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장 변혁
듀라한을 처치한 이후에도 천휘 일행은 아무 거리낌 없이 안으로, 안으로 향했다.
너무도 순조로운 돌파.
천휘로서는 안으로 들어가면 갈수록 의구심이 늘 수밖에 없었다.
“그만! 일단 여기서 쉬자! 똥개! 네 녀석은 주변의 스켈레톤을 정리해! 스켈레톤들이 이쪽으로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고.”
크엉.
천휘의 지시에 모단을 내려놓은 똥개 시벨리우스가 주변의 스켈레톤에게로 달려들었다. 그리고는 거대한 동체와 기다란 다리를 이용해 스켈레톤들을 거침없이 부수기 시작했다.
“이방인.”
“뭐야? 또 뭘 건드리려고?”
“그게 아니라 이방인 실력이 제법 대단한 것 같아서.”
안면을 튼 후 처음으로 칭찬을 하는 모단을 보며 천휘가 경계심 가득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그런 눈 할 것 없어. 난 그냥 진심을 말하는 것뿐이니까. 진심이야. 넌 대단해! 내가 본 이방인들 중 그 누구보다!”
“호오, 그래? 그런데 너 같은 꼬마에게서 그딴 말 들어도 하나도 기쁘지 않거든? 그러니까 잠자코 있어! 편히 쉬면서 가는 누구와 달리, 난 사방으로 움직이며 해골 시키들을 상대하고 있거든. 그러니까 좀 쉬자.”
천휘의 불평 어린 말에 모단도 느끼는 것이 있는 듯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그제야 천휘는 지금의 상황에 대해 생각을 해볼 여유가 생겼다.
‘상대는 아크 리치다. 상급 마수보다 강한 마력을 가진 최강의 보스 몬스터! 그런 녀석이 우리들의 존재를 눈치 채지 못했을 리가 없어. 마신의 기운이 지근거리에서 느껴지는 걸 보니 분명히 녀석은 가까운 곳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앞을 가로막고 있는 녀석들은 고작해야 스켈레톤이나 듀라한. 그보다 강력한 데스 나이트를 소환할 수 있을 녀석이건만 그러지 않고 있어. 뭐지? 이 등골을 오싹하게 만드는 위화감은?’
이곳은 본래 만들어져 있던 던전이 아니다. 그런트에서 만난 용병왕 아르샤빈의 말을 빌리자면, 이곳은 아크 리치가 갑자기 나타나 마법으로 만들어낸 던전이었다.
그렇다면 던전에 녀석의 감시가 닿지 않는 곳이 없을 테고, 녀석의 기운이 뻗치지 않는 곳이 없을 것이다.
천휘가 궁금한 건 그다음이다.
자신들은 매우 위협적으로 던전을 돌파하고 있다. 앞을 가로막는 스켈레톤이며 듀라한은 일행의 상대가 되지 못하고 순식간에 무너지고 파괴되었다.
일이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다면 녀석도 반응을 하고 더욱 강력한 언데드 몬스터를 소환했어야 옳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주변에는 스켈레톤들만 득실거렸다.
“모단.”
“왜 그래?”
천휘의 부름에 한쪽에서 시무룩해 있던 모단이 반갑게 화답했다.
“마을에 쳐들어왔던 아크 리치 녀석, 뭔가 이상해 보이지 않았어? 괜히 서두른다든지, 아니면 실제로 어딘가 불안해 보인다든지.”
“흠, 글쎄? 그랬던가?”
천휘의 물음에 잠시 고민하던 모단이 이내 손뼉을 부딪치며 소리쳤다.
“아, 맞다! 생각해보니 아크 리치 녀석, 마법 조준을 잘 하지 못했어.”
“마법… 조준?”
기대했던 것과는 다른 모단의 말에 천휘가 의아해하며 되물었다.
“녀석은 스켈레톤들을 소환하는 것 이외에도 우리 마을 최고의 전사인 듀로탄과 대결을 펼쳤어. 그 와중에 다크 애로우라든가, 다크 썬더 등의 단발성 마법을 계속해서 펼쳤는데…….”
“펼쳤는데?”
“이상하게도 녀석의 마법은 듀로탄에게 적중하지 않았어. 고작해야 5미터 거리를 유지하며 움직였는데도 말이야.”
“확실히 이상하긴 한데?”
모단의 설명에 천휘는 더욱더 머릿속이 복잡해짐을 느꼈다. 결국 여기에서는 아무것도 결론이 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천휘는 바닥에서 일어섰다.
“궁금한 건 직접 부딪쳐야 알 수 있는 법이지. 똥개, 돌아와! 오베른! 지금부터 더욱 빨리 돌파한다! 모단! 이제부터는 너도 도와! 명색이 신관인데 신성 마법 정도는 쓸 수 있을 거 아냐? 우리한테는 신성 마법 쓰지 말고 귀찮은 듀라한들에게만 신성 마법을 써.”
“그럴게.”
자신은 논외로 치더라도 오베른이나 똥개 시벨리우스는 신성력과 정반대인 마기와 사기로 이루어진 강시였다. 행여나 그 둘에게 신성 마법을 펼쳐 타격을 입힐까 염려되어 미리 모단에게 못을 박아둔 것이다.
“오베른!”
[시작한다, 주인! 하압! 드래곤 블라스트!]
오베른의 짧은 기합 소리와 함께 전방을 가로막던 스켈레톤들이 가루가 되어 산산이 무너졌다.
가공할 오베른의 공격!
소드엠페러의 경지를 밟더니 점점 카이젠을 닮아가는 듯했다.
그렇게 다시 한 시간을 달렸다.
이제는 스켈레톤들이 거의 사라지고 오직 듀라한들만이 전방을 가로막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듀라한에 대한 경험이 쌓인 오베른과 천휘는 순식간에 녀석들을 처치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자… 잠깐!”
“응? 왜 그래?”
한창 신나게 듀라한을 베어 넘기던 천휘는 모단의 다급한 외침에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그에 오베른도 덩달아 멈춰 서며 말없이 주변에 모여드는 듀라한들을 베어 넘겼다.
“저기!”
“저기 뭐?”
“저기에서 강철 사슬의 향이 풍겨지고 있어.”
“강철 사슬의 향? 킁킁! 뭐야, 그런 향이 어디서 나는데?”
이해를 할 수 없는 모단의 말에 천휘가 물었다. 그에 모단이 진중한 얼굴로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강철 사슬의 향. 우리 일족 드워프들의 냄새.”
“흠, 그럼 너만 맡을 수 있다는 건가? 좋았어! 오베른! 당장 저쪽으로 향한다!”
[하지만 저기는 벽이다! 벽을 부수자는 건가?]
모단이 가리키는 방향은 분명히 벽이었다. 하지만 천휘로서는 모단을 믿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벽이 가로막고 있다면 부수면 돼! 어때, 할 수 있겠어?”
[주인의 명이라면 설사 불가능하다 해도 가능하게 만들어야지. 내가 해보겠다.]
천휘의 지시에 오베른이 클레이모어를 어깨에 걸쳐 메고 모단이 가리킨 벽 앞으로 다가갔다. 그사이 똥개는 홀로 듀라한을 상대하며 놈들의 접근을 막았다.
[하앗! 드래곤 블라스트!]
콰아앙!
오베른의 클레이모어에서 열화와 같은 돌개바람이 일더니 벽을 강타했다. 하지만 벽은 제법 단단한 듯 움푹 파였을 뿐, 무너지는 정도의 충격을 받진 않은 듯했다.
“오베른, 고작 이 정도냐? 실망인걸? 카이젠이라면 금방 부쉈을 텐데 말이야.”
[으아악! 카이젠! 드래고닉 파워!]
천휘의 도발에 오베른이 최강의 보조 스킬인 드래고닉 파워를 발동시켰다.
이윽고 그의 전신에서 나타나는 드래곤의 형상. 그 기이한 광경에 모단은 놀란 토끼 눈으로 오베른을 바라봤다.
[부수고야 만다! 드래곤 슬레이어!]
최근 그가 소드엠퍼러의 경지에 오르며 얻게 된 새로운 스킬, 드래곤 슬레이어!
본래는 카이젠과의 승부에서 쓰고자 아껴 두던 스킬이지만, 이미 아르샤빈과의 대결에서 한 번 펼쳤던 탓에 또다시 이곳에서 그 최강의 스킬을 전개하려는 작정이었다.
“한점에 집중해! 자칫하다가는 이 던전이 무너진다고!”
순간 그들이 서 있는 곳이 험준한 산세에 마련된 깊숙한 던전 안임을 깨달은 천휘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하지만 이미 오베른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상황.
오베른의 클레이모어가 무형무색의 오러 블레이드를 머금고 무식하게 벽을 두드렸다.
꽈아아아앙!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폭음이 터져 나오며 천장에서 파편이 우수수 떨어졌다.
“후! 다행히 던전 전체가 충격을 입진 않은 모양…….”
두두두두.
“빌어먹을!”
순간적으로 방심했던 것도 잠시, 바닥이 미친년처럼 날뛰기 시작했다.
어찌나 요동을 치는지 제대로 발을 딛고 서 있기조차 힘들 지경이었다.
“오베른! 그러니까 내가 한점에 집중하라고…….”
[벽을 부쉈다, 주인!]
오베른을 향해 불만을 퍼부으려던 천휘는 자욱한 먼지 사이로 보이는 벽 너머의 공간을 바라보며 잠시 입을 닫았다. 그곳에는 그렇게도 찾아 헤매던 강철 사슬 일족 드워프들이 비좁은 공간에 갇혀 있었다.
“아빠!”
“모단!”
때마침 모단도 그들을 발견했는지 재빠르게 벽 너머로 달려갔다. 모단의 외침에 그의 아버지로 보이는, 멋들어진 수염의 드워프가 달려와 그를 덥석 끌어안았다.
“어떻게 된 거냐, 모단! 네가 여긴 어떻게!”
“헝헝! 저 이방인이 도와줬어요. 헝헝!”
모단은 아버지의 품 안에 안겨 그동안 참아왔던 슬픔을 토해냈다. 역시나 아직은 어린 녀석이라 이제까지의 상황이 너무도 힘들었던 모양이었다.
“천휘라고 합니다.”
“고맙네. 강철 사슬 일족을 이끌고 있는 아칸일세.”
놀랍게도 모단의 아버지는 강철 사슬 마을의 촌장인 듯했다. 젊은 나이에 촌장이 된 것으로 봐서 그는 강철 사슬 일족 드워프들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대장장이인 듯했다.
“아크 리치는 어디에 있습니까? 시간이 없습니다. 느끼고 계시겠지만, 이 던전은 곧 무너질 겁니다. 어서 탈출해야 합니다.”
던전은 더욱 심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당장 무너져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을 정도였다.
“아크 리치는 저쪽에 있네.”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어서 자리를 피하십시오. 이 벽 너머로 건너가면 출구로 향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던전에는 엄청난 수의 스켈레톤들이 있네. 우리의 힘으로는 무리야.”
아칸의 말처럼 출구로 향하는 곳에는 스켈레톤들과 듀라한들이 버티고 서 있을 것이다. 천휘와 함께라면 모를까, 그들만으로는 던전을 빠져나가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그들이 뛰어난 전사들이긴 하지만, 무기도 없이 수많은 스켈레톤들을 상대하는 것은 무리였다.
“오베른, 네가 이들을 이끌고 던전을 빠져나가라.”
[주인은 안 나갈 것인가.]
“난 아크 리치를 만나봐야겠어. 여기까지 와서 녀석을 상대하지 않는다는 게 말이 되지 않잖아.”
[그러다 죽는 수가 있다.]
“어차피 난 이방인이야. 죽어도 상관없어. 어서 가! 이들 중 한 명이라도 죽으면 나중에 내 손에 아작 날 줄 알아!”
[…그렇게 하지.]
천휘는 결국 드워프들과 오베른을 함께 보낼 수밖에 없었다. 오베른이라면 충분히 그들을 보호하며 던전을 빠져나갈 수 있을 것이다.
“이 사람을 따라 던전을 빠져나가십시오. 실력이 대단한 검사이니, 여러분이 조금만 도와주신다면 충분히 던전을 빠져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어차피 여기 있어봐야 죽는 것은 매한가지니 말이야. 모두들 들었겠지? 지금 당장 이곳을 빠져나가야 하네! 여자들과 아이들, 그리고 나이 드신 어르신들께서 먼저 빠져나가시고, 장정들은 노약자들을 보호하며 뒤따르세! 모두 서둘러!”
아칸의 지시에 따라 강철 사슬 일족 드워프들이 하나 둘 벽 너머로 건너갔다. 그리고는 마지막으로 모단과 아칸이 남아 천휘를 바라봤다.
“고맙네, 이방인. 이 은혜는 내 목숨으로 갚겠네.”
“그 말씀 잊지 마십시오.”
“그러지. 모단, 어서 가자꾸나!”
“죽지 마, 천휘!”
“너나 죽지 말고 무사히 빠져나가! 난 불사의 육체를 지닌 이방인이야! 난 죽지 않아.”
가슴을 탕탕 치며 아칸과 모단을 안심시킨 천휘는 둘이 빠져나가는 걸 보고는 아크 리치가 있다는 방향으로 빠르게 달려갔다.
‘이런 상황에도 아크 리치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분명히 녀석은 모종의 일로 인해 힘을 잃었거나 쇠약해진 상태일 거야. 그렇지 않고서는 일련의 일들이 말이 안 돼! 약해진 녀석이라면 나 혼자서도 충분히 해볼 만하다!’
무려 레벨 450의 보스 몬스터다. 얼마나 어마어마한 아이템을 드롭할지 상상만 해도 전신이 떨려 왔다. 어쩌면 새로운 레전드 아이템을 드롭할지도 몰랐다.
이런 기회를 놓친다면… 평생 후회할 것이다.
“어디냐, 놈!”
천휘는 보법까지 전개하며 앞으로 쭉쭉 뻗어나갔다.
점점 더 가까워지는 진득한 마기.
천휘는 전신을 떨리게 만드는 지독한 마기에 더욱 빠르게 발을 움직였다.
콰앙! 콰앙!
“갑자기 웬 충격이?”
전방에서 갑자기 땅을 울리는 진동이 전해졌다. 진동과 함께 귀를 먹먹하게 만드는 엄청난 폭발음.
천휘는 눈을 찌푸리며 그 폭발음의 정체를 확인했다.
“저 자식이 미쳤나!”
폭발음의 정체는 아크 리치의 마법이었다. 천휘의 말처럼 미친 것인지, 비좁은 공간에서 사방으로 마법을 난사하고 있었다.
[크아아아!]
도저히 접근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아크 리치는 갑자기 마법을 난사하다 말고 괴성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더욱 강력한 마법을 사방으로 쏘아대며 괴로워했다.
“빌어먹을! 이래서야 접근할 수가 없잖아!”
남다른 마법 방어력을 가진 천휘지만, 이 정도로 강력한 마법이 사방으로 뿌려지는 데에야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다.
찌릿.
“어라? 이게 또 왜 반응을…….”
멀찌감치 떨어져서 미친 아크 리치의 마법 난사를 지켜보던 천휘는 갑자기 가슴과 다리가 저려 오는 것을 느꼈다. 조금 전 마룡 오그하트의 다리 보호구를 찾을 때의 느낌과 똑같았다.
“그렇다면 이곳 어딘가에 마룡 오그하트의 또 다른 방어구가!”
더 이상 아크 리치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마룡 오그하트의 마지막 방어구만 찾는다면, 꿈의 레전드 방어구 세트가 완성된다.
“어디 있지? 어디 있는 거야?”
하지만 아무리 찾아봐도 마룡 오그하트의 마지막 방어구는 찾을 수가 없었다.
아크 리치가 마법 난사를 하고 있는 공간은 사방이 탁 막힌 던전의 끝. 마룡 오그하트의 마지막 방어구가 있을 만한 곳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결국 천휘가 눈을 돌린 곳은 다름 아닌 아크 리치였다.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 마룡 오그하트의 방어구가 반응을 한다면, 당연히 아크 리치가 그 마지막 열쇠를 쥐고 있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역시 저 녀석이었어.”
천휘는 아크 리치를 살피다, 조금은 어색하게 머리에 쓰인 투구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이제는 눈에 익숙한 마룡 오그하트의 조각.
아크 리치는 마룡 오그하트의 투구를 머리에 쓰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저 녀석… 그러고 보니 간간이 머리를 감싸고 있잖아? 설마 저 녀석이 미친 이유가?”
천휘는 다급하게 마룡 오그하트의 가슴에 대한 정보를 읽었다. 그리고는 이내 아크 리치가 미쳐 버린 이유를 알아냈다.
“마신의 힘… 때문인가?”
본래 리치라는 존재는 흑마법사가 마족과의 계약을 함으로써 만들어진다. 흑마법사가 죽기 전, 리치화 마법을 자신의 몸에 걸어놓으면 생명은 육신에서 떠나지만, 정신은 뼈만 남은 육신에 붙어 리치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마족을 받아들일 수 있다고 해서 마신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마신을 받아들일 수 있는 존재는 드래곤이 유일무이했고, 역사상 단 한 번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었다. 그가 바로 마룡이라 불린 오그하트였다.
“강대한 마신의 힘을 받아들이려다 실패하고 미쳐 버린 것이군.”
천휘 자신은 퀘스트를 통해 마신의 권능을 부여받았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이 NPC가 아닌 이방인이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제아무리 상급 마수보다 강한 아크 리치라고 해도 마신의 힘이 고스란히 담긴 마룡 오그하트의 보물을 착용하고도 무사할 리가 없었다.
“남은 건 저 녀석을 어떻게 처치하느냐 하는 건데…….”
미친 아크 리치를 처치하는 것은 정상일 때의 녀석을 상대하는 것보다 더욱 힘든 일이었다.
8서클의 흑마법을 익힌 아크 리치답게 녀석의 마나는 무한이라고 봐도 무방한 수준이었다. 그런 녀석이 낮은 서클의 흑마법을 난사한다고 해서 마나가 떨어질 리가 없었다.
“별수 없나, 몸으로 좀 받아내는 수밖에는?”
아무리 빨리 움직여도 조금의 빈틈도 없이 사방으로 난사되는 흑마법을 피해 아크 리치를 공격할 순 없었다. 그렇다면 최대한 회피하면서 어쩔 수 없는 건 몸으로 때우는 방법밖에 없었다.
“림다일!”
콰앙!
천휘는 이동속도를 높여 주는 림다일을 전개하고는 땅을 박차며 아크 리치에게로 다가갔다.
피슝. 피슝.
퍼엉!
“크윽! 이 정도쯤이야!”
연달아 2개의 검은 화염구를 피해냈지만, 복부로 날아오는 어둠의 화살은 피해내지 못했다.
머리를 울리는 강렬한 충격!
그럼에도 천휘는 물러서지 않고 앞으로 나아갔다.
“조금만 더!”
림다일 덕택인지, 아니면 회피율을 올려 주는 마룡 오그하트의 다리 보호구 덕분인지 천휘는 눈앞을 가로막는 수많은 마법 세례 속에서도 목숨을 보전하며 아크 리치에게로 다가갔다.
“이제 끝… 허억! 가엘론!”
파멸의 안식을 적중시킬 수 있는 사정거리 안에 아크 리치가 들어오자, 천휘는 곧바로 공격을 퍼부을 작정이었다. 하지만 가슴을 향해 날아오는 이글거리는 화염구에 놀라 황급히 최강의 방어 스킬인 가엘론을 전개했다.
꽈아아앙!
“컥컥! 빌어먹을! 갑자기 헬파이어냐? 쿨럭쿨럭!”
위기에 대한 본능인지, 녀석은 천휘가 공격을 가하려 하자 곧장 8서클 대인 마법 중 최강이라는 헬파이어 마법을 전개했다. 만약 천휘가 조금이라도 반응이 늦었다면, 꼼짝없이 화염에 휩싸여 통구이가 되었을 정도로 강력한 마법이었다.
‘내가 화염 저항력이 조금만 낮았어도, 세트 효과로 생명력이 10만이 늘지 않았어도 난 방금 일격에 죽었다.’
생각만 해도 오싹한 기분이었다.
미친 아크 리치의 헬파이어에 맞아 통구이가 되다니!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등골이 서늘한 기분이었다.
‘단순히 다가가는 것만으로는 상대가 불가능해. 마신의 힘 때문에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건 사실이지만, 본능적으로 나를 막아서고 있어.’
아크 리치는 여전히 미친년 널뛰듯 사방으로 마법을 난사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천휘가 서 있는 방향으로 좀 더 많은 양의 마법이 날아오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젠장! 이젠 더 이상 소환할 강시가… 있다!”
마지막의 순간에 자신을 대신해 헬파이어를 맞아줄 강시가 필요했다. 공격을 도와줄 필요도 없었다. 파멸의 안식이라면 녀석을 확실하게 보내줄 수 있었다.
“좋았어! 다시 간다! 림다일!”
무슨 생각인지 강시를 꺼내지도 않고 천휘는 다시 한 번 아크 리치를 향해 쇄도했다. 중간 중간 마법을 몸으로 받아내고 회피하며 재차 조금 전과 같은 거리까지 도달했다.
화르륵!
“아공간 오픈! 파뱃 소환!”
끼에에… 끼에에엑!
천휘의 부름에 응하던 파뱃은 소환되자마자 코앞까지 다가온 헬파이어에 본능적으로 파이어 브레스를 내뿜었다.
하지만 녀석의 파이어 브레스로는 8서클 최강의 대인 마법인 헬파이어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고작해야 아주 약간의 시간을 번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할 따름이었다.
“하앗! 파멸의 안식!”
헬파이어에 통구이가 되어버린 파뱃을 뒤로하고 천휘가 재빨리 옆으로 몸을 회피하며 아크 리치에게 강력한 일격을 적중시켰다.
[크아아아!]
천휘의 주먹으로 인한 것인지, 아니면 마신의 기운으로 인한 것인지 아크 리치는 끔찍한 비명을 내질렀다. 보통 언데드는 고통을 느낄 수 없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아무래도 마신의 기운으로 인한 정신적인 타격 때문인 듯했다.
“이 몸이 바로 마신의 대리자이자, 파멸의 권능을 지니신 천휘 님이시다! 하앗! 파멸의 축제!”
파뱃을 엄폐물 삼아 천휘의 강맹한 공격이 계속되었다. 공격이 조금씩 먹혀 들어가는지 아크 리치의 마법 전개속도가 천천히 늦춰지고 있었다.
“내놔! 내 투구!”
마법 전개속도가 늦어져 운신의 폭이 넓어지자, 천휘는 오로지 머리만을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그렇게 해서라도 마룡 오그하트의 투구를 녀석에게서 떨어트리려는 속셈이었다.
퍼엉! 퍼엉!
[크아아아!]
천휘의 주먹이 적중할 때마다 아크 리치는 계속해서 비명을 내질렀다. 하지만 좀처럼 투구는 녀석의 머리에서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오냐! 끝까지 한번 해보자! 파멸의 휘장!”
천휘는 기어코 마지막 패를 꺼내들었다.
순간적으로 1.5배 향상된 스탯!
거기에 2배에 달하는 스킬 데미지!
천휘는 연달아 파멸의 권능을 뿜어내며 녀석의 머리를 두드렸다.
“제발 좀 뒤져라! 파멸의 안식!”
더 이상 아크 리치는 마법을 전개하지 못했다. 게다가 눈에 띄게 신형이 휘청거리기까지 했다.
천휘는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자신의 최강 스킬을 전개해 녀석의 머리를 가격했다.
[끄아아아아아!]
솨아앗!
천휘의 주먹이 진정으로 녀석에게 안식을 가져다준 듯 녀석은 마지막 비명을 내지르며 연기로 산화했다.
뚝.
“허억! 허억!”
그와 동시에 천휘의 눈앞에 마룡 오그하트의 투구가 떨어졌다. 그것을 재빨리 낚아챈 천휘는 곧바로 뒤를 향해 달려 나갔다.
콰앙! 콰앙! 콰앙!
던전의 주인인 아크 리치의 죽음과 함께 던전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천장이 내려앉고 땅바닥은 거미줄처럼 갈라졌다.
“빌어먹을! 살기는 글렀네.”
이미 밖으로 나갈 수 있는 통로는 무너졌다. 이제 남은 것이라고는 천장이 무너지며 압사당하는 일만 남았다.
“그래도 이걸 얻었으니…….”
천휘는 행여나 떨어트릴까 봐 재빨리 마룡 오그하트의 투구를 착용했다.
[마룡 오그하트의 머리]
고대 하스렌 제국을 멸망으로 몰아간 원인 중 하나는 마룡 오그하트의 출현이었다.
본래 오그하트는 블랙 드래곤이었으나, 드래곤의 율법을 어기고 마신의 힘을 부여받아 세상을 멸망으로 몰아가는 마룡이 되었다.
그는 인간 영웅들의 손에 의해 처단당하며 대륙의 세 가지 신물을 남기고 죽었고, 그 신물들에는 마룡 오그하트의 강대한 힘이 담겨져 있다.
등급:레전드 내구력:35,000/35,000
분류:투구
제한:악명 300만 이상
옵션:물리 방어력 +200
옵션:마법 방어력 +200
옵션:마법 회피율 30% 증가
옵션:더위와 추위에 대해 면역
옵션:NPC 상대 시 10% 확률로 공포 효과 발생
옵션:세트 효과(1) 생명력 +100,000
옵션:세트 효과(2) 모든 스탯 +50
[띠링! 마룡 오그하트의 갑옷 세트 효과가 적용되었습니다. 모든 스탯이 50 상승합니다.]
만족스러운 알림음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만족감도 잠시, 천휘는 이내 무너지는 천장과 함께 생명의 불꽃이 산화되고 말았다.
클리든 산맥에서 시작된 지진은 바렌트 왕국에 사는 모든 NPC들과 유저들에게까지 느껴질 정도로 강도가 셌다. 산맥의 깊숙한 곳에서 거주하는 이종족 마을 몇 군데는 지진으로 인한 산사태에 의해 마을이 폐허가 됐을 정도였다.
길지 않은 지진이었지만, 바렌트 왕국에서는 지진의 진원지를 알고자 클리든 산맥으로 병사를 파견했다.
그러나 첫 번째 파견에서 돌아온 병사는 없었다.
그 후 계속되는 파견.
하지만 병사들은 계속해서 돌아오지 못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일은 바렌트 왕국에서만 발생한 것이 아니었다.
아르니안 대륙은 물론이고, 심지어 천 제국에서마저 곳곳에 강력한 지진이 발생했다. 그와 동시에 이제껏 보지 못했던 강력한 몬스터들이 대륙을 잠식하기 시작했다.
변혁의 시작!
『오벨리스크』는 변화하고 있었다.