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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장 폭풍의 시작 (61/82)

제10장 폭풍의 시작

천휘가 죽음을 맞이하고 며칠간 『오벨리스크』는 대대적인 업데이트를 명목으로 서버를 닫아버렸다.

업데이트 기간은 총 일주일!

게임 오픈 이래 가장 오랜 기간을 요하는 업데이트가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업데이트가 시작된 그 주 토요일.

교사들에게는 꿀맛과도 같은 놀토였지만, 영완은 아침부터 분주히 움직이며 무언가를 준비하는 눈치였다.

따라리라. 라라.

“미연인가?”

익숙한 벨 소리에 영완이 핸드폰을 찾았다. 역시나 미연이었다.

찰칵.

“준비 다 했어?”

(다 했으니까 전화했지! 지금 집 앞이야. 어서 내려와.)

“집 앞? 차 몰고 왔어?”

(그래! 토요일까지 내가 네 차 타야 돼? 오늘은 네가 내 차 타!)

“큭! 알았습이다요, 마님. 금방 내려갈게.”

찰칵.

영완은 전화를 끊고 급히 외투를 걸쳤다. 그리고는 평소엔 잘 신경 쓰지도 않는 머리를 만지작거리고 집을 나섰다.

“왜 이렇게 꾸물거려!”

집 앞에는 미연이 차를 세워두고 영완을 재촉하고 있었다.

“아직 약속까지 한 시간이나 남았으니까 제발 보채지 좀 마!”

“흥! 내 맘이거든? 어서 차에 타기나 해.”

으쓱.

영완은 미연의 까칠함에 어깨를 으쓱거리고는 조수석으로 향했다. 하지만 이내 미연이 소리를 내지르며 그를 멈춰 세웠다.

“나보고 차를 몰라는 거야?”

“그럼 내가 몰아?”

“당연하지! 나보다 네가 더 잘 모니까! 아무튼 네가 운전해!”

“…지 맘이야.”

영완은 결국 운전석으로 향하며 미연에게 열쇠를 건네받고 차를 몰았다. 과연 외제차 포르줴라 그런지 승차감이 너무도 좋았다.

“역시 외제가 좋긴 좋은 것 같은데? 이거 몰다가 내 차 몰면 기분 이상하겠다야.”

“그럼 그냥 너도 이참에 외제 차 하나 뽑아. 그러면 되지.”

“…내가 말을 말아야지.”

미연의 속없는 말에 영완은 낮게 중얼거리며 교외로 차를 몰았다. 놀토라 그런지 도로가 꽤나 막혔지만, 두어 시간쯤 지나자 약속했던 청평의 한 펜션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제법 괜찮은데?”

“블랙이 빌린 것 아니었어? 걔가 이런 디테일한 면도 있었나?”

“모르지, 그거야. 아무튼 들어가자.”

두 사람은 펜션 정원을 가로질러 불이 켜진 곳으로 향했다. 다른 방에는 불이 켜지지 않은 것으로 봐서 오늘 투숙객이 없는 모양이었다.

딩동.

영완이 벨을 누르자 이윽고 처음 보는 인상의 사내가 문을 열었다.

“오, 이게 누구야! 우리의 마스터! 천휘잖아? 역시 미온과 같이 왔구나.”

“누… 누구?”

천휘는 처음 보는 사내의 환대에 다소 당황하며 물었다.

“뭐야! 이거 섭섭한데? 나를 못 알아보다니! 이러면 알려나? 뭐여, 왜 이제사 왔당가. 싸게싸게 못 오는 것이여?”

“헉! 너 설마 블랙?”

“큭큭! 맞다. 내가 바로 블랙헤드다. 만나서 반갑다야.”

『오벨리스크』상에서는 영락없는 촌놈 행색을 하던 블랙헤드가 현실에서는 깔끔한 슈트를 차려입은 댄디보이라니. 영완으로서는 이 이질적인 광경에 한동안 입을 다물지 못할 정도였다.

“이야, 진짜 대단한 반전인데? 만나서 반가워.”

“그래. 나도 반갑다. 애들아! 천휘랑 미온 왔다!”

“오오! 드디어 주인공들이 오셨군그래.”

블랙헤드의 외침에 거실에 있던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아무래도 천휘와 미온이 가장 늦게 도착한 모양이었다.

“자,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어서 안으로 들어가자고.”

하린으로 여겨지는 중년 여인의 말에 일행은 이내 거실로 향했다.

이윽고 이어지는 자기소개.

모두들 『오벨리스크』상에서의 모습과는 조금씩 차이가 있었지만, 그래도 얼추 비슷한 점이 있어 쉽게 구별할 수 있었다.

역시나 최고의 반전은 블랙헤드였다.

“모두들 만나서 반가워! 진짜 이렇게 실제로 만나니까 너무 반갑네. 난 이미 밝혔다시피 블랙헤드.”

“너 현실에서는 사투리 안 쓰면서 왜 『오벨리스크』에서는 사투리 쓰는 거야?”

모두가 궁금해하는 바로 그 물음.

블랙헤드는 멋쩍게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그냥. 어렸을 때 시골에서 산 탓에 사투리가 조금 익숙하거든. 그냥 튀어 보이려고 사투리 쓰는 건데?”

“…….”

“…이상한 성격으로 봐서 확실히 블랙헤드가 맞아.”

“…동감.”

오늘의 모임은 바로 『오벨리스크』에서 인연을 맺었던 사람들끼리 조촐하게 만남을 갖는 자리였다. 화신의 사막 원정에서 함께 파티를 맺은 인연이 이어진 것이다.

“일단 저녁때가 다 되었으니 저녁부터 먹자. 눈송이와 미온은 날 도와서 음식을 만들자. 남자들은 밖에 나가서 바비큐 구울 준비를 하고.”

역시나 현역 아줌마답게 하린이 나서서 저녁을 준비했다. 그녀는 오늘 모임을 위해 사랑스러운 남편과 아들까지 내팽개치고 이 자리에 참석했다.

“그런데 아직 한 명이 안 왔네?”

한창 석쇠에 넣을 장작을 패던 영완이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닦으며 말했다.

“다 왔는데? 누구 또 오기로 했어?”

영완의 말에 정호가 다가오며 물었다.

“응! 이번에 새로 알게 된 형님인데, 우리 모임에 함께했으면 해서 연락을 드렸거든. 확실하게 펜션 이름도 알려 드렸는데 아직 안 오셨네.”

“어떤 분이신데? 네가 그렇게 선뜻 마음을 열 정도면 꽤 좋으신 분이겠지?”

“맞아. 비록 한 번밖에 뵌 적은 없지만, 여러 모로 괜찮은 분이셔.”

“어라? 저 차 아냐? 이쪽으로 다가오는데?”

함께 장작을 패던 준우가 펜션 입구를 가리켰다. 과연 그곳에는 하얀 승용차 한 대가 펜션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혹시 여기…….”

“테크토 형님 맞으시죠?”

“아, 내가 제대로 찾아왔군. 잠시만 기다리게. 일단 주차 좀 하고.”

“네.”

테크토는 게임에서의 모습 그대로였다. 조금 다른 게 있다면 형님이라 부르기 민망할 정도로 나이가 많다는 데 있었다.

“혀… 형님? 삼촌 아니고?”

“그래. 형님이라 부르기에는 연세가…….”

적게 쳐줘도 오십은 넘어 보이는 테크토의 용모!

하지만 영완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한번 형님은 영원히 형님이지. 열 살이 차이 나건, 스무 살이 차이 나건 형님은 형님이다.”

“…이 자식은 이상한 데서 고집을 피운다니까.”

“…확실히.”

이윽고 테크토가 차에서 내리며 반갑게 영완에게 악수를 청했다.

“반갑네. 옆의 두 분은 아우 친구 분들이신가?”

“그냥 말 놓으세요. 저희 둘 다 영완이랑 갑입니다. 카멜이라고 합니다.”

“저는 로빈입니다.”

게임에서 만난 인연이기에 굳이 이름을 알려 줄 필요가 없었다. 그저 카멜이니, 로빈이니, 게임상에서의 캐릭터 이름을 부르는 편이 더 나았다.

“마침 바비큐 파티를 하려 했습니다. 그쪽에 앉으세요.”

“허허! 늙었다고 무시하는 건가? 자네들보다 내가 더 장작을 잘 팰 수 있으이. 도끼 이리 내보게.”

영완의 말에 테크토가 발끈하며 도끼를 뺏어들었다. 그는 확실히 장작을 패본 경험이 있는지 세 사람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여분의 장작을 모두 쪼개냈다.

“어떤가?”

“하하! 정말 잘하시네요. 그쪽에 앉아 계세요. 안에 들어가서 준비 다 마쳤다고 해야겠습니다.”

“그러시게.”

바비큐를 구울 석쇠에 불까지 붙이자 밖에서 할 수 있는 건 모두 끝났다. 이제 남은 건 타오르는 석쇠에 고기를 얹는 일이었다.

“준비 다 끝났는데, 아직이에요?”

“아, 마침 잘 왔네. 이 재운 고기들 좀 가져가. 이쪽도 준비 다 했어. 다들 들고 나가.”

“네!”

다행히 주방에서도 음식 준비를 다 마친 듯 하린을 비롯해 여자들이 쌈장이며 김치, 그리고 반찬들을 들고 밖으로 나섰다.

낑낑.

“뭐… 뭐야, 그 술들은?”

“이 정도는 되어야 술 좀 먹었다고 할 수 있는 거 아니겠냐? 오늘은 코가 삐뚤어지도록 마셔 보는 거야.”

“…아아, 안 들린다. 나는 안 들린다.”

블랙헤드 녀석은 의외로 꽤나 주당인 듯 소주를 무려 한 박스나 사왔다. 무려 20병! 술이 그리 세지 않은 영완으로서는 치사량을 넘어 천국으로 가는 직행열차를 타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양이었다.

치이익!

“이야, 고기 굽는 소리 죽이는데?”

“삼겹살엔 역시!”

“소주!”

블랙헤드의 말에 미연이 맞장구치며 그의 옆에 앉았다. 영완보다 훨씬 술을 잘 마시는 그녀로서는 오늘같이 좋은 날, 술 못 마시는 영완의 옆이 아닌 블랙헤드의 옆을 선택한 것이다.

“쳇! 술 때문에 애인을 버리다니.”

“오빠에겐 제가 있잖아요.”

“큭큭! 눈송이, 현실에서는 정상적인 말투잖아?”

“현실과 게임이 같나요? 오빠처럼 비슷한 분위기의 사람이 있는가 하면, 블랙 오빠처럼 완전 딴판인 사람도 있기 마련이에요. 저는 그래도 양호한 편이라고요.”

눈송이의 말이 옳았다.

세상 사람들의 성격이 천차만별이듯 가상현실 게임 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어느 정도의 익명이 보장되는 가상의 공간인 만큼, 사람들은 현실에서는 꿈도 꾸지 못할 행동을 하기도 했다.

“허허! 고기가 제법 맛있네요.”

“아, 많이 드세요. 천휘와 인연이 있다고 하셨나요? 전 하린이라고 해요.”

“허허! 테크토입니다.”

하린과 테크토는 유일하게 연배가 비슷해서인지 고기를 굽는 내내 담소를 나누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자자, 이제 어느 정도 고기들 드셨을 테니, 제가 노래 한 곡 하렵니다!”

“오오! 우리 카멜이 노래는 좀 하지!”

한창 분위기가 무르익어갈 때쯤 정호가 소주병을 오른손에 움켜쥐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 박자 쉬고, 두 박자 쉬고, 세 박자 마저 쉬고 하나! 둘! 셋!”

“고요~ 한 내 가슴에! 나비처럼 날아~ 와서!”

정호의 탁월한 선곡에 모두가 다 같이 노래를 따라 불렀다. 어차피 펜션에 투숙객은 이들을 제외하곤 한 명도 없으니 마음 놓고 떠들썩하게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다.

그렇게 다시 한 시간이 흐르자, 일행 모두 어느 정도 취기가 올랐다. 그에 하린이 음식을 치우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비큐는 이제 그만! 슬슬 날씨도 추워지고 하니까 안에 들어가서 한잔 더 하자고. 내가 집에서 매운탕거리 가져왔으니까 안주는 염려 말고!”

“우오오오! 역시 하린 누님이십니다!”

“호호! 역시 날 알아주는 이는 카멜밖에 없어.”

“제가 도와드릴게요!”

하린의 말에 카멜이 천연덕스럽게 그녀를 띄워주며, 그녀와 함께 식기구들을 들고 펜션 안으로 사라졌다.

“…저 자식, 진짜 넉살도 좋아.”

“누가 아니래. 아무튼 우리도 여기 깨끗하게 치우죠.”

하린과 카멜이 안으로 들어가 설거지를 하는 동안 나머지 일행은 분주하게 움직이며 음식물 쓰레기들을 치우고 빈 병들을 분리수거하며 깨끗하게 바비큐 파티를 한 자리를 정리했다.

“자, 이제 청소도 끝났으니, 2차를 시작해볼까요?”

“좋지.”

“허허! 바라던 바라네.”

청소를 마치고 안으로 들어오자, 펜션 가득 매콤한 냄새가 진동하고 있었다. 하린이 매운탕을 끓이는 냄새였다.

“다 치웠어?”

“네.”

“금방 되니까 다들 탁자에 앉아 있어. 내 요리 솜씨 기대하라고.”

“기대할게요, 언니!”

일행이 손발을 씻고 탁자에 모이자, 이윽고 하린이 정성스럽게 끓인 매운탕이 도착했다. 그 외에도 블랙헤드가 부친 파전도 제법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자, 이제 본격적인 술자리를 하기에 앞서 우리의 호프, 우리의 마스터 천휘가 한마디 해! 이번 자리도 천휘 네가 주선한 거잖아.”

“아, 그럴까요?”

하린의 종용에 영완이 빼지 않고 술잔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흠, 제가 『오벨리스크』를 시작한 지 어언 3년 가까이 됐는데요. 사실 천 제국에서는 무림맹과 마교 모두에게 공적으로 몰려 친구들을 사귈 여유가 없었어요. 하지만 아르니안 대륙으로 넘어오면서 이렇게 좋으신 형님과 누님, 그리고 친구들과 동생들을 만나면서 참 즐거워요. 뭐랄까, 제2의 가족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참으로 정겨운 모임인 것 같아요. 앞으로도 우리 친분 변치 말고 정기적으로 만나서 모임을 가져요. 이번에는 블랙 녀석이 무리해서 펜션을 빌렸지만, 다음에는 제가 더 좋은 곳으로 모실게요. 자, 그럼 우리의 모임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거국적으로 한잔해요!”

영완의 건배 제의에 일행이 모두 잔을 높이 들어올렸다.

“우리의 모임을!”

“위하여!”

마치 가족처럼 일행은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술을 마셨다. 어느 누구 하나 빼는 이가 없었고, 어느 누구 하나 얼굴을 찌푸리는 이가 없었다.

영완의 가슴에 그들이 발산하는 따뜻한 정이 느껴졌다.

“…천휘 동생.”

“아, 누님, 한잔하실까요?”

“아니. 그것보다 오늘 이 자리가 그저 술만 마시고 헤어지는 자리는 아니지?”

“아…….”

하린의 갑작스러운 물음에 일행이 서로 이야기를 하다 말고 영완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를 바라보는 모두의 눈에 의구심이 가득 깃들어 있었다.

“흠, 사실 이번 업데이트는 어느 정도 예측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상하지 못한 부분도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로빈, 이번 업데이트의 시작이 뭐라고 생각하냐?”

“각 왕국에서 일어나는 강대한 지진들 아니냐? 지진의 원인은 알 수 없지만.”

로빈의 대답에 영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아마 대륙에서 잠자고 있던 고대의 몬스터들이 하나 둘 깨어나면서 발생한 지진일 거다.”

“뭐야, 그 정도로 세세한 부분까지 네가 어떻게 아는 건데?”

마치 개발사의 기획팀장이라도 되는 투로 말하는 영완이 의아한 듯 블랙헤드가 물었다.

“사실 여러 가지 정황으로 미루어볼 때, 바렌트 왕국에서 일어난 지진은 나와 관련이 있는 것 같다.”

“천휘 동생과 관련이 있다고?”

“네. 사실 업데이트가 시작되기 며칠 전부터 난 바렌트 왕국에서 모종의 퀘스트를 수행하고 있었어. 본래는 테크토 형님이 대장장이 강시들을 원하셔서 드워프 마을을 찾아가 그들을 처치하고 강시로 만들 생각이었는데, 일이 꼬여서 퀘스트를 하나 받게 되었지.”

“…악마.”

“…아무렇지 않게 드워프를 강시로 만든데.”

영완의 말에 미온과 눈송이가 그를 매서운 눈빛으로 쳐다보며 악담을 늘어놓았다.

“그 퀘스트가 뭔데?”

“아크 리치 퇴치.”

“아크 리치? 아크 리치는 아직 대륙에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지 않나?”

“아마 그럴걸? 그런데 그 녀석을 퇴치하는 퀘스트를 받았단 말이야? 하긴 네 녀석이 강시들을 총동원하면 못할 것도 없으니까.”

“아니. 난 강시들을 모조리 테크토 형님에게 맡겨 놓고 아크 리치를 잡으러 갔어. 유일하게 대동한 녀석이 오베른이지.”

“뭐야, 그럼 어떻게 잡은 거야?”

제아무리 천휘가 강하다 하더라도 450레벨의 보스 몬스터를 홀로 잡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때문에 일행은 무척이나 놀란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그게… 말이 안 되는 일인데…….”

“뜸 들이지 말고 말해봐.”

로빈의 재촉에 영완이 뒷말을 이었다.

“아크 리치 녀석이 미쳐 있었어.”

“미쳐 있어?”

“그게 말이 돼?”

“아, 몰라! 아무튼 미쳐 있는 녀석을 내가 처치하긴 했는데, 결국에는 나도 던전이 무너지며 목숨을 잃었어. 그런데 생각해보니…….”

영완이 말을 잇기도 전에 하린이 나섰다.

“가만! 아크 리치는 본체를 처치한다고 해도 라이프 베슬이 남아 있으면 죽은 게 아니지 않나?”

“당연하죠. 일반 리치들도 그러는데.”

“…맞아. 나도 나중에 생각해보니 그렇더군. 어쩐지 녀석이 죽으면서 아이템을 하나도 떨어트리지 않더라고. 아무튼 내 생각에는 아크 리치의 던전이 무너지며 지진이 일어났을 거고, 이와 비슷한 일들이 각 왕국에서 벌어졌을 것 같아.”

“흠.”

영완의 설명에 일행의 얼굴이 자못 심각해졌다.

도대체 지금 『오벨리스크』에서 무슨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 그들로서는 도무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던 것이다.

“허허! 어차피 알 수 없는 일에 목매서 뭐 하는가. 그저 지금 이 순간 즐겁게 술 한잔하면 되는 것 아니겠는가?”

잠자코 있던 테크토의 말에 심각해진 분위기가 살짝 풀렸다. 그러나 여전히 분위기는 무거울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오벨리스크』를 그저 하나의 평범한 게임으로만 치부하지 않았다. 그 속에는 새로운 삶이 있었고, 새로운 만남이 있었다.

그들에게 『오벨리스크』는 꿈을 실현할 수 있었던 환상의 대지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알려 드릴 것이 있는데, 아까 제가 이번 업데이트를 어느 정도 예측했다고 했죠. 그게 무슨 말인고 하면…….”

영완은 일행에게 테크토와 있었던 일들을 요약해서 설명했다. 그리고는 이번 업데이트에서 일어날 변화의 일부분을 예측해서 이야기해주었다.

“흠, 확실히 그 섬들이 유저들을 위한 공간이 될 수도 있겠지만, 그건 좀 비약인 것 같다.”

“비약?”

“그래. 벌써 몇몇 대형 길드의 마스터들은 다른 중소 길드와 동맹을 맺고 연합 전선을 구축하고 있어. 그들의 숫자는 적게 잡아도 천 단위가 넘어가고, 대륙 최고의 10대 길드들은 만 명에 가까운 길원들을 보유하고 있지. 그게 뭘 설명하는지 모르겠어?”

“그 거대해진 힘으로 왕국을 치려는 속셈이라는 소리야?”

로빈의 설명에 이은 물음에 영완이 잠시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바로 그거다. 대부분의 가상현실 게임이 그렇듯 종국에는 NPC들이 지배하는 공간이 아닌 유저들이 지배하는 공간으로 변질되고 말지. 즉, 이 아르니안 대륙 역시 유저들이 NPC의 힘을 뛰어넘는 지금이 변혁이 일어날 수 있는 최적기라는 거야.”

“그렇게 되면…….”

“허허! 그리되면 내 배들은 쓸모가 없게 되겠지.”

“…….”

“…….”

다시금 무거워진 분위기.

눈송이가 그 분위기를 참지 못하고 몰래 텔레비전을 켰다. 텔레비전을 켜긴 했지만, 아무도 텔레비전에 집중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내 눈송이가 채널을 돌려 『오벨리스크』 전문 게임 채널에 맞추자 모두의 눈이 그쪽으로 쏠렸다.

“아, 속보입니다. 방금 들어온 소식에 의하면, 『오벨리스크』 팬 사이트인 오시리스에 개발사 측에서 이번 업데이트와 관련된 동영상을 등록했다고 합니다. 바로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아! 영상이 준비되었다고 합니다! 바로 보시겠습니다!”

MC의 짧은 설명과 함께 눈에 익숙한 광경들이 화면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저긴 카이젠 산맥 아냐?”

“저긴 빙룡의 대지!”

“천휘야, 저기가 네가 있었던 심연의 밀림 맞지?”

어느새 텔레비전 앞으로 모여든 일행은 눈에 익은 풍경을 볼 때마다 짧은 탄성을 내질렀다.

“뭐가 어떻다는 거야? 아무렇지도…….”

둥둥둥둥!

카멜의 말이 끝나가기 무섭게 화면이 뒤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대륙의 4대 금지에서 몬스터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들은 마치 풀을 찾아 떠나는 누의 이동처럼 거대한 숫자가 무리를 이뤄 대륙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뭐…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저 녀석들이 왜 금지에서 벗어나는 거지?”

“빌어먹을! 도시를 침공하고 있어!”

몬스터들의 대이동은 대륙의 모든 것을 폐허로 만들고 있었다. 그들이 지나가는 자리에는 오로지 파괴와 학살만 있을 뿐이었고, 그들의 전신에는 NPC들의 피가 흥건하게 묻어 있었다.

“앗! 리버훌 성국의 성기사들과 사제들이다!”

“이 자식들! 다 죽었어!”

어느새 한 편의 영화를 보는 것처럼 몰입하고 있는 일행들은 몬스터를 퇴치하기 위해 나타난 리버훌 성국의 성기사들과 사제들을 보며 환호를 내질렀다. 하지만 그 환호가 이어진 것은 고작해야 1분이었다.

4대 금지에서 뿜어져 나온 몬스터들은 리버훌 성국 성기사들의 육신을 갈가리 찢어버렸고, 순식간에 사제들은 그들의 먹잇감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

“…….”

그와 같은 상황은 리버훌 성국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었다. 전 대륙에서 공히 그와 같은 대학살이 일어나며 NPC들은 남으로, 남으로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몬스터들의 침공을 피하기 위한 대피난.

NPC들의 얼굴에는 슬픔과 아픔이 가득했고 걸을 힘조차 없는지 점점 낙오자마저 생겨나고 있었다.

<폭풍의 시작! 폭풍의 행진곡이 전 대륙에 울려 퍼집니다!>

마지막으로 피난민과 몬스터들의 영상이 겹쳐지며 하나의 문구가 화면에 떠올랐다.

그렇게 영상은 끝이 났다.

“이거 생각 외로 큰 충격인데?”

“아무래도 그렇지?”

영상이 이미 끝났음에도 일행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힘겹게 카멜이 먼저 말문을 열었지만, 돌아오는 건 어색한 블랙헤드의 말뿐이었다.

“이 정도로 일이 커질 줄은 몰랐는데요, 형님.”

“아우도 그런가? 나 역시 그러네. 역시나 스케일을 짐작조차 할 수 없는 게임이야. 이런 식으로 유저들의 뒤통수를 치다니 말이야.”

“대체 둘이서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 거야? 같이 좀 알자.”

뜬금없는 영완과 테크토의 대화에 카멜이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말했지? 분명히 그 섬은 유저들을 위한 공간일 거라고. 영상에서 본 것처럼 이미 아르니안 대륙은 몬스터들에 의해 점령당했어. 그럼 남은 유저들은 어떻게 될까? 마을도, NPC도 없는 대륙에서 몬스터들과 치열하게 싸우며 게임을 해나가야 할까?”

“허허, 아마도 그 섬으로 대륙의 모든 유저들이 몰릴 것이네. 천 제국도 아마 그와 비슷한 섬들이 존재하겠지. 현재 『오벨리스크』의 접속자 수는 평균 20만. 많아봐야 30만을 넘지 않겠지. 내가 살펴본 그 섬들은 하나의 섬이 적어도 우리나라의 제주도와 맞먹는 크기였네. 그런 섬이 열 개나 있어. 어떤가? 유저들을 충분히 수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나?”

“그… 그렇다면…….”

“일부러 이런 일을?”

영완과 테크토의 설명에 그제야 일행들은 어느 정도 이번 업데이트의 의도를 알게 되었다.

개발사 측에서는 이번 업데이트를 통해 유저들끼리 무한 경쟁을 하게 만들려는 심산이었다. 나아가 아르니안 대륙을 몬스터들의 천국으로 만들어, 차후 아르니안 대륙을 진정한 유저들의 대지로 탈바꿈하려는 계획인 듯했다.

“이건 뭐…….”

“유저들에게 생존 경쟁을 종용하는 것도 아니고.”

로빈의 말처럼 개발사는 유저들에게 몬스터들과의, 그리고 유저 간의 무한 경쟁을 유도하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유저들이 거기에 회의를 느끼고 『오벨리스크』를 떠날 수도 있는 계획이었다.

“…있잖아.”

“왜?”

“…나 막 가슴이 떨리는데?”

“…너도 그러냐?”

로빈과 카멜의 대화처럼 일행은 왠지 모를 희열감에 가득 차 있었다.

소소한 재미는 가라!

오로지 무한 경쟁, 무한 전투의 시대가 오리니!

『오벨리스크』에 폭풍이 일고 있었다.

제10장 폭풍의 시작

- 7권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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