대륙 각지에서 벌어진 몬스터들의 준동은 감히 대적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힘의 덩어리가 되어 이 아르니안 대륙을 집어삼키고 있네. 더 이상 우리 일족의 힘만으로는 살아나갈 수 없는 땅이 되고 말았어.”
아칸 역시 한 일족의 수장답게 현 아르니안 대륙의 정세를 잘 파악하고 있는 듯했다.
그의 말에 천휘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저 역시 같은 생각입니다. 하지만 조금 전에 보셨듯이 제겐 힘이 있습니다.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현재의 강철 사슬 일족은 약합니다. 이대로라면 얼마 가지 못해 몬스터들의 먹잇감으로 전락하고 말 겁니다.”
“이방인! 어찌 그런 말을!”
“조용해라, 모단!”
너무도 냉혹한 천휘의 말에 모단이 발끈하며 앞으로 나섰으나 아칸의 제지에 의해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저는 강철 사슬 일족의 잠재 가능성을 알고 있습니다. 여건만 된다면 강철 사슬 일족은 대륙 최고의 장인들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 주실 것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래서 제가 제안을 하나 드리려고 합니다.”
“제안이라……. 이런 상황에서 제안이랄 것까지야 있겠는가. 말해보게.”
이미 강철 사슬 일족은 스스로의 힘으로 카이젠 산맥을 벗어날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그 사실을 직감하고 있는 듯 아칸의 표정은 이미 체념적이었다.
“가까운 미래에 저는 이 대륙을 떠나 피오르해에 위치한 거대한 섬으로 이주하려 합니다. 이미 아르니안 대륙은 최악으로 치닫고 있는 상황. 그곳에서 힘을 길러 후일을 도모하려 합니다.”
“…자네의 말은 우리를 보호해주는 대신 우리의 기술을 빌려 달라는 것인가?”
“강철 사슬 일족을 보호하는 것을 떠나, 대륙 최고의 장인 일족이라는 명예를 되찾으실 수 있게 해드리겠습니다.”
“…….”
천휘의 제안에 아칸은 물론이고, 다른 드워프들까지 말문이 막혔다. 최악의 위기에 처한 그들로서는 그보다 좋을 수 없을 만큼 좋은 제안이었다.
“제게 힘이 되어주시겠습니까?”
심장이 두근거릴 만큼 달콤한 제안.
아칸은 그 마력에 이끌려 조용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띠링! 퀘스트 ‘강철 사슬 일족의 재건’이 발동되었습니다.]
아르니안 대륙에 불어 닥친 파괴의 폭풍
최고의 장인 일족인 강철 사슬 일족 역시 그 파괴의 폭풍에 휩싸였다.
수백 명에 달했던 강철 사슬 일족은 기껏해야 100명 남짓밖에 살아남지 못했고, 이제는 멸망할 위기에 처했다.
그들을 위기에서 구하고, 또 다른 장소에서 강철 사슬 일족의 재건을 도우라!
난이도:B
제한:강철 사슬 일족과의 우호도
보상:강철 사슬 일족의 조력
양쪽 모두 윈윈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천휘는 그들의 뛰어난 기술을 얻을 수 있어서 좋고, 강철 사슬 일족은 일족의 재건은 물론이고 뛰어난 기술을 이어나갈 수 있어서 좋았다.
모든 준비는 끝났다. 남은 것은 이제 저 먼 대양으로 뻗어나가는 일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